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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물을 넘어서 – 부활을 산 사람들 4 –

사도행전 18: 1 ~ 4

김지철 목사

2013.04.28

돈은 때로 부모와 자녀의 관계까지 무너지게 합니다.

최근에 이런 기사를 본 적 있으십니까? 아주 놀랍고도 씁쓸한 기사로, 나이 든 한 어머니가 아들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내용은 이러합니다. 어머니는 나이 들어 아들에게 땅과 재산을 다 증여했으나 자녀가 도무지 어머니를 제대로 모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증여한 재산을 반환하라는 재산반환청구소송을 냈습니다.
그런데 재판 결과가 매우 충격적입니다. 어머니가 패소한 것입니다. 재산을 증여할 때 부모를 부양해야 한다는 효도의무를 증서에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게다가 소송비용까지 어머니가 내야 한다니, 저는 너무나 가슴이 아팠습니다. 어쩌다가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이 지경이 되어버렸을까? 아무리 법이 냉정하다고는 하지만 판사의 이러한 결정이 과연 옳은 것일까? 기사를 보며 저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실정법보다 소중한 것이 관습법 아닙니까? 그리고 관습법보다 더 소중한 것이 사회적 가치관이 들어있는 공의와 정의의 법 아니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자녀들이 부모를 섬기는 것이 마땅한 법 아닙니까? 과거 제기된 소송에서는 부양의무를 기록한 증거가 있는 증여의 경우, 소송에서 이겼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부양의무를 기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부모가 소송에서 진 것입니다.
그냥 지나가는 사람에게 몇 억씩 주는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아들이고 딸이기 때문에 주는 것 아닙니까? 기록으로 남기지 않아도 당연히 부모에게 효도하라고 주는 것 아닐까요? 그런데 그 기록 한 마디가 없다고 아들의 손을 들어준 이 법은 대체 어느 나라 법입니까?
대체 돈이 무엇이기에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는 것인지, 마음이 아프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앞으로 부모들은 살아있는 동안 자녀에게 증여를 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증여를 하겠습니까? 자녀들이 마지막까지 효도하는 것을 보고 나서, “나 죽은 후에 주겠다” 하지 않겠습니까?

돈에는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하는 어두운 힘이 있습니다.

사람의 인격을 판단할 수 있는 것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말이나 행동을 살피는 것도 한 가지 판단 기준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그 사람이 어떻게 돈을 벌었고, 번 돈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를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습니다. 이렇듯 돈은 사람의 인격을 가늠하는 리트머스 시험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돈은 우리에게 다가와서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당신은 나, 돈을 좋아하는가?” 누구나 예외 없이, 예수님을 믿든 안 믿든 상관없이 좋아한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돈의 힘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돈은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도구가 됨을 알기 때문입니다.
돈이 두 번째 질문을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당신이 가진 돈으로 스스로 만족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만족할 수가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변명합니다. ‘내가 여기서 자족하면 더 큰 노력을 하지 않는 게으름뱅이가 되지 않을까? 내가 지금 자족하면 그냥 이 모양, 이 모습에 휩쓸려 살아가게 되지 않을까? 그래, 나는 가진 것으로 자족하지 않을 거야! 나는 더 성장해야 해. 더 커져야 해. 더 많이 가져야 해. 아주 큰 부자가 되어야 해.’ 그렇게 스스로 더 가질 것을 요구하게 됩니다.
하지만 내가 지금 소유한 백만 원에 만족하지 않는다면, 십억 원을 손에 넣어도 만족할 수는 없습니다. 나보다 더 돈을 많이 가진 사람이 눈에 띄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진 것은 그저 잠깐의 기쁨으로 사라지게 마련입니다. 이렇듯 돈이란 가지면 가질수록 더 많이 갖고 싶은 욕망을 생기게 합니다. 이것이 돈의 본질이고 속성입니다.
돈은 단순히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돈은 우리를 유혹하는 영적인 마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 6절에는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디모데전서 6:6)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자족할 줄 알아야 삶에 여유가 생기고, 그 때 영적인 경건성도 큰 이익이 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족하는 마음은 이제 아무것도 안 하고 손을 놓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게으름을 피우라는 뜻도 아닙니다. 이것은 내가 지금 무엇을 가졌든 하나님 앞에서 소중히 여기고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을 가지라는 이야기입니다. 스스로 만족할 줄 아는 능력이 여유를 가져다주고, 남을 돌아볼 줄 아는 마음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돈이 우리의 인생에서 목표나 목적 그 자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돈은 우리를 쥐어짜고 몰아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돈은 결코 우리를 살리지 못합니다. 오히려 우리를 어둡게 만들고, 죽게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일함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입니다.

