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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자를 찾아오신 주님

시편 68: 3 ~ 6

김지철 목사

2007.12.02

사람들은 작은 것보다 큰 것을 좋아합니다. 약한 것 보다는 강한 것을 선호합니다. 평범한 사람보다는 영웅을 뒤따르려고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속성들이 욕심 때문에 혹은 안전과 이익 때문에 더 큰 것을 요청합니다.
아들 둘을 가진 아버지가 어느 날 맛있는 파이를 사들고 집으로 왔습니다. 이것을 본 형과 동생은 자기가 먼저 먹겠다고 다투기 시작합니다. 파이를 더 크게 잘라서 자기 몫을 챙기겠다고 우기며 형제간의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일반적으로 형제들의 싸움은 자기 몫으로 더 큰 것을 차지하려는 다툼입니다. 아버지는 이렇게 아들 둘이 다투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아들들에게 제안을 합니다. “얘들아, 누가 이 파이를 먼저 자르든지 상관이 없다. 두 조각으로 나누어라. 어떤 것을 크게 자르던지 상관이 없다. 그러나 먼저 칼을 들고 자른 사람은 선택권이 없다. 칼을 들지 않는 사람이 파이를 먼저 가져갈 선택권을 갖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아들은 파이를 조금이라도 크게 자르면 상대방이 가져갈까봐 아주 조심하며 똑같이 절반으로 잘랐습니다.
우리는 조금 더 큰 것, 조금 더 많은 것을 향해 관심을 집중합니다. 과거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시대는 영웅을 선호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늠름하고 용기 있고 재능 있는 사람을 만나면 예찬하며 뒤따르려고 합니다. 2007년 스포츠 분야에서 최고의 인물을 뽑으라고 하면 우리는 아주 어린 선수 두 명이 떠올립니다. 전혀 가능성이 보이지 못했던 수영계에 등장한 박태환 선수가 세계수영대회에서 일등을 했습니다. 그것도 자유형에서 일등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좋은지 국민들 모두 자신이 일등을 한 것처럼 환호했습니다. 박태환 선수는 아직 청년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18세의 청소년이기에 더 대견합니다.
또 체력과 기술에 있어서 결코 쉽지 않았던 세계피겨스케이팅대회에서 일등을 한 김연아 선수가 있습니다.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기술은 많은 사람들에게 경탄과 탄성을 지르게 했습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국민들이 기뻐하고 감사하며 격려와 축하의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화려한 조명을 받던 사람도 조금만 성적이 떨어지면 금방 사람들의 관심과 시선에서 사라집니다. 더 이상 기억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인기의 높낮이가 가장 심한 곳이 바로 한국의 연예계입니다. 우리는 인기와 비인기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민하며 살아가는 수많은 연예인들을 목격합니다. 어느 순간 번쩍 떴다가 이름도 없이 사라져가는 연예인들을 보면서 훌륭하게 여겨지다가도 불안하고 불쌍한 마음이 생기는 것도 사람들의 인기에 너무 민감하기 때문입니다.

