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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선의 영, 진실의 영? – 성령과 악령 23 –

마가복음 12: 13 ~ 17

김지철 목사

2017.11.26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자유와 생명, 진리가 역동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위선의 영, 진실의 영?’입니다. 예수님의 등장과 함께 유대 사회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내일의 희망 없이 살아가던 보통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등장은 새로운 도전과 용기를 가져다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억눌린 자들에게 해방과 자유를 선포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유가 필요한 이들에게 과감히 자유를 선포하셨습니다. 또한 죄 용서도 선언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가 누구이기에 죄를 용서할 수 있는가?’라고 생각했습니다. 동시에 친히 질병도 치유하셨습니다. 그러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주위에 몰려들었습니다. 특히 당대의 민중들이 예수님 곁으로 몰려왔습니다.
그러자 당시 기득권층이 위협감을 느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이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당시 정치 세력을 쥐고 있던 헤롯 왕과 로마 총독 빌라도가 이런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들을 향한 예수님의 선언의 핵심은 이런 것입니다. “너희들이 신앙을 갖고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신앙이 아니다. 일종의 종교일 뿐이다. 참다운 신앙이 아니라 거짓된 종교 속에 머물러 있다. 그러므로 너희들의 신앙에는 생명력이 없다. 생동하는 신앙이 아니다. 화석화 된 종교에 불과한 모습 아니냐?” 예수님은 노골적으로 그들을 지적하셨습니다. 또한 “너희 외식하는 자들아, 위선자들아!”라며 종교 지도자들을 심하게 꾸짖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계시는 곳에서는 생명이 느껴집니다. 예수님이 계시는 곳엔 자유가 역동합니다. 예수님은 계시는 곳에는 진리가 보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이 무엇입니까? 자유와 해방보다 더 큰 가치가 있습니까? 진리와 진실보다 본질적인 것이 과연 있기나 합니까? 그 모든 생명과 자유, 진리가 예수님 안에서 역동합니다. 예수님이 계시는 자리가 생명과 자유, 진리가 숨 쉬는 자리입니다.

예수님을 시험하던 종교 지도자들도 예수님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으로 인해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하나가 됩니다. 특히 종교 세력의 바리새인과 정치 세력의 헤롯당이 하나로 뭉칩니다. 그 전까지는 서로에게 관심도 없던 상대입니다. 때로는 서로를 멸시하던 관계였는데, 예수님을 무너뜨리기 위해 야합을 선택했습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 사실을 알려줍니다. 13절을 읽겠습니다.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 하여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보내매 (마가복음 12:13)

어떻게 하든지 예수의 문제를 찾으려고, 그래서 그를 고발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스스로를 거룩하다고, ‘나는 너희들과 다른 존재다.’라고 여기는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헤롯당은 누구입니까? 친 로마적인 경향성을 지닌 자들로, 당대 왕 헤롯을 지지하는 정치 집단입니다. 이 두 그룹이 예수님의 등장 초기부터 예수님을 몰아내려고 야합했습니다. 마가복음 3장 6절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서로가 작당해서 예수님을 몰아내자고 논의했던 자들이 이 인물들입니다. 쉽게 만날 일도 없던 이들이 예수님을 적대하기 위해 뭉친 것입니다. 그리곤 계략을 짰습니다. ‘어떻게 저 예수의 꼬투리를 잡을까? 어떻게 그를 넘어뜨릴 수 있을까?’ 그들은 가장 민감한 문제를 붙잡았습니다. 그것은 세금 문제입니다. 당시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세금 문제는 난제였습니다. 늘 어떻게 해야 될지를 고민하던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이 어떻게 접근했을까요? 14절을 통해 확인해 보겠습니다.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man of integrity)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마가복음 12:14)

