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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올로기인가? 신앙인가? : 시몬 – 예수님의 제자들 12 –

사도행전 1: 12 ~ 14

김지철 목사

2014.10.19

정치이데올로기에 빠지면 유연성을 잃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시몬이라는 자가 있습니다. 베드로의 이름도 시몬이었지만, 오늘 말씀드리려는 시몬은 열심당원이었던 시몬입니다. 셀롯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열심당원들은 당시 로마 제국에 격렬하게 저항했던 일종의 전사들이었고, 투쟁가들이었으며, 애국자들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주로 모이던 곳이 갈릴리 지역이었기에 때로 갈릴리가 폭동과 반란의 근거지로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이런 정치적인 이데올로기에 매몰되었던 열심당원 시몬이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을까요? 그것도 잠깐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3년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도 예수님의 제자직을 감당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요? 우리가 신비하게 생각해 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데올로기에 빠지게 되면 그렇게 되기란 쉽지 않습니다. 특별히 정치이데올로기는 스스로를 폐쇄하는 구조 속에 사람을 집어넣습니다. 물론, ‘이데올로기’라는 말 자체가 나쁜 의미는 아닙니다. 생각을 뜻하는 이데아(idea)와 논리를 뜻하는 로고스(logos)의 합성어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신념의 체계, 사상의 체계 또는 이념 등으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이 말이 최근에는 긍정적인 의미보다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정치이데올로기가 발생시키는 두 개의 문제 때문입니다.
첫 번째 문제는 폐쇄적인 순환 구조를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합니다. 또 수단이 목적을 왜곡합니다. 이것이 반복되면서 자기 폐쇄성 속에 스스로를 가두게 됩니다. 두 번째 문제는 거짓말과 허위의식을 양산한다는 것입니다. 이데올로기 속에 한 번 들어가면, 거기서는 비판을 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비판하는 순간, 도태될 만큼의 엄청난 위협을 받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짓을 신처럼 숭배하는 우상의 위험성이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다른 어떤 이데올로기보다도 정치이데올로기 속에 이것이 엄연히 상존한다고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정치이데올로기의 문제는 폐쇄성과 거짓말입니다.

