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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헛되다는 것은? – 전도서의 질문 1 –

전도서 1: 2 ~ 11

김지철 목사

2015.02.22

전도서는 인생의 헛됨을 이야기합니다.

2015년이 시작된 지 벌써 두 달이 지나고 있습니다. 오늘은 2월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문득문득 전도서 기자가 말한 것처럼 ‘아, 인생 참 무상하네.’ 이렇게 속으로 외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때로 인생이란 정말 헛되고 헛된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속절없이 삶이 흘러가는 건 아닌지 스스로에게 묻게도 됩니다.
전도서의 시작도 그렇습니다. 전도서는 시작부터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서 1:2)

‘헛되다’는 말을 다섯 번이나 반복하고 있는데, 전도서 맨 앞에 나온 이 말은 마지막 장인 12장 8절에도 세 번이나 반복됩니다. 시작이 헛되고 마지막이 헛되다 고백하는 이 책은, 뼈 속 깊이 스며든 삶의 무의미성과 허무를 그대로 토해내고 있습니다.
‘헛되다’라는 것은 바람과 물방울이 잠시 있다 사라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효과가 없는 것, 비어 있는 것, 심지어 때로는 남을 속인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전도서를 쓴 사람이 누구입니까? 전도서 1장 1절에 보면,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의 왕’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일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솔로몬입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이름을 써 놓지 않았습니다. 솔로몬을 연상시킬 만큼 힘과 부와 권력을 가진 존재가 틀림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익명성 안에 숨습니다.
익명성이란 두 가지 의미가 있지 않습니까? 부정적으로는, ‘책임지기 싫다’는 의미이고, 긍정적으로는 겸손의 표시입니다. 그렇다면 전도서 기자는 왜 익명성을 택했을까요? 내가 누구인지 드러내는 것 자체가 인생이 헛되다는 것과는 맞지 않는 것 같아서, 자신의 지위는 썼지만 이름은 숨겨 놓은 것입니다.

전도서는 수많은 질문들을 담고 있습니다.

전도서는 종교적인 특징을 지녔기보다는 오히려 철학적인 분위기가 더 강합니다. 철학과 종교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 차이점을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단순하게 말하면 우선 철학은 질문하는 학문입니다. 그것도 이성을 통한 비판적인 질문입니다. 그러나 철학의 한계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시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대답할 내용을 상당부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종교는 다릅니다. 비판적인 이성을 통한 질문의 마지막 순간을 인식하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바로 거기에 믿음, 우리의 신앙이 놓여 있습니다. 현실의 많은 질문들을 뛰어넘는 초월의 세계를 향해 우리 마음이 열려 있는 것, 그것이 종교의 세계, 신앙의 세계입니다.
이렇게 표현해도 괜찮을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인간이 말하는 것은 철학입니다. 반대로 인간에 대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종교입니다. 그래서 철학에서는 인간이 말하는 자로 등장한다면, 신학, 우리가 가진 신앙에서 인간은 말하기 전에 먼저 듣는 자로 나타납니다. 철학은 끊임없이 말하고 질문하고 있지만, 우리가 하나님과 예수를 믿게 되면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서 “내가 듣겠습니다. 말씀하시옵소서.”라고 듣기를 기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이고, 기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도서는 수많은 질문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본래 질문할 수 있다는 것은 용기입니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향해서 질문할 수 있다는 것은, 최고의 배짱이자 담대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편들이 아내와 대화하려 하지 않는 이유는 아내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약점이 잡힐까봐 두려워서입니다. 부모가 자녀들과 대화를 안 하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녀들이 때로 아버지를, 어머니를 들이받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전도서는 자기 속에 있는 절망과 삶의 문제들, 자신의 약점에 대해 치열하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질문들을 통해 인생 속에 있는 무의미성, 절망 등에서 탈출하고자 저자는 애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 때문에 전도서가 우리에게 위대한 책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현대인의 위기는 질문을 잘 안한다는 것입니다. 아니 질문으로부터 도망가려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문제를 들여다보지 않고 남의 것에 대해서만 큰소리를 치는 것이 현대인이 갖고 있는 약점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비겁함의 발로이기도 합니다.
오늘 전도서를 읽어보면 저자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하나하나 묻고 있습니다. ‘도대체 내 인생이 무엇인가? 여기까지의 내 인생에서 참된 의미가 있었던 것이 있는가?’ 그런데 묻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대답을 잘 받지 못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합니다. 그 침묵 속에서 저자는 자신의 이성과 경험을 모두 동원하여 삶의 문제점들을 그대로 토해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읽어보면 알 수 있다시피 전도서는 대화가 아닙니다.
성경의 다른 책들은 대화입니다. 인간이 질문하고, 하나님이 대답하십니다. 또 하나님이 우리에게 물으시고 우리가 대답을 합니다. 이렇게 주고받는 대화로 이야기가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전도서는 대화가 아니라 독백입니다. 그래서 그 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계시가 없다’고 선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도서는 계시의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전도서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으로 표현한다면, 계시의 부재 속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종종 하얀 은혜가 아니라 ‘검은(숨겨진) 은혜’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허무함을 아는 자가 참된 의미를 구하게 됩니다.