앞부분과 뒷부분이 상치됩니다. 처음엔 예수님을 높입니다. 그분을 인정하고 칭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여기서 쓰인 표현 중 ‘당신은 참되시고’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NIV 성경은 이를 ‘man of integrity’라고 번역합니다. ‘integrity’는 복합적인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신실하다’, ‘정직하다’, ‘진실하다’, ‘탁월하다’라는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를 칭찬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한다면 그것은 최고의 찬사입니다. 그만큼 신뢰할 만하고 믿음직스럽고 진실성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과 헤롯당이 예수님께 바로 이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전혀 다른 마음과 생각을 품고 있었습니다.
질문에 대해서는 우리가 분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사람이 배우기 위해 질문하는가? 알기 위해 질문하는가? 나를 걸려들게 하기 위해 질문하는가?’ 구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신앙이란 분별하는 능력입니다. 예수님에게도 이러한 지혜와 분별의 능력이 있었습니다. 한편 바리새인과 헤롯당도 그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단순한 아첨이 아니라, 당시 민중들이 예수님을 참되신 분으로 알고 따르는 것을 보면서 그들 역시 그렇게 인정하고 칭찬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한 말이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라는 것입니다. 이는 ‘당신은 다른 사람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이가 아니다. 사람을 볼 때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며 차별 없이 대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정말 가난한 자를 대할 때나 부자를 대할 때는 한결같으셨습니다. 여자나 남자나 어린이나 노인이나 차별 없이 대하셨고, 지식인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인격적으로 대우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에 그들이 감탄한 건 분명합니다.
세 번째 칭찬은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 비친 예수님의 인격, 인간관계, 삶의 태도, 모든 게 일관성이 있었던 것입니다. ‘integrity’라는 단어가 바로 이런 뜻입니다. 진실하고 일관성 있는 모습 말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민감한 사안으로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칭찬한 목적은 다른 데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시험에 빠뜨리려는 질문을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도 그들을 혹평하십니다. “이 위선자들아! 겉과 속이 다른 자들아!” 왜 그렇습니까? 앞에서는 칭찬하고, 뒤에서는 이상한 질문을 던지는 까닭입니다. 심지어 질문에 가시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계책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 질문을 던지는 자들의 속셈을 예수님도 꿰뚫어 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15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그 외식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 (마가복음 12:15)
외식한다는 말은 위선적이라는 뜻입니다. 거짓스럽고 가면을 쓰고 있는 이중인격자라는 말입니다. 바로 그런 이들이 던진 질문이 당시 가장 민감한 문제였던 세금 문제입니다. “우리가 로마 제국의 속국이자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가이사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게 옳습니까? 아니면 세금을 바치지 않는 게 옳습니까?”
세금 문제는 오늘 우리에게도 관심 있는 내용입니다. 우리 정부도 내년부터 교회에 세금을 부과하겠다고 했습니다. 목회자도 국민의 한 사람이므로 세금을 내는 게 맞습니다. 우리 교회의 목회자들과 직원들은 이미 세금을 낸지 오래되었습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교회들에게 세금이 부과될 때 염려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목회자 세금 제도가 합법화될 때, 힘을 오용하는 못된 권력자들에게 교회가 사찰당할 명분이 주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교회가 정치적인 언급이나 정부의 잘못을 지적해야 할 때도 입을 닫아 버리게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직원의 세금 문제로 한국 교회에 노조가 깊이 들어올 위험성도 있습니다. 군대는 육체적인 공동체이기 때문에 노조가 있을 수 없는 것처럼 교회는 사탄과의 영적인 전투를 하는 영적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노조가 깊숙이 들어오면 어마어마한 위험성을 끼치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다시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가 영적인 공동체요, 자발적인 공동체요,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 나가는 공동체라는 사실입니다. 앞으로 목회자들과 더불어 성도님들도 이 부분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는 하늘의 지혜가 있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예수님은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셨습니까? 먼저 그들에게 데나리온 동전을 가져 오라고 하십니다. 이는 자신에게는 이런 동전이 없음을 나타내 보여 주신 것입니다. 무엇보다 성전에 들어오면서 로마 제국의 동전을 갖고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 대한 거절이자 우상숭배의 잘못된 길임을 유대인들도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여기서 세금이란 것은 로마 황제에게 내는 인두세를 가리킵니다. 당시 로마 제국에 저항하는 열심당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로마에 인두세를 내는 건 정당하지 않다며 반대했고, 이를 위해 투쟁하던 인물들이었습니다. 한편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께 동전을 보여주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동전에 누구 초상화가 있냐? 무슨 글씨가 쓰여 있느냐?”
예수님 당시 로마 황제는 티베리우스였습니다. 그의 제위 기간이 A.D.14~37년이었으므로, 예수님 당시 로마의 제2대 황제였습니다. 그는 아우구스투스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동전의 앞면에는 ‘아우구스투스의 아들 신성한 가이사’라고 적혀 있습니다. 뒷면에는 ‘최고의 성직자(pontifex maximus)’라는 라틴어가 쓰여 있는데, 이는 ‘로마 국민의 대제사장’이라는 칭호입니다.
돈, 곧 화폐란 일종의 권력의 상징입니다. 화폐가 통용되는 곳이 권력이 지배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돈에도 세종대왕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 돈이 얼마만큼 세계적으로 통용되느냐에 따라 우리나라의 경제력도 가늠됩니다. 우리가 달러를 그렇게 많이 사용하는 것도 미국의 힘이 막강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모든 나라의 돈에는 통치자의 얼굴이 새겨 있습니다. 이는 그 돈이 통치자의 소유물이며, 그 국가의 소유라는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통치자, 곧 가이사를 보시며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이 동전이 누구 것이냐?” “가이사의 것인데요.” 그때 예수님이 명언을 남기십니다. 17절 전반부를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마가복음 12:17 중)

