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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진정한 스승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모두 자랑거리가 있습니다. 제게도 많은 자랑할 내용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큰 자랑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예수님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생각만 해도 너무나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예수님은 저에게 감동을 주시면서 다가오셨습니다. 저의 자존감을 높이 세워 주셨고, 이 땅에서 어떤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지 사명도 허락해 주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저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사죄의 은총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내가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지를 가르쳐 주신 선생님이기도 합니다. 지혜로운 스승이십니다. 그래서 저는 ‘어떻게 하면 예수님처럼 지혜로운 선생이 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한 적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믿음의 사람들의 멘토이자 진정한 스승이십니다.
예수님은 ‘감동’을 주시는 스승입니다.
오늘은 스승 되시는 예수님의 특징을 세 가지로 정리해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첫 번째 특징은, 예수님이 우리 삶에 깊은 ‘감동’을 일으켜 주신 스승이시란 점입니다.
이번 대선에서 새로운 지도자로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되었습니다. 그가 당선된 지 벌써 두 주간이 지났습니다. 한국갤럽 조사 결과, ‘앞으로 5년 동안 문재인 대통령이 대통령으로서의 직무 수행을 어떻게 할 것 같은가?’에 87%가 ‘잘할 것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7%는 ‘잘 못할 것이다’라고, 그밖에 6%는 의견 유보로 답변을 했습니다.
특별히 그가 국민에게 감동을 준 몇 가지 사건이 있었습니다. 지난 5월 18일, 제37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37년 전 5월 18일에 태어난 김소형 씨가 ‘슬픈 생일’이란 제목으로 당시 희생당한 아버지를 그리며 편지를 낭독했습니다. 그녀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며 편지를 읽었고, 편지를 다 읽고 단에서 내려가려는데 문 대통령이 앞으로 나와 그녀를 안아주었습니다. 이후 김소형 씨는 대통령의 품이 아버지처럼 따뜻했다고 심경을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초등학생들과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주저앉아 대화하는 대통령의 모습이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119 구급차가 지나갈 때는 먼저 지나가도록 도로 옆으로 차를 비켜 주는 모습도 국민들에게 인상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런 모습이 국민들에게 감동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한 가지입니다. 자신이 쓸 수 있는 권력을 유보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권력을 잠시 침묵시킬 수 있는 권력자, 권력을 위임해 준 국민에게 그 권력을 다시 돌리는 권력자의 모습에서 국민이 깊은 감동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는 대통령에게만 국한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관계의 모든 역학 구조 속에서도 생기는 모습입니다.
또한 새 대통령에게 무엇을 바라는지에 대해서도 물었습니다. 갤럽 조사 결과, 첫 번째가 바로 ‘초심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즉, 처음 마음을 지키며 끝까지 잘하길 바라는 마음이 온 국민에게 있는 것입니다. 대통령 후보 시절엔 모든 후보가 얼마나 소통을 잘합니까? 시장에서 장사하는 분들과도 자연스럽게 소통합니다. 어린아이들을 가슴에 껴안기도 합니다. 지나가던 사람들에게도 다가가 악수를 건네며 국민들의 소리에 귀 기울이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런데 대통령이 된 후 권위주의적인 모습으로 변질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소통이 아니라 불통인 사람, 듣는 귀가 먹고 명령만 하는 권력주의적인 사람, 그렇게 낡은 신념과 습관만을 가진 사람으로 머무는 사람…. 우리는 역사 속에서 이러한 권력자들의 모습을 여러 번 경험해 왔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대통령에게 바라고 있습니다. 나라를 사랑하고 국민을 섬기는 그 초심이 변치 않기를, 우리가 대한민국 국민인 것에 자부심을 느낄 수 있도록 멋진 지도자가 되기를 바라며 기대합니다. 앞으로도 5년 간 지금과 같은 마음과 자세로 직무를 감당한다면, 아마 참으로 좋은 대통령이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 믿음의 성도들도 함께 기도할 이유가 있습니다.
