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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를 분별하라!

로마서 13: 11 ~ 14

김지철 목사

2010.11.28

인생은 선택입니다

누군가 말하기를 “인생은 영어 알파벳의 ABCD와 같다”라고 표현했습니다. A는 Affection, 즉 사랑과 애정입니다. 산다는 것은 곧 사랑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온 우주가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말은 하나님이 사랑으로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이 우주의 질서, 우주의 아름다움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이 땅에 오기 전에도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분들이 서로 사랑하고 축복했기에 우리들의 인생이 시작되었고 우리가 이 세상에 생겼습니다.
두 번째는 B는 Birth, 즉 출생입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 소리쳐서 엉엉 울었습니다. 그런데 그 울음소리를 반가워하며 기뻐하는 분들이 계셨습니다. 인간의 생명은 어떤 생명이든 축하받을 권리와 자격이 있습니다.
그리고 C를 건너뛰어서 D는 Death, 즉 죽음입니다. 인생의 시작이 출생이라면 인생의 마지막은 죽음입니다. 소망동산에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흙에서 와서 다시 흙으로 돌아갈 인생입니다.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마치 들에 핀 들꽃같이 한참 피다가 사라지고 시들어지는 것이 인생입니다. 아침안개와도 같이 언젠가는 사라져갈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지난주 저는 저의 부모님을 소망동산으로 이장하였습니다. 오랜 동안 마음속에 기도하면서 준비했던 일이었습니다. 나를 낳아주시고 키워주신 아버지와 어머니의 은혜에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분골만 남은 두 분의 유골을 보면서 다시 다짐해보았습니다. ‘언젠가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는 날에 나도 저 소망동산에 저렇게 한줌의 재로 묻혀야 할 것이다. 주님,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에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히 살겠습니다. 사랑하면서 살겠습니다. 하나님 충성하면서 몸 된 교회를 위해서 살겠습니다.’ 이렇게 내게 주신 사명을 다시 한 번 확인하였습니다.
출생이 있으면 죽음이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다가오는 죽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시간 속에 작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B와 D사이에 C가 있습니다. C는 바로 Choice, 즉 선택하고 결단하는 것입니다. 출생과 죽음사이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인생을 선택하면서 살아보라는 것입니다. 선택과 결단의 과정은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지금 내가 여기까지 온 것도 나의 결단과 선택에 의한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의 남은 생애 역시 내가 어떤 결단을 하고 선택을 하는가에 따라서 달라질 것입니다.

신앙은 올바르게 분별하고 선택하며 결단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선택은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은혜와 섭리로 이끌어주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복주겠다. 내가 너를 약속의 땅으로 이끌겠다. 내가 너를 구원하겠고 저 하늘의 지혜를 주겠다.’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과 더불어 반복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선택하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옳은 것을 향하서 결단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순간에도 인간의 자유와 자율성을 파괴하지 않고 배려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선택의 자리를 허락하셨습니다.
신앙을 여러 가지로 정의할 수 있지만 본문을 통해서는 올바르게 분별하고, 선택하고, 결단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두 가지 서로 대비적인 단어가 있습니다. 밤과 낮, 자는 것과 깨는 것, 어두움의 일과 빛의 갑옷, 그리고 육신의 일-방탕, 술 취함, 음란, 호색, 다툼과 시기-과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일, 이렇게 두 가지를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서 물으십니다. 어떤 것을 택할 것인가? 어떤 것을 분별하여 삶을 살아갈 것인가를 우리에게 요청하십니다.
선택하려고 하면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어떤 것이 옳고 그른가? 어떤 것이 밝고 어두운 것인가? 어떤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고 싫어하시는 것인가? 우리는 이것을 끊임없이 물어야 바른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합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로마서 13:12)

