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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쉼의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긴 연휴 후에 “잘 쉬셨습니까?”라고 물으면 많은 분들이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더 힘들었다”, “그렇게 만나고 싶었던 가족과 친구였지만 사람을 만나고 함께 있는 것 자체가 오히려 스트레스라 피곤했다”고 대답하기도 합니다. 쉰 것도 아니고 일한 것도 아닌, 두 가지가 뒤엉킨 모습 때문일 것입니다.
일한다는 건 무엇일까요? 쉰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은 매일매일 하나님이 만드신 것에 복을 내리셨습니다. 무엇보다 인간을 만드신 후에는 매우 큰 복을 내리셨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마지막 날인 일곱째 날에는 하나님이 복을 내리신 대상이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날’을 복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선언을 통해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 공간이든 인간이든 시간이든,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 안에 놓여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창세기 2:3)
하나님은 일곱째 날을 축복하시며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날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2장 2절에는,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친히 안식일을 만드셨고, 모범적으로 안식일의 쉼을 누리셨습니다. 하나님이 왜 쉬셨을까요? 창조의 일이 너무 많아서 피곤했기 때문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이유는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사람을 위해서 쉼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창조와 안식, 일과 쉼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 보여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안식일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연결하는 다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안식을 보면서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하고 나서 쉬는 걸까? 아니면 쉬고 나서 일하는 걸까?’ 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 하는 것과 비슷한 질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읽어 보면 여기에 몇 가지 원칙이 있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습을 보면, 하나님은 일하신 후에 쉬셨습니다. 창세기 1장 5절에는 하루의 정의가 이렇게 나타납니다. “…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째 날이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하셨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아침이 되면 일이 시작되고, 저녁이 되면 하루가 마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면 일하고 쉬셨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땠을까요? 인간은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여섯째 날, 인간이 창조되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맞은 첫날은 쉼의 날, 안식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쉼과 안식의 기쁨을 먼저 주셨습니다. “쉼과 안식을 누려야 한다. 이 날은 내가 네게 주는 선물의 날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더하지 않으셨을까요? “네가 너 된 것은 바로 나의 창조 때문이란다. 먼저 쉼과 휴식의 복을 누리고 그 후에 나처럼 일해라.”
십계명 중에도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이 있습니다. 우선 십계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반부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세상의 다른 신들은 너희를 만든 신이 아니라 너희가 만든 신이다. 너는 네 여호와를 섬기라. 너희를 만든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라’입니다. 후반부는 ‘하나님이 너와 네 이웃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으니 네 이웃을 사랑하라. 네 이웃에게 긍휼을 베풀라’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통해서 주신 두 가지 큰 계명입니다.
그런데 이 전반부와 후반부를 나누고 연결하는 계명이 바로 제4계명, 안식일을 지키라는 계명입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출애굽기 20:8)
안식일을 기억하여 지키라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기억하라는 건 무슨 뜻일까요? 안식일을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왜 쉼의 날을 허락해 주셨는지 그 뜻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상 숭배를 거부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표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안식일을 온전히 거룩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내 이웃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고귀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기에 부모를 공경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자의 표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은 유대인에게만 필요한 명령일까요? 아닐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 명령은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쉼을 요청하십니다. 안식이 있어야 하나님을 사랑할 줄 알고 이웃을 사랑할 줄 아는 힘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일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러면 쉼은 필수적인 것이 아니라 선택적인 것일까요? 아닙니다. 일도 쉼도 인간에게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일만 하고 쉬지 않으면 위험한 일이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일 속에 매몰되면 인간은 자신의 인간성을 놓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 사회는 많은 사람들을 일 속에 매몰시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에 대한 하나님의 비판이 바로 안식일을 지키라는 말씀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켰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안식일을 일요일로 서서히 바꿔 나갔습니다.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예수님이 금요일에 돌아가시고 안식일인 토요일에는 무덤 속에 머무시고 안식 후 첫날인 일요일 아침에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조의 완성인 제 일곱째 날에 그리스도인은 구원의 완성인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면서 이날을 주님의 날, Lord’s day라는 표현과 함께 안식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이날이 진정한 쉼의 날, 진정한 구원의 날, 평안의 날임을 선포하게 됩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을 생각하는 구별된 날입니다.
