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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픔과 목마름을 느끼는 것은 살아있다는 표시입니다.
체중이 무려 152kg이나 나갔던 사람이 허기가 져서 먹는 것으로 채우면 사라지는 줄 알고 음식을 먹었는데, 어느 날 보니 그것은 육체의 허기가 아니라 영혼의 허기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며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지난 수년 동안 그토록 간절하게 음식으로 채우고자 했던 욕망이 있었습니다. 그 욕망이 사실은 신성하고 보편적인 욕망이라는 사실을 후에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가 욕망에서 느껴지는 배고픔을 오인해서 음식만으로 채우려고 했을 때 그 결과는 과다체중과 악화된 건강뿐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나의 영혼과의 관계 증진을 위해 내 욕망에 반응했을 때, 그 때야 비로소 허기가 채워졌습니다. 이제는 내 삶이 영적으로나 감성적으로 완전히 변화했을 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변했습니다. 내면의 필요에 부응하고, 그 속의 빈 공간을 위로할 때 나는 충만해지고 배부름을 느꼈습니다. 실제로 몸의 체중은 사라졌습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경험하는 배고픔과 목마름은 아직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죽은 자에게는 배고픔이 없고 목마름을 느낄 수도 없습니다. 살아있는 자만이 배고픔을 느끼며 목말라할 줄 압니다. 죽은 자는 안 먹고 안 마셔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있기에 먹고 마셔야 합니다. 시인이었던 칼린 지브란은 이렇게 말합니다.
“욕망은 삶의 절반이다. 그러나 무관심은 죽음의 절반이다.”
우리 안에 욕구가 있다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욕망이 있고, 소원과 갈급함과 배고픔과 목마름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아직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욕망은 삶의 길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무기력해지고 귀찮아지면 그때부터는 죽음의 길을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식욕을 잃어버리고 진수성찬을 앞에 놓아도 밥맛이 당기지 않는 것은 건강이 나빠졌다는 징조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영적인 측면에서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영적인 식욕을 잃는 것은 은혜로부터 멀리 떨어진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를 안 해도 마음이 편안하고 말씀을 읽고 듣지 않아도 갈급한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예배를 안 드려도 마음이 안타깝게 생각되지 않는 것은 영적인 빈곤의 표시입니다. 밥을 안 먹으면 배고픈 것처럼 말씀을 듣지 못하면 우리의 영혼이 안타깝고 갈급한 심정이 될 때 건강한 것입니다.
배고픔과 목마름은 인생을 도전하게 하는 성숙의 비결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배고픔과 목마름을 경험했던 시절이 있습니다. 사실 1950년-60년대에 우리는 육체적인 배고픔을 아주 많이 느꼈습니다. 또한 1960년-70년대에 독재시대를 살면서 민주주의를 그리워하기도 했습니다. 한 시인은 민주주의를 향한 가슴의 열망을 그리며 이런 노래를 했습니다.
신 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을 너를 잊은 지 너무도 오래
오직 한 가닥 있어
타는 가슴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트지 않은 뒷골목이 어딘가
발자국소리 호르락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비명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픈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돌아오는 끌려가는 것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 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과거 민주주의에 대한 타는 목마름을 가졌던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가 이만큼 성장했기에 참으로 감사합니다.
우리는 의를 향한 배고픔과 목마름이 없습니다.
육체적인 배고픔과 목마름을 느끼면 몸의 건강과 성장이 가능해집니다. 그리고 정신적인 배고픔과 목마름을 느끼면 정신적인 세계가 넓어집니다. 영적인 성숙의 깊이가 더 확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마름이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목마름이 있는 인생이야 말로 새로운 미래를 향해서 도전합니다. 그리고 모험을 하게 만드는 것이 목마름을 가진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더 넓은 진리의 세계를 향해서 인간으로 하여금 항해하게 하는 힘의 원동력이 바로 목마름과 배고픔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한두 끼를 먹지 않고 굶으면 배고프다고 아우성을 칩니다. 장사가 잘 안되면 온갖 불만을 터트리며 남의 탓을 합니다. 몸의 건강을 조금 잃어버리면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그러나 삶의 의가 모자란다고 불평하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영혼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 굶주려도 우리는 끄덕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교만해지고 오만해져 하나님의 의에 나아가지 못하고 세상 유혹을 향해 재빨리 변신하려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젊은 사람들은 영적인 갈증과 갈급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갈급함을 육체적인 쾌락을 향해서 방종에 빠지면서 만족감을 얻으려고 합니다. 정열이 사라지는 헛된 육체의 즐거움에 젊음과 시간을 쏟아 붓습니다. 반면 나이든 사람들은 세상과 쉽게 타협하며 세상을 사랑합니다. 더 높은 것을 향해 나아가려 하지 않고 세상의 명예와 짝하면서 그 자리에서 만족하고 멈추어 살아가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연단을 통해 하나님을 향한 갈급함을 주십니다.
