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구독

ic_info구독 사용방법

해당 카테고리에 새로운 콘텐츠를 모아보기 원하시면 구독을 추가해주세요 마이페이지 > 내구독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ic_info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 배우는 것! – 일과 신앙 3 –

전도서 12: 9 ~ 29

김지철 목사

2016.09.04

인간은 배움을 통해 성숙하는 존재입니다.

어떤 가구회사에서 가로 1.1미터 세로 0.8미터 높이 2.1미터 크기의 가정용 독서실을 만들었습니다. 자녀들이 집에서 공부할 때도 독서실에서 공부하는 것처럼 집중력을 향상시킬 수 있도록 독립적인 공간을 형성할 수 있게 만들어진 제품입니다. 그런데 언론들은 ‘이것이 스터디룸이냐? 아니면 현대판 사도 세자의 뒤주냐?’라는 물음을 던지며 이 제품을 비판했고, 인권침해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실제로 이곳을 나만의 학습공간이라고 느끼는 자녀가 많을까요, 아니면 감옥에 갇힌 것 같다며 힘들어하는 자녀가 많을까요?
사실 이 가정용 독서실 자체보다 더 큰 문제는 일부 부모들이 여기에 CCTV를 달거나 문에 잠금장치를 해서 자녀가 공부를 하고 있는지 아닌지 감시를 한다는 것입니다. 자녀를 위해서 만들어 준 것이 오히려 자녀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막는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묻고 대답해 봐야 할 것입니다.
중고등학교 시절을 기억해 보십시오. 공부를 하는 것이 즐거웠습니까? 공부가 즐겁고 재미있었다는 사람들은 존경을 받아야 할 사람들일 것입니다. 저도 공부가 귀찮고 싫었습니다. 공부 자체가 싫다기보다는 생각 없이 외우고 정답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 싫었고, 그보다 더 싫은 것은 성적표를 받는 일이었습니다. 시험 성적으로 평가받는 것이 싫었습니다. 공부를 잘하는 사람들은 성적표를 받는 것이 즐거운 일이었을지 모르지만, 저는 공부를 잘 못해서 성적표를 받을 때마다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그러면 스트레스를 피하기 위해 공부를 안 해야 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인간은 돌봄과 교육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모든 짐승은 태어나자마자 몇 시간 안에 일어섭니다. 어떤 동물은 몇 분 만에 일어서서 어미 뒤를 따라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태어난 후 일어서기까지 무려 일 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립니다. 게다가 처음 걸음을 떼기까지 얼마나 많은 일어서고 넘어짐의 반복이 있는지 모릅니다. 이것은 곧 인간은 자립할 수 없는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갓 태어난 아이를 그대로 놔두면 금방 죽어버리게 됩니다. 아이의 생명이 이어지기 위해 부모의 엄청난 사랑과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가 모두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이것은 또한 인간은 배우고 성장하는 존재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동물의 왕국을 시청하다 보면 짐승들이 자기 집을 짓는 모습을 봅니다. 때로는 머물 곳이 없어서 들판과 산에서 살기도 합니다. 비가 주룩주룩 오는데도 새들은 나뭇가지에 앉아서 비를 맞고, 다른 동물들도 들판에 앉거나 서서 그냥 비를 맞습니다. 그들은 수천 년, 수만 년 동안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의 모습과 십 년 전의 모습이 매우 다릅니다. 백 년 전으로 돌아가면 더욱 다릅니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배움과 생각을 통해서 성장하고 성숙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고귀한 존재라고 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정신적인 일과 육체적인 일은 함께 갑니다.

동물의 세계를 뛰어넘는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 무엇일까요? 바로 일하는 것입니다. 일하지 않으면 우리가 동물의 세계를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일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일함의 범위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손과 발을 움직이는 육체의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일이 아닙니다. 판단하고 분별하는 것처럼 마음으로 하는 정신적인 움직임도 일입니다. 인간은 마음과 생각으로 하는 정신적인 일과 손과 발로 하는 육체적인 일이 융합된 존재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장막을 지으라고 명령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유다 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를 지명하여 부르고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 정교한 일을 연구하여 금과 은과 놋으로 만들게 하며 보석을 깎아 물리며 여러 가지 기술로 나무를 새겨 만들게 하리라 (출애굽기 31:2∼5)

