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구독

ic_info구독 사용방법

해당 카테고리에 새로운 콘텐츠를 모아보기 원하시면 구독을 추가해주세요 마이페이지 > 내구독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ic_info

잔치를 베푸는 사람 : 마태 – 예수님의 제자들 10 –

마태복음 9: 9 ~ 13

김지철 목사

2014.09.28

이번 총회는 한국교회들과 함께한 잔치였습니다.

지난 주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대한예수교장로회 99회 총회가 소망교회에서 열렸습니다. ‘그리스도인, 복음으로 사는 사람’이라는 주제로 천오백 명의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이 함께했습니다.
그 기간 동안 많은 분들에게 고맙고 감사하다는 인사를 들었습니다. 마음이 푸근하다, 음식이 맛있고 후하다, 모두가 친절하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소망교회 담임목사로서 이를 위해 애써 주신 여러분들께 감사를 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찬양대원·부원들, 여전도회원들, 남선교회원들, 권사님들, 장로님들, 직원들, 그리고 성도님들 한 분 한 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무엇보다 많은 불편을 감수해 주신 이웃주민들에게도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번 총회는 우리 교회가 한국교회를 위해서 베푼 잔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잔치란, 내가 받은 축복을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고 사랑을 베푼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잔치를 베푼다는 것은 참으로 멋진 일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잔치를 베푼 적이 있습니까? 살아가면서 남에게 밥 한 끼 사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까? 이웃에게 베풀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것도 허세가 아니라 진심으로 한다면, 금상첨화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인생이 그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품어야 베풀 수 있습니다.

그분은 베푸는 분, 복을 나누는 분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세상을 향해 제자들을 두 명씩 파송하시며 하신 말씀을 기억해 보면 더 명백해집니다.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마태복음 10:7∼8)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생명, 사랑, 복음의 축복 등을 이웃에게 거저 주라는 것입니다. 남에게 무언가를 준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인간은 본래 이기적인 존재가 아닙니까? 받는 것은 쉽지만 베푸는 것은 누구에게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때에 거저 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말씀처럼, 내가 가진 것도 거저 받았다는 것을 기억할 때입니다. ‘이것은 선물이구나. 그러니 남에게도 선물로 줘야 되겠다.’
내 속에 열등감과 자기연민이 있으면 남에게 베풀기가 쉽지 않습니다. ‘나는 못난 놈이야.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라며 스스로를 괴롭히고 분노를 쉬지 않으면, 베푸는 자리까지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즉 열등감과 자기연민의 앙금들을 떨쳐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단순히 그것만으로는 잠깐, 혹은 한 번은 베풀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근본적으로 베풀 수 있으려면 하나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구약의 호세아서 6장을 인용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9:13)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긍휼한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대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긍휼한 마음을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도 의인이 아닌 죄인을 위해 이 땅에 오셨다고 고백하십니다.
우리는 누구 곁에 가기를 원합니까? 죄인 곁에 가기를 원합니까, 아니면 의인 곁에 가기를 원합니까? 많이 가진 자, 높은 자 곁에 가기를 원합니까, 아니면 없는 자, 낮은 자에게 가기를 원합니까? 근본적으로 우리의 생각과 관심은, 많이 가진 자, 높은 자 곁에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내가 받을 것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람을 만나시는 방식은 우리와 같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낮은 자, 연약한 자, 가난한 자를 택하셨습니다. 없는 자, 소외된 자 만나시는 것을 즐거워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며, 또 그 말씀을 들을 때마다 감동을 받는 이유입니다. 나도 약하고, 부족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은총 앞에 설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마태에게 돈은 자신을 지키는 유일한 방패였습니다.

마태가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습니다. 본래 마태는 세리였습니다. 유대인의 적대국이었던 로마 제국을 위해 세금을 걷어 바치는 세금공무원이었습니다. 동족에게는 엄청난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직업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게만 바쳐야 하는데 동족의 돈을 수탈해서 로마 제국, 그것도 가이사 황제에게 바치는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유대인들은 세리를 인간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세리를 창녀와 비슷한 위치에 놓았습니다. ‘인간쓰레기’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부정한 사람, 죄인, 매국노라는 칭호를 붙이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약탈자, 협잡꾼, 수전노(守錢奴), 도둑놈이라고 낙인찍으며 조롱했습니다. 마태는 바로 그런 직업의 인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당대의 세리장이었던 삭개오를 만나신 사건이 누가복음 19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때 삭개오는 이미 자신의 평판이 어떠한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회개합니다.

