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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젠도르프식 성경읽기라고 아십니까?
로마서 1장을 읽을 때마다 제게 일어난 사건이 늘 생각납니다. 로마서는 저에게 삶의 전환을 가져다 준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저에게 사상적인 충격까지 주었습니다. 저로 하여금 신학을 하게 했고, 목사가 되게 했고, 목회를 하는 자리까지 인도했습니다.
정말 신학을 공부해야 할까 고민하던 때에 많은 분들이 ‘목사의 길은 쉽지 않다. 목회의 길은 힘들고 어렵다. 꼭 그 길을 가야만 하는지 잘 생각해 보라’는 권면을 하셨습니다. 그러한 권면들로 인해, 신학을 공부하고는 싶었지만 동시에 두려움도 많이 생겼었습니다. 당시 김준곤 목사님이 대표로 계시던 선교단체 CCC(대학생 선교회)에서 저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새로운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는 것이 인생 최대의 축복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제 삶 전체를 주님께 드리려고 할 때마다 끊임없는 주저함이 제 안에 있었습니다.
대학교 4학년이 되기 바로 직전의 겨울이었습니다. 대학교를 졸업하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사실 그것은 3년 동안 지속된 기도제목이었습니다. 그날도 밤늦게까지 기도하다가 마음으로부터 울부짖었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가야 할 길을 가르쳐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제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습니다. 책을 펴서 읽으라는 어린아이의 노래를 들으면서 성경책을 폈던 어거스틴입니다. 그때 어거스틴이 읽은 말씀은 로마서 13장 13~14절이었습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로마서 13:13)
이 말씀은 그로 하여금 부끄럽고 타락한 삶을 청산하고 신앙의 자리에 들어서게 했습니다. 자신의 현실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옛 삶을 벗어버리고 새 삶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 어거스틴이 생각나자 저도 기도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인 성경을 펴서 읽겠습니다. 제게 가르쳐 주시옵소서.”
이런 식의 성경 읽기를 ‘진젠도르프식 성경읽기’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성경읽기에는 위험이 뒤따릅니다. 어쩌면 이런 식의 성경읽기는 평생에 한 번 정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위험이 있기에 그럴까요? 성경책을 마치 주술책처럼 여기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과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매일 아침 이런 식으로 성경을 읽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오늘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라고 여기며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성경을 폈는데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구절이 ‘가룟 유다가 목매달아 죽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어 이러면 안 되는데?’ 그는 두 번째로 성경을 폈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이런 구절이 눈에 띄었습니다. ‘너도 가서 그렇게 행하라.’ 더 심란한 마음에 ‘모든 것은 삼세번이지!’ 하고는 한 번 더 펴서 읽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펼쳤더니 이번에는 이 구절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어찌하여 머뭇머뭇 거리느냐 속히 행하라.’
이 이야기는 부적처럼 성경을 읽는 것을 거부하라는 교훈을 주기 위한 이야기일 테지만, 단순히 재미로만 넘길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하고 또 기도했는데, 말씀을 읽고 또 읽었는데, 간절히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이런 성경읽기를 해 볼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 드린 대로 자주가 아니라 기도하고 기도하다가 평생에 한 번 정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응답해 주셨습니다.
저도 지금까지 단 한 번 경험한 일입니다. 사십여 년 전, 대학 졸업을 앞두고 어떤 길로 가야 할 것인가를 하나님께 여쭐 때 그리했습니다. 그때가 새벽 2~3시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저도 성경을 펴서 주님 말씀을 듣겠습니다’라고 기도하며 성경을 폈습니다. 놀랍게도 사도행전 28장과 로마서 1장 말씀이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심장이 멎는 것 같은 충격을 느꼈습니다.
로마서 1장 1절 말씀은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로마서 1:1)
저는 바울 대신 제 이름을 넣고 그 말씀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김지철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제 기도의 응답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렇게 로마서 1장을 읽어 내려가니 오늘 본문 말씀인 16절 말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 (로마서 1:16)
‘그래! 복음을 부끄러워하거나 창피하게 여기지 않겠다. 나는 내가 믿고 있는 복음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이 되리라!’ 결심하며 옆에 있는 사도행전 28장을 읽어 내려갔습니다. 마지막 구절 30절과 31절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사도행전 28:30~31)
그때 제 마음에 한 가지 굳은 결심이 생겼습니다. ‘담대하게 거침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되리라. 평생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는 전도자가 되리라.’ 제가 신학을 시작했던 이유는 목사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신학교 교수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복음을 바르게 전하는 전도자가 되고 싶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아마추어 전도자가 아니라, 누군가 “복음이 무엇이냐? 왜 예수를 믿어야 되느냐?” 물었을 때 즉시 내 삶 전체를 걸고 전할 수 있는 전문적인 전도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제 삶의 가장 우선적인 목표였습니다.