영웅, 인기인, 다른 사람들보다 독특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성경은 어떻게 이야기할까요? 성경 속에도 영웅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성경은 영웅들의 이야기를 아주 잘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아브라함은 믿음의 영웅입니다. 어느 날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기가 살고 있던 삶의 모든 터전을 과감하게 내려놓습니다. 부모와 친척을 떠나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으로 갔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땅이 어디인지도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대로 순종하면서 뒤따라가 믿음의 아버지가 됩니다. 또한 백세에 난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라고 했을 때도 그가 불평하거나 저항했다는 말이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냥 묵묵히 산으로 아들을 데리고 가서 하나님께 아들을 바칩니다. 세상에 이런 아버지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충성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헌신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우리를 놀랍게 하는 신앙의 영웅으로 다가옵니다.
요셉은 수많은 기독청년들이 이 사람과 같이 되기를 꿈꾸는 인물입니다. 요셉은 집과 부모를 떠나서 타향에서 종살이를 했습니다. 그것도 감옥에 들어가서 옥살이를 했습니다. 그는 인생에서 가장 비천하고 낮은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에게 주신 하나님의 꿈은 하나님의 비전을 잃지 않게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간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자신을 이끌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결국 그는 최고의 자리까지 올라갑니다. 많은 기독 청년들이 이것을 보면서 자신들도 하나님 안에서 꿈을 꾸고 도전하면서 인생을 살아야겠다는 모험심을 갖는 것도 요셉이 갖고 있던 이런 영웅적인 신앙 때문입니다.
모세는 정치적이고 영적인 종교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애굽에서 고통 받던 자기 민족을 보면서 가슴 아파했습니다. 그때 그는 자기 민족 앞에 나서서 민족을 이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가슴을 뛰게 하는 시원함을 주는 민족의 지도자로서의 영웅적인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예수를 믿은 사람들에게 가장 큰 영웅으로 생각되는 사람은  소년 다윗입니다. 거대한 골리앗 장군 앞에서 20살도 안된 소년이 물맷돌 다섯 개로 골리앗의 이마를 맞추고 무너뜨렸습니다. 다윗의 용기와 담대함을 보면서 우리는 그의 모습이 참으로 영웅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우리도 다윗과 같은 용기와 담대함을 갖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이처럼 성경은 마치 영웅들의 이야기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다시 한 번 가만히 읽어보면 성경의 영웅들은 처음부터 영웅은 아니었습니다. 원래부터 탁월한 사람들이 아닌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작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쓰실 수 있게 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지식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불러주신 이유를 알았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쓰실 만한 사람으로 성숙하고 견고하게 되었고, 용기와 담대함도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선 자기를 작은 자, 별 볼일 없는 자라고 고백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다가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결코 작은 자가 아니야. 너는 무능력자가 아니야. 내가 너에게 능력을 줄 것이다. 내가 너를 사용할 것이다.”
그들도 처음에는 우리와 똑같이 작은 자들이었습니다. 자기 스스로 무언가 대단한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백성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서 고통을 받고 있다. 그 땅에서 종노릇을 하고 있다. 내가 그들을 저 가나안 땅까지 이끌려고 하는데 네가 좀 나서렴.”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때 모세는 “하나님, 저를 잘 부르셨습니다. 제가 가겠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나는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역부족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출애굽기 4:10)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내가 너의 입에 함께 있겠다. 내가 능력을 주겠다.” 그러나 다시 모세는 말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작은 자입니다.” 또 다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의 작은 모습을 감추겠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작은 자라고 여기는 모세를 달래서 사용하십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작은 자를 쓰실까요? 하나님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겠다고 작정하기 때문입니다.
삼 백 명의 군대로 미디안 적군 수 백 명과 싸워서 이긴 기드온이라는 용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불러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라고 말씀하실 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니이다” (사사기 6:15)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작은 자라고 여기는 기드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쓰겠다. 나의 능력을 믿고 나가라.”

이스라엘의 초대왕이었던 사울은 자기 스스로 작은 자라고 여길 때 하나님께서 높여주셨습니다. 사울이 기름 부어 왕이 될 것이라는 사무엘의 유언을 들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이스라엘 지파 중 가장 작은 지파인 베나민 사람이 아닙니까? 또 나의 가족은 베나민 지파 중에 가장 미약하지 않습니까? 당신은 어찌하여 내가 왕이 된다고 말씀하십니까?” 사울이 겸손했을 때 하나님은 그를 왕으로 높이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실패하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거만하게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스스로 무엇인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한 순간부터 사울은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사울 왕에게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여호와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시고” (사무엘상 15:17)