러시아에서 피의 혁명을 이끌었던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Lenin)은 무섭고 격렬하게 공산당 운동을 만들어 낸 인물입니다. 그가 했던 유명한 말 중 하나가 “진실은 총구멍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공산주의의 이 프롤레타리아 혁명(proletarian revolution)은 폭력적으로 역사를 변혁시키려고 애를 썼습니다. 총을 가진 자가 진실을 가진 자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가 1920년에 행한 연설이 있습니다. 아주 무섭고, 동시에 비열한 연설 중에 하나입니다. 다음은 그의 말입니다.
“우리는 도덕이란, ‘낡은 착취 사회를 타파하고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중심으로 모든 노동자를 결속시키는 일에 기여하는 것, 새로운 공산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라 규정한다. 공산주의자들은 어떤 희생이라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며 필요하다면 내용을 불문하고 모든 지혜와 책략과 술책에 호소하고 불법적인 방법을 사용하고 사실을 은폐 또는 왜곡시킬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가 말하는 ‘도덕’을 위해서는 목숨도 내놓아야 하며, 모든 술책과 지략을 동원하고, 불법의 행함과 거짓말, 왜곡, 은폐가 다 괜찮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산주의 운동에서 가장 위험한 것이 폐쇄성이고 거짓말입니다. 거짓말을 해도 목표를 위해서였다고 하면 전혀 양심에 가책을 받지 않는 위험한 인간을 만들어 냅니다. 바로 이 두 가지, 폐쇄성과 거짓말이 인류 역사상 엄청난 피의 역사, 투쟁의 역사를 만들어 냈던 것입니다.
북한은 이미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넘어서서 한 사람을 우상화 하고 있습니다. 최악의 독재 파시즘(fascism)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개방성이 없습니다. 비판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진실성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거짓말을 해도 괜찮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인간의 존엄성이 파괴된 정권, 이것은 반신앙적이고 반기독교적이며 거짓된 우상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과 강도는 다르겠지만, 이러한 정치이데올로기적인 모습은 한국의 정치권에도 깊숙이 스며들어 와 있습니다. 대한민국 백성은 어떤 백성입니까? 일본제국의 억압 속에서 고통을 받다가 해방되었습니다. 그리고 해방된 다음, 우익과 좌익의 격렬한 싸움이 있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6.25전쟁이라는 민족상잔의 슬픈 과거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 때문에 우리는 좌익, 우익이라는 말에 긴장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색깔론’으로 시비를 거는 것은 급진적 진보주의자나 급진적 보수주의자나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상대방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정치이데올로기를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정말로 상처받고 수난 당하고 고통 받으면서 정치이데올로기에 관여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민주화에 헌신하면서 독재에 저항했던 사람들, 가난한 자들의 편에 섰던 사람들, 소외된 외로운 사람들을 도왔던 사람들, 돈이 우상이 된 왜곡된 자본주의의 부익부빈익빈에 저항했던 사람들, 있는 자들의 횡포와 권력을 가진 자들의 억압에 도전했던 사람들이 그들입니다. 그중에는 ‘연약한 사람들 편에 서는 것이 정의’라고 외치며 급진적인 정치이데올로기에 들어가게 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는 그 반대로, 공산주의의 학정에 못 이겨서 남쪽으로 내려온 사람들, ‘공산당’ 하면 치가 떨릴 정도로 고난을 경험한 사람들, 지금도 거짓말을 일삼고 협박하는 북한 정권을 보며 한탄하는 사람들, 인권이 매몰된 상황을 보며 마음 아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중에는 그 가슴 아픔으로 반공 이데올로기 주의자가 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좌파나 이런 우파는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사실 존경받을 만한 사람들입니다. 왜입니까? 적어도 이런 분들은 자기 삶의 진정성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자신이 경험한 것이 한쪽은 이쪽이고 다른 한쪽은 저쪽인 차이가 있을 뿐, 모두 자신의 아픔을 가지고 온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정치적 야욕을 위해서, 정권을 차지하기 위해서 정치이데올로기를 마구 양산해 내는 집단이 있습니다. 북한의 파시즘적인 독재 정권에 대해서 침묵을 지키면서도, 대한민국 사회에 끊임없는 갈등을 야기시키는 집단이 있습니다. 극보수를 외치며 상대방을 정죄하면서 정치적인 자리에 오르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이들로 인해 우리 사회는 너무 빨리 좌파와 우파로 구분되고 있습니다. “내 말 안 들으면 넌 좌파야.”, “내 말 안 들으면 넌 우파야.”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사회의 갈등이 증폭되는 것으로 먹고 살려는 사람들입니다. 일종의 정치모리배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영적 지도자들까지 권력자와 야합하면서 부화뇌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아픔이며 고통입니다.

