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구독

ic_info구독 사용방법

해당 카테고리에 새로운 콘텐츠를 모아보기 원하시면 구독을 추가해주세요 마이페이지 > 내구독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ic_info

일, 죄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

창세기 2: 15 ~ 19

김지철 목사

2016.08.21

우리에게는 직업을 바라보는 틀이 있습니다.

올여름은 유독 무더워서 견디기 힘들었던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덥기는 했지만, 여름이 선사하는 자연의 풍성함 속에서 쉼을 누리는 멋진 계절이기도 했습니다. 이제 휴가철이 끝나고 다시 일터에서 맡겨진 일에 집중해야 하는 시간이 왔습니다. 그래서 몇 주간에 걸쳐서 ‘일과 신앙’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에서, 직장에서 어떻게 일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갈 생각입니다.
누군가를 처음 만나게 되면,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하는 궁금증이 생깁니다. 상대방에 대해 알 수 있는 것들은 많이 있습니다. 우선 얼굴이나 옷차림을 보면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은 가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확한 정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대화를 해 봐야 어느 정도 정확하게 그 사람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람에 대해 알 수 있을 만한 것들을 조심스럽게 묻습니다.
대부분 무엇부터 묻습니까? “몇 살입니까?”, “어디 출신입니까?”, “고향은 어디입니까?”, “어느 학교를 나왔습니까?” 면접관이 아닌 이상 이런 것부터 묻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 무슨 일을 하고 계십니까?”라고는 물을 수 있을 것입니다. 가정주부, 학생, 교사, 사업가, 엔지니어, 의사 등 상대방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면 그 사람의 많은 부분을 미리 파악할 수 있게 됩니다.
‘나를 나 되게 하는 것’은 나이나 출생지, 졸업한 학교가 아니라 ‘내가 하고 있는 일’입니다. 내가 하는 일에 의해서 내 삶이 규정되기 때문입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내가 하는 일이 곧 나 자신’인 샘입니다.
그런데 내가 하고 있는 일을 말할 때 간혹 문제가 발생합니다. 내가 하는 일에 자부심을 느끼기도 하지만, 때로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열등감을 느낄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 사람은 나보다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이네’, ‘나보다 학식이 깊네’, ‘나보다 사회적 지위가 높네’ 등의 생각을 하면서 위축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직업을 보는 우리의 눈 때문입니다. 업적주의적인 사고를 가지고 사람의 직업을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주어진 일을 대하는 마음과 일함의 목적이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믿기 이전과 예수님을 믿은 이후의 삶이 구분된다고 말합니다. 과거에는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인 것처럼 마음대로 살았지만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 후에는 예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과거에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모든 일을 했지만, 이제는 주님을 위해서 일하는 인생으로 바뀌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난 후 내가 해 온 모든 일을 뒤집어야 할까요? 직업까지 바꾸어야 할까요? 사도 바울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부탁합니다.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고린도전서 7:20)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갑자기 직업을 바꾸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동안 최선을 다해서 일을 해 왔다면, 바로 그 일에 매진하라는 것입니다. 대신 일을 하는 목표와 의미, 이유를 바꾸라고 말합니다. 사람의 종노릇하면서 억지로 일하지 말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유자로서 즐겁게 맡겨진 일을 감당하라고 부탁하는 것입니다.
종교 개혁자 루터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가정주부는 주부로서, 구두수선공은 수선공으로서, 농부는 농부로서의 삶에 충실하라. 이것이 곧 소명이다.” 과거 우리의 직업이 생계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면, 이제는 직업을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섬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노동이란 이웃을 향한 봉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임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물론 때로는 우리가 직업을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이유로 지금까지 하고 있는 일을 다 바꾸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장로교의 시조인 칼빈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노동은 아주 선하고 신성한 것이다. 노동은 신체를 강건하게 해줄 뿐 아니라 나태에 의해 빚어지는 질병을 고쳐 준다. 이 세상에서 노동자는 신 하나님을 가장 많이 닮은 자라고 할 수 있다. 노동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이다.”