사무엘이 왕에게 당신 스스로 아무 것도 아닌 작은 자라고 여길 때 하나님께서 높이시고 영광을 주셨는데 왜 거만해져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느냐고 따지고 있습니다. 지도자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라는 처음 가졌던 겸손함을 잃어버리면 지도자의 삶의 내용은 땅에 떨어집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신앙인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고린도전서 1:27)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는 이런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 저는 미련하고 부족한 사람입니다. 능력이 없고 부끄러운 죄인입니다. 감히 주님 앞에 나올 수 가 없습니다.” 이런 고백을 하며 주님 앞에 무릎을 꿇었을 때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 말씀해 주십니다. “네가 왜 미련하냐? 네가 왜 부족하다고 하느냐? 내가 너에게 풍성함을 주는데 왜 능력이 없다고 하느냐? 내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데 왜 네가 부끄러운 죄인이냐? 내가 네 죄를 용서했는데 왜 그러느냐?”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실 때 우리는 다시 회복되어 하나님의 역사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위대한 사도 바울은 노년의 자신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디모데전서 1:15)

바울은 자신이 죄인 중에 죄수라고 고백하며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을 받았고, 성령에 의존하여 매일매일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인간상으로 성숙하고 변화되어 갔습니다.
세상의 정치인들, 연예인들은 자기 자랑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자기를 자랑해야 모든 것이 사람들에게 먹혀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은 사람보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작은 자를 귀하여 여기시는 당신 스스로 작은 자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를 빗대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마태복음 18:4)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가장 작은 자가 되는 겸손한 사람들에게 가까이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도와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왜 마음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을까요? 가난하고 애통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역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부자가 되어도 마음이 가난한 자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은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모든 것을 가진 풍요로운 자가 되어도 마음속에는 애통하는 진리를 향하고 있다면 분명 하나님께서 은총을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가장 작은 자로 마구간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가장 낮은 곳, 가장 비천한 이 땅에 오셨고 생이 끝날 때도 가장 낮고 비천한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그러셨을까요? 고아의 보호자와 재판장이 되시고 고독한 사람의 친구가 되기 위해서 그러셨습니다. 절망하는 사람들의 위로자가 되기 위해서 낮은 자리에 오셨습니다. 어느 누구도 예수님 안에 다 들어올 수 있도록 우리를 초청하셨습니다.
여러분이 갖고 있는 아픔이 어떤 것입니까? 여러분이 갖고 있는 괴로움과 부끄러움이 어떤 것입니까? 그것을 주님께 다 아뢸 때 주님은 받아주십니다.
성경은 작은 자의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양 백 마리 중 한 마리를 찾기 위해서 아흔 아홉 마리를 두고 나서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이것은 수학 공식이나 기업 공식으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사실입니다. 양 아홉 아흔 마리가 다 없어질 수도 있는데 한 마리를 찾아 나섭니다. 예수님에게는 한 영혼이너무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작은 자로 여기는 자가 예수님께는 결코 작은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작은 자가 가장 큰 자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창녀들에게 인생의 소망을 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이 접촉하기를 싫어하는 문둥병 환자들을 만나셔서 질병의 상처에 손을 얹으셨습니다. 혈루병을 앓는 여인이 사람들 앞에 나서기 부끄러워서 예수님의 뒤로 가서 옷자락을 만질 때 예수님은 그 여인을 향해서 돌아서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하는 딸의 육체적인 아픔과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인은 하나님의 처소는 거룩한 하늘이라고 말합니다(시편 68:5). 하나님이 계셔야 할 곳은 거룩한 곳, 인간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곳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약하고 작은 자를 찾으십니다. 그런 작은 자인 고아의 아버지, 과부의 보호자와 재판장이 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홀로 있는 사람들에게 가족과 친구가 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갇힌 자를 자유롭고 형통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이 큰 사랑 때문에 자신을 스스로 제한시키셨습니다. 우리와 똑같이 육체를 꼬집으면 아프고 찌르면 상처 나는 몸에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서른 세 살이라는 나이로 당신 자신을 제한시키며 낮아지셨습니다. 이는 오직 우리들을 붙잡고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은 작은 자를 싫어합니다. 연약한 자를 기피합니다. 인간의 외모를 보고 편견을 갖습니다. 못생기고 굼뜨면 왕따를 당하기 쉽습니다. 세상은 지성과 학력을 봅니다. 운동능력과 재능을 봅니다. 부족하면 더 이상 관심의 대상이 아니기에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히려 그런 사람들을 섬기며 희망을 주십니다. 친구와 보호자가 되어주십니다. 새로운 삶의 미래를 향해서 일어나라고 격려하십니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님의 이야기는 새로운 영웅을 만드는 이야기 입니다. 그런데 영웅의 내용이 바뀝니다. 거지 나사로가 하나님이 인정하신 아브라함에 안긴 존재가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단 두 푼을 헌금으로 내놓는 바보가 다른 누구보다도 귀한 헌금을 냈다고 하나님은 칭찬하십니다. 소외되고 따돌림을 받으며 인간취급조차 못 받던 여인들을 값진 인격으로 예수님께서 바라보십니다.
우리는 부끄러운 죄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이렇게 귀하고 값진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성탄절을 기다리며 마지막 때 영광을 주시고 다시 재림하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대림절을 맞습니다. 우리는 연약한 작은 자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축복을 주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 주위에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여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어 함께 위로하고 말씀을 나눌 때 인간을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주시는 놀라운 축복을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작은 자이고 부끄러운 죄인이었지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값진 축복을 받는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주님, 우리 주위에 고통 받고 연약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일어서게 하시고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녀가 되는 소중한 존재가 됨을 온 천하에 알릴 수 있도록 축복하여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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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68: 3 ~ 6

