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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는 하나님 앞에 나를 무장 해제하는 것입니다.
‘교회, 예배의 공동체’라는 주제로 두 번째 말씀을 전합니다. 예배란 무엇일까요? 말씀을 통해 예배를 재정의해 본다면, 예배란 내 삶의 무장 해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 모든 것을 무장 해제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이는 정신적이고 영적인 무장 해제입니다. 본래 무장 해제란 전시 상황에서 교전국 중 한 편이 항전을 포기할 때, 상대국이 그 무장을 압수하고 다시 무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뜻합니다. 더 이상 공격하거나 반격할 수 없게 만드는 것, 즉 항복한 군대를 전열에서 이탈시키는 것이 무장 해제입니다.
예배는 강제로 무장 해제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영적 무장 해제입니다. 우리가 어머니를 생각하면 마음에서 무장 해제를 경험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나이가 많이 들어도 어머니 앞에만 서면 어린아이가 됩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벌거벗은 어린아이로 어머니를 대했던 기억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또, 그 어머니가 나를 위해 절대적인 사랑과 헌신을 하셨다는 기억, 그 경험을 맛보았기 때문에 어머니 앞에 서면 누구나 어린아이가 되는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드린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어린아이로 선다는 것입니다. 어머니보다 더 위대한 사랑을 지니신 분이 우리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그분이 나를 만드신 창조주시며, 나를 사랑하셔서 아들이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주신 분입니다. 더욱이 나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고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자녀 되는 특권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 앞에 영적인 무장 해제를 하고 어린아이처럼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분께 감사하며 기뻐 뛰노는 것, 그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위기의 순간, 하나님이 야곱을 찾아오십니다.
오늘 본문에 야곱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이전에 벧엘에서 돌베개 베고 자던 야곱에게 나타나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그 약속을 상기시키십니다. 무려 30여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도망자였던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0여 년의 세월을 보냈고, 숙곳과 세겜에서 10여 년의 세월을 보낸 뒤입니다. 야곱도 이제 나이가 들었습니다. 30년 전에 만났던 벧엘의 하나님을 차츰 잊어가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분이 주신 약속도 희미해져 갔습니다.
당시 그가 거주하던 곳은 세겜입니다. 세겜은 상업적으로 발달된 도시였습니다. 목초지도 풍성해 양과 소를 키우기에도 적합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 세겜은 세속적인 도시였습니다. 그리고 그 세겜에서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야곱의 딸 디나가 세겜 사람에게 겁탈 당한 것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분개했습니다. 누이가 강간당한 것에 보복을 결심합니다. 그리하여 세겜 사람들을 속여 할례를 받게 한 뒤, 그들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할 때 세겜 남자들을 다 죽여 버립니다. 이 복수극은 엄청난 참극이었습니다. 야곱 역시 이 일로 다른 가나안 족속이 보복을 행할까 두려웠습니다. 그만큼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위기의 순간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야곱아, 일어나라. 거기에 머물지 말고 벧엘로 올라가라.” 1절 말씀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창세기 35:1)
하나님이 야곱에게 일어나라고 하십니다. 그 자리에 멈춰 있지 말고, 주저앉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대신 벧엘로 올라가라 하십니다. 돌베개를 베고 외로이 삶의 문제를 하나님 앞에 아룄던 그날을 기억하며, 다시 하나님 앞에 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주신 약속을 잊지 말라고 하십니다.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벧엘로 올라가서 하나님과 함께 새로운 인생의 전기를 맞이하자고 하나님이 직접 야곱에게 요청하십니다.
물론 야곱에겐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야곱의 생애를 돌아보면, 진정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앙에까지 이르지 못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야곱마저도 사랑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다시 그를 찾아와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야곱아, 벧엘로 올라가거라. 네가 내게 예배했던 그 자리로 올라가 다시 나를 찾아라. 그리고 지금처럼 살지 말거라. 무엇인가에 도망치면서 쫓기듯 살지 말라는 것이다. 더는 근심과 불안 속에 멈춰 있지 말고, 이제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거라.” 세속적인 세겜의 자리를 떠나 벧엘이라는 영적인 자리로 나아가라고 하나님이 야곱을 일으켜 세우십니다.
