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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영, 희망의 영? – 성령과 악령 28 –

열왕기상 19: 9 ~ 18

김지철 목사

2017.12.31

현대인들의 우울증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절망의 영, 소망의 영?’입니다. 열흘 전쯤 인기 가수의 자살 소식이 보도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를 죽음으로 몰아간 원인이 무엇이었을까요? 절망의 심연이 얼마나 깊었길래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까요? 외로움을 그토록 견디기 어려웠던 것일까요? 공개된 그의 유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난 속에서부터 고장 났다. 천천히 날 갉아먹던 우울은 결국 날 집어삼켰고 난 그걸 이길 수 없었다. 나는 날 미워했다. 끊기는 기억을 붙들고 아무리 정신차리라고 소리쳐 봐도 답은 없었다. 막히는 숨을 틔워줄 수 없다면 차라리 멈추는 게 나아. 날 책임질 수 있는 건 누구인지 물었다. 너뿐이야. 난 오롯이 혼자였다. 끝낸다는 말은 쉽다. 끝내기는 어렵다. 그 어려움에 여지껏 살았다. 도망치고 싶은 거라 했다. 맞아. 난 도망치고 싶었어. 나에게서, 너에게서.”

이 청년의 고통과 절망에 누구도 함께해 주지 못했습니다. 이 유서를 읽어드린 이유는 우리 어린 자녀들이, 또 청년들이 혹시 이런 아픔 속에서 지내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보기 위함입니다. 사는 것 자체가 즐거움이 아니라 고통이라면 얼마나 슬픕니까? 공부라는 짐이 그들을 짓누르고 부모의 기대를 이루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다면, 또 자신의 비전이나 꿈에 비해 현실이 너무 미약하다고 생각된다면, 낙심하고 절망할 것입니다. 아마 이 연예인 역시 직업적 특성상 인기의 고락에 따라 큰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우울증이란 질병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울증의 원인은 다양합니다. 내면적인 요인과 외부적인 요인이 결합해 발생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가족의 죽음, 연애와 이성 문제, 실직, 직장 내 갈등과 스트레스 등 여러 환경적 요인이 우리 몸과 마음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 신체적으로는 면역력이 저하되고 저항 기능도 떨어집니다. 그동안 인생을 살아오면서 이러한 위기와 우울감, 절망감을 한두 번쯤은 다 겪어보셨을 것입니다.
보건복지부가 지난 12월 6일에 ‘2016년 정신 건강 실태 조사’를 발표했습니다. 병원에 직접 찾아온 우울증 환자만 해도 61만3천 명이었습니다. 전체 국민의 1.5% 가량입니다. 또한 여성 환자가 46만9천 명, 남성 환자가 23만4천 명으로, 여성 환자가 두 배나 많았습니다. 이는 남성들은 우울감이 찾아와도 병원을 잘 찾지 않는다는 추측도 가능케 합니다.
우리는 우울증을 ‘마음의 감기’, ‘정신적인 독감’으로 표현합니다. 그리고 우리 삶에 흔히 나타나는 질병이라고 여깁니다. 실제로 우리나라 성인 4천만 명 중 535만 명이 우울감을 경험하는 우울증 고 위험 군에 속한다는 발표도 나왔습니다. 여기에 불안증과 강박 증세를 호소하는 사람들까지 합산하며 성인 4명 중 1명이 우울 증세를 경험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옵니다.
우리도 그런 느낌을 가져본 적이 있지 않습니까? 불안감, 두려움, 외로움, 낙심, 마음의 피로 등을 경험하곤 합니다. 어떻게 보면 이런 증상들은 우리 삶을 떠나지 않는 수식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수식어가 우리 인생을 지나쳐 가는 게 아니라 깊숙이 파고든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의 정신세계를 좀먹으면서 생의 활력마저 앗아갑니다. 이것이 우울증의 두려운 정신 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울감이 우리 영혼에 둥지를 틀게 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은 2017년의 마지막 날입니다. 올 한 해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올 한 해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기쁜 일도 있었지만 슬픈 일이 먼저 떠오릅니다. 희망차게 시작했지만 낙심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우리 마음을 어둡고 무겁게 만들었습니다. 이제 나를 괴롭혔던 모든 문제와 짐들을 훌훌 털어버리고 싶은데,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또다시 마음이 어렵습니다.
