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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긍휼하심

마가복음 6: 30 ~ 34

김지철 목사

2009.07.19

독재자들은 잔인하고 긍휼이 없습니다.

20세기의 독재자로 히틀러와 스탈린이 있습니다. 그들은 20세기를 피와 어둠으로 물들인 사람들이었습니다. 히틀러는 국가사회주의와 민족주의를 내세워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습니다. 이 전쟁으로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죽고 많은 사람들이 전쟁의 상처로 괴로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구 소련의 스탈린은 공산주의로 시민들을 억압했고 가차 없이 숙청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잔인함과 변덕스러움입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긍휼함이 없었습니다. 역사는 스탈린에 대한 평가를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숭배했고 동시에 자신을 혐오했다. 자신에 대한 숭배가 표상화되어 그는 자아도취적인 개인숭배에 빠졌다. 동시에 그는 자신에 대한 혐오로 인해 공포정치를 실시했고 자기에 대한 증오를 표출했다.”
“그는 자신이 누구보다도 위대하다는 사실을 스스로를 포함하여 한사람이라도 수궁하지 못하면 굉장히 비참하게 생각했다. 이 비참한 기분 때문에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수를 했고 특히 어떤 점에서든 그보다 높은 위치에 있거나 잘난 사람들에게는 더욱 더 악착같이 복수 했다. 그는 속이 좁고 독살스러운 사람이다. 아니, 사람이 아니라 악마다.”

히틀러는 「나의 투쟁」이라는 저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계의 좋은 인종에 속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은 찌꺼기다.”
“대중이란 본능을 따르는 동물과 같다. 합리적인 추론으로 결론에 이르지 않는다.”
“군중집회에서 생각한다는 것은 설 자리를 잃는다. 대중의 감수성은 아주 한정되어 있고 그들의 이해력은 박약하다.”
역사가들은 두 독재자들이 공통적으로 불안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들은 다른 사람을 의심합니다. 그리고 그 의심이 증폭해서 사람을 억압하고 학대합니다. 우리가 그들에게서 도저히 긍휼을 찾아볼 수 없는 이유는 그 때문입니다.

긍휼은 명예와 권력의 자리에서 매우 중요한 덕입니다.

명예와 권력이 있는 사람에게 ‘긍휼’은 가장 중요한 덕입니다. 다니엘이 바벨론 제국의 강력한 통치자였던 느부갓네살 왕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왕이여, 내가 아뢰는 것을 받으시고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사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사하소서. 그리하시면 왕의 평안함이 혹시 장구하리이다 하니라.” (다니엘 4:27)
하나님께서 교만하고 잔인한 왕 느부갓네살을 벌하실 텐데, 자기의 권세와 영광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인 줄 깨달아 지금이라도 공의를 행하고, 가난한 백성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그 죄를 속하기를 조언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은 잔인함 위에 세워진 나라는 지속할 수 없음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긍휼이 없는 권력은 위험하고, 잔인한 힘은 이미 파멸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권리와 힘으로 더 많은 것을 추구하고 타인을 흠집 내 깎아내리는 탐욕스럽고 잔인한 본성이 있습니다. 이 본성이 하나님의 성령으로 변화되지 못하고 오히려 더욱 광폭해진 상태로 권력을 갖게 된다면 얼마나 위험할지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긍휼 없는 잔인성은 우리의 일상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파괴적인 힘은 단순히 큰 권력에서만 발휘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일상에서도, 평범한 직장생활이나 가정에서조차 엿볼 수 있습니다. 한 가정의 안과 밖에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생활하는 한 남성, 혹은 여성의 일화들은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밖에서는 다정하고 배려심 넘치며 책임을 다하는 유능한 직장인인데, 가정에서는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과 아내의 이야기는 이제 우리에게 그리 생소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 평범한 잔인함은 우리에게 얼마나 긍휼함이 부족한지를 여실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긍휼은 함께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긍휼이란 무엇일까요?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긍휼이란 영어 단어 compassion은 ‘함께(com)’라는 의미와 ‘고난(passion)’이라는 의미가 합쳐져서 된 말입니다. 고난에 함께 참여한다는 뜻입니다. 자기 아닌 타인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는 능력입니다. 마음에 긍휼을 품으면 사람들 사이의 거리를 점점 가까이 할 수 있는 하나님 나라를 빚어내는 능력을 갖게 됩니다. 고통스럽고 아파도, 싫고 힘들어도 고난의 현장을 경험하는 다른 누군가에게 자기를 붙들어 기꺼이 고통과 아픔, 싫음과 힘듦을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다른 누군가의 상처를 보며 나의 비슷한 상처를 되살리는 가혹한 현장에 스스로를 노출하는 위험하고 과감한 도전입니다.
긍휼과 비난은 비슷해 보일 수 있습니다. 비난도 긍휼처럼 타인을 걱정하는 가면을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긍휼의 현장은 비난의 현장과 아주 다릅니다. 긍휼의 현장은 상처를 덮고 싸매며 자기의 안전한 위치를 버리고 함께 하는 현장인 반면, 비난의 현장은 상처를 들추고 파헤치며 고통을 가중하는 일만 되풀이합니다. 자기의 가진 것과 안전함을 내려놓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비난은 결국 자기와 다른 형제들을 함께 괴롭게 하고 파괴하며 하나님 나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그러나 긍휼은 나의 모든 것을 던져서라도 형제를 살리려 노력하는 현장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마음을 발견합니다. 자기의 가진 것, 권리, 힘, 능력과 소유를 사용하여 형제와 이웃을 살리고 자기 스스로도 하나님 나라를 참으로 경험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긍휼을 가르쳐주십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긍휼하심을 발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시며 선포하시고 제자들을 세상 속에 파송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하나님 나라의 증거들을 가지고 제자들은 세상에 나가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습니다. 제자들이 다시 돌아왔을 때, 그들은 예수님께 이런 저런 삶의 현장을 이야기해 드렸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시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쉬게 하셨습니다. 본문의 31절은 그 상황을 묘사해 줍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마가복음 6:31)