지옥과 천국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지옥의 특징은 고통입니다. 그런데 사실 지옥의 본질은 고통이라기보다는 ‘허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육체적인 고통이 아니라 영적인 고통입니다.
단테는 신곡(La Divina Commedia)에서 지옥 문에 쓰인 글귀로 지옥을 표현합니다. ‘여기에 들어오는 그대들이여, 모든 희망을 버리라.’ 무슨 말입니까? 희망을 가질 수 없는 곳이 지옥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의 욥기를 보면 주인공 욥은 고통을 당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을 원망하며 하나님께 대들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두 가지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하나는 신앙입니다. 하나님께 대들기는 했지만,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며 하나님을 팽개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대든 것은 괜찮습니다.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도 괜찮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가 전제된 것이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욥은 하나님을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욥이 놓치지 않은 다른 하나는 희망입니다. 욥은 이 고통이 언젠가는 끝난다는 것과 고통을 넘어서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소망을 가졌습니다. 그가 이 소망 이외의 모든 것들은 팽개쳤을 때, 오직 소망을 붙잡고 있었을 때, 하나님은 그를 회복시켜 주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도서는 조금 다릅니다. 전도서를 읽어보면 신앙을 갖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갖고 있지 않은 것 같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공허, 절망, 무의미성을 이야기하며, 소망조차도 없다는 듯한 탄식을 듣게 되기 때문입니다.
구약 성경의 모든 책들이 삶의 내용들을 깊게 다루는 멋진 책들이지만, 제가 개인적으로 그중 세 권을 권한다면, 욥기, 아가서, 그리고 전도서입니다. 먼저 욥기는 어두운 밤을 지내고 있지만, 가슴에는 소망을 품고 있는 책입니다. 고통 중에 있지만, ‘언제 아침이 올까’하는 살아있는 기대감이 욥기의 특색입니다. 아가서는 사랑하는 연인이 함께하는 밤입니다. 아주 뜨겁고 열정적인 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말합니다. ‘이 밤이 천천히 지나갔으면, 우리의 사랑을 더 불태웠으면….’ 그렇다면 전도서는 무엇일까요? 전도서는 아주 칠흑 같은 밤입니다. 불빛이라곤 보이지 않습니다. 소망이 사라졌습니다. 기댈 곳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밤이 언제 끝날지 기대할 줄 모르고, 쓸쓸함과 외로움 속에 빠진 삶의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제가 예수님을 처음 믿고 성경을 읽기 시작했을 때, 이 전도서가 저에게 무척 크게 다가왔습니다. 성경 속에 인생의 허무를 이야기하는 책이 있다는 것이 저에게는 매우 놀라웠습니다. 그것도 인생의 모든 것을 경험한, 모든 것을 소유하고 누리고, 이 세상의 모든 쾌락을 즐긴 한 나라의 왕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인생이 참 허무하게 지나가는구나….’ 탄식하는 모습에서 그동안 제가 갖고 있었던 수많은 물음들이 결국 이 안에 담겨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전도서를 열심히 봤던 기억이 있습니다.
전도서의 허무주의는 긍정적인 효과가 있습니다. 허무를 발견한 사람만이 허무를 뛰어넘는 삶의 의미, 삶의 긍정을 찾고 동시에 삶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인생에는 양면이 있지 않습니까? 어둠의 깊이를 알아야 빛이 얼마나 좋은지 알지 않습니까? 어둠 속에서 헤맨 경험이 있어야 생명이, 빛이 다가올 때 그것을 따라가지 않습니까? 죽음이라는 슬픔이 얼마나 과격한 것임을 알 때,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이 복음으로 다가오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전도서의 허무주의는 긍정적인 효과가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뱀처럼 도사리고 있는 탐욕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허무주의는 이러한 탐욕들을 거침없이 깨뜨려 버립니다. 하나님을 따라가면서도 추구했던 은밀한 우상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따라가면서도, 돈과 재물이 때로는 하나님보다 더 좋고 육체의 쾌락이 하나님보다 더 좋고, 세상의 지식과 지혜가 하나님보다 더 근사하게 느껴지고, 명예와 권력이 하나님보다 더 힘이 있다고 생각했던 그런 모든 우상들을 깨뜨립니다. 즉 허무주의 속에 들어간다는 것은, 그토록 바라고 기다렸던 것들도 결국 허무로 끝난다는 선언입니다.
그때 두 번째 효과가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사라져 버리는 이러한 것들을 뛰어넘는 것의 의미가 도대체 무엇일까? 들꽃처럼 반짝 피었다가 사라질 존재인 내게 영원한 것은 정말 없는 것일까?’ 물음과 함께 기대감과 소망이, 탐구가 시작됩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전도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억하게 합니다.