어둠이 사라지기 위해서는 오직 빛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참된 빛에 들어와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빛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실 우리는 반사체에 불과합니다. 발광체는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령님만이 참된 빛의 근원이시고 빛 자체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빛을 쬐기 위해 주님 앞에 나아와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인생은 놀이터인 동시에 전쟁터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밤은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잠자는 것이 죄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판단할 수 있는 분별력을 가지고 나아갈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인생은 놀이터(playground)이면서 동시에 전쟁터(battlefield)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놀이터로 초청하실 때는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해야합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감사하면서 뛰놀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삶입니다. 그런데 사탄이 들어와서 그 놀이터를 방해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놀이터는 전쟁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적을 물리치고 승리해야하는 긴장과 격렬한 투쟁이 있는 장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놀이터에서 불평과 불만을 갖고 다른 사람을 헐뜯고 덤벼들어 공격하는 것 같이 잘못된 삶의 습관들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것은 인생을 잘못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생을 낭비하는 삶입니다. 반대로 지금은 전쟁터인데 너무 느긋하게 게으름을 피우다가 그 전쟁터에서 패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자리를 바르게 감당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두 가지를 어떻게든 합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래서 만들어낸 것이 놀이터(playground)와 전쟁터(battlefield)를 합한 운동경기장(sports-ground)입니다. 올림픽 경기, 아시안 게임, 월드컵과 같은 것이 이에 해당할 것입니다. 여기에는 가장 격한 격투기에서부터 집 앞에서 쉽게 할 수 있는 배드민턴까지 다양하게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가 함께 묶여져 있습니다. 하나는 즐거움입니다. 또 하나는 전투적인 긴장감입니다. 경기장 안에서 뛰는 선수들에게는 룰이 있습니다. 그들은 경기의 규칙에 맞춰서 상대방을 이겨야합니다. 경기를 보는 관중은 훨씬 여유가 있습니다. 그들은 그냥 즐기면 됩니다. 내가 응원하는 팀이 이기면 기분이 좋습니다. 그러나 진다고해도 내가 진 것은 아닙니다. 짜릿한 긴장감을 즐기는 것만으로도 괜찮은 것입니다.

삶을 즐기되 쾌락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 놀이터와 전쟁터를 함께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삶을 즐겨야 합니다. 먹고 마시는 것을 즐거워해야 합니다. 내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를 사랑으로 즐겨야 합니다. 내게 주신 직업의 현장을 즐거워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를 어지럽게 하는 사탄의 세력이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본능적인 쾌락만을 추구하게 하고 이기적인 탐욕을 만들어내는 것이 우리를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쁨과 축복의 현장을 사라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 때 우리는 정신을 차려야합니다.
삶을 사는 두 가지의 극단적인 방식이 있습니다. 하나는 금욕주의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방탕주의 방식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누가복음 15장에 탕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여기서 큰아들은 금욕주의적인 삶을 대표합니다. 그는 아버지의 규칙을 잘 지켜 아버지가 하라는 대로 했습니다. 그는 수고했고 땀 흘렸으며 집밖으로 나가본 적도 없었습니다. 다른 친구들과 나쁜 짓도 하지 않는 모범생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그 아들을 꾸짖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는 주어진 규칙대로 잘 살았지만 기쁜 마음으로 살지 않고 마지못해 억지로 했습니다. 그는 아들로서 아버지의 것이 내 것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기뻐하면서 산 것이 아니라, 마치 종처럼 내가 아버지에게 무언가 얻어먹을 것은 없는지 살피며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했습니다. 그는 자부심도 없었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그를 향해서 꾸중한 것입니다. “네가 모든 걸 잘했다. 그런데 내 것이 다 네 것인 줄을 몰랐더냐?” 아들이 갖고 있는 특권을 놓치며 살았을 때 그의 인생은 아버지께 꾸중을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인생은 기쁨이 없는 인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속에 감사와 즐거움이 사라진 인생이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방탕주의를 대표하는 둘째아들은 쾌락만을 추구했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거부했습니다. 그에게는 절제하는 규칙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가졌던 돈과 재물을 한 순간에 다 잃었습니다. 그토록 좋아했던 여인들도 그의 주위를 떠났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채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 통에 그의 입을 갖다 박았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주신 축복을 모두 잃었습니다. 그는 즐거움을 추구했지만 그것은 쾌락이었습니다. 그것은 자기 혼자서 모든 것을 취하려고 했던 욕망이고 탐욕일 뿐이었습니다.

