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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급함의 영, 기다림의 영? – 성령과 악령 24 –

민수기 20: 10 ~ 13

김지철 목사

2017.12.03

성경에는 미시담론과 거대담론이 공존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조급함의 영, 기다림의 영?’입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그 안에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인간들의 이야기와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작은 이야기도 있고 큰 이야기도 있습니다. 작은 이야기란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 일상의 이야기, 사람 사는 이야기를 말합니다. 이런 작은 이야기를 ‘미시담론’이라 일컫습니다. 한편 큰 이야기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과 더불어 구원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이야기입니다. 범죄 한 인간을 하나님이 어떻게 회복하시고, 그를 어떻게 해방시키는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거대담론’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 거대담론은 율법과 약속이라는 주제 아래 성경을 관통합니다. 구약에서 이 주제를 관통하는 인물이 있다면, 모세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율법을 대표합니다.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이 주제를 관통하는데, 그분은 약속을 대표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아주 작은 이야기지만, 그 안에 큰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모세의 조급함과 하나님의 기다림이 대비되는 사건입니다. 모세는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한 민족의 지도자이자 종과 노예였던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킨 독립투사였습니다. 그는 영웅이었습니다. 한편 모세는 급한 성격을 가진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쉽게 격분하기도 했고, 조급하게 움직이며 자기 생각을 성취하려던 인물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모세를 말리셨습니다. 그를 광야 학교로 내보내십니다. 그곳에서 모세는 40년 동안이나 훈련을 받습니다. 그런 후 비로소 출애굽의 역사가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모세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모세가 품은 하나님이 꿈은 그분의 약속에 근거했습니다. 그 약속이란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약속이기도 합니다. 약속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 내가 가나안 땅을 약속의 땅으로 줄 것이다.” 이와 같은 약속을 허락해 주셨고, 이를 성취하시고자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 속에 모세를 세우셨습니다. 그렇게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로 섭니다.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탈출시키는 지도자로 말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약속의 땅인 가나안 앞에 이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깁니다. 그 내용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당혹스러운 사건입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모세 입장에서는 더욱 황당한 일이 벌어집니다. 본 사건 이후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모세야, 내가 네게 약속한 땅 가나안에 너는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수십 년 동안이나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왔는데, 결국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떤 일이 있었길래 이렇게 냉혹한 결과를 받아들여야 했을까요?
원인은 한 가지입니다.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1장 32절에 보면, ‘이 일에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였도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불평하면서 우상숭배 하는 모습을 보인 까닭입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믿음이 없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도자인 모세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도자 모세에게 그 책임을 물으십니다. 오늘 본문 중 12절 말씀이, 하나님이 모세에게 직접 이 사실을 말씀하고 계신 내용입니다.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민수기 20:12)

여기서 ‘너희’란 모세와 아론을 뜻합니다. “모세야, 네가 나를 믿지 않아서, 네가 내 거룩함을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에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 이스라엘 백성만 믿음이 없는 게 아니라 지도자인 너도 믿음이 없다. 나 여호와를 네가 신뢰하지 않았다.” 이렇게 모세를 질책하십니다.
사실 모세로서는 조금 억울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불신앙 때문에 자기가 손해를 봤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래서 신명기 1장 37절에서, 그가 이렇게 투덜대는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너희 때문에 내게도 진노하사 이르시되 너도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불신앙 때문에 자신까지 야단쳤다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너무 억울하다고 분노합니다.

조급함이 불신앙과 교만을 낳습니다.

이 모든 역사적 맥락을 잘 알고 있던 시편 기자는 본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립니다.