예수님은 쉬려고 배를 타고 한적한 곳으로 가셨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먼저 건너와 다시 몰려들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 문제와 어려움을 가지고 찾아왔습니다. 상처와 질병 때문에 고통 받는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곤고함의 아수라장은 예수님이 누리려던 쉼과 휴식을 잠시도 가만 두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이를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휴식보다는 불쌍한 군중이 중요했습니다. 자기를 찾아 몰려든 사람들을 보시니, 마치 ‘목자 없는 양들’과 같았다고 성경이 기록합니다. 목자 없는 양은 굶주립니다. 목자 없는 양은 갈 길을 못 찾아 방황합니다. 목자 없는 양은 어디로 가야 먹을 것이 있고 안전한지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이런 당황스러움을 함께 느끼시면서 가슴 아파하셨습니다. 목자 없는 양떼를 향한 긍휼의 마음이 불일 듯 일어나셨습니다.
‘목자 없는 양’이라는 표현은 사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가 자기의 후계자인 여호수아를 백성의 지도자로 세우면서 하나님께 드리는 탄원의 기도문 속에 나오는 말입니다.
“여호와,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이시여 원하건대 한 사람을 이 회중 위에 세워서 그로 그들 앞에 출입하며 그들을 인도하여 출입하게 하사 여호와의 회중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민수기 27:16)
하나님은 민족의 지도자로 여호수아를 세웁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이끄시는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처럼 이리저리 방황하지 않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모세가 새로운 지도자를 세우는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인도와 도우심을 구하며 기도하는 장면에서 ‘목자 없는 양’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를 보면서 당시 종교 지도자였던 율법학자들,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제사장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뜻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지 않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말씀하지 않아서 사람들이 진리와 생명에 굶주려서 고통 받는 것을 너무 안타깝게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안타까운 현장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마음을 온통 쏟아 부으셨습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진정으로 긍휼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마음으로 빈 들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먹이는 표적으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의 풍성함과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긍휼의 마음은 함께 세워갈 수 있습니다.

