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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들에게는 계속되는 고민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 청년들이 직장에서 경험하는 가장 큰 어려움이 무엇일까요? 또 직장생활을 통해 갖게 되는 고민은 무엇일까요? 이것에 관한 청년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중 몇 가지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한 청년의 고민입니다. “보람과 사명감이 아닌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일을 하다 보니 일이 즐겁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미래, 특히 경제적인 부분에 대한 부담감이 큽니다. 하나님이 어떤 일로 저를 사용하기 원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른 청년의 질문입니다. “왜 제가 가는 곳마다 일은 제대로 못하면서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이 있는 것일까요?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런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 것일까요?” 또 다른 청년의 고민입니다. “직장에 나가면 감정적인 사람이 되어 쉽게 화가 납니다. 그래서 직장 사람들에게 크리스천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기가 힘듭니다.”
이 내용들을 보면 고민은 크게 두 가지인 것 같습니다. 일의 목적과 의미에 관한 것, 사람에 관한 것. 일의 목적과 의미에 대한 질문의 핵심은 ‘돈 때문에 일을 해야 하는데 돈 때문에만 일해야 되는가’입니다. “일해야 하는 당위성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즐거움이 동반되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는 것입니다.
일을 열심히 하면서도 마음에 기쁨이 없다면, 돈 버는 것이 목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돈을 버는 것 자체에 목적을 두면, 삶이 살벌해지기 시작합니다. 모든 사람이 친구가 아니라 경쟁자가 되고 때로는 적대자로 변모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돈보다 더 큰 가치를 위해 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에 대한 질문의 핵심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입니다. 이것은 특히 부하 직원에게 시도 때도 없이 ‘갑질’을 하는 상사 밑에서 일하는 것에 대한 하소연이기도 합니다. 이런 고민에 빠진 청년들은 묻습니다. “다른 직장은 괜찮을까요? 다른 상사는 저러지 않을까요?” 대답하기 쉽지 않지만 일반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다른 곳으로 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디에 가나 내 마음을 거슬리는 사람이 있고,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장소나 직종을 바꾸는 것이 이 문제의 해결은 아닙니다.
저는 사람에 대한 생각을 할 때마다 예수님과 열두 제자를 떠올립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잘 아셨는데 왜 하필 가룟 유다를 열두 제자 중에 하나로 택하셨을까? 예수님이 가룟 유다가 변화되기를 기대하셨기 때문일까? 그가 회개하기를 원하셔서 그를 택하셨을까?’ 분명히 그가 회개하기를 원하셨지만, 그것이 이유는 아닐 것입니다. 누구를 택해도, 무작위로 사람을 택하든 아니면 의도적으로 누군가를 택하든 가룟 유다와 같은 사람은 등장하기 마련입니다. 가룟 유다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내 속에도 가룟 유다와 같은 속성이 들어 있습니다. 무언가에 반항하고 싶고, 기존의 틀을 때려 부수고 싶고, 내게 이익이 되는 것을 우선시하고 싶고, 다른 사람을 억누르고 싶은 마음이 우리 안에도 똑같이 들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어디를 가도 가룟 유다와 같은 사람이 있고,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싸움터와 놀이터를 오가며 살아갑니다.
청년들이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중대한 고민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청년들은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면 마음이 편해진다고 말합니다. 친구들과 말씀을 배우면 영혼의 쉼을 얻게 된다고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직장에 나가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동료들은 경쟁상대가 되고, 마치 전투장에 끌려가는 것 같은 긴장과 불안이 도처에 깔려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은 놀이터와 싸움터로 나뉩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가 분명하게 구분되지 않고, 섞여 있습니다. 본래 놀이터란 어떤 곳입니까? 쉼과 평안을 누리고 재충전함으로 용기를 얻게 되는 곳입니다. 이곳에서는 함께하는 사람들끼리 모두 승자가 되는 복을 얻습니다. 배려와 양보와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 그 안에 녹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싸움터는 어떻습니까? 긴장해야 하고 준비해야 합니다. 도전해야 하고 경쟁해야 됩니다. 처절한 싸움을 치른 후에는 승자와 패자가 나뉘게 됩니다. 이런 싸움터에서의 덕은 실력과 탁월성, 능숙함입니다.