갈급함이 모자라면 기다림이 없습니다. 마음속에 타는 목마름이 없으면 새로운 삶에 대한 도전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식욕이 없으면 식욕을 자극하기 위해서 육체의 운동이 필요합니다. 때로는 걷기와 뛰기 운동이 필요합니다. 유산소 운동을 하면 배가 고프듯이 영적인 식욕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인 식욕이 생기려면 훈련과 연습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디모데전서 4:7)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연단시키시기 원하십니다. 스스로 연단하고 갈급하며 배고파하고 목말라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우리 삶을 연단시키기를 원하시는데 그것이 바로 고난입니다. 때로는 가난과 질병입니다. 육체 비만에 빠지면 운동과 다이어트를 통해 살을 빼듯이 영적인 비만에 대한 특효약이 무엇인지 하나님은 잘 알고 계십니다. 그것은 바로 인생에 부딪치는 여러 가지 아픈 사건들입니다. 때로 인생에 실패를 하게하고, 마음의 상처와 좌절과 고통을 느끼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 삶 전체를 뒤흔들어 놓아 인생은 내 소유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의 시간이며 하나님께 받은 선물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 인생이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순간만 열심히 살다가 하나님께 나아가야할 존재임을 가르쳐주시면서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해주십니다.
욕망은 하나님 앞에서의 또 다른 열망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보시면서 우리 영혼만큼은 결코 잃어버릴 수 없다고 생각하시며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이 아닌 육체의 쾌락을 찾습니다. 성적인 욕망을 향해 우리 삶을 쏟아 부으려고 합니다. 필립 얀시는 이런 모습을 보면서 오늘의 시대를 이렇게 평가합니다.
“우리 사회의 성적탐닉을 볼수록, 그런 탐닉 속에 숨겨져 있는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깊은 목마름이 느껴진다.”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목마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작 육체적인 즐거움을 통해서 대신 만족시키려는 것이 이 시대가 가진 모습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정의합니다. “욕망이란 곧 하나님을 향한 깊은 갈증이다.”
인간들은 하나님을 향한 갈증을 만족시키지 못해서 세속적인 욕망으로 풀어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욕망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또 다른 열망입니다. 진정한 만족을 얻기 위한 인간의 몸부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따라가지 않고 세상 것을 따라가면서 중독에 빠집니다. 어떤 사람들은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한 중독에 빠집니다. 먹고 마시는 것을 즐기라고 했지만 그것에 중독 되어서는 안 됩니다. 술과 담배에 대한 중독, 성적인 쾌락에 대한 중독, 좋은 일에 대한 중독도 마찬가지입니다. 중독이 되면 내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중독에 빠진 것이 나를 지배하고 조종합니다. 억압하고 자유가 없어지기 때문에 자율성과 자원하는 마음이 사라집니다.
하나님을 향한 갈급함은 축복입니다.
이런 고통을 당했던 사마리아 여인을 예수님께서 만나 주셨습니다. 수가성에서 예수님께서 만난 여인은 인생을 실패했습니다. 5번 결혼해서 5명의 남편을 가져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남자들에게 버림을 받아 육체적인 배고픔과 갈증이 있었습니다. 영적인 목마름이 있어서 밤잠을 못자며 외로워했던 여인을 예수님께서 만나시면서 목마르지 않는 생수가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십니다. 이런 목마름은 이 여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이 여인과 마찬가지로 목마름과 외로움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해결되는 부분이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있습니다. 시편에서 시인이 이런 말을 합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편 42:1)
갈급함이 있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축복입니다. 그리움이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그리움이 있는 사람에게만 기다림이 있습니다. 영혼에 목마름이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목마름이 있는 사람만 하나님이 주신 새로운 미래를 향해서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작자미상의 이런 글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타는 목마름이 있다. 기업가에게 돈을 향한 목마름이 있듯이, 정치가에게 권력을 향한 목마름이 있듯이, 스포츠 인에게 파워나 기록갱신을 향한 목마름이 있듯이, 나에게는 영적 목마름이 있다.