하나님이 건축물을 만들 이에게 영을 부어 주시고, 지혜와 총명을 주시고, 여러 가지 재주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손과 발을 움직여 여러 가지 작품을 만들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생각과 육체로 일은 맞물려 있습니다. 몸으로 하는 육체적인 일과 머리로 하는 생각의 일이 함께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가 함께 가지 못하고 분리되기 시작하면 인간의 삶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일하는 사람은 무기력증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일하는 사람이 겪는 정신적 증후군이 있습니다. 어떤 보고에 의하면 직장인 90%이상이 무기력증에 빠지는데, 그 원인은 상대적으로 낮은 보수, 과도한 업무, 미비한 자기 존재감이라고 합니다.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포기하고 일에 전력투구했는데, 건강까지 포기하며 밤낮으로 일에 매달렸는데, 어느 날 자신에게 남는 것이 없다고 느낍니다. 그렇게 되면 일에 대한 회의감이 몰려오고 자존감이 뒤틀립니다. 그리고 이런 감정을 누구에게 표현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부딪히게 되는 직장의 요구가 있습니다. 하나는 업적주의입니다. “내가 너에게 돈을 주고 있으니 너는 받는 것보다 더 큰일을 해라. 생산성을 높여라”는 식의 업적주의 때문에 많은 직장인들이 끊임없이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또 하나는 완벽주의입니다. “너는 너의 일을 완벽하게 마무리해야 한다. 적당히 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업적주의와 완벽주의는 성공한 사람조차 무기력증에 빠지게 합니다. 무기력증에 빠지면 공허함과 허무, 혼자 있는 것 같은 고립감을 경험합니다.
이 무기력증은 크게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번아웃 증후군(burnout syndrome)입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다 타 버렸다는 의미로, 많은 시간 과도한 업무로 인해 에너지가 소진된 탈진 상태를 말합니다. 이런 상태의 사람은 극도의 피로감과 함께 불안감을 느낍니다. 면역력 저하로 몸이 약해지고 우울해지며 수면장애를 겪기도 합니다. 때로는 자기혐오에 빠지기도 하고, 직무를 거부하기도 합니다. 이런 증상을 다른 사람에게 숨겨 보려고 때로는 술을 먹거나 도박을 하고 섹스나 게임과 같은 쾌락 속에 자신을 몰아넣기도 합니다.
두 번째는 보어아웃 증후군(boreout syndrome)입니다. 하는 일이 너무 단조롭고, 하찮게 여겨져서 삶이 지루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권태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증후군에 빠지면 자존감이 사라지고 삶의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이런 사람들은 ‘나는 이것밖에 못하는 무능한 존재인가? 나는 무가치한 존재인가? 아무도 나에게는 관심이 없는 걸까?’ 등의 생각으로 괴로워합니다. 때로는 심각한 우울증으로 발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두 가지 무기력증은 어떤 특별한 사람에게만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일을 하면서 삶의 의미를 못 찾으면, 육체적인 일이 정신적인 세계와 연결되지 않으면 누구나 무기력증에 빠질 있습니다. 가정주부도 예외가 아닙니다. ‘내가 도대체 뭐 했지? 남편도 나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잖아? 세상 사람들도 나를 우습게 보잖아? 내가 무엇을 위해서 여기까지 왔지?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가?’ 하는 질문들이 이어지면서 모든 것을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찾아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도 그런 생각을 품은 채 어쩔 수 없이 일하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배우기를 바라십니다.

이런 위기를 벗어나는 길은 없을까요?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나 자신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돌아본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육체와 정신이 만나야 제대로 기능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육체로 하는 일과 생각의 일과 함께 가야 즐겁게 일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생각의 일이란 무엇일까요? 바로 배움입니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하나님은 어떤 분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까? 가르치시는 분으로 다가오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내가 지혜자다. 그러니 너희는 나의 지혜를 배우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의 세계에서 숨겨진 비밀을 배우라고 끊임없이 권면하십니다. 배움과 함께 수고하고 땀 흘리면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목표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습에서 이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만드시면서 하루하루 “보기에 좋다”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의 계획대로, 뜻대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적 생각과 디자인이 우주만물 안에 들어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창조의 일 속에 생각과 뜻과 디자인이 창의적으로 들어가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는 것은 “사람아, 지혜를 가져라. 네가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수고하고 행하라”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생각하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또 하나의 요청은 ‘머리’교육에서 ‘마음’교육으로 방향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지식을 축척하는 교육에서 지혜를 키우는 교육으로 변하라는 것입니다.
요새는 인터넷만 접속하면 각종 정보를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더 이상 백과사전이 필요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 유명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이 절판된 지 오래되었습니다. 백과사전 없이도 지식축적이 가능해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식축적이 배움의 궁극적인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해야 할 공부는 ‘마음’ 공부입니다.

