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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할 이유를 지닌 사람들 – 로마서 강해 13 –

로마서 3: 27 ~ 31

김지철 목사

2015.09.06

자기 사랑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시 한 편을 소개하겠습니다. 시인 이정하가 쓴 ‘자기 사랑에 빠져 보라’는 시입니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과 사랑에 빠져 보라.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하고 싶은 일들을
먼저 자신과 함께 해보라.
근사한 음악을 골라 줄 사람이 필요하면
스스로 안내 책을 읽고 음악을 골라 보라.
혼자 영화를 보고 자신과 함께 즐겨라.
자신에게 도취되라.
자기 자신과 사랑에 빠질 수 없다면
다른 누구와 함께 있어도 즐거움을 느낄 수 없고,
깊은 사랑에 빠질 수 없다.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이 쉬운 것 같아도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시인이 말하는 자기 사랑은,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미소년 나르시스처럼 자기애에 빠져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랑이 결코 아닙니다. 자기를 사랑하되 바르게 사랑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바르게 사랑한다는 것은 인생을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시작이 됩니다. 이때의 자기 사랑이란 자존감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 자기 사랑이나 자존감은 저절로 생기지 않습니다. 스스로 보기에도 자신이 사랑받을 만하다고 여겨져야 자기 사랑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가장 먼저 거울 앞에 서는 것입니다. 과연 나는 사랑받을 만한 존재인지를 암묵적으로 묻는 것입니다. 또한 내가 사랑을 할 만한 얼굴과 눈빛을 지니고 있는지 살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매일 얼굴과 몸을 가꾸어 나가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이런 육체의 것들만이 아니라 영혼을 보는 거울도 있습니다. 마음의 거울, 생각의 거울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대면하면 내가 어떤 존재인지, 내가 어떻게 변해야 될는지 알게 됩니다. 오늘도 우리는 예배를 드리면서 나 자신이 사랑할 만한 존재가 되는 것과 또 사랑받을 만한 존재로 성숙해 나가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확인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게 되면, 어느 순간부터 남을 탓하기 시작합니다. 조상을 탓하고 부모를 탓하고 환경을 탓하며 마음속에 있는 불평을 쏟아 놓습니다. 그런데 이런 남의 탓은 자기 사랑의 왜곡된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의 문제를 직시하고, 나의 잘못이 비난받는 것이 두려워 먼저 남의 탓을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 자신에 대한 비난을 피하기 위해 남을 비난하는 것입니다.
알코올중독에 빠졌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자존감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중독자가 된 것은 어린 시절 자신을 학대했던 부모님에 대한 기억이 여전히 자신을 못난 사람이라고 여기도록 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부모가 그에게 한 말은 “널 낳지 말았어야 했다”, “너만 없었으면 내 인생이 이렇게 되지 않았을 텐데…”였습니다. 어른이 된 후에도 이 말이 늘 마음을 억누르고 가슴을 파헤쳤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람이 “당신의 나이가 몇이냐”고 물었고, 그가 대답했습니다. “마흔 다섯 살입니다.” 그러자 이야기를 듣던 사람이 이렇게 말하며 나가 버렸습니다. “사십년 전 부모와 겪었던 일에서 당신은 아직까지도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군요.” 그런데 이 말이 알코올중독자에게 심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삼사십년이 지났음에도 자신은 아직도 그 옛날 일에 매달려서 삶을 망가뜨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스스로가 매우 한심하게 여겨졌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자신을 귀히 여기며 존중하고 사랑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의 문제를 남의 탓으로 돌리면서 여기까지 왔습니까? 세월이 한참 지났는데도 그 사건, 그 사람을 떠올리며 탄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남을 탓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가져야 할 모습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가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라고 물으면 나 자신에 대해 5분 동안 이야기할 거리가 있습니까? 보통은 자신의 이름과 가족, 직장이나 스펙 등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보다 더 중요하고 나를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있지 않을까요? 내가 좋아했던 일, 내가 하고 싶었던 일, 가치관, 앞으로의 계획 등으로 자신을 소개할 수 있다면 그것이 더 멋지고 아름답지 않을까요?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자기를 소개해 보라는 말에 두 사람이 다음처럼 대답을 합니다. 한 여자는 “저는 그냥 가정주부예요” 하고 끝냅니다. 또 다른 여자는 “저는 세 아들을 키우고 있어요. 저는 전업주부예요. 저는 이 아이들의 어머니예요”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여러분은 누구에게 더 관심이 가십니까? 이번에는 남자에게 물었습니다. 한 남자가 대답합니다. “저는 직장에 다니고 있어요.” 또 다른 남자가 말합니다. “제가 다니는 회사는 소망상사입니다. 저는 무역업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누구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으십니까?
저 사람은 자존감이 있구나, 자기가 하는 일을 좋아하고 있구나, 자기의 직업에 열정이 있구나 하는 느낌을 받아야 그 사람에게 호기심이나 관심이 생기고 대화를 더 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남에게 그런 느낌을 주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신이 스스로를 좋아하고 귀히 여겨야 합니다. 그래야 남도 나를 좋아하고 귀히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자랑의 대상을 바르게 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랑한다는 것은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자랑하게 됩니다. 그러니 가끔씩 자기 자랑하는 사람을 너무 흉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신에게 자랑스러운 것, 사랑스러운 것이 있기 때문에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면 자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선생님이 학생들을 사랑하면 학생들을 자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대한민국을 사랑하면 대한민국을 자랑하게 되고, 소망교회를 사랑하면 소망교회를 자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사랑하면 예수님을 자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평생에 예수님을 자랑해 본 적이 얼마나 됩니까? 전도라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내가 믿는 예수님이 이런 분이라고, 그리고 그 예수님 때문에 내가 여기까지 왔다고 고백하며 전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그것은 곧 우리가 갖고 있는 축복의 역사이고 믿음의 역사이고 하나님이 주신 복음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은 그 반대처럼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 (로마서 3:27)