사십여 년이 지났지만 말씀을 전할 때마다 스스로에게 묻는 것이 그것입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자랑스러운가? 내가 믿고 있는 복음에 대해 누구를 향해서도 이것이 진리요, 생명이요, 구원의 역사를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사건인 것을 말하고 있는가? 어떻게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나 같은 사람을 통해서 선포될 수 있을까?’ 그것은 질문이자 제 마음 속 소원이기도 합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믿음을 전제로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바울은 이 복음의 내용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1:17)
하나님의 의가 복음 안에 나타났는데 이것을 믿어야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게 무슨 뜻일까요? 이것은 뒤집어서 이야기해도 됩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가 곧 의인이라는 것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고, 믿음으로 살면 의인이 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이 없으면 의인이 아닌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사람이 의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 우리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앞에 나오는 사람들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느냐? 그 믿음으로 나오면 내가 너를 받아주겠다.”
하지만 사실 바울은 이 놀라운 사실을 처음에는 알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는 복음을 부끄럽고 잘못된 것이라고 여겼다고 고백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 (로마서 1:16)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뒤집어보면, 한때 복음을 부끄러워한 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과거에는 복음을 부끄러워했지만 지금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과거에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잘못되었다고 공격했지만 이제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자신의 자랑이 되었다는 선포인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복음을 향한 오해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복음을 처음 들었을 때, 의심했습니다. 그것은 사람을 현혹하는 이단사상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믿는 사람들을 공격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한 중심에는 무엇이 있었을까요? 십자가에 죽은 예수를 그리스도, 메시아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십자가는 누추하고, 비참하고, 죄악이 가득한 곳인데 그곳에 있었던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한 것입니다. 그것은 신성모독이고, 유대인의 자존심을 훼손하는 것이며, 율법에 대한 모독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 마치 공짜의식을 부추기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믿음 때문에 의롭게 되고, 믿음 때문에 구원을 받는다니, 바리새인이자 율법주의자였던 바울에게 이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궤변이었습니다. ‘아니 세상에 열심히 노력하고 땀 흘리며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선함을 지키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이건 그런 사람들에 대한 모욕이다! 어떻게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 지금도 선하게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 세상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쉽게 들어오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이것입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그런 값싼 종교가 어디 있느냐?’
게다가 바울에게는 이러한 복음이 인간의 자율성을 포기하라는 협박처럼 들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의롭게 되고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인간이 가진 다른 모든 가능성을 무시하는 것 같았습니다. 매우 나약한 생각으로 여겨졌습니다. ‘인생에서 인간이 가진 책임과 역할이 얼마나 많은데 그것들을 단순화시키는 잘못된 사상이 아닌가?’ 그는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도 이것에 대한 질문이 있습니다. 복잡다단한 인간사를 ‘믿음’이라는 한 마디로 단순화시키는 기독교에 대한 공격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어떻게 자신이 부끄럽게 여기고 공격했던 복음을 자랑스러워하고 감사하게 된 것일까요? 어떤 이유로 복음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된 것일까요?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는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다고 선포합니다. 이 능력이 무엇을 통해 나타났을까요? 바로 ‘믿음’입니다. 바울이 자랑스러워하는 이유도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그 믿음을 가졌기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부끄러움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바울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여겼던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로,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로 다가오심을 경험했습니다. 바울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때까지 바울은, ‘땅은 땅이다. 하늘은 하늘이다’며 모든 것을 분리시켜 왔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과 땅이 만나는 역동적인 경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곧 인간의 죄악과 하나님의 용서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 속에서 만나는 경험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순간의 존재인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이 들어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그는 고린도전서에서 기록하듯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선포합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죄악과 하나님의 거룩함이라는 가장 극단의 것들을 한곳으로 끌어들입니다. 인간의 순간성과 하나님의 영원성을 끌어들입니다. 인간이 가진 삶의 무의미성과 하나님이 갖고 계신 의미성을 끌어들이는 것이 기독교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 속에서는 땅도 있고 하늘도 있습니다. 십자가가 위대한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동안 바울은 복음을 값싼 은혜로 여겼었습니다. 하지만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보면서 그것이 값비싼 은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값비싼’이라는 표현은 사실 은혜라는 말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은혜는 공짜이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값비싼’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서 이 땅에 내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값비싼 예수로 말미암은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깨닫게 되면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알게 됩니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복음 중에 복음, 기쁜 소식 중에 기쁜 소식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확인하게 된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인간의 가능성을 무시한다는 질문에 대해서도 답을 얻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복음을 깨달으면서, 오히려 인간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 믿음을 통해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인간이 만들어 놓은 수많은 차별성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가진 자나 못 가진 자나 누구나 믿음을 통해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즉 인간이 만들어 놓은 수많은 장애물을 다 깨뜨려버리는 것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지식으로, 재물로, 권력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의 믿음으로 내 앞에 나올 수 있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복음입니다.