이는 그들이 그의 뜻을 거역함으로 말미암아 모세가 그의 입술로 망령되이(rash words) 말하였음이로다 (시편 106:33)

‘망령되이’라는 단어를 영어 성경으로 보면, ‘rash words’라고 표현됩니다. rash란 섣부르고 경솔하며 성급하고 무분별하다는 의미입니다. 즉 모세가 매우 경솔하고 무분별하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세가 언제 그렇게 행동했을까요? 오늘 본문의 앞뒤 문맥을 자세히 읽어보면, 물이 없어 고통 받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친히 말씀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8절입니다.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이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게 할지니라 (민수기 20:8 중)

하나님은 반석 자체를 향해 명령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이 말씀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십시오. 11절 말씀입니다.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민수기 20:11)

우리에겐 모세에 대한 질문이 많습니다. 그렇게 위대한 지도자였는데 왜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었는지 쉽게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때론 ‘하나님이 너무 가혹하신 게 아닌가’, ‘모세만한 인물이 도대체 누가 있는가’, ‘반석을 두 번 두드린 것이 그렇게 큰 죄가 되는 것인가’라고 질문하게 됩니다. 또한 ‘그만한 죄를 짓지 않고 사는 사람이 누군가’, ‘우리는 얼마나 많은 죄를 짓고 사는가’, ‘정말 그 이유 때문일까’, ‘하나님이 그를 가나안에 들여보내지 않으신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하고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성경에 다시 집중하면서 읽다보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 중 10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민수기 20:10 중)

여기서 미묘한 구별이 보입니다. 모세가 백성들을 향해 “반역한 이 백성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모세는 백성들과 자신을 분리시키고 있습니다. 자신은 거룩한데 백성은 반역한 자들이란 것입니다. 또한 “내가 너희를 위해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라고 하면서 마치 기적의 주체가 자신인 것처럼 말합니다. 반석에서 물을 내시는 이는 하나님이심에도 자신이 그 역사를 일으킬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이 아니라 자신의 힘과 능력을 과시하고자 하는 지도자로 나서고 있는 모세의 모습입니다. 이처럼 당시 모세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을 드러내며 과시하고 싶어 했습니다. 이는 조급한 모세의 모습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의 불신앙에 분노가 솟구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마음속에 품었던 생각을 경솔하게 내뱉었습니다. 함부로 말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반석에서 물을 낸 게 아닙니다. 분노함으로 물을 냈습니다. 조급함으로 성급하게 말하고 함부로 행동한 것입니다.

누구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챌 수 없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모세만큼 위대한 지도자도 없습니다. 그동안 모세는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서 중보자 역할을 톡톡히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마다 놀라운 은혜에 감격하기도 했습니다. 두려움과 떨림 가운데 하나님을 경외했고, 그렇게 변화된 성품을 소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물 때문에 시시때때로 불평하는 백성들을 보면서 그만 혈기를 드러내고 맙니다. 마치 자신이 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처럼 반석을 치는 행위까지 보이며, 하나님의 기적을 자기 것으로 둔갑시켰습니다. 바로 이 모습에서 모세의 교만과 하나님을 향한 불신이 풍겨 나옵니다. 아마 당시 모세는 순간적으로 자신이 하나님인 것처럼 착각했던 모양입니다. 온유한 사람이었던 모세도 혈기를 드러냅니다. 격분하는 마음이 그를 사로잡은 것입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을 높이기보다 자신을 높였습니다. 조급한 교만이 모세를 순식간에 무너뜨린 것입니다.
이 사건을 거대한 하나님의 구속사적 틀에서 보면, 하나님의 구원사에 실수하고 실패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모세에게 “네가 믿음이 없다. 네가 내게 영광을 돌리지 않았다. 내가 얼마나 거룩한 분인지를 백성들 앞에 나타내지 않았다. 내가 받아야 할 영광을 네가 차지하려고 했다.”는 내용의 말씀을 하십니다. 12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민수기 20:12 중)

‘너희’란 모세와 아론을 가리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모세를 말합니다. 즉 모세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영광을 자기 것으로 가로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약속의 땅에 모세가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부족한 모세를 세우셔서 크게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건,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누구도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하나님의 주권성을 누구도 손상시킬 수 없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안 되며, 민족의 지도자 모세도 안 되며,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 다윗도 안 됩니다. 그것만큼은 하나님이 용납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빼앗는 것은 누구라도 하나님께서 용납하시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은 지도자들 특히 영적인 지도자들에게 선포되는 말씀입니다. “너의 너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고 있느냐? 네가 여기까지 온 것이 하나님의 축복인 줄 아느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네 자신의 모습을 혹시 상실하고 있지는 않느냐?” 하고 물어보시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를 향해 물어보시는 것이며, 이 땅의 지도자들에게 물어보시는 것이고, 무엇보다 영적인 직분을 맡고 있는 지도자들에게 묻고 계신 것입니다.

