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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이 의롭다 – 성경주제 15 : 칭의 –

누가복음 18: 9 ~ 14

김지철 목사

2013.12.15

북한을 위해 더욱 열심히 기도할 때입니다.

우리는 새벽마다 북한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특히 지금 북한의 사태를 보면, 북한을 위해 더욱 기도해야 할 때라 여겨집니다. 김정은 체제가 북한의 소위 제2인자로 알려졌던 장성택, 김정은의 고모부를 전격 숙청했습니다. 죄목은 경제와 군을 자기 손에 장악하고 김정은 체제를 뒤집겠다는 쿠데타의 도모, 즉 반란죄였습니다.
보도에 의하면 군사재판 하루 이틀 만에 기관총으로 쏴 죽이고, 그것도 모자라 화염방사기로 시체까지 불태웠다고 합니다. 미 백악관은 논평에서, 이 일이 김정은 정권의 극단적 잔인함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의 숙청에 희생이 될지, 또 백성들은 얼마나 두려움에 떨면서 한 사람의 눈치를 보며 살게 될지 가슴이 답답합니다.
북한을 보면 오직 한 사람의 의견만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 한 사람의 자유를 위해서는 다른 것들에 막대한 출혈이 있어도 괜찮다는 사회입니다. 이것이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도저히 예측 불가능한 정권입니다. 국민들과 나라를 한 사람이 사유화한 정권입니다.
그런데 어제 보도에 의하면, 분위기 반전이 있었다고 합니다. 포상잔치를 했다는 것입니다. 장성택의 사형 사실을 공개한 지 이틀 만에 경제건설에서 공헌을 세운 군인과 주민들을 대대적으로 표창했다는 소식이 연속적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대단히 노회한, 백성을 조정하고 통제하는 수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2015년이 되면, 남북이 갈라진 지 70년의 세월이 지납니다. 성경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로 붙잡혀간 지 70년 만에 되돌아오게 됩니다. 우리도 희망을 놓지 않고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특히 함께 기도해야 할 몇 가지 제목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한반도에 다시는 피 흘림의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절체절명의 과제입니다. 두 번째는 자유와 민주와 평화통일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저 북녘의 백성들이 이제는 억압의 통치에서 해방되고, 무너진 재단을 다시 쌓아 하나님 앞에 마음껏 예배드릴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는 달랐습니다.

인간이 오만방자해지면 어떤 길을 가게 되는지 하나님이 우리 현실에서 보여주시는 예가 바로 북한 정권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다시 묵상해 봅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오만한 사람들, 교만한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인가를 말씀하십니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누가복음 18:9)

자기만 옳고 다른 사람들은 다 그르고, 다 못됐다고 하면서 하나님까지도 자기 소유물로 삼으려고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두 명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한 명은 당대에 존경을 받던 종교인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종교적인 열심과 헌신을 갖고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던 지도자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은 멸시와 천대를 받던 세리였습니다. 그는 유대인에게 세금을 걷어 로마제국에 갖다 바치는, 그래서 매국노라고 비난받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방인을 만나는 직업이기에 율법을 어길 수밖에 없는 자였습니다.
그 둘은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하기 위해서 성전으로 올라갔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에 올라가시면서 그들의 모습을 눈여겨보셨던 것 같습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예수님은 하나하나 묘사하십니다. 그들의 태도는 어떠했고, 기도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요?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누가복음 18:11~12)

바리새인은 아주 자신만만합니다. 의기양양합니다. ‘나같이 헌신적이고 경건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 자랑하는 모습이 그대로 전달됩니다. 그런데 세리의 기도는 어떠했을까요?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누가복음 18:13)

세리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아주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비천한 모습으로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기의 차이가 내용의 차이로 나타납니다.

