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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영혼을 파는 사람들

열왕기상 21: 20 ~ 21

김지철 목사

2014.05.25

지도자의 역할은 매우 중요합니다.

‘내가 리더다. 내가 지도자다’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요즘처럼 힘들고 부끄러웠던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위기가 다가올 때 지도자의 역할은 너무나 중요한데, 지도자들이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양의 유가, 논어와 맹자는 인간의 자기 수양에 대해서 여러 좋은 이야기를 해 줍니다. 특별히 정치철학에 대한 중요한 제안을 해 주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공자가 자장에게 가르쳐 준 ‘지도자가 물리쳐야 할 네 가지 악’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첫째, 일을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은 채 엄벌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도자의 잔혹함이라고 말합니다. 오만하고 관용이 부족하여 아랫사람을 잔인하게 다루는 것은 지도자가 피해야 하는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일을 실행함에 있어서 경계할 점을 미리 알려주지 않고 성공만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도자의 횡포라고 말합니다. 일의 핵심은 전수해 주지 않으면서 잘못의 책임을 아랫사람에게 돌리는 악인 것입니다. 셋째, 지시는 늦게 하고 일의 성취는 사납게 독촉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도자의 도둑질이라고 말합니다. 일이 안되면 책임을 뒤집어씌우고 다행히 결과가 좋으면 자기의 공으로 삼으니 도적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마땅히 주어야 할 것을 생색을 내면서 주는 것입니다. 이런 자는 지도자가 아니라 창고지기에 불과하다고 공자는 말합니다.
2500년 전의 이 이야기는 오늘 우리의 삶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지도자입니까? 좋은 지도자입니까, 아니면 못된 지도자입니까? 우리 자신을 되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공자의 가르침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지도자상을 제시합니다. 마지막 판단 기준이 사람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내면의 세계를 들여다보라고 합니다. 동시에 시간을 만드신 하나님, 역사를 만드신 하나님의 평가 기준 앞에 바르게 설 수 있어야 좋은 지도자가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신앙은 어떤 관점에서 지도자를 평가할까요? 세상적으로 얼마나 큰 업적을 만들었는지도, 또 어떤 프로젝트를 행했는지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우선적인 것이 있습니다. 바로 사람들의 눈이 아닌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지도자인가, 하나님의 마음을 진노하게 만든 지도자인지를 판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아합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한 왕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20절 말씀에 기록되었듯이 아합 왕은 이스라엘의 역대왕 중에 가장 못된 왕이었습니다. 선지자 엘리야는 하나님의 눈으로 아합의 잘못된 모습을 꾸중하고 있습니다.

… 네가 네 자신을 팔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열왕기상 21:20)