돈은 우리에게 또 묻습니다. “당신은 돈을 많이 갖고 있어서 부자인가? 아니면 부자인 마음을 가지니 돈이 당신에게 들어오고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떼돈 벌기를 원합니다. 돈이 손에 막 굴러 들어오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도박에 손을 대고, 매일 로또를 사서 거기에 정신을 팔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이렇게 돈을 기적처럼 받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지만 돈은 결코 그렇게 오지 않습니다. 혹 그렇게 다가왔다 하더라도 그런 돈은 밑 빠진 독에 부은 물처럼 금방 사라지고 맙니다.
그렇다면 돈은 누구에게 오는 것일까요? 수고한 자에게 오는 것입니다. 돈은 땀 흘리며 노력하고, 애쓰고 전략을 세우는 사람들에게 다가오는 것이지, 그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돈을 버는 과정에 참여하지 않고, 수고와 노력 없이 돈을 얻겠다는 마음은 못된 마음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거지근성이요, 마음의 병폐입니다. 마찬가지로 일 없는 돈, 일하지 않음에도 얻게 된 돈은 우리에게 해를 가져다 줄뿐입니다.
창세기 2장 15절을 보면,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도 인간으로 하여금 일하게 하셨습니다. 땅을 갈면서 땀 흘리게 만드셨습니다. 이처럼 노동이란 하나님의 거룩한 축복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씀하시며 우리 인간들에게 일을 하도록 부탁하셨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이 말을 받아서 ‘일하기 싫어하는 자들에게는 먹을 것도 주지 말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만큼 수고하고 땀 흘리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소중한 덕목입니다.
인간의 노동은 창조주 하나님과 동역하는 것입니다.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은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기업을 통해 생산의 작업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복된 사람들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노동과 수고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과도 같은 죄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서 창조의 사역에 동참하여 이 세계를 아름답고 풍성하게 만들 것을 요청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수고하고 땀 흘리는 것을 소중히 여깁니까? 또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을 어떻게 키우고 있습니까? 수고하고 땀 흘리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가르치면서 자녀들에게 돈을 줍니까?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돈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가 나옵니다. 초대교회에서 바울의 복음 선포에 동역한 인물 중에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만큼 소중한 자들도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일을 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감당했던 인물들로 성경에 나오는 최고의 멋진 부부입니다.
남편 아굴라는 본도 출신의 유대인이었고, 그의 아내 브리스길라는 로마 귀족 출신으로 여겨집니다. 브리스길라는 남편보다 더 적극적이고 사교적이며 일하기를 귀히 여겼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리고 남편 아굴라는 지성적이며 조용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도행전 18장 3절을 보면 바울이 이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사도행전 18:3)

