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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 제물을 버리고 하늘 만나를!

요한계시록 2: 12 ~ 17

김지철 목사

2007.09.09

유혹에 빠져 망한 파리와 나방

이솝 우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향긋한 냄새를 찾아온 파리가 꿀단지에 앉아 꿀을 핥아먹기 시작했습니다. 꿀단지 언저리에만 있다가 성이 차지 않은 파리는 꿀단지 속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날개가 꿀에 닿는 순간 꿀단지 속에 빠져들어 다시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불나방이 파리를 향해서 비웃었습니다. “야, 이 미련한 놈아, 너는 욕심이 많아서 이제 꿀단지 속에서 빠져 죽게 되었구나.”
그러다가 해가 졌고 저녁이 되자 주인이 등불을 켰습니다. 그러자 불나방은 등불 주위를 빙글빙글 돌다가 점점 불 가까이로 다가서 그만 불에 타죽어 땅바닥에 떨어졌습니다. 그 때 꿀단지에 빠졌던 파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야 이 녀석아, 너는 나보다 더 멍청했구나. 타 죽는 줄도 모르고 정욕대로 행하더니.”
결국 먹이에 욕심을 내던 파리도 죽었고, 현란한 불빛을 찾아 헤매던 불나방도 죽었습니다.
우리의 삶은 어떠합니까? 우리 주위에는 우리를 유혹하는 손길이 참으로 많고, 순간의 유혹은 우리를 향해 속삭입니다. “야 한번만 즐겨라. 이번만 네 육체가 끌리는 정욕대로 한번 해봐라.” 일시적인 환락 속에 우리를 이끌어 들이는 유혹이 끊임없이 우리 주위에 손길을 내밀며 속삭이고 있습니다. 또 어쩌면 파리와 불나방같은 비참한 결과를 알면서도 서서히 그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여 교만에 빠진 한 남자

미국에서 신앙을 지녔던 한 남자는 흠 잡을 데 없이 훌륭하고 아주 너그럽고 친절했습니다. 자기 시간과 돈과 모든 에너지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아낌없이 내놓고 헌신할 줄 아는 인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그를 좋아했고 존경했습니다. 그는 훌륭한 아버지와 충실한 남편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의 아내는 너무나 외로웠습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완벽한 남편을 볼 때마다 화가 치밀어서 미칠 지경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신앙인의 영적인 상투어를 써가면서 영적인 우월성을 가진 자세로 아내를 대했고, 생색을 내면서 아내에게 지시했습니다. 아내가 남편을 따라 올수 없을 정도로 거리감을 계속해서 유지했기 때문에 아내는 깊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위로할 때도 멸시하는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며 말했습니다. “스스로 그것도 못 해결해? 그 정도의 어려움도 극복하지 못해?”
아내는 오랜 세월동안 남편의 도인과도 같은 태도에 시달리다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아무 말 없이 남편을 떠나가 버렸습니다. 이 소식을 기독교공동체가 듣고 모든 사람들이 남자를 위로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멋진 남편을 놔두고 도망 가버리는 여자의 배신을 비난했습니다. 아내가 떠나고 몇 달이 지나자, 남편의 견고했던 자기 정체성이 서서히 붕괴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마음속의 신앙도 흔들려 하나님을 향해서 항의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십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나를 이렇게 내버려 두십니까?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 가정에 이런 어려움이 생기도록 허용하실 수가 있습니까?’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목사님을 찾아갔고, 목사님은 남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인이 가정을 버리고 당신을 떠난 것은 전적으로 부인의 잘못입니다. 하지만 내가 만약 당신의 아내 입장이었다면 나는 훨씬 오래전에 당신을 미련 없이 떠났을 것입니다. 부인의 잘못은 잘못이죠. 하지만 당신이 지닌 자기 스스로를 자랑하는 영적 우월감에 비하면 부인은 차라리 깨끗한 눈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당신의 자기 교만, 자기 멸시가 해결되도록 옆에서 기도해드리겠습니다.”
한국의 아내들은 참으로 착해서 남편을 쉽게 안 떠납니다. 남편이 문제가 있고 어려움이 있어도 남편을 위해서 끊임없이 기도하는 사람들이 한국의 아내들입니다. 이 땅의 남편들은 다시금 아내를 바라보며 아내가 무엇을 요구하고,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를 알아 잘 감당해야합니다. 이 남자는 자기 스스로 너무 의롭기 때문에 가장 가까운 사람인 아내의 연약함을 도무지 돌볼 수가 없습니다. 스스로 너무 강했고 완벽했습니다. 자기 스스로 모든 것이 다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아내마저도 그 모습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이중성을 지닌 교회입니다.

