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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육에 변화가 시작되어야 할 때입니다.
어제 우리 교회에서 한국 교회의 여러 교육 담당 지도자들을 초정해 ‘교육 컨퍼런스’를 개최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우리 성도님들을 위해 교회 앞마당에 ‘교회학교 박람회’를 개최 중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교회에서 어떻게 보고 배우며 양육 받고 있는지, 어떻게 말씀을 듣고 실천하고 있는지를 직접 보면서 함께 경험하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며칠 전 조선일보 인터뷰에 이스라엘의 영재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아리엘이라는 사람의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그는 한국의 교육 현장을 보며 비판적인 의사를 전했습니다. “학교에서 밤 9시까지 공부하는 것으로는 결코 창의성을 키울 수 있는 교육이 될 수 없다. 오히려 그보다는 오후 4시 이후에는 학교 문을 닫는 것이 더 낫다.” 대한민국의 학교 교육이 입시교육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비판입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따끔한 충고도 했습니다. “한국은 미래를 준비해야 할 아이들을 과거 방식으로 교육하고 있다.” 이와 같이 입시 중심의 학교 교육이 되니, 인성 교육 역시 뒷전으로 밀리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 교육 역시 쉽지가 않습니다. 짧은 주일학교 시간에 어떻게 아이들을 말씀으로 가르쳐야 할까요? 주일이 되면 아이들에게 입시 준비를 시키겠다고 “얘야, 오늘 교회 가지 말고 학원에 가라. 너 고3 됐으니 1년 동안만 예배 방학하자.”라고 말씀하시는 부모님이 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제 가슴도 먹먹해집니다. 이는 자녀의 미래를 망치는 일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로 인해 자녀의 사고방식이 뒤바뀌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우선권이 무엇인지 가치 판단을 할 때, 하나님보다 세상의 가치를 앞세우는 쪽으로 기울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그렇게 나오면 자녀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가치를 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지혜의 근본이시거늘 그것을 잊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1년이 지난다고 해서 자녀가 자연스럽게 교회에 나올까요? 이미 그때는 가치관이 바뀌어져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을 향해 나가버립니다. 입시 교육의 표어는 ‘정보가 힘이다!’입니다. 정보를 소유하는 것이 일종의 권력이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회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인터넷만 치면 웬만한 전공 분야의 교수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알 수가 있습니다. 게다가 빅 데이터, 사물 인터넷, 인공지능까지 4차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있다고들 합니다. 빠른 변화만큼이나 학생과 교사들의 역할도 다양하게 변화되어야 한다고 요청 받고 있는 시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참 스승이십니다.
이에 따라 선생님들의 역할이 더 중요해졌습니다. 이제는 ‘얼마나 많은 정보를 주입할 것인가?’보다 ‘정보를 어떻게 해석하고 창의적으로 적용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더욱 중요합니다. 선생님이란 매우 소중한 분들입니다. 선배들의 좋은 점들을 전승해 주시는 분들이 선생님이고, 우리가 갖고 있는 재능을 발견해 주는 분들도 선생님이며, 좋은 것을 전승하고 창의적으로 재해석하여 적용할 수 있도록 돕는 분들도 선생님입니다.
요한 페터 에커만의 『괴테와의 대화』라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에 이러한 일화가 실려 있습니다. 어느 젊은 화가가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아주 멋진 작품이었습니다. 그 그림을 본 사람들이 칭찬했습니다. 괴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 화가는요. 순전히 혼자 힘으로 그림을 배웠대요. 놀랍지 않나요?” 그러자 괴테가 대답합니다. “이 젊은 화가에게는 분명 재능이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독학했다는 것은 칭찬거리가 못 됩니다. 오히려 나무라야 할 점이지요. 모름지기 재능이 있는 사람은 외톨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재능을 최대한 꽃피우게 이끌어 줄 스승과 교감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삶에도 스승이 필요합니다. 권위를 인정하고 기꺼이 순종할 수 있는 스승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내가 성장할 수 있는 비결이자 성숙할 수 있는 비결입니다. 스승으로부터 지식과 지혜를 얻고, 그분이 경험한 것을 내 것으로 삼는 것이 공부요, 참 배움입니다. 지적 유대감과 감성적 유대감을 나누는 스승과 제자가 있다는 것은 매우 큰 축복입니다.
우리에게 지금까지 수많은 스승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스승보다 최고의 스승이 계십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지혜의 스승입니다. 우리에게 하늘의 계시를 알려 주시는 분, 삶의 모든 지혜를 가르쳐 주시는 분입니다. 그분을 통해 참된 인격과 성품도 배웁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삶의 모든 것을 지혜롭게 바라보고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 자체이신 예수님을 통해 교육의 현장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교육은 사람을 살리는 생명 교육입니다.