바울은 ‘자랑할 데가 있을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말은 자랑하지 말라는 뜻일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단지 자랑의 대상을 제대로 정하라는 이야기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자랑하지 말라고 하면 입을 닫습니다. 겸손해야 한다는 생각에 자신을 감추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것은 바른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내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소중한 사람이 되었는지 표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착한 사람 콤플렉스가 있고 겸손함의 콤플렉스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그저 꾹꾹 눌러 놓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자신을 표현하는 것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자랑의 대상을 예수 그리스도로 두고 내 삶의 모습을 자신 있게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로 인해 십자가에 못 박혀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신 것과 그 예수님을 자랑하기 시작해야 참된 자랑이 내 안에서 싹트고 솟아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물론 잘못된 자랑은 있습니다. 나의 소유물, 나의 성취, 나의 잘난 행위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감추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를 자랑하게 될 때 생기는 위험성 때문입니다. 내가 누구인가를 보여 주기 원하는 것이 자기 자랑입니다. 그러나 나를 통하여 나를 자랑하는 순간, ‘나’라는 존재 자체가 남에게 의존되고 남에 의해 규정되고 맙니다.
자랑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남들에게 인정받기 원한다는 것입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남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시간과 정성을 쏟아붓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내가 자랑하는 것에 누군가 동조하고 칭찬을 덧붙이면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위로 올라갑니다. 하지만 반대로 누군가 나의 말을 비난하고 조롱하는 것처럼 느끼면 내리막길을 달리듯 아래로 떨어져 괴로워합니다. 나의 나됨을 다른 사람에 의해서 규정받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자랑을 하고 싶을 때, 나 자신을 내가 가진 것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명품 가방을 샀다고, 좋은 자동차를 몬다고 자랑합니다. 학벌을 자랑하고, 얼마나 큰 집에서 사는지 자랑합니다. 자녀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자랑합니다. 한두 번쯤 이러한 것들을 자랑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문제는 ‘나’라는 존재와 나의 ‘소유’가 일치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누군가 나를 업신여기면 어떻게 하나’ 하는 염려가 나를 붙잡기 때문에 자꾸만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 외적인 것들로 나를 치장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랑의 뒷면에는 나를 알아달라는, 관심 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칭찬받고 싶다는 속마음이 숨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일수록 마음이 약한 사람입니다. 때로는 콤플렉스와 열등감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물질이나 외적인 직분으로 자신을 대체하려는 인간 심리의 발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랑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바울이 “자랑할 데가 어디에 있느냐 있을 수 없느니라”고 말하며 자랑을 멈추게 했던 이유도 그것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그랬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 선택받은 백성이고, 율법을 가진 백성이고, 하나님의 약속의 표시로 할례를 받은 족속이라고 자랑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바울이 선언하는 것입니다. “네가 약속의 백성이면 약속을 지켜야 되지 않느냐? 율법을 받았으면 율법에 순종하며 살아야 하지 않느냐? 네가 선민이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만을 높이고 예배드려야 되지 않느냐? 그런 것은 하지 않으면서 외적인 것만 자랑하는 그런 자랑은 다 거짓 자랑이다!”
그래서 바울은 자랑은 하되 목표를 세우라고 이야기합니다. 목표를 세우지 않으면 그 자랑은 거짓 자랑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로마서 3:27∼28)

