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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하는 사람들의 복

느헤미야 11: 1 ~ 2

김지철 목사

2010.08.22

자원하는 마음으로 교회를 섬기는 분들이 있습니다

제가 소망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한지 7년이 되었습니다. 늘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마음속에 기쁘고 감사한 마음이 있습니다. 특히 주일만 되면 그런 생각이 더욱 마음속에 솟아오릅니다. 어디서 이렇게 귀한 성도님들이 한분 한분씩 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일까? 어떻게 이렇게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일까? 그 자체가 제게는 최고의 감사의 내용이고 기쁨의 고백입니다.
때로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서 말씀에 은혜를 받았다고 말씀하시면 저는 하늘을 날 것 같은 감격을 느끼곤 합니다. 또 주일만 되면 이른 아침부터 나오셔서 예배를 준비하시는 분들을 보며 감사를 느낍니다. 예배위원들이 있습니다. 찬양대원들이 있습니다. 차량대원들이 있습니다. 성도님들이 보다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예배드릴 수 있도록 준비하시는 분들입니다. 예배당 안팎에서 땀 흘리시며 충성하시는 분들입니다. 이분들을 볼 때마다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모두가 자원하는 마음으로 나왔습니다. 강제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억지로 이끌려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기쁜 마음으로 봉사하며 이 일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교회 예배뿐만이 아닙니다. 주일학교 교육과 전도, 경조, 봉사, 선교를 위해 애쓰며 섬기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국내현장, 때로는 해외현장을 방문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사랑을 증거 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이분들은 자기의 시간을 내놓습니다. 자기의 돈과 재물을 내놓습니다. 자기의 달란트와 은사 등을 자원하는 마음으로 내놓으면서 이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소망교회를 향해 많은 복을 허락해주셨지만, 소망교회의 축복 중에 축복은 바로 이렇게 자원하는 마음으로 교회를 섬기고 복음을 증거 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지도자들에게 강제적으로 이주할 것을 명하였습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하나님을 위해서 수고하고 애쓴 사람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느헤미야가 드디어 성벽을 완성했습니다. 그들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했습니다. 그리고 회개하는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이제 문제는 이것을 어떻게 지속시킬 것인가, 이 예루살렘에 누가 거주하며 이 피폐되고 망가진 예루살렘을 재건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서 다른 곳에 흩어져 살았습니다. 이제 성벽만 덩그러니 세워졌습니다. 누가 이 예루살렘에 거주하길 좋아하겠습니까? 아무도 자신의 삶의 터전을 버리고 이곳으로 이주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성벽은 재건되었지만 이 터전은 여전히 황폐한 채로 남아있었습니다. 위험부담이 너무나 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사는 것을 꺼려했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생각했습니다. ‘성벽을 아무리 높이 쌓고 아무리 귀한 공간이 있어도 그 곳에 거주할 사람이 없다면, 그 속에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낼 사람이 없다면 이 공간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래서 그는 거주할 사람들을 선택해서 그곳에서 살아가도록 요청했습니다. 1절 말씀을 보면 제일 먼저 예루살렘에 거주하기를 작정한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들은 백성들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이는 강제적이었습니다.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루살렘에 거주하였고 그 남은 백성은 제비 뽑아 십분의 일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서 거주하게 하고 그 십분의 구는 다른 성읍에 거주하게 하였으며” (느헤미야 11:1)

먼저 느헤미야는 백성들의 지도자들에게 강제적으로 이곳에 이주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지도자들은 여기에서 살아야한다. 왜냐하면 지도자들은 다른 백성들보다 어려운 일을 택해야하기 때문이다. 힘을 가졌는가? 그 힘을 공동체를 위해서 내어놓으라. 직분을 가졌는가? 그것은 네 권리가 아니라 책임을 감당하기 위한 직분임을 기억하라!” 느헤미야는 이것을 그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먼저 고생하고, 먼저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고, 먼저 택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의 지도자에게는 무조건 이곳에 와서 새로운 예루살렘을 만드는 일에 동참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두 번째 그룹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백성들 중에 제비를 뽑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전체 인구 중 10분의 1을 제비뽑아서 예루살렘에 이주시켰습니다. 백성들의 지도자는 강제적으로 이주시켰다고 한다면, 이 제비뽑은 사람들은 반강제적인 이주였습니다. 이 제비에 뽑히는 것은 손해나는 일이었습니다. 제비에 뽑히지 않으면 자신의 터전을 지킬 수 있는데 뽑히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예루살렘에 와야 했습니다.