그동안 우리의 교육 현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전통적인 교육에서 소중한 것은 외우기 교육이었습니다. 이는 내용을 담기에 가장 적합한 방식입니다. 그래서 예전에 교회학교를 다니신 분들은 성경 암송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지금도 이 방식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얼마나 좋은 교육 방식입니까? 이를 통해 성경 지식이 풍성해졌습니다. 또한 성경의 교리 교육에 전념했습니다. 이를 통해 성경 내용 자체를 깨닫게 된 것에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만 머물 때 문제가 생깁니다. 아니, 그 성경 내용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삶의 모습이 달라지게 됩니다.
이천 년 전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성경 해석을 놓고 끊임없이 갈등하셨습니다. 예수님이나 바리새인이나 모두 성경을 많이 읽고 외웠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들을 들여다보면, 그분이 구약 말씀을 자주 인용하신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구약 말씀을 늘 묵상하며 외우고 사랑하셨다는 뜻입니다. 바리새인들도 그랬습니다. 그들 역시 구약의 말씀을 생명처럼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바리새인의 차이가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말씀을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했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말씀을 이해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문자를 더 중요시한 반면, 예수님은 문자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셨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키운 사람들은 교리적인 인간들이었지만, 예수님이 양육하신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정향된 인간들이었습니다.
이 내용을 가장 잘 살펴볼 수 있는 게 안식일 논쟁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보다 안식일 법 자체에 목매고 있는 바리새인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느냐?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지 않느냐?” 그러면서 예수님은 신앙이란 인간이 얼마나 소중하고, 하나님이 얼마나 인간을 사랑하시는지에 대해 알려 주는 것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인간론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인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 인권의 존엄성, 지혜로운 존재로서의 인간 등을 주장하는 게 기독교 신앙의 인간론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독교 신앙인이면서도 예수님처럼 인간을 사랑하지 못하고 바리새인처럼 형식주의적인 신앙생활을 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바리새인을 향해 “외식하는 형식주의자들이여, 화있을 진저!”라고 질타하셨습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믿으면서 마음이 더 넓어졌습니까? 아니면 더 편협해졌습니까? 더 독선적인 사람이 되고 아집이 강해졌습니까?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남을 함부로 정죄합니까? 바리새인처럼 자기 교만에 빠져든 적은 없습니까? 그런 사람들 중에 목사들도 있습니다. 영적인 지도자들 중에 바리새주의자들이 있습니다. 만약 부모님이 그런 모습이라면 자녀들은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살아 계신 예수님의 생명이 전달되지 않고 교조주의적인 모습만 전달될 뿐입니다. 때문에 자녀들은 나중에 이렇게 고함칩니다. “나는 엄마처럼 안 살 거야! 아빠 같은 사람은 안 될 거야! 엄마, 아빠가 믿는 예수는 안 믿을 거야!”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부모가 본이 되지 못하면 자녀는 당연히 불신앙의 자리로 들어설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 교육의 목표는 나의 하나님을 만나고 내 신앙을 세우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서 연구가 왜 즐거울까요? 그 속에서 하나님이 발견되지만, 인간도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성경 연구는 인문학 중의 인문학입니다. 인간이 누구인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하나님이 왜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고 그에게 세상을 관리하도록 맡기셨는지, 성경 연구를 통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인간에 대한 소중함을 선언하는 종교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의 색깔은 잿빛이 아닙니다. 푸르른 초록빛입니다. 신앙 안에 생명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의 교육 목표는 무엇일까요? 소망교회의 목회 목표는 무엇일까요? 매 주일, 또 매일 새벽마다 제가 설교하면서 목표로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한 가지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성도님들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만날까? 어떻게 예수님의 위대함을 깨닫고 더 사랑하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예수님을 닮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할까? 바로 이 한 가지 목표에 전념합니다.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만나 대화하고 그분과 동행하는 믿음의 사람들로 성숙하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 교회 교육의 목표며 목회의 목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만난 체험이 있습니까? 예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실 수가 있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 시편 23편의 말씀 중 1~3절까지 말씀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시편 23:1~3)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무엇입니까? ‘나’입니다. 그 다음에 많이 나오는 단어는 ‘여호와’입니다. 이 기록은 하나님을 경험한 다윗의 삶의 족적입니다. 그는 이렇게 자신의 삶을 추억하며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간증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과의 추억이 있습니까? 예수님과 만났던 추억, 그분이 나와 동행하셨던 기억, 예수님과 나누었던 삶의 이야기가 있습니까? 다윗은 그 추억을 시편을 통해 이렇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과제가 무엇입니까? 부모의 신앙이 내 신앙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남의 신앙이 아니라 내 신앙을 만드는 것입니다. 아버지, 어머니의 신앙이 내 신앙으로, 선생님과 전도사님, 목사님의 신앙이 내 신앙으로 바뀌는 것, 신앙의 선배들의 이야기를 내 이야기로 삼을 수 있는 것, 그것이 우리 신앙의 과제입니다. 그때 가슴도 벅차오를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내 안에서 움직이면서 예수님을 마음껏 자랑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나타나셨습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 무슨 뜻입니까? 신앙이란 전수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전승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음 이야기를 기대하십니다. 누가 당신의 이야기를 이어갈지 말입니다. 모세의 하나님, 엘리야의 하나님, 다윗의 하나님, 베드로의 하나님, 바울의 하나님, 그리고 예수님의 하나님이신 것을 성경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우리를 초청하시며 또 하나의 이야기를 쓰라고 하십니다. 바로 나의 이야기, 내가 경험한 하나님 이야기를 쓰라고….