마중물 한 바가지, 기다리는 펌프의 목마름을 생각하며, 나의 마중물을 예수님의 펌프에 붓는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목이 마르신 것을 기억하며, 모든 피와 물을 쏟아 버리셨기에 목이 타셨던 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딱 일곱 마디 남기신 그 유언을 되새김한다.
아침 묵상 시간을 부으며 마중물처럼 예수님의 펌프에 붓는다.
조금한 물질을 마음에 담아 바치며 나의 마중물을 펌프에 붓는다.
예배를 올리며 나의 마중물을 예수님의 펌프에 붓는다.
나의 존재란 모아봐야 한 바가지의 물에 불과하지만 주님의 펌프에 부으며 주님 안에 넘치는 영원한 성수를 내 삶 속에 기다린다.
명절 끝 날까지도 목마른, 나의 목마름이 주님 안에서 솟아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이길 바라며 나의 마중물을 예수님의 펌프에 붓는다.”
하나님은 영적인 식욕과 목마름으로 나오라고 초청하십니다.
목마름이란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목마를 때 예수님의 초청을 듣습니다. 예수님은 수가성의 사마리아 여인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요한복음 4:13-14)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주는 말씀을 통해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축복을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런 음성을 듣고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28)
또한 이사야서에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이사야 55:1)
사실 우리가 무슨 공로가 있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에 수고하고 땀 흘렸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아갈만한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초청하신 것입니다. 초청하시며 우리에게 오직 한 가지만 있으면 된다고 말씀합니다. 그것이 바로 영적인 식욕과 목마름입니다. 영적인 갈급함만 가지고 나오면 우리의 갈급한 목마름을 다 해갈시켜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근본적인 목마름이 해결되면 그동안 우리가 다른 것 때문에 목말라했던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그런데 오히려 하나님께서 보이는 것, 육체적인 것, 인간적인 것에 대한 목마름을 먼저 해결해 주시면 주님을 믿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다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말을 듣고 받아서 영혼의 만족이 되면 다른 모든 문제들은 내 안에서 해결될 것이다.”
의이신 하나님께 나아올 때 생수의 강이 흘러넘칩니다.
의에 목말라한다고 했을 때 의란 곧 하나님이십니다. 의는 곧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목말라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목말라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하기를 목말라 하라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시편 73:25)
인간은 교만과 불순종으로 기갈과 갈증에 허덕이며 살았습니다. 주님께서 이 모든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서 그의 사랑하는 아들 예수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그분이 십자가에 달리셔서 고통을 당하며 갈급해 하셨습니다. 그분이 갈급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갈급함에 해결책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한복음 6:35)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말씀을 받으면,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오면 내 안에 있는 답답함, 내 안에 있는 배고픔과 목마름이 다 해결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때 예수님이 다시 우리에게 찾아오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내 살을 먹어라 이것이 참된 양식이다 내 피를 마셔라 이것이 참된 음료다.”
빈들에 마른 풀같이 시들은 우리의 영혼이 어떻게 변화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올 때, 하나님의 말씀을 내 가슴으로 받아들일 때, 생수의 강이 넘쳐흐르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엇에 갈급합니까? 무엇에 목말라 하십니까? 예수님을 향해서 우리의 목마름을 아뢰십시오. “주님, 제가 지금 주님을 목말라 합니다. 내 영혼이 주의 말씀으로 목말라 하고 성령으로 목말라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우리 영혼을 만족시키시고 모든 갈급함을 친히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따라가기 보다는 보이는 것, 육체적인 것, 쾌락적인 것에 뭔가 인생의 해결책이 있는 줄 알고 열심히 뒤따라갔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참 생명이시고 참 양식이시고 참 생수이신 주님께 다시 나아가게 하시고 주님으로 만족하며 예수님을 먹고 마시면서 세상이 주지 못하는 기쁨,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안으로 만족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다른 조그만 갈급한 것들을 해결해 나가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마태복음 5: 6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배고픔과 목마름을 느끼는 것은 살아있다는 표시입니다.