이 말은 정치권력과 종교의 상관관계를 보여주기도 하는 말입니다. 이 말 속에는 예수님을 넘어뜨리려는 여러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로마 제국에게 세금을 바치라.”고 한다면, “당신, 겁쟁이네! 로마에 세금을 바치라고 말하다니?”라는 비소를 면치 못하셨을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경제 문제가 아닙니다. 정치적인 문제입니다. 아니 정치적인 문제를 넘어 종교적인 문제로까지 넘어갑니다. 이 동전을 바침으로써 하나님을 거부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문제로까지 나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세금을 바치라고 했다면, 비겁한 영웅, 민족을 반역하는 매국노 등과 같은 비난을 면치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했다면, 당시 정치적 사회 속에서 반란자가 됩니다. 이는 로마 제국을 향한 거부요, 정권에 대한 모반자로 비춰질 수 있기 때문에 고발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종교 지도자들이 던진 질문은 매우 골치 아픈 질문입니다. 이렇게 대답해도, 저렇게 대답해도 함정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어려운 질문을 다음과 같이 넘어가십니다. “동전에 무엇이 보이냐? 가이사의 얼굴이 아니냐? 그러면 가이사에게 내라. 그러나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드려라.”
어떻게 보면 수사학적인 반응 같습니다. 물론 그런 요소가 없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있어서 늘 명백한 것이 있습니다. 가이사와 하나님이 동등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반복해서 가르치고 계십니다. 때문에 이 말씀의 강조는 뒷부분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에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창조주시며 모든 것을 만드신 만물의 주인이십니다. 그러므로 가이사의 것 역시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분별력으로 진실성을 회복합시다.

예수님의 대답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 이렇게도 말씀하시는 분이 있구나. 어디서 저런 지혜가 나오는 거지? 저분의 분별력의 총명의 근원은 무엇인가?”라고 속삭이며 예수님께 집중했습니다. 17절 후반절 말씀을 통해 그 내용을 확인해 보겠습니다.