지혜, 현장, 공동체를 지향하는 교육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바로 그 뒤에 내 이름을 집어넣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했던 내 삶의 이야기와 사건들을 써 내려 가는 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의 신앙 이야기를 써 내려 갈 수 있을까요? 저는 교회학교 교역자들에게 자주 이런 말을 합니다. 몇 가지 방향 설정을 해야 된다고.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첫째, 지식의 교육에서 ‘지혜’의 교육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 신앙 교육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머리로는 신앙생활을 하는데 가슴은 냉랭한 분들이 있습니다. 가슴으로 신앙이 오기까지 평생이 걸리는 분들도 있습니다. 머리로는 믿는데 가슴으로 내려오지 못하고 인생을 마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런 지식만의 신앙 교육은 인간을 교만하게 만듭니다. 지식은 늘 자기를 자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혜 교육은 하나님을 자랑하는 교육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면 “하나님, 제 인생은 언젠가 끝납니다. 하나님, 제가 저를 압니다. 저는 연약한 존재고 탐욕의 죄가 제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으로 제 죄가 씻겨지길 원합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지혜자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그에게 임재하셔서 지혜와 용서의 복을 내려 주십니다. 이처럼 지식의 교육에서 지혜의 교육으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강조합니다.
또한 지혜의 교육에 들어가면 내 삶에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분의 동행에 놀라며 축복에 감사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 중 28~29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마태복음 7:28~29)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놀랐다고 합니다. 그분의 가르침이 서기관들의 가르침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권위 있는 가르침이었고, 놀라운 지혜가 깃든 가르침이었습니다. 지혜 교육이란 바로 이런 교육입니다.
두 번째는 ‘현장’ 교육으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왔다면, 이제 손과 발로 움직이는 삶의 교육 현장으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우리 곁에 이웃이 있음을 알고 나누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경험하게 되면 눈이 열립니다. 나보다 나은 사람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그 사람에게서 무언가를 배우고 싶다는 욕망도 생깁니다. 반대로 나보다 연약하고 열악한 환경에 있는 사람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때는 그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생기고, 사랑하고 도와주고 싶은 간절함이 생깁니다. 이처럼 우리 삶이 이웃에게 열려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자녀들이 그 모습을 보고, 귀한 배움을 얻어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자녀들에게 하나님 사랑과 나라 사랑을 교육 과정에 연계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도산공원에 가면 안창호 선생이 어떻게 나라를 사랑하고 꿈을 키웠는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남산공원에 가면 안중근 의사가 어떻게 생명을 걸고 투쟁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또 양화진에 가면 선교사들의 묘역이 있는데, 그 현장을 방문하며 우리가 얼마나 복음에 빚진 자들인지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통일전망대에 가서는 북한을 품고 기도할 수 있고, 대한민국 각지를 돌며 나라 사랑과 하나님 사랑을 가슴에 품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배당을 넘어 삶의 현장, 역사의 현장으로 나가 기독교적 역사관을 키울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다음세대를 위한 교육이며, 이 나라의 미래를 위한 교육입니다. 24절 말씀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마태복음 7:24)
삶의 현장으로 나가 실천하는 사람이야말로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함께 체험하는 ‘공동체’ 교육으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교육 방법을 보니, 질문하고 대답을 들으시고, 다시 제자들이 질문하면 대답하시고 함께 생각하고 대화 나누고 참여하는 교육 방법을 취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저희 교회는 현재 히브리식의 ‘하브루타’ 교육과 ‘거꾸로 교실’이라는 교육을 참고하면서 ‘더불어 교실’이라는 교육 방법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중심에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두고, 양 옆에 가정과 교회를 두어 함께 연계하고 연결하면서 소통하는 교육을 이루어 갑니다. 여기서 선생님들이 중매인이 되어 말씀을 가정에, 학생들과 친구들에게 전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선생님에게 권위가 있어야 한다고 늘 생각합니다. 29절 말씀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마태복음 7:29)
말씀과 사랑의 권위를 지니신 예수님을 본받읍시다.
