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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은 곧 일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 목요일 소망 수양관에서 추모예배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떠난 보낸 유족들이 함께 모여 그 사람을 기억하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소망 동산 곳곳에는 “보고 싶어요”, “그리워요”, “사랑해요”라는 말이 적힌 꽃다발이 달려 있었습니다. 그것들을 읽으며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이고 죽었다는 것은 무엇일까?’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우선 죽었다는 것은 추억 속에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추억을 만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살아 있다는 것은 누군가의 손을 붙잡을 수 있고,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며 밥을 먹을 수 있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아름다운 세계를 거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추억을 새롭게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살아 있다는 것의 표증입니다. 그래서 살아 있다는 것은 곧 ‘일하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장애인이나 노인, 병상에 누운 사람이 일할 것이 없을 때, 그들은 ‘살아 있음’에 해당되지 않는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일하는 즐거움을 잃어버리면 인간은 그때부터 위축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삶의 의욕도 상실하게 됩니다. 하지만 지금 말하는 ‘일’은 직업이나 활동의 개념이 아닙니다. 숨이 멎을 때까지 생명과 함께 가는 것으로서, 일종의 융합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살아 있다는 게 무엇입니까? 심장이 뛰고 있는 것입니다. 코로 호흡하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하고, 손으로 잡고, 발로 거니는 것. 이것이 살아 있음의 모습입니다.
심장은 죽을 때까지 뜁니다. 1분에 약 60번을 뛰는데, 이것을 70년으로 따져 보면 무려 20억 번 이상을 쉬지 않고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것뿐입니까?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에 퍼져 있는 약 100조 개에 이르는 세포가 나의 생존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뼈는 팔에 64개, 다리에 62개, 두개골에 23개, 척추와 몸에 57개, 총 206개입니다. 이 뼈들이 각각 맡겨진 일을 감당하며 함께 움직이기 때문에 우리가 활동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체중의 약 60% 이상이 수분이고, 그중에서 혈액량은 체중의 1/12 정도인데, 심장의 펌프질을 통해 피가 몸 전체를 한 바퀴 도는 데 약 45∼46초가 걸린다고 합니다. 종합해서 말하면, 몸의 모든 기관이 나의 살아 있음을 위해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나는 세포들의 수고를 통해서 살아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일입니까?
따라서 산다는 것 자체가 일입니다. 산다는 것이 곧 일이라니, 한편으로는 고단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헛되고 헛되고 헛되다며 인생의 허무를 이야기했던 전도서 기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기쁘고 감사한 일이 있음을 증언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인생의 즐거움을 누려야 한다고 선포합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음식을 대해야 합니다.
첫째, 먹고 마시는 일입니다.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음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이는 하나님이 네가 하는 일들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 (전도서 9:7)
우리가 기쁘게 먹고 마시는 일을 통해 인간의 기쁨과 하나님의 기쁨이 서로 만나고 있습니다. 인생에 수많은 기쁨이 있지만 먹고 마시는 기쁨처럼 기분 좋은 일이 또 어디에 있습니까?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아 행복하다”라고 말했던 기억이 있지 않습니까? 저는 제가 좋아하는 냉면 한 그릇을 먹으면 행복하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맛을 느낄 수 있게 하시고, 식욕을 주시고, 먹은 것이 소화되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솟아납니다. 그래서 때로는 밥상 앞에서 속으로 중얼거릴 때도 있습니다. ‘밥아, 고맙구나. 입과 혀와 치아야, 고맙구나. 내 위장과 창자야, 고맙구나.’ 또한 우리 식탁에 놓여 있는 먹거리의 재료들 중 어느 것도 저절로 생긴 것이 없습니다. 식탁에 오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의 수고가 있었고, 음식을 만드는 주부의 애씀이 있었기에 우리가 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감사를 느끼는 것이 먹고 마시는 일의 축복입니다. 그래서 즐겁고 기쁘게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별명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먹는 자, 마시는 자’였습니다. 사실 이것은 점잖은 별명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이 예수님을 낮추기 위해 부른 별명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맛있게 잘 잡수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이 곧 하나님의 선물임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오천 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에게 먹고 마시는 것을 허락하시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 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먹는 것 앞에서 불평하고 짜증내며 투정부리는 것은 하나님의 기쁨에 동참하지 못하는 태도입니다.
