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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우리의 인생 전부를 알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했을 때를 기억하십니까?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에 대해서 더 잘 알고 싶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읽습니다. 그런데 구약을 읽으려고 하니 분량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개 구약보다는 신약을 먼저 읽기 시작합니다. 신약성경을 펴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책이 마태복음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1장을 펴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예수님의 족보입니다.
이 예수님의 계보에는 41명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이 낯선 이름들입니다. 또한 읽다 보면 누가 누구를 낳았다는 말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딱딱한 내용에 실망하며 성경읽기를 포기하곤 합니다. 저도 성경을 열심히 읽어보려고 마태복음을 폈다가 이 족보를 보고 시험에 든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대신 읽기 시작한 것이 요한복음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성경을 제대로 읽고 나서 예수님의 족보를 살펴보니 여기에는 하나님이 구원의 역사가 놀랍게 설명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이스라엘 가문의 족보에 대한 자랑을 하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족보 속에는 부끄러운 일들도 서슴없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 족보는 인간이 지니고 있는 부끄러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가 어떻게 진행되는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마치 스냅사진과 같습니다. 우리는 스냅사진과 같은 지금의 한순간은 알 수 있지만 앞으로의 미래는 어떻게 펼쳐질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 부딪히는 위기 속에서 탄식하며 슬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인생 전체의 필름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러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전개해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마태복음 1장의 예수님의 계보는 세 가지로 분리됩니다. 6절까지는 왕조이전의 족장시대, 즉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는 족장시대의 이야기와 사람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11절까지는 이스라엘의 왕조시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때는 풍요와 영광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그 이면을 살펴보면 전쟁의 상처와 아픔이 있었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16절까지는 바벨론 포로 이후의 시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시대는 슬픔과 탄식의 시대요, 고통 중에 기다리는 시대였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족보에는 선하다고 칭찬 받았던 위대한 왕들의 이야기도 기록되어 있고, 사악하고 부패했던 왕들의 이름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또 입으로 담기 어려운 부끄럽고 비참한 사건의 주인공들도 등장합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이 겪었던 최대 실연이라고 할 수 있는 예루살렘의 멸망과 바벨론에 포로로 붙잡혀갔던 처참한 상황들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역사의 고비 때마다 참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번 약속하신 것을 신실하게 지키시기 위하여 애쓰셨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마태복음 1:1)
여기에서 제일 처음에 아브라함이 나오고, 두 번째로 다윗, 그리고 세 번째로 예수님이 나옵니다. 그런데 헬라어 원문을 살펴보면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다.”
헬라어 원문에서는 예수님의 이름이 제일 먼저 등장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수식하는 말이 이어서 나옵니다.
“다윗의 자손이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읽는 순서와는 전혀 반대의 순서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의 이름을 말하면서 다윗과 아브라함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자손 중에서 그의 왕위를 영원히 이을 메시아를 보내주겠다고 다윗과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유대인의 왕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써 이 땅을 다스릴 메시아가 올 것이라는 약속이 바로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왜 언급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자손을 통하여 온 세상이 복을 받게 될 것이며 그를 통해서 생명과 구원의 역사가 도래할 것이라고 아브라함과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족보는 인간의 족보를 자랑하기 위한 구절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가 하신 약속을 얼마나 신실하게 지키셨는가에 대한 찬양, 즉 하나님에 대한 자랑의 족보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변개함이 없으신 분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눈에 띄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포기하지 않는 열심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불의와 죄악의 역사를 보면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꿈을 꾸게 하시고 그 꿈을 역사 속에서 이루시는 분입니다.
인간은 꿈을 꾸는 사람과 꿈을 이루는 사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꿈을 꾸기는 하지만 거기에서 멈춘 사람이 있는가 하면, 꿈을 꾸면서 그것을 이루어나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수많은 꿈들이 그냥 꿈으로만 끝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러나 꿈을 이룬 사람들은 특징이 있습니다. 꿈을 가진 사람들은 게으르지 않습니다. 꿈을 가진 사람들은 일을 실천에 옮깁니다. 그 꿈을 가슴에 품고 맡겨진 일들을 하나하나 충성스럽게 감당합니다. 그렇게 하다가 어느 순간 꿈의 현장에 이르게 됩니다. 물론 여러 가지 문제가 나타나고 장애물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하다가 싫증이 나서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시작은 멋지게 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힘이 떨어져 마무리를 잘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적어도 세 가지 마음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첫째는 초심이 필요합니다. 초심이란 무엇일까요? 꿈을 꾸면서 가슴속에 다짐하는 마음입니다. 초심이란 뭔가를 배우고 거기에 내 것을 투자하겠다는 마음입니다. 또한 초심이란 순수한 마음이고 겸손한 마음입니다. 이것은 처음 사랑을 고백하는 마음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도 초심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초심을 가지고 대하셨습니다. 그것은 인간과 하신 하나님의 약속에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신뢰한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네 위를 이을 왕을 영원히 세우리라.”