예수님의 시대에도 정치이데올로기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2000년 전, 예수님의 시대는 어떠했을까요? 예수님의 시대에도 정치·종교·문화적인 이데올로기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중심이라고 보면, 그들 속에도 좌파적 사고와 우파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선 그 시대의 상황을 살펴보면, 예수님의 등장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좌파는 이 세상에 대해서 개혁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쿰란파는 “세속이 너무 타락해서 이곳에 살 수 없다!” 하며 외딴 수도원처럼 자기들만의 세계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려고 고대했던, 일종의 세속 도피주의적인 집단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주 극단적이었습니다. 또 열심당이 있습니다. 이들은 세속은 타락했고, 로마 정권의 억압은 강하니 “로마정권의 힘을 힘으로 물리치겠다!” 했던 변혁의 집단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폭력적인 행사를 감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반대쪽에 바리새파가 있습니다. 이들은 이중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만 율법을 잘 지키니, 나만 옳지!’ 하며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며 살아가는 자들이었습니다. 사두개파도 있습니다. 그들은 미래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보다는 현실이 중요했습니다. 철저하게 현실적인 종교인이 되다 보니, 돈도 필요했고 권력도 필요했습니다. 일종의 종교 정치인들이 사두개파에 속해 있었습니다.
바로 이 중심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는 좌파적인 사고를 갖고 있는 사람도 있고, 우파적인 사고를 갖고 있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보통 때 같으면 이들은 서로 만날 수 없는 인물들이었습니다. 당시에 좌파라고 알려졌던 쿰란파 중에 세례 요한이 가담되어 있었는데, 바로 그의 제자 중에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이 있습니다. 안드레입니다. 아마 요한도 그럴 것입니다. 이들은 엄격한 금욕과 자기 절제를 지키고 있다가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실 때 예수님께 다가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과격한 좌파도 있었습니다. 바로 시몬입니다. 또한 가룟 유다도 열심당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갈릴리 출신이었던 어부 베드로도 여기에 속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파는 누구였을까요? 후에 예수님의 제자가 된 바리새인 니고데모입니다. 또 바리새인이었던 사도 바울도 우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사두개적인 특성을 갖고 있던 자로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예수님의 시신을 자신의 무덤 속에 놓았던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있습니다. 그는 산헤드린 유대 공인회의 의원일 뿐만 아니라 당대 총독인 빌라도와 안면이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부탁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 중에는 우파도 좌파도 함께 있었습니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이들은 서로를 적대시하기에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당시 예수님의 제자였던 마태는 로마 제국의 앞잡이며 하수인처럼 여겨져 비난받았던 인물이었습니다. 반대로 열심당 시몬은 로마제국을 향해서 미움과 분노로 저항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안에서 같이 만났습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도대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기에 이렇게 생각과 삶의 태도가 다른 두 부류가 함께 만날 수 있었던 것일까요?
특별히 오늘은 열심당원이던 시몬이 어떻게 예수님의 공동체에 가입하게 된 것인지 물으려고 합니다. 그는 왜 이 안에 들어왔을까요? 그리고 왜 잠깐 머물다가 떠나지 않았을까요? 마지막 순간에 그는 어떤 인물로 바뀌어졌을까요?

예수님은 변혁을 꿈꾸셨습니다.

예수님의 삶 속에서 그는 열심당적인 어떤 요소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이 복음을 믿으라.” 지금 우리는 이것을 당연하게 여기지만, 당대에 이것은 정치적인 선포이기도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시대는 헤롯 왕이 다스리는 시대였습니다. 카이사 황제의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말씀하십니다. “황제가 주인이 아니다. 이 나라의 주인이 헤롯 왕이 아니다. 이 나라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친히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왔다.” 열심당 시몬은 이것을 정치적 저항의 표시로써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마지막 십자가도 정치적 형틀이었던 것을 기억해 보십시오.
또한 그는 예수님의 이런 말씀을 들으며 환호했을지도 모릅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마태복음 10:34)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이 땅을 변화시키고 역전시켜서 뭔가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라는 것이었으니 말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성전을 정화시키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은 종교의 중심지였습니다. 거기에서 대제사장들이 예루살렘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먹이사슬처럼 장사하는 사람들을 끌어들였습니다. 예루살렘에 들어가게 될 때 환전할 수 있게 하였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서 제사를 드리려고 할 때 양이나 염소, 비둘기를 살 수 있게 주위에 장사하는 사람들을 두었습니다. 그들은 비싸게 짐승들을 팔면서 이득을 취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득을 제사장들, 즉 예루살렘의 영적 지도자들과 함께 나누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을 때, 이 못된 꼴을 보게 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환전하는 사람들, 짐승을 파는 사람들의 책상을 뒤집어 엎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마태복음 21:13)