바울은 이 부부와 함께 살며 함께 일을 했습니다. 그들의 일은 집을 짓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건설업입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바울의 복음을 들으면서, 무엇보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돈을 사용할 줄 아는 부부가 되었습니다. 열심히 일하여 번 돈을 바르게 쓸 줄 아는 부부가 된 것입니다.
우리 몸에 산소가 필요하듯 우리의 삶에는 돈이 필요합니다. 돈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돈만큼 우리의 삶 전체를 흔들리게 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만큼 돈은 우리 삶에서 매우 소중하고 값진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인들은 이 돈 앞에 설 때마다 결단할 필요가 있습니다. 돈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 때문입니다. 아니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전에 돈이 먼저 우리를 향해서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요구합니다. “당신, 내 지배를 받을래 아니면 당신이 나를 다스릴래?”
우리는 돈을 만질 때, 아니 이미 그 전에 사업을 계획하고 시작할 때 늘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돈을 다스리는가? 돈이 나를 다스리는가? 돈이 내 노예인가? 내가 돈의 노예인가? 이것을 분명히 구분해야 합니다. 그래야 돈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의미가 있게 됩니다. 예수님은, 돈은 하나님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존재이지 돈이 하나님처럼 높이 들려 인생의 목표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그것은 곧 망하는 인생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돈이 나를 지배할 때에는 이미 욕심과 탐욕의 영이 나를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돈을 지배하게 되면 내게는 자유로운 영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 마음을 풍요롭게 만듭니다. 그 풍요의 마음이 있어야 우리가 돈을 바르게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돈이 있기 때문에, 돈을 많이 쌓아 놓았기 때문에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그것을 자기만을 위해 사용하면 부자일 수 없습니다. 반대로 돈이 많지 않아도 그것을 하나님 나라와 이웃을 위해서 쓸 줄 알 때, 그 사람이 진정한 부자인 것입니다.
돈과 재물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에 우선순위로 사용될 때, 그 돈과 재물은 축복이 됩니다. 그 때 돈은 선물이 되는 것이고, 그 돈을 통해서 삶을 풍요롭게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나의 소유를 하나님 앞에 드릴 때, 하나님의 동역자가 됩니다.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면, 바울은 고린도에 이르렀을 때 유대인 아굴라와 그의 아내 브리스길라를 만나게 됩니다. 이 부부는 무역업까지 하고 있던 사역가들로, 로마의 본집 외에도 고린도와 에베소에 집이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말씀을 듣고 감격하게 되어 바울을 집으로 초대하여 함께 거하게 했습니다. 그러자 그곳이 말씀 증거하는 공간이 되어 곧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한 사람, 두 사람, 세 사람이 모이면서 교회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웅장한 예배당이 아니었습니다. 독립된 건물이 아니었습니다. 거의 다 가정교회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또 저의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 (로마서 16:5)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고린도전서 16:19)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의 집에 교회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의 집을 교회 장소로 제공했습니다. 그들은 시간을 내고, 돈을 내고, 정성을 다했습니다. 가지고 있는 삶의 소중한 부분을 하나님의 교회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성도들이 모이는 자리에 내놓은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동역자가 될까요? 시간을 내고, 돈이나 재물을 낼 때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를 주님께 드릴 때, 내가 가지고 있는 달란트를 하나님 앞에 내놓을 때,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 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일들을 통해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는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 나가는 일에 쓰임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바울에게 엄청난 기쁨이었고, 위로와 힘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16장 4절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그들은(브리스가와 아굴라)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로마서 16:4)

그들은 바울을 위해 자기들의 목숨까지도 내놓을 만큼 열정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했다는 것입니다.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는 말에서 이들이 얼마나 이웃교회들을 섬기고 사랑하며 하나님의 교회가 풍성하게 되기를 열망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영적인 도움뿐만 아니라 물질적인 도움도 이 부부를 통해서 제공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재물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재물의 주인입니까 아니면 재물의 종입니까? 부활을 산다는 것은 저 공중에 사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부활의 능력으로 사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하게 산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의 생각을 갖고 내게 주어진 삶을 하나하나 새롭게 만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활을 살기 위해서 성령의 사람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 중 하나는, 돈과 재물에 대해서 가치관을 설정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방향을 전환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돈이 나를 억압하지 않도록 돈보다 더 큰 분이신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내게 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돈의 진정한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야 돈과 재물로부터 자유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돈을 벌지 않고 그냥 놀기만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수고하고 땀 흘리며 열심히 돈을 벌면서 돈의 소중함을 알고, 내가 그 돈을 다스리는 것, 즉 돈을 바르게 사용할 줄 아는 돈의 주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활을 산 사람, 재물을 넘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또 하나가 있습니다. 돈을 벌고 돈을 사용하기 전에 먼저 돈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50억을 선물로 준다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허락하신다면 그 돈을 어떻게 사용하시겠습니까? “하나님, 주시기만 하면 그 때부터 제가 기도하며 멋지게 사용하겠습니다!” 이래서는 안 됩니다. 어떻게 사용할지 준비를 해야 받았을 때 그것을 바르게 사용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자족함으로 준비해야 합니다.

