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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반의 순종?!

요나 3: 1 ~ 5

김지철 목사

2016.07.03

요나는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절반의 순종’입니다. 요나서 2장에 나온 요나의 기도가 절반의 회개였던 것처럼, 이후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같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온전한 순종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억지로 하는 순종입니다. 마지막 4장까지 그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습니다.
도대체 요나는 어떤 성품을 지닌 인물이었을까요? 그는 겁쟁이라기보다는 고집쟁이였습니다. 도망을 간 것도 무서워서 피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거부하려고 숨은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과 영적인 씨름을 하고자 한 것입니다. “누가 옳은가 한번 해 봅시다!” 하는 마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구약의 야곱을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신약의 예수님을 믿기 전 바울을 닮은 것 같기도 합니다. 자기주장을 관철하지 못하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요나의 고집을 꺾기 원하셨습니다. 웬만한 사건과 사고로는 그의 고집을 무너뜨릴 수 없다는 사실을 아시고는, 특단의 방법을 택하셨습니다. 그래서 요나를 스올의 뱃속까지 몰아가신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요나는 굉장한 용기 있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도망가긴 했지만, 그는 하나님께서 쓰실 만한 인물이었습니다. 니느웨, 곧 이방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강력하게 선포할 수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방 사람들로부터 받을 수 있는 고난과 죽음의 위협도 무릅쓰고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기본적으로 자기주장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때로 예수님을 믿으면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는 생각에 술에 술탄 듯 물에 물탄 듯 살아갑니다. ‘내가 참으면 되지’ 하는 생각으로 모든 것을 참으면서 자신의 생각은 표명할 줄 모르는 그리스도인이 참으로 많습니다. 하지만 이런 식의 유약한 사람은 남에게 자신의 삶을 빼앗기게 됩니다. 또한 개인의 내면에도 문제가 생깁니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뿐 속으로는 화가 나고 가슴은 쓰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싫고 좋음에 대해 분명하게 말할 줄 알아야 합니다. 다만 감정적으로가 아니라 담백하게 자신의 뜻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으로 존중받고 존중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자신의 뜻을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삶의 환경이 나빠져도 굳건하게 신앙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요나는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 앞에서 뚜렷하게 표명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영적인 대결이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자기표현이 때로는 무모하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큰 물고기 뱃속에서부터 나온 요나는 이후 하나님의 말씀에 진심으로 순종했을까요?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로 결정합니다.

큰 물고기 뱃속에서부터 나온 그는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더 가봐야 스올의 뱃속보다 더 어둡고, 죽음에 더욱 가까운 자리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제 하나님께 순종하기로 작정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순종하기는 하는데 여전히 순종하지 않는 모습이 그에게 남아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오랫동안 믿어 온 우리에게도 있는 모습입니다.
먼저 요나의 순종하는 모습은 무엇일까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가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요나 3:2)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세 가지 동사로 명령을 하십니다. ‘일어나라’, ‘가라’, ‘선포하라’입니다. ‘일어나라’는 새롭게 시작하라는 것이고, ‘가라’는 가야 할 목표와 길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마지막으로 ‘선포하라’는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해야 할 말을 주시겠다는, 즉 사명에 대한 것입니다. 이처럼 이 세 개의 동사는 굉장히 강렬한 의미를 가진 단어들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후 요나는 어떻게 했을까요?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 요나가 외쳐 이르되 … (요나 3:3∼4)