체중이 무려 152kg이나 나갔던 사람이 허기가 져서 먹는 것으로 채우면 사라지는 줄 알고 음식을 먹었는데, 어느 날 보니 그것은 육체의 허기가 아니라 영혼의 허기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며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지난 수년 동안 그토록 간절하게 음식으로 채우고자 했던 욕망이 있었습니다. 그 욕망이 사실은 신성하고 보편적인 욕망이라는 사실을 후에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가 욕망에서 느껴지는 배고픔을 오인해서 음식만으로 채우려고 했을 때 그 결과는 과다체중과 악화된 건강뿐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나의 영혼과의 관계 증진을 위해 내 욕망에 반응했을 때, 그 때야 비로소 허기가 채워졌습니다. 이제는 내 삶이 영적으로나 감성적으로 완전히 변화했을 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변했습니다. 내면의 필요에 부응하고, 그 속의 빈 공간을 위로할 때 나는 충만해지고 배부름을 느꼈습니다. 실제로 몸의 체중은 사라졌습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경험하는 배고픔과 목마름은 아직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죽은 자에게는 배고픔이 없고 목마름을 느낄 수도 없습니다. 살아있는 자만이 배고픔을 느끼며 목말라할 줄 압니다. 죽은 자는 안 먹고 안 마셔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있기에 먹고 마셔야 합니다. 시인이었던 칼린 지브란은 이렇게 말합니다.
“욕망은 삶의 절반이다. 그러나 무관심은 죽음의 절반이다.”
우리 안에 욕구가 있다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욕망이 있고, 소원과 갈급함과 배고픔과 목마름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아직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욕망은 삶의 길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무기력해지고 귀찮아지면 그때부터는 죽음의 길을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식욕을 잃어버리고 진수성찬을 앞에 놓아도 밥맛이 당기지 않는 것은 건강이 나빠졌다는 징조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영적인 측면에서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영적인 식욕을 잃는 것은 은혜로부터 멀리 떨어진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를 안 해도 마음이 편안하고 말씀을 읽고 듣지 않아도 갈급한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예배를 안 드려도 마음이 안타깝게 생각되지 않는 것은 영적인 빈곤의 표시입니다. 밥을 안 먹으면 배고픈 것처럼 말씀을 듣지 못하면 우리의 영혼이 안타깝고 갈급한 심정이 될 때 건강한 것입니다.
배고픔과 목마름은 인생을 도전하게 하는 성숙의 비결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배고픔과 목마름을 경험했던 시절이 있습니다. 사실 1950년-60년대에 우리는 육체적인 배고픔을 아주 많이 느꼈습니다. 또한 1960년-70년대에 독재시대를 살면서 민주주의를 그리워하기도 했습니다. 한 시인은 민주주의를 향한 가슴의 열망을 그리며 이런 노래를 했습니다.
신 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을 너를 잊은 지 너무도 오래
오직 한 가닥 있어
타는 가슴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트지 않은 뒷골목이 어딘가
발자국소리 호르락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비명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픈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돌아오는 끌려가는 것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 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과거 민주주의에 대한 타는 목마름을 가졌던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가 이만큼 성장했기에 참으로 감사합니다.
우리는 의를 향한 배고픔과 목마름이 없습니다.
육체적인 배고픔과 목마름을 느끼면 몸의 건강과 성장이 가능해집니다. 그리고 정신적인 배고픔과 목마름을 느끼면 정신적인 세계가 넓어집니다. 영적인 성숙의 깊이가 더 확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마름이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목마름이 있는 인생이야 말로 새로운 미래를 향해서 도전합니다. 그리고 모험을 하게 만드는 것이 목마름을 가진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더 넓은 진리의 세계를 향해서 인간으로 하여금 항해하게 하는 힘의 원동력이 바로 목마름과 배고픔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한두 끼를 먹지 않고 굶으면 배고프다고 아우성을 칩니다. 장사가 잘 안되면 온갖 불만을 터트리며 남의 탓을 합니다. 몸의 건강을 조금 잃어버리면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그러나 삶의 의가 모자란다고 불평하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영혼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 굶주려도 우리는 끄덕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교만해지고 오만해져 하나님의 의에 나아가지 못하고 세상 유혹을 향해 재빨리 변신하려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젊은 사람들은 영적인 갈증과 갈급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갈급함을 육체적인 쾌락을 향해서 방종에 빠지면서 만족감을 얻으려고 합니다. 정열이 사라지는 헛된 육체의 즐거움에 젊음과 시간을 쏟아 붓습니다. 반면 나이든 사람들은 세상과 쉽게 타협하며 세상을 사랑합니다. 더 높은 것을 향해 나아가려 하지 않고 세상의 명예와 짝하면서 그 자리에서 만족하고 멈추어 살아가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연단을 통해 하나님을 향한 갈급함을 주십니다.