다시 하나님의 명령을 떠올려 봅시다. 앞서 보았던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에서 ‘기억하라’는 것은 ‘생각하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오늘날 생각을 잃어버린 채 살고 있지 않습니까? 특별히 이 시대는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게 우리의 삶을 몰아가고 있습니다. 현대사회는 인간을 평가할 때 이룬 일, 즉 업적의 정도를 기준으로 삼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사회는 인간을 생산성으로 따지는 천박한 자본주의 사회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업이나 사회에서 사람을 뽑을 때도 소위 말하는 스펙을 주의 깊게 살펴봅니다. 우리는 시장경제의 치열함 가운데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전쟁터 안에 놓여 있습니다.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사람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일중독의 위험에서 빠져나오기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회적, 문화적 위험성을 일찍이 아시고 이것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주셨습니다. 바로 안식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함의 철학도 가르쳐 주셨지만, 쉼과 안식의 철학도 보여 주셨습니다.
또 오늘 말씀은 ‘거룩히 안식일을 구별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다른 날과 차별하라는 의미입니다. 평상시에 우리가 수고하고 땀 흘리며 일했다면, 안식일에는 그 수고의 움직임을 멈추라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을 쉬게 하라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지나친 경쟁과 소비로부터 벗어나는 자리입니다.
이 사회의 문화는 소비문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장경제 아래 이루어지는 치열한 경쟁은 우리로 하여금 생각 없이 살도록 몰아갈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육체적인 욕망을 추구하라고 요구합니다. 하지만 욕망은 우리에게 늘 불만족을 이끌어 내고, 불평과 불만을 야기시킵니다. 마치 빛을 향해 날아드는 부나비처럼 욕구와 욕망을 채워줄 곳을 찾아 분주하게 움직이게 만듭니다. 이런 문화 안에서, 어느새 얼마나 더 가질 것인가? 얼마나 더 누릴 것인가? 하는 것이 우리 인생의 목적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 천박한 자본주의 경제체제하에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이런 모토가 있습니다. ‘아직 나는 충분하지 않아. 조금 더 많이, 조금 더 크게!’ 이것이 우리가 알게 모르게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힘입니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기업들은 많은 상품을 만들어 내면서 요란하게 떠들어댑니다. “브랜드 뉴! 이것이야말로 다른 것과 차별되는 새로운 것이다!” 텔레비전을 켜도, 신문을 펴도, 인터넷에 접속해도 동일한 의미의 광고 메시지가 “너는 아직 충분하지 않으니 새 것을 가지라”며 우리를 부추깁니다. 이러한 메시지가 매일 우리의 눈과 귀에 반복되면서 우리의 머리는 일종의 세뇌를 당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마치 상품화된 동물처럼 서서히 변질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경제체제 속에서 우리는 매우 치열하게 경쟁합니다. 누군가 내 것을 빼앗아 갔고, 내가 누려야 할 것을 누군가 대신 누리고 있다는 생각에, 내 것을 뺏기지 않기 위해 남의 것을 빼앗아야 한다는 공격적인 욕구가 마음에서 자라납니다. 그리고 그 욕구에 따라 우리는 끝없이 시기하고 갈등하며 살아갑니다.
우리 사회에 왜 그렇게 분노가 많을까요? 무슨 일이 조금이라도 풀리지 않으면 왜 그렇게 소리를 지르는 걸까요? 남과 함께 가는 것을 왜 못 하는 걸까요? 우리에게 참된 쉼과 안식이 부족하여 세상 모든 것을 소유의 등급으로 판정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이웃을 속이고 약한 사람의 것을 빼앗는 사람이 됩니다. 약육강식이라는 동물의 문화가 우리의 삶을 지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살벌한 사회에서는 승리자와 패배자가 나뉠 수밖에 없습니다. 누군가 더 많이 가지게 되면, 누군가는 가진 것이 없는 낙오자의 슬픔을 경험하게 됩니다. 누군가 더 많이 이루게 되면, 누군가는 눈물을 거두는 패배자가 됩니다. 이런 사회는 소수만을 위한 행복을 향해 나아가는 잘못된 사회, 왜곡된 사회로 서서히 전락하게 될 뿐입니다.