내가 붙잡았던 것을 내려놓을 때, 예배가 시작됩니다.
사실 야곱은 자아가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이 그에게 강점이 되기도 했지만 많은 문제를 야기하기도 했습니다. 오늘 우리 중에도 자아가 강한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이 예수님을 믿기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 해도 자신을 온전히 드리겠다고 약속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생각보다 내 판단, 내 생각이 앞설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늘 하나님의 생각보다 자기 생각과 욕심이 앞섰습니다. 그래서 실수하고 실패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늘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을 망각한 적도 있습니다. 영적인 게으름을 피우기도 했습니다. 늘 자기 생각에 함몰돼 있었기에, 하나님께 자신의 인생을 전적으로 맡기기가 쉽지 않았던 야곱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야곱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를 찾아와 경고도 하시고, 친절하게 권면도 하셨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야곱도 새롭게 깨닫게 됩니다. ‘아! 내가 하나님을 잊은 게 아닌데, 하나님을 떠난 것도 아닌데…. 하나님을 싫어한 것도, 그분을 망각 속에 버려둔 것도 아닌데….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삶에 진정한 예배가 빠졌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면서 드리는 기쁨과 감사의 예배가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이 내 인생의 최우선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자신이 필요할 때만 하나님을 찾은 것입니다. 위기에 처할 때,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할 때만 그분을 찾았습니다. 배부르고 편안할 때는 내 욕심을 채우는 데 급급했습니다. 수많은 우상들에 둘러싸여 하나님을 향한 참다운 예배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제야 야곱은 깨닫습니다. ‘아! 내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기쁨을 놓치고 있었구나. 그분을 향한 사랑도 어느새 점점 시들어 갔구나.’ 그리곤 다음과 같은 회개의 깨달음도 얻습니다. ‘그럼 이제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까? 그래! 다시 그분께 나아가기 위해선 그동안 붙잡고 있었던 것들을 하나하나 내려놓아야겠구나. 하나님보다 더 소중한 게 없으니 다시 그분만을 찾아야겠구나.’ 그렇게 야곱은 자신을 무장 해제시켰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2절 말씀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창세기 35:2)
‘이방 신상을 버려라.’, ‘자신을 정결하게 하라.’, ‘의복을 바꿔 입으라.’ 다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네가 붙잡고 있던 그 많은 것들을 다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을 버리고, 내가 의지하던 것에서 탈출해야 하나님께 진정으로 예배드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야곱의 가족과 가솔들이 잡다한 우상들을 붙들고 있던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모습을 야곱도 수수방관했던 모양입니다. 하나님도 섬기고 이방 신도 섬겼다는 말입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정결함을 지키지 못한 행위입니다. 그것이 죄악임을 간과했습니다. 그러나 더는 안 됩니다. 이제 그 모든 이방 신상을 버려야 합니다. 야곱도 자기와 함께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선포합니다. “너희가 붙잡고 있던 것들, 그것 없으면 못 살겠다고 하는 것들, 네 삶을 얽어매는 것들, 집착하면서 놓지 못하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을 다 내려놓고 버려라.” 벧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만나려면 그것부터 해결해야 합니다. 그래야 영적으로 무장되어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드린다는 건, 영적인 무장 해제를 뜻합니다. 내가 그렇게 사랑하던 것, 놓을 수 없던 것, 내 삶을 지탱해 오던 것, 집착하고 붙잡았던 그 모든 것을 내려놓는 무장 해제가 전제되어야 신앙이 시작되고, 예배도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어린아이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왜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걸까요? 왜 미지근하기만 할까요? 스스로 보기에도 신앙심이 부족합니다. 그렇다고 신앙이 없다고 하기엔 신앙이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렇게 자신도 확신할 수 없는 신앙의 모습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열정 없는 신앙, 이름만 건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이러한 신앙을 지속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 앞에 벌거벗고 투명하게 설 수 없게 만드는 수많은 우상이 내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때로는 나의 알량한 자존심이 예수님 앞에 나를 온전히 드리지 못하게 합니다. 때로는 게으름이 신앙생활을 방해합니다. 재물에 대한 집착이 하나님 앞에 참되게 예배드리는 것을 방해할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명예욕과 권력욕이, 욕심과 탐욕이, 또 교만이 우리를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의 삶을 한번 돌아봅시다. 주일이면 예배를 곧잘 드립니다. 가끔은 새벽 기도도 나옵니다. 헌금도 빠지지 않고 드립니다. 그런데 예배드리면서도 내 영혼에서 기뻐하고 감사하는 감격이 솟구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혹시 하나님을, 계셔도 좋고 안 계셔도 아쉬울 것 없는 분으로 생각하고 살아가는 건 아닙니까?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졌다고 주장할 순 있지만 하나님께 내 인생 전체를 드릴 수 있다고 고백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혹시 그분을 그 정도의 귀한 분으로 여기지 않는 건 아닙니까? 또, 하나님 앞에서 무장 해제하기 싫어서 그분 앞에서조차 내가 꼭 붙들고 있는 것, 내가 놓지 못하고 있는 그것은 무엇입니까?