다시 예수님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감동을 주신 분이 누구일까요? 어떤 권력자와도 비교할 수 없고, 어떤 인간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큰 감동을 주신 분, 그분은 단연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가장 큰 권력을 갖고 계셨지만 가장 권력 없는 자처럼, 무능한 자처럼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영광과 존귀를 받으셔야 마땅한 분이심에도 한없이 낮고 천한 곳에 오시기를 마다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예수님이 만난 사람들은 아무 힘없는 민초들이었습니다. 배고픈 사람, 병약한 사람, 인간 대접 받지 못하고 신음하던 사람, 자기 존재 이유를 알지 못해 방황하던 사람들을 예수님이 친히 만나주시고 접촉하시며 그들의 삶을 안아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섬김의 삶을 사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나가면 절감하는 게 있습니다. ‘아, 세상은 힘의 세계구나. 권력의 세계구나.’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낍니다. 힘 있는 자들은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아니 더 큰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철저하게 마키아벨리즘을 동원합니다. 마키아벨리즘(Machiavellism)이란 일종의 국가권력주의를 뜻합니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속임수와 표리부동한 방법 등을 동원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즉, 남을 지배하고 권력을 지속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키아벨리즘이 이 세속 사회에 가득합니다. 이렇게 살벌한 경쟁 구도 속에 우리가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신 예수님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셨습니다. 자기 탐욕과 자기 보신에 힘썼던 권력자들의 역사와는 전혀 다른 길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한 삶이었고, 자신을 높이려 함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인 우리를 높이려 하신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가장 잘 요약한 구절이 있다고 하면, 어떤 구절일까요? 바로 마가복음 10장 45절입니다.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가복음 10:45)
세상 권력자들은 자기 배와 욕심을 채우는 데 급급한데, 예수님은 전혀 다른 방법으로 나아가셨다는 것입니다. 섬김을 받아야 할 분이 섬기셨고, 존귀를 받아야 할 분이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 힘없고 아픈 자들, 연약한 자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생명까지도 내어 놓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살벌한 인류 역사를 사랑과 섬김의 역사로 뒤집기 시작하셨습니다. 역사를 변화시키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길에 깊이 감동 받은 사도 바울도 로마서에서 다음과 같이 우리를 가르칩니다. 로마서 5장 7~8절의 말씀입니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7~8)
잘나가는 사람, 힘 있는 사람, 의인이라고 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죽기를 각오하는 사람이 더러 있지만, 죄인이나 세상에서 천대 받는 사람을 위해 자기 몸을 바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우리를 위해 당신 몸을 내놓으시고 십자가 고난의 길을 가셨습니다. 그리고 친히 죽임 당하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런 분이 도대체 어디 있을까요?
바울을 말합니다. 그분을 보니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바울이 예수님의 고난의 길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죄인 된 우리를 의인으로 변화시키시고, 죄의 종을 의의 사람으로 바꾸시고, 사탄의 노예였던 우리를 감히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삼아주신 예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저와 여러분이 바로 그 축복의 자리에 들어왔다는 사실입니다.
영광의 주님이 가장 비참한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실은 세상 권력자가 갖고 있는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고귀한 진리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요, 하나님의 구원사 속에 있는 존귀한 사건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가 감동을 받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당신 몸을 내놓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바라보며, “예수님, 내가 예수님으로 인해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내가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깨닫습니다. 내가 당신으로 인해 사랑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자아 정체성’을 바로 세워 주시는 스승입니다.
두 번째 특징은,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놀랍게도 자존감을 회복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자아 정체성’을 발견하게 해 주셨습니다.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깨닫게 해 주신 것입니다.
저는 청년 때 자존심이 매우 셌습니다. 그런데 자존감은 결여돼 있었습니다. 남과 비교해 조금 잘했다 싶고 남이 칭찬하면 으쓱댔고, 남이 비판하면 열불이 나고 화가 나서 어쩔 줄 몰라 했던 사람입니다. 그만큼 자존심은 세고 자존감은 부족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알게 된 후, 예수님 안에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내가 존재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심으로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얼마나 복된 존재인지, 내가 얼마나 특별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는 특별한 존재다.” 우리가 가난해도 가난이 우리의 자존감을 해치지 못 합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이런 말 저런 말을 들어도, 나는 그것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사람입니다. 성경에서도 그런 인물들이 많이 나옵니다. 환경에 의해 자기 자신을 규정하다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된 사람들 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난 후 자기 자신을 억누르던 족쇄에서 해방되었습니다.