…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누가복음 19:8)

그에게도 양심이 있었습니다. 스스로 좋아서 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 길에 들어섰기 때문에 어찌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그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꼭 가져야 할 것은 바로 돈이었습니다.
삶이 불안정하다고 여길 때, 믿을 만한 것은 하나 밖에 없다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합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돈입니다. 돈이란, 깨끗한 사람이나 불결한 사람을 가리지 않고 힘을 주기 때문입니다. 권력과도 같고 세력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돈을 마치 우상처럼 높이고, 돈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2000년 전 마태의 최대 관심과 목표도 돈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마 수고했을 것입니다. 요새말로 표현하면, 일중독에 빠져있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내 몫인 돈만 잘 챙기면 그만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지 않습니까? 지갑에 돈이 들어있으면 마음이 어떻습니까? 편안해집니다. 그런데 돈이 하나도 없는 지갑을 가지고 있으면, 우선 사람을 만나는 것부터 겁이 납니다. 식당에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이처럼 돈이란 살아있는 권력, 휴대할 수 있는 권력, 막강한 힘을 가진 권력입니다. 돈을 가지면 힘이 생기고, 반대로 돈이 없으면 무력해지는 것을 우리도 살면서 뼈아프게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오늘날의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입니다. 시장경제 사회입니다. 모든 것은 돈의 형태로 계산됩니다. 그래서 모든 국가가 경제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돈의 전쟁입니다. 그러니 모든 사람들의 관심이 돈에 몰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지적합니다. 왜입니까? 돈을 사랑하는 것에서 모든 탐욕스러운 것들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사이좋던 형제들이 부모님이 돌아가시며 남긴 유산 때문에 다투는 것을 수없이 봤습니다. 형제지간임에도 조금 더 많은 유산을 상속받기 위해 다투는 것입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왜 그렇게 대듭니까? 살을 맞대며 오랫동안 살았던 부부가 왜 그렇게 치열하게 싸웁니까? 더 많은 돈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돈이 있어야 염려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마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늘날이나 2000년 전이나 돈이란 똑같은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그동안 자기만을 위해서 아끼고 아끼던 돈으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위해서 잔치를 베푸는 마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마 한두 번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돈으로 이런 일들을 여러 번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과거의 마태를 생각했을 때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어떻게 그가 바뀌게 되었을까요?

예수님과의 만남이 마태를 변화시켰습니다.

그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질문하기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는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앞에서는 웃지만, 돌아서서는 자기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저 매국노, 저 협잡꾼, 저 도둑놈!’ 사람들이 마음 속으로는 자신을 미워하고 저주한다는 사실에 그는 가슴이 아팠습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자신의 것을 더 챙겨야 했습니다. 돈이 방패가 되어 준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돈이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을 갖고 있었을 때,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을 만난 것이 왜 그의 삶에 변화를 가져왔을까요?
다른 사람들은 자신을 진정한 인간으로 대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을 사람으로 대접해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마다 예수님에 대해서 감동받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 대접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만나셔서 그들을 온전한 인간으로 대접하셨습니다. “너도 하나님의 사람이다. 너에게도 소망이 있다. 너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 너도 네 인생의 주인공으로 살 수 있다.” 말씀하셨습니다.
나병환자는 사람을 만나면 ‘부정하다, 부정하다. 나는 부정하다’라고 소리쳐야 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나병환자에게 가까이 가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나병환자의 상처를 친히 손으로 쓰다듬으셨습니다. 또 제자들에게 가로 막혀 예수님 앞에 가지 못한 소경 거지 바디메오를 예수님은 부르시고 그의 소원을 들어 주셨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은 어떻습니까? 유대인들이 돌을 들고 죽이려 했을 때, 예수님은 그녀의 변호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나아가 “너를 용서한다” 하시며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귀한 존재로 그녀를 삼으셨습니다.
이것이 마태를 감격스럽게 한 것입니다. 내가 조롱받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존재인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는 너무 기쁘고 감사했던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언젠가 끝날 것입니다. 많이 가진 자도 갖지 못한 자도, 높은 지위에 있는 자도 낮은 자리에 있는 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죽음 앞에 서면 반드시 기억하는 것이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인생이 의미가 있었나? 내가 무엇을 위해서 살았나?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함으로 세상이 축복을 받았나?’ 예외 없이 이것을 묻고 싶어 합니다. 바로 내 인생의 의미에 대해 질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되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버지로서, 어머니로서, 남편으로서, 아내로서, 자녀로서, 직장인으로서 나의 존재 자체가 유의미했는지 묻고 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태는 예수님을 만나면서 존재해야 할 이유를 깨달은 것입니다. 나를 인정하는 예수님과 하나님이 계시고, 그리고 하나님이 나에게 사명을 주신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그는 소리쳐 외치고 싶었던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만났다! 예수님이 내 소망이고 나의 생명이다! 그리고 내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