“아합아, 네가 네 자신을 팔아먹었구나. 인격도 팔아먹고 자존심도 팔아먹고 왕으로서 해야 할 역할까지 모두 팔아먹었구나. 그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을 행한 모습과도 같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자기됨의 모습을 잃어버린 이스라엘 왕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자기 자신을 팔아넘기는 것, 그것은 하나님의 시선과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아합은 무엇을 팔아먹었습니까? 자신의 직분을 팔아먹었습니다. 자존심도 팔아먹었고, 마지막에는 인격까지 팔아먹었습니다.
매매춘은 돈을 받고 자기 몸을 성적 노리개로 내놓는 것입니다. 말씀은 이것이 나쁜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또한 매관매직, 즉 돈이나 재물을 받고 벼슬을 파는 것은 부패한 관료들이 돈을 버는 수단이었고, 관료들이 부패한 고리를 이어갈 수 있었던 악한 행위였습니다. 이로 인해 백성들이 신음하고 나라 전체가 도탄에 빠지는 위험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이런 말이 하나 생겼습니다. 관피아, 관료와 마피아를 합한 말입니다. 정치적으로 승리를 한 정권이 자기 사람들에게 주는 경제적 혹은 신분의 포상으로 자기 사람들을 곳곳에 심어 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이나믹이 상실된 관료의 부패 고리를 일컫는 말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신조어가 생겼습니다. 종피아입니다. 종교인과 마피아를 합한 말입니다. 종교인이 권력에 아부합니다. 종교인이 돈과 재물에 눈이 어두워 종교의 이름을 빌어 비즈니스를 하는 것입니다. 돈과 재물을 위해 종교의 이름 때로는 하나님의 이름까지 들먹이는 것입니다. 종교와 신앙의 본질은 뒷전으로 하고, 결국 어떻게 부를 축적하고 권력에 가까이 갈 수 있을까 하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공동체 앞에, 백성들 앞에 서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국민들을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이 지도자 됨의 올바른 모습입니다. 이것을 가장 잘 깨닫는 사람들이 누굴까요? 바로 정치인들입니다. 무엇보다 선거철이 다가오면 정치인들은 국민들을 위한 수많은 약속을 내놓습니다. 왜일까요? 국민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여론이 자신의 당락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막상 붙고 나면 태도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뻔뻔해지고 국민들을 안중에 두지 않는 것입니다. 권력만 차지하면 국민이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고민하며 아파하는지 외면합니다. 왜 그렇게 될까요? 내면의 자기 훈련이 안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수양이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삶의 목표와 방향, 가치관이 일시적으로, 간헐적으로 존재합니다. 그때뿐인 것입니다. 자신의 삶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목표와 방향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지도자들이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채 서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조변석개로 바뀌지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힘 있는 자 앞에서는 잔뜩 주눅 들어 그들에게 아첨하고, 반대로 힘 없는 자 앞에서는 오만방자해지고 그들을 억누르려고 하지 말라고 성경은 끊임없이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아합은 도대체 어떤 일을 행했기에 하나님이 ‘너 자신을 팔아넘겼다’, ‘악하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아합은 여호와 신앙을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아합을 보시며, “너는 자존심도 없냐? 인격도, 왕으로서의 체통도 없냐? 너는 왜 왕이 되었느냐?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느냐?” 묻고 계십니다. 죄의 노예, 탐욕의 종이 된 아합을 안타깝게 꾸중하시는 것입니다.
아합 왕은 북이스라엘의 가장 못되고 악한 왕으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방 여자였던 아내 이세벨에게 사로잡혀서 여호와 신앙을 내팽개쳤습니다. 대신 이방신 바알과 아세라 신에게 자신을 팔아넘겼습니다. 그동안 갖고 있었던 신앙의 지조를 순식간에 바알신에게 넘겨버린 것입니다. 성경은 그 모습을 열왕기상 21장 25절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로부터 아합과 같이 그 자신을 팔아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한 자가 없음은 그를 그의 아내 이세벨이 충동하였음이라 (열왕기상 21:25)