돈을 벌고 싶으십니까? 세상의 자리에서 무언가 얻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려면 수고해야 합니다. 땀 흘리며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돈의 속성과 돈의 길을 배워야 합니다. 또한 돈이 나를 지배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돈을 선물로 주신 것을 압니다. 돈을 다스리는 마음을 갖고 이 돈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쓰고 싶습니다.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쓰고 싶습니다.”라고 구체적인 제목들을 정하여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돈을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신명기 8:18)

우리 속에는 이미 그런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니 개발하시기 바랍니다. 수고하고 노력하고, 기도하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 “내게 지혜를 주세요. 하나님 이것을 주님 위해서 쓰고 싶습니다.”라고 아뢰시기 바랍니다. 만약 그런 마음이 없는데도 돈이 자꾸 생기게 되거든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그런 돈과 재물은 우리를 타락과 파멸로 이끄는 못된 재물이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변함없이 하나님을 위해 자신들의 물질을 쓰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이렇게 부릅니다.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로마서 16:3)

그들은 바울의 동역자이자, 믿음의 친구였습니다. 함께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믿음의 역사가 이 부부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돈과 재물을 주시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벌고,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하나님 앞에 아뢰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 채우지 말고 먼저 내게 있는 지금 것으로 자족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더 큰 미래를 향해서 마음을 열어 놓아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이고,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모두가 하나님 말씀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돈과 재물의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돈과 재물을 주님의 뜻대로 바르게 다스릴 줄 아는 복된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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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8: 1 ~ 4

1

그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2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3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4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

돈은 때로 부모와 자녀의 관계까지 무너지게 합니다.

최근에 이런 기사를 본 적 있으십니까? 아주 놀랍고도 씁쓸한 기사로, 나이 든 한 어머니가 아들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내용은 이러합니다. 어머니는 나이 들어 아들에게 땅과 재산을 다 증여했으나 자녀가 도무지 어머니를 제대로 모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증여한 재산을 반환하라는 재산반환청구소송을 냈습니다.
그런데 재판 결과가 매우 충격적입니다. 어머니가 패소한 것입니다. 재산을 증여할 때 부모를 부양해야 한다는 효도의무를 증서에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게다가 소송비용까지 어머니가 내야 한다니, 저는 너무나 가슴이 아팠습니다. 어쩌다가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이 지경이 되어버렸을까? 아무리 법이 냉정하다고는 하지만 판사의 이러한 결정이 과연 옳은 것일까? 기사를 보며 저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실정법보다 소중한 것이 관습법 아닙니까? 그리고 관습법보다 더 소중한 것이 사회적 가치관이 들어있는 공의와 정의의 법 아니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자녀들이 부모를 섬기는 것이 마땅한 법 아닙니까? 과거 제기된 소송에서는 부양의무를 기록한 증거가 있는 증여의 경우, 소송에서 이겼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부양의무를 기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부모가 소송에서 진 것입니다.
그냥 지나가는 사람에게 몇 억씩 주는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아들이고 딸이기 때문에 주는 것 아닙니까? 기록으로 남기지 않아도 당연히 부모에게 효도하라고 주는 것 아닐까요? 그런데 그 기록 한 마디가 없다고 아들의 손을 들어준 이 법은 대체 어느 나라 법입니까?
대체 돈이 무엇이기에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는 것인지, 마음이 아프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앞으로 부모들은 살아있는 동안 자녀에게 증여를 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증여를 하겠습니까? 자녀들이 마지막까지 효도하는 것을 보고 나서, “나 죽은 후에 주겠다” 하지 않겠습니까?