하나의 예외적인 경우가 있다면 미각 감별사일 것입니다. 그는 정확하게 맛을 감별해야 하기에 맛이 있다,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외에는 음식 앞에서 감사해야 합니다. 지금도 주위에 먹을 것이 없어서 못 먹는 사람, 소화 장애가 있어서 음식을 조심해야 하는 사람, 몸이 아파서 입맛이 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들을 생각하면 먹을 수 있고 마실 수 있고 소화시킬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알게 됩니다.
먹는 것 가지고 불평하고 투정하는 사람이 있으면 한번쯤 굶겨야 합니다. 자녀들이 먹을 것 가지고 투정하면 굶기세요. 한 끼 굶는다고 죽지 않습니다. 오히려 먹는 것의 소중함을 깨닫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때로 금식을 하거나 배앓이 때문에 식사를 거르면 먹는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경험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음식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먹을 때 더 큰 기쁨이 됩니다. 최근 통계청 조사에 의하면 1인 가구의 수가 511만이 넘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대한민국 전체 가구 수 중에 27%가 1인 가구, 즉 단독 가구인 것입니다. 네 명 중에 한 명이 1인 가구인 셈입니다. 1인 가구의 수가 늘었다는 것은 아플 때 혼자 있고, 밥을 먹을 때도 혼자 먹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최근에 노인들의 고독사가 늘어나고 있는 것도 동일한 의미를 가질 것입니다. 이 시대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혼자서 어려움과 고통을 극복하고 있는지를 생각하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깨닫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3부 예배가 끝나면 곧 점심시간이 다가옵니다. 혼자 식사하지 마시고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식사하세요. 교회에서 봉사하는 분들은 어쩔 수 없이 혼자 먹어야 할 수도 있지만,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가족들과 함께 하나님께 예배드리면서 영적 양식을 먹고 그 다음에는 육신의 양식도 나누시기를 권합니다. 함께 음식을 나누며 한 주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삶을 나누는 기쁨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이고 예수님이 이 땅에서 많은 사람들과 나누신 기쁨입니다.
그런데 밥 먹을 때 반드시 기억해야 할 원칙이 있습니다. 많이 먹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맛있게 먹는 것입니다. 맛있게 먹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즐겁게 감사하면서 먹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마음으로 음식을 먹는다면, 그것이 곧 복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나 자신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둘째, 자신을 아름답게 꾸미는 일입니다. 이것은 내 인생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닫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일입니다.
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 네 머리에 향 기름을 그치지 아니하도록 할지니라 (전도서 9:8)
여기에서 말하는 멋을 내고 아름답게 꾸미라는 것은 사치를 뜻하지 않습니다. 명품으로 치장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고 당당한 모습으로 살아가라는 요청입니다.
저는 권사회 모임 때마다 아가서 6장 10절을 함께 읽고 복창하게 합니다. 권사님들이 이렇게 멋진 분들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아침 빛같이 뚜렷하고 달같이 아름답고 해같이 맑고 깃발을 세운 군대같이 당당한 여자가(사람이) 누구인가 (아가 6:10)
이 본문을 함께 읽은 후에 권사님들이 오른손을 가슴에 대고 “바로 나!”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여자’는 꼭 여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을 이야기합니다. 제가 권사님들과 이 본문을 소리 내어 읽는 이유는, 아가서에서 말하는 그 아름답고 맑고 당당한 사람이 바로 나라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스스로가 멋진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거울을 볼 때마다 이렇게 이야기해 보세요. “아침 빛같이 뚜렷하고 달같이 아름답고 해같이 맑고 깃발을 세운 군대같이 당당한 사람이 누구인가!” 그리고 거울에 비친 나 자신을 향해 “바로 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을 격려하고,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확인해야 나도 나를 귀하게 여기며 꾸밀 수 있습니다.