… 그들이 예수께 대하여 매우 놀랍게 여기더라 (마가복음 12:17 중)

여러분,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지금도 가슴이 뜁니다. 이천년 전만 아니라 오늘 우리도 예수님의 말씀에 감동하며 감탄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아, 이분의 지혜는 나하고는 근본적으로 다르구나. 이것은 하늘의 지혜구나. 이분은 하늘의 계시를 갖고 계신 분이구나. 이분은 하나님이 보낸 분, 하나님의 아들이구나!’ 하고 깨닫게 됩니다.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은 거짓으로 진실을 호도합니다. 진실을 적대하고 파괴하는 존재가 그들이라면, 예수님은 진실 자체이십니다. 이러한 진실성을 가진 존재가 되고자 한다면, 필요한 게 있습니다. 무엇보다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믿음이란 무조건 믿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분별력을 가지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옳고 그른지,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게 어떤 것이고, 기뻐하시는 게 무엇인지 분별할 줄 알아야 참된 신앙에 이르고 참된 지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 모든 질문에 답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별력을 가져야 거짓과 허위에 넘어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헤롯당의 위선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위선이란 무엇입니까? 남을 칭찬하는 것 같은데 실제로는 깎아내립니다. 거짓으로 착한 모습을 취합니다. 앞과 뒤, 겉과 속이 다른 모습입니다. 배우고 알기 위해 질문하는 게 아니라 상대방을 넘어뜨리기 위해 질문합니다. 이러한 위선을 꿰뚫어 보신 예수님은 그들을 꾸짖으시며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을 만한 대답을 하십니다.
여러분, 위선자들은 자기를 높이려고 합니다. 자기 잘난 맛에 살려고 합니다. 그러면 그 옆에 있는 사람은 위축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파하고 신음합니다. 반면 진실한 사람은 상대방을 높여줍니다. 함께 더불어 있는 것이 축복임을 압니다.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들은 이러한 마음을 경험합니다. 자신의 가면을 벗어 버리게 되고, 진실한 모습을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위선은 우리를 꼭두각시로 만듭니다. 하지만 진실은 우리를 내 삶의 주인공으로 세워 줍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다가오시며 하시는 말씀도 “내가 네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겠다.”라는 것입니다. “너는 너답게 살아갈 충분한 이유가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예수님을 오늘도 사랑하고,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우리의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진리이십니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생명이자 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자유와 분별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도 이 놀라운 사실은 고백하면서 세상을 향해 당당하게 나아가는 하나님의 복된 아들과 딸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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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2: 13 ~ 17

13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 하여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보내매

14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15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한대 예수께서 그 외식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 하시니

16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17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그들이 예수께 대하여 매우 놀랍게 여기더라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자유와 생명, 진리가 역동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위선의 영, 진실의 영?’입니다. 예수님의 등장과 함께 유대 사회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내일의 희망 없이 살아가던 보통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등장은 새로운 도전과 용기를 가져다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억눌린 자들에게 해방과 자유를 선포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유가 필요한 이들에게 과감히 자유를 선포하셨습니다. 또한 죄 용서도 선언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가 누구이기에 죄를 용서할 수 있는가?’라고 생각했습니다. 동시에 친히 질병도 치유하셨습니다. 그러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주위에 몰려들었습니다. 특히 당대의 민중들이 예수님 곁으로 몰려왔습니다.
그러자 당시 기득권층이 위협감을 느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이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당시 정치 세력을 쥐고 있던 헤롯 왕과 로마 총독 빌라도가 이런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들을 향한 예수님의 선언의 핵심은 이런 것입니다. “너희들이 신앙을 갖고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신앙이 아니다. 일종의 종교일 뿐이다. 참다운 신앙이 아니라 거짓된 종교 속에 머물러 있다. 그러므로 너희들의 신앙에는 생명력이 없다. 생동하는 신앙이 아니다. 화석화 된 종교에 불과한 모습 아니냐?” 예수님은 노골적으로 그들을 지적하셨습니다. 또한 “너희 외식하는 자들아, 위선자들아!”라며 종교 지도자들을 심하게 꾸짖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계시는 곳에서는 생명이 느껴집니다. 예수님이 계시는 곳엔 자유가 역동합니다. 예수님은 계시는 곳에는 진리가 보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이 무엇입니까? 자유와 해방보다 더 큰 가치가 있습니까? 진리와 진실보다 본질적인 것이 과연 있기나 합니까? 그 모든 생명과 자유, 진리가 예수님 안에서 역동합니다. 예수님이 계시는 자리가 생명과 자유, 진리가 숨 쉬는 자리입니다.

