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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하게 하는 영

고린도후서 3: 12 ~ 18

김지철 목사

2010.02.14

성경은 자유의 책입니다

신앙의 부모님이 있다는 것은 자녀에게 큰 축복입니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을 통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인생의 최고 가치인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신앙의 부모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다른 측면에서 보면 큰 부담일 수도 있습니다. 어렸을 때는 교회도 잘 다니고 기도도 잘했지만, 어느 순간 꺼림칙한 권위주의에 대한 저항감이 생겨납니다. ‘이것은 내 뜻대로 하는 것이 아니야. 이것은 내 신앙이 아니라 부모님의 신앙이야. 지금까지 한 것은 내 기도가 아니라 부모님이 시켜서 억지로 한 거야. 그동안 교회에 나갔던 것도 강요 때문이었어.’
저도 마찬가지로 신앙의 가정에서 자랐고 어려서부터 가정예배를 드렸습니다. 기도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행동이었고 교회에 가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이것은 내 신앙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중고등학교 시절에 눈에 띄었던 단어가 있었습니다. 바로 ‘자유’라는 단어였습니다.
어찌 보면 성경은 자유의 책이요 해방의 책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종 되었던 애굽 땅에서 가나안으로 가는 것 자체가 자유의 행로요 해방의 여정이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다시 자세하게 읽어보았더니 자유라는 말이 곳곳에 있었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누가복음 4:18)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한복음 8:31~32)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요한복음 8:36)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갈라디아서 5:1)

‘자유’라는 말은 매력적인 언어입니다. 우리는 ‘자유’라는 말을 들으면 설렙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마음속에 고뇌가 시작되었습니다. ‘정말 예수님을 믿으면 자유로워지는 것인가? 예수님이 진리이신가? 예수님이 생명이신가? 예수님만 있으면 내가 자유의 생을 누릴 수 있는 것인가?’
지금 목사로서 여러분에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선물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주님 자체가 자유이십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마다 자유가 선포되고 자유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죄로 고통 받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참다운 인생의 목적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2000년 기독교 역사 속에 나타난 모습입니다.

신앙이란 예수님을 향해서 마음의 문을 활짝 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처음에는 불편해집니다. 지금까지 내 마음대로 살던 삶에 목표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목적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자유의 길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때로는 지금까지 익숙해졌던 습관들을 잘라버려야 합니다. 자유하지 못하게 하는 것들을 잘라내야 합니다. 그래서 결단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인생의 주님이라는 고백은 우리의 생각의 전환, 마음의 전환, 사고의 전환, 판단력의 전환, 삶의 전환을 강력하게 요구하는 고백입니다.
본문은 유대인에 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어려서부터 율법을 읽고 배워왔습니다. 그들은 말씀에 정통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저항했습니다. 예수님을 향하여 핍박했습니다. 예수님을 원수로 여기며 십자가의 길로 내몰기까지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모습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고린도후서 3:14)

이스라엘 백성이 완악했다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완고해져서 꽉 닫혀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구약을 다 꿰뚫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스스로 보기에도 똑똑하며 명철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보기에는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데 인색했습니다. 새로운 것에 대해서 마음의 문을 열지 않고 거절했습니다.
신앙이란 무엇일까요? 교리를 외우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신앙이란 예수님을 향해서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놓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 전체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얻은 지식은 소중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사상, 가치관과 세계관이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한걸음 더 도약해야 합니다.
우리는 내가 어디에 속해 있는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어렸을 때는 부모님에게 소속되어 있습니다. 학교에 들어가면 학교에 소속됩니다. 직장에 가면 직장에 소속됩니다. 이 땅에 살면 대한민국에 소속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내가 갖고 있는 생각과 지식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변화될 것, 없어질 것이 아니라 더 궁극적인 것, 진리의 것, 진정으로 인간을 자유하게 하는 것에 네 인생 전체를 소속시켜라!”
신앙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예수님께서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과 지혜보다 더 큰 하늘의 지혜를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향해서 집중해 보라는 것입니다.