자원하는 사람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판단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세 번째 그룹이 있습니다. 제일 소중한 그룹이었습니다. 이는 백성들 중에서 자원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거주하기를 자원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백성들이 복을 빌었느니라.” (느헤미야 11:2)

본문을 보면 영적인 원리가 명백하게 나타납니다. 지도자는 어렵고 힘든 일을 택하라는 것입니다. 공동체를 위해서 모든 것을 쏟아내라는 것입니다. 권리를 자랑하지 말고 의무를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간과 정성과 모든 것들을 쏟아부어야하는 것이 지도자의 일이라고 하면서, 무엇보다도 자원하는 마음으로 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자원하는 마음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일이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일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될 때 자원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아무리 귀한 일도 억지로 하게 되면 마음이 힘들고 괴로워집니다. 하지만 별일이 아니래도 마음속에 자원하는 마음이 있으면 감사한 것입니다. 기쁜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자발성이란 근본적으로 소명과 사명의 마음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자원하는 사람들의 특성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첫 번째로는 머리로 판단하는 것을 넘어 가슴으로 뜨겁게 느끼면서 결단하는 것입니다. 파스칼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가슴은 머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다.” 가슴으로 느끼는 사람이란 머리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이 모자란다는 것이 아닙니다. 머리를 뛰어 넘는 가슴의 뜨거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가슴의 뜨거움이 생기기 시작하면 도전하고 모험합니다. 새로운 것을 향해서, 새 창조를 향해서 달려갑니다. 머리로 판단하고 이성으로 판단하면 손해입니다. 머릿속으로 두려운 생각과 부정적인 생각이 들면 비겁함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머리와 이성이 아니라 그것보다 더 큰 가슴으로 생각하기 시작하고 결단하게 되면 그 어려움은 오히려 내가 할 일이요, 그 힘든 것은 꿈과 사명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가슴으로 먼저 느끼게 되면 용기와 담대함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것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결단하게 됩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몇 번의 중요한 것을 결정해야할 때가 다가옵니다. 이성적인 판단도 필요합니다. 머리로 분석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무엇보다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가슴으로 이것이 필요한 것인지 확인하는 용기와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에 자원했던 사람들은 불이익을 얻을 수 있지만 예루살렘을 재건하겠다는 뜨거운 가슴으로 예루살렘에 머물기를 소원했던 것입니다.

자원하는 사람은 낯선 것을 새로운 도전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 자원하는 사람의 특징이 있습니다. 안락한 것을 내려놓고 낯선 것을 새로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낯선 것을 만나면 두렵고 적응하는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자원하는 사람은 이 낯설고 익숙하지 않은 것을 새로운 것, 새롭게 변화하는 것, 새롭게 창조하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놀라운 것입니다. 인생을 축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요, 진정한 용기를 가진 사람들의 태도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는 남을 위해서 섬기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다. 불우한 이웃을 위해서 봉사하고 싶은 생각도 있습니다. 내가 갖고 있는 것들을 통해서 자원하는 마음으로 섬기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마음이 있습니다. 나의 익숙함을 포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의 안락함을 버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때 이 두 가지가 충돌합니다. 그런데 이 익숙함과 안락함을 포기하지 아니하며 자발성이 생기지 않습니다. 자발성은 익숙함을 포기해야 얻어지는 것입니다. 자발성은 안락한 것을 내려놓아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자원하는 사람은 낯선 것을 오히려 새로운 도전의 현장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보다 조금 더 인내력을 가져야 합니다. 조금 더 결단력을 취해야 합니다. 조금 더 믿음을 간직해야 합니다. 조금 더 헌신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남들보다 조금만 더 끈기가 있으면 자원하는 능력의 사람으로 변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에머슨이 이런 흥미 있는 말을 합니다. “영웅이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용감한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보다 10분 더 용감한 사람이다.” 10분만 더 용감하면 영웅이 된다는 것입니다. 10분만 더 오래 참으면 끈기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10분만 더 신뢰하면 신뢰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을 향해서 달려가는 자발적인 마음이 우리에게 요청되는 시대입니다.