아합은 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만 이런 악을 행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온 백성을 우상숭배로 몰아갔습니다. 이것은 매우 큰 죄악이었습니다.
지도자가 왜 중요할까요? 자기만 망가지고 파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남까지 덩달아 파멸시킵니다. 공동체를 무너지게 합니다. 아합은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양심의 가책도 없이 다 죽여 버립니다. 엘리야 선지자마저 죽이려 했던 왕이 바로 아합 왕이었습니다.
또 그는 탐욕에 취해 있었습니다. 재물에 눈이 어두워 왕으로서의 직책을 팔아넘겼습니다.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남의 것을 탈취했습니다. 그것도 거짓말과 속임수로 말입니다.
왕궁 옆에서 포도원을 일구고 있던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 나봇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합은 나봇에게 가서 포도원을 달라고 했지만 나봇이 거절하자 그를 죽이기로 결정합니다. 그래서 거짓 증인들을 내세웁니다. 나봇이 하나님을 저주한다, 나봇이 왕을 저주한다는 거짓 증거로 그에게 변명할 기회도 주지 않고 성읍 밖으로 끌고 가 돌로 쳐 죽였습니다. 그리고는 포도원을 대신 차지했습니다.
백성을 위해 있는 것이 권력 아닙니까? 백성들을 돌아보기 위해서 있는 것이 권력자 아닙니까? 그런데 그는 권력으로 자기 욕심을 채웠습니다. 권력자가 되어 백성들을 억눌렀습니다. 권력에 돈과 재물까지 더하려고 악과 불의를 행한 사람이 바로 아합 왕이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악을 행했습니다. 왕의 이름으로 악을 행했다는 것이 그가 보여준 최악의 모습입니다.
세상에는 유혹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향한 마음 속 욕망들이 있습니다. 욕망 자체는 축복입니다. 돈을 더 많이 벌고 싶다, 더 잘살고 싶다, 더 높은 지위에 오르고 싶다, 인생을 풍요롭게 꾸미고 싶다는 등의 바람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들을 바라면서 자기 절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웃을 배려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욕망은 탐욕이 되어 우리를 죄의 노예로 만듭니다. 그러한 지도자를 갖는 공동체는 얼마나 신음을 하게 되겠습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악한 욕망을 때로 하나님이 주신 비전이자 꿈이라고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을 바르게 확인하지 못하면 잘못된 길로 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요? 내가 무슨 가치관을 갖고 있는지, 이 꿈이 가지고 있는 목표가 무엇인지, 정말 하나님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내 욕심과 내 만족을 위한 것인지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부화뇌동하게 됩니다. 이 사람이 이렇게 말하면 솔깃하여 마음이 쏠리고, 또 저 사람이 저렇게 말하면 또 거기에 솔깃하여 처음 가진 사명을 잊는 지도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 바른 가치관이 생깁니다.

어디서부터 우리의 환부를 도려내고 어떻게 다시 새로운 가치관을 세울 수 있을까요? 물론 시스템이 중요합니다. 제도가 중요합니다. 환경, 여건 모두 중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왜 좋은 환경에도 문제가 생깁니까? 문제는 사람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의 생각과 가치관, 또 목표가 무엇인지에 따라 그 공동체가 살아날 수도 죽을 수도 있습니다.
주후 1세기에 요하난 벤 자카이라는 유명한 랍비가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를 ‘지혜의 아버지’, ‘우리를 살린 민족의 아버지’라고 예찬합니다. 그는 일상적인 삶을 소중히 여기며 매일을 충실히 살았던 사람으로, 로마에 저항하는 유대인들을 향해서 지금은 저항하고 반란할 때가 아니라고 지적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래서 열심당원들에게는 비애국적, 반애국적인 인물로 치부되기도 한 사람입니다.
AD 70년대 초반에 유대 군대가 마지막 요새였던 맛사다에서 저항하다가 완전히 몰사합니다. 이때 랍비는 목숨을 걸고 로마 장군 베스파시아누스를 만나 한 가지 요청을 합니다. “장군이여, 당신은 앞으로 로마의 황제가 될 것입니다. 내게 소원이 하나 있는데 작은 학교를 하나 세울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
예루살렘을 온전하게 해달라거나 이스라엘 백성을 완전히 살려달라고 부탁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요청은 작은 유대 랍비 학교를 만들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장군은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허락하였습니다.
이 작은 랍비 학교는 어둡고 절망 속에 빠진 유대인들에게 희망의 등불이 되었습니다. 지중해 근처 야브네에 있는 토라학교는 이렇게 시작이 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유대의 정신세계가 싹트기 시작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지금까지 중요한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토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랍비, 말씀을 가르치는 선생님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식이 아니라 지혜를 가르치는 선생님들이 필요합니다. 인생의 가치관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변화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벤 자카이는 자기가 해야 할 오늘일에 충실할 것을 가르쳤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메시아가 왔다고 말할 때 묘목을 손에 쥐고 있다면, 먼저 그것을 심고 메사아를 맞으러 가야 한다.”
또한 그에 관한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가 죽음을 앞두고 있었을 때, 제자들이 찾아와 마지막으로 자신들에게 축복의 말씀을 해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때 그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말을 합니다. “너희는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그의 이러한 말에 제자들은 실망하여 물었습니다. “이것이 전부입니까?” 그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정말 그렇게 할 수 있느냐? 사람은 뭔가 잘못을 할 때에 아무도 나를 보지 않기를 바라며 조심하고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느냐. 정작 하나님이 나를 지켜보고 계신다는 그 중요한 사실은 잊은 채 말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두려워한다고 하면서 우리는 얼마나 우리 마음대로 합니까? 보이는 인간은 별것 아니라고 하면서, 우리는 그런 인간에게 들킬까봐 얼마나 조심합니까? 그는 바로 그 마음을 지적한 것입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듯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자존심답게 살아가십시오.

