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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는 기쁨

시편 126: 5 ~ 6

김지철 목사

2015.01.18

하나님은 인간을 일하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지난해 청년 실업률이 9%라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이는 1999년 외환위기 이후 가장 높은 수치입니다. 청년 남성만의 실업률을 보면, 처음으로 10%를 돌파해서 10.5%에 이르렀습니다. 청년들이 직업을 구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또한 어렵게 취직을 해도 다섯 명 중 한 명은 비정규직입니다. 지난해 청년 취업자 389만 명 가운데 76만 명은 첫 직장이 일 년 이하의 계약직이었습니다. 이처럼 일자리가 부족하다는 것은, 개인의 위기이자 동시에 우리 사회의 심각한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일을 해야 하는 것일까요? 먼저, 생존이 걸려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삶의 원칙이고 태도일 것입니다. 젊었을 때는 한 번쯤 그런 질문을 해 봅니다. ‘나는 일하기 위해서 사는가? 아니면 살기 위해서 일하는가?’ 살기 위해서 일한다고 하면, 스스로가 너무 애처롭고 불쌍하게 여겨집니다. 반대로, 일하기 위해서 산다고 하면, 쉼이 없는 삶이 되지는 않을지, 일중독에 빠진 사람이 되지는 않을지 염려가 됩니다. 나는 일벌레도, 돈벌레도 아닌데 왜 일하기 위해서 살아야 하나 하는 회의마저 듭니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이 두 가지 질문 앞에서 이처럼 갈등한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일하는 것, 노동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가르치고 있을까요?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창조 때부터 인간을 일하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이것은 축복이었습니다. 하나님 당신 자신이 먼저 일하셨습니다. 일하신 후에 매우 좋아하셨습니다. 여섯째 날에는 인간을 만드시고, “보기에 참 좋구나.” 말씀하시며 창조를 끝내셨습니다.
하나님이 그처럼 좋아하신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창조가 ‘인간’을 만듦으로 완성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인간을 만드시며 이렇게 좋아하신 이유는, 인간에게 하나님이 행하신 창조의 일을 위임하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일함’은 인간을 존엄하게 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동물과 인간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창세기 1장을 살펴보면, 하나님은 동물을 만드시고 “일하라.” 명령하지 않으셨습니다. 창세기 1장 22절을 보면, 동물에게는 “생육하라.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을 하셨습니다. 동물의 역할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먹고 마시고 새끼를 불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동물이 살아가는 목표입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다르셨습니다. 먹고 마시고 번성하라는 것은 기본이었고, 거기에 또 다른 명령을 더하셨습니다.

…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1:28)

앞부분의 내용은 동물에게 주신 것과 같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다음에 인간에게만 주신 두 번째 명령이 있습니다.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인간아, 너는 내가 만든 이 모든 것을 통치해라. 네가 관할하라. 네가 운영해라.” 통치권과 운영권을 주시며 ‘일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이 땅에서 계속 이어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창조의 능력을 더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관리하고 새롭게 창조하라는 허락, 이것은 우리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인간이 범죄 한 후에 일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이미 세상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이 인간으로 주신 명령이었습니다. 핵심은 그것입니다. “나도 일했으니 너도 일해라. 창조주 내가 창조했으니 너도 내 뒤를 따라서 이 세상을 새롭게 만들라.” 그것이 하나님이 인간에게만 주신 축복입니다. 일하고 수고함으로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동참하게 하신 것, 이것이 얼마나 큰 권리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이 창조의 일을 인간에게 맡기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창세기 2:15)

영어성경으로 보면, ‘to work it and take care of it’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일하고 그것을 보살피며 지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동물과 인간을 구별하신 내용입니다. 다시 말하면, 일한다는 것은 우리가 동물과 다르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존엄한 이유는 일할 수 있는 특권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무위도식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게으름을 싫어합니다. 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수고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손으로 만들고 발로 뛰는 것이 일입니다. 머리로 생각하여 아이디어를 창출하는 것이 일입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일들을 통하여 동물 세계와 인간 세계를 구별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일’을 허락하심으로, 인간은 하나님을 닮아가는 존재, 하나님과 비슷한 존엄성을 지닌 존재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렇게 보았을 때, 일이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삶이라는 의미 아닙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이 삶의 유일한 목표는 아닐 것입니다. 내 인생의 이유가 일이라는 것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일함의 이유와 목표를 확인해야 합니다.