자원하는 사람은 축복의 통로가 됩니다

세 번째 특성이 있습니다. 자원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다른 사람을 살리겠다고 하는 사랑의 통계가 마음속에 있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멋진 일도 아무런 비용과 대가를 치르지 않고서 생기는 것이 없습니다. 멋지고 아름다운 일의 뒷면에는 누군가의 대가와 시간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것이 역사의 현장입니다.
우리 교회에 풍성한 열매가 맺어진 것은 우리의 선배들이 쏟아 부은 사랑과 헌신과 시간과 모든 충성의 내용들이 그 안에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남이 나서지 않는 힘들고 어려운 일에 자원하는 마음으로 나섰던 사랑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개인적인 이익보다는 공동체의 이익을 더 우선시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격려를 받습니다. 자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주저하다가도 힘을 얻습니다. 자원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우울한 분위기를 명랑하게 바꿉니다. 불평과 불만의 현장을 감사와 기쁨의 현장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자원하는 사람들의 역사가 있습니다.
불평하는 사람의 특징은 무얼까요? 그들은 항상 핑계거리를 찾습니다. 자신의 불운을 남의 탓으로 돌립니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즐기기보다는 지금 내가 없는 것을 아쉬워하면서 시샘합니다. 그렇게 되면 불평이 내 속에 들어와 나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원하는 마음이 생기면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가져다줍니다. 내 마음이 기쁩니다. 내가 있음으로 다른 사람들이 복을 받기 때문입니다. 내가 있음으로 다른 사람들이 유익을 얻기 때문입니다. 나는 어떤 것을 포기하는 대가를 치르지만 이 대가보다 더 큰 축복이 내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자원하는 사람은 사람들이 인정하고 존중합니다. 칭찬하고 귀히 여깁니다.
본문을 보면 이렇게 자원하는 사람들을 모든 백성들이 귀하게 여기면서 그들을 축복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원하는 사람은 축복의 통로가 됩니다. 자원하는 사람들의 삶의 태도를 통해서 모든 사람들이 함께 복을 받는 아름다운 역사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바로 그랬습니다. 그는 페르시아 황제의 최고의 경호관이자 최고 비서관이었습니다. 부도 명예도 권력도 보장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백성이 고통 받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성벽은 무너지고 이방인의 공격과 억압 속에서 백성들이 아파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예루살렘이 황폐해졌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그의 가슴이 아파왔습니다. 그의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리고 이 황폐된 곳에 다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겠다는 하나님의 소명이 그의 마음을 붙들었습니다. 그때 느헤미야는 모든 것을 다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고국으로 돌아와서 예루살렘 재건에 동참하게 된 것입니다. 모든 백성들을 초청했습니다. 우리가 새로운 일들을 감당하자고 그들의 마음을 북돋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예루살렘은 바로 이 느헤미야의 자원하는 마음 때문에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자원하는 마음으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기억하십시오

자원하는 마음의 원조가 누구일까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보좌를 버리셨습니다. 낮고 비천한 땅으로 내려오셔서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빛나는 왕관을 남겨두시고 이 땅에 내려와서 머물 집조차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생활을 하시면서 자신의 처량한 모습을 표현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마태복음 8:20)

그분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시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습니다. 자원하는 마음으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우리를 위해서였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에게 하늘나라의 영원한 생명의 비밀을 가르쳐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자원하는 사랑을 가지고 역사하는 그 자리마다 생명의 역사와 치유의 역사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자원하는 사람은 도전합니다. 변화를 기다리면서 새롭게 만듭니다. 익숙한 것을 떠납니다. 안락한 것을 포기합니다. 지금까지 낯선 것을 새로운 삶의 창조의 현장으로 바꾸어 나갑니다. 이러한 모습이 바로 자원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대속의 마음과도 같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에게는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세상에는 소리 지르는 사람도 많습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의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자원하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이 시대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여기고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그 일을 위해서 내가 나서겠다고 하나님의 마음을 갖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그 마음은 거룩한 마음이요 거룩한 영성을 지닌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이러한 믿음의 사람으로 서게 될 때 우리의 역사가 바뀔 것입니다. 우리의 공동체가 바뀔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이 바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위해서 우리를 불러주셨습니다. “연약하고 힘든 곳에 나 같은 사람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게 하옵소서. 그래서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 치유의 역사, 회복의 역사가 이 땅에 일어나게 하옵소서.” 이렇게 고백하며 나아가는 성도님들 한 분 한 분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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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 11: 1 ~ 2