사람이 한 번 실패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닙니다. 승패병가지상사(勝敗兵家之常事)라고 했습니다. 이기고 지는 것은 병가에서 일상적인 일이란 뜻입니다. 실수와 실패 때문에 잠깐 넘어지는 건 사실 큰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실수와 실패를 발판과 교훈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인생의 소중한 추억으로 남길 수도 있고, 나를 새롭게 만드는 훈련 과정으로 삼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좌절감과 낙심이 우리 마음에 둥지를 튼다면, 그것은 문제입니다. 내 인생을 구렁텅이 나락 속에 빠져들게 하는 위험 요소입니다. 인생의 낙오자가 되게 하는 위험한 현상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들은 단호히 거부해야 합니다. 실망과 절망, 좌절감을 거절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과감히 절망을 향해 “아니오!”라고 선언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낙담과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탈출해 새로운 사명을 얻게 된 선지자 엘리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구약을 통틀어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한 선지자이자 가장 용기 있고 담대한 선지자를 들라면 누구나 엘리야를 꼽을 것입니다. 그는 당대 아합 왕에게도 거침없이 직언을 쏟았습니다. 당신이 지도자로서 잘못했다고, 이 재해와 기근의 원인이 왕인 당신이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이라며 용기 있게 선언했습니다. 더욱이 당시 아합 왕의 부인 이세벨은 이방 여인이었는데, 그녀가 바알 신과 아세라 신을 끌고 들어왔습니다. 그때 엘리야는 바알을 섬기는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400명, 도합 850명과 갈멜 산에서 결전을 벌였습니다. 그렇게 승리를 거머쥔 인물이 엘리야입니다.
그런데 그런 엘리야도 두려움과 절망감에 사로잡힐 때가 있었습니다. 아합 왕의 아내 이세벨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권력을 이용해서 엘리야를 찾아 나섰습니다. 바알 신을 섬기는 제사장들이 엘리야에 의해 죽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곤 분노하며 엘리야에게 살의를 품습니다. 이때 엘리야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습니다. 그는 낙담했습니다. 결국 도망치기로 결심합니다. 광야로 나가 로뎀나무 아래 앉아 하나님께 투덜댑니다. “하나님, 이게 뭡니까? 내가 하나님을 위해 모든 일을 했는데 결과가 왜 이렇습니까? 내 삶이 무의미합니다. 차라리 여기서 죽는 게 낫겠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원망과 불평을 쏟아냅니다. 4절을 직접 읽어 보겠습니다.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열왕기상 19:4 중)

하나님의 말씀과 인격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가 왜 죽음을 생각했을까요? 하나님과 동행할 때는 기적과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보다 더 열정 있게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죽음의 위협에 직면하니 그렇게 좋았던 신앙지수가 급격히 떨어집니다. 보통 사람처럼 겁이 나서 도망칩니다. 권력 앞에서 무력한 자신을 발견하면서 하나님을 향해 원망과 불평만 쏟아냅니다. 그는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왜 기적이 사라졌는가? 왜 능력도 없어졌는가? 왜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앗아가셨는가? 바알 신을 섬기는 제사장을 없애면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거꾸로 아닌가?’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네가 기적만 바라보고 일했구나. 능력만 바라며 일했지. 네가 정말 나 여호와를 바라봤느냐? 내가 네게 준 것들을 기억하고 있느냐? 엘리야야, 다시 내 말을 들어보아라.” 그러면서 엘리야에게 가르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11~1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열왕기상 19:11~12)

