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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여인 : 사랑때문에 – 예수님의 제자들 14 –

마가복음 14: 3 ~ 9

김지철 목사

2014.11.09

진정한 사랑을 해 보셨습니까?

여러분은 자신의 생애를 돌아보면서 진정한 사랑을 해 본 적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연애하는 사람들이 사랑을 고백할 때, 그들이 서로를 향해 하는 두 가지 말이 있습니다. 하나는 ‘당신은 내 것이야’이고, 다른 하나는 ‘당신 뜻대로 하겠어요’입니다.
‘당신은 내 것이야’라는 말은 상대방을 철저하게 내 소유로 만들고 싶다는 희망입니다. 내가 당신의 주인이 되고 싶다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랑이 여기에서만 멈추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탐욕이 되고 맙니다. 거기에는 주인과 종이라는 수직적인 관계 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당신 뜻대로 하겠다’는 말은 사랑하는 이를 위해 자원하는 마음으로 헌신하겠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서 내 모든 것을 다 내려놓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아끼던 것, 소중하게 여기던 것을 당신을 위해 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 소신도, 체면도, 가치관도, 심지어 목숨까지도 내던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상대방을 위해 자발적인 노예가 되겠다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했던 사람들, 즉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내가 주님 뜻대로 하겠습니다!” 강제가 아니었습니다. 자발적인 순종으로 종의 모습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 칭찬을 받은 여인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러한 모습을 아주 잘 보여주는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 향유를 붓는 여인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을 칭찬하셨습니다. 성경 속에 이런 인정과 칭찬을 받았던 인물이 또 있을까요? 구약에서도 신약에서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어떤 말로 이 여인을 칭찬하셨을까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14:9)

여기에는 예수님이 강조하실 때마다 사용하시는 용법이 나옵니다. 바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입니다. 예수님의 신뢰가 가득 담긴 표현입니다. 그러면서 ‘온 천하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증거 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지고 사람들이 이 여자를 기억하게 될 것’이라는 최고의 찬사를 하십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의 행적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금요일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목요일에는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다가 로마 병정들에게 체포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사건은 바로 그 전날인 수요일에 일어난 일임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아주 긴박합니다. 여인의 앞과 뒤에는 이 여인과는 전혀 다른 두 종류의 인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절과 2절에는 예수님을 잡아 죽일 계략을 갖고 있는 유대 지도자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은 대제사장이었고 서기관들이었습니다.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구하며 (마가복음 14:1)

또 10절과 11절에는 스승을 은 30에 팔아넘긴 제자 가룟 유다의 모습이 나옵니다.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 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마가복음 14:10)

한 여인은 예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치려고 하는데, 종교지도자들과 예수님을 3년 동안이나 따라다닌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수난의 자리에 전혀 동참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샌드위치 구조로 가운데에 있는 이 여인이 더욱 빛나게 마가복음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보다도 이 여인이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였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면서 어떻게 변화를 받게 되었을까요? 오늘 본문을 보면 이 여인은 사랑을 받을 줄도 알고, 사랑을 표현할 줄도 아는 여인이었습니다. 사랑은 받을 줄도 알고 할 줄도 알아야 온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자존감을 세워줍니다.