갈급함이 모자라면 기다림이 없습니다. 마음속에 타는 목마름이 없으면 새로운 삶에 대한 도전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식욕이 없으면 식욕을 자극하기 위해서 육체의 운동이 필요합니다. 때로는 걷기와 뛰기 운동이 필요합니다. 유산소 운동을 하면 배가 고프듯이 영적인 식욕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인 식욕이 생기려면 훈련과 연습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디모데전서 4:7)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연단시키시기 원하십니다. 스스로 연단하고 갈급하며 배고파하고 목말라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우리 삶을 연단시키기를 원하시는데 그것이 바로 고난입니다. 때로는 가난과 질병입니다. 육체 비만에 빠지면 운동과 다이어트를 통해 살을 빼듯이 영적인 비만에 대한 특효약이 무엇인지 하나님은 잘 알고 계십니다. 그것은 바로 인생에 부딪치는 여러 가지 아픈 사건들입니다. 때로 인생에 실패를 하게하고, 마음의 상처와 좌절과 고통을 느끼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 삶 전체를 뒤흔들어 놓아 인생은 내 소유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의 시간이며 하나님께 받은 선물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 인생이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순간만 열심히 살다가 하나님께 나아가야할 존재임을 가르쳐주시면서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해주십니다.
욕망은 하나님 앞에서의 또 다른 열망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보시면서 우리 영혼만큼은 결코 잃어버릴 수 없다고 생각하시며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이 아닌 육체의 쾌락을 찾습니다. 성적인 욕망을 향해 우리 삶을 쏟아 부으려고 합니다. 필립 얀시는 이런 모습을 보면서 오늘의 시대를 이렇게 평가합니다.
“우리 사회의 성적탐닉을 볼수록, 그런 탐닉 속에 숨겨져 있는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깊은 목마름이 느껴진다.”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목마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작 육체적인 즐거움을 통해서 대신 만족시키려는 것이 이 시대가 가진 모습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정의합니다. “욕망이란 곧 하나님을 향한 깊은 갈증이다.”
인간들은 하나님을 향한 갈증을 만족시키지 못해서 세속적인 욕망으로 풀어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욕망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또 다른 열망입니다. 진정한 만족을 얻기 위한 인간의 몸부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따라가지 않고 세상 것을 따라가면서 중독에 빠집니다. 어떤 사람들은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한 중독에 빠집니다. 먹고 마시는 것을 즐기라고 했지만 그것에 중독 되어서는 안 됩니다. 술과 담배에 대한 중독, 성적인 쾌락에 대한 중독, 좋은 일에 대한 중독도 마찬가지입니다. 중독이 되면 내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중독에 빠진 것이 나를 지배하고 조종합니다. 억압하고 자유가 없어지기 때문에 자율성과 자원하는 마음이 사라집니다.
하나님을 향한 갈급함은 축복입니다.
이런 고통을 당했던 사마리아 여인을 예수님께서 만나 주셨습니다. 수가성에서 예수님께서 만난 여인은 인생을 실패했습니다. 5번 결혼해서 5명의 남편을 가져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남자들에게 버림을 받아 육체적인 배고픔과 갈증이 있었습니다. 영적인 목마름이 있어서 밤잠을 못자며 외로워했던 여인을 예수님께서 만나시면서 목마르지 않는 생수가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십니다. 이런 목마름은 이 여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이 여인과 마찬가지로 목마름과 외로움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해결되는 부분이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있습니다. 시편에서 시인이 이런 말을 합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편 42:1)
갈급함이 있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축복입니다. 그리움이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그리움이 있는 사람에게만 기다림이 있습니다. 영혼에 목마름이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목마름이 있는 사람만 하나님이 주신 새로운 미래를 향해서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작자미상의 이런 글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타는 목마름이 있다. 기업가에게 돈을 향한 목마름이 있듯이, 정치가에게 권력을 향한 목마름이 있듯이, 스포츠 인에게 파워나 기록갱신을 향한 목마름이 있듯이, 나에게는 영적 목마름이 있다.