오늘의 위기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함부로 나 자신을 팔아넘기고 있는 것입니다. 인격을, 자존심을, 위치와 직분을 팔아넘기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재물 때문에, 성적쾌락 때문에, 좀 더 유명한 인사가 되고 싶은 마음 때문에,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내가 더 괜찮은 인간임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권력과 신분 상승에 대한 욕망 때문입니다.
왜 우리는 이 시대에 다시금 하나님 앞에 서야 되는 것일까요? 왜 우리는 하나님께 다시 예배해야 하는 것일까요? 이것이 왜 회복이 되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우리의 궁극적이고 마지막 진정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분만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살아계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이 나 전체를 바르게 볼 수 있는 진정한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그분 앞에 서야 내 추하고 악하고 탐욕스러운 모습을 바르게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시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께 이야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바아버지이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지켜보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곧 나의 자존심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하나님의 자존심입니다. 이 시대 우리에게 맡겨진 일들, 감당해야 할 역할들을 오늘 그 자리에서 제대로 행할 때에 역사가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어떤 직분을 맡았습니까? 어떤 지위를 가지고 있습니까? 그 일을 감사함으로 행하며 하나님 앞에서 있는 모습 그대로 존재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진정한 지도자로, 하나님이 쓰실 만한 존재로 세워주실 것입니다. 성도님들 모두가 이렇게 쓰임 받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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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21: 20 ~ 21

20

아합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 대적자여 네가 나를 찾았느냐 대답하되 내가 찾았노라 네가 네 자신을 팔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21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재앙을 네게 내려 너를 쓸어 버리되 네게 속한 남자는 이스라엘 가운데에 매인 자나 놓인 자를 다 멸할 것이요

지도자의 역할은 매우 중요합니다.

‘내가 리더다. 내가 지도자다’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요즘처럼 힘들고 부끄러웠던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위기가 다가올 때 지도자의 역할은 너무나 중요한데, 지도자들이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양의 유가, 논어와 맹자는 인간의 자기 수양에 대해서 여러 좋은 이야기를 해 줍니다. 특별히 정치철학에 대한 중요한 제안을 해 주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공자가 자장에게 가르쳐 준 ‘지도자가 물리쳐야 할 네 가지 악’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첫째, 일을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은 채 엄벌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도자의 잔혹함이라고 말합니다. 오만하고 관용이 부족하여 아랫사람을 잔인하게 다루는 것은 지도자가 피해야 하는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일을 실행함에 있어서 경계할 점을 미리 알려주지 않고 성공만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도자의 횡포라고 말합니다. 일의 핵심은 전수해 주지 않으면서 잘못의 책임을 아랫사람에게 돌리는 악인 것입니다. 셋째, 지시는 늦게 하고 일의 성취는 사납게 독촉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도자의 도둑질이라고 말합니다. 일이 안되면 책임을 뒤집어씌우고 다행히 결과가 좋으면 자기의 공으로 삼으니 도적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마땅히 주어야 할 것을 생색을 내면서 주는 것입니다. 이런 자는 지도자가 아니라 창고지기에 불과하다고 공자는 말합니다.
2500년 전의 이 이야기는 오늘 우리의 삶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지도자입니까? 좋은 지도자입니까, 아니면 못된 지도자입니까? 우리 자신을 되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공자의 가르침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지도자상을 제시합니다. 마지막 판단 기준이 사람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내면의 세계를 들여다보라고 합니다. 동시에 시간을 만드신 하나님, 역사를 만드신 하나님의 평가 기준 앞에 바르게 설 수 있어야 좋은 지도자가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신앙은 어떤 관점에서 지도자를 평가할까요? 세상적으로 얼마나 큰 업적을 만들었는지도, 또 어떤 프로젝트를 행했는지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우선적인 것이 있습니다. 바로 사람들의 눈이 아닌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지도자인가, 하나님의 마음을 진노하게 만든 지도자인지를 판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아합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한 왕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20절 말씀에 기록되었듯이 아합 왕은 이스라엘의 역대왕 중에 가장 못된 왕이었습니다. 선지자 엘리야는 하나님의 눈으로 아합의 잘못된 모습을 꾸중하고 있습니다.