야곱은 드디어 깨달았습니다. ‘아! 지금껏 내가 하나님을 믿고 따라간다고 하면서도 진정으로 무장 해제를 하지 않았구나.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하나님 앞에 벌거벗지 않았구나.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다가서질 못했구나.’ 사실 그래서 야곱이 회개를 두려워한 것 같습니다. 회개하면 내 삶을 무장 해제해야 하는데, 하나님 앞에서도 그것이 싫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모습이 있습니다. 자존심 때문에 회개를 거절합니다. 회개한다는 시늉을 하고 말로는 회개한다고 하지만, 하나님도 건드리지 못하는 영역을 남겨 둡니다. “하나님, 이것만큼은 터치하지 마세요. 내가 예수님 믿고 하나님 뜻대로 하겠지만 내 자존심, 이건 건드리면 안 됩니다. 만약 건드리시면 하나님께도 화를 낼 겁니다.” 이렇게 우리가 어리숙한 신앙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늘 어설픈 신앙의 모습입니다. 믿는 것 같은데 한편으론 믿지 못하는 것 같고, 때로는 게으름 때문에 적극적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이렇듯 열정을 쏟아 붓지 못한 우리의 모습 때문에 영혼의 감사와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벧엘로 올라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누립시다.
몇 년 전 작고하신 방지일 목사님은 인생을 녹슬게 사는 걸 원치 않으셨습니다. 향년 104세를 일기로 별세하셨는데, 마지막 임종 시 자신의 인생이 닳아서 없어지길 원하신다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또, 백수를 맞이했을 때 한 교회 기자와 인터뷰를 했는데, 기자가 “목사님, 신앙이 무엇이죠?”라고 물으니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고 합니다. “신앙은 투항이다. 신앙은 항복하는 것이다. 신앙은 무장 해제를 하는 것이다. 내가 들고 있는 총과 칼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투항하는 것이다. 내가 갖고 있는 것, 나를 보호하려고 했던 것, 내가 이것만 있으면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그 총과 칼을 내려놓는 것이 믿음이다.” 그러니 기자가 또 질문을 합니다. “내가 가진 총과 칼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그러자 방 목사님이 이렇게 답변하십니다. “나의 의견, 나의 주관, 나의 관점이다. 그걸 모두 내려놓아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투항한 뒤에도 무장을 한다. 내 안에 권총을 숨기고, 내 안에 칼을 숨긴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나의 주관으로 주님을 믿는다. 투항은 그런 게 아니다. 투항은 자신을 몽땅 바치는 것이다. 나 자신을 항복하는 것, 내가 갖고 있던, 내가 의지하고 안전판이라고 여겼던 것, 내가 이것만 가지면 내 인생이 뚫리고 잘 갈 수 있을 것이라고 붙잡았던 그 모든 것조차 무장 해제를 하고 하나님 앞에 내려놓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우리의 신앙에 무장 해제가 필요합니다. 자꾸 자기방어를 하려고 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피곤하고, 신경 쇠약에 걸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의심하고, 근심과 걱정을 합니다. 우리의 방어 메커니즘이 신앙 가운데서도 작동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때로는 그것이 나의 심술과 오기일 수도 있습니다. 교만과 고집일 수도 있습니다. 뽐내고 싶은 물질과 재물일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권위와 명예, 세상 권력들로 나를 치장하면서 무장 해제를 거부하는 것이 우리의 연약한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보시며 “야곱아, 네가 내 앞에서 무장 해제를 안 하겠다고 버티면 언제까지 버티겠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사람 앞에서는 치장하고 자신을 보호할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벌거벗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어린아이처럼 내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야곱에게 말씀하십니다. “야곱아, 일어나라. 벧엘로 올라가라.”