이처럼 둘의 기도하는 자세와 태도는 다릅니다. 바리새인은 따로 서서 기도했습니다. 자신을 보라는 듯이 맨 앞으로 나갔는지 아니면 따로 옆에 섰는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따로’ 섰다는 것입니다. ‘나를 보라. 내 기도하는 모습을 보라. 나는 너희와 같지 않다.’ 나타내고 싶었던 것입니다.
‘바리새’라는 말의 본래 뜻은 ‘구별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는 ‘나는 너와 차별되어야 해. 나는 너와 구별되었어.’하는 자기 과시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우월한 것을 지니고 있다고 여겨 자랑스럽게 따로 선 것입니다.
그런데 세리도 멀리 따로 섰습니다.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가 따로 선 것은, 남들과 함께 기도할 수 없는 사람으로 스스로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따로 선 두 사람의 동기는 다릅니다. 한 사람은 ‘나는 너희와 다르니까 나를 바라보라’는 의미에서 따로 선 것이고, 다른 한 사람은 ‘내가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같이 있을 수 있을까? 나는 사람들 앞에 내놓을 것이 없는 부끄러운 죄인이다.’하는 마음에서 따로 섰던 것입니다.
또한 기도의 내용을 보면 놀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바리새인은 훌륭한 종교인입니다. 기도의 대상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으며, 기도도 멋지게 잘하는 사람입니다. 마치 정교하게 잘 갖춰진 기도문과도 같은 기도였습니다. 게다가 감사를 고백하는 기도였습니다. 기도 중에 최고의 기도는 감사기도입니다. 그의 삶은 감사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기도는 예수님의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감사의 선언처럼 소중한 것이 없는데 왜 예수님은 이 감사의 기도를 거절하셨을까요?
그의 감사는 하나님을 높이는 감사가 아니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감사였습니다. 자랑하고 싶은 감사였습니다. 바리새인의 감사를 들어보면, 첫째 하지 않은 것에 대한 감사가 있습니다.
“나는 남들이 그러하듯 남의 것을 빼앗지 않았습니다. 도둑질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불의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처럼 간음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십계명의 중요한 덕목을 잘 지켰습니다…”
자기가 얼마나 칭찬받을 만한 인물인가를 하나하나 조목조목 하나님 앞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를까봐,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을 놓칠까봐,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을 칭찬하지 않을까봐 그동안 얼마나 잘했는지를 하나님 앞에 아뢰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지 않은 것을 자랑할 뿐만 아니라 행한 것까지 자랑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금식을 해도 일주일에 한 번만 하면 족하지만 나는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했습니다. 나는 소득의 십일조를 드려서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철저하게 잘 지켰습니다.”

예수님은 동기를 중요하게 보십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좋은 신앙인의 표본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율법의 말씀대로 경건한 삶을 산 인물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네 모습이 하나님 마음에 안들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너무 다르지 않습니까? 이유가 무엇일까요? 14절 말씀에 예수님의 판정과 그 판정 기준이 나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누가복음 18:14)