“내 집에 들어오면 기도하고 말씀 보고 예배드려야 되는데, 너희가 여기에서 장사를 하는구나. 이 자리를 강도의 소굴로 만드는구나!” 당대의 지도자들을 향해서 ‘강도’라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당대의 지도자들이 얼마나 영적인 충격을 받았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없애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동참하게 된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사회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소외된 사람들을 만나 그들을 친구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시는 곳마다 민중들의 사랑을 받으셨습니다. 점점 인기가 올라갔습니다. ‘이 민중들을 통해서 새로운 변화의 시기를 마련하겠구나!’ 열심당이었던 시몬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라갔을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바리새인들의 외식주의와 허위의식을 그대로 폭로하셨습니다. “너희가 입으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하는데, 너희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하나님과는 거리가 멀구나.” 이러한 선포는 시몬의 마음을 움직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데올로기가 아닌 하나님의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그날이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그 밤에 로마의 병정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러 왔습니다. 그때, 성경에 정확한 이름은 나와 있지 않은, 곁에 있던 제자들의 이야기가 함께 나옵니다. 하나는 베드로였고 하나는 열심당 시몬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말합니다. “예수님, 여기 검 두 자루가 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아마 속으로는 “우리가 이 검을 갖고 민중 봉기를 일으킬까요?” 라고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로 그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요한복음 18:11)

…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마태복음 26:52)

칼로써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열심당 시몬은 칼이 문제의 해결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창을 들어야 이 억압된 세계로부터 해방의 역사를 이룩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시도를 멈추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직접 십자가의 길을 가시면서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역사를 새롭게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열심당 시몬의 회심에 대한 것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마지막 부탁을 하시며 “기도해라.”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장을 보면 그때 기도에 전념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베드로부터 시작해서 12제자의 이름이 나오는데 거기에 셀롯 즉 열심당 시몬의 이름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 또 다른 성도들, 그렇게 약 120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기도했다는 기록을 통해 열심당이었던 시몬이 변화되었다는 사실을 성경은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 민족을 사랑하는 격렬한 애국자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열정적인 사도로 변모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택하신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순전하다는 것입니다. 우파든지 좌파든지 간에 적어도 순전하게 개방성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열정이 있었습니다. 열정 없이는 인생에서 이룰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공부를 해도, 연애를 해도, 직장 생활을 해도, 기업을 운영해도 열정이 없으면 되는 일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택하신 사람들은 열정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열정을 변모시키셨습니다. 칼과 창으로 역사가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위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부활의 복음으로 역사가 바뀐다는 사실을 열심당이었던 시몬에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신념을 넘어선 신앙의 자리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어떤 정치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습니까? 좌파적이고 진보적입니까? 아니면 우파적이며 보수적입니까? 그리스도인은 좌파가 될 수도 있고, 우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야당의 편이 될 수도 있고, 여당의 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거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데올로기적인 것은 신념의 일이지만,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인 신앙을 가지고 내가 갖고 있는 이데올로기적인 요소를 끊임없이 비판하고 분석해야 합니다. 이 좌파적인 성향이 올바른 것인가? 이 우파적인 성향이 올바른 것인가? 내가 극단으로 나가지 않는가? 남을 정죄하지는 않는가? 나만이 진리라고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는가? 물어야 합니다. 물론 그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처럼 혁명적이고 급진적인 분이 또 어디에 있습니까? 헤롯 왕이 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로마의 황제가 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스린다고 예수님은 선언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처럼 보수적이고 기본적인 분이 또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만이 우리 아버지시며 하나님만이 창조주와 역사의 주인이라는 생각을 늘 가지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평생 이 두 가지를 가슴에 안으시며 하나님 나라를 세워 나가셨습니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정치적 성향들은 다 소중합니다. 나의 경험에서 나온 것입니다. 내가 배운 것에서 나온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 이데올로기로 인해 내가 폐쇄적으로 변하고 있지는 않은지, 독선적이지는 않은지를 말입니다. 그러면서 말씀을 통해 신념보다 더 큰 신앙의 자리로 넘어가야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땅에 주신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해야 합니다. 그랬을 때 좌와 우로 구분하고 있는 이 시대에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역사를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곳에 모인 모든 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슴에 품고 이 시대 속에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믿음의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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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 12 ~ 14