기도를 많이 한 한 젊은 여성이 있었습니다. 기도의 내용은 멋진 청년을 만나서 사랑하고 결혼해서 아름다운 가정을 꾸리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얘야, 이제 그만큼 기도했으면 됐다. 이제 집으로 가서 네 모습을 한번 들여다봐라. 너를 꾸며 보지 않겠니? 외모뿐만 아니라 네 내면세계도 꾸며 봐라. 겉과 속이 모두 아름다운 너를 보고 누군가 반하지 않겠니?”
비싼 브랜드가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명품백이 없으면 어떻습니까? 나를 아름답게 하는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닙니다. 나를 꾸미는 것에는 원칙이 있습니다. 겉모습을 꾸미지만, 내면의 세계를 더 멋지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기본적인 사고의 틀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는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유일무이하게 만드신 진품이다’는 것입니다.
저는 성경을 읽을 때 만나는 하나님의 말씀, “너는 너답게 살라”는 말씀이 참 좋습니다. “남과 비교하면서 살지 말고,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답게 네 인생을 열어가라. 너는 네 인생의 엑스트라가 아니라 네 인생을 만들어 가는 주인공이다. 그러니 나와 함께 네 인생을 만들어 가자.”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시는 메시지이자 우리가 자신을 꾸미고 내면의 세계를 가꾸어야 할 이유입니다.
주변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셋째, 사랑하는 일입니다. 가족을 사랑하고 친구와 우정을 맺는 일입니다.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에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그것이 네가 평생의 해 아래에서 수고하고 얻은 네 몫이니라 (전도서 9:9)
헛된 날처럼 흘러가는 세월 속에서 아내나 남편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신 몫이기 때문입니다.
가정은 행복의 베이스캠프가 아닙니까? 세상에서 받은 스트레스와 응어리들이 풀어지는 곳이 가정 아닙니까? 예전에 어느 목사님이 하신 말씀이 기억납니다. 어떤 사람이 직장만 가면 화를 벌컥벌컥 내고 아무에게나 욕을 해댄다는 이야기에 그 목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람, 가정에서 사랑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일 거야. 틀림없이 가족에게 위로받지 못하기 때문에 밖에서 그 불만을 터트리고 있는 거야.”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직장에서는 더없이 친절하고 좋은 사람인데, 집에서는 가족들에게 사랑을 베풀지 않습니다. 위에 나타난 두 가지 경우는 다 문제입니다.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사랑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랑 없이 사는 인생은 무의미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모든 추억이 종료되는 것이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살아 있음으로 추억을 새롭게 만들어 가기 위해 꼭 있어야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사랑하는 것입니다. 온 인류를 사랑한다면서 가장 가까운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면 그것은 가짜 사랑, 거짓 사랑일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가장 가까운 사람, 바로 앞에 있는 그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랑이 점점 커져 이웃에게 닿을 수 있습니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넷째, 주어진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일과 신앙에 대해 나누며 반복하는 이야기는, 육체의 일과 정신의 일이 함께 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창조의 대행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네 손이 일을 얻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스올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전도서 9:10)
네 손이 움직일 때 열심과 힘을 다해서 일하라는 것입니다. 일이 멈춰지는 날, 우리의 인생도 끝납니다. 예수님이 갖고 계시는 원칙을 우리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우리도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오늘 나눈 말씀을 다시 정리해 보겠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 우리가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첫째, 먹고 마시는 일입니다. 기억해야 하는 것은 많이 먹는 것보다 맛있게 먹는 것, 맛있게 먹는 것보다 감사하며 먹는 것이 최고의 즐거움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자신을 가꾸는 일입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먼저 내가 나를 존귀하게 여기고 스스로를 가꿔야 합니다. 셋째, 사랑하는 일입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사랑하는 것입니다. 넷째, 일할 수 없을 만큼 연약해 질 때가 오기 전까지 살아 있음에 감사하면서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귀한 믿음의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네 가지 일을 맡기셨습니다. 이것을 감사히 받고 기쁨으로 누리며, 하나님이 인생에게 주신 선물인 것을 고백하면서 살아가는 주님의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전도서 9: 7 ~ 10
7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음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이는 하나님이 네가 하는 일들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
8
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 네 머리에 향 기름을 그치지 아니하도록 할지니라
9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에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그것이 네가 평생에 해 아래에서 수고하고 얻은 네 몫이니라