예수님의 권위는 말씀의 권위였습니다. 예수님이 말씀 자체이셨으며, 하나님의 말씀 곧 그분의 뜻을 우리에게 자세히 풀이해 주셨습니다. 그로 인해 그분에게 말씀의 권위가 덧입혀졌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권위는 사랑의 권위였습니다. 연약한 자의 삶의 자리에 찾아가셨고, 그들과 함께하셨습니다. 이러한 권위가 바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참된 권위의 모습입니다. 예수님도 우리에게 이러한 권위를 가지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선생님 중의 선생님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이 지혜와 계시의 원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혜로운 자가 되는 길은 한 가지입니다. 올해 종교개혁 500주년, 소망교회 창립 40주년을 맞이하면서 교회 표어를 ‘다시 새롭게, 다시 거룩하게’로 정했습니다. 우리가 함께 새롭게 변화되길 원하는 마음으로 정한 표어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지혜롭게 변화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 다시 새롭게, 다시 거룩하게 될 수 있을까요? 하나입니다. 거룩하신 분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늘 새로움을 주시는 분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지혜 자체이신 예수님과 함께 가면 지혜자가 되고, 새로운 자가 되며,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최고의 스승이 계십니다. 예수님입니다. 그분 안에 하늘의 모든 비밀, 세상의 모든 비밀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께 질문하고, 바로 그분에게서 답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 지혜의 영을 달라고 간구하십시오. 그리하여 ‘다시 새롭게, 다시 거룩하게’ 하나님의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 이 땅에서 하나님나라를 세우는 일에 쓰임 받는 하나님의 복된 자녀들이 다 되시길 축원합니다.
마태복음 7: 24 ~ 29
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29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한국 교육에 변화가 시작되어야 할 때입니다.
어제 우리 교회에서 한국 교회의 여러 교육 담당 지도자들을 초정해 ‘교육 컨퍼런스’를 개최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우리 성도님들을 위해 교회 앞마당에 ‘교회학교 박람회’를 개최 중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교회에서 어떻게 보고 배우며 양육 받고 있는지, 어떻게 말씀을 듣고 실천하고 있는지를 직접 보면서 함께 경험하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며칠 전 조선일보 인터뷰에 이스라엘의 영재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아리엘이라는 사람의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그는 한국의 교육 현장을 보며 비판적인 의사를 전했습니다. “학교에서 밤 9시까지 공부하는 것으로는 결코 창의성을 키울 수 있는 교육이 될 수 없다. 오히려 그보다는 오후 4시 이후에는 학교 문을 닫는 것이 더 낫다.” 대한민국의 학교 교육이 입시교육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비판입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따끔한 충고도 했습니다. “한국은 미래를 준비해야 할 아이들을 과거 방식으로 교육하고 있다.” 이와 같이 입시 중심의 학교 교육이 되니, 인성 교육 역시 뒷전으로 밀리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 교육 역시 쉽지가 않습니다. 짧은 주일학교 시간에 어떻게 아이들을 말씀으로 가르쳐야 할까요? 주일이 되면 아이들에게 입시 준비를 시키겠다고 “얘야, 오늘 교회 가지 말고 학원에 가라. 너 고3 됐으니 1년 동안만 예배 방학하자.”라고 말씀하시는 부모님이 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제 가슴도 먹먹해집니다. 이는 자녀의 미래를 망치는 일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로 인해 자녀의 사고방식이 뒤바뀌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우선권이 무엇인지 가치 판단을 할 때, 하나님보다 세상의 가치를 앞세우는 쪽으로 기울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그렇게 나오면 자녀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가치를 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지혜의 근본이시거늘 그것을 잊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1년이 지난다고 해서 자녀가 자연스럽게 교회에 나올까요? 이미 그때는 가치관이 바뀌어져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을 향해 나가버립니다. 입시 교육의 표어는 ‘정보가 힘이다!’입니다. 정보를 소유하는 것이 일종의 권력이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회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인터넷만 치면 웬만한 전공 분야의 교수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알 수가 있습니다. 게다가 빅 데이터, 사물 인터넷, 인공지능까지 4차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있다고들 합니다. 빠른 변화만큼이나 학생과 교사들의 역할도 다양하게 변화되어야 한다고 요청 받고 있는 시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참 스승이십니다.