이러한 위험을 깨뜨리는 힘이 바로 안식일입니다. “인간은 소유에 의해서 규정되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소유물보다 훨씬 더 고귀한 존재다.” 하나님은 이것을 선언하시기 위해서 안식일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너는 일하는 기계가 아니다. 너는 일만 하는 동물이 아니다. 너는 나의 형상을 입은 값비싼 존재, 내가 사랑하는 존재란다.” 이 사실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 안식의 복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돌아가는 생산과 소비의 경제체제를 넘어서려면,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누구인지, 내가 왜 일하고 있는지, 내 인생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바르게 아는 인생이 됩니다.
우리에게 참 안식을 주시는 분은 주님 한 분뿐입니다.
악보 중간에 있는 쉼표는 노래를 잘 부르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쉴 때 쉬어야 끝까지 큰 목소리로 노래를 부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안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안식을 통해서 ‘하나님, 제가 생각 없이 살았습니다. 이제는 생각하며 살겠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지, 내 이웃은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 수 있는지 다시 생각하고 시작하겠습니다’ 하고 다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안식일이 주는 축복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소유를 위해서 뛰어다녔습니다. 얼마나 많이 갖고 있는가에 따라 사람을 평가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을 깨뜨려야 합니다. 그래야 인간다워지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존재처럼 살아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제 더 이상 소유로 존재의 가치를 평가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의 존재, 그 자체로 스스로 소중한 존재임을 확인하라고 부탁하십니다. 그것은 나 자신뿐만 아니라 이웃에 관해서도 동일합니다. 그 사람의 소유가 아닌, 그 사람 자체로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소중한 존재임을 깨닫고 긍휼과 사랑을 베풀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산과 소비 위주의 사회경제적 문화를 비판하고 저항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곧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우리는 그 축복을 누려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안식을 어디서부터 얻을 수 있을까요?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마가복음 2:28)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 앞에 나와야 우리가 진정한 안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시기에 우리에게 안식을 주실 수 있는 걸까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11:28)
예수님은 우리를 쉬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 쉼의 자리에 들어가면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나의 잘남과 노력 때문에 얻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물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고백할 때, 우리의 영혼에 기쁨과 평안과 감사가 넘치기 시작합니다. 즉, 내 영혼이 기쁨과 평안과 감사를 누리는 것은 내가 안식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무념무상’의 태도로 쉬라고 이야기합니다.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쉬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유념유상’의 태도로 쉬라고 합니다. 생각하며 쉬고, 기억하며 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기억해야 할 대상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입니다. 그분이 안식의 주인이기 때문이고, 그분이 안식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분을 생각하는 것은 우리에게 영혼의 기쁨과 평안과 감사가 됩니다. 그리고 그분을 생각할 때 내 영혼이 빛나고 내 삶에 의미가 생기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진정한 쉼을 누리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쉴 시간이 없을 만큼 바쁩니까? 일중독에 빠진 것 같습니까? 시간이 없어서 교회에 예배드리러 나오기도 어렵습니까? 쉼을 방해하는 것들을 단절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일에는 온전히 예배를 드리십시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기쁨과 평안과 감사가 옵니다. 그리고 그런 후에야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자녀가 대학 입시를 앞두고 있습니까? “시간이 얼마 없다. 교회 나가지 말고 학원에 가서 공부해라.” 설마 자녀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계십니까? 이것은 자녀를 망치는 것입니다. “시간이 없으면 없을수록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우선으로 생각해라. 하나님이 널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네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깨닫고, 마음의 평안과 기쁨과 쉼을 누린 후에 공부해라. 네가 공부해야 할 이유를 말씀 속에서 배워라.” 자녀에게 이렇게 이야기하는 부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쉼을 누릴 수 있을 때에야 그가 하나님의 뜻대로 멋진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일합니까? 때로는 밤을 새우기도 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 바쁨이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을 막아서는 안 됩니다. 바쁜 것을 멈추고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쉼과 안식의 주인이신 하나님만이 삶을 물질화시키고 인간을 소유로 판단하는 이 사회의 가치관을 깨뜨릴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만이 우리를 이 사회에서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 줍니다. 이곳에 모인 모든 성도님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넘치는 안식과 평안을 누리는 하나님의 복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창세기 2:1~3, 막 2:27~28: 1 ~ 28
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2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27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28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쉼의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긴 연휴 후에 “잘 쉬셨습니까?”라고 물으면 많은 분들이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더 힘들었다”, “그렇게 만나고 싶었던 가족과 친구였지만 사람을 만나고 함께 있는 것 자체가 오히려 스트레스라 피곤했다”고 대답하기도 합니다. 쉰 것도 아니고 일한 것도 아닌, 두 가지가 뒤엉킨 모습 때문일 것입니다.