12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13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14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정치이데올로기에 빠지면 유연성을 잃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시몬이라는 자가 있습니다. 베드로의 이름도 시몬이었지만, 오늘 말씀드리려는 시몬은 열심당원이었던 시몬입니다. 셀롯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열심당원들은 당시 로마 제국에 격렬하게 저항했던 일종의 전사들이었고, 투쟁가들이었으며, 애국자들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주로 모이던 곳이 갈릴리 지역이었기에 때로 갈릴리가 폭동과 반란의 근거지로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이런 정치적인 이데올로기에 매몰되었던 열심당원 시몬이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을까요? 그것도 잠깐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3년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도 예수님의 제자직을 감당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요? 우리가 신비하게 생각해 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데올로기에 빠지게 되면 그렇게 되기란 쉽지 않습니다. 특별히 정치이데올로기는 스스로를 폐쇄하는 구조 속에 사람을 집어넣습니다. 물론, ‘이데올로기’라는 말 자체가 나쁜 의미는 아닙니다. 생각을 뜻하는 이데아(idea)와 논리를 뜻하는 로고스(logos)의 합성어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신념의 체계, 사상의 체계 또는 이념 등으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이 말이 최근에는 긍정적인 의미보다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정치이데올로기가 발생시키는 두 개의 문제 때문입니다.
첫 번째 문제는 폐쇄적인 순환 구조를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합니다. 또 수단이 목적을 왜곡합니다. 이것이 반복되면서 자기 폐쇄성 속에 스스로를 가두게 됩니다. 두 번째 문제는 거짓말과 허위의식을 양산한다는 것입니다. 이데올로기 속에 한 번 들어가면, 거기서는 비판을 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비판하는 순간, 도태될 만큼의 엄청난 위협을 받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짓을 신처럼 숭배하는 우상의 위험성이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다른 어떤 이데올로기보다도 정치이데올로기 속에 이것이 엄연히 상존한다고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정치이데올로기의 문제는 폐쇄성과 거짓말입니다.