예수님을 시험하던 종교 지도자들도 예수님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으로 인해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하나가 됩니다. 특히 종교 세력의 바리새인과 정치 세력의 헤롯당이 하나로 뭉칩니다. 그 전까지는 서로에게 관심도 없던 상대입니다. 때로는 서로를 멸시하던 관계였는데, 예수님을 무너뜨리기 위해 야합을 선택했습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 사실을 알려줍니다. 13절을 읽겠습니다.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 하여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보내매 (마가복음 12:13)

어떻게 하든지 예수의 문제를 찾으려고, 그래서 그를 고발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스스로를 거룩하다고, ‘나는 너희들과 다른 존재다.’라고 여기는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헤롯당은 누구입니까? 친 로마적인 경향성을 지닌 자들로, 당대 왕 헤롯을 지지하는 정치 집단입니다. 이 두 그룹이 예수님의 등장 초기부터 예수님을 몰아내려고 야합했습니다. 마가복음 3장 6절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서로가 작당해서 예수님을 몰아내자고 논의했던 자들이 이 인물들입니다. 쉽게 만날 일도 없던 이들이 예수님을 적대하기 위해 뭉친 것입니다. 그리곤 계략을 짰습니다. ‘어떻게 저 예수의 꼬투리를 잡을까? 어떻게 그를 넘어뜨릴 수 있을까?’ 그들은 가장 민감한 문제를 붙잡았습니다. 그것은 세금 문제입니다. 당시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세금 문제는 난제였습니다. 늘 어떻게 해야 될지를 고민하던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이 어떻게 접근했을까요? 14절을 통해 확인해 보겠습니다.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man of integrity)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마가복음 12:14)