3

의인은 기뻐하여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할지어다

4

하나님께 노래하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 하늘을 타고 광야에 행하시던 이를 위하여 대로를 수축하라 그의 이름은 여호와이시니 그의 앞에서 뛰놀지어다

5

그의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6

하나님이 고독한 자들은 가족과 함께 살게 하시며 갇힌 자들은 이끌어 내사 형통하게 하시느니라 오직 거역하는 자들의 거처는 메마른 땅이로다

사람들은 작은 것보다 큰 것을 좋아합니다. 약한 것 보다는 강한 것을 선호합니다. 평범한 사람보다는 영웅을 뒤따르려고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속성들이 욕심 때문에 혹은 안전과 이익 때문에 더 큰 것을 요청합니다.
아들 둘을 가진 아버지가 어느 날 맛있는 파이를 사들고 집으로 왔습니다. 이것을 본 형과 동생은 자기가 먼저 먹겠다고 다투기 시작합니다. 파이를 더 크게 잘라서 자기 몫을 챙기겠다고 우기며 형제간의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일반적으로 형제들의 싸움은 자기 몫으로 더 큰 것을 차지하려는 다툼입니다. 아버지는 이렇게 아들 둘이 다투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아들들에게 제안을 합니다. “얘들아, 누가 이 파이를 먼저 자르든지 상관이 없다. 두 조각으로 나누어라. 어떤 것을 크게 자르던지 상관이 없다. 그러나 먼저 칼을 들고 자른 사람은 선택권이 없다. 칼을 들지 않는 사람이 파이를 먼저 가져갈 선택권을 갖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아들은 파이를 조금이라도 크게 자르면 상대방이 가져갈까봐 아주 조심하며 똑같이 절반으로 잘랐습니다.
우리는 조금 더 큰 것, 조금 더 많은 것을 향해 관심을 집중합니다. 과거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시대는 영웅을 선호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늠름하고 용기 있고 재능 있는 사람을 만나면 예찬하며 뒤따르려고 합니다. 2007년 스포츠 분야에서 최고의 인물을 뽑으라고 하면 우리는 아주 어린 선수 두 명이 떠올립니다. 전혀 가능성이 보이지 못했던 수영계에 등장한 박태환 선수가 세계수영대회에서 일등을 했습니다. 그것도 자유형에서 일등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좋은지 국민들 모두 자신이 일등을 한 것처럼 환호했습니다. 박태환 선수는 아직 청년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18세의 청소년이기에 더 대견합니다.
또 체력과 기술에 있어서 결코 쉽지 않았던 세계피겨스케이팅대회에서 일등을 한 김연아 선수가 있습니다.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기술은 많은 사람들에게 경탄과 탄성을 지르게 했습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국민들이 기뻐하고 감사하며 격려와 축하의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화려한 조명을 받던 사람도 조금만 성적이 떨어지면 금방 사람들의 관심과 시선에서 사라집니다. 더 이상 기억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인기의 높낮이가 가장 심한 곳이 바로 한국의 연예계입니다. 우리는 인기와 비인기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민하며 살아가는 수많은 연예인들을 목격합니다. 어느 순간 번쩍 떴다가 이름도 없이 사라져가는 연예인들을 보면서 훌륭하게 여겨지다가도 불안하고 불쌍한 마음이 생기는 것도 사람들의 인기에 너무 민감하기 때문입니다.