러시아에서 피의 혁명을 이끌었던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Lenin)은 무섭고 격렬하게 공산당 운동을 만들어 낸 인물입니다. 그가 했던 유명한 말 중 하나가 “진실은 총구멍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공산주의의 이 프롤레타리아 혁명(proletarian revolution)은 폭력적으로 역사를 변혁시키려고 애를 썼습니다. 총을 가진 자가 진실을 가진 자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가 1920년에 행한 연설이 있습니다. 아주 무섭고, 동시에 비열한 연설 중에 하나입니다. 다음은 그의 말입니다.
“우리는 도덕이란, ‘낡은 착취 사회를 타파하고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중심으로 모든 노동자를 결속시키는 일에 기여하는 것, 새로운 공산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라 규정한다. 공산주의자들은 어떤 희생이라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며 필요하다면 내용을 불문하고 모든 지혜와 책략과 술책에 호소하고 불법적인 방법을 사용하고 사실을 은폐 또는 왜곡시킬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가 말하는 ‘도덕’을 위해서는 목숨도 내놓아야 하며, 모든 술책과 지략을 동원하고, 불법의 행함과 거짓말, 왜곡, 은폐가 다 괜찮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산주의 운동에서 가장 위험한 것이 폐쇄성이고 거짓말입니다. 거짓말을 해도 목표를 위해서였다고 하면 전혀 양심에 가책을 받지 않는 위험한 인간을 만들어 냅니다. 바로 이 두 가지, 폐쇄성과 거짓말이 인류 역사상 엄청난 피의 역사, 투쟁의 역사를 만들어 냈던 것입니다.
북한은 이미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넘어서서 한 사람을 우상화 하고 있습니다. 최악의 독재 파시즘(fascism)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개방성이 없습니다. 비판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진실성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거짓말을 해도 괜찮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인간의 존엄성이 파괴된 정권, 이것은 반신앙적이고 반기독교적이며 거짓된 우상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과 강도는 다르겠지만, 이러한 정치이데올로기적인 모습은 한국의 정치권에도 깊숙이 스며들어 와 있습니다. 대한민국 백성은 어떤 백성입니까? 일본제국의 억압 속에서 고통을 받다가 해방되었습니다. 그리고 해방된 다음, 우익과 좌익의 격렬한 싸움이 있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6.25전쟁이라는 민족상잔의 슬픈 과거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 때문에 우리는 좌익, 우익이라는 말에 긴장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색깔론’으로 시비를 거는 것은 급진적 진보주의자나 급진적 보수주의자나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상대방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정치이데올로기를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정말로 상처받고 수난 당하고 고통 받으면서 정치이데올로기에 관여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민주화에 헌신하면서 독재에 저항했던 사람들, 가난한 자들의 편에 섰던 사람들, 소외된 외로운 사람들을 도왔던 사람들, 돈이 우상이 된 왜곡된 자본주의의 부익부빈익빈에 저항했던 사람들, 있는 자들의 횡포와 권력을 가진 자들의 억압에 도전했던 사람들이 그들입니다. 그중에는 ‘연약한 사람들 편에 서는 것이 정의’라고 외치며 급진적인 정치이데올로기에 들어가게 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는 그 반대로, 공산주의의 학정에 못 이겨서 남쪽으로 내려온 사람들, ‘공산당’ 하면 치가 떨릴 정도로 고난을 경험한 사람들, 지금도 거짓말을 일삼고 협박하는 북한 정권을 보며 한탄하는 사람들, 인권이 매몰된 상황을 보며 마음 아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중에는 그 가슴 아픔으로 반공 이데올로기 주의자가 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좌파나 이런 우파는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사실 존경받을 만한 사람들입니다. 왜입니까? 적어도 이런 분들은 자기 삶의 진정성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자신이 경험한 것이 한쪽은 이쪽이고 다른 한쪽은 저쪽인 차이가 있을 뿐, 모두 자신의 아픔을 가지고 온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정치적 야욕을 위해서, 정권을 차지하기 위해서 정치이데올로기를 마구 양산해 내는 집단이 있습니다. 북한의 파시즘적인 독재 정권에 대해서 침묵을 지키면서도, 대한민국 사회에 끊임없는 갈등을 야기시키는 집단이 있습니다. 극보수를 외치며 상대방을 정죄하면서 정치적인 자리에 오르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이들로 인해 우리 사회는 너무 빨리 좌파와 우파로 구분되고 있습니다. “내 말 안 들으면 넌 좌파야.”, “내 말 안 들으면 넌 우파야.”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사회의 갈등이 증폭되는 것으로 먹고 살려는 사람들입니다. 일종의 정치모리배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영적 지도자들까지 권력자와 야합하면서 부화뇌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아픔이며 고통입니다.