예수님은 그의 외적 행위에, “박수치고 싶구나. 너 정말 수고했구나. 남의 것 노략질 안하고 참으로 경건하게 살려고 애썼구나!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금식도 하고, 하나님께 헌금도 내면서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명령을 잘 지켰구나!” 하고 칭찬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외적인 행위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은 동기였습니다. 마음의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했느냐? 무슨 마음으로 그렇게 했느냐? 네가 자랑하려고 그 일을 한 것 아니냐? 교만한 마음으로 그것을 한 것이 아니냐? 사람에게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지금 예배시간 아니냐? 기도하는 시간 아니냐? 하나님 앞에서 예배드린다는 것은 네가 겸손해지는 시간 아니냐?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고 내 실존의 무능함과 나의 죄인 됨을 고백하는 시간이 아니더냐?” 예수님은 질문하시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자기연설이고, 자기자랑이었습니다. 세속적인 말로 표현하면 정치적인 프로파간다였습니다. 심지어 그는, “내가 얼마나 멋있는 사람인지 알고 있냐? 내가 얼마나 경건한 사람인 줄 아느냐? 내가 얼마나 맡은 직분을 잘 수행하는 사람인 줄 아냐? 사람들아, 제발 좀 알아다오.”에 그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서 이야기한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좀 알아주십시오. 내가 얼마나 괜찮은, 경건한 인물인지 말입니다. 얼마나 충성스러운지 말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자기를 뽐내면서 하나님을 훈계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에서 싫어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용납하지 않으시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감히 창조주 앞에서 건방을 떠는 것, 교만해지고 오만해지는 것, 스스로가 심판관이 되어 하나님의 역할을 대행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받아들이실 수 없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속에 무엇이 있었습니까? 교만이 있었습니다. 교만은 마치 속옷과도 같습니다. 입을 때는 가장 먼저 입습니다. 하지만 벗을 때는 가장 늦게 벗습니다. 인간의 본질 속에서, 심성 속에서 인간을 붙잡는 것이 교만임을 하나님은 가르쳐주고 계신 것입니다.
교만이 얼마나 우리의 삶에 붙어 있느냐하면, 아무것이 없어도 교만해지고,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도 교만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경고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하면서도 인간이 교만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네가 하나님을 잘 믿느냐? 믿으면서도 교만하구나! 네가 기도하고 있느냐? 그 기도가 교만하구나! 네가 예배드리고 있느냐? 예배를 드리면서도 교만하구나! 네가 감사하느냐? 찬송을 부르느냐? 그런데도 네가 교만하구나!”
교만이 얼마나 우리를 붙잡고 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종종 바리새인들을 꾸짖으셨던 이유도 교만이었습니다. “화가 있을지어다. 회칠한 무덤 같은 자들아.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들이 인간의 본성 속에 숨어있는 교만의 깊이를 감추면서 겉모양만 신앙생활하고 겉모양만 종교인이 되었구나! 너희들은 신앙인이 아니라 종교인일 뿐이다! 너희 속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가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니냐?”

교만은, 하나님의 자리를 뺏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서 교만한 것은 변화의 가능성이 있지 않습니까? 예수 믿고 회개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교만을 벗게 된다는 가능성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잘 안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잘 믿고, 오랫동안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했다고 하면서 교만해지면 변화의 가능성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파멸의 자리에 들어갈 때에나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교만이 그렇게 무섭습니다.
잠언서 16장 18절에서는 교만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잠언 16:18)

바리새인의 모습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끊임없이 남과 자기를 비교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과 같지 않은데요. 나를 저 세리와 비교해서는 안 되는데요.” 하는 신앙적인 독선이 그 안에 들어 있습니다.
‘신앙적’인 것은 선한 것입니다. 그런데 독선이 들어가면, 다시 말해 교만해지면 다른 모든 것들을 내 마음대로 하려고 합니다. 모든 것을 나의 소유물로 만들려고 합니다. 모든 시선이 나만을 향하도록 만듭니다. 그리고 나만 잘나고 나만 높아져야 됩니다. 누구도 나와 비슷한 자리에 올라가면 안 되는 것입니다. 모든 독재자들이 그랬습니다.
바리새인은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스스로가 심판자가 되고 심지어 하나님의 역할을 하려고 하는 자리까지 나가게 됩니다. 그래서 이 바리새인의 기도문을 보면 기도문의 주어는 ‘나’입니다. ‘내가’ 이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자랑스러운 행위의 주체가 ‘나’인 것입니다. “나와 같이 이만큼 헌신하고, 나와 같이 이만큼 경건한 덕을 가진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아주 과시적인 기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맞다. 네가 참 잘하는 것 같다. 그런데 내가 들어갈 자리가 없구나. 내가 너와 함께할 자리가 없구나.” 탄식하시는 것입니다. 예배와 기도가 자기선전의 수단이 되면, 그것이 곧 예배와 기도의 타락입니다. 예배와 기도의 파멸입니다.
반면 예수님은 세리가 의롭다 칭함을 받았다고 이야기하십니다. 세리의 기도에는 특색이 있습니다. 먼저, ‘내’가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중심입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렇게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지만, 원어의 의미를 살려 다시 번역을 하면 하나님이 주어가 됩니다. “하나님이여, 죄인인 나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하나님이 주어가 되어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구하는 그런 기도입니다.
그는 존재 그 자체로 하나님 만나기를 열망했습니다. 하나님의 도움과 은혜를 구하며, 하나님이 이끌어주실 것을 갈급히 기다리는 존재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아뢴 것입니다. 불쌍히 여겨달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용서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긍휼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임을 확인하는 기도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의로움입니다.