앞부분과 뒷부분이 상치됩니다. 처음엔 예수님을 높입니다. 그분을 인정하고 칭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여기서 쓰인 표현 중 ‘당신은 참되시고’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NIV 성경은 이를 ‘man of integrity’라고 번역합니다. ‘integrity’는 복합적인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신실하다’, ‘정직하다’, ‘진실하다’, ‘탁월하다’라는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를 칭찬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한다면 그것은 최고의 찬사입니다. 그만큼 신뢰할 만하고 믿음직스럽고 진실성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과 헤롯당이 예수님께 바로 이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전혀 다른 마음과 생각을 품고 있었습니다.
질문에 대해서는 우리가 분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사람이 배우기 위해 질문하는가? 알기 위해 질문하는가? 나를 걸려들게 하기 위해 질문하는가?’ 구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신앙이란 분별하는 능력입니다. 예수님에게도 이러한 지혜와 분별의 능력이 있었습니다. 한편 바리새인과 헤롯당도 그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단순한 아첨이 아니라, 당시 민중들이 예수님을 참되신 분으로 알고 따르는 것을 보면서 그들 역시 그렇게 인정하고 칭찬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한 말이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라는 것입니다. 이는 ‘당신은 다른 사람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이가 아니다. 사람을 볼 때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며 차별 없이 대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정말 가난한 자를 대할 때나 부자를 대할 때는 한결같으셨습니다. 여자나 남자나 어린이나 노인이나 차별 없이 대하셨고, 지식인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인격적으로 대우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에 그들이 감탄한 건 분명합니다.
세 번째 칭찬은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 비친 예수님의 인격, 인간관계, 삶의 태도, 모든 게 일관성이 있었던 것입니다. ‘integrity’라는 단어가 바로 이런 뜻입니다. 진실하고 일관성 있는 모습 말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민감한 사안으로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칭찬한 목적은 다른 데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시험에 빠뜨리려는 질문을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도 그들을 혹평하십니다. “이 위선자들아! 겉과 속이 다른 자들아!” 왜 그렇습니까? 앞에서는 칭찬하고, 뒤에서는 이상한 질문을 던지는 까닭입니다. 심지어 질문에 가시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계책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 질문을 던지는 자들의 속셈을 예수님도 꿰뚫어 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15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그 외식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 (마가복음 12:15)
외식한다는 말은 위선적이라는 뜻입니다. 거짓스럽고 가면을 쓰고 있는 이중인격자라는 말입니다. 바로 그런 이들이 던진 질문이 당시 가장 민감한 문제였던 세금 문제입니다. “우리가 로마 제국의 속국이자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가이사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게 옳습니까? 아니면 세금을 바치지 않는 게 옳습니까?”
세금 문제는 오늘 우리에게도 관심 있는 내용입니다. 우리 정부도 내년부터 교회에 세금을 부과하겠다고 했습니다. 목회자도 국민의 한 사람이므로 세금을 내는 게 맞습니다. 우리 교회의 목회자들과 직원들은 이미 세금을 낸지 오래되었습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교회들에게 세금이 부과될 때 염려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목회자 세금 제도가 합법화될 때, 힘을 오용하는 못된 권력자들에게 교회가 사찰당할 명분이 주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교회가 정치적인 언급이나 정부의 잘못을 지적해야 할 때도 입을 닫아 버리게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직원의 세금 문제로 한국 교회에 노조가 깊이 들어올 위험성도 있습니다. 군대는 육체적인 공동체이기 때문에 노조가 있을 수 없는 것처럼 교회는 사탄과의 영적인 전투를 하는 영적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노조가 깊숙이 들어오면 어마어마한 위험성을 끼치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다시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가 영적인 공동체요, 자발적인 공동체요,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 나가는 공동체라는 사실입니다. 앞으로 목회자들과 더불어 성도님들도 이 부분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는 하늘의 지혜가 있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예수님은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셨습니까? 먼저 그들에게 데나리온 동전을 가져 오라고 하십니다. 이는 자신에게는 이런 동전이 없음을 나타내 보여 주신 것입니다. 무엇보다 성전에 들어오면서 로마 제국의 동전을 갖고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 대한 거절이자 우상숭배의 잘못된 길임을 유대인들도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여기서 세금이란 것은 로마 황제에게 내는 인두세를 가리킵니다. 당시 로마 제국에 저항하는 열심당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로마에 인두세를 내는 건 정당하지 않다며 반대했고, 이를 위해 투쟁하던 인물들이었습니다. 한편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께 동전을 보여주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동전에 누구 초상화가 있냐? 무슨 글씨가 쓰여 있느냐?”
예수님 당시 로마 황제는 티베리우스였습니다. 그의 제위 기간이 A.D.14~37년이었으므로, 예수님 당시 로마의 제2대 황제였습니다. 그는 아우구스투스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동전의 앞면에는 ‘아우구스투스의 아들 신성한 가이사’라고 적혀 있습니다. 뒷면에는 ‘최고의 성직자(pontifex maximus)’라는 라틴어가 쓰여 있는데, 이는 ‘로마 국민의 대제사장’이라는 칭호입니다.
돈, 곧 화폐란 일종의 권력의 상징입니다. 화폐가 통용되는 곳이 권력이 지배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돈에도 세종대왕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 돈이 얼마만큼 세계적으로 통용되느냐에 따라 우리나라의 경제력도 가늠됩니다. 우리가 달러를 그렇게 많이 사용하는 것도 미국의 힘이 막강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모든 나라의 돈에는 통치자의 얼굴이 새겨 있습니다. 이는 그 돈이 통치자의 소유물이며, 그 국가의 소유라는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통치자, 곧 가이사를 보시며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이 동전이 누구 것이냐?” “가이사의 것인데요.” 그때 예수님이 명언을 남기십니다. 17절 전반부를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마가복음 12:17 중)