벧엘은 야곱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곳입니다. 또, 하나님이 친히 야곱에게 다가와 환상과 비전을 보여주신 곳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벧엘은 어디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이 시간, 이 자리가 우리의 벧엘입니다. 바로 이곳에서 이 순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나 자신을 하나님 앞에 무장 해제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만이 내 인생의 주인이시오, 주님만이 내 길과 진리, 생명이심을 고백하며 나아가는 것이 예배입니다. 예배란 나는 죽고 예수님이 사시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와 함께하심으로 나의 옛 생명은 죽고 부활한 생명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오늘도 주님을 만나기 위해 이 자리에 오신 귀한 성도님들,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길 원하십니다. 그분 앞에 우리는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가 간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 앞에 나는 어린아이입니다. 나의 모든 것을 무장 해제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높이겠습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주님이시고, 나의 사랑이시며, 나의 생명이십니다.” 이렇게 우리의 예배가 살아나면 우리의 삶이 살아납니다. 회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이 예배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축복입니다. 이 예배의 자리에 우리가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시 세워 주십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는 내 사랑하는 딸이다. 내가 너를 기뻐한다.” 이렇게 말씀하시며 우리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며, 우리 삶을 새롭게 열어가는 주님의 자녀들이 다 되시길 축원합니다.
창세기 35: 1 ~ 5
1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2
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3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4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을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
5
그들이 떠났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예배는 하나님 앞에 나를 무장 해제하는 것입니다.
‘교회, 예배의 공동체’라는 주제로 두 번째 말씀을 전합니다. 예배란 무엇일까요? 말씀을 통해 예배를 재정의해 본다면, 예배란 내 삶의 무장 해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 모든 것을 무장 해제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이는 정신적이고 영적인 무장 해제입니다. 본래 무장 해제란 전시 상황에서 교전국 중 한 편이 항전을 포기할 때, 상대국이 그 무장을 압수하고 다시 무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뜻합니다. 더 이상 공격하거나 반격할 수 없게 만드는 것, 즉 항복한 군대를 전열에서 이탈시키는 것이 무장 해제입니다.
예배는 강제로 무장 해제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영적 무장 해제입니다. 우리가 어머니를 생각하면 마음에서 무장 해제를 경험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나이가 많이 들어도 어머니 앞에만 서면 어린아이가 됩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벌거벗은 어린아이로 어머니를 대했던 기억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또, 그 어머니가 나를 위해 절대적인 사랑과 헌신을 하셨다는 기억, 그 경험을 맛보았기 때문에 어머니 앞에 서면 누구나 어린아이가 되는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드린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어린아이로 선다는 것입니다. 어머니보다 더 위대한 사랑을 지니신 분이 우리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그분이 나를 만드신 창조주시며, 나를 사랑하셔서 아들이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주신 분입니다. 더욱이 나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고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자녀 되는 특권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 앞에 영적인 무장 해제를 하고 어린아이처럼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분께 감사하며 기뻐 뛰노는 것, 그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위기의 순간, 하나님이 야곱을 찾아오십니다.
오늘 본문에 야곱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이전에 벧엘에서 돌베개 베고 자던 야곱에게 나타나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그 약속을 상기시키십니다. 무려 30여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도망자였던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0여 년의 세월을 보냈고, 숙곳과 세겜에서 10여 년의 세월을 보낸 뒤입니다. 야곱도 이제 나이가 들었습니다. 30년 전에 만났던 벧엘의 하나님을 차츰 잊어가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분이 주신 약속도 희미해져 갔습니다.