지적인 게으름에 빠져 분별력을 잃지 마세요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려면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즐거움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놓치면 안 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이 특권을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을 즐거워해야합니다. 그런데 동시에 우리에게 규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순종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순종하려면 먼저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분별력과 함께 절제력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분별하는 능력을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십니다. 분별하는 것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은 지적인 노동입니다. 분별력을 갖는다는 것은 정신적인 노동이요 영적인 노동입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 고뇌해야 분별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분별력은 자동적으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변증가였던 C. S. 루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게으름뱅이들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그렇지만 지적인 게으름뱅이들은 더더욱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육체적으로 게으름뱅이가 된 것은 이미 정신적으로 게으름뱅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육체적으로 타락에 빠지는 것은 이미 지적인 분별력을 상실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적인 게으름에 빠지면 생각과 판단이 중지됩니다. 그리고 분별하는 능력이 중지되고 실천하려는 삶의 태도들을 멈추게 됩니다. 그래서 지적인 게으름은 아주 무서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육체적인 게으름을 죄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지적인 게으름 속에서 분별력을 잃어버리는 것 또한 더 큰 죄악입니다. 그것은 삶을 포기하는 것이며 삶이 가지고 있는 특권을 모두 놓치는 악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 시대가 지니고 있는 문제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분별하기를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그냥 편안한 것이면 다 좋은 것입니다. 요사이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까지도 마음대로 팽개쳐버리고 있습니다. 학교교육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자녀들을 그냥 팽개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좋은 교사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점점 어둠속으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꾸중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지고 있습니다.
정치가 국가의 이익을 도외시하고 당리당략의 정치가 되었다면 그것은 분별력 없는 정치가들의 모습 때문입니다. 기업이 국민의 건강과 풍요를 생각하지 않고 돈과 재물의 이익만을 탐하는 기업이 되었다면 그것은 못된 기업가들의 모습 때문입니다. 교육이 인성과 지성과 덕성을 세우지는 않고 입시준비만을 위한 교육이 된다면 그것은 참된 교육이라고 이야기할 수가 없습니다. 사회정의와 공의가 세워지지 않고 거짓과 불의를 방치하는 사회는 악한사회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과 헌신과 도덕성이 사라지고 명예와 권력만을 탐하는 종교는 가짜종교일 수밖에 없습니다.

분별력을 가지고 빛 되신 그리스도께로 나아가십시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로마서 13:13~14)

이것은 어거스틴이 회심할 때 읽었던 유명한 구절입니다. 그는 이 구절을 딱 본 순간에 받은 충격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나에게는 좀 더 읽어봐야겠다는 마음도 들지 않았고, 더 읽어야 할 필요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 문장의 마지막 부분에 눈이 가는 순간 마치 한줄기 광선 같은 확신이 갑자기 내 마음속에 밀려들어와 온갖 어둠과 의심을 내쫓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이 말씀을 듣고 자기 속에 어둠과 방탕과 음란과 호색이 가득 차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예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본문은 말씀합니다. 밤에 잔다는 것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낮까지 잠을 자면서 침대에 누워 뭉개는 것은 방탕이요 무절제의 게으름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은 삶의 즐거움입니다. 그러나 폭식하고 폭음하는 것은 자기의 생각과 정신을 지배당하는 것입니다. 결혼한 부부간에 성적인 만족과 즐거움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축복입니다. 그런데 이 축복받은 가정을 파괴하는 주범이 있습니다. 그것은 남의 아내, 남의 남자를 통해서 자기의 성적욕구를 채우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부부의 기쁨과 가정의 소중함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이런 음란과 호색을 멈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남이 잘 되는 것을 끌어내리려 하지 말고, 남이 축복받으면 박수쳐주고 위로하며 격려하고, 남이 고통 받으면 함께 기도하고 세워주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분별력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속에 있는 어둠을 이겨나가려면 우리가 빛의 자리로 들어와야 합니다. 이 세상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 빛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우리의 가슴에 모셔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빛의 갑옷을 입으라. 그분으로 내 모든 것을 채우라. 예수님의 빛으로 생각하고, 예수님의 빛으로 판단하고, 예수님의 빛으로 순종하고, 예수님의 빛으로 행해나가라. 그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통해서 새로운 역사를 이루어주실 것이다.”
우리에게는 빛이 없습니다. 빛 되신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펴서 읽으십시오. 그리고 “예수님, 제게 와주세요. 저를 비춰주세요. 저를 통해서 이 땅에 생명을 나타내주세요. 먼저 제게 분별력을 주시고 옳은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와 담대함을 주세요.” 이렇게 고백하면서 빛이신 예수님과 함께 나아가는 복된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
하나님 아버지, 분별하지 않음으로 우리의 삶이 망가질 때가 참으로 많았습니다. 주님, 저희로 하여금 빛의 갑옷을 입어 생각하게 하시고 선택하고 결단하게 하옵소서. 그래서 주님의 도우심과 함께 우리의 인생을 열어가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가 빛의 통로가 되어서 세상의 어둠을 밝혀주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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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3: 11 ~ 14