얼마 전 알파고와 최고의 바둑기사 이세돌의 맞대결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인공지능이 사람을 이겼습니다. 인간 고유의 영역으로 생각되었던 사고와 창조의 영역까지 컴퓨터가 들어온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 기계가 인간을 따를 수 없는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인간의 마음입니다. 성경은 벌써 3천 년 전에 이 사실을 꿰뚫었습니다. 인간의 지식은 한계가 있고 지식을 위한 공부는 인간을 피곤하게 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새로운 목표를 정해야 한다고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내 아들아 또 이것들로부터 경계를 받으라 많은 책들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하게 하느니라 (전도서 12:12)

“공부하는 것이 얼마나 인간을 피곤하게 하는 줄 아느냐?”라는 말은 공부하지 말라는 뜻일까요? 아닙니다. 진짜 공부를 하라는 것입니다. 진짜 공부란 무엇입니까? 바로 마음의 공부, 영혼의 공부입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잠언 4:23)

인간에게는 마음이 있습니다. 판단하고 생각하고 결단하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이 모든 것이 마음으로부터 나오는데, 그곳이 생명의 근원이라는 것입니다.

…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사무엘상 16:7)

‘중심’이란 마음입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고 그 사람을 평가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의 세계를 배우고 받아들이는지 보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육의 교과과정은 지식교육에서 지혜교육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머리교육에서 마음교육으로 중심을 변화시켜 나가야 합니다. 학교뿐만 아니라 교회도 그러한 방향으로 교육의 중심을 변화시켜야 하나님이 쓰실 만한 마음을 지닌 인물로 우리가 세워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것을 어디에서 배울 수 있을까요?

우리는 예수님을 배워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배움은 내용도 방법론도 목표도 한 가지입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그분이 모든 교육의 목표이자 내용입니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누가복음 2:52)

예수님이라고 해서 지혜가 한 번에 다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키가 자라듯이 지혜가 자랐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하늘의 놀라운 계시의 비밀을 점차 알아 가셨습니다.

…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린도전서 1:24)

그(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 (골로새서 2:3)

예수님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예수님이 곧 우리가 배워야 할 하나님의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지혜 선생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지혜의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참된 지혜자로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며, 말씀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듣고 배우는 것이 우리의 최고의 특권이자 자랑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언제까지 배워야 할까요? 죽을 때까지입니다. 이 배움은 끝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지혜자이며, 하늘의 계시자이기 때문입니다.
1942년 영국의 윈스턴 처칠이 경제학자인 베버리지로 하여금 일부 특권층만이 누리던 복지혜택을 국민 모두가 누려야 한다는 보고서를 발표하게 했습니다. 여기에서 ‘요람에서 무덤까지(from the cradle to the grave)’라는 유명한 말이 나왔습니다. 즉,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에 이를 때까지 인간은 복지혜택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배움도 마찬가지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이 누구신가, 예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가르치고 죽을 때까지 배워 나가야 합니다. 죽을 때까지 지혜자이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배워 나가는 것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태복음 11:29)

예수님을 배우면, 육체의 일과 정신적인 일이 분열되는 것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안에서 하나님이 나를 위해 준비하신 지혜의 역사를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오늘도 우리가 예배를 드리면서 성령님의 은혜와 지혜로 하나님과 예수님을 배웁니다. 이제 우리가 세상에 나가서 일할 때, 생각하며 일하십시오. 다른 말로 하면 기도하면서 일하십시오. 그리고 무엇보다 주님이신 예수님을 배우십시오. 그러면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께서 나 같은 사람을 통해서 사람을 살리고 회복시키는 역사를 이루고 계시는구나.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지혜를 나를 통해 세상에 보이고 계시는구나’ 하고 깨닫게 됩니다. 이 놀라운 깨달음의 축복을 경험하며 세상 가운데서 일하는 하나님의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btn_switch

전도서 12: 9 ~ 29

9

전도자는 지혜자이어서 여전히 백성에게 지식을 가르쳤고 또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여 잠언을 많이 지었으며

10

전도자는 힘써 아름다운 말들을 구하였나니 진리의 말씀들을 정직하게 기록하였느니라

11

지혜자들의 말씀들은 찌르는 채찍들 같고 회중의 스승들의 말씀들은 잘 박힌 못 같으니 다 한 목자가 주신 바이니라

12

내 아들아 또 이것들로부터 경계를 받으라 많은 책들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하게 하느니라

13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인간은 배움을 통해 성숙하는 존재입니다.