예수님을 믿으면 자기주도적인 사람이 됩니다.

마태는 예수님을 만나면서 두 가지가 변했습니다. 첫 번째는 마태복음 9장 9절에 나타난 모습입니다.

예수께서 그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마태복음 9:9)

일어나 따랐다는 것은 굉장한 결단이고 용기입니다. 자기 직업을 내려놓은 것입니다. 한 가지 묻겠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자기주도적인 사람이 될까요, 아닐까요? 우리는 종종 예수님을 믿으면 수동적인 인물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그냥 다 하나님께 맡기고 나는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된다고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칼 막스(Karl Marx)가 러시아 정교회를 보면서 가장 분노했던 것도 이러한 것입니다.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자기주도적인 사람이 됩니다.
마태는 과거에 사람 만나기를 싫어했습니다. 피했습니다. 사람들의 냉소적인 시선 때문에 마음에 꺼려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난 순간에 자기주도적인 인물로 변모했습니다. 그동안은 인생을 미적거렸습니다. 마지못해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 ‘나를 따라오라’는 그 말씀을 들었을 때, 자신의 삶의 실존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살아도 되는가? 예수님과 함께 새롭게 인생을 열어 보는 건 어떨까?’ 그러면서 인생의 주도권을 갖게 된 것입니다. 황폐한 영혼에 새로운 불길이 당겨졌습니다. 그러자 머물던 자리를 박차고 나올 수 있었습니다. 삶의 목표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인생은 네 것이야. 너는 네 인생의 주인공이야. 그래서 하나님이 너를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만드신 거란다. 너의 인생은 다른 사람이 살아주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네가 살아가는 거란다. 이제 시작해야 해!”
예수님을 믿으면 도망가고 도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동적인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과 함께 새로운 가치관과 목표를 가지고 달려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이것을 놓치게 되면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무기력한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긴다고 하면서도,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들을 놓치게 됩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소중한 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두 번째 변화는 마태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초대해서 잔치를 베푸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함께, 자신의 친구들도 모이게 해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님이 마태에게 사명을 주시니, 그동안 놓치면 안 된다고 생각하며 움켜쥐었던 그의 손이 주님을 위해서 펼쳐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곧 마음을 열어놓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그의 인생은 축제와 잔치의 인생으로 변화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때로 하나님 앞에서 내 죄악을 가슴 치며 회개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금식하며 스스로를 절제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생을 사는 목표는 아닙니다. 왜 회개합니까? 왜 금식하며 하나님 앞에 무릎을 끓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인생을 아름답게 살기 위해서 아닙니까? 하나님은 잔치하면서 살도록, 기뻐하고 즐거워하면서 살도록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이 놀라운 사실 앞에서 마태는 잔치를 베푼 것입니다.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마태복음 9:10)