우리는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자신을 자랑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하나님을 의존하기 보다는 사실은 자기의 자존심을 의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반성하고 되돌아보기보다는 오히려 자기가 옳다는 고정관념에 대해서 자기 삶을 조종하는 모습일 수가 있습니다. 파리와 불나방 같이 타협에 대한 욕망이 가득한 인간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주 고상하고 우아하지만 오만하고,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삶의 모습이 들어 있습니다. 어떤 면으로는 세상이 갖고 있는 욕심과 쾌락을 즐기고 싶어 하고 또 다른 면으로는 세상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으면서 고고하고 오만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이런 두 가지의 특징을 모두 지니고 있습니다. 버가모는 로마 제국 하에 있는 문화도시, 종교도시, 행정도시였습니다. 이 도시는 해발 400m의 높은 언덕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제우스신을 위한 대형제단이 있었고 아크로폴리스가 도시의 멋을 더해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 황제 신전과 디오니소스 신전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의술의 신이라고 알려진 아스클레피오스 신전도 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당시 20만권을 소장한 도서관도 있고, 로마 총독 앞에서 청문회가 열린 재판장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곳은 종교 문화의 도시였지만 황제숭배가 만연하던 이방도시였습니다. 바로 이런 도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간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곳에 복음이 들어간 것을 보면서 걱정하셨습니다. “너희들이 있는 바로 그곳이 사탄의 권좌가 있는 곳이다. 사탄이 거주하고 살아있는 사탄의 본거지다.”
이것은 우리에게 안쓰럽지만 한편으로는 아주 놀라운 충격을 가져다줍니다. 여기에 있던 신앙인들이 믿음생활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과 함께 산다는 것이 충돌이었고 생명을 건 모험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곳에는 순교자가 있다는 사실을 지적해주셨는데 그가 안디바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있었다. 그는 내 이름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았다. 그런데 이런 위기 속에서도 버가모 교회가 내 이름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마지막까지 버리지 않고 지금까지 지키고 있구나.”