크고 강한 바람이나 바위를 부수는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않았다고 합니다. 바람 후에 지진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않았습니다. 지진 후에 불이 있었지만 불 가운데도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들려옵니다. 강력한 바람이나 지진, 불같이 솟구치는 능력에도 계시지 않았던 하나님이 오히려 말씀으로 다가오신 것입니다. 미세한 음성을 엘리야에게 들려주셨습니다. “엘리야야, 기적과 능력만 찾지 말고 기적과 능력을 만들고 언제나 너와 함께하는 나를 바라보아라.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힘을 받거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9절과 13절에서 하나님의 물음이 반복되는데, 엘리야에게 왜 여기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즉 ‘네가 무엇 때문에 여기 있느냐? 왜 도망갔느냐? 본래 그렇게 겁쟁이였느냐? 네 믿음은 어디 갔느냐? 왜 그렇게 절망하고 있느냐? 왜 나를 바라보지 않느냐?’라고 묻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묻고 계십니다. “네가 나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느냐? 혹시 너를 돕는 분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지는 않느냐? 수단이나 방법으로 보고 있는 건 아니냐? 하나님 자체를 바라보아라. 하나님의 인격을 바라보아라.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읽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다시 미세한 하나님의 음성 앞에 서야 합니다. 다시 말씀을 펴야 합니다. 그동안 잃어버렸던 기도도 시작해야 합니다. 다시 새벽의 자리로 나와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다시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얼마나 나를 사랑하시는지, 기적과 능력이 필요한 게 아니라 그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사람들을 남겨두셨습니다.

왜 엘리야가 그토록 낙담하고 절망했을까요? 그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모습을 하나님께 아뢰었습니다. 10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열왕기상 19:10 중)

그는 이와 비슷한 항변을 14절에서도 또 한 번 합니다. “하나님, 내가 얼마나 하나님께 충성하는 사람입니까? 내 열심은 다른 사람들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내가 이 백성을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붓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 백성이 오히려 나를 죽이려고 합니다.” 이렇게 항변하며 따져 물었습니다.
그는 사실 외로웠습니다. 자신만 홀로 남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갈멜 산의 영적 전투는 1 대 450, 1 대 850의 전투였습니다. 엘리야도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지닌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홀로 이 모든 일들을 감당했습니다. 아무리 거창하고 위대한 일을 한다 해도, 명분 있는 싸움을 치른다고 해도 혼자서 감당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엘리야 역시 외로웠습니다. 자신 홀로 그 모든 것을 책임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백성을 위해 생명 걸고 충성을 해도, 백성들은 엘리야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그의 외로움과 고독은 심화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 것입니다. “엘리야야, 포기하지 말거라. 절망하지도 말라. 너는 혼자가 아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람들을 남겨놓았다. 모든 사람들이 너를 싫어하고 나를 배반한 게 아니다. 내가 나의 사람 7천 명을 남겨 놓았다.” 18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열왕기상 19:18)

“엘리야야, 낙담하지 말거라. 네 주위에 신앙의 인물들이 있다. 말씀의 친구들도 있다.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라. 내가 숨겨놓은 그 사람들을 찾아라. 그리고 그들과 함께 길을 가거라.”라고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이로써 엘리야에게 마지막 사명, 곧 사람을 세우는 사명을 허락하십니다. “엘리야야, 너에게 새로운 사명이 있다. 사람을 키우는 일이다. 이제 내가 알려주는 사람들을 만나라. 그들에게 기름을 부어 지도자로 세워라. 나의 뜻을 실천하게 하라.”라고 말입니다.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고,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라고 하십니다. 그리하여 아합과 이세벨이 행한 못된 행위를 심판하게 하십니다. 또한 엘리사에게도 기름을 부어 엘리야의 후계자가 되게 하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해야 할 사명은 사람을 세우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 말씀의 사람들,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사람들을 세우는 것이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입니다. 거기서 우리의 절망이 희망으로 변하게 되고, 우리가 소망을 얻게 됩니다.

우리의 소망은 오직 주님께 있습니다.