율법의 시대가 끝나고 믿음의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당장 멈춰 섰을까요? 그는 억울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하나님께 요구했던 것 같습니다. 신명기 3장 25~26절 말씀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구하옵나니 나를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쪽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 하되 여호와께서 너희 때문에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신명기 3:25~26)

모세가 하나님께 가나안 입성을 간구했지만, 하나님은 매몰차게 거절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는 것 같습니다. 모세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은 이런 것입니다. “모세야, 네 시대는 끝났다. 네 시대는 광야 40년이면 족하다. 너는 율법을 대표한다. 그러나 율법의 시대는 여기까지다. 이제는 율법을 넘어서서 믿음의 시대로 나아가야 된다.” 신명기 1장 37~38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너희 때문에 내게도 진노하사 이르시되 너도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리라 네 앞에 서 있는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그리로 들어갈 것이니 너는 그를 담대하게 하라 (신명기 1:37~38 중)

하나님은 모세에게 약속의 땅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여호수아라는 인물을 세우셔서 그로 하여금 가나안 입성을 가능케 하십니다. 모세는 요단강이 잘 보이는 느보 산에 올라섰습니다. 그곳에 오르면 가나안이 내려다보입니다. 아마 그곳에서 모세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절을 조금씩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여러분, 모세가 힘이 없어서 가나안에 못 들어간 게 아닙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눈이 총명하고 흐리지 않았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모세의 시대가 거기까지였던 것입니다. 이제 여호수아를 통해 새로운 시대가 열립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여호수아를 통해 이어지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히브리어입니다. 그런데 이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음역하면 ‘예수’가 됩니다. 즉 여호수아와 예수는 똑같은 이름입니다. 하나님이 모세 다음에 이 여호수아를 준비시키셨습니다. 여호수아는 현실에서 믿음의 성취를 경험합니다. 모세가 율법의 사람이라면, 여호수아는 약속의 사람입니다. 모세가 행위를 대표하는 인물이라면, 여호수아는 믿음의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여호수아는 다가오실 예수님의 전초적인 표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놀랍지 않습니까? 여기서 작은 이야기가 큰 이야기로 바뀝니다. 미시담론적인 한 사건이 거대담론으로 바뀝니다. 한 사건 속에 위대한 하나님의 섭리가 들어 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모세야, 내가 네게 율법을 줬는데, 율법이 인간을 구원할 수는 없다. 율법은 바로 구원의 자리, 약속의 땅 앞까지 오게 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믿음이 필요하다. 예수를 믿는 믿음, 하나님을 믿는 믿음,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그 믿음으로 구원의 자리, 생명의 자리에 들어오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대림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대림절에서 ‘대(待)’는 기다릴 대, ‘림(臨)’은 임하실 림입니다. 즉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가 대림절입니다. 구약의 백성들은 오실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그것의 성취가 성탄입니다. 신약 시대를 사는 우리는 이미 오신 메시아를 축하하며, 다시 오실 재림의 주를 기다립니다.
우리는 모세 이후의 시대를 살아갑니다. 모세가 보지 못한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모세가 경험하지 못한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목격하고, 이미 가나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약속의 증거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이미 우리가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독일어 중에 Eile mit Weile 이란 말이 있습니다. Eile는 서두르란 뜻입니다. mit은 ‘함께’라는 뜻이며, Weile는 시간, 여유라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slow and stay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즉 ‘여유를 갖되 서두르라’는 말입니다. 침착히 서두르라는 것입니다. 여유가 없이 서두르면 조급함이 되지만, 여유를 갖고 서두르면 준비와 부지런한 삶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다림은 모세처럼 초조하지 않습니다. 조급하지도 않습니다. 이미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를 통해서입니까? 예수님을 통해서, 여호수아를 통해서입니다.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구원과 죄 용서와 평안과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고, 약속의 성취인 주님 안에서 이 기쁨을 누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다리면서 축하합니다. 기다리면서 기뻐합니다. 기다리면서 감사합니다. 기다리면서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약속을 미리 경험하고 재림의 주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대림절을 맞이하면서 이 축복을 누려야 합니다.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이지.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주신 모든 보화가 들어있지.’라고 생각하면서, 우리의 남은 생을 감사와 기쁨으로 누리며 예수님 안에서 발견되는 모든 지혜와 보화를 우리 삶에 간직하면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이 모든 축복을 항상 누리면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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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20: 10 ~ 13

