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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반의 회개?!

요나 2: 5 ~ 10

김지철 목사

2016.06.26

나에게 맞춰진 시선이 타인을 향하는 것이 성숙입니다.

어제 매스컴마다 헤드라인을 장식한 것은 브렉시트(Brexit)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선언으로 세계 금융시장이 큰 충격에 빠졌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국민투표 결과 52%가 탈퇴를 찬성한 것은 지금 영국이 당면하고 있는 경제, 정치, 사회, 문화적인 이유에 기인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 내면에는 민족주의, 국가주의가 깃든 ‘자국민 우선주의’가 깔려 있습니다.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보며 착잡한 마음이 드는 것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세계는 하나다. 지구촌은 하나다’에서 자신의 국가적 이익을 우선한다는 방향 선회이기 때문입니다. 글로벌 정신과 세계화의 위기라는 우려의 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영국에 속해 있는 스코틀랜드와 북아일랜드가 독립을 주장할 가능성도 높아졌습니다.
우리가 몇 주째 살펴보고 있는 요나의 마음에도 이런 민족주의, 국가주의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택하신 선민이었습니다. 그들은 이것이 매우 자랑스러웠습니다. 특권을 받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것이 세상을 향한 사명이기도 하다는 것을 종종 잊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 땅 위에 이루라’는 사명이기도 했는데 사명은 놓칠 때가 많았습니다.
‘선민’이라는 자의식이 사명을 잃고 특권만 될 때 어떤 문제가 발생할까요? 미성숙의 자리로 내려가게 됩니다. 마치 갓 태어난 아기의 수준과 비슷해지는 것입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부모님으로부터 엄청난 사랑과 무조건적인 보살핌을 받습니다. 아이가 울면 엄마는 젖을 물립니다. 칭얼거리면 금방 기저귀를 갈아 줍니다. 아이의 입장에서는 모든 삶이 자기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런데 어느 날 동생이 생깁니다. 유치원에서 또래 친구들을 만납니다. 그러면 세상이 나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동생과 친구와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존재임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존중해야 나도 존중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 그것은 나 중심의 세계에서 이웃을 보게 되는 경험이며, 성숙을 위한 놀라운 체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나는 세상이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돌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중심에는 자신이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나’ 중심으로 돌아야 하고, 그렇지 않은 하나님은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요나는 신앙은 있었지만 나 중심적인 이기성에 붙잡혀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영적인 미성숙에 놓여 있었습니다.

요나의 기도에는 본질적인 회개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요나에게 요나와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온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가르쳐 주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요나의 편협한 사상을 깨뜨리십니다.
요나서 2장에는,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언뜻 보면 요나가 깊은 참회의 기도를 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가 고난 속에서도 기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난을 당하면 먼저 불평과 원망이 나오기 마련인데, 요나는 고난 속에서 기도합니다.

…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요나 2:7)

자신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었다는 사실을 기뻐하면서 기도를 시작하게 됩니다. 또 그는 고난 속에서 감사하며 기도했습니다. 고난 속에서 감사가 우러나오려면 시간이 좀 걸립니다. 쉽게 “감사합니다”라는 소리가 나오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그는 감사할 줄 알았습니다.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 (요나 2:9)

조금만 아파도 불평하고, 계획된 대로 되지 않으면 하나님께 화를 내고 원망하는 게 우리인데, 요나는 고난 가운데 감사의 기도를 하나님께 올리고 있습니다. 고난 속에서 기도하고, 고난 속에서 감사를 찾는 모습이 요나의 기도를 참회의 기도처럼 보이게 하는 요소입니다.
그런데 더 자세히 살펴보면 요나의 기도는 진정한 참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여전히 포기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설교의 제목을 ‘절반의 회개’라고 잡았습니다. 회개는 회개인데 본질적인 회개의 내용은 잃었다는 의미입니다.

회개 없는 신앙은 진정한 신앙이 아닙니다.