1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루살렘에 거주하였고 그 남은 백성은 제비 뽑아 십분의 일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서 거주하게 하고 그 십분의 구는 다른 성읍에 거주하게 하였으며

2

예루살렘에 거주하기를 자원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백성들이 복을 빌었느니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교회를 섬기는 분들이 있습니다

제가 소망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한지 7년이 되었습니다. 늘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마음속에 기쁘고 감사한 마음이 있습니다. 특히 주일만 되면 그런 생각이 더욱 마음속에 솟아오릅니다. 어디서 이렇게 귀한 성도님들이 한분 한분씩 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일까? 어떻게 이렇게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일까? 그 자체가 제게는 최고의 감사의 내용이고 기쁨의 고백입니다.
때로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서 말씀에 은혜를 받았다고 말씀하시면 저는 하늘을 날 것 같은 감격을 느끼곤 합니다. 또 주일만 되면 이른 아침부터 나오셔서 예배를 준비하시는 분들을 보며 감사를 느낍니다. 예배위원들이 있습니다. 찬양대원들이 있습니다. 차량대원들이 있습니다. 성도님들이 보다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예배드릴 수 있도록 준비하시는 분들입니다. 예배당 안팎에서 땀 흘리시며 충성하시는 분들입니다. 이분들을 볼 때마다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모두가 자원하는 마음으로 나왔습니다. 강제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억지로 이끌려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기쁜 마음으로 봉사하며 이 일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교회 예배뿐만이 아닙니다. 주일학교 교육과 전도, 경조, 봉사, 선교를 위해 애쓰며 섬기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국내현장, 때로는 해외현장을 방문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사랑을 증거 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이분들은 자기의 시간을 내놓습니다. 자기의 돈과 재물을 내놓습니다. 자기의 달란트와 은사 등을 자원하는 마음으로 내놓으면서 이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소망교회를 향해 많은 복을 허락해주셨지만, 소망교회의 축복 중에 축복은 바로 이렇게 자원하는 마음으로 교회를 섬기고 복음을 증거 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지도자들에게 강제적으로 이주할 것을 명하였습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하나님을 위해서 수고하고 애쓴 사람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느헤미야가 드디어 성벽을 완성했습니다. 그들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했습니다. 그리고 회개하는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이제 문제는 이것을 어떻게 지속시킬 것인가, 이 예루살렘에 누가 거주하며 이 피폐되고 망가진 예루살렘을 재건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서 다른 곳에 흩어져 살았습니다. 이제 성벽만 덩그러니 세워졌습니다. 누가 이 예루살렘에 거주하길 좋아하겠습니까? 아무도 자신의 삶의 터전을 버리고 이곳으로 이주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성벽은 재건되었지만 이 터전은 여전히 황폐한 채로 남아있었습니다. 위험부담이 너무나 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사는 것을 꺼려했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생각했습니다. ‘성벽을 아무리 높이 쌓고 아무리 귀한 공간이 있어도 그 곳에 거주할 사람이 없다면, 그 속에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낼 사람이 없다면 이 공간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래서 그는 거주할 사람들을 선택해서 그곳에서 살아가도록 요청했습니다. 1절 말씀을 보면 제일 먼저 예루살렘에 거주하기를 작정한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들은 백성들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이는 강제적이었습니다.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루살렘에 거주하였고 그 남은 백성은 제비 뽑아 십분의 일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서 거주하게 하고 그 십분의 구는 다른 성읍에 거주하게 하였으며” (느헤미야 11:1)

먼저 느헤미야는 백성들의 지도자들에게 강제적으로 이곳에 이주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지도자들은 여기에서 살아야한다. 왜냐하면 지도자들은 다른 백성들보다 어려운 일을 택해야하기 때문이다. 힘을 가졌는가? 그 힘을 공동체를 위해서 내어놓으라. 직분을 가졌는가? 그것은 네 권리가 아니라 책임을 감당하기 위한 직분임을 기억하라!” 느헤미야는 이것을 그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먼저 고생하고, 먼저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고, 먼저 택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의 지도자에게는 무조건 이곳에 와서 새로운 예루살렘을 만드는 일에 동참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두 번째 그룹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백성들 중에 제비를 뽑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전체 인구 중 10분의 1을 제비뽑아서 예루살렘에 이주시켰습니다. 백성들의 지도자는 강제적으로 이주시켰다고 한다면, 이 제비뽑은 사람들은 반강제적인 이주였습니다. 이 제비에 뽑히는 것은 손해나는 일이었습니다. 제비에 뽑히지 않으면 자신의 터전을 지킬 수 있는데 뽑히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예루살렘에 와야 했습니다.