누가복음에는 이 여인을 ‘죄 많은 여인’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동안 아무도 자신을 이해하고 위로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여인을 만나서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로 인해, 자신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기쁨이 여인에게 생겼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의 인격체로 대우하셨습니다. 그동안의 남자들은 자신의 육체만을 탐냈습니다. 그래서 여인에게는 사랑에 대한 갈증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사랑받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나도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자존감은 어디서부터 생기는 것일까요? 우리의 자긍심은 무엇으로부터 생기는 것일까요? 내가 사랑해야 할 존재, 그분을 통해서 사랑을 받을 때 자존감과 자긍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자존감과 자긍심이 없는 사람의 뒷면을 들여다보면, 그들에게는 사랑받은 기억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존중받을 만한 존재인지 누군가 사랑으로 가르쳐 준 적이 없었기 때문에 늘 자존감이 메말라 있습니다. 자긍심이 생기다가도 무너집니다. 즉 사랑은 자존감과 자긍심을 심어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 인생에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한 가지였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자존감을 갖도록 하신 일입니다. 버려진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외로운 사람들, 삶을 포기한 불쌍한 사람들을 찾아가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버려질 존재가 아니라 소중한 존재다. 너는 이 세상에서 엑스트라로 존재하다가 어느 순간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네 인생의 주인공은 바로 너다.” 바로 이 사실을 가르쳐 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가 예배드릴 때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이 세상 수십 억 중에 하나이지만, 네가 있나 없나 나는 모르겠다가 아니라 오직 너로 존재하는 너 자신을 내가 사랑한다.”
사랑은 어떤 역할을 할까요? 상대방을 주인공으로 세워주는 것입니다. 남녀가 사랑을 하게 되면 갑자기 밝아지고 예뻐지기 시작합니다. 왜 그럴까요? 삶에 지쳐 있을 때, 삶에서 의미를 찾지 못할 때, 사랑을 통해 희망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의미 있는 삶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속에서부터 활기가 솟아나는 것, 그것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축복입니다.
사랑하게 되면 두 사람은 서로를 주인공으로 세워줍니다. 서로가 귀한 존재임을 일깨워 줍니다. 그렇게 되면, 숨겨져 있던 끼까지 살아납니다. 또한 상대방이 주인공이 되면서 나도 같이 주인공이 됩니다. 그리고 다른 모든 것들, 다른 모든 사람들은 조연으로 밀려나기 시작합니다. 사랑이란 그런 능력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녀들을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자녀들을 위해 얼마나 많은 수고와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습니까? 그런데 어느 날 내 아들과 딸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깁니다. 그동안은 부모인 내가, 내 아들과 딸의 주인공처럼 여겨졌었는데 그 자리를 빼앗기는 것입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주인공이라고 말하며 이제는 떠나겠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결혼을 합니다. 우리도 그렇게 해서 가정을 꾸린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의 다른 모든 것들을 상대화시키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에게 자긍심과 자존감을 불어넣는 방법이었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포기의 기쁨을 알게 합니다.

남자 제자들에게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며 뒤따랐지만 그들의 사랑은 너무나 작았습니다. 그들이 지녔던 것은 오히려 명예욕이고 권력욕이었습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이용해서 자기의 탐욕을 채우려고 했던 것입니다. 남자들이 왜 이렇게 쉽게 무너졌을까요? 사랑하지 않고 따라갔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언제 진정으로 바뀌었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 초대 교회의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후에 비로소 예수님을 온전하게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등장하는 이 여인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예수님을 온전히 사랑할 줄 알았습니다. 이 여인의 모습은 우리에게 많은 감동을 줍니다. 사랑의 속성을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사랑은 아무리 쏟고 쏟아도, 아무리 하고 또 해도 더욱 사랑하고 싶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향해서 자신을 개방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했습니다. 자기가 갖고 있던 가장 소중한 것으로 예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고 했습니다. 성경은 이 여인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마가복음 14:3)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그 값이 300데나리온 이상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노동자 1년 치 봉급에 해당되는 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에 상관없이 그 귀한 것을 아낌없이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것입니다.
돈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돈이라는 것은 사랑을 가늠하는 잣대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돈을 아무에게나 주지 않습니다. 아깝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아들과 딸에게는 주어도 주어도 아깝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랑은, 상대방을 위해서 내 것을 내어놓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돈을 주는 것이 아깝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사랑이 부족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주어도 주어도 또 주고 싶은 것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해 줄 수 있습니다. 자원하는 마음으로 노예가 되는 것을 기뻐하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자발적인 포기가 오히려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사랑의 속성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십의 일조 헌금을 드립니다. 아깝습니까? 억지로 드립니까? 안 드리면 하나님이 벌을 내리실까봐 무서워서 드립니까? 이 헌금을 드리면 삼십 배, 육십 배, 백배로 부어 주시겠지 하는 마음으로 드립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온전한 헌금이 아닙니다. 진정한 헌금이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축복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님 사랑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알고 주님께 드립니다.’ 고백하며 드리는 것입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헌금이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용기를 줍니다.