회개가 무엇일까요? 내가 지금 가고 있는 방향이 잘못된 것을 깨닫고,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란 삶의 전환입니다. 잘못된 것, 문제가 있음을 고백하고, 생각과 삶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서 삶을 돌이키는 것이 회개입니다. 회개란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회개를 놓치고는 기독교 신앙을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첫 번째 메시지가 회개하라는 것이었고, 요한계시록을 보면 마지막 메시지 또한 회개하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마가복음 1:15)

예수님의 명령은 두 가지였습니다. 믿으라는 것과 그것보다 앞서 행해야 할 것으로 회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믿음 이전에 회개가 이루어져야 신앙이 시작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요한계시록에는 하나님이 교회를 향해서 주시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 (요한계시록 2:4∼5)

수고하고 땀 흘리고 교회 봉사도 잘했지만,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것이 책망받을 이유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회개하던 마음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회개 없는 기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회개할 생각은 하지 않고 달라는 기도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회개 없는 찬양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곡조로 찬양을 부르는데 영혼의 기쁨은 사라진, 목소리만 울리는 찬양이 있다는 것입니다. 용서받음의 은총으로 하나님을 향해서 노래 불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회개 없는 예배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배당에 앉아서 예배의 모든 순서에 다 참여하고는 있지만, 가슴 속에 흐르는 회개의 눈물이 없다는 것입니다. 회개 없는 봉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땀 흘리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하는데, 마음속에 불평과 원망이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결국 회개 없는 기도, 회개 없는 찬송, 회개 없는 예배, 회개 없는 봉사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회개를 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렵습니다. 사람 앞에서는 우리가 회개할 수 없지 않습니까? 사람 앞에서 내 잘못을 이야기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도 내 잘못을 이야기하는 것이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우리 안에 새 것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가 우리의 헌 것을 하나님 앞에서 해체시키기를 요청하십니다. ‘회개하라’는 요청입니다.

요나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요나의 첫 번째 문제는, 그의 기도에는 회개가 없다는 것입니다. 요나는 2장에서 1절부터 9절에 이르기까지 꽤 긴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위기를 통해 여러 번 사인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요나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자기변명에 급급했습니다. 그의 기도 속에는 회개가 없습니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불순종과 죄악이 무엇인지 고백하지 않습니다.
사울 왕(사무엘상 15장)과 다윗 왕(사무엘하 12장)의 이야기가 좋은 예가 됩니다. 둘 다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일을 행했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자신의 잘못 앞에서 상반된 태도를 보입니다. 선지자 사무엘이 사울 왕에게 잘못을 지적했을 때, 사울은 변명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사울이 잘못을 시인하고 회개하기를 바라셨는데, 사울은 마치 사람 앞에서 하듯이 그때 자신이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서 사울 왕을 버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변명을 싫어하십니다.
반면 다윗은 선지자 나단에게 지적을 받았을 때,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통회하며 자복했습니다. 왕으로서의 체면을 생각하지 않고 크게 회개했습니다. 이때 그가 드린 기도가 시편 51편의 참회의 시입니다.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시편 51:3)

자신 안에 죄를 짓는 못된 습성이 있다는 것을 고백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다윗을 용서하십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귀히 여기신 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 있는 모습 그대로 나왔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어린아이가 엄마 앞에 시커멓게 때 묻은 옷, 상처 난 모습 그대로 나아가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다윗을 좋아하셨습니다.
그런데 요나서 2장에 등장하는 요나의 기도에는 그런 모습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나 몰라라 하며 도망쳤던 자신의 불순종에 대한 회개가 한마디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요나는 자신의 고통을 강조하는 것에 집중했습니다.

요나의 두 번째 문제는 자신이 당한 고난에 대한 넋두리가 기도 전체를 휩싸고 있다는 것입니다.