이에 따라 선생님들의 역할이 더 중요해졌습니다. 이제는 ‘얼마나 많은 정보를 주입할 것인가?’보다 ‘정보를 어떻게 해석하고 창의적으로 적용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더욱 중요합니다. 선생님이란 매우 소중한 분들입니다. 선배들의 좋은 점들을 전승해 주시는 분들이 선생님이고, 우리가 갖고 있는 재능을 발견해 주는 분들도 선생님이며, 좋은 것을 전승하고 창의적으로 재해석하여 적용할 수 있도록 돕는 분들도 선생님입니다.
요한 페터 에커만의 『괴테와의 대화』라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에 이러한 일화가 실려 있습니다. 어느 젊은 화가가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아주 멋진 작품이었습니다. 그 그림을 본 사람들이 칭찬했습니다. 괴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 화가는요. 순전히 혼자 힘으로 그림을 배웠대요. 놀랍지 않나요?” 그러자 괴테가 대답합니다. “이 젊은 화가에게는 분명 재능이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독학했다는 것은 칭찬거리가 못 됩니다. 오히려 나무라야 할 점이지요. 모름지기 재능이 있는 사람은 외톨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재능을 최대한 꽃피우게 이끌어 줄 스승과 교감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삶에도 스승이 필요합니다. 권위를 인정하고 기꺼이 순종할 수 있는 스승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내가 성장할 수 있는 비결이자 성숙할 수 있는 비결입니다. 스승으로부터 지식과 지혜를 얻고, 그분이 경험한 것을 내 것으로 삼는 것이 공부요, 참 배움입니다. 지적 유대감과 감성적 유대감을 나누는 스승과 제자가 있다는 것은 매우 큰 축복입니다.
우리에게 지금까지 수많은 스승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스승보다 최고의 스승이 계십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지혜의 스승입니다. 우리에게 하늘의 계시를 알려 주시는 분, 삶의 모든 지혜를 가르쳐 주시는 분입니다. 그분을 통해 참된 인격과 성품도 배웁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삶의 모든 것을 지혜롭게 바라보고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 자체이신 예수님을 통해 교육의 현장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교육은 사람을 살리는 생명 교육입니다.
그동안 우리의 교육 현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전통적인 교육에서 소중한 것은 외우기 교육이었습니다. 이는 내용을 담기에 가장 적합한 방식입니다. 그래서 예전에 교회학교를 다니신 분들은 성경 암송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지금도 이 방식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얼마나 좋은 교육 방식입니까? 이를 통해 성경 지식이 풍성해졌습니다. 또한 성경의 교리 교육에 전념했습니다. 이를 통해 성경 내용 자체를 깨닫게 된 것에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만 머물 때 문제가 생깁니다. 아니, 그 성경 내용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삶의 모습이 달라지게 됩니다.
이천 년 전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성경 해석을 놓고 끊임없이 갈등하셨습니다. 예수님이나 바리새인이나 모두 성경을 많이 읽고 외웠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들을 들여다보면, 그분이 구약 말씀을 자주 인용하신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구약 말씀을 늘 묵상하며 외우고 사랑하셨다는 뜻입니다. 바리새인들도 그랬습니다. 그들 역시 구약의 말씀을 생명처럼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바리새인의 차이가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말씀을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했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말씀을 이해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문자를 더 중요시한 반면, 예수님은 문자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셨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키운 사람들은 교리적인 인간들이었지만, 예수님이 양육하신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정향된 인간들이었습니다.