“너와 네 자손을 통해서 온 백성이 복을 받으리라.”
하나님께서는 이 약속을 끝까지 지키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하지 않으심이니이다 하니” (사무엘상 15:29)
우리는 약속을 지키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또 우리의 초심은 얼마나 빨리 변합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한 번 약속하시면 끝까지 지키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변개함이 없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초심을 끝까지 지키심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열심을 가지고 자신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두 번째로는 열심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도 열심이 있었습니다. 열심이란 무엇일까요? 내가 하는 일에 몰두하는 것입니다. 헌신하는 마음입니다. 때로는 대가를 치를 준비까지 하면서 시간과 정열과 내 모든 것을 투자하는 마음입니다.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을 쓴 에리히 프롬이 사랑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사랑이란 어떤 대상에 대한 관심, 이해, 앎, 보살핌 그리고 몰입이다.”
사랑하게 되면 열심이 생깁니다. 열심이 있는 곳에는 사랑이 들어가 있습니다. 열심이란 사랑으로 열중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메시아를 보내셨을 때에도 하나님의 열심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열심이 없었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벌써 모든 것을 포기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열심을 가장 잘 표현한 구절 중 하나가 이사야 9장 6~7절의 말씀입니다. 여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한 아기를 보내시고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실 것인데 하나님의 열심이 이것을 잘 감당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이사야 9:6~7)
열심이 없는 사람처럼 재미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사랑할 때에도 열심이 있어야 합니다. 공부할 때에도 열심이 있어야 합니다. 직장에서도 열심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에도 열심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열심이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도 열심을 가지고 그 뜻을 이루셨음을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셨습니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 세 번째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뒷심입니다. 일을 하다보면 싫증이 날 때가 있습니다. 일은 점점 더 힘들고 어려워집니다. 그러면 우리는 열심을 내다가도 포기하려 합니다. 그런데 뒷심이란 무엇일까요? 마지막까지 붙들고 인내하면서 일의 마무리를 할 때까지 충성하는 태도가 바로 뒷심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도 인간과의 약속을 여러 번 폐기하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먼저 반역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불신했고 하나님과의 약속을 파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그들의 죄악대로 갚으셨다면 오늘날 어느 누가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때에도 하나님은 참으셨습니다. 그때에도 하나님은 기다리셨습니다. 그때에도 하나님은 인간이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 오래 참는 인내가 없었다면 우리의 인생은 아주 허무하고 비참하게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여 주는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오니” (시편 86:15)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오래 참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까지 우리를 살리시려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직접 새로운 역사를 만드십니다. 과거에는 예언자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직접 보내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생명의 역사로 들어가는 축복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도 꿈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악에서 건짐을 받는 것, 사탄의 권세에서 해방되는 것, 어둠의 골짜기에서 나와 빛의 역사 속에서 걷는 것을 꿈꾸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꿈을 이루시기 위해 지금까지 참으시면서 이 땅의 역사 속에 개입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족보를 통해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애통하는 사람, 기다림의 사람들을 통해서 역사를 이루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일들을 누구를 통해서 이루실까요? 하나님께서는 버려진 사람들, 기다림의 사람들, 아픔과 슬픔을 지닌 사람들을 통해서 역사의 변화를 만들어 가십니다.