창세기를 살펴보면 인간은 하나님 앞에 범죄를 하고, 하나님과 단절됩니다. 그때는 일이 기쁨과 축복이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저주가 되었고, 우상이 되었습니다. 인간은 그때부터 일할수록 힘들어졌고, 일할수록 일중독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일하는 것이 삶의 목표가 되었고, 삶의 우선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긴 부작용들입니다.
만약 일이 인생 최고의 목표라면, 우리는 사람을 어떻게 평가하게 될까요? ‘이 사람의 생산적인 능력이 수치적으로 계산될 수 있을까?’ 그것을 먼저 볼 것입니다. ‘효용성이 있는 사람일까? 쓸모가 있는 사람일까?’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으로 인간에 대한 평가가 내려질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일이 중요하지만, 그것이 전부일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격을 가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물이나 물건은 비싸다, 싸다로 저울질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게 판단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 자체로 중요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그가 하는 일이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상관없이 살아있는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것, 그 자체를 하나님은 귀히 여기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간에게 일을 부여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합니다. ‘내가 하는 일의 목표가 무엇인가? 내가 왜 일을 하는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소명은 무엇인가?’ 이것들의 답을 찾아야 일이 나를 지배하지 않고 내가 일을 다스리며, 하나님이 주신 일의 축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일을 나의 생존만을 위해서 사용한다면, 인간은 금방 피곤해집니다. 금방 싫증이 납니다. ‘일하는 것이 내 인생인가!’ 탄식하게 됩니다. 그런데 일이라는 것이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축복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나를 통해서 내 가정이 복을 받는구나. 나를 통해서 내 이웃이 복을 받는구나. 나를 통해서 이 세상이 복을 받는구나!’ 하는 깨달음이 생깁니다. 목표와 이유가 분명하면 일하는 것이 즐거움과 기쁨으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러한 즐거움과 기쁨을 누릴 수 있을까요? 우선 우리는 ‘일하는 것’과 ‘신앙’이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직장생활과 여러분의 신앙은 일치합니까?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까? 우리는 종종 질문합니다. “도대체 일과 신앙이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예배 잘 드리면 되는 것 아닙니까? 기도 많이 하고, 헌금 잘 드리면 좋은 신앙 아닙니까? 전도할 줄 알고 선교에도 참여하면 그것이 복된 신앙 아닙니까? 그것이면 족하지 않습니까?”
한편으로는 맞고 한편으로는 틀린 이야기입니다. 물론 그러한 것들이 좋은 신앙의 표현일 것입니다.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넘어선 또 하나의 단계를 요청하십니다. 무엇일까요? “내가 이 세상의 주권자인 것을 세상 사람들이 알도록 네 삶에서, 네 직업을 통해서 나에게 영광을 돌리며 살고 있느냐?” 하나님은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일과 신앙은 구분된 것이 아닙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나 요한 칼빈은 이 중요한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대의 잘못된 사상을 비판하고, 그것을 넘어서기를 원했습니다. 목회자와 같은 성직뿐만 아니라 세속적인 일로 여겨지는 일반 노동도 하나님이 주신 소명이며 거룩한 직분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이 500년 전 마틴 루터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수도사와 신부, 수녀는 신령한 직분이고 그 밖의 다른 직업은 다 세속적인 노동이며 천박한 것으로 여겼던 당대의 사고를 아주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500년 전이면, 우리나라는 조선시대였습니다. 바로 그때, 루터가 이런 말을 한 것입니다. “교황, 주교, 신부, 수도사들을 신령한 직분으로 칭하면서 왕족, 귀족, 장인, 농부들을 세속의 직분이라고 부르는 건 모두 지어낸 허구이다. 철저한 기만이요, 위선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누구도 거기에 주눅들 이유가 없다.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진정으로 신령한 직분을 가졌으며, 직무의 종류가 다르다는 것 말고는 아무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려는 마음으로 일할 때, 그 모든 직분이 거룩하고 신령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일을 하면서 자부심을 갖고, 기쁨으로 삶의 현장에 참여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어떤 일을 하고 계십니까? 내 직업이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습니까? 아닙니다. 만약 의사가 병든 사람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 일한다면 얼마나 귀합니까? 그런데 만약 긍휼히 여기는 마음 없이 단지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 진료를 한다면 슬픈 일 아니겠습니까? 판사, 검사, 변호사가 이 땅에 정의를 실현하려는 열정으로 맡겨진 일을 감당한다면 얼마나 멋진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약한 사람 앞에서 큰소리치는 것이 좋고, 자신이 먹고 살기 위해서만 법을 다룬다면 그 사회가 복 받는 사회가 되겠습니까? 공의로운 사회가 되겠습니까?
우리가 가진 직업들은 참으로 다양할 것입니다. 국가공무원, 경찰관, 산업근로자, 기업가, 가정주부, 정치인, 교역자 등 셀 수 없이 많은 직업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이 정말로 이 땅을 풍요롭게 만드는가? 이 땅을 아름답게 만드는가? 이 땅을 조화롭게 만드는가?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다면, 이미 창조사역에 동참하고 있는 것입니다. 존중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 삶에 하늘로부터 축복이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삶의 목표, 일함의 이유를 신앙인들은 더 명백하게 알고 있습니다. 일함에 있어 신앙을 가졌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기도하면서 일하는 것입니다. 일하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일 자체가 신앙이 되고,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린도전서 10:31)