맹인이자 거지였던 바디매오는 늘 구걸하는 인생이었습니다. 아마 그는 자신이 돈에 의해 규정되고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만나면서 변화됩니다. “어떤 돈도, 어떤 사람도 나를 얽어맬 수가 없구나!”라고 외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마가복음 10장 52절에 보면, 예수님이 다음과 같은 말씀을 바디매오에게 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마가복음 10:52 중)
이 말씀을 들은 후, 그는 더는 구걸하지 않는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나의 나 됨의 축복을 누리는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누구도 자신을 규정할 수 없고, 어떤 물질로도 자신이 규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 당대에 비난 받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세리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만나 주셨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나라도 선포하시며 그들과 밥상도 함께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조롱했습니다. “저 예수, 세리와 죄인의 친구구나!”
하지만 예수님과 함께한 세리와 죄인들은 그간의 억압에서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에 의해 자기를 규정했던 그 족쇄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 나는 예수님과 동행하는 하나님의 사람이구나!’
키가 작아 고통 받았던 삭개오도 그렇게 변화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자기가 살고 있던 성에 들어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뽕나무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이 삭개오에게 내려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맞아주신 예수님께 감동해 자신의 재산을 내어놓습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다고 말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9장 9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누가복음 19:9)
내 외모, 키, 삶의 환경이 나를 규정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이 이것을 깨뜨려 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삭개오 역시 예수님을 만나면서 자신도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을 알게 됩니다.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며 자존감을 회복하게 된 것입니다.
2,000년 전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들 역시 얼마나 차별받던 존재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여성들 또한 예수님을 통해 자기 정체성을 새롭게 깨닫습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십자가 고난의 길을 가시기 전, 예수님의 머리 위에 향유 옥합을 깨트린 여인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는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불렀습니다. 메시아란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입으로만이 아니라 몸으로 직접 이 표현을 나타냅니다. 아주 값비싸고 귀한 향유를 예수님 머리 위에 부으며, 그분이 정말 기름 부음 받은 자인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마가복음 14장 9절에 기록돼 있습니다.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마가복음 14:9 중)
복음이 전해지는 모든 곳에 이 여인이 행한 일이 알려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선언해 주신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 의해 너를 규정하지 마라. 성별에 의해서도 너를 규정하지 마라. 너는 하나님의 사랑 받는 복된 여인이라!”
우리는 하나님께 사랑받는 존재입니다.
여러분, 나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를 부끄럽게 만드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결코 그런 것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한 교수가 학생들 앞에 오만 원 권 지폐를 꺼내 들었습니다. 그리곤 막 구겨버립니다. 땅바닥에 던져 발로 밟기도 합니다. 진흙탕 속에 집어넣곤 흙 범벅이 되게도 합니다. 그런 뒤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이거 가질 사람?” 학생들이 손을 들었을까요, 안 들었을까요? 전부 다 들었습니다. “저요!”라고 외치면서 말입니다. 왜일까요? 구겨졌다 해도, 흙탕물에 들어갔어도, 오만 원의 가치는 사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가 넘어졌다 해도, 또 실패했다 해도, 내가 다른 사람보다 돈이 좀 없어도, 월세 집에 산다 해도, 대학교를 안 나왔다고 해도,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입니다. 더 이상 세상의 기준이 나를 억누르지 않도록 나 자신의 정체성을 하나님 안에서 바로 세워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이 일을 해 주셨습니다. 우리 인생의 족쇄, 그 사슬을 풀어주셨습니다. 그리곤 우리에게 “너는 소중한 존재다. 너는 값진 존재야. 너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존재란다.”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저는 권사 월례회 때마다 아가서 6장 10절 말씀을 권사님들과 함께 읽습니다. “아침 빛 같이 뚜렷하고 달 같이 아름답고 해 같이 맑고 깃발을 세운 군대 같이 당당한 여자가 누구인가?”라고 외치면, 권사님들이 오른 손을 번쩍 들어 가슴에 대고 이렇게 말합니다. “바로 나!”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나 자신의 정체성을 재발견하는 일입니다. 이를 통해 내가 환경이나 여건에 의해 규정되는 사람이 아니란 걸 알게 됩니다. 즉, 하나님에 의해서 나 자신을 바로보고, 내가 얼마나 그분께 사랑받는 존재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이웃과 하나님나라로 초청’하시는 스승입니다.