‘노동’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매일 하는 일과 노동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할까요? 성경은 두 가지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부정적인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긍정적인 입장입니다. 우리는 부정적인 관점에서 일과 노동을 해석할 때가 많습니다. 바로 그런 관점 때문에 일과 노동이 즐겁지 않은 것입니다.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창세기 3:19)

이것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죄를 지은 후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이 아름다운 에덴동산에서 단 하나 금지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었으니, 이제는 너희가 수고하고 땀 흘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7절은 더 구체적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창세기 3:17)

수고하지 않으면 먹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수고하고 땀 흘리는 것이 마치 죄가(罪價)를 갚는 것으로, 죄에 대한 징계로 말씀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이와 같은 부정적인 입장에서 노동을 바라보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것, 어쩔 수 없이 주어진 것으로 말입니다.

노동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사명이자 축복입니다.

성경을 읽어 보면 노동의 긍정성을 보여 주는 개념이 더 중요하게 나타남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일과 노동은 인간이 타락한 후에 생긴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네가 죄를 지었으니 죄의 값을 치러야 한다”는 말씀 때문에 노동이 생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죄를 짓기 이전에 하나님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기 위해서 노동을 주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창세기 2:15)

하나님은 친히 만드신 에덴동산을 사람에게 맡기셨습니다. 동산지기로 그들을 임명하신 것입니다. 그곳에서 그들이 해야 할 일은 동산을 경작하며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경작하라’는 것은 땅을 일구라는 것이고, ‘지키라’는 것은 동산을 잘 관리하고 보존하며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인간이 죄를 짓기 이전에 이미 인간에게 노동을 주셨습니다. 수고하고 땀 흘리는 것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왜 노동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일까요?
여기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친히 일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첫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하나님은 일하셨습니다. 성경에는 ‘만들다’는 의미의 단어, ‘바라’와 ‘아싸’가 반복됩니다. ‘바라’는 하나님께만 사용하는 단어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또 하나님과 인간 모두에게 사용되는 동사 ‘아싸’는 하나님이 만드신 것을 인간도 만들 수 있다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특별히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의 과정을 아주 섬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세기 2:7)

하나님은 마치 조각가처럼 흙으로 사람을 빚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습니다. 그랬더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습니다. 여기에 나타난 동사 ‘지으시니’, ‘불어넣으시니’는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셨다는 의미이자 하나님이 일하셨음을 보여 주는 단어입니다. 이것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성경은 일하는 것을 결코 부정적인 뜻으로만 표현하지 않습니다.
이미 일하셨던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할 일을 맡기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노동관입니다. ‘일하고 수고하는 것은 복되고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메시지에도 일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동물과 사람을 만드시고 그들을 각각 축복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축복의 말씀이 다릅니다. 동물에게 주어진 축복의 내용은 “생육하라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였습니다. 번식과 생식을 위한 일에 동물의 세계는 집중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인간에게는 동물에게 주신 축복에 새로운 축복을 더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1:28)

전반부 축복은 동물에게 주신 것과 동일합니다. 그런데 이어 ‘정복하라’, ‘다스리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것은 다른 생물들과 달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세계를 인간에게 맡기시고, 그 세계를 잘 이끌어 나가야 할 청지기의 직분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지구촌의 생태학적인 위기를 해결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곳을 우리에게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아름다운 세계를 아름답게 보존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여러 동물들이 있는 곳으로 이끌고 오십니다. 아담은 독수리, 토끼, 곰, 호랑이 등 각종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 줍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하나님의 지성과 지혜를 가진 인간에게 이 땅의 모든 것을 좋게 나누고 잘 이끌어 가도록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들에, ‘좋다’는 감동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만드신 피조물들을 보시며 매일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보기에 좋구나.”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 좋은 곳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이 선합니다. 아름답습니다. 조화롭습니다. 이것은 창조 이전의 세계와 비교하면 매우 놀라운 변화입니다.
창조 이전의 세계는 어떠했습니까? 창세기 1장 1절과 2절에는 창조 전을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고 기록합니다. 한마디로 무질서 상태입니다. 바로 이 카오스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갑니다. “빛이 있으라.” 하나님의 말씀은 흑암을 빛의 세계로 바꾸었습니다. 무질서와 혼돈이 우주의 아름다움과 조화로, 카오스가 코스모스로 변화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루하루 창조의 사역 끝에 “보기에 좋다”고 말씀하시고, 마지막 날 모든 창조물의 정점에 있는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보기에 심히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피조 세계를 맡기시면서, “내가 일했으니 너도 일하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이 땅에 있는 것들을 관리하며 이끌어 가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이원론이 아니라 일원론입니다. 기독교는 “육체는 악하고 영은 선하다. 세상일은 세속적이고 교회 일은 거룩하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도 만드시고 육체도 만드신 분이며, 교회도 만드시고 세상도 만드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평일은 세속적이고 주일은 거룩하다.” 하나님은 이렇게도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구약 시대에 안식일을 정하실 때에는 이런 말씀을 하셨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다음부터는 모든 날이 다 거룩한 하나님의 날이 되었습니다.
교회에 나와서 봉사하며 섬기는 것은 물론 소중한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지만 직장에서, 학교에서 일하고 공부하는 것도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에 나가서 수고하고 땀 흘릴 때, 하나님이 당신이 만드신 것을 보시며 기뻐하셨던 것처럼 우리 마음속에도 ‘보기에 좋구나’하는 감탄이 있어야 합니다. 그랬을 때 일하는 것이 우리에게 기쁨이 되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인간답게, 내가 나답게 됩니다.
시편에는 수고하는 것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시편 128:2)