…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 (요나 2:2)

물이 나를 영혼까지 둘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워싸고 바다 풀이 내 머리를 감쌌나이다 (요나 2:5)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 (요나 2:6)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 … (요나 2:7)

그가 기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가 당하는 고난이 컸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당한 고통에 대해 강조합니다. 스올의 뱃속, 물의 깊음, 산의 뿌리, 죽은 자들이 거하는 무덤과도 같은 곳, 창세기에 나오는 혼돈 상태, 흑암 속에 자신이 빠져 들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너무 상심되고 피곤하니 하나님이 생각난다고 이야기합니다. 몸과 영혼이 침몰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부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못 견디겠습니다!”라고 하나님을 붙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고난 속에서 그가 기억한 것은 자신의 죄가 아니었습니다.
고난을 당하거나 깊은 질병이 들어 아플 때, 우리는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 고난을 제거해 주세요. 못 살겠습니다.” 그런데 그래도 고난이 사라지지 않으면 이런 기도도 합니다. “하나님, 이 고난이 지나가게 해 주시면, 제가 주님께 충성할게요. 제 몸을 주님께 바칠게요. 제가 가진 것들을 주님께 드릴게요.” 굉장히 멋진 기도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자신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하나님, 그동안 제가 말로 행동으로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상처를 줬는지 모릅니다. 제가 얼마나 교만했는지 모릅니다. 제 속에는 늘 거짓이 있었습니다. 나를 변명하려고 남에게 내 죄를 덮어씌운 적도 많았습니다. 제 속에 있는 제 악함을 압니다” 하고 내 안에 있는 악과 허물을 하나님 앞에 먼저 토해 내야 합니다.

요나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자신의 잘함을 드러냈습니다.

요나의 세 번째 문제는 아직도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모든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요나 2:8)

저는 처음에 이 구절을 읽으면서, 요나가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아닌가 싶었습니다. ‘내가 거짓되었구나. 내가 헛된 우상을 섬겼구나.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사실은 무신론적 사고를 가졌구나. 내가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불순종했구나!’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했다는 대상이 단수가 아니라 복수입니다. 어쩌면 니느웨 백성을 뜻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린 사람들입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요나는 8절 마지막에 반전 접속사 ‘그러나’를 사용하여 9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 (요나 2:9)

이 구절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세리와 바리새인의 기도를 예로 들어 하신 말씀입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누가복음 18:11)

여기에도 감사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감사는 다른 사람과의 비교를 통한 감사였습니다. “저는 저 사람하고 다르죠? 저는 본질적으로 저런 사람과는 달라요. 제가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데요? 제가 얼마나 교회 생활을 잘했는데요? 제가 기도도 얼마나 많이 하고 헌금도 얼마나 많이 했는데요?”
감사한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것입니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겠다는 것이 얼마나 굉장한 것입니까? 주의 소원을 갚겠다고 결단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요나의 본심이 바뀌지는 않았습니다. 감사는 잠깐뿐입니다. 서원을 주께 갚겠다는 것도 일시적입니다. 그것은 요나서 3장과 4장을 보면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절반의 회개만 한 것입니다.
절반의 회개는 아예 회개를 하지 않는 것보다 나을까요? 때로는 더 나쁜 것이 되고 맙니다. 차선은 최선의 다음이 아니라 최선의 적이 될 수 있습니다. 차선에 만족하면 최선을 향한 노력을 접게 됩니다. ‘이 정도 했으면 됐지!’ 하고 멈춰 버리거나 때로는 오만한 생각마저 들게 합니다. 그러면 가슴에 뜨거움이 없고 영혼의 눈물이 사라집니다.

참된 신앙의 시작은 회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마지막까지 쉽게 사라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야 하고, 하나님마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마지막까지 그것을 붙들려고 합니다. 그리고 나의 죄악과 부끄러움과 연약함을 하나님 앞에 토해 내지 않으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체면을 차리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하나님 앞에 어린아이와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엄마 아빠 앞에 서는 어린아이처럼,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그저께 잘못하고, 어제 잘못하고, 오늘 또 잘못하고, 내일도 잘못할지라도, 그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에 회개의 영과 영혼의 눈물을 주십니다. 회개의 영을 받아야 내 영혼이 다시 기뻐하고 다시 감사할 줄 알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제가 스스로 자랑했던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주님과 함께 다시 출발하겠습니다. 다시 주님 뜻대로 살겠습니다’ 하고 새로운 용기와 사명을 갖게 됩니다.
회개가 모든 것의 시작입니다. 신앙의 시작과 끝은 모두 회개입니다. 오늘도 내 모습을 돌아보면서 하나님 앞에 나를 토해내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복된 하나님의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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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 2: 5 ~ 10

5

물이 나를 영혼까지 둘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워싸고 바다 풀이 내 머리를 감쌌나이다

6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7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8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모든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9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하니라

10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말씀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

나에게 맞춰진 시선이 타인을 향하는 것이 성숙입니다.