종교인이 되지 말고 신앙인이 되십시오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고린도후서 3:15)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바라볼 때 그들이 마음의 수건을 덮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도 들리지 않고, 들어도 깨달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읽지만 자기 생각대로 말씀을 왜곡시킵니다. 말씀을 자기 입맛에 맞게 해석합니다. 그리고 남을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만의 이야기일까요? 이것은 우리가 예수를 믿기 전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아니, 우리가 예수를 믿은 후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내가 보고 싶은 대로 세상을 바라보았습니다. 예수님은 필요할 때만, 위기가 다가왔을 때만 요청하였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는 자유롭지 못합니다. 신앙의 기쁨이 생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를 믿는 것이 부담이 되고 무거운 짐이 됩니다. 믿음이 나를 자유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족쇄를 채웁니다. 조그만 평안, 헛된 안심, 일시적인 위로에 머무르려 합니다. 참된 믿음의 삶이 아니라 형식적인 종교생활에 머물게 만듭니다.
믿음과 종교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구약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끊임없이 예언자를 보내셨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편의주의적인 종교행위로 바뀌어 지는 것을 몹시 안타까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저 형식적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값싼 은혜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당시의 종교 엘리트들이었던 바리새인, 서기관들과 충돌하셨을까요? 바리새인들은 정결예법을 잘 지켰습니다. 음식을 먹기 전에는 손을 닦았습니다. 정결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을 구분했습니다. 그리고 정결한 음식만 먹었습니다. 안식일의 규례를 따르고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인정을 받았습니다. 율법을 지키려면 저들처럼 지키라고 칭찬받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종교인이지 신앙인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에 안주했을 뿐이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참되게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습관에 젖어서 편파적 이데올로기로 자기의 삶을 지탱하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비판하십니다. 그들은 생명력 넘치는 신앙을 형식만 남은 종교로 고착화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들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 도전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죽은 종교, 형식만 남은 종교를 믿지 말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으라.”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가 있습니다

종교개혁을 포함하여 모든 영적인 회복의 자리에는 예수님이 있습니다. 우리가 자유롭게 되려면 예수님께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종교로 돌아가지 말고 예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고린도후서 3:16)

여기서 주는 예수님입니다. 언제든지 주님께로 돌아가면 내가 갖고 있던 편견과 고정관념, 오만과 삶의 찌꺼기들, 영적인 회복을 방해하는 것들이 다 벗겨질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로 돌아가는 것에 변화와 개혁이 있습니다. 갱신과 성숙이 있습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고린도후서 3:17)

예수님은 영이십니다. 성령이십니다.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시간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내게 오시면 시간을 꿰뚫는 영원한 세계가 우리 속에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는 공간 속에 묻혀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내 안에 오시면 이 지상의 보이는 세계가 아니라 하늘의 세계를 내 가슴에 품게 만드십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우리의 시야가 넓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확대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예수님의 영이십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할 때 우리는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이렇게 아뢰어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여기 왔습니다. 말씀해주시옵소서.”
길을 가다가도 기도하면서 물어야 합니다. “성령님이시여 내 안에 오시옵소서.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가 어떻게 살아야 될까요? 제가 어떤 길로 가야될까요? 제가 어떻게 살아야 참 자유자로 살 수 있을까요?”
성경은 살아계신 성령께서 내 안에 오실 때 우리를 진리로, 생명으로, 자유하게 하는 자리로 초청하십니다.