사랑 없는 헌신, 사랑 없는 드림, 사랑 없는 봉사의 뒷면에는 나 자신의 탐욕과 욕망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 달랐습니다.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자기의 모든 것을 예수님께 쏟아부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여인의 용기였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인의 이러한 행동을 보며 비난합니다. 옆에 있는 제자들은 화를 냅니다.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마가복음 14:4∼5)

“300데나리온이 넘는 비싼 것인데, 이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그들은 뚜렷한 명분을 가지고 여인을 비난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성경구절을 보면, 여자를 비난한 자들이 제자들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요한복음에는 가룟 유다였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가룟 유다가 이런 비난을 한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자기는 예수님을 은 30에 팔아 넘겨버렸습니다. 그러면서 자기의 모든 것을 다 쏟아부으며 예수님을 지키려고 한 여인을 비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조롱하는 것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본래 이 여인은 손가락질 당하고 비난 받으면서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숨고 싶어 했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당당히 사람들 앞에 서 있습니다.
사랑을 하면, 나약한 사람이 강해집니다. 비겁한 사람이 용기 있게 됩니다. 우리 어머니들을 보십시오. 여자들입니다.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되는 순간, 강해지고 대담해지고 용기 있는 존재로 바뀝니다. 그 안에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당한 사람이 사랑을 할 줄 안다.” 맞습니다. 그런데 그 반대도 맞습니다. 사랑을 하면 당당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이 갖고 있는 축복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 당당해져라. 너희도 나를 사랑해라. 내가 너희를 축복하겠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의 모습이고, 약속이고 축복입니다.
사랑하면 어느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사가 됩니다. 사랑하면 노예로 갇혀있던 삶이 자유를 향한 여정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 여인의 모습처럼 말입니다.
오늘 이 여인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또 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사랑하면서 예수님 속에 감추어진 신비한 환상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이 당하실 십자가 고난 속에서 장차 다가올 하나님의 영광을 목도하게 됩니다. 다 알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을 위해서 자기 몸을 내어 놓으신 예수님처럼, 예수님을 위해 자신에게 소중한 것들을 내어 놓고 싶은 마음이 여인에게 생겼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머리에 기름을 부음으로써 예수님을 메시아로, 기름 부음 받은 자 그리스도로 세우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사건인지 모릅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향해서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때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은 메시아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은 그 말씀을 듣고 기뻐하셨습니다. 그러나 곧 수난의 길을 이야기하셨을 때, 베드로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화들짝 놀라며 말렸습니다. “안됩니다!” 그때 예수님은 “사탄아 물러가라.” 하시며 베드로를 꾸중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입으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 곧 기름 부음 받은 자 메시아로 칭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입이 아닌 몸으로 그의 삶으로 예수님이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였습니다. 누가 더 예수님을 사랑한 인물일까요?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십시오.

우리 시대가 갖고 있는 문제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면서도 속으로 앓고 있는 질병들은 무엇일까요? 크게 두 가지일 것입니다. 첫째, 진실한 사랑을 받아 보지 못한 병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음하고 있습니다. 소리를 지릅니다. 남에게 시비를 걸고 남을 비난합니다. 남의 탓이라고 말을 합니다. 사랑받지 못했음을 역설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이것이 이 시대가 싸움과 갈등으로 가득 찬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무서운 병이 있습니다. 사랑을 줄 수 없어서 생긴 병입니다. 자신을 낭비할 만큼 사랑하지 않아서, 사랑의 대상에 모든 것을 쏟지 않아서 생기는 병입니다. 사랑을 해야 우리의 삶이 자유를 얻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사랑을 해야만 진정한 자존감이 생깁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사랑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말씀하시며 아들을 버리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그 사랑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사랑의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신앙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으로 이 땅에서 사랑의 스토리를 만들어 가는 것, 그것이 신앙입니다. 내가 있는 자리에 사랑의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그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들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사랑받은 기억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낭비할 정도로 사랑할 대상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그 사랑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의 이 여인처럼 삶으로 응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진정한 사랑을 회복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줄 아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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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4: 3 ~ 9

3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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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5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6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7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8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진정한 사랑을 해 보셨습니까?