요나는 하나님이 명하신 세 가지를 모두 행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여호와의 말씀대로’ 따랐습니다. 완벽한 순종입니다.
신앙의 순종이란 무엇일까요? 내 뜻을 꺾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듣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서 자신을 열어 놓습니다. 자녀를 키울 때, 자녀의 이름을 부르는 데도 모른 체하고 자기 일만 하는 자녀를 보면 화가 납니다. 자녀라면 부모가 부를 때 대답을 하고, 부모가 무언가를 지시하면 하는 시늉이라도 내야 하지 않습니까? 부름에 답하는 것이 바로 듣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우리가 듣는 마음을 가져야 순종이 시작됩니다.
둘째, 자기를 부정할 줄 압니다. 내가 생각했던 것, 하고 싶었던 것을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내려놓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우선적인 것인지 바르게 판단하여 가지치기를 해야 하는데, 그것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가지치기를 잘하는 것이 삶의 지혜입니다. 모든 것을 다 하면서 살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가장 우선적인 것, 가장 소중한 것,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첫 번째에 해당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가지치기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요나는 괜찮은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그는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일어나서 가라는 곳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전해야 할 말을 선포했습니다. 이것이 요나의 순종입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로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습니다.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는 성경을 펴서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말씀도 읽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도 하지 않으면서 “나는 하나님의 뜻을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직무유기이고 영적인 게으름입니다. 둘째는 고정관념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으로 울타리를 만들어 놓고는,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셔도 ‘그것은 안 됩니다!’ 하면서 내 생각, 내 가치관, 내 판단으로 스스로를 가둬 놓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는 것과 같습니다. 바로 이것이 요나가 도망간 이유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다가도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내가 한번은 불순종해 봐야지.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어디까지 취급하시는지 보고, 또 불순종의 결과가 무엇인지 보고 싶어. 그래도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데 조금 불순종했다고 나를 구덩이 속에 빠뜨리시기야 하겠어!’ 하나님을 시험해 보려는 못된 마음 때문에 하나님께 의도적으로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런 마음도 있습니다. ‘순종은 모범생들이나 가지는 특징 아니야? 나는 고대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프로메테우스적인 저항 정신을 가지고 하나님 말씀에 도전해 봐야겠어. 인간을 대표해서 하나님께 대들어 보겠어. 나는 욕먹고 벌 받을 각오도 되어 있어!’ 허세와 허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항하고 무시하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예수 믿은 지 오래되었으니까 이미 성숙한 인격을 가졌다고 볼 수 있지. 그러니 하나님, 이제 저를 그냥 놔 주세요.’ 순종을 성숙을 파괴시키는 총성으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무지해서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배워야 합니다. 말씀을 펴서 읽고 기도해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시작합니다. 순종하고 싶지 않아서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맛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사람은 요나처럼 혼이 나 봐야 합니다. 자신의 한계에 부딪히고, 때로는 스올의 뱃속까지 들어가 봐야 내 인생이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겸손히 깨닫게 됩니다.

요나의 순종은 온전한 순종이 아니었습니다.

요나는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을 만나고 나자 하나님의 말씀이 다시 임했을 때 벌떡 일어나서 니느웨로 갔습니다. 그리고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처럼 보이는 이 요나에게 과연 어떤 불순종의 모습이 있을까요?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요나 3:4)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표현을 눈여겨봐야 합니다. ‘하루 동안 다니며’와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라’입니다. 요나는 하루 동안 수고했을 것입니다. 니느웨 성읍을 돌며 땀을 흘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루 동안’이라는 말은 3절에 나오는 말씀과 충돌하고 있습니다.

…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하나님 앞에 큰 성읍이더라 (요나 3:3)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어야 다 다닐 수 있는 거대한 성읍이었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하루 동안만 다닌 것입니다. 보통 사람은 한 시간에 4km 정도를 걸을 수 있습니다. 하루에 일곱 시간을 걷는다고 가정하면 하루에 약 28∼30km를 걷게 되고, 사흘이면 약 90km를 걷게 됩니다. 또한 4장에는 니느웨에 약 12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그곳이 작은 도시가 아니라 거대한 도시라는 사실입니다. 이 큰 도시를, 사흘을 걸어야 하는 곳을 요나는 단 하루만 돌아다녔다는 것입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요나가 전심전력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사흘이 걸려야 할 전도 사역을 하루에 해치웠다는 것입니다.

요나의 자기 생각이 온전한 순종을 막았습니다.

