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구독

ic_info구독 사용방법

해당 카테고리에 새로운 콘텐츠를 모아보기 원하시면 구독을 추가해주세요 마이페이지 > 내구독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ic_info

정욕과 정결의 경계선에서 – 7대 죄악 7 ‘정욕’ –

사무엘하 13: 10 ~ 14

김지철 목사

2014.04.06

이성에게 끌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충격적인 사건이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 왕가와 그의 자녀에게 일어난 사건으로 오빠가 이복동생과 근친상간한 것입니다. 그것도 강제적인 겁탈로 말입니다.
남녀 간에 일어난 사건들에 대해서 우리는 종종 ‘정말 사랑일까, 아니면 육체적인 욕정에 불과한 것일까?’하고 묻곤 합니다. 젊은 청년들이 서로의 멋지고 매력적인 모습에 반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 아닙니까?
한자어 ‘좋아할 호(好)’를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여자와 남자가 함께 있는 모습입니다. 즉 함께 있을 때 좋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남자는 여자를 좋아하고 여자는 남자를 좋아하도록 만드셨습니다. 남자가 매력적인 여성을 보게 되면 즐겁습니다. 또 보고 싶습니다. 만나서 대화도 해 보고 싶고, 사귀고 싶은 마음도 듭니다. 여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멋진 남성을 보면 한 번 더 보는 것이 즐거움이고, 가까이 가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그래서 연애를 하는 것이고, 결혼까지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섭리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남자라는 성과 여자라는 성을 주신 복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랑하는 마음과 정욕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그동안 일곱 가지의 죄악들을 매주 하나씩 나누어 왔습니다. 교만과 겸손의 경계선, 시기와 포용의 경계선, 분노와 인내의 경계선, 나태와 근면의 경계선, 탐욕과 자족의 경계선, 탐식과 절제의 경계선. 그리고 오늘 그 마지막 시간으로 ‘정욕과 정결의 경계선’에 놓여있는 우리의 삶을 살펴보려고 합니다.때로는 욕정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것 같기도 하고, 때로는 그것에서 벗어나 정결한 삶을 추구하고자 하기도 하는 우리의 모습을 말씀을 통해서 되돌아보기 원합니다.

정욕은 남자들이 쉽게 빠지는 죄의 유혹입니다.

다윗 가문은 훌륭한 가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보시면서 ‘나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는 인물’이라고 칭찬하기도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에게는 큰 부끄러움이 있었습니다. 결정적인 실수와 치명적인 죄악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남의 아내를 빼앗기 위해 신실한 부하였던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죽여 버린 것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다윗의 이 행동은 사형을 받아 마땅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두 가지 죄, 즉 간음죄와 살인죄를 범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다윗에게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첫 번째 아들 암논이 이복동생인 다말을 겁탈한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잘 나갈 때, 할 일이 없을 때 가장 먼저 남자에게 들어오는 죄악이 있습니다. 바로 정욕입니다. 성적인 욕망을 통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윗의 부하들과 장수들은 전쟁터에 나가서 싸움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대낮에 침실에 누워 빈둥빈둥하다가 저녁이 되어서야 어슬렁어슬렁 바깥을 향했습니다. 그러다가 목욕하고 있던 밧세바의 벗은 몸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욕정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맏아들 암논도 비슷했습니다. 이제 가만히 있어도 왕권은 자신의 것이 됩니다. 안도했을 것입니다. 이제 자신의 힘을 막을 자, 자신이 하는 일을 멈출 자는 아버지 다윗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이복동생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녀의 미모가 그에게 욕정을 일으켰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읽어보면 그 결말은 아주 참담합니다. 암논의 이 범죄 때문에 다윗은 두 아들을 잃게 됩니다. 먼저 암논을 잃어버립니다. 그의 동생이었던 압살롬이 형을 죽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셋째 아들인 압살롬까지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뿐입니까? 한 딸을 비극과 비참함 속에 몰아넣게 됩니다. 한 마디로 암논의 범죄는 다윗 왕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왜 다윗은 이렇게 못된 짓을 한 암논을 불러 야단치지 않았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심리적으로 자신이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다는 마음의 거리낌이 있었습니다. 이미 자신도 정욕 때문에 밧세바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니 자기와 똑같은 죄를 지은 아들을 꾸짖을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냥 묻어 두고 싶었을 것입니다. 부전자전이라는 소리를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가계 속에 정욕의 문제가 흐르고 있다는 것이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그로 인해 그는 아들의 심정도 헤아리지 않았고 고통 받고 있는 딸 다말의 마음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세월이 흐르는 대로 놔두면 암논도 제자리로 돌아오고 다말도 받은 상처가 치유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성경에는 위대한 아버지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러한 아버지의 모습과는 달리 타락한 자녀들이 종종 있습니다. 엘리의 아들들이 그랬습니다. 위대한 제사장이며 선지자였던 사무엘의 아들도 그러했습니다. 그리고 최고의 왕이었다는 다윗도 아들을 통제하지 못했습니다. 자기가 너무 잘났기 때문에, 너무 바빴기 때문에 가정의 심각한 위기를 다스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성욕을 통제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암논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요? 남자로서, 여자로서, 성적인 욕망이 있다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사랑하게 하고, 자녀를 낳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런 점에서 성적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암논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그 욕망을 정욕으로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통제되지 않는 욕망으로 내몰았다는 것입니다.
암논은 한 여인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사랑’에 빠져 있었습니다. 욕정을 해결하기 위해서 가장 나쁜 방법을 택한 것입니다.