먹을 때도 감사할 줄 알고, 마실 때도 감사할 줄 알고, 직장에 나가서 일을 할 때도 감사할 줄 알고, “하나님, 나 같은 사람을 통해서 이 직장이 복 받게 하시고, 내가 밟는 땅이 복 받게 하시고,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게 하소서. 내 삶의 현장이 하나님의 주권이 나타나는 자리가 되게 하옵소서.” 기도하면, 그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그 직업을 통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선의 씨앗을 뿌려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나가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위임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우리의 삶이 얼마나 치열하고 전투적인 상황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시편 126:5∼6)

이 시편은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 가서 70년 동안 고독한 유배 생활을 한 후,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면서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을 고백한 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그들의 삶을 하나님께 맞추어 어떻게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고자 했던 그들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척박하고 힘들어서 눈물을 쏟지 않을 수 없는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축복해 주셨던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표현으로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삶의 현장이란, 내 마음대로 되는 자리가 아닙니다. 결코 녹록하지 않습니다. 아주 치열합니다. 경쟁 때문에 서로 치고받습니다. 누가 먼저 승진할지, 누가 더 많이 벌지를 두고 빼앗고 빼앗기는 긴장 속에 우리가 놓여 있습니다.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씨를 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눈물이 흐를 수밖에 없는 힘든 자리에서도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뿌리지 않으면 싹이 나고, 줄기가 솟고, 열매를 맺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 속에서도 씨를 뿌리라는 것입니다. 수고한 후에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애쓰라는 것입니다.
이 원칙은 창조의 법칙입니다. 창조의 법칙은 무엇입니까?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입니다. 팥을 심으면 팥이 나고, 콩을 심으면 콩이 나는 이 원칙을,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도 그대로 적용하십니다. 갈라디아서 6장 7절에서도 그러한 원칙을 말씀하십니다.