스승 예수님의 세 번째 모습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게 된 사람은 이웃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이 됩니다. 그동안 자신만을 위해 살았는데, 예수님이 다가오셔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얘야, 이제 너도 너만을 위해 살지 말고 이웃을 위해 살지 않으련? 하나님나라를 위해 네 인생을 사용하지 않으련?” 예수님의 이 부르심에 우리가 초청되었습니다.
갈릴리바다에서 어부 생활을 했던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당시 그들의 인생 목표가 무엇이었겠습니까? 물고기를 많이 잡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으로 생계를 이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라.” 그렇게 예수님이 그들의 삶을 인도하셨습니다. 이후 오순절엔 성령이 임하여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욜2:28~29; 행2:17~18)라는 예언도 성취됩니다. 갈릴리바다의 어부들이 세계를 가슴에 품는 하나님의 종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제자들을 만나신 목표는 한 가지입니다. 우리가 자유자라는 것,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는 것, 사탄의 노예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더는 열등감과 교만으로 자신을 규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 31~32절을 우리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한복음 8:31~32)
진리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 아닙니까! 그 예수 그리스도를 알면 우리를 억압하던 모든 억눌림에서 해방될 것이며 자유자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기독교는 이 자유를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종처럼 살지 마고 아들과 딸로 떳떳하게 살아라. 기쁜 마음과 자원하는 마음으로 모든 일을 해 나가라.”
예수님이 우리의 스승이 되어 우리를 가르치고 계십니다. 혹시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더 이상 그것에 억눌리지 마십시오. 왜 나는 여기까지밖에 못하냐고, 나는 왜 이렇게 가진 게 없냐고 절망하지도 마십시오. 그런 것들이 우리를 규정할 수 없습니다. 주님과 함께 다시 일어서면 됩니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권한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당당히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 제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입니다. 이제 주님이 주시는 지혜로 살아가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미 스승입니다. 생명이 있다면 스승입니다. 힘이 있어도 스승입니다. 지식이 있다면 스승입니다. 달란트가 있어도 스승입니다. 의욕이 있으면 스승입니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이 귀한 자원을 가지고 주님을 닮아가는 스승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이 시대의 축복의 통로로 사용하시길 원하십니다. 또, 스승이신 예수님을 닮아가도록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이 놀라운 축복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 되길, 그리하여 이 땅의 다음세대들에게 존경받는 스승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한복음 8: 31 ~ 36
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33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35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우리의 진정한 스승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모두 자랑거리가 있습니다. 제게도 많은 자랑할 내용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큰 자랑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예수님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생각만 해도 너무나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예수님은 저에게 감동을 주시면서 다가오셨습니다. 저의 자존감을 높이 세워 주셨고, 이 땅에서 어떤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지 사명도 허락해 주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저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사죄의 은총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내가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지를 가르쳐 주신 선생님이기도 합니다. 지혜로운 스승이십니다. 그래서 저는 ‘어떻게 하면 예수님처럼 지혜로운 선생이 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한 적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믿음의 사람들의 멘토이자 진정한 스승이십니다.
예수님은 ‘감동’을 주시는 스승입니다.
오늘은 스승 되시는 예수님의 특징을 세 가지로 정리해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첫 번째 특징은, 예수님이 우리 삶에 깊은 ‘감동’을 일으켜 주신 스승이시란 점입니다.
이번 대선에서 새로운 지도자로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되었습니다. 그가 당선된 지 벌써 두 주간이 지났습니다. 한국갤럽 조사 결과, ‘앞으로 5년 동안 문재인 대통령이 대통령으로서의 직무 수행을 어떻게 할 것 같은가?’에 87%가 ‘잘할 것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7%는 ‘잘 못할 것이다’라고, 그밖에 6%는 의견 유보로 답변을 했습니다.