일한다는 건 무엇일까요? 쉰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은 매일매일 하나님이 만드신 것에 복을 내리셨습니다. 무엇보다 인간을 만드신 후에는 매우 큰 복을 내리셨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마지막 날인 일곱째 날에는 하나님이 복을 내리신 대상이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날’을 복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선언을 통해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 공간이든 인간이든 시간이든,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 안에 놓여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창세기 2:3)
하나님은 일곱째 날을 축복하시며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날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2장 2절에는,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친히 안식일을 만드셨고, 모범적으로 안식일의 쉼을 누리셨습니다. 하나님이 왜 쉬셨을까요? 창조의 일이 너무 많아서 피곤했기 때문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이유는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사람을 위해서 쉼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창조와 안식, 일과 쉼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 보여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안식일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연결하는 다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안식을 보면서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하고 나서 쉬는 걸까? 아니면 쉬고 나서 일하는 걸까?’ 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 하는 것과 비슷한 질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읽어 보면 여기에 몇 가지 원칙이 있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습을 보면, 하나님은 일하신 후에 쉬셨습니다. 창세기 1장 5절에는 하루의 정의가 이렇게 나타납니다. “…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째 날이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하셨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아침이 되면 일이 시작되고, 저녁이 되면 하루가 마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면 일하고 쉬셨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땠을까요? 인간은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여섯째 날, 인간이 창조되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맞은 첫날은 쉼의 날, 안식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쉼과 안식의 기쁨을 먼저 주셨습니다. “쉼과 안식을 누려야 한다. 이 날은 내가 네게 주는 선물의 날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더하지 않으셨을까요? “네가 너 된 것은 바로 나의 창조 때문이란다. 먼저 쉼과 휴식의 복을 누리고 그 후에 나처럼 일해라.”
십계명 중에도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이 있습니다. 우선 십계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반부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세상의 다른 신들은 너희를 만든 신이 아니라 너희가 만든 신이다. 너는 네 여호와를 섬기라. 너희를 만든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라’입니다. 후반부는 ‘하나님이 너와 네 이웃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으니 네 이웃을 사랑하라. 네 이웃에게 긍휼을 베풀라’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통해서 주신 두 가지 큰 계명입니다.
그런데 이 전반부와 후반부를 나누고 연결하는 계명이 바로 제4계명, 안식일을 지키라는 계명입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출애굽기 20:8)
안식일을 기억하여 지키라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기억하라는 건 무슨 뜻일까요? 안식일을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왜 쉼의 날을 허락해 주셨는지 그 뜻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상 숭배를 거부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표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안식일을 온전히 거룩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내 이웃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고귀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기에 부모를 공경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자의 표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은 유대인에게만 필요한 명령일까요? 아닐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 명령은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쉼을 요청하십니다. 안식이 있어야 하나님을 사랑할 줄 알고 이웃을 사랑할 줄 아는 힘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일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러면 쉼은 필수적인 것이 아니라 선택적인 것일까요? 아닙니다. 일도 쉼도 인간에게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일만 하고 쉬지 않으면 위험한 일이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일 속에 매몰되면 인간은 자신의 인간성을 놓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 사회는 많은 사람들을 일 속에 매몰시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에 대한 하나님의 비판이 바로 안식일을 지키라는 말씀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켰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안식일을 일요일로 서서히 바꿔 나갔습니다.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예수님이 금요일에 돌아가시고 안식일인 토요일에는 무덤 속에 머무시고 안식 후 첫날인 일요일 아침에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조의 완성인 제 일곱째 날에 그리스도인은 구원의 완성인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면서 이날을 주님의 날, Lord’s day라는 표현과 함께 안식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이날이 진정한 쉼의 날, 진정한 구원의 날, 평안의 날임을 선포하게 됩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을 생각하는 구별된 날입니다.