요나가 능력이 많아서일까요? 사실 그렇게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계속 읽어 보면 능력으로 인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이 자신이 전하는 말을 듣고 회개하여 하나님께 구원받는 것이 싫었습니다. 요나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이런 생각이 있었습니다. ‘제발 망해라. 회개하지 말고 무너져라.’ 니느웨를 향해 저주에 가까운 마음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하루 동안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할 일을 다 했다며 자리를 피한 것입니다. 이러한 그의 마음은 그가 전한 메시지를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요나서 1장 첫 부분에는 하나님이 요나에게 전하라고 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요나 1:1∼2)

하나님이 예언자들을 통해서 죄악과 허물을 지적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부모가 자녀에게 자녀의 잘못을 지적하는 이유와 같습니다. 먼저는 잘못하고 있음을 알려 주려는 것입니다. “네가 지금 무엇인가 잘못하고 있어. 계속 그렇게 하면 벌을 받을 수밖에 없어.” 멈추지 않으면 야단을 맞게 된다는 경고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이제 멈춰라. 네가 잘못에서 돌이키면 내가 용서해줄게.” 경고에는 용서와 축복의 메시지가 따라옵니다. 잘못을 고백하고 돌아오는 자녀를 껴안으며 받아 주는 부모의 마음과 같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메시지에는 징벌에 대한 경고뿐만 아니라 용서와 축복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첫 번째 메시지에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는 니느웨 백성의 죄를 지적하지 않았고, 회개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언급하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심판과 멸망의 메시지만 아주 짧게 외쳤습니다. “사십 일이 지나면 이제 망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회개를 요청하시는 이유는 회개 속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회개 속에 치유가 있고, 회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삶이 새로워지는 것은, 지은 죄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회개를 하느냐 안 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내 모습을 그대로 아뢰면, 그때부터 회복이 일어납니다. 그때부터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지만 요나는 그것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회개의 메시지가 아니라 멸망의 메시지만 선포했습니다. 니느웨가 망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사흘에 걸쳐 선포해야 할 메시지를 단 하루 동안만 전한 것입니다. 그의 이러한 모습은 4장까지 지속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물으며 온전한 순종으로 나아갑시다.

엄한 아버지의 회초리가 무서워서 그저 아버지의 말에 “네네” 하는 것은 어린아이의 미숙한 순종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징계가 무서워서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겠다는 것은 미숙한 신앙입니다. 또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고, 우리가 헌금하면 30배, 60배, 100배로 축복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순종하겠다는 것은 기복주의적인 신앙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 위에서 죽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나를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삼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복해서 순종해야 합니다. 그것이 자발적인 순종이며 성숙한 신앙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어디에 머물러 있습니까? 하나님이 무서워서 겨우 예배를 드리고 겨우 헌금을 하고 있습니까? 물질적인 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헌금합니까? 아니면 나 같은 자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해서 내 인생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고백과 함께 하나님께 예배하고 헌금하고 있습니까?
우리 속에 요나의 모습이 있습니다. 내 고집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클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이름, 예수님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내 주장을 관철하려고 하는 완악하고 못된 마음도 있습니다. 이것은 불순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주에 절반의 회개가 위험하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절반의 불순종도 위험합니다. 그것으로 만족하여 기쁜 마음과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는 순종을 놓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서 이 땅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요? 다시 말씀을 펴서 하나님의 뜻을 살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물으면서 내게 주어진 삶, 내 가정과 직장에서 내가 할 일들을 다시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며, 내가 믿는 예수님을 자랑할 줄 아는 것이 축복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를 부르신 이유입니다.
한 해의 하반기를 시작합니다. 그동안 성경을 읽지 않았다면 다시 펴서 읽으십시오. 그동안 기도하지 않았다면 다시 기도를 시작하십시오. 내가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는 자랑스러운 정체성을 갖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십시오. 하나님께서 나의 아바아버지 되시고,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 되시고, 성령님께서 지혜와 능력으로 나를 이끄신다는 것을 믿고 세상을 향해 담대히 나아가는 주님의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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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 3: 1 ~ 5