보통 족보에는 남자의 이름을 기록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족보에는 네 명의 여인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인간적으로 보면 별 볼일 없는 여인들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그들의 아픔과 기다림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고 계십니다.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마태복음 1:3)
베레스와 세라는 사생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다말이라는 여인이 그의 시아버지인 유다로부터 낳은 아들의 이름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치와 부끄러움이 담겨져 있는 역사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의 불의하고 탐욕스러운 모습 속에서도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가 흘러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마태복음 1:5)
라합은 어떤 여인이었습니까? 라합은 여리고에 살고 있었던 기생이었습니다. 오늘의 표현으로 말하면 창녀와 같은 여인입니다. 그런데 그녀가 보아스를 낳았습니다. 이 전통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아가 오시게 되었습니다. 룻은 어떤 여인이었습니까? 그녀는 과부였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모압 사람, 즉 이방 여자였습니다. 유대인들이 돼지와 같이 취급하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룻이라는 여인에게서 오벳이라는 인물이 태어났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마태복음 1:6)
우리야는 다윗의 신복이자 밧세바의 남편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밧세바를 얻기 위해서 자신의 충성스러운 부하를 전쟁터에 내보내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부하의 아내를 빼앗아 자기의 아내로 삼았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참으로 부끄러운 역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상처받고 고통 받은 이 여인을 통해서 솔로몬이라는 인물을 등장시키십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구원의 역사로 이끌어가고 계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찬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의 인간사 속에도 슬프고 안타까운 역사가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속에서 기다리는 자, 마음속에 탄식하고 애통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해서 생명과 구원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교회는 의인들의 모임이 아닙니다. 교회는 자랑스러운 것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모임이 아닙니다. 교회는 부끄러운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나 같은 죄인들이 주님의 은총을 기다리는 곳입니다. 나 같이 부족한 사람이 주님의 능력을 기다리는 곳입니다. 나 같이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의 능력과 용서, 치유의 역사를 경험하는 것이 바로 교회가 가지고 있는 축복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꿈과 비전을 허락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인간이 만든 역사는 하나님의 뜻을 왜곡시키기도 하고 이 땅에 죄악과 부패를 만들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그 속에서도 당신이 한번 약속하신 것을 놓치지 않고 지키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역사를 반드시 이루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왜 주님이십니까? 그분을 통해서 우리의 죄를 알게 되고, 하나님의 용서를 깨닫기 때문입니다. 우리 같이 하나님 앞에 설수 없는 자에게 친히 내 아들, 내 딸이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이 원하시는 역사는 인간의 역사 속에서 흐르고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했다고 너무 자랑하지 마십시오. 내가 무엇이 되었다고 너무 뽐내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주신 꿈과 비전을 이 땅 위에서 이루어나갈 수 있도록 우리에게 허락하신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도 주님의 오심을 기대하고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믿음과 사랑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마태복음 1:1~17: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 전부를 알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했을 때를 기억하십니까?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에 대해서 더 잘 알고 싶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읽습니다. 그런데 구약을 읽으려고 하니 분량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개 구약보다는 신약을 먼저 읽기 시작합니다. 신약성경을 펴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책이 마태복음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1장을 펴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예수님의 족보입니다.
이 예수님의 계보에는 41명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이 낯선 이름들입니다. 또한 읽다 보면 누가 누구를 낳았다는 말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딱딱한 내용에 실망하며 성경읽기를 포기하곤 합니다. 저도 성경을 열심히 읽어보려고 마태복음을 폈다가 이 족보를 보고 시험에 든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대신 읽기 시작한 것이 요한복음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성경을 제대로 읽고 나서 예수님의 족보를 살펴보니 여기에는 하나님이 구원의 역사가 놀랍게 설명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이스라엘 가문의 족보에 대한 자랑을 하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족보 속에는 부끄러운 일들도 서슴없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 족보는 인간이 지니고 있는 부끄러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가 어떻게 진행되는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마치 스냅사진과 같습니다. 우리는 스냅사진과 같은 지금의 한순간은 알 수 있지만 앞으로의 미래는 어떻게 펼쳐질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 부딪히는 위기 속에서 탄식하며 슬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인생 전체의 필름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러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전개해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마태복음 1장의 예수님의 계보는 세 가지로 분리됩니다. 6절까지는 왕조이전의 족장시대, 즉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는 족장시대의 이야기와 사람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11절까지는 이스라엘의 왕조시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때는 풍요와 영광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그 이면을 살펴보면 전쟁의 상처와 아픔이 있었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16절까지는 바벨론 포로 이후의 시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시대는 슬픔과 탄식의 시대요, 고통 중에 기다리는 시대였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족보에는 선하다고 칭찬 받았던 위대한 왕들의 이야기도 기록되어 있고, 사악하고 부패했던 왕들의 이름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또 입으로 담기 어려운 부끄럽고 비참한 사건의 주인공들도 등장합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이 겪었던 최대 실연이라고 할 수 있는 예루살렘의 멸망과 바벨론에 포로로 붙잡혀갔던 처참한 상황들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역사의 고비 때마다 참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번 약속하신 것을 신실하게 지키시기 위하여 애쓰셨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마태복음 1:1)
여기에서 제일 처음에 아브라함이 나오고, 두 번째로 다윗, 그리고 세 번째로 예수님이 나옵니다. 그런데 헬라어 원문을 살펴보면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다.”