우리 삶에서 놀이터는 어디일까요? 가정과 믿음의 형제자매가 있는 교회입니다. 또 세상 속에서는 우정을 나눈 친구들과의 모임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싸움터는 어디입니까? 집을 떠난 순간, 삶의 모든 자리가 싸움터가 됩니다. 사람들이 많이 이동하는 때에 버스나 지하철을 타 보신 적 있습니까? 자리가 하나 나면 많은 사람들이 그곳으로 득달같이 달려듭니다. 양보란 없습니다. 내가 편하게 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누구나 이기적으로 되는 것이 싸움터의 본질입니다.
올림픽도 하나의 예가 될 수 있습니다. 금메달 하나를 위해 얼마나 많은 선수들이 오랜 시간 땀을 흘립니까? 그래서 금메달을 목에 걸게 되면 그토록 감격하고, 반대로 메달을 얻지 못하게 되었을 때 통한의 논물을 흘리는 것이 아닙니까?
국가가 복지정책을 펼치는 것은 노인과 장애인처럼 연약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곧 그들이 싸움터가 아니라 놀이터에서 쉼과 평안을 누리며 서로 섬기는 삶을 살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현실 세계를 놀이터로 변화시키려는 노력입니다.
세상은 점점 싸움터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삶의 건강한 현장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놀이터는 점점 줄어들고 싸움터는 자꾸만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시대의 아픔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놀이터의 마지막 보루가 어디입니까? 가정 아닙니까? 그런데 서로 사랑해서 평생 함께하겠다고 약속한 부부가 더 이상 함께 살지 않겠다며 헤어지는 일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또 부모와 자녀 사이에 대화가 단절되고, 자식이 부모를 피하려는 일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행복의 베이스캠프인 가정조차 놀이터와 쉼터가 아니라 싸움터로 변질되는 것은 우리의 크나큰 슬픔과 아픔입니다.
교회는 어떻습니까? 믿음과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교회에서 차별대우를 받는 것 같다고 항의하고, 직분 하나를 얻기 위해 남의 흠집을 부풀려 사람들에게 알리면서까지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합니다. 또 목사와 장로의 갈등이 드러나면서 성도들이 가슴 아파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진정한 교회의 모습이 아닙니다.
이처럼 가정과 교회마저도 쉼터와 놀이터가 아니라 싸움터로 변질되고 있으니 우리가 어떻게 그곳에서 마음의 평안과 쉼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싸움터에서 받은 피곤함과 긴장을 풀기 위해 도피처를 찾습니다. 건전한 스포츠를 통해 위로를 받는 것은 괜찮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술 취함을 통해서 쉼을 얻으려고 합니다. 기업의 회식 문화가 왜 자꾸 커져 갑니까? 낮에는 원수처럼 싸우다가 저녁에는 술잔을 돌리면서 친구가 되어 보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아침이 되면 지난밤 친구가 되자고 했던 이들은 또다시 원수가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직장인들의 가슴을 멍들게 하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청년들이 갖고 있는 또 하나의 도피처는 바로 게임입니다. 요즘 게임에 몰입하는 젊은이들이 얼마나 많아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게임 속에서는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 내가 왕이나 영주가 되어 다른 사람을 지배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게임 속 세상에 몰두하는 이유입니다.
이처럼 술이나 게임, 성적 쾌락에 몰두하는 것은 싸움터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들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이 바른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고자 하는 일을 하는 것도 용기이지만,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단호하게 멈추고 잘라버리는 것도 용기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매우 중요한 태도입니다.
장성한 아들을 둔 어머니가 어렵고 힘든 일 가운데 유혹을 만날 때 이것을 염두에 두라며 아들에게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아들아! 잘못된 일이나 잘못된 인간관계에 관여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 때마다 그 일이나 관계에 네가 연루되었다는 것이 다음 날 뉴스에 대서특필로 보도된다고 상상해라. 네가 하는 일이나 맺은 관계가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면 하고 싶은 대로 해라.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면 당장 마음을 고쳐먹어야 한단다.”
이렇게까지 거창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됩니다. 쉽게 말해서 내 배우자나 자녀들 앞에서 부끄러운 일이라고 여겨지면 그 자리에서 멈추라는 것입니다. 해야 할 것을 하는 것도 일이지만, 하지 않아야 할 것을 멈추는 것도 우리에게 주어진 일입니다.