… 암논이 말하되 내가 아우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사랑함이니라… (사무엘하 13:4)

영어 성경에 보면, fell in love with Tamar 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사랑에 빠져있다는 것입니다. 상사병에 걸렸다는 것입니다. 사랑에 빠졌을 때, 남자에게 있어 성이라는 것은 늘 육체적인 쾌락을 향해서 달려가게 합니다. 하지만 사랑에 빠진 것에서 나오게 되면 제정신이 듭니다. 그때는 사랑에 빠져 성적관계를 맺었던 여인을 내칩니다. 쫓아냅니다. 왜입니까? 성적관계에 실증이 났기 때문입니다.
저는 결혼을 준비하고 있는 젊은 청년들에게 종종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너희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연애하는 게 얼마나 축복이냐. 사랑해라. 사랑도 받아봐라. 그런데 결혼까지 이르려고 하면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지나봐라. 그저 사랑에 빠진 채로 결혼하지 말아라. 이 남자가 일관성이 있는가, 이 여자가 진정성이 있는가, 상대가 정말로 사랑으로 나를 귀히 여기는지를 확인하고 나서 결혼해라. 그래야 평생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사는 축복을 누릴 수 있다.” 신뢰하지 않는 사랑, 그저 사랑에 빠져 육체적인 탐욕을 채우는 사랑은 길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암논의 두 번째 문제는 나쁜 친구의 계략에 넘어갔다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요나답이라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암논에게 요나답이라 하는 친구가 있으니 그는 다윗의 형 시므아의 아들이요 심히 간교한 자라 (사무엘하 13:3)

간교할 때 쓰는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거짓말입니다. 간교하고 비굴하고 비열한 것의 핵심은 거짓말입니다. 사탄이 인간에게 처음 찾아와서 한 것은 거짓말이었습니다. 속이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을 이간하는 것이었습니다.
암논의 친구도 악하고 아주 간교했습니다. 그는 암논에게 거짓말로 아버지를 속이고, 여인 다말을 속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요나답의 말을 들은 암논은 꾀병을 빙자해서 아버지를 속였고 동생 다말을 가까이 끌어들였습니다.
암논의 세 번째 문제는, 그의 이러한 행동들이 여자의 마음을 얻기 위한 비책이 아니라 여자의 육체를 탐하기 위한 계락이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 가까이 있게 해서 그 여자를 자신의 소유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거짓으로 병든 체했습니다. 그리고 이복 누이였던 다말이 가까이 왔을 때, 그가 원한 것은 사랑이 아니라 그녀의 육체였습니다.
여기에서 남자들의 전형적이 모습이 나타납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니까 너는 네 육체를 내게 주라”는 것입니다. “네가 네 육체를 내게 주지 않으면 너는 사랑이 없는 여자”라고 윽박지르면서 여인의 육체를 빼앗으려고 하는 수많은 젊은 남자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남자들이 갖고 있는 하나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여자들이 속아 넘어가는 것입니다.
네 번째 문제는 그가 여자의 인격을 존중할 줄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는 다말을 사랑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 나의 누이야 와서 나와 동침하자 하는지라 (사무엘하 13:11)

그가 원했던 것은 동침이었습니다. 하룻밤의 즐거움을 누리려는 것이었습니다. 이어진 내용을 보면 다말은 그런 암논을 말립니다.