헬라어 원문에서는 예수님의 이름이 제일 먼저 등장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수식하는 말이 이어서 나옵니다.
“다윗의 자손이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읽는 순서와는 전혀 반대의 순서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의 이름을 말하면서 다윗과 아브라함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자손 중에서 그의 왕위를 영원히 이을 메시아를 보내주겠다고 다윗과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유대인의 왕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써 이 땅을 다스릴 메시아가 올 것이라는 약속이 바로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왜 언급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자손을 통하여 온 세상이 복을 받게 될 것이며 그를 통해서 생명과 구원의 역사가 도래할 것이라고 아브라함과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족보는 인간의 족보를 자랑하기 위한 구절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가 하신 약속을 얼마나 신실하게 지키셨는가에 대한 찬양, 즉 하나님에 대한 자랑의 족보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변개함이 없으신 분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눈에 띄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포기하지 않는 열심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불의와 죄악의 역사를 보면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꿈을 꾸게 하시고 그 꿈을 역사 속에서 이루시는 분입니다.
인간은 꿈을 꾸는 사람과 꿈을 이루는 사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꿈을 꾸기는 하지만 거기에서 멈춘 사람이 있는가 하면, 꿈을 꾸면서 그것을 이루어나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수많은 꿈들이 그냥 꿈으로만 끝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러나 꿈을 이룬 사람들은 특징이 있습니다. 꿈을 가진 사람들은 게으르지 않습니다. 꿈을 가진 사람들은 일을 실천에 옮깁니다. 그 꿈을 가슴에 품고 맡겨진 일들을 하나하나 충성스럽게 감당합니다. 그렇게 하다가 어느 순간 꿈의 현장에 이르게 됩니다. 물론 여러 가지 문제가 나타나고 장애물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하다가 싫증이 나서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시작은 멋지게 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힘이 떨어져 마무리를 잘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적어도 세 가지 마음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첫째는 초심이 필요합니다. 초심이란 무엇일까요? 꿈을 꾸면서 가슴속에 다짐하는 마음입니다. 초심이란 뭔가를 배우고 거기에 내 것을 투자하겠다는 마음입니다. 또한 초심이란 순수한 마음이고 겸손한 마음입니다. 이것은 처음 사랑을 고백하는 마음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도 초심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초심을 가지고 대하셨습니다. 그것은 인간과 하신 하나님의 약속에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신뢰한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네 위를 이을 왕을 영원히 세우리라.”
“너와 네 자손을 통해서 온 백성이 복을 받으리라.”
하나님께서는 이 약속을 끝까지 지키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하지 않으심이니이다 하니” (사무엘상 15:29)
우리는 약속을 지키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또 우리의 초심은 얼마나 빨리 변합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한 번 약속하시면 끝까지 지키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변개함이 없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초심을 끝까지 지키심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열심을 가지고 자신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두 번째로는 열심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도 열심이 있었습니다. 열심이란 무엇일까요? 내가 하는 일에 몰두하는 것입니다. 헌신하는 마음입니다. 때로는 대가를 치를 준비까지 하면서 시간과 정열과 내 모든 것을 투자하는 마음입니다.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을 쓴 에리히 프롬이 사랑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사랑이란 어떤 대상에 대한 관심, 이해, 앎, 보살핌 그리고 몰입이다.”