예수님의 시대에도 정치이데올로기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2000년 전, 예수님의 시대는 어떠했을까요? 예수님의 시대에도 정치·종교·문화적인 이데올로기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중심이라고 보면, 그들 속에도 좌파적 사고와 우파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선 그 시대의 상황을 살펴보면, 예수님의 등장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좌파는 이 세상에 대해서 개혁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쿰란파는 “세속이 너무 타락해서 이곳에 살 수 없다!” 하며 외딴 수도원처럼 자기들만의 세계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려고 고대했던, 일종의 세속 도피주의적인 집단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주 극단적이었습니다. 또 열심당이 있습니다. 이들은 세속은 타락했고, 로마 정권의 억압은 강하니 “로마정권의 힘을 힘으로 물리치겠다!” 했던 변혁의 집단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폭력적인 행사를 감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반대쪽에 바리새파가 있습니다. 이들은 이중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만 율법을 잘 지키니, 나만 옳지!’ 하며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며 살아가는 자들이었습니다. 사두개파도 있습니다. 그들은 미래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보다는 현실이 중요했습니다. 철저하게 현실적인 종교인이 되다 보니, 돈도 필요했고 권력도 필요했습니다. 일종의 종교 정치인들이 사두개파에 속해 있었습니다.
바로 이 중심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는 좌파적인 사고를 갖고 있는 사람도 있고, 우파적인 사고를 갖고 있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보통 때 같으면 이들은 서로 만날 수 없는 인물들이었습니다. 당시에 좌파라고 알려졌던 쿰란파 중에 세례 요한이 가담되어 있었는데, 바로 그의 제자 중에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이 있습니다. 안드레입니다. 아마 요한도 그럴 것입니다. 이들은 엄격한 금욕과 자기 절제를 지키고 있다가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실 때 예수님께 다가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과격한 좌파도 있었습니다. 바로 시몬입니다. 또한 가룟 유다도 열심당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갈릴리 출신이었던 어부 베드로도 여기에 속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파는 누구였을까요? 후에 예수님의 제자가 된 바리새인 니고데모입니다. 또 바리새인이었던 사도 바울도 우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사두개적인 특성을 갖고 있던 자로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예수님의 시신을 자신의 무덤 속에 놓았던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있습니다. 그는 산헤드린 유대 공인회의 의원일 뿐만 아니라 당대 총독인 빌라도와 안면이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부탁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 중에는 우파도 좌파도 함께 있었습니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이들은 서로를 적대시하기에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당시 예수님의 제자였던 마태는 로마 제국의 앞잡이며 하수인처럼 여겨져 비난받았던 인물이었습니다. 반대로 열심당 시몬은 로마제국을 향해서 미움과 분노로 저항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안에서 같이 만났습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도대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기에 이렇게 생각과 삶의 태도가 다른 두 부류가 함께 만날 수 있었던 것일까요?
특별히 오늘은 열심당원이던 시몬이 어떻게 예수님의 공동체에 가입하게 된 것인지 물으려고 합니다. 그는 왜 이 안에 들어왔을까요? 그리고 왜 잠깐 머물다가 떠나지 않았을까요? 마지막 순간에 그는 어떤 인물로 바뀌어졌을까요?

예수님은 변혁을 꿈꾸셨습니다.

예수님의 삶 속에서 그는 열심당적인 어떤 요소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이 복음을 믿으라.” 지금 우리는 이것을 당연하게 여기지만, 당대에 이것은 정치적인 선포이기도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시대는 헤롯 왕이 다스리는 시대였습니다. 카이사 황제의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말씀하십니다. “황제가 주인이 아니다. 이 나라의 주인이 헤롯 왕이 아니다. 이 나라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친히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왔다.” 열심당 시몬은 이것을 정치적 저항의 표시로써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마지막 십자가도 정치적 형틀이었던 것을 기억해 보십시오.
또한 그는 예수님의 이런 말씀을 들으며 환호했을지도 모릅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마태복음 10:34)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이 땅을 변화시키고 역전시켜서 뭔가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라는 것이었으니 말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성전을 정화시키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은 종교의 중심지였습니다. 거기에서 대제사장들이 예루살렘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먹이사슬처럼 장사하는 사람들을 끌어들였습니다. 예루살렘에 들어가게 될 때 환전할 수 있게 하였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서 제사를 드리려고 할 때 양이나 염소, 비둘기를 살 수 있게 주위에 장사하는 사람들을 두었습니다. 그들은 비싸게 짐승들을 팔면서 이득을 취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득을 제사장들, 즉 예루살렘의 영적 지도자들과 함께 나누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을 때, 이 못된 꼴을 보게 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환전하는 사람들, 짐승을 파는 사람들의 책상을 뒤집어 엎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마태복음 21:13)