어제 매스컴마다 헤드라인을 장식한 것은 브렉시트(Brexit)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선언으로 세계 금융시장이 큰 충격에 빠졌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국민투표 결과 52%가 탈퇴를 찬성한 것은 지금 영국이 당면하고 있는 경제, 정치, 사회, 문화적인 이유에 기인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 내면에는 민족주의, 국가주의가 깃든 ‘자국민 우선주의’가 깔려 있습니다.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보며 착잡한 마음이 드는 것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세계는 하나다. 지구촌은 하나다’에서 자신의 국가적 이익을 우선한다는 방향 선회이기 때문입니다. 글로벌 정신과 세계화의 위기라는 우려의 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영국에 속해 있는 스코틀랜드와 북아일랜드가 독립을 주장할 가능성도 높아졌습니다.
우리가 몇 주째 살펴보고 있는 요나의 마음에도 이런 민족주의, 국가주의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택하신 선민이었습니다. 그들은 이것이 매우 자랑스러웠습니다. 특권을 받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것이 세상을 향한 사명이기도 하다는 것을 종종 잊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 땅 위에 이루라’는 사명이기도 했는데 사명은 놓칠 때가 많았습니다.
‘선민’이라는 자의식이 사명을 잃고 특권만 될 때 어떤 문제가 발생할까요? 미성숙의 자리로 내려가게 됩니다. 마치 갓 태어난 아기의 수준과 비슷해지는 것입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부모님으로부터 엄청난 사랑과 무조건적인 보살핌을 받습니다. 아이가 울면 엄마는 젖을 물립니다. 칭얼거리면 금방 기저귀를 갈아 줍니다. 아이의 입장에서는 모든 삶이 자기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런데 어느 날 동생이 생깁니다. 유치원에서 또래 친구들을 만납니다. 그러면 세상이 나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동생과 친구와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존재임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존중해야 나도 존중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 그것은 나 중심의 세계에서 이웃을 보게 되는 경험이며, 성숙을 위한 놀라운 체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나는 세상이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돌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중심에는 자신이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나’ 중심으로 돌아야 하고, 그렇지 않은 하나님은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요나는 신앙은 있었지만 나 중심적인 이기성에 붙잡혀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영적인 미성숙에 놓여 있었습니다.

요나의 기도에는 본질적인 회개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요나에게 요나와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온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가르쳐 주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요나의 편협한 사상을 깨뜨리십니다.
요나서 2장에는,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언뜻 보면 요나가 깊은 참회의 기도를 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가 고난 속에서도 기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난을 당하면 먼저 불평과 원망이 나오기 마련인데, 요나는 고난 속에서 기도합니다.

…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요나 2:7)

자신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었다는 사실을 기뻐하면서 기도를 시작하게 됩니다. 또 그는 고난 속에서 감사하며 기도했습니다. 고난 속에서 감사가 우러나오려면 시간이 좀 걸립니다. 쉽게 “감사합니다”라는 소리가 나오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그는 감사할 줄 알았습니다.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 (요나 2:9)

조금만 아파도 불평하고, 계획된 대로 되지 않으면 하나님께 화를 내고 원망하는 게 우리인데, 요나는 고난 가운데 감사의 기도를 하나님께 올리고 있습니다. 고난 속에서 기도하고, 고난 속에서 감사를 찾는 모습이 요나의 기도를 참회의 기도처럼 보이게 하는 요소입니다.
그런데 더 자세히 살펴보면 요나의 기도는 진정한 참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여전히 포기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설교의 제목을 ‘절반의 회개’라고 잡았습니다. 회개는 회개인데 본질적인 회개의 내용은 잃었다는 의미입니다.

회개 없는 신앙은 진정한 신앙이 아닙니다.