특별히 그가 국민에게 감동을 준 몇 가지 사건이 있었습니다. 지난 5월 18일, 제37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37년 전 5월 18일에 태어난 김소형 씨가 ‘슬픈 생일’이란 제목으로 당시 희생당한 아버지를 그리며 편지를 낭독했습니다. 그녀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며 편지를 읽었고, 편지를 다 읽고 단에서 내려가려는데 문 대통령이 앞으로 나와 그녀를 안아주었습니다. 이후 김소형 씨는 대통령의 품이 아버지처럼 따뜻했다고 심경을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초등학생들과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주저앉아 대화하는 대통령의 모습이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119 구급차가 지나갈 때는 먼저 지나가도록 도로 옆으로 차를 비켜 주는 모습도 국민들에게 인상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런 모습이 국민들에게 감동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한 가지입니다. 자신이 쓸 수 있는 권력을 유보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권력을 잠시 침묵시킬 수 있는 권력자, 권력을 위임해 준 국민에게 그 권력을 다시 돌리는 권력자의 모습에서 국민이 깊은 감동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는 대통령에게만 국한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관계의 모든 역학 구조 속에서도 생기는 모습입니다.
또한 새 대통령에게 무엇을 바라는지에 대해서도 물었습니다. 갤럽 조사 결과, 첫 번째가 바로 ‘초심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즉, 처음 마음을 지키며 끝까지 잘하길 바라는 마음이 온 국민에게 있는 것입니다. 대통령 후보 시절엔 모든 후보가 얼마나 소통을 잘합니까? 시장에서 장사하는 분들과도 자연스럽게 소통합니다. 어린아이들을 가슴에 껴안기도 합니다. 지나가던 사람들에게도 다가가 악수를 건네며 국민들의 소리에 귀 기울이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런데 대통령이 된 후 권위주의적인 모습으로 변질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소통이 아니라 불통인 사람, 듣는 귀가 먹고 명령만 하는 권력주의적인 사람, 그렇게 낡은 신념과 습관만을 가진 사람으로 머무는 사람…. 우리는 역사 속에서 이러한 권력자들의 모습을 여러 번 경험해 왔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대통령에게 바라고 있습니다. 나라를 사랑하고 국민을 섬기는 그 초심이 변치 않기를, 우리가 대한민국 국민인 것에 자부심을 느낄 수 있도록 멋진 지도자가 되기를 바라며 기대합니다. 앞으로도 5년 간 지금과 같은 마음과 자세로 직무를 감당한다면, 아마 참으로 좋은 대통령이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 믿음의 성도들도 함께 기도할 이유가 있습니다.
다시 예수님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감동을 주신 분이 누구일까요? 어떤 권력자와도 비교할 수 없고, 어떤 인간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큰 감동을 주신 분, 그분은 단연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가장 큰 권력을 갖고 계셨지만 가장 권력 없는 자처럼, 무능한 자처럼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영광과 존귀를 받으셔야 마땅한 분이심에도 한없이 낮고 천한 곳에 오시기를 마다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예수님이 만난 사람들은 아무 힘없는 민초들이었습니다. 배고픈 사람, 병약한 사람, 인간 대접 받지 못하고 신음하던 사람, 자기 존재 이유를 알지 못해 방황하던 사람들을 예수님이 친히 만나주시고 접촉하시며 그들의 삶을 안아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섬김의 삶을 사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나가면 절감하는 게 있습니다. ‘아, 세상은 힘의 세계구나. 권력의 세계구나.’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낍니다. 힘 있는 자들은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아니 더 큰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철저하게 마키아벨리즘을 동원합니다. 마키아벨리즘(Machiavellism)이란 일종의 국가권력주의를 뜻합니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속임수와 표리부동한 방법 등을 동원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즉, 남을 지배하고 권력을 지속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키아벨리즘이 이 세속 사회에 가득합니다. 이렇게 살벌한 경쟁 구도 속에 우리가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신 예수님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셨습니다. 자기 탐욕과 자기 보신에 힘썼던 권력자들의 역사와는 전혀 다른 길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한 삶이었고, 자신을 높이려 함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인 우리를 높이려 하신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가장 잘 요약한 구절이 있다고 하면, 어떤 구절일까요? 바로 마가복음 10장 45절입니다.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가복음 10:45)
세상 권력자들은 자기 배와 욕심을 채우는 데 급급한데, 예수님은 전혀 다른 방법으로 나아가셨다는 것입니다. 섬김을 받아야 할 분이 섬기셨고, 존귀를 받아야 할 분이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 힘없고 아픈 자들, 연약한 자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생명까지도 내어 놓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살벌한 인류 역사를 사랑과 섬김의 역사로 뒤집기 시작하셨습니다. 역사를 변화시키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길에 깊이 감동 받은 사도 바울도 로마서에서 다음과 같이 우리를 가르칩니다. 로마서 5장 7~8절의 말씀입니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7~8)
잘나가는 사람, 힘 있는 사람, 의인이라고 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죽기를 각오하는 사람이 더러 있지만, 죄인이나 세상에서 천대 받는 사람을 위해 자기 몸을 바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우리를 위해 당신 몸을 내놓으시고 십자가 고난의 길을 가셨습니다. 그리고 친히 죽임 당하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런 분이 도대체 어디 있을까요?