… 내 오라버니여 나를 욕되게 하지 말라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마땅히 행하지 못할 것이니 이 어리석은 일을 행하지 말라 (사무엘하 13:12)

놀랍게도 성경은 다윗의 치욕적인 모습과 그의 아들의 부끄러운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윗에 대한 고발이며 인간의 성적 욕망을 정욕으로 무너뜨리는 것에 대한 고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는 어떻습니까? 그 잠깐의 쾌락 때문에 암논은 왕위를 빼앗깁니다. 그리고 자기 생명까지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성적 쾌락과 모든 것을 맞바꾼 어리석은 자가 되고 만 것입니다.
암논의 이러한 행동이 사랑이 아닌 욕정임을 알 수 있는 것은, 동침 후에 일어난 심리적인 변화를 통해서입니다. 그렇게 강렬하게 욕망했던 것이 이제는 미움으로 바뀌게 됩니다. 다말에게 더 이상 관심이 없습니다. 다말을 볼수록 자기의 악한 행위를 떠올리게 되니 아예 그녀를 떠나보내려 합니다. 강제로 겁탈한 암논의 태도가 돌변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사랑이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그리하고 암논이 그를 심히 미워하니 이제 미워하는 미움이 전에 사랑하던 사랑보다 더한지라… (사무엘하 13:15)

사랑이란 지속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정욕은, 간헐적일 뿐만 아니라 단절이 되는 것입니다. 암논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자마자 다말을 내쫓아 버렸습니다. 그리고 다말은 그의 행동이 옳지 않음을 지적합니다.

다말이 그에게 이르되 옳지 아니하다 나를 쫓아보내는 이 큰 악은 아까 내게 행한 그 악보다 더하다 하되 암논이 그를 듣지 아니하고 (사무엘하 13:16)

구약의 율법 전통에 의하면 억지로 동침을 했으면 그와 혼인해서 책임을 져야(신명기 22장) 합니다. 하지만 암논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복동생이었던 다말은 창녀처럼 하룻밤의 쾌락을 위해 몸을 내주고 버림을 당하고 맙니다.

다윗의 태도가 더 큰 분노를 낳았습니다.

이 소식을 다윗이 들었습니다. 21절을 보면 ‘다윗 왕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노하니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누구를 향해 노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이 없습니다. 자기를 향해서 화를 냈는지, 아들을 향해서 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냥 화만 내다가 끝나버린 것입니다. 뭐가 없었습니까? 꾸중이 없었습니다. 징계가 없었습니다. 그저 우유부단하게 처리했습니다.
잠언서에는 자녀들을 향한 상벌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잠언 13:24)

하지만 다윗은 자녀에 대한 상벌이 불분명했습니다. 혼자 화만 내다가 그냥 넘어가려고 했습니다. 암논이 왕위를 이어받을 장자였기 때문일는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자신의 옛 과오가 떠올랐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이유가 무엇이었든 다윗은 암논의 파렴치한 행동에 대해 묵묵부답이었습니다.
부모 된 사람들도 실수한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실패한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도 자녀들과 대화해야 됩니다. “아들아, 내가 젊었을 때 이런 어려움이 있었다. 너는 이것을 극복해라.”라고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야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자녀가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 수 있습니다. 만약 다윗이 그러했다면, 성적 욕망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지만 그것을 절제하지 않을 때 정욕으로 빠지게 된다는 것을 암논이 깨달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자신과 아들 암논의 모습을 비교하면서 할 말을 잃은 채 침묵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결과가 나왔습니까? 또 다른 아들, 다말의 친오빠인 압살롬으로 하여금 분노를 품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무능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보복하기로 결정하고 결국 이복형이었던 암논을 처단해 버립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향해서는 반역을 일으킵니다. 아버지의 왕권을 끌어내리고 자신이 왕이 되었다고 선언하기에 이릅니다.
결과적으로 다윗은 두 아들을 잃었고, 딸 다말은 깊은 고통 속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온 집안이 풍비박산 났습니다. 한 사람이 자신의 성적인 욕망을 정욕으로 잘못 사용한 것이 이렇게 큰 파장을 일으킨 것입니다. 개인적인 사건이 집안 사건이 되고, 집안 사건이 왕권에 대한 사건이 되고, 결국 한 민족과 한 나라의 존폐가 흔들리는 사건으로 확대된 것입니다. 보복과 복수의 악순환이 시작된 것입니다.