나만의 생각에서 공동체의 생각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의 중심에 누가 있었습니까?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우리가 가진 돈은, 세상 친구들과 놀고먹는 데 쓰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예수님을 위해서,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위해서 쓰라고 있는 것입니다. 내 시간, 내 돈, 내 달란트가 그렇게 쓰임을 받을 때, 그것이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를 찾아오셔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태야, 돈보다도 소중한 것이 있단다. 일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단다. 네가 이룬 업적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단다. 그것은 바로 너 자신이란다. 네가 돈보다 더 소중하고, 네가 너의 일보다 더 소중하고, 네가 네 업적보다 더 소중하단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갖고 있는 어떤 것보다 더 소중합니다. 여러분의 직업보다, 여러분이 쌓아놓은 돈보다 여러분이 더 소중합니다. 바로 그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마태는 자기가 움켜쥐고 있었던 돈을 주님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내어놓을 수 있었습니다.

주님 안에서 잔치의 인생을 누리십시오.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세 가지 종류의 회심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마음의 회심, 생각의 회심, 그리고 돈지갑의 회심입니다. 우리 가슴에 회심이 일어나야 하고, 머리에 회심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현실적인 부분, 즉 돈지갑의 회심까지 있어야 온전한 회심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내가 갖고 있는 것이 나를 지배하지 않도록, 내 일이나 돈이 나를 지배하지 않도록 말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가르쳐 주시려는 것은 우리 자신이 가장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내 돈을 내가 다스릴 수 있어야 하고, 내 일도 내가 이끌어 가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주도적인 사람으로, 또한 축제의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으로 부르십니다.
얼굴 찡그리면서 살아가면 안 됩니다. 우울한 마음으로 ‘나는 안 돼! 할 수 없어.’ 탄식하며 살아가는 것을 하나님은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가장 소중한 존재다. 그러니 주저앉아 있지 말고 일어나라. 그리고 나를 따라와라. 내가 너에게 창의성을 주었으니 네가 가지고 있는 시간, 달란트, 돈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해 봐라.”
귀한 믿음의 성도님들, 또 우리 젊은 청년들에게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어려운 상황에서 도망가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주도적인 사람이 되어서 인생을 새롭게 열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입니다. 우리 모두가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이 음성을 들으면서, 잔치를 베푸는 축복의 신앙을 누리기를 축원합니다.

btn_switch

마태복음 9: 9 ~ 13

9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이번 총회는 한국교회들과 함께한 잔치였습니다.

지난 주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대한예수교장로회 99회 총회가 소망교회에서 열렸습니다. ‘그리스도인, 복음으로 사는 사람’이라는 주제로 천오백 명의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이 함께했습니다.
그 기간 동안 많은 분들에게 고맙고 감사하다는 인사를 들었습니다. 마음이 푸근하다, 음식이 맛있고 후하다, 모두가 친절하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소망교회 담임목사로서 이를 위해 애써 주신 여러분들께 감사를 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찬양대원·부원들, 여전도회원들, 남선교회원들, 권사님들, 장로님들, 직원들, 그리고 성도님들 한 분 한 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무엇보다 많은 불편을 감수해 주신 이웃주민들에게도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번 총회는 우리 교회가 한국교회를 위해서 베푼 잔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잔치란, 내가 받은 축복을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고 사랑을 베푼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잔치를 베푼다는 것은 참으로 멋진 일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잔치를 베푼 적이 있습니까? 살아가면서 남에게 밥 한 끼 사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까? 이웃에게 베풀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것도 허세가 아니라 진심으로 한다면, 금상첨화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인생이 그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품어야 베풀 수 있습니다.