바울을 말합니다. 그분을 보니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바울이 예수님의 고난의 길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죄인 된 우리를 의인으로 변화시키시고, 죄의 종을 의의 사람으로 바꾸시고, 사탄의 노예였던 우리를 감히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삼아주신 예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저와 여러분이 바로 그 축복의 자리에 들어왔다는 사실입니다.
영광의 주님이 가장 비참한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실은 세상 권력자가 갖고 있는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고귀한 진리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요, 하나님의 구원사 속에 있는 존귀한 사건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가 감동을 받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당신 몸을 내놓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바라보며, “예수님, 내가 예수님으로 인해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내가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깨닫습니다. 내가 당신으로 인해 사랑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자아 정체성’을 바로 세워 주시는 스승입니다.
두 번째 특징은,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놀랍게도 자존감을 회복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자아 정체성’을 발견하게 해 주셨습니다.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깨닫게 해 주신 것입니다.
저는 청년 때 자존심이 매우 셌습니다. 그런데 자존감은 결여돼 있었습니다. 남과 비교해 조금 잘했다 싶고 남이 칭찬하면 으쓱댔고, 남이 비판하면 열불이 나고 화가 나서 어쩔 줄 몰라 했던 사람입니다. 그만큼 자존심은 세고 자존감은 부족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알게 된 후, 예수님 안에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내가 존재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심으로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얼마나 복된 존재인지, 내가 얼마나 특별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는 특별한 존재다.” 우리가 가난해도 가난이 우리의 자존감을 해치지 못 합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이런 말 저런 말을 들어도, 나는 그것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사람입니다. 성경에서도 그런 인물들이 많이 나옵니다. 환경에 의해 자기 자신을 규정하다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된 사람들 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난 후 자기 자신을 억누르던 족쇄에서 해방되었습니다.
맹인이자 거지였던 바디매오는 늘 구걸하는 인생이었습니다. 아마 그는 자신이 돈에 의해 규정되고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만나면서 변화됩니다. “어떤 돈도, 어떤 사람도 나를 얽어맬 수가 없구나!”라고 외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마가복음 10장 52절에 보면, 예수님이 다음과 같은 말씀을 바디매오에게 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마가복음 10:52 중)
이 말씀을 들은 후, 그는 더는 구걸하지 않는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나의 나 됨의 축복을 누리는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누구도 자신을 규정할 수 없고, 어떤 물질로도 자신이 규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 당대에 비난 받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세리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만나 주셨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나라도 선포하시며 그들과 밥상도 함께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조롱했습니다. “저 예수, 세리와 죄인의 친구구나!”
하지만 예수님과 함께한 세리와 죄인들은 그간의 억압에서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에 의해 자기를 규정했던 그 족쇄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 나는 예수님과 동행하는 하나님의 사람이구나!’
키가 작아 고통 받았던 삭개오도 그렇게 변화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자기가 살고 있던 성에 들어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뽕나무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이 삭개오에게 내려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맞아주신 예수님께 감동해 자신의 재산을 내어놓습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다고 말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9장 9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누가복음 19:9)
내 외모, 키, 삶의 환경이 나를 규정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이 이것을 깨뜨려 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삭개오 역시 예수님을 만나면서 자신도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을 알게 됩니다.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며 자존감을 회복하게 된 것입니다.
2,000년 전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들 역시 얼마나 차별받던 존재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여성들 또한 예수님을 통해 자기 정체성을 새롭게 깨닫습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십자가 고난의 길을 가시기 전, 예수님의 머리 위에 향유 옥합을 깨트린 여인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는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불렀습니다. 메시아란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입으로만이 아니라 몸으로 직접 이 표현을 나타냅니다. 아주 값비싸고 귀한 향유를 예수님 머리 위에 부으며, 그분이 정말 기름 부음 받은 자인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마가복음 14장 9절에 기록돼 있습니다.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마가복음 14:9 중)
복음이 전해지는 모든 곳에 이 여인이 행한 일이 알려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선언해 주신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 의해 너를 규정하지 마라. 성별에 의해서도 너를 규정하지 마라. 너는 하나님의 사랑 받는 복된 여인이라!”