돈에는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하는 어두운 힘이 있습니다.

사람의 인격을 판단할 수 있는 것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말이나 행동을 살피는 것도 한 가지 판단 기준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그 사람이 어떻게 돈을 벌었고, 번 돈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를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습니다. 이렇듯 돈은 사람의 인격을 가늠하는 리트머스 시험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돈은 우리에게 다가와서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당신은 나, 돈을 좋아하는가?” 누구나 예외 없이, 예수님을 믿든 안 믿든 상관없이 좋아한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돈의 힘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돈은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도구가 됨을 알기 때문입니다.
돈이 두 번째 질문을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당신이 가진 돈으로 스스로 만족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만족할 수가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변명합니다. ‘내가 여기서 자족하면 더 큰 노력을 하지 않는 게으름뱅이가 되지 않을까? 내가 지금 자족하면 그냥 이 모양, 이 모습에 휩쓸려 살아가게 되지 않을까? 그래, 나는 가진 것으로 자족하지 않을 거야! 나는 더 성장해야 해. 더 커져야 해. 더 많이 가져야 해. 아주 큰 부자가 되어야 해.’ 그렇게 스스로 더 가질 것을 요구하게 됩니다.
하지만 내가 지금 소유한 백만 원에 만족하지 않는다면, 십억 원을 손에 넣어도 만족할 수는 없습니다. 나보다 더 돈을 많이 가진 사람이 눈에 띄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진 것은 그저 잠깐의 기쁨으로 사라지게 마련입니다. 이렇듯 돈이란 가지면 가질수록 더 많이 갖고 싶은 욕망을 생기게 합니다. 이것이 돈의 본질이고 속성입니다.
돈은 단순히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돈은 우리를 유혹하는 영적인 마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 6절에는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디모데전서 6:6)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자족할 줄 알아야 삶에 여유가 생기고, 그 때 영적인 경건성도 큰 이익이 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족하는 마음은 이제 아무것도 안 하고 손을 놓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게으름을 피우라는 뜻도 아닙니다. 이것은 내가 지금 무엇을 가졌든 하나님 앞에서 소중히 여기고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을 가지라는 이야기입니다. 스스로 만족할 줄 아는 능력이 여유를 가져다주고, 남을 돌아볼 줄 아는 마음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돈이 우리의 인생에서 목표나 목적 그 자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돈은 우리를 쥐어짜고 몰아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돈은 결코 우리를 살리지 못합니다. 오히려 우리를 어둡게 만들고, 죽게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일함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입니다.

돈은 우리에게 또 묻습니다. “당신은 돈을 많이 갖고 있어서 부자인가? 아니면 부자인 마음을 가지니 돈이 당신에게 들어오고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떼돈 벌기를 원합니다. 돈이 손에 막 굴러 들어오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도박에 손을 대고, 매일 로또를 사서 거기에 정신을 팔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이렇게 돈을 기적처럼 받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지만 돈은 결코 그렇게 오지 않습니다. 혹 그렇게 다가왔다 하더라도 그런 돈은 밑 빠진 독에 부은 물처럼 금방 사라지고 맙니다.
그렇다면 돈은 누구에게 오는 것일까요? 수고한 자에게 오는 것입니다. 돈은 땀 흘리며 노력하고, 애쓰고 전략을 세우는 사람들에게 다가오는 것이지, 그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돈을 버는 과정에 참여하지 않고, 수고와 노력 없이 돈을 얻겠다는 마음은 못된 마음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거지근성이요, 마음의 병폐입니다. 마찬가지로 일 없는 돈, 일하지 않음에도 얻게 된 돈은 우리에게 해를 가져다 줄뿐입니다.
창세기 2장 15절을 보면,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도 인간으로 하여금 일하게 하셨습니다. 땅을 갈면서 땀 흘리게 만드셨습니다. 이처럼 노동이란 하나님의 거룩한 축복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씀하시며 우리 인간들에게 일을 하도록 부탁하셨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이 말을 받아서 ‘일하기 싫어하는 자들에게는 먹을 것도 주지 말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만큼 수고하고 땀 흘리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소중한 덕목입니다.
인간의 노동은 창조주 하나님과 동역하는 것입니다.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은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기업을 통해 생산의 작업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복된 사람들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노동과 수고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과도 같은 죄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서 창조의 사역에 동참하여 이 세계를 아름답고 풍성하게 만들 것을 요청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수고하고 땀 흘리는 것을 소중히 여깁니까? 또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을 어떻게 키우고 있습니까? 수고하고 땀 흘리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가르치면서 자녀들에게 돈을 줍니까?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돈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가 나옵니다. 초대교회에서 바울의 복음 선포에 동역한 인물 중에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만큼 소중한 자들도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일을 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감당했던 인물들로 성경에 나오는 최고의 멋진 부부입니다.
남편 아굴라는 본도 출신의 유대인이었고, 그의 아내 브리스길라는 로마 귀족 출신으로 여겨집니다. 브리스길라는 남편보다 더 적극적이고 사교적이며 일하기를 귀히 여겼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리고 남편 아굴라는 지성적이며 조용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도행전 18장 3절을 보면 바울이 이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사도행전 18:3)