좋은 전자 제품을 갖고 계십니까? 아무리 좋은 제품이라고 해도 전원이 꺼져 있으면 작동이 되지 않습니다. 먼저 전원의 스위치를 켜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안 됩니다. 코드가 한국 전력의 공급원과 연결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스스로가 괜찮은 존재라고 생각하십니까? 맞습니다. 그러나 나를 만드신 하나님, 나를 향한 계획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과 연결이 되어야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내 인생의 목표가 무엇인지,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 앞에서 기쁨을 누리며 살 수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나를 만드신 하나님과 연결되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이 믿음,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축복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선언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가 바로 의인이라는 뜻입니다. 믿음이란 ‘나’라는 좁고 작은 자아(ego)에서 하나님이라는 크고 넓은 하나님의 자아로 우리를 확장시키는 능력입니다. 믿음이란 삶을 예찬하는 진정한 삶의 태도이자 방식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믿음이 있음을 자랑하며 믿음으로 살아갑시다.
절망의 시대일수록 필요한 것이 믿음입니다. 지푸라기조차 찾을 수 없는 망망대해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희망의 끈을 붙잡게 하기 때문입니다. 고독의 시대일수록 필요한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내 옆의 소중한 이웃을 만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불신의 시대일수록 필요한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바라볼 때 진정한 신뢰의 공동체를 삶 가운데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값싼 공짜의식을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값비싼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삶에 대한 모욕이 아닙니다. 삶에 대한 감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믿음이 있음을 기뻐하고 자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역사, 새로운 가능성의 역사, 하나님 안에 들어가는 임마누엘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인이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가 우선적으로 여기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선물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입니다. 이 축복을 날마다 기억하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로마서 1: 16 ~ 17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진젠도르프식 성경읽기라고 아십니까?
로마서 1장을 읽을 때마다 제게 일어난 사건이 늘 생각납니다. 로마서는 저에게 삶의 전환을 가져다 준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저에게 사상적인 충격까지 주었습니다. 저로 하여금 신학을 하게 했고, 목사가 되게 했고, 목회를 하는 자리까지 인도했습니다.
정말 신학을 공부해야 할까 고민하던 때에 많은 분들이 ‘목사의 길은 쉽지 않다. 목회의 길은 힘들고 어렵다. 꼭 그 길을 가야만 하는지 잘 생각해 보라’는 권면을 하셨습니다. 그러한 권면들로 인해, 신학을 공부하고는 싶었지만 동시에 두려움도 많이 생겼었습니다. 당시 김준곤 목사님이 대표로 계시던 선교단체 CCC(대학생 선교회)에서 저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새로운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는 것이 인생 최대의 축복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제 삶 전체를 주님께 드리려고 할 때마다 끊임없는 주저함이 제 안에 있었습니다.
대학교 4학년이 되기 바로 직전의 겨울이었습니다. 대학교를 졸업하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사실 그것은 3년 동안 지속된 기도제목이었습니다. 그날도 밤늦게까지 기도하다가 마음으로부터 울부짖었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가야 할 길을 가르쳐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제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습니다. 책을 펴서 읽으라는 어린아이의 노래를 들으면서 성경책을 폈던 어거스틴입니다. 그때 어거스틴이 읽은 말씀은 로마서 13장 13~14절이었습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로마서 13:13)
이 말씀은 그로 하여금 부끄럽고 타락한 삶을 청산하고 신앙의 자리에 들어서게 했습니다. 자신의 현실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옛 삶을 벗어버리고 새 삶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 어거스틴이 생각나자 저도 기도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인 성경을 펴서 읽겠습니다. 제게 가르쳐 주시옵소서.”