모든 분들에게 그런 세월이 있었을 것입니다. ‘내 인생 이대로 가도 괜찮은가? 이렇게 살아도 의미가 있는 것일까? 내 모습이 참 볼품없다.’ 자신에 대해, 자신의 삶에 대해 의미를 묻던 시간들 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시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기쁨으로 맞이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됩니다.
그렇다면, 전도서 기자가 가지고 있는 삶의 탄식이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에는 두 가지가 나옵니다. 하나는 ‘내가 해 아래에서 모든 것을 봤더니 인생이란 쳇바퀴처럼 돌아간다. 그저 반복이다. 아침이 오면 저녁이 되고, 저녁이 되면 다시 아침이 되고….’ 해 아래에 새 것이 없음을 발견하면서 피곤해하고 싫증을 느낍니다. 한마디로 삶의 권태 속에 들어간 것입니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전도서 1:3∼4)

삶 자체가 우리를 피곤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너무 뻔해서 우리를 괴롭게 하고, 싫증나게 한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일은 없고, 새로운 것을 기대할 수도 없이 반복만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자연만물의 모습도 그러하다고 이야기합니다.

해는 뜨고 해는 지되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아가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바람은 그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강물은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전도서 1:5∼7)

왔다가 다시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자연만물의 모습을 보며 전도자는 어떻게 결론을 맺을까요?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전도서 1:9)

싫증나고 허무하기만 한 반복 속에서, “이런 인생을 도대체 어떻게 살라는 말인가!”라며 전도자는 탄식하고 있습니다. 사실 전도서는 질문의 책이기 때문에 답이 다 나오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전도서뿐만 아니라 다른 65권의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갖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답이신 예수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 답이 무엇입니까?
삶이 허무하니 신앙은 의미 없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기독교는, ‘삶은 반복되고 허무하다. 하지만 허무하기 때문에 내가 지금 살아있다는 것이 소중하다’고 가르칩니다. 내가 호흡하는 것이 감사하고, 봄이 오는 소리를 들으며 하나님의 창조의 솜씨를 느낀다는 것이 귀하다는 것입니다. 결국 살아 있는 지금, 마음껏 즐거워하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인생의 허무는 인간의, 인생의 단면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한쪽 면입니다. 또 다른 면은, 하나님을 믿는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를 아는 것입니다. 살아있다는 것, 내 심장이 뛰고, 스스로 손과 발을 움직일 수 있는 삶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먹은 것이 소화되는 것, 그래서 먹고 마시는 것이 즐거움이 되는 것, 그것을 알고 마음껏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떠오르는 태양의 웅장함과 노을의 아름다움과 쓸쓸함, 겨울의 앙상한 가지에 수북이 쌓인 흰 눈의 찬란함을 느끼며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새싹이 돋아나는 봄의 모습을 신기한 눈으로, 기쁨으로 맞이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옆에 소중한 사람들이 있는 것, 이런 귀한 삶의 자리에 내가 들게 된 것, 나 같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것, 이 모든 것들이 축복임을 알고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자녀를 낳고, 때로 부부끼리 싸우기도 하지만 그 자체를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생의 기본적인 즐거움을 누가 이야기하나요? 전도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그 안에 이 놀라운 기쁨의 사실들이 다 들어 있습니다. 권면합니다. 전도서를 한 번 읽어보세요. 그 속에 내 질문이 있고, 그 질문들을 통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알도록 우리를 초청하고 있습니다.
전도서 기자의 두 번째 탄식은 언젠가는 내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된다는 아픔입니다.