우리는 싸움터를 놀이터로 바꿀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복덩어리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 말은 곧 우리가 내가 있는 자리를 싸움터에서 놀이터와 쉼터로 변화시키는 사람들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나의 가정이 평안합니까? 가정 안에서 내 역할은 무엇입니까? 내가 아버지입니까? 내가 집에 들어가면 가족들이 환영합니까? 내가 어머니입니까? 내가 집안에 있으면 가족들이 집에 오는 것을 기뻐합니까? 내가 자녀입니까? 나를 통해서 우리 가정이 행복의 베이스캠프로 변화되고 있습니까? 우리 직장은 어떻습니까? 경쟁이 치열하다는 이유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가장자리로 자꾸만 밀려가겠습니까? 아니면 내가 있음으로 일하는 기쁨과 즐거움이 더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품겠습니까? 직장 안에서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친절한 사람이 곁에 있으면 좋겠습니까?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일하고 싶습니까? 내가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남이 그렇게 해 주기를 원하지만 말고 내가 먼저 그런 사람이 될 수는 없겠습니까?
우리는 일에 대하여, 또 사람에 대하여 몇 가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돈 때문에 일하지만 돈 때문에만 일하지 않겠다고 선언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그런 마음을 가지려고 애씁니다. ‘내가 돈 때문에 일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돈 때문에만 일하지 않겠다. 나에게는 돈보다 더 큰 꿈과 비전이 있다.’ 그런 생각으로 일하는 것입니다. 이 선언을 해야 마음에 여유가 생기기고 회사에서 어려운 일을 당해도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이 선언은 곧 나 자신만을 위한 삶에서 이웃을 위한 삶으로 인생을 전환시키겠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겠다는 각오입니다. “당장 밥벌이가 급한데 그게 되겠습니까?”라고 질문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선언을 계속 되새기며 일터로 나아가야 합니다.
둘째, 인간관계에 대해서는 예수님과 열두 제자를 기억합시다. 어떤 공동체에도 가룟 유다와 같은 사람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도망쳐서는 안 됩니다. 비록 그 사람 때문에 내 인생이 무너지는 한이 있더라도 도망가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열두 제자 중 한 사람만 가룟 유다이고, 나머지 열한 명은 동지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삶에 어둠의 그림자와 깊은 골짜기가 있더라도 다시 용기를 낼 수 있습니다. 다시 인간관계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훌륭한 조언자가 있습니다.
오늘 읽은 잠언서에는 이런 흥미로운 구절이 있습니다.
의논이 없으면 경영이 무너지고 지략이 많으면 경영이 성립하느니라 (잠언 15:22)
여기에는 의논, 경영, 지략이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의논이 무엇입니까? 더 좋은 방안이 무엇인지 대화하며 찾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경영이 무너진다고 합니다. 여기서의 경영은 계획 또는 뜻, 즉 내가 품고 있는 꿈과 비전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의논이 없으면 꿈과 비전이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략은 무엇일까요? 상담자, 조언자입니다. 나를 도와주고 나에게 조언을 해 줄 사람이 많으면 꿈과 비전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봅시다. 내게는 좋은 친구나 조언자가 있습니까?