자랑할 것은 행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붙잡고 있는 소유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셔서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게 하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받게 하는 화목제물로 세우신 바로 그 예수님을 자랑하고 그 하나님을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의 법을 주셨습니다. 새로운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 길은 내가 수고하고 땀 흘리고 애써서 업적과 행위를 쌓으므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입니다. 이 약속의 선물을 생각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포기하시면서까지 사랑한 존재가 바로 나 자신이니,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깨달으며 하나님께 자랑과 경배를 올려 드리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31절에서 다음과 같이 우리를 가르칩니다.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전서 1:31)

자랑하려 한다면 주님 안에서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자랑하라’는 말 속에는 두 가지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는, 직접 목적어로써의 ‘주님’입니다. 즉 주님을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것을 자랑하지 말고 믿음의 길을 열어 주신 하나님을, 예수님을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 안에서’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생각할 때, 말할 때, 행동할 때의 모든 순간에 내가 주님 안에 있음을 깨닫고 주님이 내게 주신 축복을 기억하면서 삶의 모든 것들을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건강한 자의식이란 무엇일까요?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아도 내가 나인 것을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나는 저 사람보다 조금 더 가졌다’, ‘나는 저 사람보다 조금 더 건강하다’, ‘나는 저 사람보다 조금 더 높은 자리에 있다’는 것들로 나의 가치를 결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나인 그 자체로 소중하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나만의 독특한 가치가 있음을 인식하는 자의식이 건강한 자의식입니다. 그것은 어디로부터 배울 수 있습니까? 바로 예수님으로부터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최고의 자의식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아들로, 딸로 세우시고 나를 기뻐하시고 좋아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자의식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자랑한다는 말 속에는 ‘전적으로 신뢰한다’, ‘그 대상을 삶의 근거로 삼겠다’, ‘내 시간과 정성과 물질을 쏟아붓겠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주님을 자랑하며, 나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살아갑시다.

성경을 읽어보면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랑하고 싶어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너는 내 아들이다. 너는 내 딸이다” 하고 우리를 이 세상에 자랑하고 싶어 하십니다.

…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사무엘상 2:30)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를 높이느냐? 그렇다면 나도 너를 높이겠다. 네가 나를 존중하느냐? 그렇다면 나도 너를 존중하겠다. 네가 나를 자랑하느냐? 나도 너를 자랑하겠다.”
우리가 왜 그리스도에게로 다가가야 할까요? 왜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할까요?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고 자랑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고 자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만물을 만드신 창조주라고 고백하면, 하나님께서는 “너는 나의 형상으로 지어져 이 모든 것을 다스릴 나의 소중한 아들과 딸이다”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존중하십시오. 하나님을 자랑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자랑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순간에 우리는 자랑할 대상과 이유를 갖게 됩니다. 바로 하늘과 땅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우리의 연약함과 죄악을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그분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믿음의 길이 열렸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똑같이 믿음의 길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러므로 이 예수님을 자랑하고 하나님을 자랑하지 않을 수 없지 않겠습니까.
이 자랑할 이유를 갖게 될 때, 내가 얼마나 주님 안에서 소중한 존재인지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 나 자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십시오.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선언하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런 귀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시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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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3: 27 ~ 31