이전 세대들이 기억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들과 함께 기억됨이 없으리라 (전도서 1:11)

분명 우리의 이름을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때가 올 것입니다. 그 유명한 사람들이 지금 다 어디에 갔습니까? 우리가 부모님의 묘소에는 가지만, 우리 자녀들은 어떻습니까? 할아버지, 할머니의 묘소를 찾는 자녀들이 부모님의 묘소를 찾는 이들의 1/10이나 될까요? 증조할아버지나 할머니의 이름도 모릅니다. 이처럼 우리 인생의 이름은 그냥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이 전도자를 가슴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경을 읽어보면, 구약에서도 신약에서도 하나님은 우리의 이름을 기억하신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네 이름을 부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네가 그동안 흘렸던 눈물을 하나하나 기억하면서 다시 닦아주겠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영원한 기쁨을 채워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 인생의 이름은 언젠가는 사라질 것입니다. 아마 아무도 나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어질 때가 올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내 이름을 기억하시고 나를 불러주십니다. 이 하나님 앞에 우리가 서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주님을 기억하는 것이 허무를 이기는 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왜 대답일까요?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면서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고 말씀하시며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사실을 알고 외칩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해 아래에 새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해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내가 사는 이 땅을 새롭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기독교 신앙이란 그 새로움을 내 속에서 경험하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물건은 낡아지지만, 내가 새로워지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이 새롭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생이 허무하다는 것은, 살아 숨 쉬는 지금이 소중하다는 뜻입니다. 인생은 내 이름을 잊어버리지만, 하나님은 내 이름을 부르시면서 나를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삼으셨습니다. 이 놀라운 사실들이 허무하고 의미 없는 인생을 이겨나가는 비밀입니다.
여러분, 지금 내가 움직일 수 있다는 것, 살아있다는 것을 즐거워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오늘도 내가 살아 있음을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내게 주어진 삶을 하나님이 주신 새로움으로 살겠다고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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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 1: 2 ~ 11

2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3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4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5

해는 뜨고 해는 지되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6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아가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바람은 그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7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강물은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8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

9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10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가 있기 오래 전 세대들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11

이전 세대들이 기억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들과 함께 기억됨이 없으리라

전도서는 인생의 헛됨을 이야기합니다.

2015년이 시작된 지 벌써 두 달이 지나고 있습니다. 오늘은 2월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문득문득 전도서 기자가 말한 것처럼 ‘아, 인생 참 무상하네.’ 이렇게 속으로 외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때로 인생이란 정말 헛되고 헛된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속절없이 삶이 흘러가는 건 아닌지 스스로에게 묻게도 됩니다.
전도서의 시작도 그렇습니다. 전도서는 시작부터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서 1:2)

‘헛되다’는 말을 다섯 번이나 반복하고 있는데, 전도서 맨 앞에 나온 이 말은 마지막 장인 12장 8절에도 세 번이나 반복됩니다. 시작이 헛되고 마지막이 헛되다 고백하는 이 책은, 뼈 속 깊이 스며든 삶의 무의미성과 허무를 그대로 토해내고 있습니다.
‘헛되다’라는 것은 바람과 물방울이 잠시 있다 사라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효과가 없는 것, 비어 있는 것, 심지어 때로는 남을 속인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전도서를 쓴 사람이 누구입니까? 전도서 1장 1절에 보면,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의 왕’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일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솔로몬입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이름을 써 놓지 않았습니다. 솔로몬을 연상시킬 만큼 힘과 부와 권력을 가진 존재가 틀림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익명성 안에 숨습니다.
익명성이란 두 가지 의미가 있지 않습니까? 부정적으로는, ‘책임지기 싫다’는 의미이고, 긍정적으로는 겸손의 표시입니다. 그렇다면 전도서 기자는 왜 익명성을 택했을까요? 내가 누구인지 드러내는 것 자체가 인생이 헛되다는 것과는 맞지 않는 것 같아서, 자신의 지위는 썼지만 이름은 숨겨 놓은 것입니다.

전도서는 수많은 질문들을 담고 있습니다.