자원하는 사람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판단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세 번째 그룹이 있습니다. 제일 소중한 그룹이었습니다. 이는 백성들 중에서 자원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거주하기를 자원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백성들이 복을 빌었느니라.” (느헤미야 11:2)

본문을 보면 영적인 원리가 명백하게 나타납니다. 지도자는 어렵고 힘든 일을 택하라는 것입니다. 공동체를 위해서 모든 것을 쏟아내라는 것입니다. 권리를 자랑하지 말고 의무를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간과 정성과 모든 것들을 쏟아부어야하는 것이 지도자의 일이라고 하면서, 무엇보다도 자원하는 마음으로 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자원하는 마음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일이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일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될 때 자원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아무리 귀한 일도 억지로 하게 되면 마음이 힘들고 괴로워집니다. 하지만 별일이 아니래도 마음속에 자원하는 마음이 있으면 감사한 것입니다. 기쁜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자발성이란 근본적으로 소명과 사명의 마음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자원하는 사람들의 특성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첫 번째로는 머리로 판단하는 것을 넘어 가슴으로 뜨겁게 느끼면서 결단하는 것입니다. 파스칼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가슴은 머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다.” 가슴으로 느끼는 사람이란 머리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이 모자란다는 것이 아닙니다. 머리를 뛰어 넘는 가슴의 뜨거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가슴의 뜨거움이 생기기 시작하면 도전하고 모험합니다. 새로운 것을 향해서, 새 창조를 향해서 달려갑니다. 머리로 판단하고 이성으로 판단하면 손해입니다. 머릿속으로 두려운 생각과 부정적인 생각이 들면 비겁함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머리와 이성이 아니라 그것보다 더 큰 가슴으로 생각하기 시작하고 결단하게 되면 그 어려움은 오히려 내가 할 일이요, 그 힘든 것은 꿈과 사명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가슴으로 먼저 느끼게 되면 용기와 담대함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것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결단하게 됩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몇 번의 중요한 것을 결정해야할 때가 다가옵니다. 이성적인 판단도 필요합니다. 머리로 분석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무엇보다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가슴으로 이것이 필요한 것인지 확인하는 용기와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에 자원했던 사람들은 불이익을 얻을 수 있지만 예루살렘을 재건하겠다는 뜨거운 가슴으로 예루살렘에 머물기를 소원했던 것입니다.

자원하는 사람은 낯선 것을 새로운 도전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 자원하는 사람의 특징이 있습니다. 안락한 것을 내려놓고 낯선 것을 새로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낯선 것을 만나면 두렵고 적응하는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자원하는 사람은 이 낯설고 익숙하지 않은 것을 새로운 것, 새롭게 변화하는 것, 새롭게 창조하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놀라운 것입니다. 인생을 축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요, 진정한 용기를 가진 사람들의 태도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는 남을 위해서 섬기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다. 불우한 이웃을 위해서 봉사하고 싶은 생각도 있습니다. 내가 갖고 있는 것들을 통해서 자원하는 마음으로 섬기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마음이 있습니다. 나의 익숙함을 포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의 안락함을 버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때 이 두 가지가 충돌합니다. 그런데 이 익숙함과 안락함을 포기하지 아니하며 자발성이 생기지 않습니다. 자발성은 익숙함을 포기해야 얻어지는 것입니다. 자발성은 안락한 것을 내려놓아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자원하는 사람은 낯선 것을 오히려 새로운 도전의 현장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보다 조금 더 인내력을 가져야 합니다. 조금 더 결단력을 취해야 합니다. 조금 더 믿음을 간직해야 합니다. 조금 더 헌신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남들보다 조금만 더 끈기가 있으면 자원하는 능력의 사람으로 변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에머슨이 이런 흥미 있는 말을 합니다. “영웅이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용감한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보다 10분 더 용감한 사람이다.” 10분만 더 용감하면 영웅이 된다는 것입니다. 10분만 더 오래 참으면 끈기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10분만 더 신뢰하면 신뢰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을 향해서 달려가는 자발적인 마음이 우리에게 요청되는 시대입니다.