지난 금요일에 소망교회의 구역지도자 모임이 있었습니다. 약 천 명에 가까운 권사님과 집사님들이 모였습니다. 구역모임은 믿음의 형제요 친구인 것을 확인하는 매우 복된 자리입니다. 모여서 성경 공부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쁨과 슬픔을 나누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구역지도자에게 반드시 필요한 태도가 있습니다. 바로 듣는 마음입니다. 내가 지도자라고 해서 나의 이야기만 늘어놓아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이 이야기할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모든 지도자가 가져야 할 덕목입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줄 알아야 사람들이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서로 들어줄 때, 그 공동체는 싸움터가 아니라 진정한 놀이터, 쉼터가 될 수 있습니다. 용기와 희망을 얻는 사랑방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최고의 친구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로 하나님이고 예수님이고 성령님이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문제나 선택 앞에서 나 자신과 대화하고 믿음의 동료나 멘토에게 물어야 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진정한 위로자요 조언자이신 성령님과 의논하는 것입니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 (잠언 16:3)
여기에 나타난 ‘행사’는 ‘모든 일’을 의미합니다. 즉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이 이루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나는 아무것도 안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노동을 소중히 여기는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수고하고 땀 흘리며 맡겨진 일을 하면 하나님이 내 인생에 계획되어진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이루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신앙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하나님이 내 삶의 자리에 들어오셔서 나와 동행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보면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 계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예수님을 통해서 행동하셨습니다. 성령님은 우리 믿음의 사람들과도 함께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님께 물을 때, 성령님은 우리를 이끌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경영이 우리를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직장을 다니고 있습니까? 직장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여러분에게 부탁합니다. 첫 번째, 다른 사람보다 십분 일찍 출근하십시오. 아침에 교회에 다녀오느라고 10분 늦었다고, 저녁에 집회가 있으니 10분 빨리 퇴근하겠다고 하는 것을 하나님이 결코 기뻐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내게 맡겨진 일을 성실히 최선을 다해 감당해야 합니다. 두 번째, 회사에 도착하면 자리에 앉아서 먼저 자신을 축복하십시오. “하나님, 제가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딸입니다. 제게 지혜를 주시고, 용기를 주세요. 제가 사람들과 잘 어울릴 수 있게 해 주세요.” 그런 후에 옆자리에 앉은 사람들과 직장을 축복하세요.
내 생각이 바뀌기 시작하면 내 말이 바뀝니다. 말이 바뀌면 몸의 근육상태가 바뀌고 표정이 바뀝니다. 따뜻한 미소가 나타나고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축복의 통로가 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순간마다 ‘성령님, 저의 조언자가 되어 주세요’라고 기도하십시오. 성령님은 우리의 위로자, 상담자, 조언자가 되어 주십니다. 우리가 그 성령님을 모시고 주어진 일들을 감당할 때, 내 인생의 계획이 하나님의 계획이 될 것이고 하나님의 경영이 내 인생의 경영이 될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축복을 경험하면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잠언 15: 22 ~ 3
22
의논이 없으면 경영이 무너지고 지략이 많으면 경영이 성립하느니라
1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
2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3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
직장인들에게는 계속되는 고민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 청년들이 직장에서 경험하는 가장 큰 어려움이 무엇일까요? 또 직장생활을 통해 갖게 되는 고민은 무엇일까요? 이것에 관한 청년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중 몇 가지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한 청년의 고민입니다. “보람과 사명감이 아닌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일을 하다 보니 일이 즐겁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미래, 특히 경제적인 부분에 대한 부담감이 큽니다. 하나님이 어떤 일로 저를 사용하기 원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른 청년의 질문입니다. “왜 제가 가는 곳마다 일은 제대로 못하면서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이 있는 것일까요?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런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 것일까요?” 또 다른 청년의 고민입니다. “직장에 나가면 감정적인 사람이 되어 쉽게 화가 납니다. 그래서 직장 사람들에게 크리스천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기가 힘듭니다.”
이 내용들을 보면 고민은 크게 두 가지인 것 같습니다. 일의 목적과 의미에 관한 것, 사람에 관한 것. 일의 목적과 의미에 대한 질문의 핵심은 ‘돈 때문에 일을 해야 하는데 돈 때문에만 일해야 되는가’입니다. “일해야 하는 당위성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즐거움이 동반되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는 것입니다.
일을 열심히 하면서도 마음에 기쁨이 없다면, 돈 버는 것이 목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돈을 버는 것 자체에 목적을 두면, 삶이 살벌해지기 시작합니다. 모든 사람이 친구가 아니라 경쟁자가 되고 때로는 적대자로 변모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돈보다 더 큰 가치를 위해 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에 대한 질문의 핵심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입니다. 이것은 특히 부하 직원에게 시도 때도 없이 ‘갑질’을 하는 상사 밑에서 일하는 것에 대한 하소연이기도 합니다. 이런 고민에 빠진 청년들은 묻습니다. “다른 직장은 괜찮을까요? 다른 상사는 저러지 않을까요?” 대답하기 쉽지 않지만 일반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다른 곳으로 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디에 가나 내 마음을 거슬리는 사람이 있고,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장소나 직종을 바꾸는 것이 이 문제의 해결은 아닙니다.