10
네 손이 일을 얻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스올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산다는 것은 곧 일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 목요일 소망 수양관에서 추모예배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떠난 보낸 유족들이 함께 모여 그 사람을 기억하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소망 동산 곳곳에는 “보고 싶어요”, “그리워요”, “사랑해요”라는 말이 적힌 꽃다발이 달려 있었습니다. 그것들을 읽으며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이고 죽었다는 것은 무엇일까?’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우선 죽었다는 것은 추억 속에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추억을 만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살아 있다는 것은 누군가의 손을 붙잡을 수 있고,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며 밥을 먹을 수 있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아름다운 세계를 거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추억을 새롭게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살아 있다는 것의 표증입니다. 그래서 살아 있다는 것은 곧 ‘일하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장애인이나 노인, 병상에 누운 사람이 일할 것이 없을 때, 그들은 ‘살아 있음’에 해당되지 않는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일하는 즐거움을 잃어버리면 인간은 그때부터 위축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삶의 의욕도 상실하게 됩니다. 하지만 지금 말하는 ‘일’은 직업이나 활동의 개념이 아닙니다. 숨이 멎을 때까지 생명과 함께 가는 것으로서, 일종의 융합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살아 있다는 게 무엇입니까? 심장이 뛰고 있는 것입니다. 코로 호흡하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하고, 손으로 잡고, 발로 거니는 것. 이것이 살아 있음의 모습입니다.
심장은 죽을 때까지 뜁니다. 1분에 약 60번을 뛰는데, 이것을 70년으로 따져 보면 무려 20억 번 이상을 쉬지 않고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것뿐입니까?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에 퍼져 있는 약 100조 개에 이르는 세포가 나의 생존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뼈는 팔에 64개, 다리에 62개, 두개골에 23개, 척추와 몸에 57개, 총 206개입니다. 이 뼈들이 각각 맡겨진 일을 감당하며 함께 움직이기 때문에 우리가 활동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체중의 약 60% 이상이 수분이고, 그중에서 혈액량은 체중의 1/12 정도인데, 심장의 펌프질을 통해 피가 몸 전체를 한 바퀴 도는 데 약 45∼46초가 걸린다고 합니다. 종합해서 말하면, 몸의 모든 기관이 나의 살아 있음을 위해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나는 세포들의 수고를 통해서 살아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일입니까?
따라서 산다는 것 자체가 일입니다. 산다는 것이 곧 일이라니, 한편으로는 고단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헛되고 헛되고 헛되다며 인생의 허무를 이야기했던 전도서 기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기쁘고 감사한 일이 있음을 증언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인생의 즐거움을 누려야 한다고 선포합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음식을 대해야 합니다.
첫째, 먹고 마시는 일입니다.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음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이는 하나님이 네가 하는 일들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 (전도서 9:7)
우리가 기쁘게 먹고 마시는 일을 통해 인간의 기쁨과 하나님의 기쁨이 서로 만나고 있습니다. 인생에 수많은 기쁨이 있지만 먹고 마시는 기쁨처럼 기분 좋은 일이 또 어디에 있습니까?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아 행복하다”라고 말했던 기억이 있지 않습니까? 저는 제가 좋아하는 냉면 한 그릇을 먹으면 행복하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맛을 느낄 수 있게 하시고, 식욕을 주시고, 먹은 것이 소화되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솟아납니다. 그래서 때로는 밥상 앞에서 속으로 중얼거릴 때도 있습니다. ‘밥아, 고맙구나. 입과 혀와 치아야, 고맙구나. 내 위장과 창자야, 고맙구나.’ 또한 우리 식탁에 놓여 있는 먹거리의 재료들 중 어느 것도 저절로 생긴 것이 없습니다. 식탁에 오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의 수고가 있었고, 음식을 만드는 주부의 애씀이 있었기에 우리가 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감사를 느끼는 것이 먹고 마시는 일의 축복입니다. 그래서 즐겁고 기쁘게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별명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먹는 자, 마시는 자’였습니다. 사실 이것은 점잖은 별명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이 예수님을 낮추기 위해 부른 별명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맛있게 잘 잡수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이 곧 하나님의 선물임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오천 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에게 먹고 마시는 것을 허락하시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 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먹는 것 앞에서 불평하고 짜증내며 투정부리는 것은 하나님의 기쁨에 동참하지 못하는 태도입니다.