여러분, 절망에 대한 신앙인과 비신앙인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비신앙인은 실망하면 자학을 합니다. 자신을 비탄에 빠뜨립니다. 바닥에 내쳐진 자신의 모습이 싫습니다. 바닥 치는 내 인생을 누군가에게 고백하는 것도 괴롭습니다. 그래서 스스로가 미운 것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싫어지고 혐오스러워집니다. 그래서 서서히 죽음을 향해 걸음을 내딛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다릅니다. 물론 그도 실망과 절망을 경험합니다. 자기 실존의 죽음과 같은 고통도 경험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자신이 미워지기도 합니다. 하나님께 원망과 불평을 쏟아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다음이 다릅니다. 신앙인은 그 모든 감정과 절망을 하나님께 아뢰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무능과 절망감, 실망, 아픔, 고통, 원망을 하나님께 다 쏟아내고 맡기는 것입니다. 자신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보다 더 큰 고난의 길을 가신 예수님을 경험하기 시작합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사랑도 깨닫게 됩니다. 절망 가운데 힘들어하는 나를 있는 그대로 받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습니다. 그때 우리는 다시 하나님께 소망을 두게 됩니다. 시편 39편 7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시편 39:7)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서 할 일이 있습니다. 절망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절망아, 결코 네가 나를 넘어뜨릴 수 없다. 네가 나를 무너뜨릴 수 없다.”라고 선언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소망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망이 아닌 소망의 주님을 바라봅니다. 절망이 우리의 인생을 스쳐 지나갈 수는 있지만 우리 인생에 둥지를 틀 수는 없습니다. 결코 내 인생을 파괴시킬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 모든 것을 이겨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를 억압하고 힘들게 했던 모든 것들을 주님 앞에 털어내고, 다가오는 새해에 “예수님만이 내 소망입니다. 내가 주님과 함께 새로운 삶을 열겠습니다.”라고 고백하며 결단하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이 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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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19: 9 ~ 18

9

엘리야가 그 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머물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10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1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12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13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14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를 통하여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고

16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17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18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현대인들의 우울증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절망의 영, 소망의 영?’입니다. 열흘 전쯤 인기 가수의 자살 소식이 보도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를 죽음으로 몰아간 원인이 무엇이었을까요? 절망의 심연이 얼마나 깊었길래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까요? 외로움을 그토록 견디기 어려웠던 것일까요? 공개된 그의 유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난 속에서부터 고장 났다. 천천히 날 갉아먹던 우울은 결국 날 집어삼켰고 난 그걸 이길 수 없었다. 나는 날 미워했다. 끊기는 기억을 붙들고 아무리 정신차리라고 소리쳐 봐도 답은 없었다. 막히는 숨을 틔워줄 수 없다면 차라리 멈추는 게 나아. 날 책임질 수 있는 건 누구인지 물었다. 너뿐이야. 난 오롯이 혼자였다. 끝낸다는 말은 쉽다. 끝내기는 어렵다. 그 어려움에 여지껏 살았다. 도망치고 싶은 거라 했다. 맞아. 난 도망치고 싶었어. 나에게서, 너에게서.”