… 네가 네 자신을 팔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열왕기상 21:20)

“아합아, 네가 네 자신을 팔아먹었구나. 인격도 팔아먹고 자존심도 팔아먹고 왕으로서 해야 할 역할까지 모두 팔아먹었구나. 그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을 행한 모습과도 같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자기됨의 모습을 잃어버린 이스라엘 왕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자기 자신을 팔아넘기는 것, 그것은 하나님의 시선과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아합은 무엇을 팔아먹었습니까? 자신의 직분을 팔아먹었습니다. 자존심도 팔아먹었고, 마지막에는 인격까지 팔아먹었습니다.
매매춘은 돈을 받고 자기 몸을 성적 노리개로 내놓는 것입니다. 말씀은 이것이 나쁜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또한 매관매직, 즉 돈이나 재물을 받고 벼슬을 파는 것은 부패한 관료들이 돈을 버는 수단이었고, 관료들이 부패한 고리를 이어갈 수 있었던 악한 행위였습니다. 이로 인해 백성들이 신음하고 나라 전체가 도탄에 빠지는 위험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이런 말이 하나 생겼습니다. 관피아, 관료와 마피아를 합한 말입니다. 정치적으로 승리를 한 정권이 자기 사람들에게 주는 경제적 혹은 신분의 포상으로 자기 사람들을 곳곳에 심어 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이나믹이 상실된 관료의 부패 고리를 일컫는 말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신조어가 생겼습니다. 종피아입니다. 종교인과 마피아를 합한 말입니다. 종교인이 권력에 아부합니다. 종교인이 돈과 재물에 눈이 어두워 종교의 이름을 빌어 비즈니스를 하는 것입니다. 돈과 재물을 위해 종교의 이름 때로는 하나님의 이름까지 들먹이는 것입니다. 종교와 신앙의 본질은 뒷전으로 하고, 결국 어떻게 부를 축적하고 권력에 가까이 갈 수 있을까 하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공동체 앞에, 백성들 앞에 서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국민들을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이 지도자 됨의 올바른 모습입니다. 이것을 가장 잘 깨닫는 사람들이 누굴까요? 바로 정치인들입니다. 무엇보다 선거철이 다가오면 정치인들은 국민들을 위한 수많은 약속을 내놓습니다. 왜일까요? 국민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여론이 자신의 당락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막상 붙고 나면 태도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뻔뻔해지고 국민들을 안중에 두지 않는 것입니다. 권력만 차지하면 국민이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고민하며 아파하는지 외면합니다. 왜 그렇게 될까요? 내면의 자기 훈련이 안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수양이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삶의 목표와 방향, 가치관이 일시적으로, 간헐적으로 존재합니다. 그때뿐인 것입니다. 자신의 삶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목표와 방향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지도자들이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채 서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조변석개로 바뀌지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힘 있는 자 앞에서는 잔뜩 주눅 들어 그들에게 아첨하고, 반대로 힘 없는 자 앞에서는 오만방자해지고 그들을 억누르려고 하지 말라고 성경은 끊임없이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아합은 도대체 어떤 일을 행했기에 하나님이 ‘너 자신을 팔아넘겼다’, ‘악하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아합은 여호와 신앙을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아합을 보시며, “너는 자존심도 없냐? 인격도, 왕으로서의 체통도 없냐? 너는 왜 왕이 되었느냐?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느냐?” 묻고 계십니다. 죄의 노예, 탐욕의 종이 된 아합을 안타깝게 꾸중하시는 것입니다.
아합 왕은 북이스라엘의 가장 못되고 악한 왕으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방 여자였던 아내 이세벨에게 사로잡혀서 여호와 신앙을 내팽개쳤습니다. 대신 이방신 바알과 아세라 신에게 자신을 팔아넘겼습니다. 그동안 갖고 있었던 신앙의 지조를 순식간에 바알신에게 넘겨버린 것입니다. 성경은 그 모습을 열왕기상 21장 25절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로부터 아합과 같이 그 자신을 팔아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한 자가 없음은 그를 그의 아내 이세벨이 충동하였음이라 (열왕기상 21:25)