10

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11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12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13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와 다투었으므로 이를 므리바 물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들 중에서 그 거룩함을 나타내셨더라

성경에는 미시담론과 거대담론이 공존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조급함의 영, 기다림의 영?’입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그 안에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인간들의 이야기와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작은 이야기도 있고 큰 이야기도 있습니다. 작은 이야기란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 일상의 이야기, 사람 사는 이야기를 말합니다. 이런 작은 이야기를 ‘미시담론’이라 일컫습니다. 한편 큰 이야기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과 더불어 구원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이야기입니다. 범죄 한 인간을 하나님이 어떻게 회복하시고, 그를 어떻게 해방시키는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거대담론’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 거대담론은 율법과 약속이라는 주제 아래 성경을 관통합니다. 구약에서 이 주제를 관통하는 인물이 있다면, 모세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율법을 대표합니다.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이 주제를 관통하는데, 그분은 약속을 대표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아주 작은 이야기지만, 그 안에 큰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모세의 조급함과 하나님의 기다림이 대비되는 사건입니다. 모세는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한 민족의 지도자이자 종과 노예였던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킨 독립투사였습니다. 그는 영웅이었습니다. 한편 모세는 급한 성격을 가진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쉽게 격분하기도 했고, 조급하게 움직이며 자기 생각을 성취하려던 인물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모세를 말리셨습니다. 그를 광야 학교로 내보내십니다. 그곳에서 모세는 40년 동안이나 훈련을 받습니다. 그런 후 비로소 출애굽의 역사가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모세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모세가 품은 하나님이 꿈은 그분의 약속에 근거했습니다. 그 약속이란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약속이기도 합니다. 약속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 내가 가나안 땅을 약속의 땅으로 줄 것이다.” 이와 같은 약속을 허락해 주셨고, 이를 성취하시고자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 속에 모세를 세우셨습니다. 그렇게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로 섭니다.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탈출시키는 지도자로 말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약속의 땅인 가나안 앞에 이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깁니다. 그 내용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당혹스러운 사건입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모세 입장에서는 더욱 황당한 일이 벌어집니다. 본 사건 이후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모세야, 내가 네게 약속한 땅 가나안에 너는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수십 년 동안이나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왔는데, 결국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떤 일이 있었길래 이렇게 냉혹한 결과를 받아들여야 했을까요?
원인은 한 가지입니다.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1장 32절에 보면, ‘이 일에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였도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불평하면서 우상숭배 하는 모습을 보인 까닭입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믿음이 없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도자인 모세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도자 모세에게 그 책임을 물으십니다. 오늘 본문 중 12절 말씀이, 하나님이 모세에게 직접 이 사실을 말씀하고 계신 내용입니다.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민수기 20:12)

여기서 ‘너희’란 모세와 아론을 뜻합니다. “모세야, 네가 나를 믿지 않아서, 네가 내 거룩함을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에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 이스라엘 백성만 믿음이 없는 게 아니라 지도자인 너도 믿음이 없다. 나 여호와를 네가 신뢰하지 않았다.” 이렇게 모세를 질책하십니다.
사실 모세로서는 조금 억울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불신앙 때문에 자기가 손해를 봤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래서 신명기 1장 37절에서, 그가 이렇게 투덜대는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너희 때문에 내게도 진노하사 이르시되 너도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불신앙 때문에 자신까지 야단쳤다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너무 억울하다고 분노합니다.