성(性)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우리 삶에는 이렇듯 잘못된 정욕이 일으키는 사건들이 많습니다. 사랑스럽던 가정이 파괴됩니다. 귀한 자녀들이 상처를 입고 고통을 당합니다. 세상은 성적인 이야기의 담론들과 이미지들이 가득 차 있습니다. 핸드폰이나 컴퓨터만 켜면 성적인 것들이 가득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성경은 우리에게 어떻게 가르치고 있을까요?
성적인 욕망은 좋은 것이고,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생존을 위해서 주신 것이고 사랑을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적이 욕망은 마치 불꽃과도 같습니다. 불꽃이 얼마나 많은 곳에서 유용하게 쓰입니까? 그런데 이것이 잘못 사용되면 온 집이 불타 재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성적인 욕망을 잘못 다스리게 되면, 화상을 입습니다. 아니 몸 전체가 타버립니다. 잠언서 6장은 그것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숯불을 밟고서야 어찌 그의 발이 데지 아니하겠느냐 (잠언 6:28)

사람이 숯불을 밟으면 발이 데지 않겠습니까? 아니, 어디 발만 데겠습니까? 온 몸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성적인 욕망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에 대해 몇 가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남녀 간의 사랑은 좋은 것입니다. 사랑 때문에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는 것입니다. 성이란 부부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축복입니다. 이것을 놓치면 남자들이 거리를 방황하게 되고, 여자들이 다른 것으로 빈 자리를 채우려 흔들립니다.
신앙은 성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몸을 멸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몸을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몸과 성을 귀히 여겨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때로는 절제하고 통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적인 욕망을 관리하는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남자들에게는 ‘성이란 내가 빼앗는 것’이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여자와 잠자리를 한 남자들은 소위 성의 정복기를 친구들에게 자랑삼아 이야기하곤 합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성은, 빼앗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주인공으로 높여주는 것입니다. 성이란 내가 그와 함께 동행함으로 모든 기쁨을 그에게 선물로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적인 축복입니다.

배우자를 향한 사랑으로 한 몸이 되어야 합니다.

기억해야 합니다. 성욕이 정욕으로 빠지지 않고 진정한 사랑으로 승화되기 위해 하나님은 결혼이라는 제도를 허락하셨습니다. 남편의 성적인 욕망과 기쁨을 충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여자는 아내입니다. 아내를 기쁘게 하고 아내가 사랑받는 기쁨과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남자는 바로 남편입니다. 이것을 기억해야 가정이 축복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억하면서 서로를 위하고 서로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며 내 몸을 상대에게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부부를 ‘너희가 부모를 떠나서 남편과 아내가 한 몸이 된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면서 예수님과 연합하고 하나가 됩니다. 그래서 하늘로부터 오는 기쁨을 누립니다. 부부가 성적으로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이 주신 사랑의 기쁨을 누리는 것, 이것은 육체적인 성례전입니다. 그래서 고귀한 것이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것을 알려주시기 위해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처럼 생명을 걸고 네 아내를 사랑하라. 네 남편에게 모든 것을 내놓으며 사랑하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 시대는 성적인 이미지와 담론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남편이 아닌 남자, 아내가 아닌 여자에게 지금도 이런 잘못된 정욕의 길을 가는 사람이 우리 안에 있습니까? 멈춰 서야 됩니다. 끊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 아내, 내 남편에게 나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 됩니다. 사랑을 쏟아붓고, 내 전체를 바쳐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사랑과 기쁨, 평안과 감사, 그리고 큰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이런 놀라운 축복을 받는 가정되기를 축원합니다.

btn_switch

사무엘하 13: 10 ~ 14

10

암논이 다말에게 이르되 음식물을 가지고 침실로 들어오라 내가 네 손에서 먹으리라 하니 다말이 자기가 만든 과자를 가지고 침실에 들어가 그의 오라버니 암논에게 이르러