이 말은 정치권력과 종교의 상관관계를 보여주기도 하는 말입니다. 이 말 속에는 예수님을 넘어뜨리려는 여러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로마 제국에게 세금을 바치라.”고 한다면, “당신, 겁쟁이네! 로마에 세금을 바치라고 말하다니?”라는 비소를 면치 못하셨을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경제 문제가 아닙니다. 정치적인 문제입니다. 아니 정치적인 문제를 넘어 종교적인 문제로까지 넘어갑니다. 이 동전을 바침으로써 하나님을 거부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문제로까지 나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세금을 바치라고 했다면, 비겁한 영웅, 민족을 반역하는 매국노 등과 같은 비난을 면치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했다면, 당시 정치적 사회 속에서 반란자가 됩니다. 이는 로마 제국을 향한 거부요, 정권에 대한 모반자로 비춰질 수 있기 때문에 고발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종교 지도자들이 던진 질문은 매우 골치 아픈 질문입니다. 이렇게 대답해도, 저렇게 대답해도 함정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어려운 질문을 다음과 같이 넘어가십니다. “동전에 무엇이 보이냐? 가이사의 얼굴이 아니냐? 그러면 가이사에게 내라. 그러나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드려라.”
어떻게 보면 수사학적인 반응 같습니다. 물론 그런 요소가 없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있어서 늘 명백한 것이 있습니다. 가이사와 하나님이 동등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반복해서 가르치고 계십니다. 때문에 이 말씀의 강조는 뒷부분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에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창조주시며 모든 것을 만드신 만물의 주인이십니다. 그러므로 가이사의 것 역시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분별력으로 진실성을 회복합시다.

예수님의 대답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 이렇게도 말씀하시는 분이 있구나. 어디서 저런 지혜가 나오는 거지? 저분의 분별력의 총명의 근원은 무엇인가?”라고 속삭이며 예수님께 집중했습니다. 17절 후반절 말씀을 통해 그 내용을 확인해 보겠습니다.

… 그들이 예수께 대하여 매우 놀랍게 여기더라 (마가복음 12:17 중)

여러분,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지금도 가슴이 뜁니다. 이천년 전만 아니라 오늘 우리도 예수님의 말씀에 감동하며 감탄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아, 이분의 지혜는 나하고는 근본적으로 다르구나. 이것은 하늘의 지혜구나. 이분은 하늘의 계시를 갖고 계신 분이구나. 이분은 하나님이 보낸 분, 하나님의 아들이구나!’ 하고 깨닫게 됩니다.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은 거짓으로 진실을 호도합니다. 진실을 적대하고 파괴하는 존재가 그들이라면, 예수님은 진실 자체이십니다. 이러한 진실성을 가진 존재가 되고자 한다면, 필요한 게 있습니다. 무엇보다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믿음이란 무조건 믿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분별력을 가지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옳고 그른지,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게 어떤 것이고, 기뻐하시는 게 무엇인지 분별할 줄 알아야 참된 신앙에 이르고 참된 지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 모든 질문에 답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별력을 가져야 거짓과 허위에 넘어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헤롯당의 위선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위선이란 무엇입니까? 남을 칭찬하는 것 같은데 실제로는 깎아내립니다. 거짓으로 착한 모습을 취합니다. 앞과 뒤, 겉과 속이 다른 모습입니다. 배우고 알기 위해 질문하는 게 아니라 상대방을 넘어뜨리기 위해 질문합니다. 이러한 위선을 꿰뚫어 보신 예수님은 그들을 꾸짖으시며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을 만한 대답을 하십니다.
여러분, 위선자들은 자기를 높이려고 합니다. 자기 잘난 맛에 살려고 합니다. 그러면 그 옆에 있는 사람은 위축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파하고 신음합니다. 반면 진실한 사람은 상대방을 높여줍니다. 함께 더불어 있는 것이 축복임을 압니다.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들은 이러한 마음을 경험합니다. 자신의 가면을 벗어 버리게 되고, 진실한 모습을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위선은 우리를 꼭두각시로 만듭니다. 하지만 진실은 우리를 내 삶의 주인공으로 세워 줍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다가오시며 하시는 말씀도 “내가 네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겠다.”라는 것입니다. “너는 너답게 살아갈 충분한 이유가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예수님을 오늘도 사랑하고,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우리의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진리이십니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생명이자 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자유와 분별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도 이 놀라운 사실은 고백하면서 세상을 향해 당당하게 나아가는 하나님의 복된 아들과 딸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7년 11월 26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위선의 영, 진실의 영”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262장, 393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막 12:13-17 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생각하기