조급함이 불신앙과 교만을 낳습니다.

이 모든 역사적 맥락을 잘 알고 있던 시편 기자는 본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립니다.

이는 그들이 그의 뜻을 거역함으로 말미암아 모세가 그의 입술로 망령되이(rash words) 말하였음이로다 (시편 106:33)

‘망령되이’라는 단어를 영어 성경으로 보면, ‘rash words’라고 표현됩니다. rash란 섣부르고 경솔하며 성급하고 무분별하다는 의미입니다. 즉 모세가 매우 경솔하고 무분별하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세가 언제 그렇게 행동했을까요? 오늘 본문의 앞뒤 문맥을 자세히 읽어보면, 물이 없어 고통 받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친히 말씀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8절입니다.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이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게 할지니라 (민수기 20:8 중)

하나님은 반석 자체를 향해 명령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이 말씀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십시오. 11절 말씀입니다.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민수기 20:11)

우리에겐 모세에 대한 질문이 많습니다. 그렇게 위대한 지도자였는데 왜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었는지 쉽게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때론 ‘하나님이 너무 가혹하신 게 아닌가’, ‘모세만한 인물이 도대체 누가 있는가’, ‘반석을 두 번 두드린 것이 그렇게 큰 죄가 되는 것인가’라고 질문하게 됩니다. 또한 ‘그만한 죄를 짓지 않고 사는 사람이 누군가’, ‘우리는 얼마나 많은 죄를 짓고 사는가’, ‘정말 그 이유 때문일까’, ‘하나님이 그를 가나안에 들여보내지 않으신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하고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성경에 다시 집중하면서 읽다보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 중 10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민수기 20:10 중)

여기서 미묘한 구별이 보입니다. 모세가 백성들을 향해 “반역한 이 백성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모세는 백성들과 자신을 분리시키고 있습니다. 자신은 거룩한데 백성은 반역한 자들이란 것입니다. 또한 “내가 너희를 위해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라고 하면서 마치 기적의 주체가 자신인 것처럼 말합니다. 반석에서 물을 내시는 이는 하나님이심에도 자신이 그 역사를 일으킬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이 아니라 자신의 힘과 능력을 과시하고자 하는 지도자로 나서고 있는 모세의 모습입니다. 이처럼 당시 모세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을 드러내며 과시하고 싶어 했습니다. 이는 조급한 모세의 모습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의 불신앙에 분노가 솟구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마음속에 품었던 생각을 경솔하게 내뱉었습니다. 함부로 말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반석에서 물을 낸 게 아닙니다. 분노함으로 물을 냈습니다. 조급함으로 성급하게 말하고 함부로 행동한 것입니다.

누구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챌 수 없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모세만큼 위대한 지도자도 없습니다. 그동안 모세는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서 중보자 역할을 톡톡히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마다 놀라운 은혜에 감격하기도 했습니다. 두려움과 떨림 가운데 하나님을 경외했고, 그렇게 변화된 성품을 소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물 때문에 시시때때로 불평하는 백성들을 보면서 그만 혈기를 드러내고 맙니다. 마치 자신이 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처럼 반석을 치는 행위까지 보이며, 하나님의 기적을 자기 것으로 둔갑시켰습니다. 바로 이 모습에서 모세의 교만과 하나님을 향한 불신이 풍겨 나옵니다. 아마 당시 모세는 순간적으로 자신이 하나님인 것처럼 착각했던 모양입니다. 온유한 사람이었던 모세도 혈기를 드러냅니다. 격분하는 마음이 그를 사로잡은 것입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을 높이기보다 자신을 높였습니다. 조급한 교만이 모세를 순식간에 무너뜨린 것입니다.
이 사건을 거대한 하나님의 구속사적 틀에서 보면, 하나님의 구원사에 실수하고 실패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모세에게 “네가 믿음이 없다. 네가 내게 영광을 돌리지 않았다. 내가 얼마나 거룩한 분인지를 백성들 앞에 나타내지 않았다. 내가 받아야 할 영광을 네가 차지하려고 했다.”는 내용의 말씀을 하십니다. 12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민수기 20:12 중)