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29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30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31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자기 사랑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시 한 편을 소개하겠습니다. 시인 이정하가 쓴 ‘자기 사랑에 빠져 보라’는 시입니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과 사랑에 빠져 보라.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하고 싶은 일들을
먼저 자신과 함께 해보라.
근사한 음악을 골라 줄 사람이 필요하면
스스로 안내 책을 읽고 음악을 골라 보라.
혼자 영화를 보고 자신과 함께 즐겨라.
자신에게 도취되라.
자기 자신과 사랑에 빠질 수 없다면
다른 누구와 함께 있어도 즐거움을 느낄 수 없고,
깊은 사랑에 빠질 수 없다.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이 쉬운 것 같아도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시인이 말하는 자기 사랑은,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미소년 나르시스처럼 자기애에 빠져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랑이 결코 아닙니다. 자기를 사랑하되 바르게 사랑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바르게 사랑한다는 것은 인생을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시작이 됩니다. 이때의 자기 사랑이란 자존감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 자기 사랑이나 자존감은 저절로 생기지 않습니다. 스스로 보기에도 자신이 사랑받을 만하다고 여겨져야 자기 사랑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가장 먼저 거울 앞에 서는 것입니다. 과연 나는 사랑받을 만한 존재인지를 암묵적으로 묻는 것입니다. 또한 내가 사랑을 할 만한 얼굴과 눈빛을 지니고 있는지 살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매일 얼굴과 몸을 가꾸어 나가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이런 육체의 것들만이 아니라 영혼을 보는 거울도 있습니다. 마음의 거울, 생각의 거울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대면하면 내가 어떤 존재인지, 내가 어떻게 변해야 될는지 알게 됩니다. 오늘도 우리는 예배를 드리면서 나 자신이 사랑할 만한 존재가 되는 것과 또 사랑받을 만한 존재로 성숙해 나가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확인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게 되면, 어느 순간부터 남을 탓하기 시작합니다. 조상을 탓하고 부모를 탓하고 환경을 탓하며 마음속에 있는 불평을 쏟아 놓습니다. 그런데 이런 남의 탓은 자기 사랑의 왜곡된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의 문제를 직시하고, 나의 잘못이 비난받는 것이 두려워 먼저 남의 탓을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 자신에 대한 비난을 피하기 위해 남을 비난하는 것입니다.
알코올중독에 빠졌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자존감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중독자가 된 것은 어린 시절 자신을 학대했던 부모님에 대한 기억이 여전히 자신을 못난 사람이라고 여기도록 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부모가 그에게 한 말은 “널 낳지 말았어야 했다”, “너만 없었으면 내 인생이 이렇게 되지 않았을 텐데…”였습니다. 어른이 된 후에도 이 말이 늘 마음을 억누르고 가슴을 파헤쳤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람이 “당신의 나이가 몇이냐”고 물었고, 그가 대답했습니다. “마흔 다섯 살입니다.” 그러자 이야기를 듣던 사람이 이렇게 말하며 나가 버렸습니다. “사십년 전 부모와 겪었던 일에서 당신은 아직까지도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군요.” 그런데 이 말이 알코올중독자에게 심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삼사십년이 지났음에도 자신은 아직도 그 옛날 일에 매달려서 삶을 망가뜨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스스로가 매우 한심하게 여겨졌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자신을 귀히 여기며 존중하고 사랑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의 문제를 남의 탓으로 돌리면서 여기까지 왔습니까? 세월이 한참 지났는데도 그 사건, 그 사람을 떠올리며 탄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남을 탓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가져야 할 모습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가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라고 물으면 나 자신에 대해 5분 동안 이야기할 거리가 있습니까? 보통은 자신의 이름과 가족, 직장이나 스펙 등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보다 더 중요하고 나를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있지 않을까요? 내가 좋아했던 일, 내가 하고 싶었던 일, 가치관, 앞으로의 계획 등으로 자신을 소개할 수 있다면 그것이 더 멋지고 아름답지 않을까요?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자기를 소개해 보라는 말에 두 사람이 다음처럼 대답을 합니다. 한 여자는 “저는 그냥 가정주부예요” 하고 끝냅니다. 또 다른 여자는 “저는 세 아들을 키우고 있어요. 저는 전업주부예요. 저는 이 아이들의 어머니예요”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여러분은 누구에게 더 관심이 가십니까? 이번에는 남자에게 물었습니다. 한 남자가 대답합니다. “저는 직장에 다니고 있어요.” 또 다른 남자가 말합니다. “제가 다니는 회사는 소망상사입니다. 저는 무역업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누구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으십니까?
저 사람은 자존감이 있구나, 자기가 하는 일을 좋아하고 있구나, 자기의 직업에 열정이 있구나 하는 느낌을 받아야 그 사람에게 호기심이나 관심이 생기고 대화를 더 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남에게 그런 느낌을 주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신이 스스로를 좋아하고 귀히 여겨야 합니다. 그래야 남도 나를 좋아하고 귀히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자랑의 대상을 바르게 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랑한다는 것은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자랑하게 됩니다. 그러니 가끔씩 자기 자랑하는 사람을 너무 흉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신에게 자랑스러운 것, 사랑스러운 것이 있기 때문에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면 자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선생님이 학생들을 사랑하면 학생들을 자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대한민국을 사랑하면 대한민국을 자랑하게 되고, 소망교회를 사랑하면 소망교회를 자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사랑하면 예수님을 자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평생에 예수님을 자랑해 본 적이 얼마나 됩니까? 전도라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내가 믿는 예수님이 이런 분이라고, 그리고 그 예수님 때문에 내가 여기까지 왔다고 고백하며 전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그것은 곧 우리가 갖고 있는 축복의 역사이고 믿음의 역사이고 하나님이 주신 복음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은 그 반대처럼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 (로마서 3:27)