…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갈라디아서 6:7)

그런데 그 다음 단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갈라디아서 6:9)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무엇을 심습니까? 선을 심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름답다 하시는 것을 심는다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을 심고,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심는 것입니다. 그리고 포기하지 않으면, 때가 이르매 하나님이 새로운 역사를 우리에게 허락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일함의 기쁨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일이란 무엇일까요? 일을 많이 하는 것,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행하셨던 창조의 방향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흑암과 깊음에서 빛과 생명을 창조하셨습니다. 혼돈과 공허의 카오스 속에서 질서와 조화가 아름다운 코스모스의 세계를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향하는 것은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나 같은 사람이 존재하므로 공동체가 더 밝아지고, 더 따뜻해지고, 더 아름다워지고, 나 같은 사람이 있으므로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나타날 수 있다면, 그것이 곧 나를 이 시대의 일꾼으로 부르신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세상은 미움과 분노로 가득할 때, 그것을 뛰어넘는 사랑과 은혜의 역사를 만들어 가라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탁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우리에게는 명백한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무엇이 목표일까요? 돈일까요? 물론 돈은 참 중요합니다. 인생에서 돈만큼 소중한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돈이 중요하다. 그러나 돈보다 더 큰 목표를 가져라. 그래야 돈에 억눌리지 않고, 일중독에 빠지지 않고, 일이 너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네가 일을 다스리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인생에는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일하는 기쁨과 즐거움입니다. 나 같은 사람을 통해서 이 세계와 내 가정, 삶의 자리가 더 축복을 받는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선이 나타난다면 얼마나 큰 은총입니까? 이것을 깨닫는 것이 일하는 기쁨과 즐거움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함의 기쁨을 주셨습니다. 이 기쁨을 사탄에게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돈에게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 기쁨을 갖고 세상의 주권자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 사랑과 은혜가 이 세상에 나타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의 가정이, 우리의 직장이, 우리의 삶이, 여기에 모인 믿음의 성도님들을 통해 변화되고 복 받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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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26: 5 ~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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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6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하나님은 인간을 일하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지난해 청년 실업률이 9%라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이는 1999년 외환위기 이후 가장 높은 수치입니다. 청년 남성만의 실업률을 보면, 처음으로 10%를 돌파해서 10.5%에 이르렀습니다. 청년들이 직업을 구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또한 어렵게 취직을 해도 다섯 명 중 한 명은 비정규직입니다. 지난해 청년 취업자 389만 명 가운데 76만 명은 첫 직장이 일 년 이하의 계약직이었습니다. 이처럼 일자리가 부족하다는 것은, 개인의 위기이자 동시에 우리 사회의 심각한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일을 해야 하는 것일까요? 먼저, 생존이 걸려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삶의 원칙이고 태도일 것입니다. 젊었을 때는 한 번쯤 그런 질문을 해 봅니다. ‘나는 일하기 위해서 사는가? 아니면 살기 위해서 일하는가?’ 살기 위해서 일한다고 하면, 스스로가 너무 애처롭고 불쌍하게 여겨집니다. 반대로, 일하기 위해서 산다고 하면, 쉼이 없는 삶이 되지는 않을지, 일중독에 빠진 사람이 되지는 않을지 염려가 됩니다. 나는 일벌레도, 돈벌레도 아닌데 왜 일하기 위해서 살아야 하나 하는 회의마저 듭니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이 두 가지 질문 앞에서 이처럼 갈등한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일하는 것, 노동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가르치고 있을까요?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창조 때부터 인간을 일하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이것은 축복이었습니다. 하나님 당신 자신이 먼저 일하셨습니다. 일하신 후에 매우 좋아하셨습니다. 여섯째 날에는 인간을 만드시고, “보기에 참 좋구나.” 말씀하시며 창조를 끝내셨습니다.
하나님이 그처럼 좋아하신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창조가 ‘인간’을 만듦으로 완성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인간을 만드시며 이렇게 좋아하신 이유는, 인간에게 하나님이 행하신 창조의 일을 위임하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일함’은 인간을 존엄하게 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동물과 인간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창세기 1장을 살펴보면, 하나님은 동물을 만드시고 “일하라.” 명령하지 않으셨습니다. 창세기 1장 22절을 보면, 동물에게는 “생육하라.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을 하셨습니다. 동물의 역할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먹고 마시고 새끼를 불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동물이 살아가는 목표입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다르셨습니다. 먹고 마시고 번성하라는 것은 기본이었고, 거기에 또 다른 명령을 더하셨습니다.