땀 흘린 사람이 먹고 마실 수 있고,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주의 자녀가 가져야 할 태도입니다.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일하고 있습니까? 억지로 합니까? 아니면 감사하면서 합니까? 어쩌다가 내가 이런 일을 하게 되었는가 탄식하면서 일합니까? 아니면 작은 일이라도 하나님의 소명이라고 생각하면서 하십니까? 가정주부입니까? 교회에 열심히 나오는 것은 귀한 일이지만 만약 모든 시간을 교회에만 쏟아부어서 가정일을 소홀히 한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학생입니까? 학교 가는 것보다 교회 오는 시간이 더 많은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교사입니까? 학생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지 못하면서 교회에 나와서는 스스로 ‘괜찮은 사람’이라고 주장한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직장인입니까? 정치인입니까? 기업가입니까? 맡겨진 일, 하나님이 보내신 자리에서 나는 충성을 다하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먼저 내가 하는 일을 자랑스럽게 여기십시오. 하나님이 내게 소중한 일을 맡겨 주신 것을 확인하고, 그 일을 기쁨으로 감당하는 것에서부터 노동에 대한 것이 바르게 정립됩니다.
일을 하며 땀 흘리는 것,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고 축복입니다. 수고하고 일하면서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다. 하나님이 만드시고 보기에 좋았다고 하신 그 놀라운 일을 나도 할 것이다’라고 다짐하며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btn_switch

창세기 2: 15 ~ 19

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우리에게는 직업을 바라보는 틀이 있습니다.

올여름은 유독 무더워서 견디기 힘들었던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덥기는 했지만, 여름이 선사하는 자연의 풍성함 속에서 쉼을 누리는 멋진 계절이기도 했습니다. 이제 휴가철이 끝나고 다시 일터에서 맡겨진 일에 집중해야 하는 시간이 왔습니다. 그래서 몇 주간에 걸쳐서 ‘일과 신앙’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에서, 직장에서 어떻게 일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갈 생각입니다.
누군가를 처음 만나게 되면,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하는 궁금증이 생깁니다. 상대방에 대해 알 수 있는 것들은 많이 있습니다. 우선 얼굴이나 옷차림을 보면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은 가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확한 정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대화를 해 봐야 어느 정도 정확하게 그 사람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람에 대해 알 수 있을 만한 것들을 조심스럽게 묻습니다.
대부분 무엇부터 묻습니까? “몇 살입니까?”, “어디 출신입니까?”, “고향은 어디입니까?”, “어느 학교를 나왔습니까?” 면접관이 아닌 이상 이런 것부터 묻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 무슨 일을 하고 계십니까?”라고는 물을 수 있을 것입니다. 가정주부, 학생, 교사, 사업가, 엔지니어, 의사 등 상대방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면 그 사람의 많은 부분을 미리 파악할 수 있게 됩니다.
‘나를 나 되게 하는 것’은 나이나 출생지, 졸업한 학교가 아니라 ‘내가 하고 있는 일’입니다. 내가 하는 일에 의해서 내 삶이 규정되기 때문입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내가 하는 일이 곧 나 자신’인 샘입니다.
그런데 내가 하고 있는 일을 말할 때 간혹 문제가 발생합니다. 내가 하는 일에 자부심을 느끼기도 하지만, 때로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열등감을 느낄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 사람은 나보다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이네’, ‘나보다 학식이 깊네’, ‘나보다 사회적 지위가 높네’ 등의 생각을 하면서 위축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직업을 보는 우리의 눈 때문입니다. 업적주의적인 사고를 가지고 사람의 직업을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주어진 일을 대하는 마음과 일함의 목적이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믿기 이전과 예수님을 믿은 이후의 삶이 구분된다고 말합니다. 과거에는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인 것처럼 마음대로 살았지만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 후에는 예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과거에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모든 일을 했지만, 이제는 주님을 위해서 일하는 인생으로 바뀌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난 후 내가 해 온 모든 일을 뒤집어야 할까요? 직업까지 바꾸어야 할까요? 사도 바울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부탁합니다.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고린도전서 7:20)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갑자기 직업을 바꾸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동안 최선을 다해서 일을 해 왔다면, 바로 그 일에 매진하라는 것입니다. 대신 일을 하는 목표와 의미, 이유를 바꾸라고 말합니다. 사람의 종노릇하면서 억지로 일하지 말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유자로서 즐겁게 맡겨진 일을 감당하라고 부탁하는 것입니다.
종교 개혁자 루터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가정주부는 주부로서, 구두수선공은 수선공으로서, 농부는 농부로서의 삶에 충실하라. 이것이 곧 소명이다.” 과거 우리의 직업이 생계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면, 이제는 직업을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섬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노동이란 이웃을 향한 봉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임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물론 때로는 우리가 직업을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이유로 지금까지 하고 있는 일을 다 바꾸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장로교의 시조인 칼빈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노동은 아주 선하고 신성한 것이다. 노동은 신체를 강건하게 해줄 뿐 아니라 나태에 의해 빚어지는 질병을 고쳐 준다. 이 세상에서 노동자는 신 하나님을 가장 많이 닮은 자라고 할 수 있다. 노동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이다.”