당시 그가 거주하던 곳은 세겜입니다. 세겜은 상업적으로 발달된 도시였습니다. 목초지도 풍성해 양과 소를 키우기에도 적합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 세겜은 세속적인 도시였습니다. 그리고 그 세겜에서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야곱의 딸 디나가 세겜 사람에게 겁탈 당한 것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분개했습니다. 누이가 강간당한 것에 보복을 결심합니다. 그리하여 세겜 사람들을 속여 할례를 받게 한 뒤, 그들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할 때 세겜 남자들을 다 죽여 버립니다. 이 복수극은 엄청난 참극이었습니다. 야곱 역시 이 일로 다른 가나안 족속이 보복을 행할까 두려웠습니다. 그만큼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위기의 순간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야곱아, 일어나라. 거기에 머물지 말고 벧엘로 올라가라.” 1절 말씀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창세기 35:1)
하나님이 야곱에게 일어나라고 하십니다. 그 자리에 멈춰 있지 말고, 주저앉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대신 벧엘로 올라가라 하십니다. 돌베개를 베고 외로이 삶의 문제를 하나님 앞에 아룄던 그날을 기억하며, 다시 하나님 앞에 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주신 약속을 잊지 말라고 하십니다.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벧엘로 올라가서 하나님과 함께 새로운 인생의 전기를 맞이하자고 하나님이 직접 야곱에게 요청하십니다.
물론 야곱에겐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야곱의 생애를 돌아보면, 진정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앙에까지 이르지 못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야곱마저도 사랑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다시 그를 찾아와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야곱아, 벧엘로 올라가거라. 네가 내게 예배했던 그 자리로 올라가 다시 나를 찾아라. 그리고 지금처럼 살지 말거라. 무엇인가에 도망치면서 쫓기듯 살지 말라는 것이다. 더는 근심과 불안 속에 멈춰 있지 말고, 이제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거라.” 세속적인 세겜의 자리를 떠나 벧엘이라는 영적인 자리로 나아가라고 하나님이 야곱을 일으켜 세우십니다.
내가 붙잡았던 것을 내려놓을 때, 예배가 시작됩니다.
사실 야곱은 자아가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이 그에게 강점이 되기도 했지만 많은 문제를 야기하기도 했습니다. 오늘 우리 중에도 자아가 강한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이 예수님을 믿기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 해도 자신을 온전히 드리겠다고 약속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생각보다 내 판단, 내 생각이 앞설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늘 하나님의 생각보다 자기 생각과 욕심이 앞섰습니다. 그래서 실수하고 실패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늘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을 망각한 적도 있습니다. 영적인 게으름을 피우기도 했습니다. 늘 자기 생각에 함몰돼 있었기에, 하나님께 자신의 인생을 전적으로 맡기기가 쉽지 않았던 야곱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야곱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를 찾아와 경고도 하시고, 친절하게 권면도 하셨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야곱도 새롭게 깨닫게 됩니다. ‘아! 내가 하나님을 잊은 게 아닌데, 하나님을 떠난 것도 아닌데…. 하나님을 싫어한 것도, 그분을 망각 속에 버려둔 것도 아닌데….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삶에 진정한 예배가 빠졌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면서 드리는 기쁨과 감사의 예배가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이 내 인생의 최우선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자신이 필요할 때만 하나님을 찾은 것입니다. 위기에 처할 때,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할 때만 그분을 찾았습니다. 배부르고 편안할 때는 내 욕심을 채우는 데 급급했습니다. 수많은 우상들에 둘러싸여 하나님을 향한 참다운 예배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제야 야곱은 깨닫습니다. ‘아! 내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기쁨을 놓치고 있었구나. 그분을 향한 사랑도 어느새 점점 시들어 갔구나.’ 그리곤 다음과 같은 회개의 깨달음도 얻습니다. ‘그럼 이제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까? 그래! 다시 그분께 나아가기 위해선 그동안 붙잡고 있었던 것들을 하나하나 내려놓아야겠구나. 하나님보다 더 소중한 게 없으니 다시 그분만을 찾아야겠구나.’ 그렇게 야곱은 자신을 무장 해제시켰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2절 말씀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창세기 35:2)