전도서는 종교적인 특징을 지녔기보다는 오히려 철학적인 분위기가 더 강합니다. 철학과 종교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 차이점을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단순하게 말하면 우선 철학은 질문하는 학문입니다. 그것도 이성을 통한 비판적인 질문입니다. 그러나 철학의 한계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시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대답할 내용을 상당부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종교는 다릅니다. 비판적인 이성을 통한 질문의 마지막 순간을 인식하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바로 거기에 믿음, 우리의 신앙이 놓여 있습니다. 현실의 많은 질문들을 뛰어넘는 초월의 세계를 향해 우리 마음이 열려 있는 것, 그것이 종교의 세계, 신앙의 세계입니다.
이렇게 표현해도 괜찮을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인간이 말하는 것은 철학입니다. 반대로 인간에 대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종교입니다. 그래서 철학에서는 인간이 말하는 자로 등장한다면, 신학, 우리가 가진 신앙에서 인간은 말하기 전에 먼저 듣는 자로 나타납니다. 철학은 끊임없이 말하고 질문하고 있지만, 우리가 하나님과 예수를 믿게 되면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서 “내가 듣겠습니다. 말씀하시옵소서.”라고 듣기를 기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이고, 기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도서는 수많은 질문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본래 질문할 수 있다는 것은 용기입니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향해서 질문할 수 있다는 것은, 최고의 배짱이자 담대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편들이 아내와 대화하려 하지 않는 이유는 아내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약점이 잡힐까봐 두려워서입니다. 부모가 자녀들과 대화를 안 하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녀들이 때로 아버지를, 어머니를 들이받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전도서는 자기 속에 있는 절망과 삶의 문제들, 자신의 약점에 대해 치열하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질문들을 통해 인생 속에 있는 무의미성, 절망 등에서 탈출하고자 저자는 애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 때문에 전도서가 우리에게 위대한 책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현대인의 위기는 질문을 잘 안한다는 것입니다. 아니 질문으로부터 도망가려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문제를 들여다보지 않고 남의 것에 대해서만 큰소리를 치는 것이 현대인이 갖고 있는 약점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비겁함의 발로이기도 합니다.
오늘 전도서를 읽어보면 저자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하나하나 묻고 있습니다. ‘도대체 내 인생이 무엇인가? 여기까지의 내 인생에서 참된 의미가 있었던 것이 있는가?’ 그런데 묻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대답을 잘 받지 못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합니다. 그 침묵 속에서 저자는 자신의 이성과 경험을 모두 동원하여 삶의 문제점들을 그대로 토해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읽어보면 알 수 있다시피 전도서는 대화가 아닙니다.
성경의 다른 책들은 대화입니다. 인간이 질문하고, 하나님이 대답하십니다. 또 하나님이 우리에게 물으시고 우리가 대답을 합니다. 이렇게 주고받는 대화로 이야기가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전도서는 대화가 아니라 독백입니다. 그래서 그 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계시가 없다’고 선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도서는 계시의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전도서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으로 표현한다면, 계시의 부재 속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종종 하얀 은혜가 아니라 ‘검은(숨겨진) 은혜’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허무함을 아는 자가 참된 의미를 구하게 됩니다.