이 청년의 고통과 절망에 누구도 함께해 주지 못했습니다. 이 유서를 읽어드린 이유는 우리 어린 자녀들이, 또 청년들이 혹시 이런 아픔 속에서 지내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보기 위함입니다. 사는 것 자체가 즐거움이 아니라 고통이라면 얼마나 슬픕니까? 공부라는 짐이 그들을 짓누르고 부모의 기대를 이루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다면, 또 자신의 비전이나 꿈에 비해 현실이 너무 미약하다고 생각된다면, 낙심하고 절망할 것입니다. 아마 이 연예인 역시 직업적 특성상 인기의 고락에 따라 큰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우울증이란 질병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울증의 원인은 다양합니다. 내면적인 요인과 외부적인 요인이 결합해 발생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가족의 죽음, 연애와 이성 문제, 실직, 직장 내 갈등과 스트레스 등 여러 환경적 요인이 우리 몸과 마음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 신체적으로는 면역력이 저하되고 저항 기능도 떨어집니다. 그동안 인생을 살아오면서 이러한 위기와 우울감, 절망감을 한두 번쯤은 다 겪어보셨을 것입니다.
보건복지부가 지난 12월 6일에 ‘2016년 정신 건강 실태 조사’를 발표했습니다. 병원에 직접 찾아온 우울증 환자만 해도 61만3천 명이었습니다. 전체 국민의 1.5% 가량입니다. 또한 여성 환자가 46만9천 명, 남성 환자가 23만4천 명으로, 여성 환자가 두 배나 많았습니다. 이는 남성들은 우울감이 찾아와도 병원을 잘 찾지 않는다는 추측도 가능케 합니다.
우리는 우울증을 ‘마음의 감기’, ‘정신적인 독감’으로 표현합니다. 그리고 우리 삶에 흔히 나타나는 질병이라고 여깁니다. 실제로 우리나라 성인 4천만 명 중 535만 명이 우울감을 경험하는 우울증 고 위험 군에 속한다는 발표도 나왔습니다. 여기에 불안증과 강박 증세를 호소하는 사람들까지 합산하며 성인 4명 중 1명이 우울 증세를 경험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옵니다.
우리도 그런 느낌을 가져본 적이 있지 않습니까? 불안감, 두려움, 외로움, 낙심, 마음의 피로 등을 경험하곤 합니다. 어떻게 보면 이런 증상들은 우리 삶을 떠나지 않는 수식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수식어가 우리 인생을 지나쳐 가는 게 아니라 깊숙이 파고든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의 정신세계를 좀먹으면서 생의 활력마저 앗아갑니다. 이것이 우울증의 두려운 정신 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울감이 우리 영혼에 둥지를 틀게 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은 2017년의 마지막 날입니다. 올 한 해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올 한 해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기쁜 일도 있었지만 슬픈 일이 먼저 떠오릅니다. 희망차게 시작했지만 낙심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우리 마음을 어둡고 무겁게 만들었습니다. 이제 나를 괴롭혔던 모든 문제와 짐들을 훌훌 털어버리고 싶은데,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또다시 마음이 어렵습니다.
사람이 한 번 실패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닙니다. 승패병가지상사(勝敗兵家之常事)라고 했습니다. 이기고 지는 것은 병가에서 일상적인 일이란 뜻입니다. 실수와 실패 때문에 잠깐 넘어지는 건 사실 큰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실수와 실패를 발판과 교훈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인생의 소중한 추억으로 남길 수도 있고, 나를 새롭게 만드는 훈련 과정으로 삼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좌절감과 낙심이 우리 마음에 둥지를 튼다면, 그것은 문제입니다. 내 인생을 구렁텅이 나락 속에 빠져들게 하는 위험 요소입니다. 인생의 낙오자가 되게 하는 위험한 현상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들은 단호히 거부해야 합니다. 실망과 절망, 좌절감을 거절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과감히 절망을 향해 “아니오!”라고 선언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낙담과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탈출해 새로운 사명을 얻게 된 선지자 엘리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구약을 통틀어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한 선지자이자 가장 용기 있고 담대한 선지자를 들라면 누구나 엘리야를 꼽을 것입니다. 그는 당대 아합 왕에게도 거침없이 직언을 쏟았습니다. 당신이 지도자로서 잘못했다고, 이 재해와 기근의 원인이 왕인 당신이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이라며 용기 있게 선언했습니다. 더욱이 당시 아합 왕의 부인 이세벨은 이방 여인이었는데, 그녀가 바알 신과 아세라 신을 끌고 들어왔습니다. 그때 엘리야는 바알을 섬기는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400명, 도합 850명과 갈멜 산에서 결전을 벌였습니다. 그렇게 승리를 거머쥔 인물이 엘리야입니다.
그런데 그런 엘리야도 두려움과 절망감에 사로잡힐 때가 있었습니다. 아합 왕의 아내 이세벨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권력을 이용해서 엘리야를 찾아 나섰습니다. 바알 신을 섬기는 제사장들이 엘리야에 의해 죽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곤 분노하며 엘리야에게 살의를 품습니다. 이때 엘리야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습니다. 그는 낙담했습니다. 결국 도망치기로 결심합니다. 광야로 나가 로뎀나무 아래 앉아 하나님께 투덜댑니다. “하나님, 이게 뭡니까? 내가 하나님을 위해 모든 일을 했는데 결과가 왜 이렇습니까? 내 삶이 무의미합니다. 차라리 여기서 죽는 게 낫겠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원망과 불평을 쏟아냅니다. 4절을 직접 읽어 보겠습니다.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열왕기상 19:4 중)