회개가 무엇일까요? 내가 지금 가고 있는 방향이 잘못된 것을 깨닫고,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란 삶의 전환입니다. 잘못된 것, 문제가 있음을 고백하고, 생각과 삶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서 삶을 돌이키는 것이 회개입니다. 회개란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회개를 놓치고는 기독교 신앙을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첫 번째 메시지가 회개하라는 것이었고, 요한계시록을 보면 마지막 메시지 또한 회개하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마가복음 1:15)

예수님의 명령은 두 가지였습니다. 믿으라는 것과 그것보다 앞서 행해야 할 것으로 회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믿음 이전에 회개가 이루어져야 신앙이 시작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요한계시록에는 하나님이 교회를 향해서 주시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 (요한계시록 2:4∼5)

수고하고 땀 흘리고 교회 봉사도 잘했지만,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것이 책망받을 이유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회개하던 마음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회개 없는 기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회개할 생각은 하지 않고 달라는 기도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회개 없는 찬양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곡조로 찬양을 부르는데 영혼의 기쁨은 사라진, 목소리만 울리는 찬양이 있다는 것입니다. 용서받음의 은총으로 하나님을 향해서 노래 불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회개 없는 예배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배당에 앉아서 예배의 모든 순서에 다 참여하고는 있지만, 가슴 속에 흐르는 회개의 눈물이 없다는 것입니다. 회개 없는 봉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땀 흘리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하는데, 마음속에 불평과 원망이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결국 회개 없는 기도, 회개 없는 찬송, 회개 없는 예배, 회개 없는 봉사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회개를 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렵습니다. 사람 앞에서는 우리가 회개할 수 없지 않습니까? 사람 앞에서 내 잘못을 이야기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도 내 잘못을 이야기하는 것이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우리 안에 새 것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가 우리의 헌 것을 하나님 앞에서 해체시키기를 요청하십니다. ‘회개하라’는 요청입니다.

요나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요나의 첫 번째 문제는, 그의 기도에는 회개가 없다는 것입니다. 요나는 2장에서 1절부터 9절에 이르기까지 꽤 긴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위기를 통해 여러 번 사인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요나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자기변명에 급급했습니다. 그의 기도 속에는 회개가 없습니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불순종과 죄악이 무엇인지 고백하지 않습니다.
사울 왕(사무엘상 15장)과 다윗 왕(사무엘하 12장)의 이야기가 좋은 예가 됩니다. 둘 다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일을 행했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자신의 잘못 앞에서 상반된 태도를 보입니다. 선지자 사무엘이 사울 왕에게 잘못을 지적했을 때, 사울은 변명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사울이 잘못을 시인하고 회개하기를 바라셨는데, 사울은 마치 사람 앞에서 하듯이 그때 자신이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서 사울 왕을 버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변명을 싫어하십니다.
반면 다윗은 선지자 나단에게 지적을 받았을 때,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통회하며 자복했습니다. 왕으로서의 체면을 생각하지 않고 크게 회개했습니다. 이때 그가 드린 기도가 시편 51편의 참회의 시입니다.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시편 51:3)

자신 안에 죄를 짓는 못된 습성이 있다는 것을 고백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다윗을 용서하십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귀히 여기신 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 있는 모습 그대로 나왔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어린아이가 엄마 앞에 시커멓게 때 묻은 옷, 상처 난 모습 그대로 나아가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다윗을 좋아하셨습니다.
그런데 요나서 2장에 등장하는 요나의 기도에는 그런 모습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나 몰라라 하며 도망쳤던 자신의 불순종에 대한 회개가 한마디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요나는 자신의 고통을 강조하는 것에 집중했습니다.

요나의 두 번째 문제는 자신이 당한 고난에 대한 넋두리가 기도 전체를 휩싸고 있다는 것입니다.