아합은 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만 이런 악을 행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온 백성을 우상숭배로 몰아갔습니다. 이것은 매우 큰 죄악이었습니다.
지도자가 왜 중요할까요? 자기만 망가지고 파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남까지 덩달아 파멸시킵니다. 공동체를 무너지게 합니다. 아합은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양심의 가책도 없이 다 죽여 버립니다. 엘리야 선지자마저 죽이려 했던 왕이 바로 아합 왕이었습니다.
또 그는 탐욕에 취해 있었습니다. 재물에 눈이 어두워 왕으로서의 직책을 팔아넘겼습니다.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남의 것을 탈취했습니다. 그것도 거짓말과 속임수로 말입니다.
왕궁 옆에서 포도원을 일구고 있던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 나봇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합은 나봇에게 가서 포도원을 달라고 했지만 나봇이 거절하자 그를 죽이기로 결정합니다. 그래서 거짓 증인들을 내세웁니다. 나봇이 하나님을 저주한다, 나봇이 왕을 저주한다는 거짓 증거로 그에게 변명할 기회도 주지 않고 성읍 밖으로 끌고 가 돌로 쳐 죽였습니다. 그리고는 포도원을 대신 차지했습니다.
백성을 위해 있는 것이 권력 아닙니까? 백성들을 돌아보기 위해서 있는 것이 권력자 아닙니까? 그런데 그는 권력으로 자기 욕심을 채웠습니다. 권력자가 되어 백성들을 억눌렀습니다. 권력에 돈과 재물까지 더하려고 악과 불의를 행한 사람이 바로 아합 왕이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악을 행했습니다. 왕의 이름으로 악을 행했다는 것이 그가 보여준 최악의 모습입니다.
세상에는 유혹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향한 마음 속 욕망들이 있습니다. 욕망 자체는 축복입니다. 돈을 더 많이 벌고 싶다, 더 잘살고 싶다, 더 높은 지위에 오르고 싶다, 인생을 풍요롭게 꾸미고 싶다는 등의 바람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들을 바라면서 자기 절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웃을 배려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욕망은 탐욕이 되어 우리를 죄의 노예로 만듭니다. 그러한 지도자를 갖는 공동체는 얼마나 신음을 하게 되겠습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악한 욕망을 때로 하나님이 주신 비전이자 꿈이라고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을 바르게 확인하지 못하면 잘못된 길로 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요? 내가 무슨 가치관을 갖고 있는지, 이 꿈이 가지고 있는 목표가 무엇인지, 정말 하나님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내 욕심과 내 만족을 위한 것인지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부화뇌동하게 됩니다. 이 사람이 이렇게 말하면 솔깃하여 마음이 쏠리고, 또 저 사람이 저렇게 말하면 또 거기에 솔깃하여 처음 가진 사명을 잊는 지도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 바른 가치관이 생깁니다.