버가모 교회는 하나님을 섬기면서 동시에 신앙을 버렸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칭찬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꾸중이 이어집니다. “네게 책망할 것 두 가지가 있다. 네가 발람의 교훈을 따라가며 우상숭배와 음행을 저지르고 있구나.”
이 구절을 읽으면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두 가지 구절이 함께 묶여져있는가? 순교의 헌신과 순교할 수 있는 신앙을 가졌던 버가모 교회가 어떻게 동시에 우상숭배를 하고 음행을 하는 교회가 될 수 있는가? 어떻게 교회 안에 두 그룹이 있는가? 순교적 열정을 갖고 있는 그룹과 우상숭배를 하면서 음행을 하는 두 그룹이 있는가? 아니면 한사람 마음속에 이 두 가지 마음이 동시에 들어가 있다는 말씀인가?’
본문에 의하면 예수님은 좌우의 날선 검을 가진 분입니다. 예수님은 본문에 의하면 구원자가 아니라 심판자이십니다.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시고, 엄중히 판단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눈에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거짓 교훈을 향해서 끊임없이 나가는가? 예수님께서는 왜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지 않으시는지 묻고 계십니다. 여기에 나오는 우상숭배란 아예 하나님 믿는 것을 다 포기하고 우상숭배를 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나님도 믿고 우상숭배도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기도하면서 우상숭배를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하나님께 예배도 드리면서 우상숭배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욕심, 자기탐심을 채우는데 하나님을 이용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빌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눈으로 볼 때 하나님에 대한 모욕이며 하나님에 대한 배신입니다.
여기 나타난 발람의 교훈은 구약 민수기 22장 이하에 나타나는 말씀으로 발람은 거짓 선지자였습니다. 발람의 교훈이란 일종의 신앙적인 사기 행위입니다. 모압 왕이었던 발락은 이스라엘 백성을 두려워해서 발람이라는 선지자를 돈을 주고 매수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고 모압 백성을 축복하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래서 발람이 이스라엘 백성 앞에 섰지만 하나님께서 발람의 마음을 움직이셨습니다. 저주하려고 섰는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을 축복하게 하셨습니다. 무려 세 번 반복해서 이런 사건이 일어난 것을 성경은 기록해주고 있습니다. 발람은 하나님의 이 놀라운 역사를 경험함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알을 섬기도록 부추기는 거짓 선지자였습니다. 그래서 발람의 교훈이란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우상의 풍습을 뒤따르고 세상과 타협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런 발람의 교훈 때문에 우상을 숭배하게 되었고 성적으로 부도덕한 음행을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포기하는 훈련, 버리는 훈련을 할 때 이중생활을 청산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소중한 것, 사랑스러운 것을 찾으면 다른 것은 다 버릴 수가 있습니다. 아니 물건은 버리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내게 사랑하는 여인, 사랑하는 남자가 나타나서 이 사람과 한평생 살아가는 결혼을 할 마음을 갖게 되면 지금까지 사귀었던 모든 여자를 끊어 버려야 합니다. 지금까지 만난 모든 남자를 끊어야 합니다. 이제는 사랑하는 한 사람만으로 만족하며 일생을 살겠다고 작정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결혼이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여자에 대해 ‘아니오’를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남자에 대해 ‘아니오’를 선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여자, 한 남자보다 더 위대한 인격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때 때로는 참된 신앙을 버리고 내려놓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그동안 덕지덕지 붙어있던 모든 것들을 다 붙들고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포기하는 훈련, 버리는 훈련이 되지 않으면 버가모 교인들처럼 하나님도 섬기면서 우상숭배를 하며 행음과 간음을 행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그리스도를 믿으면 직업을 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갖고 있는 전문성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을 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관보다는 하나님 말씀의 가치관을 우선으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내 가정, 내 친구, 내 직장, 내 기업, 내가 사용하는 전문적 달란트가 하나님을 위해서 어떻게 쓰임 받을까를 생각하면서 내게 주어진 삶, 내게 주어진 직장, 내게 주어진 가정을 꾸려 나가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신앙생활과 사회생활에 늘 정신적 분열증 현상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이중적인 인간이 됩니다.

신앙에는 중립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편에 서야 합니다.

왜 버가모 교회는 순교적 각오를 했으면서도 우상숭배와 음행을 하는 교회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을까요? 그들은 하나님 때문에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 때문에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럴 때 믿음이 있노라고 하면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믿음이 있노라고 하면서 거짓말을 지어내고 부정을 행하는 사람이 됩니다.
믿음이 있노라고 하면서 이기주의적인 삶의 도취된 사람이 됩니다.
믿음이 있노라고 하면서 남을 미워하고 분노하는 사람이 됩니다.
믿음이 있노라고 하면서 끊임없이 점을 보는 사람이 됩니다.
믿음이 있노라고 하면서 불륜과 음란의 행위를 반복하는 사람이 됩니다.
믿음이 있노라고 하면서 술과 마약에 중독 된 사람이 됩니다.
믿음이 있노라고 하면서 명예와 권력에 탐욕스런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이 우선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우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선입니다.