하나님의 말씀과 인격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가 왜 죽음을 생각했을까요? 하나님과 동행할 때는 기적과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보다 더 열정 있게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죽음의 위협에 직면하니 그렇게 좋았던 신앙지수가 급격히 떨어집니다. 보통 사람처럼 겁이 나서 도망칩니다. 권력 앞에서 무력한 자신을 발견하면서 하나님을 향해 원망과 불평만 쏟아냅니다. 그는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왜 기적이 사라졌는가? 왜 능력도 없어졌는가? 왜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앗아가셨는가? 바알 신을 섬기는 제사장을 없애면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거꾸로 아닌가?’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네가 기적만 바라보고 일했구나. 능력만 바라며 일했지. 네가 정말 나 여호와를 바라봤느냐? 내가 네게 준 것들을 기억하고 있느냐? 엘리야야, 다시 내 말을 들어보아라.” 그러면서 엘리야에게 가르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11~1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열왕기상 19:11~12)

크고 강한 바람이나 바위를 부수는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않았다고 합니다. 바람 후에 지진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않았습니다. 지진 후에 불이 있었지만 불 가운데도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들려옵니다. 강력한 바람이나 지진, 불같이 솟구치는 능력에도 계시지 않았던 하나님이 오히려 말씀으로 다가오신 것입니다. 미세한 음성을 엘리야에게 들려주셨습니다. “엘리야야, 기적과 능력만 찾지 말고 기적과 능력을 만들고 언제나 너와 함께하는 나를 바라보아라.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힘을 받거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9절과 13절에서 하나님의 물음이 반복되는데, 엘리야에게 왜 여기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즉 ‘네가 무엇 때문에 여기 있느냐? 왜 도망갔느냐? 본래 그렇게 겁쟁이였느냐? 네 믿음은 어디 갔느냐? 왜 그렇게 절망하고 있느냐? 왜 나를 바라보지 않느냐?’라고 묻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묻고 계십니다. “네가 나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느냐? 혹시 너를 돕는 분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지는 않느냐? 수단이나 방법으로 보고 있는 건 아니냐? 하나님 자체를 바라보아라. 하나님의 인격을 바라보아라.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읽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다시 미세한 하나님의 음성 앞에 서야 합니다. 다시 말씀을 펴야 합니다. 그동안 잃어버렸던 기도도 시작해야 합니다. 다시 새벽의 자리로 나와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다시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얼마나 나를 사랑하시는지, 기적과 능력이 필요한 게 아니라 그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사람들을 남겨두셨습니다.

왜 엘리야가 그토록 낙담하고 절망했을까요? 그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모습을 하나님께 아뢰었습니다. 10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열왕기상 19:10 중)