예수님의 등장은 충격이었습니다. 억눌림에서 자유를 선포하며 죄를 용서하고, 병을 치유하였습니다. 더불어 당대의 종교지도자들과 정치지도자들을 향해 거침없는 꾸중을 하셨습니다. “너희 외식하는 자들, 너희 위선자들!” 그래서 그들에게 위협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에서처럼 자유와 해방보다, 생명보다 더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이 있을까요?

설교의 요약

바리새인들은 친로마 경향의 헤롯당을 비판하였었습니다. 동시에 자신들은 세상과 구분된 거룩한 사람들이라고 자처하였습니다. 헤롯당과는 함께 하기에는 너무 먼 사이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종교 세력의 대표로, 헤롯당원들은 정치세력의 대표로서 그렇게 서로 멸시하던 그들이 예수님을 공격하기 위해 서로 뭉쳐 “세금문제”를 들고 나섰습니다(13절, 막3:6).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14절).

일면 맞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참되신 분이십니다. 진리위에 서 있었습니다. 인격이 균형 잡힌 분이였습니다. 다른 사람에 의해서 좌지우지 되지 않는 분이었습니다. 사람을 외모로 보시지도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나, 명예가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차별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백성들의 판단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 비친 예수님의 인격과 인간관계, 그리고 삶의 태도입니다. 선생으로서의 열정과 헌신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질문에는 비수가 들어 있습니다. 위선이 깔려 있습니다. 거짓이 가득한 정직입니다. 예수님은 당시에 사용하는 데나리온 동전을 갖고 오라 말씀하십니다. 당시 사용하던 데나리온은 로마의 황제 디베리우스의 초상이 새겨져 있고, 그것은 곧 우상숭배로 연결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열심당들은 이러한 세금을 로마제국에 바치는 것을 반대했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 예수님은 이러한 동전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어떤 대답을 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로마제국에게 세금을 바치라고 말한다면, 예수님은 겁쟁이가 되는 것입니다. 로마에 바치는 세금은 경제적인 문제이기에 앞서 정치적인 문제이고, 그에 앞서서는 종교적인 문제였습니다. 우상숭배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말한다면, 이는 반란자의 언어가 됩니다. 로마제국을 향한 거부요. 정권을 향한 모반이 되고 맙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무엇을 보느냐?” 물으셨습니다. 가이사의 얼굴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가이사에게 내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악센트는 후자에 있습니다. 궁극적인 것은 다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이사의 것도 그러합니다.

예수님 안에 자유와 예수님 안에 사랑이 있습니다. 진실을 원한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종교인에 불과하게 되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예배의 구경꾼이 될 뿐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진실의 영이 우리를 이끌어가는 이 놀라운 축복을 경험하고 누리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나누기

1. 나 자신의 위선적인 모습들, 겉과 속이 다른 모습을 돌아보며 회개합시다.

2. 세상의 위선 앞에서 당혹스러웠던 경험이 있나요? 그곳에서 나는 어떤 대답으로 대처하였는지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과 같이 분별과 지혜로 잘 대처하였었나요?

3. 분별의 영을 구하며, 지혜로써 위선을 이길 힘을 위해 기도합시다.

 

마무리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 하지만, 우리 속에는 위선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용서하시옵소서. 예수님을 따라가게 하시고 옮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는 분별력을 주시고, 용기를 주시고, 생명의 에너지를 우리를 통해 이웃에게 나눠 줄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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