그분은 베푸는 분, 복을 나누는 분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세상을 향해 제자들을 두 명씩 파송하시며 하신 말씀을 기억해 보면 더 명백해집니다.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마태복음 10:7∼8)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생명, 사랑, 복음의 축복 등을 이웃에게 거저 주라는 것입니다. 남에게 무언가를 준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인간은 본래 이기적인 존재가 아닙니까? 받는 것은 쉽지만 베푸는 것은 누구에게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때에 거저 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말씀처럼, 내가 가진 것도 거저 받았다는 것을 기억할 때입니다. ‘이것은 선물이구나. 그러니 남에게도 선물로 줘야 되겠다.’
내 속에 열등감과 자기연민이 있으면 남에게 베풀기가 쉽지 않습니다. ‘나는 못난 놈이야.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라며 스스로를 괴롭히고 분노를 쉬지 않으면, 베푸는 자리까지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즉 열등감과 자기연민의 앙금들을 떨쳐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단순히 그것만으로는 잠깐, 혹은 한 번은 베풀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근본적으로 베풀 수 있으려면 하나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구약의 호세아서 6장을 인용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9:13)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긍휼한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대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긍휼한 마음을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도 의인이 아닌 죄인을 위해 이 땅에 오셨다고 고백하십니다.
우리는 누구 곁에 가기를 원합니까? 죄인 곁에 가기를 원합니까, 아니면 의인 곁에 가기를 원합니까? 많이 가진 자, 높은 자 곁에 가기를 원합니까, 아니면 없는 자, 낮은 자에게 가기를 원합니까? 근본적으로 우리의 생각과 관심은, 많이 가진 자, 높은 자 곁에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내가 받을 것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람을 만나시는 방식은 우리와 같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낮은 자, 연약한 자, 가난한 자를 택하셨습니다. 없는 자, 소외된 자 만나시는 것을 즐거워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며, 또 그 말씀을 들을 때마다 감동을 받는 이유입니다. 나도 약하고, 부족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은총 앞에 설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마태에게 돈은 자신을 지키는 유일한 방패였습니다.

마태가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습니다. 본래 마태는 세리였습니다. 유대인의 적대국이었던 로마 제국을 위해 세금을 걷어 바치는 세금공무원이었습니다. 동족에게는 엄청난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직업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게만 바쳐야 하는데 동족의 돈을 수탈해서 로마 제국, 그것도 가이사 황제에게 바치는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유대인들은 세리를 인간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세리를 창녀와 비슷한 위치에 놓았습니다. ‘인간쓰레기’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부정한 사람, 죄인, 매국노라는 칭호를 붙이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약탈자, 협잡꾼, 수전노(守錢奴), 도둑놈이라고 낙인찍으며 조롱했습니다. 마태는 바로 그런 직업의 인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당대의 세리장이었던 삭개오를 만나신 사건이 누가복음 19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때 삭개오는 이미 자신의 평판이 어떠한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회개합니다.

…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누가복음 19:8)

그에게도 양심이 있었습니다. 스스로 좋아서 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 길에 들어섰기 때문에 어찌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그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꼭 가져야 할 것은 바로 돈이었습니다.
삶이 불안정하다고 여길 때, 믿을 만한 것은 하나 밖에 없다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합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돈입니다. 돈이란, 깨끗한 사람이나 불결한 사람을 가리지 않고 힘을 주기 때문입니다. 권력과도 같고 세력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돈을 마치 우상처럼 높이고, 돈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2000년 전 마태의 최대 관심과 목표도 돈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마 수고했을 것입니다. 요새말로 표현하면, 일중독에 빠져있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내 몫인 돈만 잘 챙기면 그만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지 않습니까? 지갑에 돈이 들어있으면 마음이 어떻습니까? 편안해집니다. 그런데 돈이 하나도 없는 지갑을 가지고 있으면, 우선 사람을 만나는 것부터 겁이 납니다. 식당에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이처럼 돈이란 살아있는 권력, 휴대할 수 있는 권력, 막강한 힘을 가진 권력입니다. 돈을 가지면 힘이 생기고, 반대로 돈이 없으면 무력해지는 것을 우리도 살면서 뼈아프게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오늘날의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입니다. 시장경제 사회입니다. 모든 것은 돈의 형태로 계산됩니다. 그래서 모든 국가가 경제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돈의 전쟁입니다. 그러니 모든 사람들의 관심이 돈에 몰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지적합니다. 왜입니까? 돈을 사랑하는 것에서 모든 탐욕스러운 것들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사이좋던 형제들이 부모님이 돌아가시며 남긴 유산 때문에 다투는 것을 수없이 봤습니다. 형제지간임에도 조금 더 많은 유산을 상속받기 위해 다투는 것입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왜 그렇게 대듭니까? 살을 맞대며 오랫동안 살았던 부부가 왜 그렇게 치열하게 싸웁니까? 더 많은 돈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돈이 있어야 염려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마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늘날이나 2000년 전이나 돈이란 똑같은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그동안 자기만을 위해서 아끼고 아끼던 돈으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위해서 잔치를 베푸는 마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마 한두 번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돈으로 이런 일들을 여러 번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과거의 마태를 생각했을 때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어떻게 그가 바뀌게 되었을까요?