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인생은 선택입니다

누군가 말하기를 “인생은 영어 알파벳의 ABCD와 같다”라고 표현했습니다. A는 Affection, 즉 사랑과 애정입니다. 산다는 것은 곧 사랑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온 우주가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말은 하나님이 사랑으로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이 우주의 질서, 우주의 아름다움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이 땅에 오기 전에도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분들이 서로 사랑하고 축복했기에 우리들의 인생이 시작되었고 우리가 이 세상에 생겼습니다.
두 번째는 B는 Birth, 즉 출생입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 소리쳐서 엉엉 울었습니다. 그런데 그 울음소리를 반가워하며 기뻐하는 분들이 계셨습니다. 인간의 생명은 어떤 생명이든 축하받을 권리와 자격이 있습니다.
그리고 C를 건너뛰어서 D는 Death, 즉 죽음입니다. 인생의 시작이 출생이라면 인생의 마지막은 죽음입니다. 소망동산에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흙에서 와서 다시 흙으로 돌아갈 인생입니다.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마치 들에 핀 들꽃같이 한참 피다가 사라지고 시들어지는 것이 인생입니다. 아침안개와도 같이 언젠가는 사라져갈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지난주 저는 저의 부모님을 소망동산으로 이장하였습니다. 오랜 동안 마음속에 기도하면서 준비했던 일이었습니다. 나를 낳아주시고 키워주신 아버지와 어머니의 은혜에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분골만 남은 두 분의 유골을 보면서 다시 다짐해보았습니다. ‘언젠가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는 날에 나도 저 소망동산에 저렇게 한줌의 재로 묻혀야 할 것이다. 주님,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에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히 살겠습니다. 사랑하면서 살겠습니다. 하나님 충성하면서 몸 된 교회를 위해서 살겠습니다.’ 이렇게 내게 주신 사명을 다시 한 번 확인하였습니다.
출생이 있으면 죽음이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다가오는 죽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시간 속에 작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B와 D사이에 C가 있습니다. C는 바로 Choice, 즉 선택하고 결단하는 것입니다. 출생과 죽음사이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인생을 선택하면서 살아보라는 것입니다. 선택과 결단의 과정은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지금 내가 여기까지 온 것도 나의 결단과 선택에 의한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의 남은 생애 역시 내가 어떤 결단을 하고 선택을 하는가에 따라서 달라질 것입니다.

신앙은 올바르게 분별하고 선택하며 결단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선택은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은혜와 섭리로 이끌어주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복주겠다. 내가 너를 약속의 땅으로 이끌겠다. 내가 너를 구원하겠고 저 하늘의 지혜를 주겠다.’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과 더불어 반복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선택하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옳은 것을 향하서 결단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순간에도 인간의 자유와 자율성을 파괴하지 않고 배려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선택의 자리를 허락하셨습니다.
신앙을 여러 가지로 정의할 수 있지만 본문을 통해서는 올바르게 분별하고, 선택하고, 결단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두 가지 서로 대비적인 단어가 있습니다. 밤과 낮, 자는 것과 깨는 것, 어두움의 일과 빛의 갑옷, 그리고 육신의 일-방탕, 술 취함, 음란, 호색, 다툼과 시기-과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일, 이렇게 두 가지를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서 물으십니다. 어떤 것을 택할 것인가? 어떤 것을 분별하여 삶을 살아갈 것인가를 우리에게 요청하십니다.
선택하려고 하면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어떤 것이 옳고 그른가? 어떤 것이 밝고 어두운 것인가? 어떤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고 싫어하시는 것인가? 우리는 이것을 끊임없이 물어야 바른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합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로마서 13:12)