저는 사람에 대한 생각을 할 때마다 예수님과 열두 제자를 떠올립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잘 아셨는데 왜 하필 가룟 유다를 열두 제자 중에 하나로 택하셨을까? 예수님이 가룟 유다가 변화되기를 기대하셨기 때문일까? 그가 회개하기를 원하셔서 그를 택하셨을까?’ 분명히 그가 회개하기를 원하셨지만, 그것이 이유는 아닐 것입니다. 누구를 택해도, 무작위로 사람을 택하든 아니면 의도적으로 누군가를 택하든 가룟 유다와 같은 사람은 등장하기 마련입니다. 가룟 유다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내 속에도 가룟 유다와 같은 속성이 들어 있습니다. 무언가에 반항하고 싶고, 기존의 틀을 때려 부수고 싶고, 내게 이익이 되는 것을 우선시하고 싶고, 다른 사람을 억누르고 싶은 마음이 우리 안에도 똑같이 들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어디를 가도 가룟 유다와 같은 사람이 있고,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싸움터와 놀이터를 오가며 살아갑니다.
청년들이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중대한 고민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청년들은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면 마음이 편해진다고 말합니다. 친구들과 말씀을 배우면 영혼의 쉼을 얻게 된다고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직장에 나가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동료들은 경쟁상대가 되고, 마치 전투장에 끌려가는 것 같은 긴장과 불안이 도처에 깔려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은 놀이터와 싸움터로 나뉩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가 분명하게 구분되지 않고, 섞여 있습니다. 본래 놀이터란 어떤 곳입니까? 쉼과 평안을 누리고 재충전함으로 용기를 얻게 되는 곳입니다. 이곳에서는 함께하는 사람들끼리 모두 승자가 되는 복을 얻습니다. 배려와 양보와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 그 안에 녹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싸움터는 어떻습니까? 긴장해야 하고 준비해야 합니다. 도전해야 하고 경쟁해야 됩니다. 처절한 싸움을 치른 후에는 승자와 패자가 나뉘게 됩니다. 이런 싸움터에서의 덕은 실력과 탁월성, 능숙함입니다.
우리 삶에서 놀이터는 어디일까요? 가정과 믿음의 형제자매가 있는 교회입니다. 또 세상 속에서는 우정을 나눈 친구들과의 모임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싸움터는 어디입니까? 집을 떠난 순간, 삶의 모든 자리가 싸움터가 됩니다. 사람들이 많이 이동하는 때에 버스나 지하철을 타 보신 적 있습니까? 자리가 하나 나면 많은 사람들이 그곳으로 득달같이 달려듭니다. 양보란 없습니다. 내가 편하게 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누구나 이기적으로 되는 것이 싸움터의 본질입니다.
올림픽도 하나의 예가 될 수 있습니다. 금메달 하나를 위해 얼마나 많은 선수들이 오랜 시간 땀을 흘립니까? 그래서 금메달을 목에 걸게 되면 그토록 감격하고, 반대로 메달을 얻지 못하게 되었을 때 통한의 논물을 흘리는 것이 아닙니까?
국가가 복지정책을 펼치는 것은 노인과 장애인처럼 연약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곧 그들이 싸움터가 아니라 놀이터에서 쉼과 평안을 누리며 서로 섬기는 삶을 살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현실 세계를 놀이터로 변화시키려는 노력입니다.
세상은 점점 싸움터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삶의 건강한 현장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놀이터는 점점 줄어들고 싸움터는 자꾸만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시대의 아픔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놀이터의 마지막 보루가 어디입니까? 가정 아닙니까? 그런데 서로 사랑해서 평생 함께하겠다고 약속한 부부가 더 이상 함께 살지 않겠다며 헤어지는 일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또 부모와 자녀 사이에 대화가 단절되고, 자식이 부모를 피하려는 일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행복의 베이스캠프인 가정조차 놀이터와 쉼터가 아니라 싸움터로 변질되는 것은 우리의 크나큰 슬픔과 아픔입니다.