이런 식의 성경 읽기를 ‘진젠도르프식 성경읽기’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성경읽기에는 위험이 뒤따릅니다. 어쩌면 이런 식의 성경읽기는 평생에 한 번 정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위험이 있기에 그럴까요? 성경책을 마치 주술책처럼 여기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과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매일 아침 이런 식으로 성경을 읽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오늘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라고 여기며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성경을 폈는데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구절이 ‘가룟 유다가 목매달아 죽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어 이러면 안 되는데?’ 그는 두 번째로 성경을 폈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이런 구절이 눈에 띄었습니다. ‘너도 가서 그렇게 행하라.’ 더 심란한 마음에 ‘모든 것은 삼세번이지!’ 하고는 한 번 더 펴서 읽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펼쳤더니 이번에는 이 구절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어찌하여 머뭇머뭇 거리느냐 속히 행하라.’
이 이야기는 부적처럼 성경을 읽는 것을 거부하라는 교훈을 주기 위한 이야기일 테지만, 단순히 재미로만 넘길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하고 또 기도했는데, 말씀을 읽고 또 읽었는데, 간절히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이런 성경읽기를 해 볼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 드린 대로 자주가 아니라 기도하고 기도하다가 평생에 한 번 정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응답해 주셨습니다.
저도 지금까지 단 한 번 경험한 일입니다. 사십여 년 전, 대학 졸업을 앞두고 어떤 길로 가야 할 것인가를 하나님께 여쭐 때 그리했습니다. 그때가 새벽 2~3시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저도 성경을 펴서 주님 말씀을 듣겠습니다’라고 기도하며 성경을 폈습니다. 놀랍게도 사도행전 28장과 로마서 1장 말씀이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심장이 멎는 것 같은 충격을 느꼈습니다.
로마서 1장 1절 말씀은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로마서 1:1)
저는 바울 대신 제 이름을 넣고 그 말씀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김지철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제 기도의 응답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렇게 로마서 1장을 읽어 내려가니 오늘 본문 말씀인 16절 말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 (로마서 1:16)
‘그래! 복음을 부끄러워하거나 창피하게 여기지 않겠다. 나는 내가 믿고 있는 복음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이 되리라!’ 결심하며 옆에 있는 사도행전 28장을 읽어 내려갔습니다. 마지막 구절 30절과 31절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사도행전 28:30~31)
그때 제 마음에 한 가지 굳은 결심이 생겼습니다. ‘담대하게 거침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되리라. 평생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는 전도자가 되리라.’ 제가 신학을 시작했던 이유는 목사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신학교 교수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복음을 바르게 전하는 전도자가 되고 싶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아마추어 전도자가 아니라, 누군가 “복음이 무엇이냐? 왜 예수를 믿어야 되느냐?” 물었을 때 즉시 내 삶 전체를 걸고 전할 수 있는 전문적인 전도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제 삶의 가장 우선적인 목표였습니다.
사십여 년이 지났지만 말씀을 전할 때마다 스스로에게 묻는 것이 그것입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자랑스러운가? 내가 믿고 있는 복음에 대해 누구를 향해서도 이것이 진리요, 생명이요, 구원의 역사를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사건인 것을 말하고 있는가? 어떻게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나 같은 사람을 통해서 선포될 수 있을까?’ 그것은 질문이자 제 마음 속 소원이기도 합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믿음을 전제로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바울은 이 복음의 내용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1:17)
하나님의 의가 복음 안에 나타났는데 이것을 믿어야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게 무슨 뜻일까요? 이것은 뒤집어서 이야기해도 됩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가 곧 의인이라는 것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고, 믿음으로 살면 의인이 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이 없으면 의인이 아닌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사람이 의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 우리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앞에 나오는 사람들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느냐? 그 믿음으로 나오면 내가 너를 받아주겠다.”
하지만 사실 바울은 이 놀라운 사실을 처음에는 알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는 복음을 부끄럽고 잘못된 것이라고 여겼다고 고백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 (로마서 1:16)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뒤집어보면, 한때 복음을 부끄러워한 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과거에는 복음을 부끄러워했지만 지금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과거에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잘못되었다고 공격했지만 이제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자신의 자랑이 되었다는 선포인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복음을 향한 오해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복음을 처음 들었을 때, 의심했습니다. 그것은 사람을 현혹하는 이단사상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믿는 사람들을 공격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한 중심에는 무엇이 있었을까요? 십자가에 죽은 예수를 그리스도, 메시아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십자가는 누추하고, 비참하고, 죄악이 가득한 곳인데 그곳에 있었던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한 것입니다. 그것은 신성모독이고, 유대인의 자존심을 훼손하는 것이며, 율법에 대한 모독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 마치 공짜의식을 부추기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믿음 때문에 의롭게 되고, 믿음 때문에 구원을 받는다니, 바리새인이자 율법주의자였던 바울에게 이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궤변이었습니다. ‘아니 세상에 열심히 노력하고 땀 흘리며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선함을 지키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이건 그런 사람들에 대한 모욕이다! 어떻게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 지금도 선하게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 세상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쉽게 들어오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이것입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그런 값싼 종교가 어디 있느냐?’