1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3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하나님 앞에 큰 성읍이더라

4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5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 지라

요나는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절반의 순종’입니다. 요나서 2장에 나온 요나의 기도가 절반의 회개였던 것처럼, 이후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같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온전한 순종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억지로 하는 순종입니다. 마지막 4장까지 그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습니다.
도대체 요나는 어떤 성품을 지닌 인물이었을까요? 그는 겁쟁이라기보다는 고집쟁이였습니다. 도망을 간 것도 무서워서 피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거부하려고 숨은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과 영적인 씨름을 하고자 한 것입니다. “누가 옳은가 한번 해 봅시다!” 하는 마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구약의 야곱을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신약의 예수님을 믿기 전 바울을 닮은 것 같기도 합니다. 자기주장을 관철하지 못하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요나의 고집을 꺾기 원하셨습니다. 웬만한 사건과 사고로는 그의 고집을 무너뜨릴 수 없다는 사실을 아시고는, 특단의 방법을 택하셨습니다. 그래서 요나를 스올의 뱃속까지 몰아가신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요나는 굉장한 용기 있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도망가긴 했지만, 그는 하나님께서 쓰실 만한 인물이었습니다. 니느웨, 곧 이방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강력하게 선포할 수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방 사람들로부터 받을 수 있는 고난과 죽음의 위협도 무릅쓰고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기본적으로 자기주장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때로 예수님을 믿으면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는 생각에 술에 술탄 듯 물에 물탄 듯 살아갑니다. ‘내가 참으면 되지’ 하는 생각으로 모든 것을 참으면서 자신의 생각은 표명할 줄 모르는 그리스도인이 참으로 많습니다. 하지만 이런 식의 유약한 사람은 남에게 자신의 삶을 빼앗기게 됩니다. 또한 개인의 내면에도 문제가 생깁니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뿐 속으로는 화가 나고 가슴은 쓰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싫고 좋음에 대해 분명하게 말할 줄 알아야 합니다. 다만 감정적으로가 아니라 담백하게 자신의 뜻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으로 존중받고 존중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자신의 뜻을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삶의 환경이 나빠져도 굳건하게 신앙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요나는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 앞에서 뚜렷하게 표명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영적인 대결이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자기표현이 때로는 무모하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큰 물고기 뱃속에서부터 나온 요나는 이후 하나님의 말씀에 진심으로 순종했을까요?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로 결정합니다.

큰 물고기 뱃속에서부터 나온 그는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더 가봐야 스올의 뱃속보다 더 어둡고, 죽음에 더욱 가까운 자리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제 하나님께 순종하기로 작정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순종하기는 하는데 여전히 순종하지 않는 모습이 그에게 남아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오랫동안 믿어 온 우리에게도 있는 모습입니다.
먼저 요나의 순종하는 모습은 무엇일까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가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요나 3:2)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세 가지 동사로 명령을 하십니다. ‘일어나라’, ‘가라’, ‘선포하라’입니다. ‘일어나라’는 새롭게 시작하라는 것이고, ‘가라’는 가야 할 목표와 길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마지막으로 ‘선포하라’는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해야 할 말을 주시겠다는, 즉 사명에 대한 것입니다. 이처럼 이 세 개의 동사는 굉장히 강렬한 의미를 가진 단어들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후 요나는 어떻게 했을까요?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 요나가 외쳐 이르되 … (요나 3:3∼4)