11

그에게 먹이려고 가까이 가지고 갈 때에 암논이 그를 붙잡고 그에게 이르되 나의 누이야 와서 나와 동침하자 하는지라

12

그가 그에게 대답하되 아니라 내 오라버니여 나를 욕되게 하지 말라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마땅히 행하지 못할 것이니 이 어리석은 일을 행하지 말라

13

내가 이 수치를 지니고 어디로 가겠느냐 너도 이스라엘에서 어리석은 자 중의 하나가 되리라 이제 청하건대 왕께 말하라 그가 나를 네게 주기를 거절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되

14

암논이 그 말을 듣지 아니하고 다말보다 힘이 세므로 억지로 그와 동침하니라

이성에게 끌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충격적인 사건이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 왕가와 그의 자녀에게 일어난 사건으로 오빠가 이복동생과 근친상간한 것입니다. 그것도 강제적인 겁탈로 말입니다.
남녀 간에 일어난 사건들에 대해서 우리는 종종 ‘정말 사랑일까, 아니면 육체적인 욕정에 불과한 것일까?’하고 묻곤 합니다. 젊은 청년들이 서로의 멋지고 매력적인 모습에 반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 아닙니까?
한자어 ‘좋아할 호(好)’를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여자와 남자가 함께 있는 모습입니다. 즉 함께 있을 때 좋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남자는 여자를 좋아하고 여자는 남자를 좋아하도록 만드셨습니다. 남자가 매력적인 여성을 보게 되면 즐겁습니다. 또 보고 싶습니다. 만나서 대화도 해 보고 싶고, 사귀고 싶은 마음도 듭니다. 여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멋진 남성을 보면 한 번 더 보는 것이 즐거움이고, 가까이 가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그래서 연애를 하는 것이고, 결혼까지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섭리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남자라는 성과 여자라는 성을 주신 복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랑하는 마음과 정욕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그동안 일곱 가지의 죄악들을 매주 하나씩 나누어 왔습니다. 교만과 겸손의 경계선, 시기와 포용의 경계선, 분노와 인내의 경계선, 나태와 근면의 경계선, 탐욕과 자족의 경계선, 탐식과 절제의 경계선. 그리고 오늘 그 마지막 시간으로 ‘정욕과 정결의 경계선’에 놓여있는 우리의 삶을 살펴보려고 합니다.때로는 욕정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것 같기도 하고, 때로는 그것에서 벗어나 정결한 삶을 추구하고자 하기도 하는 우리의 모습을 말씀을 통해서 되돌아보기 원합니다.

정욕은 남자들이 쉽게 빠지는 죄의 유혹입니다.

다윗 가문은 훌륭한 가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보시면서 ‘나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는 인물’이라고 칭찬하기도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에게는 큰 부끄러움이 있었습니다. 결정적인 실수와 치명적인 죄악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남의 아내를 빼앗기 위해 신실한 부하였던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죽여 버린 것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다윗의 이 행동은 사형을 받아 마땅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두 가지 죄, 즉 간음죄와 살인죄를 범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다윗에게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첫 번째 아들 암논이 이복동생인 다말을 겁탈한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잘 나갈 때, 할 일이 없을 때 가장 먼저 남자에게 들어오는 죄악이 있습니다. 바로 정욕입니다. 성적인 욕망을 통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윗의 부하들과 장수들은 전쟁터에 나가서 싸움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대낮에 침실에 누워 빈둥빈둥하다가 저녁이 되어서야 어슬렁어슬렁 바깥을 향했습니다. 그러다가 목욕하고 있던 밧세바의 벗은 몸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욕정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맏아들 암논도 비슷했습니다. 이제 가만히 있어도 왕권은 자신의 것이 됩니다. 안도했을 것입니다. 이제 자신의 힘을 막을 자, 자신이 하는 일을 멈출 자는 아버지 다윗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이복동생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녀의 미모가 그에게 욕정을 일으켰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읽어보면 그 결말은 아주 참담합니다. 암논의 이 범죄 때문에 다윗은 두 아들을 잃게 됩니다. 먼저 암논을 잃어버립니다. 그의 동생이었던 압살롬이 형을 죽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셋째 아들인 압살롬까지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뿐입니까? 한 딸을 비극과 비참함 속에 몰아넣게 됩니다. 한 마디로 암논의 범죄는 다윗 왕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왜 다윗은 이렇게 못된 짓을 한 암논을 불러 야단치지 않았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심리적으로 자신이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다는 마음의 거리낌이 있었습니다. 이미 자신도 정욕 때문에 밧세바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니 자기와 똑같은 죄를 지은 아들을 꾸짖을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냥 묻어 두고 싶었을 것입니다. 부전자전이라는 소리를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가계 속에 정욕의 문제가 흐르고 있다는 것이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그로 인해 그는 아들의 심정도 헤아리지 않았고 고통 받고 있는 딸 다말의 마음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세월이 흐르는 대로 놔두면 암논도 제자리로 돌아오고 다말도 받은 상처가 치유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성경에는 위대한 아버지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러한 아버지의 모습과는 달리 타락한 자녀들이 종종 있습니다. 엘리의 아들들이 그랬습니다. 위대한 제사장이며 선지자였던 사무엘의 아들도 그러했습니다. 그리고 최고의 왕이었다는 다윗도 아들을 통제하지 못했습니다. 자기가 너무 잘났기 때문에, 너무 바빴기 때문에 가정의 심각한 위기를 다스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성욕을 통제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암논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요? 남자로서, 여자로서, 성적인 욕망이 있다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사랑하게 하고, 자녀를 낳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런 점에서 성적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암논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그 욕망을 정욕으로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통제되지 않는 욕망으로 내몰았다는 것입니다.
암논은 한 여인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사랑’에 빠져 있었습니다. 욕정을 해결하기 위해서 가장 나쁜 방법을 택한 것입니다.