자유를 막는 수건을 벗고 진정한 자유자가 되십시오

진정으로 주님 안에서 자유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먼저 세상에서 고독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을 선택했으면 부차적인 것들은 잘라내야 합니다. 과거의 종으로 살던 악한 습관을 잘라버리지 않으면 새 것이 내 안에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입혀주시는 그리스도의 새 옷을 입기 위해서는 먼저 옛 옷을 훌훌 벗어버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종 되었던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셨습니다. 자유의 역사와 해방의 여정으로 그들을 끄집어냈습니다. 애굽에서부터 가나안까지는 일주일이면 충분했고, 이주일이면 모든 백성이 건너갈 수 있는 짧은 거리였습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무려 40년 동안의 광야 생활을 하게 되었을까요?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에 찌든 찌꺼기들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노예근성이 그들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종 된 모습으로 빌어먹었던 생각들이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그들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유 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이 찌꺼기들을 다 쓸어내기 위해서 무려 40년의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단축시킬 수 있습니다. 먼저 옛 습관, 우리가 익숙해있던 것을 잘라버리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유자가 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자유라는 것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발적으로, 기쁨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자유가 없는 사람은 억지로 하고, 강제로 하고, 대가를 바라보면서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자유자는 감사함으로 합니다. 은혜 때문에 합니다. 그것이 좋아서 합니다. 강제로 예배에 오라고 하면 몇 번이나 올 수 있겠습니까? 강제로 새벽에 기도하라고 하면 몇 번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안에 있는 예수님을 기뻐하는 마음이 나로 하여금 예배드리게 하고 기도하게 하고 하나님께 나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자유는 성숙한 기쁨을 가진 사람들이 누리는 특권입니다.
세 번째,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분별할 수 있고 판단할 수 있는 지혜의 분별력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판단력을 가지고 하나님까지 판단합니다. 예수님도 판단합니다. 교회도 판단합니다. 목사를 향해서도 판단합니다. 그런데 진정한 자유자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 대해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만 판단하면 남을 정죄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을 판단하게 되면 남도 너그럽게 대할 수 있는 사랑의 사람으로 승화됩니다. 그래서 진리는 자유와 연결이 되어 있고, 자유는 사랑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복음은 바로 이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우리 마음에 아직도 수건이 덮여있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 아집과 편견, 내가 지금까지 쌓아왔던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나를 사랑하시는 예수님께 마음의 문을 열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말씀으로 내게 가르쳐 주옵소서. 성령님이여 내안에 임하소서. 나로 하여금 생명과 진리와 자유의 영으로 충만하게 하옵소서. 이제는 내가 주님을 향하여 가리이다!” 이렇게 고백하며 선포하고 결단하는 하나님의 귀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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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3: 12 ~ 18

12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13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14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15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16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성경은 자유의 책입니다

신앙의 부모님이 있다는 것은 자녀에게 큰 축복입니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을 통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인생의 최고 가치인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신앙의 부모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다른 측면에서 보면 큰 부담일 수도 있습니다. 어렸을 때는 교회도 잘 다니고 기도도 잘했지만, 어느 순간 꺼림칙한 권위주의에 대한 저항감이 생겨납니다. ‘이것은 내 뜻대로 하는 것이 아니야. 이것은 내 신앙이 아니라 부모님의 신앙이야. 지금까지 한 것은 내 기도가 아니라 부모님이 시켜서 억지로 한 거야. 그동안 교회에 나갔던 것도 강요 때문이었어.’
저도 마찬가지로 신앙의 가정에서 자랐고 어려서부터 가정예배를 드렸습니다. 기도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행동이었고 교회에 가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이것은 내 신앙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중고등학교 시절에 눈에 띄었던 단어가 있었습니다. 바로 ‘자유’라는 단어였습니다.
어찌 보면 성경은 자유의 책이요 해방의 책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종 되었던 애굽 땅에서 가나안으로 가는 것 자체가 자유의 행로요 해방의 여정이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다시 자세하게 읽어보았더니 자유라는 말이 곳곳에 있었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누가복음 4:18)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한복음 8:31~32)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요한복음 8:36)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갈라디아서 5:1)

‘자유’라는 말은 매력적인 언어입니다. 우리는 ‘자유’라는 말을 들으면 설렙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마음속에 고뇌가 시작되었습니다. ‘정말 예수님을 믿으면 자유로워지는 것인가? 예수님이 진리이신가? 예수님이 생명이신가? 예수님만 있으면 내가 자유의 생을 누릴 수 있는 것인가?’
지금 목사로서 여러분에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선물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주님 자체가 자유이십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마다 자유가 선포되고 자유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죄로 고통 받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참다운 인생의 목적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2000년 기독교 역사 속에 나타난 모습입니다.