어둠이 사라지기 위해서는 오직 빛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참된 빛에 들어와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빛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실 우리는 반사체에 불과합니다. 발광체는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령님만이 참된 빛의 근원이시고 빛 자체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빛을 쬐기 위해 주님 앞에 나아와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인생은 놀이터인 동시에 전쟁터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밤은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잠자는 것이 죄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판단할 수 있는 분별력을 가지고 나아갈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인생은 놀이터(playground)이면서 동시에 전쟁터(battlefield)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놀이터로 초청하실 때는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해야합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감사하면서 뛰놀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삶입니다. 그런데 사탄이 들어와서 그 놀이터를 방해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놀이터는 전쟁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적을 물리치고 승리해야하는 긴장과 격렬한 투쟁이 있는 장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놀이터에서 불평과 불만을 갖고 다른 사람을 헐뜯고 덤벼들어 공격하는 것 같이 잘못된 삶의 습관들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것은 인생을 잘못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생을 낭비하는 삶입니다. 반대로 지금은 전쟁터인데 너무 느긋하게 게으름을 피우다가 그 전쟁터에서 패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자리를 바르게 감당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두 가지를 어떻게든 합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래서 만들어낸 것이 놀이터(playground)와 전쟁터(battlefield)를 합한 운동경기장(sports-ground)입니다. 올림픽 경기, 아시안 게임, 월드컵과 같은 것이 이에 해당할 것입니다. 여기에는 가장 격한 격투기에서부터 집 앞에서 쉽게 할 수 있는 배드민턴까지 다양하게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가 함께 묶여져 있습니다. 하나는 즐거움입니다. 또 하나는 전투적인 긴장감입니다. 경기장 안에서 뛰는 선수들에게는 룰이 있습니다. 그들은 경기의 규칙에 맞춰서 상대방을 이겨야합니다. 경기를 보는 관중은 훨씬 여유가 있습니다. 그들은 그냥 즐기면 됩니다. 내가 응원하는 팀이 이기면 기분이 좋습니다. 그러나 진다고해도 내가 진 것은 아닙니다. 짜릿한 긴장감을 즐기는 것만으로도 괜찮은 것입니다.

삶을 즐기되 쾌락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 놀이터와 전쟁터를 함께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삶을 즐겨야 합니다. 먹고 마시는 것을 즐거워해야 합니다. 내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를 사랑으로 즐겨야 합니다. 내게 주신 직업의 현장을 즐거워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를 어지럽게 하는 사탄의 세력이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본능적인 쾌락만을 추구하게 하고 이기적인 탐욕을 만들어내는 것이 우리를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쁨과 축복의 현장을 사라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 때 우리는 정신을 차려야합니다.
삶을 사는 두 가지의 극단적인 방식이 있습니다. 하나는 금욕주의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방탕주의 방식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누가복음 15장에 탕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여기서 큰아들은 금욕주의적인 삶을 대표합니다. 그는 아버지의 규칙을 잘 지켜 아버지가 하라는 대로 했습니다. 그는 수고했고 땀 흘렸으며 집밖으로 나가본 적도 없었습니다. 다른 친구들과 나쁜 짓도 하지 않는 모범생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그 아들을 꾸짖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는 주어진 규칙대로 잘 살았지만 기쁜 마음으로 살지 않고 마지못해 억지로 했습니다. 그는 아들로서 아버지의 것이 내 것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기뻐하면서 산 것이 아니라, 마치 종처럼 내가 아버지에게 무언가 얻어먹을 것은 없는지 살피며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했습니다. 그는 자부심도 없었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그를 향해서 꾸중한 것입니다. “네가 모든 걸 잘했다. 그런데 내 것이 다 네 것인 줄을 몰랐더냐?” 아들이 갖고 있는 특권을 놓치며 살았을 때 그의 인생은 아버지께 꾸중을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인생은 기쁨이 없는 인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속에 감사와 즐거움이 사라진 인생이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방탕주의를 대표하는 둘째아들은 쾌락만을 추구했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거부했습니다. 그에게는 절제하는 규칙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가졌던 돈과 재물을 한 순간에 다 잃었습니다. 그토록 좋아했던 여인들도 그의 주위를 떠났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채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 통에 그의 입을 갖다 박았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주신 축복을 모두 잃었습니다. 그는 즐거움을 추구했지만 그것은 쾌락이었습니다. 그것은 자기 혼자서 모든 것을 취하려고 했던 욕망이고 탐욕일 뿐이었습니다.