이것을 놓치면 우리가 아무리 기도하고, 예배를 드리며 찬양을 해도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기쁨과 감격을 소유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중립을 지켜야할 부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신앙에는 중립이란 없습니다.

하나님 편에 서면 하나님이 좋아하는 것을 나도 좋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 서면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을 나도 싫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 서면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을 나도 기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 서면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나도 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앙이란 늘 하나님 편에 서는 것입니다. 20세기 최고 기독교 변증가 중의 하나였던 C.S 루이스가 불신자였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성경말씀을 읽으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니까 예수님은 둘 중에 하나다. 다른 대안(alternative)은 없다(삭제). 예수님은 그 말씀대로 말씀하시고 행동하시고 그 약속을 그대로 보이셨다면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분은 메시아다. 그분은 나의 주님이다. 바로 그런 분이 예수님이시든지 아니면 그는 그렇지 않은 사기꾼이다. 중간에 예수님은 선행을 많이 했다. 사랑을 많이 베풀었다. 그것은 예수님의 본질이 아니다(삭제).”
우리는 예수님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나의 하나님, 나의 주님의 말씀 속에 생명이 있고, 그분의 말씀 속에 참된 인생의 구원이 있고 지혜가 있다고 받아들이십니까? 그렇다면 주님이 원하지 않는 것을 끊어버리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물론 예수님은 이 세상에 사는 것이 어려운 것임을 말씀해주십니다. 우리는 아직도 사탄이 자기 세력을 과시하는 현장에서 살고 있기에 끊임없이 유혹받고 있습니다.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세상을 바꾸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스도인들은 마치 적진 깊이 투하된 공수부대와도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으로 파송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세상에 파송하는 것이 마치 이리떼 속에 양떼를 파송하는 것과 같구나. 이것을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그런데도 나가야 된다. 뱀처럼 지혜로워라. 미련한 사람이 되지 말라. 세상의 사람들 보다 더 지혜로워라. 그러나 비둘기처럼 순전해라. 지혜롭기만 해서는 안 된다. 거꾸로 순전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서 순전해라. 순전하면서 지혜로워라. 내가 너희를 보낼 테니 세상에 나가서 너희들이 세상을 바꿔라.”
우리 교회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우리 성도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한국교회의 영적 지도자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이제는 교회가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바꾸겠다고 벼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세상을 바꾸라고 말씀하셨는데, 내가 먼저 바뀌어야 세상이 바뀌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이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우리에게 새로운 가치관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는 가치관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백색 순교를 결단하며 이런 고백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나의 주님입니다. 내가 주님의 종입니다. 매일 내 이기적인 자아를 버리게 하시고 예수님의 자아를 내 것으로 삼게 하옵소서. 이제는 살아있는 순교자가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를 붙잡아주옵소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의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며 혼과 영감이 관절과 골수를 쪼개기까지 합니다.” (히브리서 4:12)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고 계신다고 가르쳐주십니다. 우리의 힘으로 안 됩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일제시대 때 고난을 당하면서 살아있는 순교자로 존경받았던 안희숙씨가 ‘죽으면 죽으리다’라는 책을 쓰고 얼마 있다가 다시 ‘죽으면 살리다’라는 책을 쓰면서 ‘죽으면 죽으리다’ 하는 것보다 ‘죽으면 살리다’하는 것이 더 어렵다고 했습니다. 순교하면서 사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때 오히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다시 능력과 용기와 기쁨을 주셔서 인생을 살 수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를 부르셔서 말씀의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어떤 가치관보다 하나님이 우선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세상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으로 나가 세상을 바꾸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라고 초청하십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나님 앞에 감히 설 수 없는 우리들이지만 주님께서 불러주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세상이 우리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세상을 바꾸어나가는 사람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분임을 알고, 필요하다면 내게 소중한 것일지라도 잘라버릴 줄 아는 믿음의 용기를 갖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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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2: 12 ~ 17