우리는 하나님께 사랑받는 존재입니다.
여러분, 나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를 부끄럽게 만드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결코 그런 것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한 교수가 학생들 앞에 오만 원 권 지폐를 꺼내 들었습니다. 그리곤 막 구겨버립니다. 땅바닥에 던져 발로 밟기도 합니다. 진흙탕 속에 집어넣곤 흙 범벅이 되게도 합니다. 그런 뒤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이거 가질 사람?” 학생들이 손을 들었을까요, 안 들었을까요? 전부 다 들었습니다. “저요!”라고 외치면서 말입니다. 왜일까요? 구겨졌다 해도, 흙탕물에 들어갔어도, 오만 원의 가치는 사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가 넘어졌다 해도, 또 실패했다 해도, 내가 다른 사람보다 돈이 좀 없어도, 월세 집에 산다 해도, 대학교를 안 나왔다고 해도,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입니다. 더 이상 세상의 기준이 나를 억누르지 않도록 나 자신의 정체성을 하나님 안에서 바로 세워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이 일을 해 주셨습니다. 우리 인생의 족쇄, 그 사슬을 풀어주셨습니다. 그리곤 우리에게 “너는 소중한 존재다. 너는 값진 존재야. 너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존재란다.”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저는 권사 월례회 때마다 아가서 6장 10절 말씀을 권사님들과 함께 읽습니다. “아침 빛 같이 뚜렷하고 달 같이 아름답고 해 같이 맑고 깃발을 세운 군대 같이 당당한 여자가 누구인가?”라고 외치면, 권사님들이 오른 손을 번쩍 들어 가슴에 대고 이렇게 말합니다. “바로 나!”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나 자신의 정체성을 재발견하는 일입니다. 이를 통해 내가 환경이나 여건에 의해 규정되는 사람이 아니란 걸 알게 됩니다. 즉, 하나님에 의해서 나 자신을 바로보고, 내가 얼마나 그분께 사랑받는 존재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이웃과 하나님나라로 초청’하시는 스승입니다.
스승 예수님의 세 번째 모습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게 된 사람은 이웃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이 됩니다. 그동안 자신만을 위해 살았는데, 예수님이 다가오셔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얘야, 이제 너도 너만을 위해 살지 말고 이웃을 위해 살지 않으련? 하나님나라를 위해 네 인생을 사용하지 않으련?” 예수님의 이 부르심에 우리가 초청되었습니다.
갈릴리바다에서 어부 생활을 했던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당시 그들의 인생 목표가 무엇이었겠습니까? 물고기를 많이 잡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으로 생계를 이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라.” 그렇게 예수님이 그들의 삶을 인도하셨습니다. 이후 오순절엔 성령이 임하여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욜2:28~29; 행2:17~18)라는 예언도 성취됩니다. 갈릴리바다의 어부들이 세계를 가슴에 품는 하나님의 종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제자들을 만나신 목표는 한 가지입니다. 우리가 자유자라는 것,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는 것, 사탄의 노예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더는 열등감과 교만으로 자신을 규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 31~32절을 우리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한복음 8:31~32)
진리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 아닙니까! 그 예수 그리스도를 알면 우리를 억압하던 모든 억눌림에서 해방될 것이며 자유자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기독교는 이 자유를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종처럼 살지 마고 아들과 딸로 떳떳하게 살아라. 기쁜 마음과 자원하는 마음으로 모든 일을 해 나가라.”