이 내용을 가장 잘 살펴볼 수 있는 게 안식일 논쟁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보다 안식일 법 자체에 목매고 있는 바리새인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느냐?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지 않느냐?” 그러면서 예수님은 신앙이란 인간이 얼마나 소중하고, 하나님이 얼마나 인간을 사랑하시는지에 대해 알려 주는 것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인간론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인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 인권의 존엄성, 지혜로운 존재로서의 인간 등을 주장하는 게 기독교 신앙의 인간론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독교 신앙인이면서도 예수님처럼 인간을 사랑하지 못하고 바리새인처럼 형식주의적인 신앙생활을 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바리새인을 향해 “외식하는 형식주의자들이여, 화있을 진저!”라고 질타하셨습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믿으면서 마음이 더 넓어졌습니까? 아니면 더 편협해졌습니까? 더 독선적인 사람이 되고 아집이 강해졌습니까?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남을 함부로 정죄합니까? 바리새인처럼 자기 교만에 빠져든 적은 없습니까? 그런 사람들 중에 목사들도 있습니다. 영적인 지도자들 중에 바리새주의자들이 있습니다. 만약 부모님이 그런 모습이라면 자녀들은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살아 계신 예수님의 생명이 전달되지 않고 교조주의적인 모습만 전달될 뿐입니다. 때문에 자녀들은 나중에 이렇게 고함칩니다. “나는 엄마처럼 안 살 거야! 아빠 같은 사람은 안 될 거야! 엄마, 아빠가 믿는 예수는 안 믿을 거야!”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부모가 본이 되지 못하면 자녀는 당연히 불신앙의 자리로 들어설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 교육의 목표는 나의 하나님을 만나고 내 신앙을 세우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서 연구가 왜 즐거울까요? 그 속에서 하나님이 발견되지만, 인간도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성경 연구는 인문학 중의 인문학입니다. 인간이 누구인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하나님이 왜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고 그에게 세상을 관리하도록 맡기셨는지, 성경 연구를 통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인간에 대한 소중함을 선언하는 종교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의 색깔은 잿빛이 아닙니다. 푸르른 초록빛입니다. 신앙 안에 생명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의 교육 목표는 무엇일까요? 소망교회의 목회 목표는 무엇일까요? 매 주일, 또 매일 새벽마다 제가 설교하면서 목표로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한 가지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성도님들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만날까? 어떻게 예수님의 위대함을 깨닫고 더 사랑하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예수님을 닮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할까? 바로 이 한 가지 목표에 전념합니다.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만나 대화하고 그분과 동행하는 믿음의 사람들로 성숙하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 교회 교육의 목표며 목회의 목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만난 체험이 있습니까? 예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실 수가 있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 시편 23편의 말씀 중 1~3절까지 말씀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시편 23:1~3)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무엇입니까? ‘나’입니다. 그 다음에 많이 나오는 단어는 ‘여호와’입니다. 이 기록은 하나님을 경험한 다윗의 삶의 족적입니다. 그는 이렇게 자신의 삶을 추억하며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간증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과의 추억이 있습니까? 예수님과 만났던 추억, 그분이 나와 동행하셨던 기억, 예수님과 나누었던 삶의 이야기가 있습니까? 다윗은 그 추억을 시편을 통해 이렇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과제가 무엇입니까? 부모의 신앙이 내 신앙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남의 신앙이 아니라 내 신앙을 만드는 것입니다. 아버지, 어머니의 신앙이 내 신앙으로, 선생님과 전도사님, 목사님의 신앙이 내 신앙으로 바뀌는 것, 신앙의 선배들의 이야기를 내 이야기로 삼을 수 있는 것, 그것이 우리 신앙의 과제입니다. 그때 가슴도 벅차오를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내 안에서 움직이면서 예수님을 마음껏 자랑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나타나셨습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 무슨 뜻입니까? 신앙이란 전수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전승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음 이야기를 기대하십니다. 누가 당신의 이야기를 이어갈지 말입니다. 모세의 하나님, 엘리야의 하나님, 다윗의 하나님, 베드로의 하나님, 바울의 하나님, 그리고 예수님의 하나님이신 것을 성경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우리를 초청하시며 또 하나의 이야기를 쓰라고 하십니다. 바로 나의 이야기, 내가 경험한 하나님 이야기를 쓰라고….
지혜, 현장, 공동체를 지향하는 교육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바로 그 뒤에 내 이름을 집어넣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했던 내 삶의 이야기와 사건들을 써 내려 가는 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의 신앙 이야기를 써 내려 갈 수 있을까요? 저는 교회학교 교역자들에게 자주 이런 말을 합니다. 몇 가지 방향 설정을 해야 된다고.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첫째, 지식의 교육에서 ‘지혜’의 교육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 신앙 교육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머리로는 신앙생활을 하는데 가슴은 냉랭한 분들이 있습니다. 가슴으로 신앙이 오기까지 평생이 걸리는 분들도 있습니다. 머리로는 믿는데 가슴으로 내려오지 못하고 인생을 마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런 지식만의 신앙 교육은 인간을 교만하게 만듭니다. 지식은 늘 자기를 자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혜 교육은 하나님을 자랑하는 교육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면 “하나님, 제 인생은 언젠가 끝납니다. 하나님, 제가 저를 압니다. 저는 연약한 존재고 탐욕의 죄가 제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으로 제 죄가 씻겨지길 원합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지혜자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그에게 임재하셔서 지혜와 용서의 복을 내려 주십니다. 이처럼 지식의 교육에서 지혜의 교육으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강조합니다.