지옥과 천국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지옥의 특징은 고통입니다. 그런데 사실 지옥의 본질은 고통이라기보다는 ‘허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육체적인 고통이 아니라 영적인 고통입니다.
단테는 신곡(La Divina Commedia)에서 지옥 문에 쓰인 글귀로 지옥을 표현합니다. ‘여기에 들어오는 그대들이여, 모든 희망을 버리라.’ 무슨 말입니까? 희망을 가질 수 없는 곳이 지옥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의 욥기를 보면 주인공 욥은 고통을 당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을 원망하며 하나님께 대들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두 가지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하나는 신앙입니다. 하나님께 대들기는 했지만,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며 하나님을 팽개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대든 것은 괜찮습니다.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도 괜찮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가 전제된 것이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욥은 하나님을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욥이 놓치지 않은 다른 하나는 희망입니다. 욥은 이 고통이 언젠가는 끝난다는 것과 고통을 넘어서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소망을 가졌습니다. 그가 이 소망 이외의 모든 것들은 팽개쳤을 때, 오직 소망을 붙잡고 있었을 때, 하나님은 그를 회복시켜 주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도서는 조금 다릅니다. 전도서를 읽어보면 신앙을 갖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갖고 있지 않은 것 같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공허, 절망, 무의미성을 이야기하며, 소망조차도 없다는 듯한 탄식을 듣게 되기 때문입니다.
구약 성경의 모든 책들이 삶의 내용들을 깊게 다루는 멋진 책들이지만, 제가 개인적으로 그중 세 권을 권한다면, 욥기, 아가서, 그리고 전도서입니다. 먼저 욥기는 어두운 밤을 지내고 있지만, 가슴에는 소망을 품고 있는 책입니다. 고통 중에 있지만, ‘언제 아침이 올까’하는 살아있는 기대감이 욥기의 특색입니다. 아가서는 사랑하는 연인이 함께하는 밤입니다. 아주 뜨겁고 열정적인 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말합니다. ‘이 밤이 천천히 지나갔으면, 우리의 사랑을 더 불태웠으면….’ 그렇다면 전도서는 무엇일까요? 전도서는 아주 칠흑 같은 밤입니다. 불빛이라곤 보이지 않습니다. 소망이 사라졌습니다. 기댈 곳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밤이 언제 끝날지 기대할 줄 모르고, 쓸쓸함과 외로움 속에 빠진 삶의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제가 예수님을 처음 믿고 성경을 읽기 시작했을 때, 이 전도서가 저에게 무척 크게 다가왔습니다. 성경 속에 인생의 허무를 이야기하는 책이 있다는 것이 저에게는 매우 놀라웠습니다. 그것도 인생의 모든 것을 경험한, 모든 것을 소유하고 누리고, 이 세상의 모든 쾌락을 즐긴 한 나라의 왕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인생이 참 허무하게 지나가는구나….’ 탄식하는 모습에서 그동안 제가 갖고 있었던 수많은 물음들이 결국 이 안에 담겨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전도서를 열심히 봤던 기억이 있습니다.
전도서의 허무주의는 긍정적인 효과가 있습니다. 허무를 발견한 사람만이 허무를 뛰어넘는 삶의 의미, 삶의 긍정을 찾고 동시에 삶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인생에는 양면이 있지 않습니까? 어둠의 깊이를 알아야 빛이 얼마나 좋은지 알지 않습니까? 어둠 속에서 헤맨 경험이 있어야 생명이, 빛이 다가올 때 그것을 따라가지 않습니까? 죽음이라는 슬픔이 얼마나 과격한 것임을 알 때,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이 복음으로 다가오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전도서의 허무주의는 긍정적인 효과가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뱀처럼 도사리고 있는 탐욕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허무주의는 이러한 탐욕들을 거침없이 깨뜨려 버립니다. 하나님을 따라가면서도 추구했던 은밀한 우상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따라가면서도, 돈과 재물이 때로는 하나님보다 더 좋고 육체의 쾌락이 하나님보다 더 좋고, 세상의 지식과 지혜가 하나님보다 더 근사하게 느껴지고, 명예와 권력이 하나님보다 더 힘이 있다고 생각했던 그런 모든 우상들을 깨뜨립니다. 즉 허무주의 속에 들어간다는 것은, 그토록 바라고 기다렸던 것들도 결국 허무로 끝난다는 선언입니다.
그때 두 번째 효과가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사라져 버리는 이러한 것들을 뛰어넘는 것의 의미가 도대체 무엇일까? 들꽃처럼 반짝 피었다가 사라질 존재인 내게 영원한 것은 정말 없는 것일까?’ 물음과 함께 기대감과 소망이, 탐구가 시작됩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전도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억하게 합니다.

모든 분들에게 그런 세월이 있었을 것입니다. ‘내 인생 이대로 가도 괜찮은가? 이렇게 살아도 의미가 있는 것일까? 내 모습이 참 볼품없다.’ 자신에 대해, 자신의 삶에 대해 의미를 묻던 시간들 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시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기쁨으로 맞이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됩니다.
그렇다면, 전도서 기자가 가지고 있는 삶의 탄식이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에는 두 가지가 나옵니다. 하나는 ‘내가 해 아래에서 모든 것을 봤더니 인생이란 쳇바퀴처럼 돌아간다. 그저 반복이다. 아침이 오면 저녁이 되고, 저녁이 되면 다시 아침이 되고….’ 해 아래에 새 것이 없음을 발견하면서 피곤해하고 싫증을 느낍니다. 한마디로 삶의 권태 속에 들어간 것입니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전도서 1:3∼4)

삶 자체가 우리를 피곤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너무 뻔해서 우리를 괴롭게 하고, 싫증나게 한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일은 없고, 새로운 것을 기대할 수도 없이 반복만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자연만물의 모습도 그러하다고 이야기합니다.