하나의 예외적인 경우가 있다면 미각 감별사일 것입니다. 그는 정확하게 맛을 감별해야 하기에 맛이 있다,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외에는 음식 앞에서 감사해야 합니다. 지금도 주위에 먹을 것이 없어서 못 먹는 사람, 소화 장애가 있어서 음식을 조심해야 하는 사람, 몸이 아파서 입맛이 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들을 생각하면 먹을 수 있고 마실 수 있고 소화시킬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알게 됩니다.
먹는 것 가지고 불평하고 투정하는 사람이 있으면 한번쯤 굶겨야 합니다. 자녀들이 먹을 것 가지고 투정하면 굶기세요. 한 끼 굶는다고 죽지 않습니다. 오히려 먹는 것의 소중함을 깨닫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때로 금식을 하거나 배앓이 때문에 식사를 거르면 먹는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경험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음식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먹을 때 더 큰 기쁨이 됩니다. 최근 통계청 조사에 의하면 1인 가구의 수가 511만이 넘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대한민국 전체 가구 수 중에 27%가 1인 가구, 즉 단독 가구인 것입니다. 네 명 중에 한 명이 1인 가구인 셈입니다. 1인 가구의 수가 늘었다는 것은 아플 때 혼자 있고, 밥을 먹을 때도 혼자 먹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최근에 노인들의 고독사가 늘어나고 있는 것도 동일한 의미를 가질 것입니다. 이 시대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혼자서 어려움과 고통을 극복하고 있는지를 생각하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깨닫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3부 예배가 끝나면 곧 점심시간이 다가옵니다. 혼자 식사하지 마시고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식사하세요. 교회에서 봉사하는 분들은 어쩔 수 없이 혼자 먹어야 할 수도 있지만,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가족들과 함께 하나님께 예배드리면서 영적 양식을 먹고 그 다음에는 육신의 양식도 나누시기를 권합니다. 함께 음식을 나누며 한 주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삶을 나누는 기쁨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이고 예수님이 이 땅에서 많은 사람들과 나누신 기쁨입니다.
그런데 밥 먹을 때 반드시 기억해야 할 원칙이 있습니다. 많이 먹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맛있게 먹는 것입니다. 맛있게 먹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즐겁게 감사하면서 먹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마음으로 음식을 먹는다면, 그것이 곧 복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나 자신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둘째, 자신을 아름답게 꾸미는 일입니다. 이것은 내 인생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닫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일입니다.
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 네 머리에 향 기름을 그치지 아니하도록 할지니라 (전도서 9:8)
여기에서 말하는 멋을 내고 아름답게 꾸미라는 것은 사치를 뜻하지 않습니다. 명품으로 치장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고 당당한 모습으로 살아가라는 요청입니다.
저는 권사회 모임 때마다 아가서 6장 10절을 함께 읽고 복창하게 합니다. 권사님들이 이렇게 멋진 분들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아침 빛같이 뚜렷하고 달같이 아름답고 해같이 맑고 깃발을 세운 군대같이 당당한 여자가(사람이) 누구인가 (아가 6:10)
이 본문을 함께 읽은 후에 권사님들이 오른손을 가슴에 대고 “바로 나!”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여자’는 꼭 여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을 이야기합니다. 제가 권사님들과 이 본문을 소리 내어 읽는 이유는, 아가서에서 말하는 그 아름답고 맑고 당당한 사람이 바로 나라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스스로가 멋진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거울을 볼 때마다 이렇게 이야기해 보세요. “아침 빛같이 뚜렷하고 달같이 아름답고 해같이 맑고 깃발을 세운 군대같이 당당한 사람이 누구인가!” 그리고 거울에 비친 나 자신을 향해 “바로 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을 격려하고,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확인해야 나도 나를 귀하게 여기며 꾸밀 수 있습니다.