여러분은 자신의 생애를 돌아보면서 진정한 사랑을 해 본 적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연애하는 사람들이 사랑을 고백할 때, 그들이 서로를 향해 하는 두 가지 말이 있습니다. 하나는 ‘당신은 내 것이야’이고, 다른 하나는 ‘당신 뜻대로 하겠어요’입니다.
‘당신은 내 것이야’라는 말은 상대방을 철저하게 내 소유로 만들고 싶다는 희망입니다. 내가 당신의 주인이 되고 싶다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랑이 여기에서만 멈추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탐욕이 되고 맙니다. 거기에는 주인과 종이라는 수직적인 관계 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당신 뜻대로 하겠다’는 말은 사랑하는 이를 위해 자원하는 마음으로 헌신하겠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서 내 모든 것을 다 내려놓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아끼던 것, 소중하게 여기던 것을 당신을 위해 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 소신도, 체면도, 가치관도, 심지어 목숨까지도 내던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상대방을 위해 자발적인 노예가 되겠다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했던 사람들, 즉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내가 주님 뜻대로 하겠습니다!” 강제가 아니었습니다. 자발적인 순종으로 종의 모습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 칭찬을 받은 여인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러한 모습을 아주 잘 보여주는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 향유를 붓는 여인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을 칭찬하셨습니다. 성경 속에 이런 인정과 칭찬을 받았던 인물이 또 있을까요? 구약에서도 신약에서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어떤 말로 이 여인을 칭찬하셨을까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14:9)

여기에는 예수님이 강조하실 때마다 사용하시는 용법이 나옵니다. 바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입니다. 예수님의 신뢰가 가득 담긴 표현입니다. 그러면서 ‘온 천하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증거 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지고 사람들이 이 여자를 기억하게 될 것’이라는 최고의 찬사를 하십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의 행적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금요일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목요일에는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다가 로마 병정들에게 체포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사건은 바로 그 전날인 수요일에 일어난 일임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아주 긴박합니다. 여인의 앞과 뒤에는 이 여인과는 전혀 다른 두 종류의 인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절과 2절에는 예수님을 잡아 죽일 계략을 갖고 있는 유대 지도자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은 대제사장이었고 서기관들이었습니다.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구하며 (마가복음 14:1)

또 10절과 11절에는 스승을 은 30에 팔아넘긴 제자 가룟 유다의 모습이 나옵니다.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 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마가복음 14:10)

한 여인은 예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치려고 하는데, 종교지도자들과 예수님을 3년 동안이나 따라다닌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수난의 자리에 전혀 동참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샌드위치 구조로 가운데에 있는 이 여인이 더욱 빛나게 마가복음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보다도 이 여인이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였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면서 어떻게 변화를 받게 되었을까요? 오늘 본문을 보면 이 여인은 사랑을 받을 줄도 알고, 사랑을 표현할 줄도 아는 여인이었습니다. 사랑은 받을 줄도 알고 할 줄도 알아야 온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자존감을 세워줍니다.