… 암논이 말하되 내가 아우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사랑함이니라… (사무엘하 13:4)

영어 성경에 보면, fell in love with Tamar 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사랑에 빠져있다는 것입니다. 상사병에 걸렸다는 것입니다. 사랑에 빠졌을 때, 남자에게 있어 성이라는 것은 늘 육체적인 쾌락을 향해서 달려가게 합니다. 하지만 사랑에 빠진 것에서 나오게 되면 제정신이 듭니다. 그때는 사랑에 빠져 성적관계를 맺었던 여인을 내칩니다. 쫓아냅니다. 왜입니까? 성적관계에 실증이 났기 때문입니다.
저는 결혼을 준비하고 있는 젊은 청년들에게 종종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너희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연애하는 게 얼마나 축복이냐. 사랑해라. 사랑도 받아봐라. 그런데 결혼까지 이르려고 하면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지나봐라. 그저 사랑에 빠진 채로 결혼하지 말아라. 이 남자가 일관성이 있는가, 이 여자가 진정성이 있는가, 상대가 정말로 사랑으로 나를 귀히 여기는지를 확인하고 나서 결혼해라. 그래야 평생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사는 축복을 누릴 수 있다.” 신뢰하지 않는 사랑, 그저 사랑에 빠져 육체적인 탐욕을 채우는 사랑은 길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암논의 두 번째 문제는 나쁜 친구의 계략에 넘어갔다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요나답이라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암논에게 요나답이라 하는 친구가 있으니 그는 다윗의 형 시므아의 아들이요 심히 간교한 자라 (사무엘하 13:3)

간교할 때 쓰는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거짓말입니다. 간교하고 비굴하고 비열한 것의 핵심은 거짓말입니다. 사탄이 인간에게 처음 찾아와서 한 것은 거짓말이었습니다. 속이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을 이간하는 것이었습니다.
암논의 친구도 악하고 아주 간교했습니다. 그는 암논에게 거짓말로 아버지를 속이고, 여인 다말을 속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요나답의 말을 들은 암논은 꾀병을 빙자해서 아버지를 속였고 동생 다말을 가까이 끌어들였습니다.
암논의 세 번째 문제는, 그의 이러한 행동들이 여자의 마음을 얻기 위한 비책이 아니라 여자의 육체를 탐하기 위한 계락이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 가까이 있게 해서 그 여자를 자신의 소유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거짓으로 병든 체했습니다. 그리고 이복 누이였던 다말이 가까이 왔을 때, 그가 원한 것은 사랑이 아니라 그녀의 육체였습니다.
여기에서 남자들의 전형적이 모습이 나타납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니까 너는 네 육체를 내게 주라”는 것입니다. “네가 네 육체를 내게 주지 않으면 너는 사랑이 없는 여자”라고 윽박지르면서 여인의 육체를 빼앗으려고 하는 수많은 젊은 남자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남자들이 갖고 있는 하나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여자들이 속아 넘어가는 것입니다.
네 번째 문제는 그가 여자의 인격을 존중할 줄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는 다말을 사랑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 나의 누이야 와서 나와 동침하자 하는지라 (사무엘하 13:11)

그가 원했던 것은 동침이었습니다. 하룻밤의 즐거움을 누리려는 것이었습니다. 이어진 내용을 보면 다말은 그런 암논을 말립니다.