또한 지혜의 교육에 들어가면 내 삶에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분의 동행에 놀라며 축복에 감사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 중 28~29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마태복음 7:28~29)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놀랐다고 합니다. 그분의 가르침이 서기관들의 가르침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권위 있는 가르침이었고, 놀라운 지혜가 깃든 가르침이었습니다. 지혜 교육이란 바로 이런 교육입니다.
두 번째는 ‘현장’ 교육으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왔다면, 이제 손과 발로 움직이는 삶의 교육 현장으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우리 곁에 이웃이 있음을 알고 나누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경험하게 되면 눈이 열립니다. 나보다 나은 사람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그 사람에게서 무언가를 배우고 싶다는 욕망도 생깁니다. 반대로 나보다 연약하고 열악한 환경에 있는 사람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때는 그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생기고, 사랑하고 도와주고 싶은 간절함이 생깁니다. 이처럼 우리 삶이 이웃에게 열려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자녀들이 그 모습을 보고, 귀한 배움을 얻어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자녀들에게 하나님 사랑과 나라 사랑을 교육 과정에 연계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도산공원에 가면 안창호 선생이 어떻게 나라를 사랑하고 꿈을 키웠는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남산공원에 가면 안중근 의사가 어떻게 생명을 걸고 투쟁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또 양화진에 가면 선교사들의 묘역이 있는데, 그 현장을 방문하며 우리가 얼마나 복음에 빚진 자들인지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통일전망대에 가서는 북한을 품고 기도할 수 있고, 대한민국 각지를 돌며 나라 사랑과 하나님 사랑을 가슴에 품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배당을 넘어 삶의 현장, 역사의 현장으로 나가 기독교적 역사관을 키울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다음세대를 위한 교육이며, 이 나라의 미래를 위한 교육입니다. 24절 말씀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마태복음 7:24)
삶의 현장으로 나가 실천하는 사람이야말로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함께 체험하는 ‘공동체’ 교육으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교육 방법을 보니, 질문하고 대답을 들으시고, 다시 제자들이 질문하면 대답하시고 함께 생각하고 대화 나누고 참여하는 교육 방법을 취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저희 교회는 현재 히브리식의 ‘하브루타’ 교육과 ‘거꾸로 교실’이라는 교육을 참고하면서 ‘더불어 교실’이라는 교육 방법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중심에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두고, 양 옆에 가정과 교회를 두어 함께 연계하고 연결하면서 소통하는 교육을 이루어 갑니다. 여기서 선생님들이 중매인이 되어 말씀을 가정에, 학생들과 친구들에게 전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선생님에게 권위가 있어야 한다고 늘 생각합니다. 29절 말씀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마태복음 7:29)
말씀과 사랑의 권위를 지니신 예수님을 본받읍시다.
예수님의 권위는 말씀의 권위였습니다. 예수님이 말씀 자체이셨으며, 하나님의 말씀 곧 그분의 뜻을 우리에게 자세히 풀이해 주셨습니다. 그로 인해 그분에게 말씀의 권위가 덧입혀졌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권위는 사랑의 권위였습니다. 연약한 자의 삶의 자리에 찾아가셨고, 그들과 함께하셨습니다. 이러한 권위가 바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참된 권위의 모습입니다. 예수님도 우리에게 이러한 권위를 가지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선생님 중의 선생님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이 지혜와 계시의 원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혜로운 자가 되는 길은 한 가지입니다. 올해 종교개혁 500주년, 소망교회 창립 40주년을 맞이하면서 교회 표어를 ‘다시 새롭게, 다시 거룩하게’로 정했습니다. 우리가 함께 새롭게 변화되길 원하는 마음으로 정한 표어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지혜롭게 변화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 다시 새롭게, 다시 거룩하게 될 수 있을까요? 하나입니다. 거룩하신 분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늘 새로움을 주시는 분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지혜 자체이신 예수님과 함께 가면 지혜자가 되고, 새로운 자가 되며,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최고의 스승이 계십니다. 예수님입니다. 그분 안에 하늘의 모든 비밀, 세상의 모든 비밀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께 질문하고, 바로 그분에게서 답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 지혜의 영을 달라고 간구하십시오. 그리하여 ‘다시 새롭게, 다시 거룩하게’ 하나님의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 이 땅에서 하나님나라를 세우는 일에 쓰임 받는 하나님의 복된 자녀들이 다 되시길 축원합니다.