해는 뜨고 해는 지되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아가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바람은 그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강물은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전도서 1:5∼7)

왔다가 다시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자연만물의 모습을 보며 전도자는 어떻게 결론을 맺을까요?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전도서 1:9)

싫증나고 허무하기만 한 반복 속에서, “이런 인생을 도대체 어떻게 살라는 말인가!”라며 전도자는 탄식하고 있습니다. 사실 전도서는 질문의 책이기 때문에 답이 다 나오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전도서뿐만 아니라 다른 65권의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갖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답이신 예수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 답이 무엇입니까?
삶이 허무하니 신앙은 의미 없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기독교는, ‘삶은 반복되고 허무하다. 하지만 허무하기 때문에 내가 지금 살아있다는 것이 소중하다’고 가르칩니다. 내가 호흡하는 것이 감사하고, 봄이 오는 소리를 들으며 하나님의 창조의 솜씨를 느낀다는 것이 귀하다는 것입니다. 결국 살아 있는 지금, 마음껏 즐거워하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인생의 허무는 인간의, 인생의 단면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한쪽 면입니다. 또 다른 면은, 하나님을 믿는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를 아는 것입니다. 살아있다는 것, 내 심장이 뛰고, 스스로 손과 발을 움직일 수 있는 삶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먹은 것이 소화되는 것, 그래서 먹고 마시는 것이 즐거움이 되는 것, 그것을 알고 마음껏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떠오르는 태양의 웅장함과 노을의 아름다움과 쓸쓸함, 겨울의 앙상한 가지에 수북이 쌓인 흰 눈의 찬란함을 느끼며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새싹이 돋아나는 봄의 모습을 신기한 눈으로, 기쁨으로 맞이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옆에 소중한 사람들이 있는 것, 이런 귀한 삶의 자리에 내가 들게 된 것, 나 같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것, 이 모든 것들이 축복임을 알고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자녀를 낳고, 때로 부부끼리 싸우기도 하지만 그 자체를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생의 기본적인 즐거움을 누가 이야기하나요? 전도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그 안에 이 놀라운 기쁨의 사실들이 다 들어 있습니다. 권면합니다. 전도서를 한 번 읽어보세요. 그 속에 내 질문이 있고, 그 질문들을 통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알도록 우리를 초청하고 있습니다.
전도서 기자의 두 번째 탄식은 언젠가는 내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된다는 아픔입니다.

이전 세대들이 기억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들과 함께 기억됨이 없으리라 (전도서 1:11)

분명 우리의 이름을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때가 올 것입니다. 그 유명한 사람들이 지금 다 어디에 갔습니까? 우리가 부모님의 묘소에는 가지만, 우리 자녀들은 어떻습니까? 할아버지, 할머니의 묘소를 찾는 자녀들이 부모님의 묘소를 찾는 이들의 1/10이나 될까요? 증조할아버지나 할머니의 이름도 모릅니다. 이처럼 우리 인생의 이름은 그냥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이 전도자를 가슴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경을 읽어보면, 구약에서도 신약에서도 하나님은 우리의 이름을 기억하신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네 이름을 부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네가 그동안 흘렸던 눈물을 하나하나 기억하면서 다시 닦아주겠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영원한 기쁨을 채워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 인생의 이름은 언젠가는 사라질 것입니다. 아마 아무도 나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어질 때가 올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내 이름을 기억하시고 나를 불러주십니다. 이 하나님 앞에 우리가 서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주님을 기억하는 것이 허무를 이기는 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왜 대답일까요?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면서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고 말씀하시며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사실을 알고 외칩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해 아래에 새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해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내가 사는 이 땅을 새롭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기독교 신앙이란 그 새로움을 내 속에서 경험하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물건은 낡아지지만, 내가 새로워지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이 새롭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생이 허무하다는 것은, 살아 숨 쉬는 지금이 소중하다는 뜻입니다. 인생은 내 이름을 잊어버리지만, 하나님은 내 이름을 부르시면서 나를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삼으셨습니다. 이 놀라운 사실들이 허무하고 의미 없는 인생을 이겨나가는 비밀입니다.
여러분, 지금 내가 움직일 수 있다는 것, 살아있다는 것을 즐거워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오늘도 내가 살아 있음을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내게 주어진 삶을 하나님이 주신 새로움으로 살겠다고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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