영웅, 인기인, 다른 사람들보다 독특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성경은 어떻게 이야기할까요? 성경 속에도 영웅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성경은 영웅들의 이야기를 아주 잘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아브라함은 믿음의 영웅입니다. 어느 날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기가 살고 있던 삶의 모든 터전을 과감하게 내려놓습니다. 부모와 친척을 떠나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으로 갔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땅이 어디인지도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대로 순종하면서 뒤따라가 믿음의 아버지가 됩니다. 또한 백세에 난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라고 했을 때도 그가 불평하거나 저항했다는 말이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냥 묵묵히 산으로 아들을 데리고 가서 하나님께 아들을 바칩니다. 세상에 이런 아버지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충성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헌신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우리를 놀랍게 하는 신앙의 영웅으로 다가옵니다.
요셉은 수많은 기독청년들이 이 사람과 같이 되기를 꿈꾸는 인물입니다. 요셉은 집과 부모를 떠나서 타향에서 종살이를 했습니다. 그것도 감옥에 들어가서 옥살이를 했습니다. 그는 인생에서 가장 비천하고 낮은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에게 주신 하나님의 꿈은 하나님의 비전을 잃지 않게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간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자신을 이끌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결국 그는 최고의 자리까지 올라갑니다. 많은 기독 청년들이 이것을 보면서 자신들도 하나님 안에서 꿈을 꾸고 도전하면서 인생을 살아야겠다는 모험심을 갖는 것도 요셉이 갖고 있던 이런 영웅적인 신앙 때문입니다.
모세는 정치적이고 영적인 종교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애굽에서 고통 받던 자기 민족을 보면서 가슴 아파했습니다. 그때 그는 자기 민족 앞에 나서서 민족을 이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가슴을 뛰게 하는 시원함을 주는 민족의 지도자로서의 영웅적인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예수를 믿은 사람들에게 가장 큰 영웅으로 생각되는 사람은  소년 다윗입니다. 거대한 골리앗 장군 앞에서 20살도 안된 소년이 물맷돌 다섯 개로 골리앗의 이마를 맞추고 무너뜨렸습니다. 다윗의 용기와 담대함을 보면서 우리는 그의 모습이 참으로 영웅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우리도 다윗과 같은 용기와 담대함을 갖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이처럼 성경은 마치 영웅들의 이야기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다시 한 번 가만히 읽어보면 성경의 영웅들은 처음부터 영웅은 아니었습니다. 원래부터 탁월한 사람들이 아닌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작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쓰실 수 있게 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지식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불러주신 이유를 알았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쓰실 만한 사람으로 성숙하고 견고하게 되었고, 용기와 담대함도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선 자기를 작은 자, 별 볼일 없는 자라고 고백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다가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결코 작은 자가 아니야. 너는 무능력자가 아니야. 내가 너에게 능력을 줄 것이다. 내가 너를 사용할 것이다.”
그들도 처음에는 우리와 똑같이 작은 자들이었습니다. 자기 스스로 무언가 대단한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백성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서 고통을 받고 있다. 그 땅에서 종노릇을 하고 있다. 내가 그들을 저 가나안 땅까지 이끌려고 하는데 네가 좀 나서렴.”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때 모세는 “하나님, 저를 잘 부르셨습니다. 제가 가겠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나는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역부족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출애굽기 4:10)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내가 너의 입에 함께 있겠다. 내가 능력을 주겠다.” 그러나 다시 모세는 말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작은 자입니다.” 또 다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의 작은 모습을 감추겠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작은 자라고 여기는 모세를 달래서 사용하십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작은 자를 쓰실까요? 하나님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겠다고 작정하기 때문입니다.
삼 백 명의 군대로 미디안 적군 수 백 명과 싸워서 이긴 기드온이라는 용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불러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라고 말씀하실 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니이다” (사사기 6:15)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작은 자라고 여기는 기드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쓰겠다. 나의 능력을 믿고 나가라.”