예배를 드린다는 게 무엇일까요? 진정한 예배는 무엇입니까? 내가 낮아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의롭다고 여겼다. 내가 너를 높여주겠다.” 이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예배란, 우리를 향해서 “내가 너를 의롭다고 여긴다” 하시는 하나님의 선언을 받는 자리인 것입니다. “하나님, 죄인으로 왔습니다. 부족한 종으로 왔습니다.” 할 때에, 하나님께서 “네가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다. 네가 종이 아니라 이제는 내 자녀다.” 하고 나를 세워주시는 그 자리가 예배드리는 공동체의 자리입니다.
기도는 무엇일까요? 찬양은 무엇일까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찬양을 받으실까요? 찬양의 가사가 나의 기도가 될 때입니다. 그래야 그 찬양이 하나님 앞에 상달됩니다.
내 자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랑을 만드는 자리, 나 자신을 비워서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는 자리가 바로 예배드리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그동안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뽐내기도 하고, 반대로 열등감 속에서 좌절하며 고통 받았던 비교의식, 우월감, 열등감의 고리를 끊어버리며, ‘나는 소중한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이라는 것을 깨닫는 자리가 예배입니다. 내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고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복된 자리가 바로 예배하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8장 14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누가복음 18:1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세상에서는 “내가 이런 사람입니다.” 하고 자랑 좀 해도 괜찮습니다. 요새는 자랑하는 시대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 앞에 예배드릴 때는 나의 연약한 실존, 죄 많은 실존, 부끄러운 실존 그대로 주님 앞에 나오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내가 이런 사람입니다. 오늘도 찾아오시옵소서. 그리고 억눌림에서부터 나를 해방시키시옵소서. 내가 오늘도 하나님의 아들이고 딸인 것을 확인하게 하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깨닫고 오늘도 세상을 향해 나가게 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하며 찬양 부르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여기신 이 축복의 자리에 참여하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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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8: 9 ~ 14

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북한을 위해 더욱 열심히 기도할 때입니다.

우리는 새벽마다 북한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특히 지금 북한의 사태를 보면, 북한을 위해 더욱 기도해야 할 때라 여겨집니다. 김정은 체제가 북한의 소위 제2인자로 알려졌던 장성택, 김정은의 고모부를 전격 숙청했습니다. 죄목은 경제와 군을 자기 손에 장악하고 김정은 체제를 뒤집겠다는 쿠데타의 도모, 즉 반란죄였습니다.
보도에 의하면 군사재판 하루 이틀 만에 기관총으로 쏴 죽이고, 그것도 모자라 화염방사기로 시체까지 불태웠다고 합니다. 미 백악관은 논평에서, 이 일이 김정은 정권의 극단적 잔인함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의 숙청에 희생이 될지, 또 백성들은 얼마나 두려움에 떨면서 한 사람의 눈치를 보며 살게 될지 가슴이 답답합니다.
북한을 보면 오직 한 사람의 의견만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 한 사람의 자유를 위해서는 다른 것들에 막대한 출혈이 있어도 괜찮다는 사회입니다. 이것이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도저히 예측 불가능한 정권입니다. 국민들과 나라를 한 사람이 사유화한 정권입니다.
그런데 어제 보도에 의하면, 분위기 반전이 있었다고 합니다. 포상잔치를 했다는 것입니다. 장성택의 사형 사실을 공개한 지 이틀 만에 경제건설에서 공헌을 세운 군인과 주민들을 대대적으로 표창했다는 소식이 연속적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대단히 노회한, 백성을 조정하고 통제하는 수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2015년이 되면, 남북이 갈라진 지 70년의 세월이 지납니다. 성경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로 붙잡혀간 지 70년 만에 되돌아오게 됩니다. 우리도 희망을 놓지 않고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특히 함께 기도해야 할 몇 가지 제목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한반도에 다시는 피 흘림의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절체절명의 과제입니다. 두 번째는 자유와 민주와 평화통일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저 북녘의 백성들이 이제는 억압의 통치에서 해방되고, 무너진 재단을 다시 쌓아 하나님 앞에 마음껏 예배드릴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는 달랐습니다.