예수님이 우리의 스승이 되어 우리를 가르치고 계십니다. 혹시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더 이상 그것에 억눌리지 마십시오. 왜 나는 여기까지밖에 못하냐고, 나는 왜 이렇게 가진 게 없냐고 절망하지도 마십시오. 그런 것들이 우리를 규정할 수 없습니다. 주님과 함께 다시 일어서면 됩니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권한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당당히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 제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입니다. 이제 주님이 주시는 지혜로 살아가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미 스승입니다. 생명이 있다면 스승입니다. 힘이 있어도 스승입니다. 지식이 있다면 스승입니다. 달란트가 있어도 스승입니다. 의욕이 있으면 스승입니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이 귀한 자원을 가지고 주님을 닮아가는 스승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이 시대의 축복의 통로로 사용하시길 원하십니다. 또, 스승이신 예수님을 닮아가도록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이 놀라운 축복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 되길, 그리하여 이 땅의 다음세대들에게 존경받는 스승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7년 5월 21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자유자로 이끄시는 스승, 예수!”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421, 428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요 8:31-36 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생각하기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동시에 예수님은 우리의 삶을 가르쳐 주신 지혜로운 선생님이십니다. 예수님은 그 분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멘토가 되시고, 또한 스승이 되십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은 세 가지의 특성을 지니고 계십니다.
설교의 요약
첫 번째, 예수님은 우리의 삶에 깊은 감동을 불러일으키신 스승이십니다. 쓸 수 있는 권력을 유보하는 사람들을 보며 우리는 감동을 받습니다. 가장 큰 권력을 가지신 예수님이 무능한 자처럼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영광과 존귀를 받아야 할 분이 영광의 흔적도 찾아 볼 수 없는 낮고 천한 자리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만 높아지려 하는 세상 권력자들의 모습과는 반대의 방법으로 그 삶을 보여주셨습니다.(막 10:45) 자기 배를 불리고 세상 욕심을 채우려는 세상 권력자들과는 전혀 다른 방향이었습니다. 섬김을 받아야 할 분이 섬기셨고, 힘없는 자들, 아픈 자들, 연약한 자들의 친구가 되기를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우리를 높여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주신 선생님이십니다.
두 번째, 예수님은 자존감을 북돋아주는 스승이십니다. 예수님 앞에 선 사람들은 나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내가 특별한 존재임을, 세상의 조건에 규정되지 않음을 가르쳐주십니다. 예수님은 돈의 가치에 의해서(거지 바디매오, 막10:52), 직업의 귀천에 의해서(세리와 죄인의 친구), 외모나 환경에 의해서(삭개오, 눅 19:9), 성별에 의해서(향유 부은 여인, 막 14:9) 우리가 규정받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부끄럽게 여겼던 것, 내게 열등감을 주었던 것에 의해 규정받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남과 비교하며 우월감에 빠지거나 열등감에 빠지지 말라하십니다. 우리가 실패했어도 하나님의 자녀이고, 배우지 못했어도 하나님의 자녀이고, 가난해도 하나님의 자녀임을 가르쳐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자존감을 북돋아주는 선생님이십니다.
세 번째, 예수님은 나도 다른 사람을 위해 해야 할 사명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스승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나 자신만을 위해 사는 것이 당연한 줄 알았던 우리가 남을 위해서 살 수 있다는 결단에 이르도록 초청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로 하여금 세계를 가슴에 품고 복음을 위해 쓰임 받도록 불러주셨습니다. 물질이 인생 전체의 관심이었던 그에게 물질보다 더 큰 인간의 가치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인생의 비전과 목표를 발견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사명이 있음을 깨닫게 하는 스승이십니다.
예수님이 가지신 목표는 우리를 자유자로 세우는 것입니다.(요 8:31)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자유자가 됩니다. 예수님은 완벽한 스승이십니다. 우리도 또한 누군가의 스승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감동을 주시고, 자존감을 북돋아주시고, 사명을 깨닫게 하시는 스승 되신 예수님을 자랑하며, 예수님을 닮아가며 살아가시는 여러분 되길 축복합니다.
나누기
1. 스승 되신 예수님의 세 가지 특성을 자신의 삶에서 깨닫고 경험한 적이 있다면 함께 나눠봅시다.
2. 나의 스승 되신 예수님은 어떠한 분이신지, 자신이 경험한 스승으로서의 예수님의 모습을 이야기해봅시다.
3. 자신이 누군가에게 스승이 되는지 생각해봅시다. 또한 예수님을 닮아가는 스승으로서의 자신에게 채워져야 할 모습이 있다면 무엇일지 생각해봅시다.
마무리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인생과 신앙의 스승 되신 예수님을 믿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닮아가는 스승들이 되게 하옵소서. 오직 예수님을 닮아감으로 세상을 향해 담대히 나가 승리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