…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1:28)

앞부분의 내용은 동물에게 주신 것과 같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다음에 인간에게만 주신 두 번째 명령이 있습니다.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인간아, 너는 내가 만든 이 모든 것을 통치해라. 네가 관할하라. 네가 운영해라.” 통치권과 운영권을 주시며 ‘일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이 땅에서 계속 이어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창조의 능력을 더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관리하고 새롭게 창조하라는 허락, 이것은 우리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인간이 범죄 한 후에 일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이미 세상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이 인간으로 주신 명령이었습니다. 핵심은 그것입니다. “나도 일했으니 너도 일해라. 창조주 내가 창조했으니 너도 내 뒤를 따라서 이 세상을 새롭게 만들라.” 그것이 하나님이 인간에게만 주신 축복입니다. 일하고 수고함으로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동참하게 하신 것, 이것이 얼마나 큰 권리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이 창조의 일을 인간에게 맡기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창세기 2:15)

영어성경으로 보면, ‘to work it and take care of it’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일하고 그것을 보살피며 지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동물과 인간을 구별하신 내용입니다. 다시 말하면, 일한다는 것은 우리가 동물과 다르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존엄한 이유는 일할 수 있는 특권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무위도식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게으름을 싫어합니다. 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수고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손으로 만들고 발로 뛰는 것이 일입니다. 머리로 생각하여 아이디어를 창출하는 것이 일입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일들을 통하여 동물 세계와 인간 세계를 구별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일’을 허락하심으로, 인간은 하나님을 닮아가는 존재, 하나님과 비슷한 존엄성을 지닌 존재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렇게 보았을 때, 일이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삶이라는 의미 아닙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이 삶의 유일한 목표는 아닐 것입니다. 내 인생의 이유가 일이라는 것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일함의 이유와 목표를 확인해야 합니다.