2017년 9월 17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우매의 영, 지혜의 영?”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250, 204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마 7:24-27 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생각하기
“학교에서 밤 9시까지 공부하는 것으로는 아이들의 창의성을 키울 수 없다. 그보다는 오후 4시 이후에 학교 문을 닫는 것이 낫다.” 이스라엘의 영재교육 지도자 ‘아리엘리’의 인터뷰 중 한 대목입니다. ‘미래’를 준비해야 할 아이들에게 ‘과거’ 방식으로 교육하고 있음을 따끔하게 지적한 것입니다. 인성교육은 뒷전이고, 신앙 교육은 말한 것도 없습니다. 일 년만 학원에 다니고 대학가서 교회 나가라는 부모가 자녀의 미래를 망칩니다.
설교의 요약
입시교육의 표어는 ‘정보가 힘이다’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인터넷만 치면 어떤 전공분야의 교수보다 훨씬 더 많은 정보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4차 산업혁명’으로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학생과 교사의 역할도 변해야 합니다. 교회교육의 현장을 둘러봅시다. 전통적인 교육은 ‘암기식 교육’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성경암송과 교리교육이 주요했습니다. 너무 좋은 것인데,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내 삶에 괴리된 지식이 아니라 삶에 적용하는 지식이 되어야 합니다. 바리새인들도, 예수님도 성경을 많이 읽고 외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차이점은 예수님은 문자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즉 ‘교리적인 인간’이 아니라 ‘성경적인 인간’을 세우셨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편협하고, 독선적이고 교리적 인간을 세우는 것에만 집착해 있었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이런 모습을 볼 때 실망하게 됩니다. 부모님의 예수님을 거부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선생님은 ‘생각하는 공부’를 지도해 줘야 합니다. 또한 어떻게 내 삶에 적용할 것인가에 대한 ‘실천하는 공부’를 인도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인문학 중의 인문학. ‘인간은 누구인가?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인간답게 사는 길은 무엇인가?’ 이러한 내용들이 다 성경연구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직접 만나게 하고,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고 함께 동행 하므로 신앙의 색깔은 잿빛이 아니라 봄의 푸른 초록색이 되어 집니다(시231-3). 생명을 경험하는 추억 만들기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 표현됩니다. 신앙은 이처럼 이어집니다. 곧 우리 하나님은 전승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님의 하나님이십니다. 즉 어머니의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됩니다. 선생님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교육해야 할까요? 첫째, ‘지식의 교육’에서 ‘지혜의 교육’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 교육을 해야 합니다. 지식은 교육을 통해 쌓아가기만 하지만, 지혜는 인간의 자기 미련함을 깨닫는데서 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만이 지혜의 근원이시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임을 알게 됩니다. 둘째, ‘이론교육’에서 ‘현장교육’으로 나가야 합니다. 가슴에서 멈추지 않고 손과 발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웃사랑’을 위해 고아원으로 양로원으로, 전도로, 봉사로, 선교여행으로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 사랑’과 ‘나라사랑’을 함께 교육해야 합니다. 양화진 선교사 묘역을 찾고, 도산공원을 갑니다. 남산에 올라 한국을 위해 기도합니다. 통일전망대를 찾아 북한을 위해 기도합니다. 삶의 현장에서 말씀을 현실화 시켜야 합니다(24절) 교육의 정점에 예수님이 있습니다. 가정에서 부모님과 만남의 자리를 가지고, 교회에서 믿음의 친구들과 만납니다. 이를 연결시키는 ‘중매쟁이’가 바로 선생님입니다.
우리에게는 최고의 스승이 계십니다. 지혜의 원천, 계시의 원천이십니다.(시14:1) 하나님을 모시면 지혜가 시작됩니다. 올해는 우리 소망교회 40주년이자,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다시 새롭게, 다시 거룩하게! 하나님을 만나면, 예수님을 만나면, 성령님께서 우리를 다시 새롭게, 다시 거룩하게 하실 것입니다. 이 놀라운 축복을 우리 삶에서 함께 경험하는 복된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누기
1. 나의 어머니, 아버지에게서 어떤 신앙의 유산을 물려받았는지 은혜를 나누어 봅시다.
2. 우리가 자녀들을 지식중심으로 잘못 교육시켜 왔는지 돌아보며 회개합시다.
2. 지금부터라도 우리가 신앙을 잘 물려주기 위해 무엇을 해나가야 할지를 결단해 봅시다.
마무리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예수님 만나고 사랑하고 닮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