긍휼이 아닌 비난의 문제점은 무엇일까요? 비난은 상대방을 걱정하는 듯하지만, 결국 늘 상대방보다 자신이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리고 결국 자기는 심판관이 됩니다. 긍휼 없는 비난은 자기와 형제를 가르고, 자기는 옳음에, 형제와 이웃은 그름에 세웁니다. 그리고 그 편 가름의 현장은 모두 상처와 파괴로 끝나고 맙니다.
긍휼은 겸손합니다. 자기의 피곤함을 잊고 사람들의 고난의 현장에 서신 예수님처럼 긍휼은 기꺼이 자기의 허리를 숙여 눈높이를 맞추는 일입니다. 긍휼은 아무렇지 않게 지나칠 수 있는 괴로움의 현장에서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부축해 일으키는 일입니다. 상대를 존중하며 그의 삶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참여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마가복음 6:34)
긍휼이란 상대방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보고 함께 그 자리에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연약한 자리에 함께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면 변화하도록 부축해야 합니다. 새로운 기회를 갖도록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긍휼이 동정과 다른 점은 변화를 향한 격려와 부축에 있습니다. 긍휼이란 그 자리에 함께 들어가서 새롭게 변화시켜주고 새로운 기회의 자리로 이끌어 나가는 것입니다. 긍휼이란 상대방을 억누르지 않고 부축하며 일어서도록 돕는 일입니다. 긍휼이란 상대방에게 받기를 바라지 않고 주는 것입니다. 긍휼이란 하나님의 꿈과 비전을 존중하면서 함께 미래를 새롭게 엮어가는 것입니다.

긍휼은 인격적인 ‘가르침’을 줍니다.

본문은 긍휼에 관한 특별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긍휼함 때문에 특별히 하신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불쌍히 여기셔서’,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셨다.’ 예수님께서 병도 고치신 적도 있었고, 다른 말씀도 하셨지만, 특히 오늘 본문은 불쌍히 여기셔서 ‘가르치셨다’고 기록합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독재자들은 결코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들은 백성을 조롱하고 억압합니다. 사람들이 절대 깨닫지 못하게 막아섭니다. 알고 나서는 사람들을 숙청하고 몽매함 속으로 묻으려 합니다. 자기의 정당치 못함을 가리려하고 정직하지 못한 삶을 위장하려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그렇지 않고 천국복음에 대해서 열어두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주시고, 하나님 나라의 풍성함을 사모할 수 있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압제하고 수탈하며 괴롭히는 종교지도자들이 하나님을 권위와 두려움으로 포장하여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하는 일에 맞서서 하나님의 마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알려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보여 주셨습니다. 공중의 새보다 들의 풀보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 빈 들에서도 모인 사람들을 어떻게 먹이시는지 보여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알라. 그리고 나를 알라.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스러운 분이신지, 하나님이 우리를 죄를 용서하시는 분인지를 알라. 이제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새로운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왔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의 딸이 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새로운 존재가 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자아의식을 부어주셨습니다. 약속된 믿음 가운데서 새로운 꿈을 꾸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삶의 자리를 향해서 잔치를 베풀며 백성들을 초청하시고 그들과 함께 만나신 것을 우리는 말씀을 읽을 때마다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신앙인들만큼 말씀 배우기에 열정적인 사람들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함께 나눕니다. 자녀들을 말씀 위에 바로 세우려고 노력하는 것은 축복 중에 축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의 세계, 물질의 세계보다 영적으로 깨우침을 받는 배움의 세계가 더 소중한 것을 아시고 불쌍히 여기시며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새로운 역사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사람이 변하면 가정이 변합니다. 예수님의 긍휼, 예수님의 사랑의 말씀으로 새로운 삶의 길이 열릴 것입니다.

긍휼함으로 생명과 회복의 역사를 북돋우는 사람이 됩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긍휼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그 마음으로 세상을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비난하는 것은 가르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사랑하고 긍휼을 베풀며 함께 나누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마음을 다해 배워가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누리며 사랑과 긍휼을 베풀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런 우리들이 선 자리마다 생명의 역사, 치유의 역사, 회복의 역사가 북돋아지기를 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시는 은혜에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비판하시면 우리가 어찌 설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 긍휼히 여기시고 사랑하셔서 우리의 풍요로움이 지속됨을 깨닫습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이제 주님이 베푸신 사랑과 긍휼로 내 형제와 이웃들 세우고, 우리의 온 마음을 쏟아내며 생명과 회복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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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6: 30 ~ 34

30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34

독재자들은 잔인하고 긍휼이 없습니다.