창세기를 살펴보면 인간은 하나님 앞에 범죄를 하고, 하나님과 단절됩니다. 그때는 일이 기쁨과 축복이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저주가 되었고, 우상이 되었습니다. 인간은 그때부터 일할수록 힘들어졌고, 일할수록 일중독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일하는 것이 삶의 목표가 되었고, 삶의 우선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긴 부작용들입니다.
만약 일이 인생 최고의 목표라면, 우리는 사람을 어떻게 평가하게 될까요? ‘이 사람의 생산적인 능력이 수치적으로 계산될 수 있을까?’ 그것을 먼저 볼 것입니다. ‘효용성이 있는 사람일까? 쓸모가 있는 사람일까?’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으로 인간에 대한 평가가 내려질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일이 중요하지만, 그것이 전부일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격을 가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물이나 물건은 비싸다, 싸다로 저울질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게 판단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 자체로 중요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그가 하는 일이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상관없이 살아있는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것, 그 자체를 하나님은 귀히 여기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간에게 일을 부여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합니다. ‘내가 하는 일의 목표가 무엇인가? 내가 왜 일을 하는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소명은 무엇인가?’ 이것들의 답을 찾아야 일이 나를 지배하지 않고 내가 일을 다스리며, 하나님이 주신 일의 축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일을 나의 생존만을 위해서 사용한다면, 인간은 금방 피곤해집니다. 금방 싫증이 납니다. ‘일하는 것이 내 인생인가!’ 탄식하게 됩니다. 그런데 일이라는 것이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축복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나를 통해서 내 가정이 복을 받는구나. 나를 통해서 내 이웃이 복을 받는구나. 나를 통해서 이 세상이 복을 받는구나!’ 하는 깨달음이 생깁니다. 목표와 이유가 분명하면 일하는 것이 즐거움과 기쁨으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러한 즐거움과 기쁨을 누릴 수 있을까요? 우선 우리는 ‘일하는 것’과 ‘신앙’이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직장생활과 여러분의 신앙은 일치합니까?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까? 우리는 종종 질문합니다. “도대체 일과 신앙이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예배 잘 드리면 되는 것 아닙니까? 기도 많이 하고, 헌금 잘 드리면 좋은 신앙 아닙니까? 전도할 줄 알고 선교에도 참여하면 그것이 복된 신앙 아닙니까? 그것이면 족하지 않습니까?”
한편으로는 맞고 한편으로는 틀린 이야기입니다. 물론 그러한 것들이 좋은 신앙의 표현일 것입니다.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넘어선 또 하나의 단계를 요청하십니다. 무엇일까요? “내가 이 세상의 주권자인 것을 세상 사람들이 알도록 네 삶에서, 네 직업을 통해서 나에게 영광을 돌리며 살고 있느냐?” 하나님은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일과 신앙은 구분된 것이 아닙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나 요한 칼빈은 이 중요한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대의 잘못된 사상을 비판하고, 그것을 넘어서기를 원했습니다. 목회자와 같은 성직뿐만 아니라 세속적인 일로 여겨지는 일반 노동도 하나님이 주신 소명이며 거룩한 직분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이 500년 전 마틴 루터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수도사와 신부, 수녀는 신령한 직분이고 그 밖의 다른 직업은 다 세속적인 노동이며 천박한 것으로 여겼던 당대의 사고를 아주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500년 전이면, 우리나라는 조선시대였습니다. 바로 그때, 루터가 이런 말을 한 것입니다. “교황, 주교, 신부, 수도사들을 신령한 직분으로 칭하면서 왕족, 귀족, 장인, 농부들을 세속의 직분이라고 부르는 건 모두 지어낸 허구이다. 철저한 기만이요, 위선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누구도 거기에 주눅들 이유가 없다.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진정으로 신령한 직분을 가졌으며, 직무의 종류가 다르다는 것 말고는 아무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려는 마음으로 일할 때, 그 모든 직분이 거룩하고 신령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일을 하면서 자부심을 갖고, 기쁨으로 삶의 현장에 참여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어떤 일을 하고 계십니까? 내 직업이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습니까? 아닙니다. 만약 의사가 병든 사람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 일한다면 얼마나 귀합니까? 그런데 만약 긍휼히 여기는 마음 없이 단지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 진료를 한다면 슬픈 일 아니겠습니까? 판사, 검사, 변호사가 이 땅에 정의를 실현하려는 열정으로 맡겨진 일을 감당한다면 얼마나 멋진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약한 사람 앞에서 큰소리치는 것이 좋고, 자신이 먹고 살기 위해서만 법을 다룬다면 그 사회가 복 받는 사회가 되겠습니까? 공의로운 사회가 되겠습니까?
우리가 가진 직업들은 참으로 다양할 것입니다. 국가공무원, 경찰관, 산업근로자, 기업가, 가정주부, 정치인, 교역자 등 셀 수 없이 많은 직업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이 정말로 이 땅을 풍요롭게 만드는가? 이 땅을 아름답게 만드는가? 이 땅을 조화롭게 만드는가?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다면, 이미 창조사역에 동참하고 있는 것입니다. 존중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 삶에 하늘로부터 축복이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삶의 목표, 일함의 이유를 신앙인들은 더 명백하게 알고 있습니다. 일함에 있어 신앙을 가졌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기도하면서 일하는 것입니다. 일하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일 자체가 신앙이 되고,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린도전서 10:31)