인간이 오만방자해지면 어떤 길을 가게 되는지 하나님이 우리 현실에서 보여주시는 예가 바로 북한 정권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다시 묵상해 봅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오만한 사람들, 교만한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인가를 말씀하십니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누가복음 18:9)

자기만 옳고 다른 사람들은 다 그르고, 다 못됐다고 하면서 하나님까지도 자기 소유물로 삼으려고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두 명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한 명은 당대에 존경을 받던 종교인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종교적인 열심과 헌신을 갖고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던 지도자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은 멸시와 천대를 받던 세리였습니다. 그는 유대인에게 세금을 걷어 로마제국에 갖다 바치는, 그래서 매국노라고 비난받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방인을 만나는 직업이기에 율법을 어길 수밖에 없는 자였습니다.
그 둘은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하기 위해서 성전으로 올라갔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에 올라가시면서 그들의 모습을 눈여겨보셨던 것 같습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예수님은 하나하나 묘사하십니다. 그들의 태도는 어떠했고, 기도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요?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누가복음 18:11~12)

바리새인은 아주 자신만만합니다. 의기양양합니다. ‘나같이 헌신적이고 경건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 자랑하는 모습이 그대로 전달됩니다. 그런데 세리의 기도는 어떠했을까요?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누가복음 18:13)

세리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아주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비천한 모습으로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기의 차이가 내용의 차이로 나타납니다.

이처럼 둘의 기도하는 자세와 태도는 다릅니다. 바리새인은 따로 서서 기도했습니다. 자신을 보라는 듯이 맨 앞으로 나갔는지 아니면 따로 옆에 섰는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따로’ 섰다는 것입니다. ‘나를 보라. 내 기도하는 모습을 보라. 나는 너희와 같지 않다.’ 나타내고 싶었던 것입니다.
‘바리새’라는 말의 본래 뜻은 ‘구별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는 ‘나는 너와 차별되어야 해. 나는 너와 구별되었어.’하는 자기 과시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우월한 것을 지니고 있다고 여겨 자랑스럽게 따로 선 것입니다.
그런데 세리도 멀리 따로 섰습니다.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가 따로 선 것은, 남들과 함께 기도할 수 없는 사람으로 스스로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따로 선 두 사람의 동기는 다릅니다. 한 사람은 ‘나는 너희와 다르니까 나를 바라보라’는 의미에서 따로 선 것이고, 다른 한 사람은 ‘내가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같이 있을 수 있을까? 나는 사람들 앞에 내놓을 것이 없는 부끄러운 죄인이다.’하는 마음에서 따로 섰던 것입니다.
또한 기도의 내용을 보면 놀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바리새인은 훌륭한 종교인입니다. 기도의 대상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으며, 기도도 멋지게 잘하는 사람입니다. 마치 정교하게 잘 갖춰진 기도문과도 같은 기도였습니다. 게다가 감사를 고백하는 기도였습니다. 기도 중에 최고의 기도는 감사기도입니다. 그의 삶은 감사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기도는 예수님의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감사의 선언처럼 소중한 것이 없는데 왜 예수님은 이 감사의 기도를 거절하셨을까요?
그의 감사는 하나님을 높이는 감사가 아니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감사였습니다. 자랑하고 싶은 감사였습니다. 바리새인의 감사를 들어보면, 첫째 하지 않은 것에 대한 감사가 있습니다.
“나는 남들이 그러하듯 남의 것을 빼앗지 않았습니다. 도둑질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불의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처럼 간음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십계명의 중요한 덕목을 잘 지켰습니다…”
자기가 얼마나 칭찬받을 만한 인물인가를 하나하나 조목조목 하나님 앞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를까봐,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을 놓칠까봐,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을 칭찬하지 않을까봐 그동안 얼마나 잘했는지를 하나님 앞에 아뢰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지 않은 것을 자랑할 뿐만 아니라 행한 것까지 자랑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금식을 해도 일주일에 한 번만 하면 족하지만 나는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했습니다. 나는 소득의 십일조를 드려서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철저하게 잘 지켰습니다.”