12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13

네가 어디에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14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15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16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1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유혹에 빠져 망한 파리와 나방

이솝 우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향긋한 냄새를 찾아온 파리가 꿀단지에 앉아 꿀을 핥아먹기 시작했습니다. 꿀단지 언저리에만 있다가 성이 차지 않은 파리는 꿀단지 속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날개가 꿀에 닿는 순간 꿀단지 속에 빠져들어 다시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불나방이 파리를 향해서 비웃었습니다. “야, 이 미련한 놈아, 너는 욕심이 많아서 이제 꿀단지 속에서 빠져 죽게 되었구나.”
그러다가 해가 졌고 저녁이 되자 주인이 등불을 켰습니다. 그러자 불나방은 등불 주위를 빙글빙글 돌다가 점점 불 가까이로 다가서 그만 불에 타죽어 땅바닥에 떨어졌습니다. 그 때 꿀단지에 빠졌던 파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야 이 녀석아, 너는 나보다 더 멍청했구나. 타 죽는 줄도 모르고 정욕대로 행하더니.”
결국 먹이에 욕심을 내던 파리도 죽었고, 현란한 불빛을 찾아 헤매던 불나방도 죽었습니다.
우리의 삶은 어떠합니까? 우리 주위에는 우리를 유혹하는 손길이 참으로 많고, 순간의 유혹은 우리를 향해 속삭입니다. “야 한번만 즐겨라. 이번만 네 육체가 끌리는 정욕대로 한번 해봐라.” 일시적인 환락 속에 우리를 이끌어 들이는 유혹이 끊임없이 우리 주위에 손길을 내밀며 속삭이고 있습니다. 또 어쩌면 파리와 불나방같은 비참한 결과를 알면서도 서서히 그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여 교만에 빠진 한 남자

미국에서 신앙을 지녔던 한 남자는 흠 잡을 데 없이 훌륭하고 아주 너그럽고 친절했습니다. 자기 시간과 돈과 모든 에너지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아낌없이 내놓고 헌신할 줄 아는 인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그를 좋아했고 존경했습니다. 그는 훌륭한 아버지와 충실한 남편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의 아내는 너무나 외로웠습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완벽한 남편을 볼 때마다 화가 치밀어서 미칠 지경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신앙인의 영적인 상투어를 써가면서 영적인 우월성을 가진 자세로 아내를 대했고, 생색을 내면서 아내에게 지시했습니다. 아내가 남편을 따라 올수 없을 정도로 거리감을 계속해서 유지했기 때문에 아내는 깊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위로할 때도 멸시하는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며 말했습니다. “스스로 그것도 못 해결해? 그 정도의 어려움도 극복하지 못해?”
아내는 오랜 세월동안 남편의 도인과도 같은 태도에 시달리다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아무 말 없이 남편을 떠나가 버렸습니다. 이 소식을 기독교공동체가 듣고 모든 사람들이 남자를 위로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멋진 남편을 놔두고 도망 가버리는 여자의 배신을 비난했습니다. 아내가 떠나고 몇 달이 지나자, 남편의 견고했던 자기 정체성이 서서히 붕괴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마음속의 신앙도 흔들려 하나님을 향해서 항의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십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나를 이렇게 내버려 두십니까?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 가정에 이런 어려움이 생기도록 허용하실 수가 있습니까?’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목사님을 찾아갔고, 목사님은 남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인이 가정을 버리고 당신을 떠난 것은 전적으로 부인의 잘못입니다. 하지만 내가 만약 당신의 아내 입장이었다면 나는 훨씬 오래전에 당신을 미련 없이 떠났을 것입니다. 부인의 잘못은 잘못이죠. 하지만 당신이 지닌 자기 스스로를 자랑하는 영적 우월감에 비하면 부인은 차라리 깨끗한 눈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당신의 자기 교만, 자기 멸시가 해결되도록 옆에서 기도해드리겠습니다.”
한국의 아내들은 참으로 착해서 남편을 쉽게 안 떠납니다. 남편이 문제가 있고 어려움이 있어도 남편을 위해서 끊임없이 기도하는 사람들이 한국의 아내들입니다. 이 땅의 남편들은 다시금 아내를 바라보며 아내가 무엇을 요구하고,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를 알아 잘 감당해야합니다. 이 남자는 자기 스스로 너무 의롭기 때문에 가장 가까운 사람인 아내의 연약함을 도무지 돌볼 수가 없습니다. 스스로 너무 강했고 완벽했습니다. 자기 스스로 모든 것이 다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아내마저도 그 모습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이중성을 지닌 교회입니다.