지적인 게으름에 빠져 분별력을 잃지 마세요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려면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즐거움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놓치면 안 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이 특권을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을 즐거워해야합니다. 그런데 동시에 우리에게 규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순종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순종하려면 먼저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분별력과 함께 절제력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분별하는 능력을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십니다. 분별하는 것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은 지적인 노동입니다. 분별력을 갖는다는 것은 정신적인 노동이요 영적인 노동입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 고뇌해야 분별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분별력은 자동적으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변증가였던 C. S. 루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게으름뱅이들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그렇지만 지적인 게으름뱅이들은 더더욱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육체적으로 게으름뱅이가 된 것은 이미 정신적으로 게으름뱅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육체적으로 타락에 빠지는 것은 이미 지적인 분별력을 상실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적인 게으름에 빠지면 생각과 판단이 중지됩니다. 그리고 분별하는 능력이 중지되고 실천하려는 삶의 태도들을 멈추게 됩니다. 그래서 지적인 게으름은 아주 무서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육체적인 게으름을 죄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지적인 게으름 속에서 분별력을 잃어버리는 것 또한 더 큰 죄악입니다. 그것은 삶을 포기하는 것이며 삶이 가지고 있는 특권을 모두 놓치는 악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 시대가 지니고 있는 문제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분별하기를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그냥 편안한 것이면 다 좋은 것입니다. 요사이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까지도 마음대로 팽개쳐버리고 있습니다. 학교교육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자녀들을 그냥 팽개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좋은 교사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점점 어둠속으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꾸중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지고 있습니다.
정치가 국가의 이익을 도외시하고 당리당략의 정치가 되었다면 그것은 분별력 없는 정치가들의 모습 때문입니다. 기업이 국민의 건강과 풍요를 생각하지 않고 돈과 재물의 이익만을 탐하는 기업이 되었다면 그것은 못된 기업가들의 모습 때문입니다. 교육이 인성과 지성과 덕성을 세우지는 않고 입시준비만을 위한 교육이 된다면 그것은 참된 교육이라고 이야기할 수가 없습니다. 사회정의와 공의가 세워지지 않고 거짓과 불의를 방치하는 사회는 악한사회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과 헌신과 도덕성이 사라지고 명예와 권력만을 탐하는 종교는 가짜종교일 수밖에 없습니다.

분별력을 가지고 빛 되신 그리스도께로 나아가십시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로마서 13:13~14)

이것은 어거스틴이 회심할 때 읽었던 유명한 구절입니다. 그는 이 구절을 딱 본 순간에 받은 충격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나에게는 좀 더 읽어봐야겠다는 마음도 들지 않았고, 더 읽어야 할 필요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 문장의 마지막 부분에 눈이 가는 순간 마치 한줄기 광선 같은 확신이 갑자기 내 마음속에 밀려들어와 온갖 어둠과 의심을 내쫓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이 말씀을 듣고 자기 속에 어둠과 방탕과 음란과 호색이 가득 차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예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본문은 말씀합니다. 밤에 잔다는 것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낮까지 잠을 자면서 침대에 누워 뭉개는 것은 방탕이요 무절제의 게으름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은 삶의 즐거움입니다. 그러나 폭식하고 폭음하는 것은 자기의 생각과 정신을 지배당하는 것입니다. 결혼한 부부간에 성적인 만족과 즐거움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축복입니다. 그런데 이 축복받은 가정을 파괴하는 주범이 있습니다. 그것은 남의 아내, 남의 남자를 통해서 자기의 성적욕구를 채우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부부의 기쁨과 가정의 소중함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이런 음란과 호색을 멈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남이 잘 되는 것을 끌어내리려 하지 말고, 남이 축복받으면 박수쳐주고 위로하며 격려하고, 남이 고통 받으면 함께 기도하고 세워주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분별력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속에 있는 어둠을 이겨나가려면 우리가 빛의 자리로 들어와야 합니다. 이 세상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 빛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우리의 가슴에 모셔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빛의 갑옷을 입으라. 그분으로 내 모든 것을 채우라. 예수님의 빛으로 생각하고, 예수님의 빛으로 판단하고, 예수님의 빛으로 순종하고, 예수님의 빛으로 행해나가라. 그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통해서 새로운 역사를 이루어주실 것이다.”
우리에게는 빛이 없습니다. 빛 되신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펴서 읽으십시오. 그리고 “예수님, 제게 와주세요. 저를 비춰주세요. 저를 통해서 이 땅에 생명을 나타내주세요. 먼저 제게 분별력을 주시고 옳은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와 담대함을 주세요.” 이렇게 고백하면서 빛이신 예수님과 함께 나아가는 복된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
하나님 아버지, 분별하지 않음으로 우리의 삶이 망가질 때가 참으로 많았습니다. 주님, 저희로 하여금 빛의 갑옷을 입어 생각하게 하시고 선택하고 결단하게 하옵소서. 그래서 주님의 도우심과 함께 우리의 인생을 열어가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가 빛의 통로가 되어서 세상의 어둠을 밝혀주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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