예수님은 동기를 중요하게 보십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좋은 신앙인의 표본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율법의 말씀대로 경건한 삶을 산 인물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네 모습이 하나님 마음에 안들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너무 다르지 않습니까? 이유가 무엇일까요? 14절 말씀에 예수님의 판정과 그 판정 기준이 나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누가복음 18:14)

예수님은 그의 외적 행위에, “박수치고 싶구나. 너 정말 수고했구나. 남의 것 노략질 안하고 참으로 경건하게 살려고 애썼구나!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금식도 하고, 하나님께 헌금도 내면서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명령을 잘 지켰구나!” 하고 칭찬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외적인 행위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은 동기였습니다. 마음의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했느냐? 무슨 마음으로 그렇게 했느냐? 네가 자랑하려고 그 일을 한 것 아니냐? 교만한 마음으로 그것을 한 것이 아니냐? 사람에게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지금 예배시간 아니냐? 기도하는 시간 아니냐? 하나님 앞에서 예배드린다는 것은 네가 겸손해지는 시간 아니냐?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고 내 실존의 무능함과 나의 죄인 됨을 고백하는 시간이 아니더냐?” 예수님은 질문하시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자기연설이고, 자기자랑이었습니다. 세속적인 말로 표현하면 정치적인 프로파간다였습니다. 심지어 그는, “내가 얼마나 멋있는 사람인지 알고 있냐? 내가 얼마나 경건한 사람인 줄 아느냐? 내가 얼마나 맡은 직분을 잘 수행하는 사람인 줄 아냐? 사람들아, 제발 좀 알아다오.”에 그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서 이야기한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좀 알아주십시오. 내가 얼마나 괜찮은, 경건한 인물인지 말입니다. 얼마나 충성스러운지 말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자기를 뽐내면서 하나님을 훈계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에서 싫어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용납하지 않으시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감히 창조주 앞에서 건방을 떠는 것, 교만해지고 오만해지는 것, 스스로가 심판관이 되어 하나님의 역할을 대행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받아들이실 수 없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속에 무엇이 있었습니까? 교만이 있었습니다. 교만은 마치 속옷과도 같습니다. 입을 때는 가장 먼저 입습니다. 하지만 벗을 때는 가장 늦게 벗습니다. 인간의 본질 속에서, 심성 속에서 인간을 붙잡는 것이 교만임을 하나님은 가르쳐주고 계신 것입니다.
교만이 얼마나 우리의 삶에 붙어 있느냐하면, 아무것이 없어도 교만해지고,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도 교만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경고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하면서도 인간이 교만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네가 하나님을 잘 믿느냐? 믿으면서도 교만하구나! 네가 기도하고 있느냐? 그 기도가 교만하구나! 네가 예배드리고 있느냐? 예배를 드리면서도 교만하구나! 네가 감사하느냐? 찬송을 부르느냐? 그런데도 네가 교만하구나!”
교만이 얼마나 우리를 붙잡고 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종종 바리새인들을 꾸짖으셨던 이유도 교만이었습니다. “화가 있을지어다. 회칠한 무덤 같은 자들아.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들이 인간의 본성 속에 숨어있는 교만의 깊이를 감추면서 겉모양만 신앙생활하고 겉모양만 종교인이 되었구나! 너희들은 신앙인이 아니라 종교인일 뿐이다! 너희 속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가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니냐?”