“내 집에 들어오면 기도하고 말씀 보고 예배드려야 되는데, 너희가 여기에서 장사를 하는구나. 이 자리를 강도의 소굴로 만드는구나!” 당대의 지도자들을 향해서 ‘강도’라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당대의 지도자들이 얼마나 영적인 충격을 받았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없애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동참하게 된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사회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소외된 사람들을 만나 그들을 친구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시는 곳마다 민중들의 사랑을 받으셨습니다. 점점 인기가 올라갔습니다. ‘이 민중들을 통해서 새로운 변화의 시기를 마련하겠구나!’ 열심당이었던 시몬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라갔을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바리새인들의 외식주의와 허위의식을 그대로 폭로하셨습니다. “너희가 입으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하는데, 너희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하나님과는 거리가 멀구나.” 이러한 선포는 시몬의 마음을 움직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데올로기가 아닌 하나님의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그날이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그 밤에 로마의 병정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러 왔습니다. 그때, 성경에 정확한 이름은 나와 있지 않은, 곁에 있던 제자들의 이야기가 함께 나옵니다. 하나는 베드로였고 하나는 열심당 시몬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말합니다. “예수님, 여기 검 두 자루가 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아마 속으로는 “우리가 이 검을 갖고 민중 봉기를 일으킬까요?” 라고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로 그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요한복음 18:11)

…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마태복음 26:52)

칼로써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열심당 시몬은 칼이 문제의 해결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창을 들어야 이 억압된 세계로부터 해방의 역사를 이룩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시도를 멈추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직접 십자가의 길을 가시면서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역사를 새롭게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열심당 시몬의 회심에 대한 것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마지막 부탁을 하시며 “기도해라.”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장을 보면 그때 기도에 전념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베드로부터 시작해서 12제자의 이름이 나오는데 거기에 셀롯 즉 열심당 시몬의 이름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 또 다른 성도들, 그렇게 약 120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기도했다는 기록을 통해 열심당이었던 시몬이 변화되었다는 사실을 성경은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 민족을 사랑하는 격렬한 애국자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열정적인 사도로 변모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택하신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순전하다는 것입니다. 우파든지 좌파든지 간에 적어도 순전하게 개방성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열정이 있었습니다. 열정 없이는 인생에서 이룰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공부를 해도, 연애를 해도, 직장 생활을 해도, 기업을 운영해도 열정이 없으면 되는 일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택하신 사람들은 열정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열정을 변모시키셨습니다. 칼과 창으로 역사가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위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부활의 복음으로 역사가 바뀐다는 사실을 열심당이었던 시몬에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신념을 넘어선 신앙의 자리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어떤 정치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습니까? 좌파적이고 진보적입니까? 아니면 우파적이며 보수적입니까? 그리스도인은 좌파가 될 수도 있고, 우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야당의 편이 될 수도 있고, 여당의 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거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데올로기적인 것은 신념의 일이지만,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인 신앙을 가지고 내가 갖고 있는 이데올로기적인 요소를 끊임없이 비판하고 분석해야 합니다. 이 좌파적인 성향이 올바른 것인가? 이 우파적인 성향이 올바른 것인가? 내가 극단으로 나가지 않는가? 남을 정죄하지는 않는가? 나만이 진리라고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는가? 물어야 합니다. 물론 그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처럼 혁명적이고 급진적인 분이 또 어디에 있습니까? 헤롯 왕이 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로마의 황제가 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스린다고 예수님은 선언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처럼 보수적이고 기본적인 분이 또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만이 우리 아버지시며 하나님만이 창조주와 역사의 주인이라는 생각을 늘 가지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평생 이 두 가지를 가슴에 안으시며 하나님 나라를 세워 나가셨습니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정치적 성향들은 다 소중합니다. 나의 경험에서 나온 것입니다. 내가 배운 것에서 나온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 이데올로기로 인해 내가 폐쇄적으로 변하고 있지는 않은지, 독선적이지는 않은지를 말입니다. 그러면서 말씀을 통해 신념보다 더 큰 신앙의 자리로 넘어가야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땅에 주신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해야 합니다. 그랬을 때 좌와 우로 구분하고 있는 이 시대에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역사를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곳에 모인 모든 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슴에 품고 이 시대 속에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믿음의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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