어떤 가구회사에서 가로 1.1미터 세로 0.8미터 높이 2.1미터 크기의 가정용 독서실을 만들었습니다. 자녀들이 집에서 공부할 때도 독서실에서 공부하는 것처럼 집중력을 향상시킬 수 있도록 독립적인 공간을 형성할 수 있게 만들어진 제품입니다. 그런데 언론들은 ‘이것이 스터디룸이냐? 아니면 현대판 사도 세자의 뒤주냐?’라는 물음을 던지며 이 제품을 비판했고, 인권침해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실제로 이곳을 나만의 학습공간이라고 느끼는 자녀가 많을까요, 아니면 감옥에 갇힌 것 같다며 힘들어하는 자녀가 많을까요?
사실 이 가정용 독서실 자체보다 더 큰 문제는 일부 부모들이 여기에 CCTV를 달거나 문에 잠금장치를 해서 자녀가 공부를 하고 있는지 아닌지 감시를 한다는 것입니다. 자녀를 위해서 만들어 준 것이 오히려 자녀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막는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묻고 대답해 봐야 할 것입니다.
중고등학교 시절을 기억해 보십시오. 공부를 하는 것이 즐거웠습니까? 공부가 즐겁고 재미있었다는 사람들은 존경을 받아야 할 사람들일 것입니다. 저도 공부가 귀찮고 싫었습니다. 공부 자체가 싫다기보다는 생각 없이 외우고 정답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 싫었고, 그보다 더 싫은 것은 성적표를 받는 일이었습니다. 시험 성적으로 평가받는 것이 싫었습니다. 공부를 잘하는 사람들은 성적표를 받는 것이 즐거운 일이었을지 모르지만, 저는 공부를 잘 못해서 성적표를 받을 때마다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그러면 스트레스를 피하기 위해 공부를 안 해야 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인간은 돌봄과 교육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모든 짐승은 태어나자마자 몇 시간 안에 일어섭니다. 어떤 동물은 몇 분 만에 일어서서 어미 뒤를 따라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태어난 후 일어서기까지 무려 일 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립니다. 게다가 처음 걸음을 떼기까지 얼마나 많은 일어서고 넘어짐의 반복이 있는지 모릅니다. 이것은 곧 인간은 자립할 수 없는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갓 태어난 아이를 그대로 놔두면 금방 죽어버리게 됩니다. 아이의 생명이 이어지기 위해 부모의 엄청난 사랑과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가 모두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이것은 또한 인간은 배우고 성장하는 존재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동물의 왕국을 시청하다 보면 짐승들이 자기 집을 짓는 모습을 봅니다. 때로는 머물 곳이 없어서 들판과 산에서 살기도 합니다. 비가 주룩주룩 오는데도 새들은 나뭇가지에 앉아서 비를 맞고, 다른 동물들도 들판에 앉거나 서서 그냥 비를 맞습니다. 그들은 수천 년, 수만 년 동안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의 모습과 십 년 전의 모습이 매우 다릅니다. 백 년 전으로 돌아가면 더욱 다릅니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배움과 생각을 통해서 성장하고 성숙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고귀한 존재라고 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정신적인 일과 육체적인 일은 함께 갑니다.

동물의 세계를 뛰어넘는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 무엇일까요? 바로 일하는 것입니다. 일하지 않으면 우리가 동물의 세계를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일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일함의 범위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손과 발을 움직이는 육체의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일이 아닙니다. 판단하고 분별하는 것처럼 마음으로 하는 정신적인 움직임도 일입니다. 인간은 마음과 생각으로 하는 정신적인 일과 손과 발로 하는 육체적인 일이 융합된 존재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장막을 지으라고 명령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유다 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를 지명하여 부르고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 정교한 일을 연구하여 금과 은과 놋으로 만들게 하며 보석을 깎아 물리며 여러 가지 기술로 나무를 새겨 만들게 하리라 (출애굽기 31:2∼5)