20세기의 독재자로 히틀러와 스탈린이 있습니다. 그들은 20세기를 피와 어둠으로 물들인 사람들이었습니다. 히틀러는 국가사회주의와 민족주의를 내세워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습니다. 이 전쟁으로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죽고 많은 사람들이 전쟁의 상처로 괴로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구 소련의 스탈린은 공산주의로 시민들을 억압했고 가차 없이 숙청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잔인함과 변덕스러움입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긍휼함이 없었습니다. 역사는 스탈린에 대한 평가를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숭배했고 동시에 자신을 혐오했다. 자신에 대한 숭배가 표상화되어 그는 자아도취적인 개인숭배에 빠졌다. 동시에 그는 자신에 대한 혐오로 인해 공포정치를 실시했고 자기에 대한 증오를 표출했다.”
“그는 자신이 누구보다도 위대하다는 사실을 스스로를 포함하여 한사람이라도 수궁하지 못하면 굉장히 비참하게 생각했다. 이 비참한 기분 때문에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수를 했고 특히 어떤 점에서든 그보다 높은 위치에 있거나 잘난 사람들에게는 더욱 더 악착같이 복수 했다. 그는 속이 좁고 독살스러운 사람이다. 아니, 사람이 아니라 악마다.”

히틀러는 「나의 투쟁」이라는 저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계의 좋은 인종에 속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은 찌꺼기다.”
“대중이란 본능을 따르는 동물과 같다. 합리적인 추론으로 결론에 이르지 않는다.”
“군중집회에서 생각한다는 것은 설 자리를 잃는다. 대중의 감수성은 아주 한정되어 있고 그들의 이해력은 박약하다.”
역사가들은 두 독재자들이 공통적으로 불안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들은 다른 사람을 의심합니다. 그리고 그 의심이 증폭해서 사람을 억압하고 학대합니다. 우리가 그들에게서 도저히 긍휼을 찾아볼 수 없는 이유는 그 때문입니다.

긍휼은 명예와 권력의 자리에서 매우 중요한 덕입니다.

명예와 권력이 있는 사람에게 ‘긍휼’은 가장 중요한 덕입니다. 다니엘이 바벨론 제국의 강력한 통치자였던 느부갓네살 왕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왕이여, 내가 아뢰는 것을 받으시고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사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사하소서. 그리하시면 왕의 평안함이 혹시 장구하리이다 하니라.” (다니엘 4:27)
하나님께서 교만하고 잔인한 왕 느부갓네살을 벌하실 텐데, 자기의 권세와 영광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인 줄 깨달아 지금이라도 공의를 행하고, 가난한 백성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그 죄를 속하기를 조언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은 잔인함 위에 세워진 나라는 지속할 수 없음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긍휼이 없는 권력은 위험하고, 잔인한 힘은 이미 파멸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권리와 힘으로 더 많은 것을 추구하고 타인을 흠집 내 깎아내리는 탐욕스럽고 잔인한 본성이 있습니다. 이 본성이 하나님의 성령으로 변화되지 못하고 오히려 더욱 광폭해진 상태로 권력을 갖게 된다면 얼마나 위험할지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긍휼 없는 잔인성은 우리의 일상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파괴적인 힘은 단순히 큰 권력에서만 발휘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일상에서도, 평범한 직장생활이나 가정에서조차 엿볼 수 있습니다. 한 가정의 안과 밖에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생활하는 한 남성, 혹은 여성의 일화들은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밖에서는 다정하고 배려심 넘치며 책임을 다하는 유능한 직장인인데, 가정에서는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과 아내의 이야기는 이제 우리에게 그리 생소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 평범한 잔인함은 우리에게 얼마나 긍휼함이 부족한지를 여실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긍휼은 함께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긍휼이란 무엇일까요?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긍휼이란 영어 단어 compassion은 ‘함께(com)’라는 의미와 ‘고난(passion)’이라는 의미가 합쳐져서 된 말입니다. 고난에 함께 참여한다는 뜻입니다. 자기 아닌 타인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는 능력입니다. 마음에 긍휼을 품으면 사람들 사이의 거리를 점점 가까이 할 수 있는 하나님 나라를 빚어내는 능력을 갖게 됩니다. 고통스럽고 아파도, 싫고 힘들어도 고난의 현장을 경험하는 다른 누군가에게 자기를 붙들어 기꺼이 고통과 아픔, 싫음과 힘듦을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다른 누군가의 상처를 보며 나의 비슷한 상처를 되살리는 가혹한 현장에 스스로를 노출하는 위험하고 과감한 도전입니다.
긍휼과 비난은 비슷해 보일 수 있습니다. 비난도 긍휼처럼 타인을 걱정하는 가면을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긍휼의 현장은 비난의 현장과 아주 다릅니다. 긍휼의 현장은 상처를 덮고 싸매며 자기의 안전한 위치를 버리고 함께 하는 현장인 반면, 비난의 현장은 상처를 들추고 파헤치며 고통을 가중하는 일만 되풀이합니다. 자기의 가진 것과 안전함을 내려놓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비난은 결국 자기와 다른 형제들을 함께 괴롭게 하고 파괴하며 하나님 나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그러나 긍휼은 나의 모든 것을 던져서라도 형제를 살리려 노력하는 현장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마음을 발견합니다. 자기의 가진 것, 권리, 힘, 능력과 소유를 사용하여 형제와 이웃을 살리고 자기 스스로도 하나님 나라를 참으로 경험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긍휼을 가르쳐주십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긍휼하심을 발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시며 선포하시고 제자들을 세상 속에 파송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하나님 나라의 증거들을 가지고 제자들은 세상에 나가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습니다. 제자들이 다시 돌아왔을 때, 그들은 예수님께 이런 저런 삶의 현장을 이야기해 드렸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시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쉬게 하셨습니다. 본문의 31절은 그 상황을 묘사해 줍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마가복음 6:31)