바울은 ‘자랑할 데가 있을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말은 자랑하지 말라는 뜻일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단지 자랑의 대상을 제대로 정하라는 이야기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자랑하지 말라고 하면 입을 닫습니다. 겸손해야 한다는 생각에 자신을 감추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것은 바른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내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소중한 사람이 되었는지 표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착한 사람 콤플렉스가 있고 겸손함의 콤플렉스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그저 꾹꾹 눌러 놓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자신을 표현하는 것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자랑의 대상을 예수 그리스도로 두고 내 삶의 모습을 자신 있게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로 인해 십자가에 못 박혀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신 것과 그 예수님을 자랑하기 시작해야 참된 자랑이 내 안에서 싹트고 솟아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물론 잘못된 자랑은 있습니다. 나의 소유물, 나의 성취, 나의 잘난 행위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감추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를 자랑하게 될 때 생기는 위험성 때문입니다. 내가 누구인가를 보여 주기 원하는 것이 자기 자랑입니다. 그러나 나를 통하여 나를 자랑하는 순간, ‘나’라는 존재 자체가 남에게 의존되고 남에 의해 규정되고 맙니다.
자랑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남들에게 인정받기 원한다는 것입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남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시간과 정성을 쏟아붓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내가 자랑하는 것에 누군가 동조하고 칭찬을 덧붙이면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위로 올라갑니다. 하지만 반대로 누군가 나의 말을 비난하고 조롱하는 것처럼 느끼면 내리막길을 달리듯 아래로 떨어져 괴로워합니다. 나의 나됨을 다른 사람에 의해서 규정받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자랑을 하고 싶을 때, 나 자신을 내가 가진 것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명품 가방을 샀다고, 좋은 자동차를 몬다고 자랑합니다. 학벌을 자랑하고, 얼마나 큰 집에서 사는지 자랑합니다. 자녀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자랑합니다. 한두 번쯤 이러한 것들을 자랑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문제는 ‘나’라는 존재와 나의 ‘소유’가 일치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누군가 나를 업신여기면 어떻게 하나’ 하는 염려가 나를 붙잡기 때문에 자꾸만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 외적인 것들로 나를 치장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랑의 뒷면에는 나를 알아달라는, 관심 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칭찬받고 싶다는 속마음이 숨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일수록 마음이 약한 사람입니다. 때로는 콤플렉스와 열등감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물질이나 외적인 직분으로 자신을 대체하려는 인간 심리의 발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랑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바울이 “자랑할 데가 어디에 있느냐 있을 수 없느니라”고 말하며 자랑을 멈추게 했던 이유도 그것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그랬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 선택받은 백성이고, 율법을 가진 백성이고, 하나님의 약속의 표시로 할례를 받은 족속이라고 자랑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바울이 선언하는 것입니다. “네가 약속의 백성이면 약속을 지켜야 되지 않느냐? 율법을 받았으면 율법에 순종하며 살아야 하지 않느냐? 네가 선민이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만을 높이고 예배드려야 되지 않느냐? 그런 것은 하지 않으면서 외적인 것만 자랑하는 그런 자랑은 다 거짓 자랑이다!”
그래서 바울은 자랑은 하되 목표를 세우라고 이야기합니다. 목표를 세우지 않으면 그 자랑은 거짓 자랑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로마서 3:27∼28)