요나는 하나님이 명하신 세 가지를 모두 행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여호와의 말씀대로’ 따랐습니다. 완벽한 순종입니다.
신앙의 순종이란 무엇일까요? 내 뜻을 꺾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듣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서 자신을 열어 놓습니다. 자녀를 키울 때, 자녀의 이름을 부르는 데도 모른 체하고 자기 일만 하는 자녀를 보면 화가 납니다. 자녀라면 부모가 부를 때 대답을 하고, 부모가 무언가를 지시하면 하는 시늉이라도 내야 하지 않습니까? 부름에 답하는 것이 바로 듣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우리가 듣는 마음을 가져야 순종이 시작됩니다.
둘째, 자기를 부정할 줄 압니다. 내가 생각했던 것, 하고 싶었던 것을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내려놓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우선적인 것인지 바르게 판단하여 가지치기를 해야 하는데, 그것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가지치기를 잘하는 것이 삶의 지혜입니다. 모든 것을 다 하면서 살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가장 우선적인 것, 가장 소중한 것,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첫 번째에 해당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가지치기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요나는 괜찮은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그는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일어나서 가라는 곳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전해야 할 말을 선포했습니다. 이것이 요나의 순종입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로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습니다.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는 성경을 펴서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말씀도 읽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도 하지 않으면서 “나는 하나님의 뜻을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직무유기이고 영적인 게으름입니다. 둘째는 고정관념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으로 울타리를 만들어 놓고는,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셔도 ‘그것은 안 됩니다!’ 하면서 내 생각, 내 가치관, 내 판단으로 스스로를 가둬 놓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는 것과 같습니다. 바로 이것이 요나가 도망간 이유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다가도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내가 한번은 불순종해 봐야지.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어디까지 취급하시는지 보고, 또 불순종의 결과가 무엇인지 보고 싶어. 그래도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데 조금 불순종했다고 나를 구덩이 속에 빠뜨리시기야 하겠어!’ 하나님을 시험해 보려는 못된 마음 때문에 하나님께 의도적으로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런 마음도 있습니다. ‘순종은 모범생들이나 가지는 특징 아니야? 나는 고대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프로메테우스적인 저항 정신을 가지고 하나님 말씀에 도전해 봐야겠어. 인간을 대표해서 하나님께 대들어 보겠어. 나는 욕먹고 벌 받을 각오도 되어 있어!’ 허세와 허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항하고 무시하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예수 믿은 지 오래되었으니까 이미 성숙한 인격을 가졌다고 볼 수 있지. 그러니 하나님, 이제 저를 그냥 놔 주세요.’ 순종을 성숙을 파괴시키는 총성으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무지해서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배워야 합니다. 말씀을 펴서 읽고 기도해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시작합니다. 순종하고 싶지 않아서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맛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사람은 요나처럼 혼이 나 봐야 합니다. 자신의 한계에 부딪히고, 때로는 스올의 뱃속까지 들어가 봐야 내 인생이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겸손히 깨닫게 됩니다.

요나의 순종은 온전한 순종이 아니었습니다.

요나는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을 만나고 나자 하나님의 말씀이 다시 임했을 때 벌떡 일어나서 니느웨로 갔습니다. 그리고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처럼 보이는 이 요나에게 과연 어떤 불순종의 모습이 있을까요?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요나 3:4)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표현을 눈여겨봐야 합니다. ‘하루 동안 다니며’와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라’입니다. 요나는 하루 동안 수고했을 것입니다. 니느웨 성읍을 돌며 땀을 흘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루 동안’이라는 말은 3절에 나오는 말씀과 충돌하고 있습니다.

…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하나님 앞에 큰 성읍이더라 (요나 3:3)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어야 다 다닐 수 있는 거대한 성읍이었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하루 동안만 다닌 것입니다. 보통 사람은 한 시간에 4km 정도를 걸을 수 있습니다. 하루에 일곱 시간을 걷는다고 가정하면 하루에 약 28∼30km를 걷게 되고, 사흘이면 약 90km를 걷게 됩니다. 또한 4장에는 니느웨에 약 12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그곳이 작은 도시가 아니라 거대한 도시라는 사실입니다. 이 큰 도시를, 사흘을 걸어야 하는 곳을 요나는 단 하루만 돌아다녔다는 것입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요나가 전심전력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사흘이 걸려야 할 전도 사역을 하루에 해치웠다는 것입니다.

요나의 자기 생각이 온전한 순종을 막았습니다.