‘이방 신상을 버려라.’, ‘자신을 정결하게 하라.’, ‘의복을 바꿔 입으라.’ 다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네가 붙잡고 있던 그 많은 것들을 다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을 버리고, 내가 의지하던 것에서 탈출해야 하나님께 진정으로 예배드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야곱의 가족과 가솔들이 잡다한 우상들을 붙들고 있던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모습을 야곱도 수수방관했던 모양입니다. 하나님도 섬기고 이방 신도 섬겼다는 말입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정결함을 지키지 못한 행위입니다. 그것이 죄악임을 간과했습니다. 그러나 더는 안 됩니다. 이제 그 모든 이방 신상을 버려야 합니다. 야곱도 자기와 함께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선포합니다. “너희가 붙잡고 있던 것들, 그것 없으면 못 살겠다고 하는 것들, 네 삶을 얽어매는 것들, 집착하면서 놓지 못하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을 다 내려놓고 버려라.” 벧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만나려면 그것부터 해결해야 합니다. 그래야 영적으로 무장되어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드린다는 건, 영적인 무장 해제를 뜻합니다. 내가 그렇게 사랑하던 것, 놓을 수 없던 것, 내 삶을 지탱해 오던 것, 집착하고 붙잡았던 그 모든 것을 내려놓는 무장 해제가 전제되어야 신앙이 시작되고, 예배도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어린아이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왜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걸까요? 왜 미지근하기만 할까요? 스스로 보기에도 신앙심이 부족합니다. 그렇다고 신앙이 없다고 하기엔 신앙이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렇게 자신도 확신할 수 없는 신앙의 모습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열정 없는 신앙, 이름만 건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이러한 신앙을 지속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 앞에 벌거벗고 투명하게 설 수 없게 만드는 수많은 우상이 내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때로는 나의 알량한 자존심이 예수님 앞에 나를 온전히 드리지 못하게 합니다. 때로는 게으름이 신앙생활을 방해합니다. 재물에 대한 집착이 하나님 앞에 참되게 예배드리는 것을 방해할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명예욕과 권력욕이, 욕심과 탐욕이, 또 교만이 우리를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의 삶을 한번 돌아봅시다. 주일이면 예배를 곧잘 드립니다. 가끔은 새벽 기도도 나옵니다. 헌금도 빠지지 않고 드립니다. 그런데 예배드리면서도 내 영혼에서 기뻐하고 감사하는 감격이 솟구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혹시 하나님을, 계셔도 좋고 안 계셔도 아쉬울 것 없는 분으로 생각하고 살아가는 건 아닙니까?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졌다고 주장할 순 있지만 하나님께 내 인생 전체를 드릴 수 있다고 고백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혹시 그분을 그 정도의 귀한 분으로 여기지 않는 건 아닙니까? 또, 하나님 앞에서 무장 해제하기 싫어서 그분 앞에서조차 내가 꼭 붙들고 있는 것, 내가 놓지 못하고 있는 그것은 무엇입니까?
야곱은 드디어 깨달았습니다. ‘아! 지금껏 내가 하나님을 믿고 따라간다고 하면서도 진정으로 무장 해제를 하지 않았구나.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하나님 앞에 벌거벗지 않았구나.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다가서질 못했구나.’ 사실 그래서 야곱이 회개를 두려워한 것 같습니다. 회개하면 내 삶을 무장 해제해야 하는데, 하나님 앞에서도 그것이 싫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모습이 있습니다. 자존심 때문에 회개를 거절합니다. 회개한다는 시늉을 하고 말로는 회개한다고 하지만, 하나님도 건드리지 못하는 영역을 남겨 둡니다. “하나님, 이것만큼은 터치하지 마세요. 내가 예수님 믿고 하나님 뜻대로 하겠지만 내 자존심, 이건 건드리면 안 됩니다. 만약 건드리시면 하나님께도 화를 낼 겁니다.” 이렇게 우리가 어리숙한 신앙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늘 어설픈 신앙의 모습입니다. 믿는 것 같은데 한편으론 믿지 못하는 것 같고, 때로는 게으름 때문에 적극적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이렇듯 열정을 쏟아 붓지 못한 우리의 모습 때문에 영혼의 감사와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벧엘로 올라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누립시다.