누가복음에는 이 여인을 ‘죄 많은 여인’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동안 아무도 자신을 이해하고 위로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여인을 만나서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로 인해, 자신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기쁨이 여인에게 생겼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의 인격체로 대우하셨습니다. 그동안의 남자들은 자신의 육체만을 탐냈습니다. 그래서 여인에게는 사랑에 대한 갈증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사랑받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나도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자존감은 어디서부터 생기는 것일까요? 우리의 자긍심은 무엇으로부터 생기는 것일까요? 내가 사랑해야 할 존재, 그분을 통해서 사랑을 받을 때 자존감과 자긍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자존감과 자긍심이 없는 사람의 뒷면을 들여다보면, 그들에게는 사랑받은 기억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존중받을 만한 존재인지 누군가 사랑으로 가르쳐 준 적이 없었기 때문에 늘 자존감이 메말라 있습니다. 자긍심이 생기다가도 무너집니다. 즉 사랑은 자존감과 자긍심을 심어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 인생에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한 가지였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자존감을 갖도록 하신 일입니다. 버려진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외로운 사람들, 삶을 포기한 불쌍한 사람들을 찾아가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버려질 존재가 아니라 소중한 존재다. 너는 이 세상에서 엑스트라로 존재하다가 어느 순간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네 인생의 주인공은 바로 너다.” 바로 이 사실을 가르쳐 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가 예배드릴 때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이 세상 수십 억 중에 하나이지만, 네가 있나 없나 나는 모르겠다가 아니라 오직 너로 존재하는 너 자신을 내가 사랑한다.”
사랑은 어떤 역할을 할까요? 상대방을 주인공으로 세워주는 것입니다. 남녀가 사랑을 하게 되면 갑자기 밝아지고 예뻐지기 시작합니다. 왜 그럴까요? 삶에 지쳐 있을 때, 삶에서 의미를 찾지 못할 때, 사랑을 통해 희망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의미 있는 삶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속에서부터 활기가 솟아나는 것, 그것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축복입니다.
사랑하게 되면 두 사람은 서로를 주인공으로 세워줍니다. 서로가 귀한 존재임을 일깨워 줍니다. 그렇게 되면, 숨겨져 있던 끼까지 살아납니다. 또한 상대방이 주인공이 되면서 나도 같이 주인공이 됩니다. 그리고 다른 모든 것들, 다른 모든 사람들은 조연으로 밀려나기 시작합니다. 사랑이란 그런 능력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녀들을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자녀들을 위해 얼마나 많은 수고와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습니까? 그런데 어느 날 내 아들과 딸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깁니다. 그동안은 부모인 내가, 내 아들과 딸의 주인공처럼 여겨졌었는데 그 자리를 빼앗기는 것입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주인공이라고 말하며 이제는 떠나겠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결혼을 합니다. 우리도 그렇게 해서 가정을 꾸린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의 다른 모든 것들을 상대화시키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에게 자긍심과 자존감을 불어넣는 방법이었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포기의 기쁨을 알게 합니다.

남자 제자들에게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며 뒤따랐지만 그들의 사랑은 너무나 작았습니다. 그들이 지녔던 것은 오히려 명예욕이고 권력욕이었습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이용해서 자기의 탐욕을 채우려고 했던 것입니다. 남자들이 왜 이렇게 쉽게 무너졌을까요? 사랑하지 않고 따라갔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언제 진정으로 바뀌었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 초대 교회의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후에 비로소 예수님을 온전하게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등장하는 이 여인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예수님을 온전히 사랑할 줄 알았습니다. 이 여인의 모습은 우리에게 많은 감동을 줍니다. 사랑의 속성을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사랑은 아무리 쏟고 쏟아도, 아무리 하고 또 해도 더욱 사랑하고 싶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향해서 자신을 개방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했습니다. 자기가 갖고 있던 가장 소중한 것으로 예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고 했습니다. 성경은 이 여인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마가복음 14:3)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그 값이 300데나리온 이상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노동자 1년 치 봉급에 해당되는 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에 상관없이 그 귀한 것을 아낌없이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것입니다.
돈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돈이라는 것은 사랑을 가늠하는 잣대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돈을 아무에게나 주지 않습니다. 아깝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아들과 딸에게는 주어도 주어도 아깝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랑은, 상대방을 위해서 내 것을 내어놓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돈을 주는 것이 아깝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사랑이 부족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주어도 주어도 또 주고 싶은 것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해 줄 수 있습니다. 자원하는 마음으로 노예가 되는 것을 기뻐하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자발적인 포기가 오히려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사랑의 속성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십의 일조 헌금을 드립니다. 아깝습니까? 억지로 드립니까? 안 드리면 하나님이 벌을 내리실까봐 무서워서 드립니까? 이 헌금을 드리면 삼십 배, 육십 배, 백배로 부어 주시겠지 하는 마음으로 드립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온전한 헌금이 아닙니다. 진정한 헌금이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축복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님 사랑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알고 주님께 드립니다.’ 고백하며 드리는 것입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헌금이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용기를 줍니다.