요나가 능력이 많아서일까요? 사실 그렇게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계속 읽어 보면 능력으로 인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이 자신이 전하는 말을 듣고 회개하여 하나님께 구원받는 것이 싫었습니다. 요나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이런 생각이 있었습니다. ‘제발 망해라. 회개하지 말고 무너져라.’ 니느웨를 향해 저주에 가까운 마음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하루 동안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할 일을 다 했다며 자리를 피한 것입니다. 이러한 그의 마음은 그가 전한 메시지를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요나서 1장 첫 부분에는 하나님이 요나에게 전하라고 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요나 1:1∼2)

하나님이 예언자들을 통해서 죄악과 허물을 지적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부모가 자녀에게 자녀의 잘못을 지적하는 이유와 같습니다. 먼저는 잘못하고 있음을 알려 주려는 것입니다. “네가 지금 무엇인가 잘못하고 있어. 계속 그렇게 하면 벌을 받을 수밖에 없어.” 멈추지 않으면 야단을 맞게 된다는 경고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이제 멈춰라. 네가 잘못에서 돌이키면 내가 용서해줄게.” 경고에는 용서와 축복의 메시지가 따라옵니다. 잘못을 고백하고 돌아오는 자녀를 껴안으며 받아 주는 부모의 마음과 같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메시지에는 징벌에 대한 경고뿐만 아니라 용서와 축복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첫 번째 메시지에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는 니느웨 백성의 죄를 지적하지 않았고, 회개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언급하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심판과 멸망의 메시지만 아주 짧게 외쳤습니다. “사십 일이 지나면 이제 망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회개를 요청하시는 이유는 회개 속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회개 속에 치유가 있고, 회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삶이 새로워지는 것은, 지은 죄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회개를 하느냐 안 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내 모습을 그대로 아뢰면, 그때부터 회복이 일어납니다. 그때부터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지만 요나는 그것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회개의 메시지가 아니라 멸망의 메시지만 선포했습니다. 니느웨가 망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사흘에 걸쳐 선포해야 할 메시지를 단 하루 동안만 전한 것입니다. 그의 이러한 모습은 4장까지 지속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물으며 온전한 순종으로 나아갑시다.

엄한 아버지의 회초리가 무서워서 그저 아버지의 말에 “네네” 하는 것은 어린아이의 미숙한 순종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징계가 무서워서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겠다는 것은 미숙한 신앙입니다. 또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고, 우리가 헌금하면 30배, 60배, 100배로 축복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순종하겠다는 것은 기복주의적인 신앙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 위에서 죽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나를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삼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복해서 순종해야 합니다. 그것이 자발적인 순종이며 성숙한 신앙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어디에 머물러 있습니까? 하나님이 무서워서 겨우 예배를 드리고 겨우 헌금을 하고 있습니까? 물질적인 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헌금합니까? 아니면 나 같은 자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해서 내 인생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고백과 함께 하나님께 예배하고 헌금하고 있습니까?
우리 속에 요나의 모습이 있습니다. 내 고집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클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이름, 예수님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내 주장을 관철하려고 하는 완악하고 못된 마음도 있습니다. 이것은 불순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주에 절반의 회개가 위험하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절반의 불순종도 위험합니다. 그것으로 만족하여 기쁜 마음과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는 순종을 놓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서 이 땅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요? 다시 말씀을 펴서 하나님의 뜻을 살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물으면서 내게 주어진 삶, 내 가정과 직장에서 내가 할 일들을 다시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며, 내가 믿는 예수님을 자랑할 줄 아는 것이 축복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를 부르신 이유입니다.
한 해의 하반기를 시작합니다. 그동안 성경을 읽지 않았다면 다시 펴서 읽으십시오. 그동안 기도하지 않았다면 다시 기도를 시작하십시오. 내가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는 자랑스러운 정체성을 갖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십시오. 하나님께서 나의 아바아버지 되시고,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 되시고, 성령님께서 지혜와 능력으로 나를 이끄신다는 것을 믿고 세상을 향해 담대히 나아가는 주님의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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