그는 이와 비슷한 항변을 14절에서도 또 한 번 합니다. “하나님, 내가 얼마나 하나님께 충성하는 사람입니까? 내 열심은 다른 사람들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내가 이 백성을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붓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 백성이 오히려 나를 죽이려고 합니다.” 이렇게 항변하며 따져 물었습니다.
그는 사실 외로웠습니다. 자신만 홀로 남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갈멜 산의 영적 전투는 1 대 450, 1 대 850의 전투였습니다. 엘리야도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지닌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홀로 이 모든 일들을 감당했습니다. 아무리 거창하고 위대한 일을 한다 해도, 명분 있는 싸움을 치른다고 해도 혼자서 감당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엘리야 역시 외로웠습니다. 자신 홀로 그 모든 것을 책임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백성을 위해 생명 걸고 충성을 해도, 백성들은 엘리야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그의 외로움과 고독은 심화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 것입니다. “엘리야야, 포기하지 말거라. 절망하지도 말라. 너는 혼자가 아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람들을 남겨놓았다. 모든 사람들이 너를 싫어하고 나를 배반한 게 아니다. 내가 나의 사람 7천 명을 남겨 놓았다.” 18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열왕기상 19:18)

“엘리야야, 낙담하지 말거라. 네 주위에 신앙의 인물들이 있다. 말씀의 친구들도 있다.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라. 내가 숨겨놓은 그 사람들을 찾아라. 그리고 그들과 함께 길을 가거라.”라고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이로써 엘리야에게 마지막 사명, 곧 사람을 세우는 사명을 허락하십니다. “엘리야야, 너에게 새로운 사명이 있다. 사람을 키우는 일이다. 이제 내가 알려주는 사람들을 만나라. 그들에게 기름을 부어 지도자로 세워라. 나의 뜻을 실천하게 하라.”라고 말입니다.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고,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라고 하십니다. 그리하여 아합과 이세벨이 행한 못된 행위를 심판하게 하십니다. 또한 엘리사에게도 기름을 부어 엘리야의 후계자가 되게 하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해야 할 사명은 사람을 세우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 말씀의 사람들,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사람들을 세우는 것이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입니다. 거기서 우리의 절망이 희망으로 변하게 되고, 우리가 소망을 얻게 됩니다.

우리의 소망은 오직 주님께 있습니다.

여러분, 절망에 대한 신앙인과 비신앙인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비신앙인은 실망하면 자학을 합니다. 자신을 비탄에 빠뜨립니다. 바닥에 내쳐진 자신의 모습이 싫습니다. 바닥 치는 내 인생을 누군가에게 고백하는 것도 괴롭습니다. 그래서 스스로가 미운 것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싫어지고 혐오스러워집니다. 그래서 서서히 죽음을 향해 걸음을 내딛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다릅니다. 물론 그도 실망과 절망을 경험합니다. 자기 실존의 죽음과 같은 고통도 경험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자신이 미워지기도 합니다. 하나님께 원망과 불평을 쏟아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다음이 다릅니다. 신앙인은 그 모든 감정과 절망을 하나님께 아뢰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무능과 절망감, 실망, 아픔, 고통, 원망을 하나님께 다 쏟아내고 맡기는 것입니다. 자신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보다 더 큰 고난의 길을 가신 예수님을 경험하기 시작합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사랑도 깨닫게 됩니다. 절망 가운데 힘들어하는 나를 있는 그대로 받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습니다. 그때 우리는 다시 하나님께 소망을 두게 됩니다. 시편 39편 7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시편 39:7)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서 할 일이 있습니다. 절망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절망아, 결코 네가 나를 넘어뜨릴 수 없다. 네가 나를 무너뜨릴 수 없다.”라고 선언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소망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망이 아닌 소망의 주님을 바라봅니다. 절망이 우리의 인생을 스쳐 지나갈 수는 있지만 우리 인생에 둥지를 틀 수는 없습니다. 결코 내 인생을 파괴시킬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 모든 것을 이겨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를 억압하고 힘들게 했던 모든 것들을 주님 앞에 털어내고, 다가오는 새해에 “예수님만이 내 소망입니다. 내가 주님과 함께 새로운 삶을 열겠습니다.”라고 고백하며 결단하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이 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7년 12월 31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절망의 영, 희망의 영”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292장, 301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왕상 19:9-18 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생각하기

최근 한 아이돌 가수가 우울증으로 자살한 소식이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습니다. 그의 유서가 공개되었는데요. 그 내용을 일부는 이렇습니다. “난 속에서부터 고장 났다. 천천히 날 갉아먹던 우울은 결국 날 집어 삼켰고, 난 그것 이길 수 없었다. …. 날 책임질 수 있는 건 나뿐이야. 오롯이 혼자였다. 끝낸다는 말은 쉽다. 끝내기는 어렵다… 맞아, 난 도망치고 싶었어. 나에게서. 너에게서. 아무도 함께 해 줄 사람이 없다.”