마중물 한 바가지, 기다리는 펌프의 목마름을 생각하며, 나의 마중물을 예수님의 펌프에 붓는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목이 마르신 것을 기억하며, 모든 피와 물을 쏟아 버리셨기에 목이 타셨던 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딱 일곱 마디 남기신 그 유언을 되새김한다.
아침 묵상 시간을 부으며 마중물처럼 예수님의 펌프에 붓는다.
조금한 물질을 마음에 담아 바치며 나의 마중물을 펌프에 붓는다.
예배를 올리며 나의 마중물을 예수님의 펌프에 붓는다.
나의 존재란 모아봐야 한 바가지의 물에 불과하지만 주님의 펌프에 부으며 주님 안에 넘치는 영원한 성수를 내 삶 속에 기다린다.
명절 끝 날까지도 목마른, 나의 목마름이 주님 안에서 솟아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이길 바라며 나의 마중물을 예수님의 펌프에 붓는다.”
하나님은 영적인 식욕과 목마름으로 나오라고 초청하십니다.
목마름이란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목마를 때 예수님의 초청을 듣습니다. 예수님은 수가성의 사마리아 여인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요한복음 4:13-14)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주는 말씀을 통해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축복을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런 음성을 듣고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28)
또한 이사야서에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이사야 55:1)
사실 우리가 무슨 공로가 있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에 수고하고 땀 흘렸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아갈만한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초청하신 것입니다. 초청하시며 우리에게 오직 한 가지만 있으면 된다고 말씀합니다. 그것이 바로 영적인 식욕과 목마름입니다. 영적인 갈급함만 가지고 나오면 우리의 갈급한 목마름을 다 해갈시켜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근본적인 목마름이 해결되면 그동안 우리가 다른 것 때문에 목말라했던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그런데 오히려 하나님께서 보이는 것, 육체적인 것, 인간적인 것에 대한 목마름을 먼저 해결해 주시면 주님을 믿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다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말을 듣고 받아서 영혼의 만족이 되면 다른 모든 문제들은 내 안에서 해결될 것이다.”
의이신 하나님께 나아올 때 생수의 강이 흘러넘칩니다.
의에 목말라한다고 했을 때 의란 곧 하나님이십니다. 의는 곧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목말라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목말라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하기를 목말라 하라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시편 73:25)
인간은 교만과 불순종으로 기갈과 갈증에 허덕이며 살았습니다. 주님께서 이 모든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서 그의 사랑하는 아들 예수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그분이 십자가에 달리셔서 고통을 당하며 갈급해 하셨습니다. 그분이 갈급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갈급함에 해결책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한복음 6:35)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말씀을 받으면,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오면 내 안에 있는 답답함, 내 안에 있는 배고픔과 목마름이 다 해결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때 예수님이 다시 우리에게 찾아오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내 살을 먹어라 이것이 참된 양식이다 내 피를 마셔라 이것이 참된 음료다.”
빈들에 마른 풀같이 시들은 우리의 영혼이 어떻게 변화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올 때, 하나님의 말씀을 내 가슴으로 받아들일 때, 생수의 강이 넘쳐흐르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엇에 갈급합니까? 무엇에 목말라 하십니까? 예수님을 향해서 우리의 목마름을 아뢰십시오. “주님, 제가 지금 주님을 목말라 합니다. 내 영혼이 주의 말씀으로 목말라 하고 성령으로 목말라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우리 영혼을 만족시키시고 모든 갈급함을 친히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따라가기 보다는 보이는 것, 육체적인 것, 쾌락적인 것에 뭔가 인생의 해결책이 있는 줄 알고 열심히 뒤따라갔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참 생명이시고 참 양식이시고 참 생수이신 주님께 다시 나아가게 하시고 주님으로 만족하며 예수님을 먹고 마시면서 세상이 주지 못하는 기쁨,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안으로 만족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다른 조그만 갈급한 것들을 해결해 나가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