예수님은 쉬려고 배를 타고 한적한 곳으로 가셨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먼저 건너와 다시 몰려들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 문제와 어려움을 가지고 찾아왔습니다. 상처와 질병 때문에 고통 받는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곤고함의 아수라장은 예수님이 누리려던 쉼과 휴식을 잠시도 가만 두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이를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휴식보다는 불쌍한 군중이 중요했습니다. 자기를 찾아 몰려든 사람들을 보시니, 마치 ‘목자 없는 양들’과 같았다고 성경이 기록합니다. 목자 없는 양은 굶주립니다. 목자 없는 양은 갈 길을 못 찾아 방황합니다. 목자 없는 양은 어디로 가야 먹을 것이 있고 안전한지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이런 당황스러움을 함께 느끼시면서 가슴 아파하셨습니다. 목자 없는 양떼를 향한 긍휼의 마음이 불일 듯 일어나셨습니다.
‘목자 없는 양’이라는 표현은 사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가 자기의 후계자인 여호수아를 백성의 지도자로 세우면서 하나님께 드리는 탄원의 기도문 속에 나오는 말입니다.
“여호와,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이시여 원하건대 한 사람을 이 회중 위에 세워서 그로 그들 앞에 출입하며 그들을 인도하여 출입하게 하사 여호와의 회중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민수기 27:16)
하나님은 민족의 지도자로 여호수아를 세웁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이끄시는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처럼 이리저리 방황하지 않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모세가 새로운 지도자를 세우는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인도와 도우심을 구하며 기도하는 장면에서 ‘목자 없는 양’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를 보면서 당시 종교 지도자였던 율법학자들,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제사장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뜻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지 않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말씀하지 않아서 사람들이 진리와 생명에 굶주려서 고통 받는 것을 너무 안타깝게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안타까운 현장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마음을 온통 쏟아 부으셨습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진정으로 긍휼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마음으로 빈 들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먹이는 표적으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의 풍성함과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긍휼의 마음은 함께 세워갈 수 있습니다.