이스라엘의 초대왕이었던 사울은 자기 스스로 작은 자라고 여길 때 하나님께서 높여주셨습니다. 사울이 기름 부어 왕이 될 것이라는 사무엘의 유언을 들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이스라엘 지파 중 가장 작은 지파인 베나민 사람이 아닙니까? 또 나의 가족은 베나민 지파 중에 가장 미약하지 않습니까? 당신은 어찌하여 내가 왕이 된다고 말씀하십니까?” 사울이 겸손했을 때 하나님은 그를 왕으로 높이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실패하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거만하게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스스로 무엇인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한 순간부터 사울은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사울 왕에게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여호와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시고” (사무엘상 15:17)

사무엘이 왕에게 당신 스스로 아무 것도 아닌 작은 자라고 여길 때 하나님께서 높이시고 영광을 주셨는데 왜 거만해져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느냐고 따지고 있습니다. 지도자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라는 처음 가졌던 겸손함을 잃어버리면 지도자의 삶의 내용은 땅에 떨어집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신앙인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고린도전서 1:27)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는 이런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 저는 미련하고 부족한 사람입니다. 능력이 없고 부끄러운 죄인입니다. 감히 주님 앞에 나올 수 가 없습니다.” 이런 고백을 하며 주님 앞에 무릎을 꿇었을 때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 말씀해 주십니다. “네가 왜 미련하냐? 네가 왜 부족하다고 하느냐? 내가 너에게 풍성함을 주는데 왜 능력이 없다고 하느냐? 내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데 왜 네가 부끄러운 죄인이냐? 내가 네 죄를 용서했는데 왜 그러느냐?”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실 때 우리는 다시 회복되어 하나님의 역사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위대한 사도 바울은 노년의 자신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디모데전서 1:15)