하나님이 건축물을 만들 이에게 영을 부어 주시고, 지혜와 총명을 주시고, 여러 가지 재주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손과 발을 움직여 여러 가지 작품을 만들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생각과 육체로 일은 맞물려 있습니다. 몸으로 하는 육체적인 일과 머리로 하는 생각의 일이 함께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가 함께 가지 못하고 분리되기 시작하면 인간의 삶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일하는 사람은 무기력증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일하는 사람이 겪는 정신적 증후군이 있습니다. 어떤 보고에 의하면 직장인 90%이상이 무기력증에 빠지는데, 그 원인은 상대적으로 낮은 보수, 과도한 업무, 미비한 자기 존재감이라고 합니다.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포기하고 일에 전력투구했는데, 건강까지 포기하며 밤낮으로 일에 매달렸는데, 어느 날 자신에게 남는 것이 없다고 느낍니다. 그렇게 되면 일에 대한 회의감이 몰려오고 자존감이 뒤틀립니다. 그리고 이런 감정을 누구에게 표현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부딪히게 되는 직장의 요구가 있습니다. 하나는 업적주의입니다. “내가 너에게 돈을 주고 있으니 너는 받는 것보다 더 큰일을 해라. 생산성을 높여라”는 식의 업적주의 때문에 많은 직장인들이 끊임없이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또 하나는 완벽주의입니다. “너는 너의 일을 완벽하게 마무리해야 한다. 적당히 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업적주의와 완벽주의는 성공한 사람조차 무기력증에 빠지게 합니다. 무기력증에 빠지면 공허함과 허무, 혼자 있는 것 같은 고립감을 경험합니다.
이 무기력증은 크게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번아웃 증후군(burnout syndrome)입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다 타 버렸다는 의미로, 많은 시간 과도한 업무로 인해 에너지가 소진된 탈진 상태를 말합니다. 이런 상태의 사람은 극도의 피로감과 함께 불안감을 느낍니다. 면역력 저하로 몸이 약해지고 우울해지며 수면장애를 겪기도 합니다. 때로는 자기혐오에 빠지기도 하고, 직무를 거부하기도 합니다. 이런 증상을 다른 사람에게 숨겨 보려고 때로는 술을 먹거나 도박을 하고 섹스나 게임과 같은 쾌락 속에 자신을 몰아넣기도 합니다.
두 번째는 보어아웃 증후군(boreout syndrome)입니다. 하는 일이 너무 단조롭고, 하찮게 여겨져서 삶이 지루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권태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증후군에 빠지면 자존감이 사라지고 삶의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이런 사람들은 ‘나는 이것밖에 못하는 무능한 존재인가? 나는 무가치한 존재인가? 아무도 나에게는 관심이 없는 걸까?’ 등의 생각으로 괴로워합니다. 때로는 심각한 우울증으로 발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두 가지 무기력증은 어떤 특별한 사람에게만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일을 하면서 삶의 의미를 못 찾으면, 육체적인 일이 정신적인 세계와 연결되지 않으면 누구나 무기력증에 빠질 있습니다. 가정주부도 예외가 아닙니다. ‘내가 도대체 뭐 했지? 남편도 나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잖아? 세상 사람들도 나를 우습게 보잖아? 내가 무엇을 위해서 여기까지 왔지?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가?’ 하는 질문들이 이어지면서 모든 것을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찾아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도 그런 생각을 품은 채 어쩔 수 없이 일하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배우기를 바라십니다.

이런 위기를 벗어나는 길은 없을까요?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나 자신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돌아본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육체와 정신이 만나야 제대로 기능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육체로 하는 일과 생각의 일과 함께 가야 즐겁게 일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생각의 일이란 무엇일까요? 바로 배움입니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하나님은 어떤 분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까? 가르치시는 분으로 다가오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내가 지혜자다. 그러니 너희는 나의 지혜를 배우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의 세계에서 숨겨진 비밀을 배우라고 끊임없이 권면하십니다. 배움과 함께 수고하고 땀 흘리면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목표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습에서 이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만드시면서 하루하루 “보기에 좋다”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의 계획대로, 뜻대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적 생각과 디자인이 우주만물 안에 들어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창조의 일 속에 생각과 뜻과 디자인이 창의적으로 들어가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는 것은 “사람아, 지혜를 가져라. 네가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수고하고 행하라”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생각하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또 하나의 요청은 ‘머리’교육에서 ‘마음’교육으로 방향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지식을 축척하는 교육에서 지혜를 키우는 교육으로 변하라는 것입니다.
요새는 인터넷만 접속하면 각종 정보를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더 이상 백과사전이 필요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 유명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이 절판된 지 오래되었습니다. 백과사전 없이도 지식축적이 가능해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식축적이 배움의 궁극적인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해야 할 공부는 ‘마음’ 공부입니다.