신앙이란 예수님을 향해서 마음의 문을 활짝 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처음에는 불편해집니다. 지금까지 내 마음대로 살던 삶에 목표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목적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자유의 길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때로는 지금까지 익숙해졌던 습관들을 잘라버려야 합니다. 자유하지 못하게 하는 것들을 잘라내야 합니다. 그래서 결단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인생의 주님이라는 고백은 우리의 생각의 전환, 마음의 전환, 사고의 전환, 판단력의 전환, 삶의 전환을 강력하게 요구하는 고백입니다.
본문은 유대인에 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어려서부터 율법을 읽고 배워왔습니다. 그들은 말씀에 정통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저항했습니다. 예수님을 향하여 핍박했습니다. 예수님을 원수로 여기며 십자가의 길로 내몰기까지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모습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고린도후서 3:14)

이스라엘 백성이 완악했다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완고해져서 꽉 닫혀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구약을 다 꿰뚫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스스로 보기에도 똑똑하며 명철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보기에는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데 인색했습니다. 새로운 것에 대해서 마음의 문을 열지 않고 거절했습니다.
신앙이란 무엇일까요? 교리를 외우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신앙이란 예수님을 향해서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놓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 전체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얻은 지식은 소중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사상, 가치관과 세계관이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한걸음 더 도약해야 합니다.
우리는 내가 어디에 속해 있는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어렸을 때는 부모님에게 소속되어 있습니다. 학교에 들어가면 학교에 소속됩니다. 직장에 가면 직장에 소속됩니다. 이 땅에 살면 대한민국에 소속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내가 갖고 있는 생각과 지식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변화될 것, 없어질 것이 아니라 더 궁극적인 것, 진리의 것, 진정으로 인간을 자유하게 하는 것에 네 인생 전체를 소속시켜라!”
신앙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예수님께서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과 지혜보다 더 큰 하늘의 지혜를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향해서 집중해 보라는 것입니다.

종교인이 되지 말고 신앙인이 되십시오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고린도후서 3:15)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바라볼 때 그들이 마음의 수건을 덮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도 들리지 않고, 들어도 깨달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읽지만 자기 생각대로 말씀을 왜곡시킵니다. 말씀을 자기 입맛에 맞게 해석합니다. 그리고 남을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만의 이야기일까요? 이것은 우리가 예수를 믿기 전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아니, 우리가 예수를 믿은 후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내가 보고 싶은 대로 세상을 바라보았습니다. 예수님은 필요할 때만, 위기가 다가왔을 때만 요청하였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는 자유롭지 못합니다. 신앙의 기쁨이 생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를 믿는 것이 부담이 되고 무거운 짐이 됩니다. 믿음이 나를 자유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족쇄를 채웁니다. 조그만 평안, 헛된 안심, 일시적인 위로에 머무르려 합니다. 참된 믿음의 삶이 아니라 형식적인 종교생활에 머물게 만듭니다.
믿음과 종교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구약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끊임없이 예언자를 보내셨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편의주의적인 종교행위로 바뀌어 지는 것을 몹시 안타까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저 형식적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값싼 은혜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당시의 종교 엘리트들이었던 바리새인, 서기관들과 충돌하셨을까요? 바리새인들은 정결예법을 잘 지켰습니다. 음식을 먹기 전에는 손을 닦았습니다. 정결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을 구분했습니다. 그리고 정결한 음식만 먹었습니다. 안식일의 규례를 따르고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인정을 받았습니다. 율법을 지키려면 저들처럼 지키라고 칭찬받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종교인이지 신앙인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에 안주했을 뿐이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참되게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습관에 젖어서 편파적 이데올로기로 자기의 삶을 지탱하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비판하십니다. 그들은 생명력 넘치는 신앙을 형식만 남은 종교로 고착화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들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 도전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죽은 종교, 형식만 남은 종교를 믿지 말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으라.”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가 있습니다

종교개혁을 포함하여 모든 영적인 회복의 자리에는 예수님이 있습니다. 우리가 자유롭게 되려면 예수님께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종교로 돌아가지 말고 예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고린도후서 3:16)