… 내 오라버니여 나를 욕되게 하지 말라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마땅히 행하지 못할 것이니 이 어리석은 일을 행하지 말라 (사무엘하 13:12)

놀랍게도 성경은 다윗의 치욕적인 모습과 그의 아들의 부끄러운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윗에 대한 고발이며 인간의 성적 욕망을 정욕으로 무너뜨리는 것에 대한 고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는 어떻습니까? 그 잠깐의 쾌락 때문에 암논은 왕위를 빼앗깁니다. 그리고 자기 생명까지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성적 쾌락과 모든 것을 맞바꾼 어리석은 자가 되고 만 것입니다.
암논의 이러한 행동이 사랑이 아닌 욕정임을 알 수 있는 것은, 동침 후에 일어난 심리적인 변화를 통해서입니다. 그렇게 강렬하게 욕망했던 것이 이제는 미움으로 바뀌게 됩니다. 다말에게 더 이상 관심이 없습니다. 다말을 볼수록 자기의 악한 행위를 떠올리게 되니 아예 그녀를 떠나보내려 합니다. 강제로 겁탈한 암논의 태도가 돌변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사랑이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그리하고 암논이 그를 심히 미워하니 이제 미워하는 미움이 전에 사랑하던 사랑보다 더한지라… (사무엘하 13:15)

사랑이란 지속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정욕은, 간헐적일 뿐만 아니라 단절이 되는 것입니다. 암논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자마자 다말을 내쫓아 버렸습니다. 그리고 다말은 그의 행동이 옳지 않음을 지적합니다.

다말이 그에게 이르되 옳지 아니하다 나를 쫓아보내는 이 큰 악은 아까 내게 행한 그 악보다 더하다 하되 암논이 그를 듣지 아니하고 (사무엘하 13:16)

구약의 율법 전통에 의하면 억지로 동침을 했으면 그와 혼인해서 책임을 져야(신명기 22장) 합니다. 하지만 암논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복동생이었던 다말은 창녀처럼 하룻밤의 쾌락을 위해 몸을 내주고 버림을 당하고 맙니다.

다윗의 태도가 더 큰 분노를 낳았습니다.

이 소식을 다윗이 들었습니다. 21절을 보면 ‘다윗 왕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노하니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누구를 향해 노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이 없습니다. 자기를 향해서 화를 냈는지, 아들을 향해서 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냥 화만 내다가 끝나버린 것입니다. 뭐가 없었습니까? 꾸중이 없었습니다. 징계가 없었습니다. 그저 우유부단하게 처리했습니다.
잠언서에는 자녀들을 향한 상벌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잠언 13:24)

하지만 다윗은 자녀에 대한 상벌이 불분명했습니다. 혼자 화만 내다가 그냥 넘어가려고 했습니다. 암논이 왕위를 이어받을 장자였기 때문일는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자신의 옛 과오가 떠올랐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이유가 무엇이었든 다윗은 암논의 파렴치한 행동에 대해 묵묵부답이었습니다.
부모 된 사람들도 실수한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실패한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도 자녀들과 대화해야 됩니다. “아들아, 내가 젊었을 때 이런 어려움이 있었다. 너는 이것을 극복해라.”라고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야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자녀가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 수 있습니다. 만약 다윗이 그러했다면, 성적 욕망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지만 그것을 절제하지 않을 때 정욕으로 빠지게 된다는 것을 암논이 깨달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자신과 아들 암논의 모습을 비교하면서 할 말을 잃은 채 침묵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결과가 나왔습니까? 또 다른 아들, 다말의 친오빠인 압살롬으로 하여금 분노를 품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무능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보복하기로 결정하고 결국 이복형이었던 암논을 처단해 버립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향해서는 반역을 일으킵니다. 아버지의 왕권을 끌어내리고 자신이 왕이 되었다고 선언하기에 이릅니다.
결과적으로 다윗은 두 아들을 잃었고, 딸 다말은 깊은 고통 속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온 집안이 풍비박산 났습니다. 한 사람이 자신의 성적인 욕망을 정욕으로 잘못 사용한 것이 이렇게 큰 파장을 일으킨 것입니다. 개인적인 사건이 집안 사건이 되고, 집안 사건이 왕권에 대한 사건이 되고, 결국 한 민족과 한 나라의 존폐가 흔들리는 사건으로 확대된 것입니다. 보복과 복수의 악순환이 시작된 것입니다.