우리는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자신을 자랑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하나님을 의존하기 보다는 사실은 자기의 자존심을 의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반성하고 되돌아보기보다는 오히려 자기가 옳다는 고정관념에 대해서 자기 삶을 조종하는 모습일 수가 있습니다. 파리와 불나방 같이 타협에 대한 욕망이 가득한 인간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주 고상하고 우아하지만 오만하고,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삶의 모습이 들어 있습니다. 어떤 면으로는 세상이 갖고 있는 욕심과 쾌락을 즐기고 싶어 하고 또 다른 면으로는 세상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으면서 고고하고 오만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이런 두 가지의 특징을 모두 지니고 있습니다. 버가모는 로마 제국 하에 있는 문화도시, 종교도시, 행정도시였습니다. 이 도시는 해발 400m의 높은 언덕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제우스신을 위한 대형제단이 있었고 아크로폴리스가 도시의 멋을 더해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 황제 신전과 디오니소스 신전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의술의 신이라고 알려진 아스클레피오스 신전도 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당시 20만권을 소장한 도서관도 있고, 로마 총독 앞에서 청문회가 열린 재판장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곳은 종교 문화의 도시였지만 황제숭배가 만연하던 이방도시였습니다. 바로 이런 도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간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곳에 복음이 들어간 것을 보면서 걱정하셨습니다. “너희들이 있는 바로 그곳이 사탄의 권좌가 있는 곳이다. 사탄이 거주하고 살아있는 사탄의 본거지다.”
이것은 우리에게 안쓰럽지만 한편으로는 아주 놀라운 충격을 가져다줍니다. 여기에 있던 신앙인들이 믿음생활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과 함께 산다는 것이 충돌이었고 생명을 건 모험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곳에는 순교자가 있다는 사실을 지적해주셨는데 그가 안디바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있었다. 그는 내 이름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았다. 그런데 이런 위기 속에서도 버가모 교회가 내 이름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마지막까지 버리지 않고 지금까지 지키고 있구나.”