‘노동’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매일 하는 일과 노동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할까요? 성경은 두 가지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부정적인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긍정적인 입장입니다. 우리는 부정적인 관점에서 일과 노동을 해석할 때가 많습니다. 바로 그런 관점 때문에 일과 노동이 즐겁지 않은 것입니다.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창세기 3:19)

이것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죄를 지은 후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이 아름다운 에덴동산에서 단 하나 금지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었으니, 이제는 너희가 수고하고 땀 흘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7절은 더 구체적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창세기 3:17)

수고하지 않으면 먹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수고하고 땀 흘리는 것이 마치 죄가(罪價)를 갚는 것으로, 죄에 대한 징계로 말씀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이와 같은 부정적인 입장에서 노동을 바라보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것, 어쩔 수 없이 주어진 것으로 말입니다.

노동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사명이자 축복입니다.

성경을 읽어 보면 노동의 긍정성을 보여 주는 개념이 더 중요하게 나타남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일과 노동은 인간이 타락한 후에 생긴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네가 죄를 지었으니 죄의 값을 치러야 한다”는 말씀 때문에 노동이 생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죄를 짓기 이전에 하나님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기 위해서 노동을 주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창세기 2:15)

하나님은 친히 만드신 에덴동산을 사람에게 맡기셨습니다. 동산지기로 그들을 임명하신 것입니다. 그곳에서 그들이 해야 할 일은 동산을 경작하며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경작하라’는 것은 땅을 일구라는 것이고, ‘지키라’는 것은 동산을 잘 관리하고 보존하며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인간이 죄를 짓기 이전에 이미 인간에게 노동을 주셨습니다. 수고하고 땀 흘리는 것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왜 노동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일까요?
여기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친히 일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첫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하나님은 일하셨습니다. 성경에는 ‘만들다’는 의미의 단어, ‘바라’와 ‘아싸’가 반복됩니다. ‘바라’는 하나님께만 사용하는 단어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또 하나님과 인간 모두에게 사용되는 동사 ‘아싸’는 하나님이 만드신 것을 인간도 만들 수 있다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특별히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의 과정을 아주 섬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세기 2:7)

하나님은 마치 조각가처럼 흙으로 사람을 빚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습니다. 그랬더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습니다. 여기에 나타난 동사 ‘지으시니’, ‘불어넣으시니’는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셨다는 의미이자 하나님이 일하셨음을 보여 주는 단어입니다. 이것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성경은 일하는 것을 결코 부정적인 뜻으로만 표현하지 않습니다.
이미 일하셨던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할 일을 맡기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노동관입니다. ‘일하고 수고하는 것은 복되고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메시지에도 일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동물과 사람을 만드시고 그들을 각각 축복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축복의 말씀이 다릅니다. 동물에게 주어진 축복의 내용은 “생육하라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였습니다. 번식과 생식을 위한 일에 동물의 세계는 집중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인간에게는 동물에게 주신 축복에 새로운 축복을 더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1:28)