기도를 많이 한 한 젊은 여성이 있었습니다. 기도의 내용은 멋진 청년을 만나서 사랑하고 결혼해서 아름다운 가정을 꾸리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얘야, 이제 그만큼 기도했으면 됐다. 이제 집으로 가서 네 모습을 한번 들여다봐라. 너를 꾸며 보지 않겠니? 외모뿐만 아니라 네 내면세계도 꾸며 봐라. 겉과 속이 모두 아름다운 너를 보고 누군가 반하지 않겠니?”
비싼 브랜드가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명품백이 없으면 어떻습니까? 나를 아름답게 하는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닙니다. 나를 꾸미는 것에는 원칙이 있습니다. 겉모습을 꾸미지만, 내면의 세계를 더 멋지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기본적인 사고의 틀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는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유일무이하게 만드신 진품이다’는 것입니다.
저는 성경을 읽을 때 만나는 하나님의 말씀, “너는 너답게 살라”는 말씀이 참 좋습니다. “남과 비교하면서 살지 말고,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답게 네 인생을 열어가라. 너는 네 인생의 엑스트라가 아니라 네 인생을 만들어 가는 주인공이다. 그러니 나와 함께 네 인생을 만들어 가자.”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시는 메시지이자 우리가 자신을 꾸미고 내면의 세계를 가꾸어야 할 이유입니다.
주변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셋째, 사랑하는 일입니다. 가족을 사랑하고 친구와 우정을 맺는 일입니다.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에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그것이 네가 평생의 해 아래에서 수고하고 얻은 네 몫이니라 (전도서 9:9)
헛된 날처럼 흘러가는 세월 속에서 아내나 남편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신 몫이기 때문입니다.
가정은 행복의 베이스캠프가 아닙니까? 세상에서 받은 스트레스와 응어리들이 풀어지는 곳이 가정 아닙니까? 예전에 어느 목사님이 하신 말씀이 기억납니다. 어떤 사람이 직장만 가면 화를 벌컥벌컥 내고 아무에게나 욕을 해댄다는 이야기에 그 목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람, 가정에서 사랑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일 거야. 틀림없이 가족에게 위로받지 못하기 때문에 밖에서 그 불만을 터트리고 있는 거야.”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직장에서는 더없이 친절하고 좋은 사람인데, 집에서는 가족들에게 사랑을 베풀지 않습니다. 위에 나타난 두 가지 경우는 다 문제입니다.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사랑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랑 없이 사는 인생은 무의미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모든 추억이 종료되는 것이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살아 있음으로 추억을 새롭게 만들어 가기 위해 꼭 있어야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사랑하는 것입니다. 온 인류를 사랑한다면서 가장 가까운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면 그것은 가짜 사랑, 거짓 사랑일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가장 가까운 사람, 바로 앞에 있는 그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랑이 점점 커져 이웃에게 닿을 수 있습니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넷째, 주어진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일과 신앙에 대해 나누며 반복하는 이야기는, 육체의 일과 정신의 일이 함께 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창조의 대행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네 손이 일을 얻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스올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전도서 9:10)
네 손이 움직일 때 열심과 힘을 다해서 일하라는 것입니다. 일이 멈춰지는 날, 우리의 인생도 끝납니다. 예수님이 갖고 계시는 원칙을 우리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우리도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오늘 나눈 말씀을 다시 정리해 보겠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 우리가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첫째, 먹고 마시는 일입니다. 기억해야 하는 것은 많이 먹는 것보다 맛있게 먹는 것, 맛있게 먹는 것보다 감사하며 먹는 것이 최고의 즐거움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자신을 가꾸는 일입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먼저 내가 나를 존귀하게 여기고 스스로를 가꿔야 합니다. 셋째, 사랑하는 일입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사랑하는 것입니다. 넷째, 일할 수 없을 만큼 연약해 질 때가 오기 전까지 살아 있음에 감사하면서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귀한 믿음의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네 가지 일을 맡기셨습니다. 이것을 감사히 받고 기쁨으로 누리며, 하나님이 인생에게 주신 선물인 것을 고백하면서 살아가는 주님의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