바울은 자신이 죄인 중에 죄수라고 고백하며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을 받았고, 성령에 의존하여 매일매일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인간상으로 성숙하고 변화되어 갔습니다.
세상의 정치인들, 연예인들은 자기 자랑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자기를 자랑해야 모든 것이 사람들에게 먹혀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은 사람보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작은 자를 귀하여 여기시는 당신 스스로 작은 자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를 빗대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마태복음 18:4)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가장 작은 자가 되는 겸손한 사람들에게 가까이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도와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왜 마음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을까요? 가난하고 애통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역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부자가 되어도 마음이 가난한 자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은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모든 것을 가진 풍요로운 자가 되어도 마음속에는 애통하는 진리를 향하고 있다면 분명 하나님께서 은총을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가장 작은 자로 마구간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가장 낮은 곳, 가장 비천한 이 땅에 오셨고 생이 끝날 때도 가장 낮고 비천한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그러셨을까요? 고아의 보호자와 재판장이 되시고 고독한 사람의 친구가 되기 위해서 그러셨습니다. 절망하는 사람들의 위로자가 되기 위해서 낮은 자리에 오셨습니다. 어느 누구도 예수님 안에 다 들어올 수 있도록 우리를 초청하셨습니다.
여러분이 갖고 있는 아픔이 어떤 것입니까? 여러분이 갖고 있는 괴로움과 부끄러움이 어떤 것입니까? 그것을 주님께 다 아뢸 때 주님은 받아주십니다.
성경은 작은 자의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양 백 마리 중 한 마리를 찾기 위해서 아흔 아홉 마리를 두고 나서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이것은 수학 공식이나 기업 공식으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사실입니다. 양 아홉 아흔 마리가 다 없어질 수도 있는데 한 마리를 찾아 나섭니다. 예수님에게는 한 영혼이너무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작은 자로 여기는 자가 예수님께는 결코 작은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작은 자가 가장 큰 자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창녀들에게 인생의 소망을 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이 접촉하기를 싫어하는 문둥병 환자들을 만나셔서 질병의 상처에 손을 얹으셨습니다. 혈루병을 앓는 여인이 사람들 앞에 나서기 부끄러워서 예수님의 뒤로 가서 옷자락을 만질 때 예수님은 그 여인을 향해서 돌아서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하는 딸의 육체적인 아픔과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인은 하나님의 처소는 거룩한 하늘이라고 말합니다(시편 68:5). 하나님이 계셔야 할 곳은 거룩한 곳, 인간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곳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약하고 작은 자를 찾으십니다. 그런 작은 자인 고아의 아버지, 과부의 보호자와 재판장이 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홀로 있는 사람들에게 가족과 친구가 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갇힌 자를 자유롭고 형통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이 큰 사랑 때문에 자신을 스스로 제한시키셨습니다. 우리와 똑같이 육체를 꼬집으면 아프고 찌르면 상처 나는 몸에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서른 세 살이라는 나이로 당신 자신을 제한시키며 낮아지셨습니다. 이는 오직 우리들을 붙잡고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은 작은 자를 싫어합니다. 연약한 자를 기피합니다. 인간의 외모를 보고 편견을 갖습니다. 못생기고 굼뜨면 왕따를 당하기 쉽습니다. 세상은 지성과 학력을 봅니다. 운동능력과 재능을 봅니다. 부족하면 더 이상 관심의 대상이 아니기에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히려 그런 사람들을 섬기며 희망을 주십니다. 친구와 보호자가 되어주십니다. 새로운 삶의 미래를 향해서 일어나라고 격려하십니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님의 이야기는 새로운 영웅을 만드는 이야기 입니다. 그런데 영웅의 내용이 바뀝니다. 거지 나사로가 하나님이 인정하신 아브라함에 안긴 존재가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단 두 푼을 헌금으로 내놓는 바보가 다른 누구보다도 귀한 헌금을 냈다고 하나님은 칭찬하십니다. 소외되고 따돌림을 받으며 인간취급조차 못 받던 여인들을 값진 인격으로 예수님께서 바라보십니다.
우리는 부끄러운 죄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이렇게 귀하고 값진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성탄절을 기다리며 마지막 때 영광을 주시고 다시 재림하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대림절을 맞습니다. 우리는 연약한 작은 자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축복을 주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 주위에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여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어 함께 위로하고 말씀을 나눌 때 인간을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주시는 놀라운 축복을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작은 자이고 부끄러운 죄인이었지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값진 축복을 받는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주님, 우리 주위에 고통 받고 연약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일어서게 하시고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녀가 되는 소중한 존재가 됨을 온 천하에 알릴 수 있도록 축복하여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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