얼마 전 알파고와 최고의 바둑기사 이세돌의 맞대결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인공지능이 사람을 이겼습니다. 인간 고유의 영역으로 생각되었던 사고와 창조의 영역까지 컴퓨터가 들어온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 기계가 인간을 따를 수 없는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인간의 마음입니다. 성경은 벌써 3천 년 전에 이 사실을 꿰뚫었습니다. 인간의 지식은 한계가 있고 지식을 위한 공부는 인간을 피곤하게 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새로운 목표를 정해야 한다고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내 아들아 또 이것들로부터 경계를 받으라 많은 책들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하게 하느니라 (전도서 12:12)

“공부하는 것이 얼마나 인간을 피곤하게 하는 줄 아느냐?”라는 말은 공부하지 말라는 뜻일까요? 아닙니다. 진짜 공부를 하라는 것입니다. 진짜 공부란 무엇입니까? 바로 마음의 공부, 영혼의 공부입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잠언 4:23)

인간에게는 마음이 있습니다. 판단하고 생각하고 결단하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이 모든 것이 마음으로부터 나오는데, 그곳이 생명의 근원이라는 것입니다.

…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사무엘상 16:7)

‘중심’이란 마음입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고 그 사람을 평가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의 세계를 배우고 받아들이는지 보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육의 교과과정은 지식교육에서 지혜교육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머리교육에서 마음교육으로 중심을 변화시켜 나가야 합니다. 학교뿐만 아니라 교회도 그러한 방향으로 교육의 중심을 변화시켜야 하나님이 쓰실 만한 마음을 지닌 인물로 우리가 세워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것을 어디에서 배울 수 있을까요?

우리는 예수님을 배워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배움은 내용도 방법론도 목표도 한 가지입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그분이 모든 교육의 목표이자 내용입니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누가복음 2:52)

예수님이라고 해서 지혜가 한 번에 다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키가 자라듯이 지혜가 자랐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하늘의 놀라운 계시의 비밀을 점차 알아 가셨습니다.

…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린도전서 1:24)

그(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 (골로새서 2:3)

예수님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예수님이 곧 우리가 배워야 할 하나님의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지혜 선생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지혜의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참된 지혜자로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며, 말씀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듣고 배우는 것이 우리의 최고의 특권이자 자랑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언제까지 배워야 할까요? 죽을 때까지입니다. 이 배움은 끝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지혜자이며, 하늘의 계시자이기 때문입니다.
1942년 영국의 윈스턴 처칠이 경제학자인 베버리지로 하여금 일부 특권층만이 누리던 복지혜택을 국민 모두가 누려야 한다는 보고서를 발표하게 했습니다. 여기에서 ‘요람에서 무덤까지(from the cradle to the grave)’라는 유명한 말이 나왔습니다. 즉,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에 이를 때까지 인간은 복지혜택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배움도 마찬가지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이 누구신가, 예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가르치고 죽을 때까지 배워 나가야 합니다. 죽을 때까지 지혜자이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배워 나가는 것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태복음 11:29)

예수님을 배우면, 육체의 일과 정신적인 일이 분열되는 것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안에서 하나님이 나를 위해 준비하신 지혜의 역사를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오늘도 우리가 예배를 드리면서 성령님의 은혜와 지혜로 하나님과 예수님을 배웁니다. 이제 우리가 세상에 나가서 일할 때, 생각하며 일하십시오. 다른 말로 하면 기도하면서 일하십시오. 그리고 무엇보다 주님이신 예수님을 배우십시오. 그러면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께서 나 같은 사람을 통해서 사람을 살리고 회복시키는 역사를 이루고 계시는구나.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지혜를 나를 통해 세상에 보이고 계시는구나’ 하고 깨닫게 됩니다. 이 놀라운 깨달음의 축복을 경험하며 세상 가운데서 일하는 하나님의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Connection Card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