교만은, 하나님의 자리를 뺏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서 교만한 것은 변화의 가능성이 있지 않습니까? 예수 믿고 회개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교만을 벗게 된다는 가능성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잘 안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잘 믿고, 오랫동안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했다고 하면서 교만해지면 변화의 가능성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파멸의 자리에 들어갈 때에나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교만이 그렇게 무섭습니다.
잠언서 16장 18절에서는 교만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잠언 16:18)

바리새인의 모습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끊임없이 남과 자기를 비교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과 같지 않은데요. 나를 저 세리와 비교해서는 안 되는데요.” 하는 신앙적인 독선이 그 안에 들어 있습니다.
‘신앙적’인 것은 선한 것입니다. 그런데 독선이 들어가면, 다시 말해 교만해지면 다른 모든 것들을 내 마음대로 하려고 합니다. 모든 것을 나의 소유물로 만들려고 합니다. 모든 시선이 나만을 향하도록 만듭니다. 그리고 나만 잘나고 나만 높아져야 됩니다. 누구도 나와 비슷한 자리에 올라가면 안 되는 것입니다. 모든 독재자들이 그랬습니다.
바리새인은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스스로가 심판자가 되고 심지어 하나님의 역할을 하려고 하는 자리까지 나가게 됩니다. 그래서 이 바리새인의 기도문을 보면 기도문의 주어는 ‘나’입니다. ‘내가’ 이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자랑스러운 행위의 주체가 ‘나’인 것입니다. “나와 같이 이만큼 헌신하고, 나와 같이 이만큼 경건한 덕을 가진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아주 과시적인 기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맞다. 네가 참 잘하는 것 같다. 그런데 내가 들어갈 자리가 없구나. 내가 너와 함께할 자리가 없구나.” 탄식하시는 것입니다. 예배와 기도가 자기선전의 수단이 되면, 그것이 곧 예배와 기도의 타락입니다. 예배와 기도의 파멸입니다.
반면 예수님은 세리가 의롭다 칭함을 받았다고 이야기하십니다. 세리의 기도에는 특색이 있습니다. 먼저, ‘내’가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중심입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렇게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지만, 원어의 의미를 살려 다시 번역을 하면 하나님이 주어가 됩니다. “하나님이여, 죄인인 나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하나님이 주어가 되어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구하는 그런 기도입니다.
그는 존재 그 자체로 하나님 만나기를 열망했습니다. 하나님의 도움과 은혜를 구하며, 하나님이 이끌어주실 것을 갈급히 기다리는 존재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아뢴 것입니다. 불쌍히 여겨달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용서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긍휼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임을 확인하는 기도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의로움입니다.

예배를 드린다는 게 무엇일까요? 진정한 예배는 무엇입니까? 내가 낮아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의롭다고 여겼다. 내가 너를 높여주겠다.” 이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예배란, 우리를 향해서 “내가 너를 의롭다고 여긴다” 하시는 하나님의 선언을 받는 자리인 것입니다. “하나님, 죄인으로 왔습니다. 부족한 종으로 왔습니다.” 할 때에, 하나님께서 “네가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다. 네가 종이 아니라 이제는 내 자녀다.” 하고 나를 세워주시는 그 자리가 예배드리는 공동체의 자리입니다.
기도는 무엇일까요? 찬양은 무엇일까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찬양을 받으실까요? 찬양의 가사가 나의 기도가 될 때입니다. 그래야 그 찬양이 하나님 앞에 상달됩니다.
내 자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랑을 만드는 자리, 나 자신을 비워서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는 자리가 바로 예배드리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그동안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뽐내기도 하고, 반대로 열등감 속에서 좌절하며 고통 받았던 비교의식, 우월감, 열등감의 고리를 끊어버리며, ‘나는 소중한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이라는 것을 깨닫는 자리가 예배입니다. 내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고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복된 자리가 바로 예배하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8장 14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누가복음 18:1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세상에서는 “내가 이런 사람입니다.” 하고 자랑 좀 해도 괜찮습니다. 요새는 자랑하는 시대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 앞에 예배드릴 때는 나의 연약한 실존, 죄 많은 실존, 부끄러운 실존 그대로 주님 앞에 나오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내가 이런 사람입니다. 오늘도 찾아오시옵소서. 그리고 억눌림에서부터 나를 해방시키시옵소서. 내가 오늘도 하나님의 아들이고 딸인 것을 확인하게 하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깨닫고 오늘도 세상을 향해 나가게 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하며 찬양 부르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여기신 이 축복의 자리에 참여하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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