어디서부터 우리의 환부를 도려내고 어떻게 다시 새로운 가치관을 세울 수 있을까요? 물론 시스템이 중요합니다. 제도가 중요합니다. 환경, 여건 모두 중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왜 좋은 환경에도 문제가 생깁니까? 문제는 사람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의 생각과 가치관, 또 목표가 무엇인지에 따라 그 공동체가 살아날 수도 죽을 수도 있습니다.
주후 1세기에 요하난 벤 자카이라는 유명한 랍비가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를 ‘지혜의 아버지’, ‘우리를 살린 민족의 아버지’라고 예찬합니다. 그는 일상적인 삶을 소중히 여기며 매일을 충실히 살았던 사람으로, 로마에 저항하는 유대인들을 향해서 지금은 저항하고 반란할 때가 아니라고 지적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래서 열심당원들에게는 비애국적, 반애국적인 인물로 치부되기도 한 사람입니다.
AD 70년대 초반에 유대 군대가 마지막 요새였던 맛사다에서 저항하다가 완전히 몰사합니다. 이때 랍비는 목숨을 걸고 로마 장군 베스파시아누스를 만나 한 가지 요청을 합니다. “장군이여, 당신은 앞으로 로마의 황제가 될 것입니다. 내게 소원이 하나 있는데 작은 학교를 하나 세울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
예루살렘을 온전하게 해달라거나 이스라엘 백성을 완전히 살려달라고 부탁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요청은 작은 유대 랍비 학교를 만들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장군은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허락하였습니다.
이 작은 랍비 학교는 어둡고 절망 속에 빠진 유대인들에게 희망의 등불이 되었습니다. 지중해 근처 야브네에 있는 토라학교는 이렇게 시작이 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유대의 정신세계가 싹트기 시작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지금까지 중요한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토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랍비, 말씀을 가르치는 선생님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식이 아니라 지혜를 가르치는 선생님들이 필요합니다. 인생의 가치관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변화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벤 자카이는 자기가 해야 할 오늘일에 충실할 것을 가르쳤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메시아가 왔다고 말할 때 묘목을 손에 쥐고 있다면, 먼저 그것을 심고 메사아를 맞으러 가야 한다.”
또한 그에 관한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가 죽음을 앞두고 있었을 때, 제자들이 찾아와 마지막으로 자신들에게 축복의 말씀을 해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때 그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말을 합니다. “너희는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그의 이러한 말에 제자들은 실망하여 물었습니다. “이것이 전부입니까?” 그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정말 그렇게 할 수 있느냐? 사람은 뭔가 잘못을 할 때에 아무도 나를 보지 않기를 바라며 조심하고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느냐. 정작 하나님이 나를 지켜보고 계신다는 그 중요한 사실은 잊은 채 말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두려워한다고 하면서 우리는 얼마나 우리 마음대로 합니까? 보이는 인간은 별것 아니라고 하면서, 우리는 그런 인간에게 들킬까봐 얼마나 조심합니까? 그는 바로 그 마음을 지적한 것입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듯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자존심답게 살아가십시오.

오늘의 위기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함부로 나 자신을 팔아넘기고 있는 것입니다. 인격을, 자존심을, 위치와 직분을 팔아넘기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재물 때문에, 성적쾌락 때문에, 좀 더 유명한 인사가 되고 싶은 마음 때문에,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내가 더 괜찮은 인간임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권력과 신분 상승에 대한 욕망 때문입니다.
왜 우리는 이 시대에 다시금 하나님 앞에 서야 되는 것일까요? 왜 우리는 하나님께 다시 예배해야 하는 것일까요? 이것이 왜 회복이 되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우리의 궁극적이고 마지막 진정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분만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살아계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이 나 전체를 바르게 볼 수 있는 진정한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그분 앞에 서야 내 추하고 악하고 탐욕스러운 모습을 바르게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시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께 이야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바아버지이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지켜보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곧 나의 자존심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하나님의 자존심입니다. 이 시대 우리에게 맡겨진 일들, 감당해야 할 역할들을 오늘 그 자리에서 제대로 행할 때에 역사가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어떤 직분을 맡았습니까? 어떤 지위를 가지고 있습니까? 그 일을 감사함으로 행하며 하나님 앞에서 있는 모습 그대로 존재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진정한 지도자로, 하나님이 쓰실 만한 존재로 세워주실 것입니다. 성도님들 모두가 이렇게 쓰임 받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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