성(性)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우리 삶에는 이렇듯 잘못된 정욕이 일으키는 사건들이 많습니다. 사랑스럽던 가정이 파괴됩니다. 귀한 자녀들이 상처를 입고 고통을 당합니다. 세상은 성적인 이야기의 담론들과 이미지들이 가득 차 있습니다. 핸드폰이나 컴퓨터만 켜면 성적인 것들이 가득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성경은 우리에게 어떻게 가르치고 있을까요?
성적인 욕망은 좋은 것이고,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생존을 위해서 주신 것이고 사랑을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적이 욕망은 마치 불꽃과도 같습니다. 불꽃이 얼마나 많은 곳에서 유용하게 쓰입니까? 그런데 이것이 잘못 사용되면 온 집이 불타 재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성적인 욕망을 잘못 다스리게 되면, 화상을 입습니다. 아니 몸 전체가 타버립니다. 잠언서 6장은 그것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숯불을 밟고서야 어찌 그의 발이 데지 아니하겠느냐 (잠언 6:28)

사람이 숯불을 밟으면 발이 데지 않겠습니까? 아니, 어디 발만 데겠습니까? 온 몸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성적인 욕망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에 대해 몇 가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남녀 간의 사랑은 좋은 것입니다. 사랑 때문에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는 것입니다. 성이란 부부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축복입니다. 이것을 놓치면 남자들이 거리를 방황하게 되고, 여자들이 다른 것으로 빈 자리를 채우려 흔들립니다.
신앙은 성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몸을 멸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몸을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몸과 성을 귀히 여겨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때로는 절제하고 통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적인 욕망을 관리하는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남자들에게는 ‘성이란 내가 빼앗는 것’이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여자와 잠자리를 한 남자들은 소위 성의 정복기를 친구들에게 자랑삼아 이야기하곤 합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성은, 빼앗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주인공으로 높여주는 것입니다. 성이란 내가 그와 함께 동행함으로 모든 기쁨을 그에게 선물로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적인 축복입니다.

배우자를 향한 사랑으로 한 몸이 되어야 합니다.

기억해야 합니다. 성욕이 정욕으로 빠지지 않고 진정한 사랑으로 승화되기 위해 하나님은 결혼이라는 제도를 허락하셨습니다. 남편의 성적인 욕망과 기쁨을 충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여자는 아내입니다. 아내를 기쁘게 하고 아내가 사랑받는 기쁨과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남자는 바로 남편입니다. 이것을 기억해야 가정이 축복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억하면서 서로를 위하고 서로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며 내 몸을 상대에게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부부를 ‘너희가 부모를 떠나서 남편과 아내가 한 몸이 된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면서 예수님과 연합하고 하나가 됩니다. 그래서 하늘로부터 오는 기쁨을 누립니다. 부부가 성적으로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이 주신 사랑의 기쁨을 누리는 것, 이것은 육체적인 성례전입니다. 그래서 고귀한 것이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것을 알려주시기 위해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처럼 생명을 걸고 네 아내를 사랑하라. 네 남편에게 모든 것을 내놓으며 사랑하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 시대는 성적인 이미지와 담론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남편이 아닌 남자, 아내가 아닌 여자에게 지금도 이런 잘못된 정욕의 길을 가는 사람이 우리 안에 있습니까? 멈춰 서야 됩니다. 끊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 아내, 내 남편에게 나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 됩니다. 사랑을 쏟아붓고, 내 전체를 바쳐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사랑과 기쁨, 평안과 감사, 그리고 큰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이런 놀라운 축복을 받는 가정되기를 축원합니다.

Connection Card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