먹을 때도 감사할 줄 알고, 마실 때도 감사할 줄 알고, 직장에 나가서 일을 할 때도 감사할 줄 알고, “하나님, 나 같은 사람을 통해서 이 직장이 복 받게 하시고, 내가 밟는 땅이 복 받게 하시고,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게 하소서. 내 삶의 현장이 하나님의 주권이 나타나는 자리가 되게 하옵소서.” 기도하면, 그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그 직업을 통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선의 씨앗을 뿌려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나가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위임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우리의 삶이 얼마나 치열하고 전투적인 상황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시편 126:5∼6)

이 시편은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 가서 70년 동안 고독한 유배 생활을 한 후,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면서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을 고백한 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그들의 삶을 하나님께 맞추어 어떻게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고자 했던 그들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척박하고 힘들어서 눈물을 쏟지 않을 수 없는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축복해 주셨던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표현으로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삶의 현장이란, 내 마음대로 되는 자리가 아닙니다. 결코 녹록하지 않습니다. 아주 치열합니다. 경쟁 때문에 서로 치고받습니다. 누가 먼저 승진할지, 누가 더 많이 벌지를 두고 빼앗고 빼앗기는 긴장 속에 우리가 놓여 있습니다.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씨를 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눈물이 흐를 수밖에 없는 힘든 자리에서도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뿌리지 않으면 싹이 나고, 줄기가 솟고, 열매를 맺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 속에서도 씨를 뿌리라는 것입니다. 수고한 후에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애쓰라는 것입니다.
이 원칙은 창조의 법칙입니다. 창조의 법칙은 무엇입니까?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입니다. 팥을 심으면 팥이 나고, 콩을 심으면 콩이 나는 이 원칙을,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도 그대로 적용하십니다. 갈라디아서 6장 7절에서도 그러한 원칙을 말씀하십니다.

…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갈라디아서 6:7)

그런데 그 다음 단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갈라디아서 6:9)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무엇을 심습니까? 선을 심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름답다 하시는 것을 심는다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을 심고,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심는 것입니다. 그리고 포기하지 않으면, 때가 이르매 하나님이 새로운 역사를 우리에게 허락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일함의 기쁨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일이란 무엇일까요? 일을 많이 하는 것,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행하셨던 창조의 방향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흑암과 깊음에서 빛과 생명을 창조하셨습니다. 혼돈과 공허의 카오스 속에서 질서와 조화가 아름다운 코스모스의 세계를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향하는 것은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나 같은 사람이 존재하므로 공동체가 더 밝아지고, 더 따뜻해지고, 더 아름다워지고, 나 같은 사람이 있으므로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나타날 수 있다면, 그것이 곧 나를 이 시대의 일꾼으로 부르신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세상은 미움과 분노로 가득할 때, 그것을 뛰어넘는 사랑과 은혜의 역사를 만들어 가라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탁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우리에게는 명백한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무엇이 목표일까요? 돈일까요? 물론 돈은 참 중요합니다. 인생에서 돈만큼 소중한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돈이 중요하다. 그러나 돈보다 더 큰 목표를 가져라. 그래야 돈에 억눌리지 않고, 일중독에 빠지지 않고, 일이 너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네가 일을 다스리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인생에는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일하는 기쁨과 즐거움입니다. 나 같은 사람을 통해서 이 세계와 내 가정, 삶의 자리가 더 축복을 받는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선이 나타난다면 얼마나 큰 은총입니까? 이것을 깨닫는 것이 일하는 기쁨과 즐거움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함의 기쁨을 주셨습니다. 이 기쁨을 사탄에게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돈에게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 기쁨을 갖고 세상의 주권자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 사랑과 은혜가 이 세상에 나타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의 가정이, 우리의 직장이, 우리의 삶이, 여기에 모인 믿음의 성도님들을 통해 변화되고 복 받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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