…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 (요나 2:2)

물이 나를 영혼까지 둘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워싸고 바다 풀이 내 머리를 감쌌나이다 (요나 2:5)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 (요나 2:6)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 … (요나 2:7)

그가 기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가 당하는 고난이 컸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당한 고통에 대해 강조합니다. 스올의 뱃속, 물의 깊음, 산의 뿌리, 죽은 자들이 거하는 무덤과도 같은 곳, 창세기에 나오는 혼돈 상태, 흑암 속에 자신이 빠져 들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너무 상심되고 피곤하니 하나님이 생각난다고 이야기합니다. 몸과 영혼이 침몰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부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못 견디겠습니다!”라고 하나님을 붙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고난 속에서 그가 기억한 것은 자신의 죄가 아니었습니다.
고난을 당하거나 깊은 질병이 들어 아플 때, 우리는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 고난을 제거해 주세요. 못 살겠습니다.” 그런데 그래도 고난이 사라지지 않으면 이런 기도도 합니다. “하나님, 이 고난이 지나가게 해 주시면, 제가 주님께 충성할게요. 제 몸을 주님께 바칠게요. 제가 가진 것들을 주님께 드릴게요.” 굉장히 멋진 기도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자신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하나님, 그동안 제가 말로 행동으로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상처를 줬는지 모릅니다. 제가 얼마나 교만했는지 모릅니다. 제 속에는 늘 거짓이 있었습니다. 나를 변명하려고 남에게 내 죄를 덮어씌운 적도 많았습니다. 제 속에 있는 제 악함을 압니다” 하고 내 안에 있는 악과 허물을 하나님 앞에 먼저 토해 내야 합니다.

요나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자신의 잘함을 드러냈습니다.

요나의 세 번째 문제는 아직도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모든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요나 2:8)

저는 처음에 이 구절을 읽으면서, 요나가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아닌가 싶었습니다. ‘내가 거짓되었구나. 내가 헛된 우상을 섬겼구나.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사실은 무신론적 사고를 가졌구나. 내가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불순종했구나!’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했다는 대상이 단수가 아니라 복수입니다. 어쩌면 니느웨 백성을 뜻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린 사람들입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요나는 8절 마지막에 반전 접속사 ‘그러나’를 사용하여 9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 (요나 2:9)

이 구절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세리와 바리새인의 기도를 예로 들어 하신 말씀입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누가복음 18:11)

여기에도 감사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감사는 다른 사람과의 비교를 통한 감사였습니다. “저는 저 사람하고 다르죠? 저는 본질적으로 저런 사람과는 달라요. 제가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데요? 제가 얼마나 교회 생활을 잘했는데요? 제가 기도도 얼마나 많이 하고 헌금도 얼마나 많이 했는데요?”
감사한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것입니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겠다는 것이 얼마나 굉장한 것입니까? 주의 소원을 갚겠다고 결단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요나의 본심이 바뀌지는 않았습니다. 감사는 잠깐뿐입니다. 서원을 주께 갚겠다는 것도 일시적입니다. 그것은 요나서 3장과 4장을 보면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절반의 회개만 한 것입니다.
절반의 회개는 아예 회개를 하지 않는 것보다 나을까요? 때로는 더 나쁜 것이 되고 맙니다. 차선은 최선의 다음이 아니라 최선의 적이 될 수 있습니다. 차선에 만족하면 최선을 향한 노력을 접게 됩니다. ‘이 정도 했으면 됐지!’ 하고 멈춰 버리거나 때로는 오만한 생각마저 들게 합니다. 그러면 가슴에 뜨거움이 없고 영혼의 눈물이 사라집니다.

참된 신앙의 시작은 회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마지막까지 쉽게 사라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야 하고, 하나님마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마지막까지 그것을 붙들려고 합니다. 그리고 나의 죄악과 부끄러움과 연약함을 하나님 앞에 토해 내지 않으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체면을 차리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하나님 앞에 어린아이와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엄마 아빠 앞에 서는 어린아이처럼,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그저께 잘못하고, 어제 잘못하고, 오늘 또 잘못하고, 내일도 잘못할지라도, 그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에 회개의 영과 영혼의 눈물을 주십니다. 회개의 영을 받아야 내 영혼이 다시 기뻐하고 다시 감사할 줄 알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제가 스스로 자랑했던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주님과 함께 다시 출발하겠습니다. 다시 주님 뜻대로 살겠습니다’ 하고 새로운 용기와 사명을 갖게 됩니다.
회개가 모든 것의 시작입니다. 신앙의 시작과 끝은 모두 회개입니다. 오늘도 내 모습을 돌아보면서 하나님 앞에 나를 토해내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복된 하나님의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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