   

설교의 요약

우울증은 왜 발생할까요? 우울증은 심적인 요인과 외적인 요인이 결합하면서 일어난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과 죽음, 거기에 더해져 스트레스로 인한 면역력과 저항력의 감소가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2016년 조사에 의하면 우리 국민 중에 1.5%가 우울증 환자라고 합니다. 거기에 우울증 ‘고위험군’에 속한 사람들을 포함한다면, 성인 넷 중 하나(25.4%)는 일생에 한번은 우울증을 앓고 지나간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2017년의 마지막 날입니다. 한 해를 돌아보며 기쁘고 감사한 일도 많았지만, 슬프고 낙심되는 일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작은 실수와 실패가 인생의 소중한 추억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아픔 속에 계속 머물게 되면 우리는 인생의 낙오자로 빠져들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낙담과 구덩이에서 탈출한 한명의 예언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가장 강력한 예언자이자 용기의 예언자로 불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서슬 퍼런 아합왕의 폭정 앞에서도 그 잘못과 죄를 지적하고 그 밑의 우상숭배자들과 850대 1의 싸움을 벌일 수 있었던 예언자, 바로 엘리야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엘리야에게 이세벨이라는 대적자는 오히려 죽음을 협박해 옵니다. 이에 엘리야는 결국 낙담하여 도망치게 되고, 하나님께 죽음을 청하게 됩니다(4절).

왜 그랬을까요? 기적과 능력이 다 소용이 없어지고, 무력한 자기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이때 하나님은 미세한 음성으로 그를 찾아가십니다(9절, 13절). 내용인 즉, 기적만을 바라고 기적을 만드신 하나님을 잊지 말라는 말씀이셨습니다. 엘리야의 한탄은 홀로 남겨졌다는 것입니다(10절, 14절). 혼자서는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또 다시 실패할 수밖에 없기에 그는 낙담하고 좌절하게 된 것입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칠천 명의 동역자들을 남겨 놓았다고 희망을 주십니다. ‘함께 믿음의 길을 가라!’ 하나님의 일을 함께 할 동지들을 세우고, 깨달은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절망을 맞이할 때가 있습니다. 바로 그때, 비그리스도인들은 좌절하고 자기학대, 자기비하에 빠지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은 어떻습니까? 실존의 죽음을 경험하는 것은 같습니다. 그러나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나를 위해 예수님을 내 놓으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절망을 향해서 소리쳐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언합시다. ‘절망아, 네가 나를 무너뜨릴 수 없다.’ 올해 있었던 절망의 모든 것들을 훌훌 벗어버리고 주님과 함께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나누기

1. 아직도 절망 중에 빠져나오지 못하는 일들이 있습니까? 이 시간 하나님 앞에 다 쏟아내고 그것을 이길 힘을 간구합시다.

2. 엘리야는 기적만 보고 하나님을 보지 못했었습니다. 내가 절망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진짜 이유, 내가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붙잡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봅시다.

3. 하나님은 내 주변의 도움의 손길을 통해 우리를 치유하십니다. 내가 도움을 청할 수 있는 믿음의 동역자가 있다면 오늘 찾아가 기도를 부탁합시다.

마무리 기도

주님 이 시간 우리를 친히 안수하셔서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주의 성령께서 기름 부으소서. 예수님에게만 참된 소망이 있음을 우리 가슴으로 깨달으며 나아가겠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모든 절망과 탄식의 영을 내 쫒으시옵소서. 주님을 찬양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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