전반부 축복은 동물에게 주신 것과 동일합니다. 그런데 이어 ‘정복하라’, ‘다스리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것은 다른 생물들과 달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세계를 인간에게 맡기시고, 그 세계를 잘 이끌어 나가야 할 청지기의 직분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지구촌의 생태학적인 위기를 해결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곳을 우리에게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아름다운 세계를 아름답게 보존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여러 동물들이 있는 곳으로 이끌고 오십니다. 아담은 독수리, 토끼, 곰, 호랑이 등 각종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 줍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하나님의 지성과 지혜를 가진 인간에게 이 땅의 모든 것을 좋게 나누고 잘 이끌어 가도록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들에, ‘좋다’는 감동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만드신 피조물들을 보시며 매일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보기에 좋구나.”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 좋은 곳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이 선합니다. 아름답습니다. 조화롭습니다. 이것은 창조 이전의 세계와 비교하면 매우 놀라운 변화입니다.
창조 이전의 세계는 어떠했습니까? 창세기 1장 1절과 2절에는 창조 전을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고 기록합니다. 한마디로 무질서 상태입니다. 바로 이 카오스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갑니다. “빛이 있으라.” 하나님의 말씀은 흑암을 빛의 세계로 바꾸었습니다. 무질서와 혼돈이 우주의 아름다움과 조화로, 카오스가 코스모스로 변화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루하루 창조의 사역 끝에 “보기에 좋다”고 말씀하시고, 마지막 날 모든 창조물의 정점에 있는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보기에 심히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피조 세계를 맡기시면서, “내가 일했으니 너도 일하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이 땅에 있는 것들을 관리하며 이끌어 가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이원론이 아니라 일원론입니다. 기독교는 “육체는 악하고 영은 선하다. 세상일은 세속적이고 교회 일은 거룩하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도 만드시고 육체도 만드신 분이며, 교회도 만드시고 세상도 만드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평일은 세속적이고 주일은 거룩하다.” 하나님은 이렇게도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구약 시대에 안식일을 정하실 때에는 이런 말씀을 하셨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다음부터는 모든 날이 다 거룩한 하나님의 날이 되었습니다.
교회에 나와서 봉사하며 섬기는 것은 물론 소중한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지만 직장에서, 학교에서 일하고 공부하는 것도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에 나가서 수고하고 땀 흘릴 때, 하나님이 당신이 만드신 것을 보시며 기뻐하셨던 것처럼 우리 마음속에도 ‘보기에 좋구나’하는 감탄이 있어야 합니다. 그랬을 때 일하는 것이 우리에게 기쁨이 되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인간답게, 내가 나답게 됩니다.
시편에는 수고하는 것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시편 128:2)

땀 흘린 사람이 먹고 마실 수 있고,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주의 자녀가 가져야 할 태도입니다.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일하고 있습니까? 억지로 합니까? 아니면 감사하면서 합니까? 어쩌다가 내가 이런 일을 하게 되었는가 탄식하면서 일합니까? 아니면 작은 일이라도 하나님의 소명이라고 생각하면서 하십니까? 가정주부입니까? 교회에 열심히 나오는 것은 귀한 일이지만 만약 모든 시간을 교회에만 쏟아부어서 가정일을 소홀히 한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학생입니까? 학교 가는 것보다 교회 오는 시간이 더 많은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교사입니까? 학생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지 못하면서 교회에 나와서는 스스로 ‘괜찮은 사람’이라고 주장한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직장인입니까? 정치인입니까? 기업가입니까? 맡겨진 일, 하나님이 보내신 자리에서 나는 충성을 다하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먼저 내가 하는 일을 자랑스럽게 여기십시오. 하나님이 내게 소중한 일을 맡겨 주신 것을 확인하고, 그 일을 기쁨으로 감당하는 것에서부터 노동에 대한 것이 바르게 정립됩니다.
일을 하며 땀 흘리는 것,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고 축복입니다. 수고하고 일하면서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다. 하나님이 만드시고 보기에 좋았다고 하신 그 놀라운 일을 나도 할 것이다’라고 다짐하며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Connection Card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