예수님과의 만남이 마태를 변화시켰습니다.

그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질문하기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는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앞에서는 웃지만, 돌아서서는 자기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저 매국노, 저 협잡꾼, 저 도둑놈!’ 사람들이 마음 속으로는 자신을 미워하고 저주한다는 사실에 그는 가슴이 아팠습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자신의 것을 더 챙겨야 했습니다. 돈이 방패가 되어 준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돈이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을 갖고 있었을 때,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을 만난 것이 왜 그의 삶에 변화를 가져왔을까요?
다른 사람들은 자신을 진정한 인간으로 대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을 사람으로 대접해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마다 예수님에 대해서 감동받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 대접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만나셔서 그들을 온전한 인간으로 대접하셨습니다. “너도 하나님의 사람이다. 너에게도 소망이 있다. 너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 너도 네 인생의 주인공으로 살 수 있다.” 말씀하셨습니다.
나병환자는 사람을 만나면 ‘부정하다, 부정하다. 나는 부정하다’라고 소리쳐야 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나병환자에게 가까이 가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나병환자의 상처를 친히 손으로 쓰다듬으셨습니다. 또 제자들에게 가로 막혀 예수님 앞에 가지 못한 소경 거지 바디메오를 예수님은 부르시고 그의 소원을 들어 주셨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은 어떻습니까? 유대인들이 돌을 들고 죽이려 했을 때, 예수님은 그녀의 변호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나아가 “너를 용서한다” 하시며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귀한 존재로 그녀를 삼으셨습니다.
이것이 마태를 감격스럽게 한 것입니다. 내가 조롱받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존재인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는 너무 기쁘고 감사했던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언젠가 끝날 것입니다. 많이 가진 자도 갖지 못한 자도, 높은 지위에 있는 자도 낮은 자리에 있는 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죽음 앞에 서면 반드시 기억하는 것이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인생이 의미가 있었나? 내가 무엇을 위해서 살았나?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함으로 세상이 축복을 받았나?’ 예외 없이 이것을 묻고 싶어 합니다. 바로 내 인생의 의미에 대해 질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되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버지로서, 어머니로서, 남편으로서, 아내로서, 자녀로서, 직장인으로서 나의 존재 자체가 유의미했는지 묻고 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태는 예수님을 만나면서 존재해야 할 이유를 깨달은 것입니다. 나를 인정하는 예수님과 하나님이 계시고, 그리고 하나님이 나에게 사명을 주신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그는 소리쳐 외치고 싶었던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만났다! 예수님이 내 소망이고 나의 생명이다! 그리고 내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

예수님을 믿으면 자기주도적인 사람이 됩니다.

마태는 예수님을 만나면서 두 가지가 변했습니다. 첫 번째는 마태복음 9장 9절에 나타난 모습입니다.

예수께서 그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마태복음 9:9)