사랑하게 되면 열심이 생깁니다. 열심이 있는 곳에는 사랑이 들어가 있습니다. 열심이란 사랑으로 열중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메시아를 보내셨을 때에도 하나님의 열심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열심이 없었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벌써 모든 것을 포기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열심을 가장 잘 표현한 구절 중 하나가 이사야 9장 6~7절의 말씀입니다. 여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한 아기를 보내시고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실 것인데 하나님의 열심이 이것을 잘 감당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이사야 9:6~7)
열심이 없는 사람처럼 재미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사랑할 때에도 열심이 있어야 합니다. 공부할 때에도 열심이 있어야 합니다. 직장에서도 열심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에도 열심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열심이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도 열심을 가지고 그 뜻을 이루셨음을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셨습니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 세 번째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뒷심입니다. 일을 하다보면 싫증이 날 때가 있습니다. 일은 점점 더 힘들고 어려워집니다. 그러면 우리는 열심을 내다가도 포기하려 합니다. 그런데 뒷심이란 무엇일까요? 마지막까지 붙들고 인내하면서 일의 마무리를 할 때까지 충성하는 태도가 바로 뒷심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도 인간과의 약속을 여러 번 폐기하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먼저 반역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불신했고 하나님과의 약속을 파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그들의 죄악대로 갚으셨다면 오늘날 어느 누가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때에도 하나님은 참으셨습니다. 그때에도 하나님은 기다리셨습니다. 그때에도 하나님은 인간이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 오래 참는 인내가 없었다면 우리의 인생은 아주 허무하고 비참하게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여 주는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오니” (시편 86:15)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오래 참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까지 우리를 살리시려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직접 새로운 역사를 만드십니다. 과거에는 예언자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직접 보내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생명의 역사로 들어가는 축복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도 꿈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악에서 건짐을 받는 것, 사탄의 권세에서 해방되는 것, 어둠의 골짜기에서 나와 빛의 역사 속에서 걷는 것을 꿈꾸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꿈을 이루시기 위해 지금까지 참으시면서 이 땅의 역사 속에 개입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족보를 통해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애통하는 사람, 기다림의 사람들을 통해서 역사를 이루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일들을 누구를 통해서 이루실까요? 하나님께서는 버려진 사람들, 기다림의 사람들, 아픔과 슬픔을 지닌 사람들을 통해서 역사의 변화를 만들어 가십니다.
보통 족보에는 남자의 이름을 기록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족보에는 네 명의 여인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인간적으로 보면 별 볼일 없는 여인들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그들의 아픔과 기다림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고 계십니다.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마태복음 1:3)
베레스와 세라는 사생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다말이라는 여인이 그의 시아버지인 유다로부터 낳은 아들의 이름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치와 부끄러움이 담겨져 있는 역사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의 불의하고 탐욕스러운 모습 속에서도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가 흘러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마태복음 1:5)
라합은 어떤 여인이었습니까? 라합은 여리고에 살고 있었던 기생이었습니다. 오늘의 표현으로 말하면 창녀와 같은 여인입니다. 그런데 그녀가 보아스를 낳았습니다. 이 전통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아가 오시게 되었습니다. 룻은 어떤 여인이었습니까? 그녀는 과부였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모압 사람, 즉 이방 여자였습니다. 유대인들이 돼지와 같이 취급하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룻이라는 여인에게서 오벳이라는 인물이 태어났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마태복음 1:6)
우리야는 다윗의 신복이자 밧세바의 남편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밧세바를 얻기 위해서 자신의 충성스러운 부하를 전쟁터에 내보내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부하의 아내를 빼앗아 자기의 아내로 삼았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참으로 부끄러운 역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상처받고 고통 받은 이 여인을 통해서 솔로몬이라는 인물을 등장시키십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구원의 역사로 이끌어가고 계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찬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의 인간사 속에도 슬프고 안타까운 역사가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속에서 기다리는 자, 마음속에 탄식하고 애통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해서 생명과 구원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교회는 의인들의 모임이 아닙니다. 교회는 자랑스러운 것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모임이 아닙니다. 교회는 부끄러운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나 같은 죄인들이 주님의 은총을 기다리는 곳입니다. 나 같이 부족한 사람이 주님의 능력을 기다리는 곳입니다. 나 같이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의 능력과 용서, 치유의 역사를 경험하는 것이 바로 교회가 가지고 있는 축복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꿈과 비전을 허락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인간이 만든 역사는 하나님의 뜻을 왜곡시키기도 하고 이 땅에 죄악과 부패를 만들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그 속에서도 당신이 한번 약속하신 것을 놓치지 않고 지키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역사를 반드시 이루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왜 주님이십니까? 그분을 통해서 우리의 죄를 알게 되고, 하나님의 용서를 깨닫기 때문입니다. 우리 같이 하나님 앞에 설수 없는 자에게 친히 내 아들, 내 딸이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이 원하시는 역사는 인간의 역사 속에서 흐르고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했다고 너무 자랑하지 마십시오. 내가 무엇이 되었다고 너무 뽐내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주신 꿈과 비전을 이 땅 위에서 이루어나갈 수 있도록 우리에게 허락하신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도 주님의 오심을 기대하고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믿음과 사랑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