버가모 교회는 하나님을 섬기면서 동시에 신앙을 버렸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칭찬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꾸중이 이어집니다. “네게 책망할 것 두 가지가 있다. 네가 발람의 교훈을 따라가며 우상숭배와 음행을 저지르고 있구나.”
이 구절을 읽으면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두 가지 구절이 함께 묶여져있는가? 순교의 헌신과 순교할 수 있는 신앙을 가졌던 버가모 교회가 어떻게 동시에 우상숭배를 하고 음행을 하는 교회가 될 수 있는가? 어떻게 교회 안에 두 그룹이 있는가? 순교적 열정을 갖고 있는 그룹과 우상숭배를 하면서 음행을 하는 두 그룹이 있는가? 아니면 한사람 마음속에 이 두 가지 마음이 동시에 들어가 있다는 말씀인가?’
본문에 의하면 예수님은 좌우의 날선 검을 가진 분입니다. 예수님은 본문에 의하면 구원자가 아니라 심판자이십니다.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시고, 엄중히 판단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눈에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거짓 교훈을 향해서 끊임없이 나가는가? 예수님께서는 왜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지 않으시는지 묻고 계십니다. 여기에 나오는 우상숭배란 아예 하나님 믿는 것을 다 포기하고 우상숭배를 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나님도 믿고 우상숭배도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기도하면서 우상숭배를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하나님께 예배도 드리면서 우상숭배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욕심, 자기탐심을 채우는데 하나님을 이용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빌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눈으로 볼 때 하나님에 대한 모욕이며 하나님에 대한 배신입니다.
여기 나타난 발람의 교훈은 구약 민수기 22장 이하에 나타나는 말씀으로 발람은 거짓 선지자였습니다. 발람의 교훈이란 일종의 신앙적인 사기 행위입니다. 모압 왕이었던 발락은 이스라엘 백성을 두려워해서 발람이라는 선지자를 돈을 주고 매수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고 모압 백성을 축복하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래서 발람이 이스라엘 백성 앞에 섰지만 하나님께서 발람의 마음을 움직이셨습니다. 저주하려고 섰는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을 축복하게 하셨습니다. 무려 세 번 반복해서 이런 사건이 일어난 것을 성경은 기록해주고 있습니다. 발람은 하나님의 이 놀라운 역사를 경험함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알을 섬기도록 부추기는 거짓 선지자였습니다. 그래서 발람의 교훈이란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우상의 풍습을 뒤따르고 세상과 타협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런 발람의 교훈 때문에 우상을 숭배하게 되었고 성적으로 부도덕한 음행을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포기하는 훈련, 버리는 훈련을 할 때 이중생활을 청산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소중한 것, 사랑스러운 것을 찾으면 다른 것은 다 버릴 수가 있습니다. 아니 물건은 버리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내게 사랑하는 여인, 사랑하는 남자가 나타나서 이 사람과 한평생 살아가는 결혼을 할 마음을 갖게 되면 지금까지 사귀었던 모든 여자를 끊어 버려야 합니다. 지금까지 만난 모든 남자를 끊어야 합니다. 이제는 사랑하는 한 사람만으로 만족하며 일생을 살겠다고 작정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결혼이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여자에 대해 ‘아니오’를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남자에 대해 ‘아니오’를 선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여자, 한 남자보다 더 위대한 인격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때 때로는 참된 신앙을 버리고 내려놓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그동안 덕지덕지 붙어있던 모든 것들을 다 붙들고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포기하는 훈련, 버리는 훈련이 되지 않으면 버가모 교인들처럼 하나님도 섬기면서 우상숭배를 하며 행음과 간음을 행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그리스도를 믿으면 직업을 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갖고 있는 전문성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을 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관보다는 하나님 말씀의 가치관을 우선으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내 가정, 내 친구, 내 직장, 내 기업, 내가 사용하는 전문적 달란트가 하나님을 위해서 어떻게 쓰임 받을까를 생각하면서 내게 주어진 삶, 내게 주어진 직장, 내게 주어진 가정을 꾸려 나가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신앙생활과 사회생활에 늘 정신적 분열증 현상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이중적인 인간이 됩니다.

신앙에는 중립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편에 서야 합니다.

왜 버가모 교회는 순교적 각오를 했으면서도 우상숭배와 음행을 하는 교회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을까요? 그들은 하나님 때문에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 때문에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럴 때 믿음이 있노라고 하면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믿음이 있노라고 하면서 거짓말을 지어내고 부정을 행하는 사람이 됩니다.
믿음이 있노라고 하면서 이기주의적인 삶의 도취된 사람이 됩니다.
믿음이 있노라고 하면서 남을 미워하고 분노하는 사람이 됩니다.
믿음이 있노라고 하면서 끊임없이 점을 보는 사람이 됩니다.
믿음이 있노라고 하면서 불륜과 음란의 행위를 반복하는 사람이 됩니다.
믿음이 있노라고 하면서 술과 마약에 중독 된 사람이 됩니다.
믿음이 있노라고 하면서 명예와 권력에 탐욕스런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이 우선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우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선입니다.