바울은 이 부부와 함께 살며 함께 일을 했습니다. 그들의 일은 집을 짓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건설업입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바울의 복음을 들으면서, 무엇보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돈을 사용할 줄 아는 부부가 되었습니다. 열심히 일하여 번 돈을 바르게 쓸 줄 아는 부부가 된 것입니다.
우리 몸에 산소가 필요하듯 우리의 삶에는 돈이 필요합니다. 돈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돈만큼 우리의 삶 전체를 흔들리게 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만큼 돈은 우리 삶에서 매우 소중하고 값진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인들은 이 돈 앞에 설 때마다 결단할 필요가 있습니다. 돈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 때문입니다. 아니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전에 돈이 먼저 우리를 향해서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요구합니다. “당신, 내 지배를 받을래 아니면 당신이 나를 다스릴래?”
우리는 돈을 만질 때, 아니 이미 그 전에 사업을 계획하고 시작할 때 늘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돈을 다스리는가? 돈이 나를 다스리는가? 돈이 내 노예인가? 내가 돈의 노예인가? 이것을 분명히 구분해야 합니다. 그래야 돈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의미가 있게 됩니다. 예수님은, 돈은 하나님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존재이지 돈이 하나님처럼 높이 들려 인생의 목표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그것은 곧 망하는 인생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돈이 나를 지배할 때에는 이미 욕심과 탐욕의 영이 나를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돈을 지배하게 되면 내게는 자유로운 영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 마음을 풍요롭게 만듭니다. 그 풍요의 마음이 있어야 우리가 돈을 바르게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돈이 있기 때문에, 돈을 많이 쌓아 놓았기 때문에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그것을 자기만을 위해 사용하면 부자일 수 없습니다. 반대로 돈이 많지 않아도 그것을 하나님 나라와 이웃을 위해서 쓸 줄 알 때, 그 사람이 진정한 부자인 것입니다.
돈과 재물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에 우선순위로 사용될 때, 그 돈과 재물은 축복이 됩니다. 그 때 돈은 선물이 되는 것이고, 그 돈을 통해서 삶을 풍요롭게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나의 소유를 하나님 앞에 드릴 때, 하나님의 동역자가 됩니다.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면, 바울은 고린도에 이르렀을 때 유대인 아굴라와 그의 아내 브리스길라를 만나게 됩니다. 이 부부는 무역업까지 하고 있던 사역가들로, 로마의 본집 외에도 고린도와 에베소에 집이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말씀을 듣고 감격하게 되어 바울을 집으로 초대하여 함께 거하게 했습니다. 그러자 그곳이 말씀 증거하는 공간이 되어 곧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한 사람, 두 사람, 세 사람이 모이면서 교회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웅장한 예배당이 아니었습니다. 독립된 건물이 아니었습니다. 거의 다 가정교회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또 저의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 (로마서 16:5)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고린도전서 16:19)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의 집에 교회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의 집을 교회 장소로 제공했습니다. 그들은 시간을 내고, 돈을 내고, 정성을 다했습니다. 가지고 있는 삶의 소중한 부분을 하나님의 교회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성도들이 모이는 자리에 내놓은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동역자가 될까요? 시간을 내고, 돈이나 재물을 낼 때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를 주님께 드릴 때, 내가 가지고 있는 달란트를 하나님 앞에 내놓을 때,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 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일들을 통해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는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 나가는 일에 쓰임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바울에게 엄청난 기쁨이었고, 위로와 힘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16장 4절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그들은(브리스가와 아굴라)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로마서 16:4)