자랑할 것은 행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붙잡고 있는 소유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셔서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게 하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받게 하는 화목제물로 세우신 바로 그 예수님을 자랑하고 그 하나님을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의 법을 주셨습니다. 새로운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 길은 내가 수고하고 땀 흘리고 애써서 업적과 행위를 쌓으므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입니다. 이 약속의 선물을 생각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포기하시면서까지 사랑한 존재가 바로 나 자신이니,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깨달으며 하나님께 자랑과 경배를 올려 드리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31절에서 다음과 같이 우리를 가르칩니다.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전서 1:31)

자랑하려 한다면 주님 안에서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자랑하라’는 말 속에는 두 가지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는, 직접 목적어로써의 ‘주님’입니다. 즉 주님을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것을 자랑하지 말고 믿음의 길을 열어 주신 하나님을, 예수님을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 안에서’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생각할 때, 말할 때, 행동할 때의 모든 순간에 내가 주님 안에 있음을 깨닫고 주님이 내게 주신 축복을 기억하면서 삶의 모든 것들을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건강한 자의식이란 무엇일까요?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아도 내가 나인 것을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나는 저 사람보다 조금 더 가졌다’, ‘나는 저 사람보다 조금 더 건강하다’, ‘나는 저 사람보다 조금 더 높은 자리에 있다’는 것들로 나의 가치를 결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나인 그 자체로 소중하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나만의 독특한 가치가 있음을 인식하는 자의식이 건강한 자의식입니다. 그것은 어디로부터 배울 수 있습니까? 바로 예수님으로부터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최고의 자의식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아들로, 딸로 세우시고 나를 기뻐하시고 좋아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자의식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자랑한다는 말 속에는 ‘전적으로 신뢰한다’, ‘그 대상을 삶의 근거로 삼겠다’, ‘내 시간과 정성과 물질을 쏟아붓겠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주님을 자랑하며, 나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살아갑시다.

성경을 읽어보면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랑하고 싶어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너는 내 아들이다. 너는 내 딸이다” 하고 우리를 이 세상에 자랑하고 싶어 하십니다.

…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사무엘상 2:30)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를 높이느냐? 그렇다면 나도 너를 높이겠다. 네가 나를 존중하느냐? 그렇다면 나도 너를 존중하겠다. 네가 나를 자랑하느냐? 나도 너를 자랑하겠다.”
우리가 왜 그리스도에게로 다가가야 할까요? 왜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할까요?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고 자랑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고 자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만물을 만드신 창조주라고 고백하면, 하나님께서는 “너는 나의 형상으로 지어져 이 모든 것을 다스릴 나의 소중한 아들과 딸이다”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존중하십시오. 하나님을 자랑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자랑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순간에 우리는 자랑할 대상과 이유를 갖게 됩니다. 바로 하늘과 땅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우리의 연약함과 죄악을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그분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믿음의 길이 열렸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똑같이 믿음의 길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러므로 이 예수님을 자랑하고 하나님을 자랑하지 않을 수 없지 않겠습니까.
이 자랑할 이유를 갖게 될 때, 내가 얼마나 주님 안에서 소중한 존재인지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 나 자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십시오.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선언하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런 귀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시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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