일어나 따랐다는 것은 굉장한 결단이고 용기입니다. 자기 직업을 내려놓은 것입니다. 한 가지 묻겠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자기주도적인 사람이 될까요, 아닐까요? 우리는 종종 예수님을 믿으면 수동적인 인물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그냥 다 하나님께 맡기고 나는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된다고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칼 막스(Karl Marx)가 러시아 정교회를 보면서 가장 분노했던 것도 이러한 것입니다.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자기주도적인 사람이 됩니다.
마태는 과거에 사람 만나기를 싫어했습니다. 피했습니다. 사람들의 냉소적인 시선 때문에 마음에 꺼려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난 순간에 자기주도적인 인물로 변모했습니다. 그동안은 인생을 미적거렸습니다. 마지못해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 ‘나를 따라오라’는 그 말씀을 들었을 때, 자신의 삶의 실존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살아도 되는가? 예수님과 함께 새롭게 인생을 열어 보는 건 어떨까?’ 그러면서 인생의 주도권을 갖게 된 것입니다. 황폐한 영혼에 새로운 불길이 당겨졌습니다. 그러자 머물던 자리를 박차고 나올 수 있었습니다. 삶의 목표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인생은 네 것이야. 너는 네 인생의 주인공이야. 그래서 하나님이 너를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만드신 거란다. 너의 인생은 다른 사람이 살아주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네가 살아가는 거란다. 이제 시작해야 해!”
예수님을 믿으면 도망가고 도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동적인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과 함께 새로운 가치관과 목표를 가지고 달려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이것을 놓치게 되면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무기력한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긴다고 하면서도,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들을 놓치게 됩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소중한 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두 번째 변화는 마태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초대해서 잔치를 베푸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함께, 자신의 친구들도 모이게 해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님이 마태에게 사명을 주시니, 그동안 놓치면 안 된다고 생각하며 움켜쥐었던 그의 손이 주님을 위해서 펼쳐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곧 마음을 열어놓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그의 인생은 축제와 잔치의 인생으로 변화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때로 하나님 앞에서 내 죄악을 가슴 치며 회개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금식하며 스스로를 절제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생을 사는 목표는 아닙니다. 왜 회개합니까? 왜 금식하며 하나님 앞에 무릎을 끓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인생을 아름답게 살기 위해서 아닙니까? 하나님은 잔치하면서 살도록, 기뻐하고 즐거워하면서 살도록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이 놀라운 사실 앞에서 마태는 잔치를 베푼 것입니다.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마태복음 9:10)

나만의 생각에서 공동체의 생각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의 중심에 누가 있었습니까?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우리가 가진 돈은, 세상 친구들과 놀고먹는 데 쓰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예수님을 위해서,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위해서 쓰라고 있는 것입니다. 내 시간, 내 돈, 내 달란트가 그렇게 쓰임을 받을 때, 그것이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를 찾아오셔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태야, 돈보다도 소중한 것이 있단다. 일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단다. 네가 이룬 업적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단다. 그것은 바로 너 자신이란다. 네가 돈보다 더 소중하고, 네가 너의 일보다 더 소중하고, 네가 네 업적보다 더 소중하단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갖고 있는 어떤 것보다 더 소중합니다. 여러분의 직업보다, 여러분이 쌓아놓은 돈보다 여러분이 더 소중합니다. 바로 그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마태는 자기가 움켜쥐고 있었던 돈을 주님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내어놓을 수 있었습니다.

주님 안에서 잔치의 인생을 누리십시오.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세 가지 종류의 회심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마음의 회심, 생각의 회심, 그리고 돈지갑의 회심입니다. 우리 가슴에 회심이 일어나야 하고, 머리에 회심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현실적인 부분, 즉 돈지갑의 회심까지 있어야 온전한 회심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내가 갖고 있는 것이 나를 지배하지 않도록, 내 일이나 돈이 나를 지배하지 않도록 말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가르쳐 주시려는 것은 우리 자신이 가장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내 돈을 내가 다스릴 수 있어야 하고, 내 일도 내가 이끌어 가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주도적인 사람으로, 또한 축제의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으로 부르십니다.
얼굴 찡그리면서 살아가면 안 됩니다. 우울한 마음으로 ‘나는 안 돼! 할 수 없어.’ 탄식하며 살아가는 것을 하나님은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가장 소중한 존재다. 그러니 주저앉아 있지 말고 일어나라. 그리고 나를 따라와라. 내가 너에게 창의성을 주었으니 네가 가지고 있는 시간, 달란트, 돈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해 봐라.”
귀한 믿음의 성도님들, 또 우리 젊은 청년들에게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어려운 상황에서 도망가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주도적인 사람이 되어서 인생을 새롭게 열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입니다. 우리 모두가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이 음성을 들으면서, 잔치를 베푸는 축복의 신앙을 누리기를 축원합니다.

Connection Card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