그들은 바울을 위해 자기들의 목숨까지도 내놓을 만큼 열정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했다는 것입니다.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는 말에서 이들이 얼마나 이웃교회들을 섬기고 사랑하며 하나님의 교회가 풍성하게 되기를 열망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영적인 도움뿐만 아니라 물질적인 도움도 이 부부를 통해서 제공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재물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재물의 주인입니까 아니면 재물의 종입니까? 부활을 산다는 것은 저 공중에 사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부활의 능력으로 사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하게 산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의 생각을 갖고 내게 주어진 삶을 하나하나 새롭게 만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활을 살기 위해서 성령의 사람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 중 하나는, 돈과 재물에 대해서 가치관을 설정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방향을 전환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돈이 나를 억압하지 않도록 돈보다 더 큰 분이신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내게 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돈의 진정한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야 돈과 재물로부터 자유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돈을 벌지 않고 그냥 놀기만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수고하고 땀 흘리며 열심히 돈을 벌면서 돈의 소중함을 알고, 내가 그 돈을 다스리는 것, 즉 돈을 바르게 사용할 줄 아는 돈의 주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활을 산 사람, 재물을 넘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또 하나가 있습니다. 돈을 벌고 돈을 사용하기 전에 먼저 돈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50억을 선물로 준다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허락하신다면 그 돈을 어떻게 사용하시겠습니까? “하나님, 주시기만 하면 그 때부터 제가 기도하며 멋지게 사용하겠습니다!” 이래서는 안 됩니다. 어떻게 사용할지 준비를 해야 받았을 때 그것을 바르게 사용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자족함으로 준비해야 합니다.

돈을 벌고 싶으십니까? 세상의 자리에서 무언가 얻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려면 수고해야 합니다. 땀 흘리며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돈의 속성과 돈의 길을 배워야 합니다. 또한 돈이 나를 지배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돈을 선물로 주신 것을 압니다. 돈을 다스리는 마음을 갖고 이 돈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쓰고 싶습니다.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쓰고 싶습니다.”라고 구체적인 제목들을 정하여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돈을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신명기 8:18)

우리 속에는 이미 그런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니 개발하시기 바랍니다. 수고하고 노력하고, 기도하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 “내게 지혜를 주세요. 하나님 이것을 주님 위해서 쓰고 싶습니다.”라고 아뢰시기 바랍니다. 만약 그런 마음이 없는데도 돈이 자꾸 생기게 되거든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그런 돈과 재물은 우리를 타락과 파멸로 이끄는 못된 재물이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변함없이 하나님을 위해 자신들의 물질을 쓰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이렇게 부릅니다.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로마서 16:3)

그들은 바울의 동역자이자, 믿음의 친구였습니다. 함께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믿음의 역사가 이 부부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돈과 재물을 주시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벌고,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하나님 앞에 아뢰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 채우지 말고 먼저 내게 있는 지금 것으로 자족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더 큰 미래를 향해서 마음을 열어 놓아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이고,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모두가 하나님 말씀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돈과 재물의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돈과 재물을 주님의 뜻대로 바르게 다스릴 줄 아는 복된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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