자원하는 사람은 축복의 통로가 됩니다

세 번째 특성이 있습니다. 자원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다른 사람을 살리겠다고 하는 사랑의 통계가 마음속에 있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멋진 일도 아무런 비용과 대가를 치르지 않고서 생기는 것이 없습니다. 멋지고 아름다운 일의 뒷면에는 누군가의 대가와 시간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것이 역사의 현장입니다.
우리 교회에 풍성한 열매가 맺어진 것은 우리의 선배들이 쏟아 부은 사랑과 헌신과 시간과 모든 충성의 내용들이 그 안에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남이 나서지 않는 힘들고 어려운 일에 자원하는 마음으로 나섰던 사랑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개인적인 이익보다는 공동체의 이익을 더 우선시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격려를 받습니다. 자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주저하다가도 힘을 얻습니다. 자원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우울한 분위기를 명랑하게 바꿉니다. 불평과 불만의 현장을 감사와 기쁨의 현장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자원하는 사람들의 역사가 있습니다.
불평하는 사람의 특징은 무얼까요? 그들은 항상 핑계거리를 찾습니다. 자신의 불운을 남의 탓으로 돌립니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즐기기보다는 지금 내가 없는 것을 아쉬워하면서 시샘합니다. 그렇게 되면 불평이 내 속에 들어와 나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원하는 마음이 생기면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가져다줍니다. 내 마음이 기쁩니다. 내가 있음으로 다른 사람들이 복을 받기 때문입니다. 내가 있음으로 다른 사람들이 유익을 얻기 때문입니다. 나는 어떤 것을 포기하는 대가를 치르지만 이 대가보다 더 큰 축복이 내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자원하는 사람은 사람들이 인정하고 존중합니다. 칭찬하고 귀히 여깁니다.
본문을 보면 이렇게 자원하는 사람들을 모든 백성들이 귀하게 여기면서 그들을 축복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원하는 사람은 축복의 통로가 됩니다. 자원하는 사람들의 삶의 태도를 통해서 모든 사람들이 함께 복을 받는 아름다운 역사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바로 그랬습니다. 그는 페르시아 황제의 최고의 경호관이자 최고 비서관이었습니다. 부도 명예도 권력도 보장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백성이 고통 받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성벽은 무너지고 이방인의 공격과 억압 속에서 백성들이 아파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예루살렘이 황폐해졌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그의 가슴이 아파왔습니다. 그의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리고 이 황폐된 곳에 다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겠다는 하나님의 소명이 그의 마음을 붙들었습니다. 그때 느헤미야는 모든 것을 다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고국으로 돌아와서 예루살렘 재건에 동참하게 된 것입니다. 모든 백성들을 초청했습니다. 우리가 새로운 일들을 감당하자고 그들의 마음을 북돋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예루살렘은 바로 이 느헤미야의 자원하는 마음 때문에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자원하는 마음으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기억하십시오

자원하는 마음의 원조가 누구일까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보좌를 버리셨습니다. 낮고 비천한 땅으로 내려오셔서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빛나는 왕관을 남겨두시고 이 땅에 내려와서 머물 집조차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생활을 하시면서 자신의 처량한 모습을 표현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마태복음 8:20)

그분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시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습니다. 자원하는 마음으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우리를 위해서였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에게 하늘나라의 영원한 생명의 비밀을 가르쳐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자원하는 사랑을 가지고 역사하는 그 자리마다 생명의 역사와 치유의 역사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자원하는 사람은 도전합니다. 변화를 기다리면서 새롭게 만듭니다. 익숙한 것을 떠납니다. 안락한 것을 포기합니다. 지금까지 낯선 것을 새로운 삶의 창조의 현장으로 바꾸어 나갑니다. 이러한 모습이 바로 자원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대속의 마음과도 같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에게는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세상에는 소리 지르는 사람도 많습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의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자원하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이 시대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여기고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그 일을 위해서 내가 나서겠다고 하나님의 마음을 갖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그 마음은 거룩한 마음이요 거룩한 영성을 지닌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이러한 믿음의 사람으로 서게 될 때 우리의 역사가 바뀔 것입니다. 우리의 공동체가 바뀔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이 바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위해서 우리를 불러주셨습니다. “연약하고 힘든 곳에 나 같은 사람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게 하옵소서. 그래서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 치유의 역사, 회복의 역사가 이 땅에 일어나게 하옵소서.” 이렇게 고백하며 나아가는 성도님들 한 분 한 분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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