다시 하나님의 명령을 떠올려 봅시다. 앞서 보았던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에서 ‘기억하라’는 것은 ‘생각하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오늘날 생각을 잃어버린 채 살고 있지 않습니까? 특별히 이 시대는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게 우리의 삶을 몰아가고 있습니다. 현대사회는 인간을 평가할 때 이룬 일, 즉 업적의 정도를 기준으로 삼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사회는 인간을 생산성으로 따지는 천박한 자본주의 사회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업이나 사회에서 사람을 뽑을 때도 소위 말하는 스펙을 주의 깊게 살펴봅니다. 우리는 시장경제의 치열함 가운데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전쟁터 안에 놓여 있습니다.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사람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일중독의 위험에서 빠져나오기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회적, 문화적 위험성을 일찍이 아시고 이것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주셨습니다. 바로 안식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함의 철학도 가르쳐 주셨지만, 쉼과 안식의 철학도 보여 주셨습니다.
또 오늘 말씀은 ‘거룩히 안식일을 구별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다른 날과 차별하라는 의미입니다. 평상시에 우리가 수고하고 땀 흘리며 일했다면, 안식일에는 그 수고의 움직임을 멈추라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을 쉬게 하라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지나친 경쟁과 소비로부터 벗어나는 자리입니다.
이 사회의 문화는 소비문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장경제 아래 이루어지는 치열한 경쟁은 우리로 하여금 생각 없이 살도록 몰아갈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육체적인 욕망을 추구하라고 요구합니다. 하지만 욕망은 우리에게 늘 불만족을 이끌어 내고, 불평과 불만을 야기시킵니다. 마치 빛을 향해 날아드는 부나비처럼 욕구와 욕망을 채워줄 곳을 찾아 분주하게 움직이게 만듭니다. 이런 문화 안에서, 어느새 얼마나 더 가질 것인가? 얼마나 더 누릴 것인가? 하는 것이 우리 인생의 목적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 천박한 자본주의 경제체제하에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이런 모토가 있습니다. ‘아직 나는 충분하지 않아. 조금 더 많이, 조금 더 크게!’ 이것이 우리가 알게 모르게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힘입니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기업들은 많은 상품을 만들어 내면서 요란하게 떠들어댑니다. “브랜드 뉴! 이것이야말로 다른 것과 차별되는 새로운 것이다!” 텔레비전을 켜도, 신문을 펴도, 인터넷에 접속해도 동일한 의미의 광고 메시지가 “너는 아직 충분하지 않으니 새 것을 가지라”며 우리를 부추깁니다. 이러한 메시지가 매일 우리의 눈과 귀에 반복되면서 우리의 머리는 일종의 세뇌를 당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마치 상품화된 동물처럼 서서히 변질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경제체제 속에서 우리는 매우 치열하게 경쟁합니다. 누군가 내 것을 빼앗아 갔고, 내가 누려야 할 것을 누군가 대신 누리고 있다는 생각에, 내 것을 뺏기지 않기 위해 남의 것을 빼앗아야 한다는 공격적인 욕구가 마음에서 자라납니다. 그리고 그 욕구에 따라 우리는 끝없이 시기하고 갈등하며 살아갑니다.
우리 사회에 왜 그렇게 분노가 많을까요? 무슨 일이 조금이라도 풀리지 않으면 왜 그렇게 소리를 지르는 걸까요? 남과 함께 가는 것을 왜 못 하는 걸까요? 우리에게 참된 쉼과 안식이 부족하여 세상 모든 것을 소유의 등급으로 판정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이웃을 속이고 약한 사람의 것을 빼앗는 사람이 됩니다. 약육강식이라는 동물의 문화가 우리의 삶을 지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살벌한 사회에서는 승리자와 패배자가 나뉠 수밖에 없습니다. 누군가 더 많이 가지게 되면, 누군가는 가진 것이 없는 낙오자의 슬픔을 경험하게 됩니다. 누군가 더 많이 이루게 되면, 누군가는 눈물을 거두는 패배자가 됩니다. 이런 사회는 소수만을 위한 행복을 향해 나아가는 잘못된 사회, 왜곡된 사회로 서서히 전락하게 될 뿐입니다.