여기서 주는 예수님입니다. 언제든지 주님께로 돌아가면 내가 갖고 있던 편견과 고정관념, 오만과 삶의 찌꺼기들, 영적인 회복을 방해하는 것들이 다 벗겨질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로 돌아가는 것에 변화와 개혁이 있습니다. 갱신과 성숙이 있습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고린도후서 3:17)

예수님은 영이십니다. 성령이십니다.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시간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내게 오시면 시간을 꿰뚫는 영원한 세계가 우리 속에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는 공간 속에 묻혀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내 안에 오시면 이 지상의 보이는 세계가 아니라 하늘의 세계를 내 가슴에 품게 만드십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우리의 시야가 넓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확대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예수님의 영이십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할 때 우리는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이렇게 아뢰어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여기 왔습니다. 말씀해주시옵소서.”
길을 가다가도 기도하면서 물어야 합니다. “성령님이시여 내 안에 오시옵소서.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가 어떻게 살아야 될까요? 제가 어떤 길로 가야될까요? 제가 어떻게 살아야 참 자유자로 살 수 있을까요?”
성경은 살아계신 성령께서 내 안에 오실 때 우리를 진리로, 생명으로, 자유하게 하는 자리로 초청하십니다.

자유를 막는 수건을 벗고 진정한 자유자가 되십시오

진정으로 주님 안에서 자유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먼저 세상에서 고독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을 선택했으면 부차적인 것들은 잘라내야 합니다. 과거의 종으로 살던 악한 습관을 잘라버리지 않으면 새 것이 내 안에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입혀주시는 그리스도의 새 옷을 입기 위해서는 먼저 옛 옷을 훌훌 벗어버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종 되었던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셨습니다. 자유의 역사와 해방의 여정으로 그들을 끄집어냈습니다. 애굽에서부터 가나안까지는 일주일이면 충분했고, 이주일이면 모든 백성이 건너갈 수 있는 짧은 거리였습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무려 40년 동안의 광야 생활을 하게 되었을까요?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에 찌든 찌꺼기들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노예근성이 그들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종 된 모습으로 빌어먹었던 생각들이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그들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유 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이 찌꺼기들을 다 쓸어내기 위해서 무려 40년의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단축시킬 수 있습니다. 먼저 옛 습관, 우리가 익숙해있던 것을 잘라버리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유자가 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자유라는 것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발적으로, 기쁨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자유가 없는 사람은 억지로 하고, 강제로 하고, 대가를 바라보면서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자유자는 감사함으로 합니다. 은혜 때문에 합니다. 그것이 좋아서 합니다. 강제로 예배에 오라고 하면 몇 번이나 올 수 있겠습니까? 강제로 새벽에 기도하라고 하면 몇 번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안에 있는 예수님을 기뻐하는 마음이 나로 하여금 예배드리게 하고 기도하게 하고 하나님께 나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자유는 성숙한 기쁨을 가진 사람들이 누리는 특권입니다.
세 번째,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분별할 수 있고 판단할 수 있는 지혜의 분별력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판단력을 가지고 하나님까지 판단합니다. 예수님도 판단합니다. 교회도 판단합니다. 목사를 향해서도 판단합니다. 그런데 진정한 자유자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 대해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만 판단하면 남을 정죄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을 판단하게 되면 남도 너그럽게 대할 수 있는 사랑의 사람으로 승화됩니다. 그래서 진리는 자유와 연결이 되어 있고, 자유는 사랑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복음은 바로 이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우리 마음에 아직도 수건이 덮여있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 아집과 편견, 내가 지금까지 쌓아왔던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나를 사랑하시는 예수님께 마음의 문을 열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말씀으로 내게 가르쳐 주옵소서. 성령님이여 내안에 임하소서. 나로 하여금 생명과 진리와 자유의 영으로 충만하게 하옵소서. 이제는 내가 주님을 향하여 가리이다!” 이렇게 고백하며 선포하고 결단하는 하나님의 귀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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