교회는 어떻습니까? 믿음과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교회에서 차별대우를 받는 것 같다고 항의하고, 직분 하나를 얻기 위해 남의 흠집을 부풀려 사람들에게 알리면서까지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합니다. 또 목사와 장로의 갈등이 드러나면서 성도들이 가슴 아파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진정한 교회의 모습이 아닙니다.
이처럼 가정과 교회마저도 쉼터와 놀이터가 아니라 싸움터로 변질되고 있으니 우리가 어떻게 그곳에서 마음의 평안과 쉼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싸움터에서 받은 피곤함과 긴장을 풀기 위해 도피처를 찾습니다. 건전한 스포츠를 통해 위로를 받는 것은 괜찮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술 취함을 통해서 쉼을 얻으려고 합니다. 기업의 회식 문화가 왜 자꾸 커져 갑니까? 낮에는 원수처럼 싸우다가 저녁에는 술잔을 돌리면서 친구가 되어 보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아침이 되면 지난밤 친구가 되자고 했던 이들은 또다시 원수가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직장인들의 가슴을 멍들게 하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청년들이 갖고 있는 또 하나의 도피처는 바로 게임입니다. 요즘 게임에 몰입하는 젊은이들이 얼마나 많아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게임 속에서는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 내가 왕이나 영주가 되어 다른 사람을 지배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게임 속 세상에 몰두하는 이유입니다.
이처럼 술이나 게임, 성적 쾌락에 몰두하는 것은 싸움터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들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이 바른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고자 하는 일을 하는 것도 용기이지만,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단호하게 멈추고 잘라버리는 것도 용기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매우 중요한 태도입니다.
장성한 아들을 둔 어머니가 어렵고 힘든 일 가운데 유혹을 만날 때 이것을 염두에 두라며 아들에게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아들아! 잘못된 일이나 잘못된 인간관계에 관여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 때마다 그 일이나 관계에 네가 연루되었다는 것이 다음 날 뉴스에 대서특필로 보도된다고 상상해라. 네가 하는 일이나 맺은 관계가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면 하고 싶은 대로 해라.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면 당장 마음을 고쳐먹어야 한단다.”
이렇게까지 거창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됩니다. 쉽게 말해서 내 배우자나 자녀들 앞에서 부끄러운 일이라고 여겨지면 그 자리에서 멈추라는 것입니다. 해야 할 것을 하는 것도 일이지만, 하지 않아야 할 것을 멈추는 것도 우리에게 주어진 일입니다.
우리는 싸움터를 놀이터로 바꿀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복덩어리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 말은 곧 우리가 내가 있는 자리를 싸움터에서 놀이터와 쉼터로 변화시키는 사람들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나의 가정이 평안합니까? 가정 안에서 내 역할은 무엇입니까? 내가 아버지입니까? 내가 집에 들어가면 가족들이 환영합니까? 내가 어머니입니까? 내가 집안에 있으면 가족들이 집에 오는 것을 기뻐합니까? 내가 자녀입니까? 나를 통해서 우리 가정이 행복의 베이스캠프로 변화되고 있습니까? 우리 직장은 어떻습니까? 경쟁이 치열하다는 이유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가장자리로 자꾸만 밀려가겠습니까? 아니면 내가 있음으로 일하는 기쁨과 즐거움이 더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품겠습니까? 직장 안에서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친절한 사람이 곁에 있으면 좋겠습니까?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일하고 싶습니까? 내가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남이 그렇게 해 주기를 원하지만 말고 내가 먼저 그런 사람이 될 수는 없겠습니까?
우리는 일에 대하여, 또 사람에 대하여 몇 가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돈 때문에 일하지만 돈 때문에만 일하지 않겠다고 선언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그런 마음을 가지려고 애씁니다. ‘내가 돈 때문에 일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돈 때문에만 일하지 않겠다. 나에게는 돈보다 더 큰 꿈과 비전이 있다.’ 그런 생각으로 일하는 것입니다. 이 선언을 해야 마음에 여유가 생기기고 회사에서 어려운 일을 당해도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이 선언은 곧 나 자신만을 위한 삶에서 이웃을 위한 삶으로 인생을 전환시키겠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겠다는 각오입니다. “당장 밥벌이가 급한데 그게 되겠습니까?”라고 질문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선언을 계속 되새기며 일터로 나아가야 합니다.