이것을 놓치면 우리가 아무리 기도하고, 예배를 드리며 찬양을 해도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기쁨과 감격을 소유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중립을 지켜야할 부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신앙에는 중립이란 없습니다.

하나님 편에 서면 하나님이 좋아하는 것을 나도 좋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 서면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을 나도 싫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 서면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을 나도 기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 서면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나도 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앙이란 늘 하나님 편에 서는 것입니다. 20세기 최고 기독교 변증가 중의 하나였던 C.S 루이스가 불신자였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성경말씀을 읽으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니까 예수님은 둘 중에 하나다. 다른 대안(alternative)은 없다(삭제). 예수님은 그 말씀대로 말씀하시고 행동하시고 그 약속을 그대로 보이셨다면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분은 메시아다. 그분은 나의 주님이다. 바로 그런 분이 예수님이시든지 아니면 그는 그렇지 않은 사기꾼이다. 중간에 예수님은 선행을 많이 했다. 사랑을 많이 베풀었다. 그것은 예수님의 본질이 아니다(삭제).”
우리는 예수님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나의 하나님, 나의 주님의 말씀 속에 생명이 있고, 그분의 말씀 속에 참된 인생의 구원이 있고 지혜가 있다고 받아들이십니까? 그렇다면 주님이 원하지 않는 것을 끊어버리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물론 예수님은 이 세상에 사는 것이 어려운 것임을 말씀해주십니다. 우리는 아직도 사탄이 자기 세력을 과시하는 현장에서 살고 있기에 끊임없이 유혹받고 있습니다.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세상을 바꾸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스도인들은 마치 적진 깊이 투하된 공수부대와도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으로 파송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세상에 파송하는 것이 마치 이리떼 속에 양떼를 파송하는 것과 같구나. 이것을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그런데도 나가야 된다. 뱀처럼 지혜로워라. 미련한 사람이 되지 말라. 세상의 사람들 보다 더 지혜로워라. 그러나 비둘기처럼 순전해라. 지혜롭기만 해서는 안 된다. 거꾸로 순전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서 순전해라. 순전하면서 지혜로워라. 내가 너희를 보낼 테니 세상에 나가서 너희들이 세상을 바꿔라.”
우리 교회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우리 성도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한국교회의 영적 지도자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이제는 교회가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바꾸겠다고 벼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세상을 바꾸라고 말씀하셨는데, 내가 먼저 바뀌어야 세상이 바뀌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이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우리에게 새로운 가치관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는 가치관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백색 순교를 결단하며 이런 고백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나의 주님입니다. 내가 주님의 종입니다. 매일 내 이기적인 자아를 버리게 하시고 예수님의 자아를 내 것으로 삼게 하옵소서. 이제는 살아있는 순교자가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를 붙잡아주옵소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의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며 혼과 영감이 관절과 골수를 쪼개기까지 합니다.” (히브리서 4:12)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고 계신다고 가르쳐주십니다. 우리의 힘으로 안 됩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일제시대 때 고난을 당하면서 살아있는 순교자로 존경받았던 안희숙씨가 ‘죽으면 죽으리다’라는 책을 쓰고 얼마 있다가 다시 ‘죽으면 살리다’라는 책을 쓰면서 ‘죽으면 죽으리다’ 하는 것보다 ‘죽으면 살리다’하는 것이 더 어렵다고 했습니다. 순교하면서 사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때 오히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다시 능력과 용기와 기쁨을 주셔서 인생을 살 수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를 부르셔서 말씀의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어떤 가치관보다 하나님이 우선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세상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으로 나가 세상을 바꾸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라고 초청하십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나님 앞에 감히 설 수 없는 우리들이지만 주님께서 불러주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세상이 우리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세상을 바꾸어나가는 사람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분임을 알고, 필요하다면 내게 소중한 것일지라도 잘라버릴 줄 아는 믿음의 용기를 갖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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