사랑 없는 헌신, 사랑 없는 드림, 사랑 없는 봉사의 뒷면에는 나 자신의 탐욕과 욕망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 달랐습니다.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자기의 모든 것을 예수님께 쏟아부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여인의 용기였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인의 이러한 행동을 보며 비난합니다. 옆에 있는 제자들은 화를 냅니다.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마가복음 14:4∼5)

“300데나리온이 넘는 비싼 것인데, 이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그들은 뚜렷한 명분을 가지고 여인을 비난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성경구절을 보면, 여자를 비난한 자들이 제자들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요한복음에는 가룟 유다였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가룟 유다가 이런 비난을 한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자기는 예수님을 은 30에 팔아 넘겨버렸습니다. 그러면서 자기의 모든 것을 다 쏟아부으며 예수님을 지키려고 한 여인을 비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조롱하는 것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본래 이 여인은 손가락질 당하고 비난 받으면서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숨고 싶어 했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당당히 사람들 앞에 서 있습니다.
사랑을 하면, 나약한 사람이 강해집니다. 비겁한 사람이 용기 있게 됩니다. 우리 어머니들을 보십시오. 여자들입니다.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되는 순간, 강해지고 대담해지고 용기 있는 존재로 바뀝니다. 그 안에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당한 사람이 사랑을 할 줄 안다.” 맞습니다. 그런데 그 반대도 맞습니다. 사랑을 하면 당당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이 갖고 있는 축복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 당당해져라. 너희도 나를 사랑해라. 내가 너희를 축복하겠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의 모습이고, 약속이고 축복입니다.
사랑하면 어느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사가 됩니다. 사랑하면 노예로 갇혀있던 삶이 자유를 향한 여정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 여인의 모습처럼 말입니다.
오늘 이 여인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또 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사랑하면서 예수님 속에 감추어진 신비한 환상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이 당하실 십자가 고난 속에서 장차 다가올 하나님의 영광을 목도하게 됩니다. 다 알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을 위해서 자기 몸을 내어 놓으신 예수님처럼, 예수님을 위해 자신에게 소중한 것들을 내어 놓고 싶은 마음이 여인에게 생겼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머리에 기름을 부음으로써 예수님을 메시아로, 기름 부음 받은 자 그리스도로 세우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사건인지 모릅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향해서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때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은 메시아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은 그 말씀을 듣고 기뻐하셨습니다. 그러나 곧 수난의 길을 이야기하셨을 때, 베드로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화들짝 놀라며 말렸습니다. “안됩니다!” 그때 예수님은 “사탄아 물러가라.” 하시며 베드로를 꾸중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입으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 곧 기름 부음 받은 자 메시아로 칭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입이 아닌 몸으로 그의 삶으로 예수님이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였습니다. 누가 더 예수님을 사랑한 인물일까요?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십시오.

우리 시대가 갖고 있는 문제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면서도 속으로 앓고 있는 질병들은 무엇일까요? 크게 두 가지일 것입니다. 첫째, 진실한 사랑을 받아 보지 못한 병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음하고 있습니다. 소리를 지릅니다. 남에게 시비를 걸고 남을 비난합니다. 남의 탓이라고 말을 합니다. 사랑받지 못했음을 역설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이것이 이 시대가 싸움과 갈등으로 가득 찬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무서운 병이 있습니다. 사랑을 줄 수 없어서 생긴 병입니다. 자신을 낭비할 만큼 사랑하지 않아서, 사랑의 대상에 모든 것을 쏟지 않아서 생기는 병입니다. 사랑을 해야 우리의 삶이 자유를 얻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사랑을 해야만 진정한 자존감이 생깁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사랑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말씀하시며 아들을 버리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그 사랑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사랑의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신앙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으로 이 땅에서 사랑의 스토리를 만들어 가는 것, 그것이 신앙입니다. 내가 있는 자리에 사랑의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그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들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사랑받은 기억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낭비할 정도로 사랑할 대상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그 사랑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의 이 여인처럼 삶으로 응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진정한 사랑을 회복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줄 아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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