이러한 위험을 깨뜨리는 힘이 바로 안식일입니다. “인간은 소유에 의해서 규정되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소유물보다 훨씬 더 고귀한 존재다.” 하나님은 이것을 선언하시기 위해서 안식일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너는 일하는 기계가 아니다. 너는 일만 하는 동물이 아니다. 너는 나의 형상을 입은 값비싼 존재, 내가 사랑하는 존재란다.” 이 사실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 안식의 복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돌아가는 생산과 소비의 경제체제를 넘어서려면,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누구인지, 내가 왜 일하고 있는지, 내 인생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바르게 아는 인생이 됩니다.
우리에게 참 안식을 주시는 분은 주님 한 분뿐입니다.
악보 중간에 있는 쉼표는 노래를 잘 부르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쉴 때 쉬어야 끝까지 큰 목소리로 노래를 부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안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안식을 통해서 ‘하나님, 제가 생각 없이 살았습니다. 이제는 생각하며 살겠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지, 내 이웃은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 수 있는지 다시 생각하고 시작하겠습니다’ 하고 다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안식일이 주는 축복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소유를 위해서 뛰어다녔습니다. 얼마나 많이 갖고 있는가에 따라 사람을 평가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을 깨뜨려야 합니다. 그래야 인간다워지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존재처럼 살아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제 더 이상 소유로 존재의 가치를 평가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의 존재, 그 자체로 스스로 소중한 존재임을 확인하라고 부탁하십니다. 그것은 나 자신뿐만 아니라 이웃에 관해서도 동일합니다. 그 사람의 소유가 아닌, 그 사람 자체로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소중한 존재임을 깨닫고 긍휼과 사랑을 베풀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산과 소비 위주의 사회경제적 문화를 비판하고 저항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곧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우리는 그 축복을 누려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안식을 어디서부터 얻을 수 있을까요?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마가복음 2:28)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 앞에 나와야 우리가 진정한 안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시기에 우리에게 안식을 주실 수 있는 걸까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11:28)
예수님은 우리를 쉬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 쉼의 자리에 들어가면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나의 잘남과 노력 때문에 얻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물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고백할 때, 우리의 영혼에 기쁨과 평안과 감사가 넘치기 시작합니다. 즉, 내 영혼이 기쁨과 평안과 감사를 누리는 것은 내가 안식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무념무상’의 태도로 쉬라고 이야기합니다.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쉬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유념유상’의 태도로 쉬라고 합니다. 생각하며 쉬고, 기억하며 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기억해야 할 대상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입니다. 그분이 안식의 주인이기 때문이고, 그분이 안식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분을 생각하는 것은 우리에게 영혼의 기쁨과 평안과 감사가 됩니다. 그리고 그분을 생각할 때 내 영혼이 빛나고 내 삶에 의미가 생기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진정한 쉼을 누리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쉴 시간이 없을 만큼 바쁩니까? 일중독에 빠진 것 같습니까? 시간이 없어서 교회에 예배드리러 나오기도 어렵습니까? 쉼을 방해하는 것들을 단절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일에는 온전히 예배를 드리십시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기쁨과 평안과 감사가 옵니다. 그리고 그런 후에야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자녀가 대학 입시를 앞두고 있습니까? “시간이 얼마 없다. 교회 나가지 말고 학원에 가서 공부해라.” 설마 자녀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계십니까? 이것은 자녀를 망치는 것입니다. “시간이 없으면 없을수록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우선으로 생각해라. 하나님이 널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네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깨닫고, 마음의 평안과 기쁨과 쉼을 누린 후에 공부해라. 네가 공부해야 할 이유를 말씀 속에서 배워라.” 자녀에게 이렇게 이야기하는 부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쉼을 누릴 수 있을 때에야 그가 하나님의 뜻대로 멋진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일합니까? 때로는 밤을 새우기도 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 바쁨이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을 막아서는 안 됩니다. 바쁜 것을 멈추고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쉼과 안식의 주인이신 하나님만이 삶을 물질화시키고 인간을 소유로 판단하는 이 사회의 가치관을 깨뜨릴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만이 우리를 이 사회에서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 줍니다. 이곳에 모인 모든 성도님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넘치는 안식과 평안을 누리는 하나님의 복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