게다가 바울에게는 이러한 복음이 인간의 자율성을 포기하라는 협박처럼 들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의롭게 되고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인간이 가진 다른 모든 가능성을 무시하는 것 같았습니다. 매우 나약한 생각으로 여겨졌습니다. ‘인생에서 인간이 가진 책임과 역할이 얼마나 많은데 그것들을 단순화시키는 잘못된 사상이 아닌가?’ 그는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도 이것에 대한 질문이 있습니다. 복잡다단한 인간사를 ‘믿음’이라는 한 마디로 단순화시키는 기독교에 대한 공격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어떻게 자신이 부끄럽게 여기고 공격했던 복음을 자랑스러워하고 감사하게 된 것일까요? 어떤 이유로 복음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된 것일까요?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는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다고 선포합니다. 이 능력이 무엇을 통해 나타났을까요? 바로 ‘믿음’입니다. 바울이 자랑스러워하는 이유도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그 믿음을 가졌기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부끄러움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바울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여겼던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로,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로 다가오심을 경험했습니다. 바울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때까지 바울은, ‘땅은 땅이다. 하늘은 하늘이다’며 모든 것을 분리시켜 왔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과 땅이 만나는 역동적인 경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곧 인간의 죄악과 하나님의 용서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 속에서 만나는 경험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순간의 존재인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이 들어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그는 고린도전서에서 기록하듯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선포합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죄악과 하나님의 거룩함이라는 가장 극단의 것들을 한곳으로 끌어들입니다. 인간의 순간성과 하나님의 영원성을 끌어들입니다. 인간이 가진 삶의 무의미성과 하나님이 갖고 계신 의미성을 끌어들이는 것이 기독교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 속에서는 땅도 있고 하늘도 있습니다. 십자가가 위대한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동안 바울은 복음을 값싼 은혜로 여겼었습니다. 하지만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보면서 그것이 값비싼 은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값비싼’이라는 표현은 사실 은혜라는 말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은혜는 공짜이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값비싼’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서 이 땅에 내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값비싼 예수로 말미암은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깨닫게 되면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알게 됩니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복음 중에 복음, 기쁜 소식 중에 기쁜 소식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확인하게 된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인간의 가능성을 무시한다는 질문에 대해서도 답을 얻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복음을 깨달으면서, 오히려 인간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 믿음을 통해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인간이 만들어 놓은 수많은 차별성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가진 자나 못 가진 자나 누구나 믿음을 통해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즉 인간이 만들어 놓은 수많은 장애물을 다 깨뜨려버리는 것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지식으로, 재물로, 권력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의 믿음으로 내 앞에 나올 수 있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복음입니다.
좋은 전자 제품을 갖고 계십니까? 아무리 좋은 제품이라고 해도 전원이 꺼져 있으면 작동이 되지 않습니다. 먼저 전원의 스위치를 켜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안 됩니다. 코드가 한국 전력의 공급원과 연결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스스로가 괜찮은 존재라고 생각하십니까? 맞습니다. 그러나 나를 만드신 하나님, 나를 향한 계획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과 연결이 되어야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내 인생의 목표가 무엇인지,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 앞에서 기쁨을 누리며 살 수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나를 만드신 하나님과 연결되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이 믿음,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축복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선언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가 바로 의인이라는 뜻입니다. 믿음이란 ‘나’라는 좁고 작은 자아(ego)에서 하나님이라는 크고 넓은 하나님의 자아로 우리를 확장시키는 능력입니다. 믿음이란 삶을 예찬하는 진정한 삶의 태도이자 방식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믿음이 있음을 자랑하며 믿음으로 살아갑시다.
절망의 시대일수록 필요한 것이 믿음입니다. 지푸라기조차 찾을 수 없는 망망대해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희망의 끈을 붙잡게 하기 때문입니다. 고독의 시대일수록 필요한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내 옆의 소중한 이웃을 만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불신의 시대일수록 필요한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바라볼 때 진정한 신뢰의 공동체를 삶 가운데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값싼 공짜의식을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값비싼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삶에 대한 모욕이 아닙니다. 삶에 대한 감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믿음이 있음을 기뻐하고 자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역사, 새로운 가능성의 역사, 하나님 안에 들어가는 임마누엘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인이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가 우선적으로 여기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선물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입니다. 이 축복을 날마다 기억하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