긍휼이 아닌 비난의 문제점은 무엇일까요? 비난은 상대방을 걱정하는 듯하지만, 결국 늘 상대방보다 자신이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리고 결국 자기는 심판관이 됩니다. 긍휼 없는 비난은 자기와 형제를 가르고, 자기는 옳음에, 형제와 이웃은 그름에 세웁니다. 그리고 그 편 가름의 현장은 모두 상처와 파괴로 끝나고 맙니다.
긍휼은 겸손합니다. 자기의 피곤함을 잊고 사람들의 고난의 현장에 서신 예수님처럼 긍휼은 기꺼이 자기의 허리를 숙여 눈높이를 맞추는 일입니다. 긍휼은 아무렇지 않게 지나칠 수 있는 괴로움의 현장에서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부축해 일으키는 일입니다. 상대를 존중하며 그의 삶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참여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마가복음 6:34)
긍휼이란 상대방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보고 함께 그 자리에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연약한 자리에 함께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면 변화하도록 부축해야 합니다. 새로운 기회를 갖도록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긍휼이 동정과 다른 점은 변화를 향한 격려와 부축에 있습니다. 긍휼이란 그 자리에 함께 들어가서 새롭게 변화시켜주고 새로운 기회의 자리로 이끌어 나가는 것입니다. 긍휼이란 상대방을 억누르지 않고 부축하며 일어서도록 돕는 일입니다. 긍휼이란 상대방에게 받기를 바라지 않고 주는 것입니다. 긍휼이란 하나님의 꿈과 비전을 존중하면서 함께 미래를 새롭게 엮어가는 것입니다.

긍휼은 인격적인 ‘가르침’을 줍니다.

본문은 긍휼에 관한 특별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긍휼함 때문에 특별히 하신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불쌍히 여기셔서’,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셨다.’ 예수님께서 병도 고치신 적도 있었고, 다른 말씀도 하셨지만, 특히 오늘 본문은 불쌍히 여기셔서 ‘가르치셨다’고 기록합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독재자들은 결코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들은 백성을 조롱하고 억압합니다. 사람들이 절대 깨닫지 못하게 막아섭니다. 알고 나서는 사람들을 숙청하고 몽매함 속으로 묻으려 합니다. 자기의 정당치 못함을 가리려하고 정직하지 못한 삶을 위장하려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그렇지 않고 천국복음에 대해서 열어두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주시고, 하나님 나라의 풍성함을 사모할 수 있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압제하고 수탈하며 괴롭히는 종교지도자들이 하나님을 권위와 두려움으로 포장하여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하는 일에 맞서서 하나님의 마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알려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보여 주셨습니다. 공중의 새보다 들의 풀보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 빈 들에서도 모인 사람들을 어떻게 먹이시는지 보여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알라. 그리고 나를 알라.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스러운 분이신지, 하나님이 우리를 죄를 용서하시는 분인지를 알라. 이제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새로운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왔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의 딸이 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새로운 존재가 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자아의식을 부어주셨습니다. 약속된 믿음 가운데서 새로운 꿈을 꾸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삶의 자리를 향해서 잔치를 베풀며 백성들을 초청하시고 그들과 함께 만나신 것을 우리는 말씀을 읽을 때마다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신앙인들만큼 말씀 배우기에 열정적인 사람들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함께 나눕니다. 자녀들을 말씀 위에 바로 세우려고 노력하는 것은 축복 중에 축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의 세계, 물질의 세계보다 영적으로 깨우침을 받는 배움의 세계가 더 소중한 것을 아시고 불쌍히 여기시며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새로운 역사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사람이 변하면 가정이 변합니다. 예수님의 긍휼, 예수님의 사랑의 말씀으로 새로운 삶의 길이 열릴 것입니다.

긍휼함으로 생명과 회복의 역사를 북돋우는 사람이 됩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긍휼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그 마음으로 세상을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비난하는 것은 가르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사랑하고 긍휼을 베풀며 함께 나누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마음을 다해 배워가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누리며 사랑과 긍휼을 베풀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런 우리들이 선 자리마다 생명의 역사, 치유의 역사, 회복의 역사가 북돋아지기를 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시는 은혜에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비판하시면 우리가 어찌 설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 긍휼히 여기시고 사랑하셔서 우리의 풍요로움이 지속됨을 깨닫습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이제 주님이 베푸신 사랑과 긍휼로 내 형제와 이웃들 세우고, 우리의 온 마음을 쏟아내며 생명과 회복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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