둘째, 인간관계에 대해서는 예수님과 열두 제자를 기억합시다. 어떤 공동체에도 가룟 유다와 같은 사람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도망쳐서는 안 됩니다. 비록 그 사람 때문에 내 인생이 무너지는 한이 있더라도 도망가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열두 제자 중 한 사람만 가룟 유다이고, 나머지 열한 명은 동지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삶에 어둠의 그림자와 깊은 골짜기가 있더라도 다시 용기를 낼 수 있습니다. 다시 인간관계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훌륭한 조언자가 있습니다.
오늘 읽은 잠언서에는 이런 흥미로운 구절이 있습니다.
의논이 없으면 경영이 무너지고 지략이 많으면 경영이 성립하느니라 (잠언 15:22)
여기에는 의논, 경영, 지략이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의논이 무엇입니까? 더 좋은 방안이 무엇인지 대화하며 찾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경영이 무너진다고 합니다. 여기서의 경영은 계획 또는 뜻, 즉 내가 품고 있는 꿈과 비전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의논이 없으면 꿈과 비전이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략은 무엇일까요? 상담자, 조언자입니다. 나를 도와주고 나에게 조언을 해 줄 사람이 많으면 꿈과 비전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봅시다. 내게는 좋은 친구나 조언자가 있습니까?
지난 금요일에 소망교회의 구역지도자 모임이 있었습니다. 약 천 명에 가까운 권사님과 집사님들이 모였습니다. 구역모임은 믿음의 형제요 친구인 것을 확인하는 매우 복된 자리입니다. 모여서 성경 공부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쁨과 슬픔을 나누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구역지도자에게 반드시 필요한 태도가 있습니다. 바로 듣는 마음입니다. 내가 지도자라고 해서 나의 이야기만 늘어놓아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이 이야기할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모든 지도자가 가져야 할 덕목입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줄 알아야 사람들이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서로 들어줄 때, 그 공동체는 싸움터가 아니라 진정한 놀이터, 쉼터가 될 수 있습니다. 용기와 희망을 얻는 사랑방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최고의 친구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로 하나님이고 예수님이고 성령님이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문제나 선택 앞에서 나 자신과 대화하고 믿음의 동료나 멘토에게 물어야 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진정한 위로자요 조언자이신 성령님과 의논하는 것입니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 (잠언 16:3)
여기에 나타난 ‘행사’는 ‘모든 일’을 의미합니다. 즉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이 이루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나는 아무것도 안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노동을 소중히 여기는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수고하고 땀 흘리며 맡겨진 일을 하면 하나님이 내 인생에 계획되어진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이루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신앙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하나님이 내 삶의 자리에 들어오셔서 나와 동행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보면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 계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예수님을 통해서 행동하셨습니다. 성령님은 우리 믿음의 사람들과도 함께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님께 물을 때, 성령님은 우리를 이끌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경영이 우리를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직장을 다니고 있습니까? 직장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여러분에게 부탁합니다. 첫 번째, 다른 사람보다 십분 일찍 출근하십시오. 아침에 교회에 다녀오느라고 10분 늦었다고, 저녁에 집회가 있으니 10분 빨리 퇴근하겠다고 하는 것을 하나님이 결코 기뻐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내게 맡겨진 일을 성실히 최선을 다해 감당해야 합니다. 두 번째, 회사에 도착하면 자리에 앉아서 먼저 자신을 축복하십시오. “하나님, 제가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딸입니다. 제게 지혜를 주시고, 용기를 주세요. 제가 사람들과 잘 어울릴 수 있게 해 주세요.” 그런 후에 옆자리에 앉은 사람들과 직장을 축복하세요.
내 생각이 바뀌기 시작하면 내 말이 바뀝니다. 말이 바뀌면 몸의 근육상태가 바뀌고 표정이 바뀝니다. 따뜻한 미소가 나타나고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축복의 통로가 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순간마다 ‘성령님, 저의 조언자가 되어 주세요’라고 기도하십시오. 성령님은 우리의 위로자, 상담자, 조언자가 되어 주십니다. 우리가 그 성령님을 모시고 주어진 일들을 감당할 때, 내 인생의 계획이 하나님의 계획이 될 것이고 하나님의 경영이 내 인생의 경영이 될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축복을 경험하면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