몇 년 전 작고하신 방지일 목사님은 인생을 녹슬게 사는 걸 원치 않으셨습니다. 향년 104세를 일기로 별세하셨는데, 마지막 임종 시 자신의 인생이 닳아서 없어지길 원하신다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또, 백수를 맞이했을 때 한 교회 기자와 인터뷰를 했는데, 기자가 “목사님, 신앙이 무엇이죠?”라고 물으니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고 합니다. “신앙은 투항이다. 신앙은 항복하는 것이다. 신앙은 무장 해제를 하는 것이다. 내가 들고 있는 총과 칼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투항하는 것이다. 내가 갖고 있는 것, 나를 보호하려고 했던 것, 내가 이것만 있으면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그 총과 칼을 내려놓는 것이 믿음이다.” 그러니 기자가 또 질문을 합니다. “내가 가진 총과 칼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그러자 방 목사님이 이렇게 답변하십니다. “나의 의견, 나의 주관, 나의 관점이다. 그걸 모두 내려놓아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투항한 뒤에도 무장을 한다. 내 안에 권총을 숨기고, 내 안에 칼을 숨긴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나의 주관으로 주님을 믿는다. 투항은 그런 게 아니다. 투항은 자신을 몽땅 바치는 것이다. 나 자신을 항복하는 것, 내가 갖고 있던, 내가 의지하고 안전판이라고 여겼던 것, 내가 이것만 가지면 내 인생이 뚫리고 잘 갈 수 있을 것이라고 붙잡았던 그 모든 것조차 무장 해제를 하고 하나님 앞에 내려놓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우리의 신앙에 무장 해제가 필요합니다. 자꾸 자기방어를 하려고 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피곤하고, 신경 쇠약에 걸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의심하고, 근심과 걱정을 합니다. 우리의 방어 메커니즘이 신앙 가운데서도 작동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때로는 그것이 나의 심술과 오기일 수도 있습니다. 교만과 고집일 수도 있습니다. 뽐내고 싶은 물질과 재물일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권위와 명예, 세상 권력들로 나를 치장하면서 무장 해제를 거부하는 것이 우리의 연약한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보시며 “야곱아, 네가 내 앞에서 무장 해제를 안 하겠다고 버티면 언제까지 버티겠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사람 앞에서는 치장하고 자신을 보호할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벌거벗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어린아이처럼 내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야곱에게 말씀하십니다. “야곱아, 일어나라. 벧엘로 올라가라.”
벧엘은 야곱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곳입니다. 또, 하나님이 친히 야곱에게 다가와 환상과 비전을 보여주신 곳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벧엘은 어디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이 시간, 이 자리가 우리의 벧엘입니다. 바로 이곳에서 이 순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나 자신을 하나님 앞에 무장 해제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만이 내 인생의 주인이시오, 주님만이 내 길과 진리, 생명이심을 고백하며 나아가는 것이 예배입니다. 예배란 나는 죽고 예수님이 사시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와 함께하심으로 나의 옛 생명은 죽고 부활한 생명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오늘도 주님을 만나기 위해 이 자리에 오신 귀한 성도님들,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길 원하십니다. 그분 앞에 우리는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가 간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 앞에 나는 어린아이입니다. 나의 모든 것을 무장 해제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높이겠습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주님이시고, 나의 사랑이시며, 나의 생명이십니다.” 이렇게 우리의 예배가 살아나면 우리의 삶이 살아납니다. 회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이 예배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축복입니다. 이 예배의 자리에 우리가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시 세워 주십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는 내 사랑하는 딸이다. 내가 너를 기뻐한다.” 이렇게 말씀하시며 우리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며, 우리 삶을 새롭게 열어가는 주님의 자녀들이 다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