‘너희’란 모세와 아론을 가리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모세를 말합니다. 즉 모세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영광을 자기 것으로 가로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약속의 땅에 모세가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부족한 모세를 세우셔서 크게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건,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누구도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하나님의 주권성을 누구도 손상시킬 수 없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안 되며, 민족의 지도자 모세도 안 되며,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 다윗도 안 됩니다. 그것만큼은 하나님이 용납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빼앗는 것은 누구라도 하나님께서 용납하시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은 지도자들 특히 영적인 지도자들에게 선포되는 말씀입니다. “너의 너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고 있느냐? 네가 여기까지 온 것이 하나님의 축복인 줄 아느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네 자신의 모습을 혹시 상실하고 있지는 않느냐?” 하고 물어보시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를 향해 물어보시는 것이며, 이 땅의 지도자들에게 물어보시는 것이고, 무엇보다 영적인 직분을 맡고 있는 지도자들에게 묻고 계신 것입니다.

율법의 시대가 끝나고 믿음의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당장 멈춰 섰을까요? 그는 억울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하나님께 요구했던 것 같습니다. 신명기 3장 25~26절 말씀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구하옵나니 나를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쪽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 하되 여호와께서 너희 때문에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신명기 3:25~26)

모세가 하나님께 가나안 입성을 간구했지만, 하나님은 매몰차게 거절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는 것 같습니다. 모세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은 이런 것입니다. “모세야, 네 시대는 끝났다. 네 시대는 광야 40년이면 족하다. 너는 율법을 대표한다. 그러나 율법의 시대는 여기까지다. 이제는 율법을 넘어서서 믿음의 시대로 나아가야 된다.” 신명기 1장 37~38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너희 때문에 내게도 진노하사 이르시되 너도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리라 네 앞에 서 있는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그리로 들어갈 것이니 너는 그를 담대하게 하라 (신명기 1:37~38 중)

하나님은 모세에게 약속의 땅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여호수아라는 인물을 세우셔서 그로 하여금 가나안 입성을 가능케 하십니다. 모세는 요단강이 잘 보이는 느보 산에 올라섰습니다. 그곳에 오르면 가나안이 내려다보입니다. 아마 그곳에서 모세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절을 조금씩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여러분, 모세가 힘이 없어서 가나안에 못 들어간 게 아닙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눈이 총명하고 흐리지 않았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모세의 시대가 거기까지였던 것입니다. 이제 여호수아를 통해 새로운 시대가 열립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여호수아를 통해 이어지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히브리어입니다. 그런데 이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음역하면 ‘예수’가 됩니다. 즉 여호수아와 예수는 똑같은 이름입니다. 하나님이 모세 다음에 이 여호수아를 준비시키셨습니다. 여호수아는 현실에서 믿음의 성취를 경험합니다. 모세가 율법의 사람이라면, 여호수아는 약속의 사람입니다. 모세가 행위를 대표하는 인물이라면, 여호수아는 믿음의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여호수아는 다가오실 예수님의 전초적인 표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놀랍지 않습니까? 여기서 작은 이야기가 큰 이야기로 바뀝니다. 미시담론적인 한 사건이 거대담론으로 바뀝니다. 한 사건 속에 위대한 하나님의 섭리가 들어 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모세야, 내가 네게 율법을 줬는데, 율법이 인간을 구원할 수는 없다. 율법은 바로 구원의 자리, 약속의 땅 앞까지 오게 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믿음이 필요하다. 예수를 믿는 믿음, 하나님을 믿는 믿음,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그 믿음으로 구원의 자리, 생명의 자리에 들어오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대림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대림절에서 ‘대(待)’는 기다릴 대, ‘림(臨)’은 임하실 림입니다. 즉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가 대림절입니다. 구약의 백성들은 오실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그것의 성취가 성탄입니다. 신약 시대를 사는 우리는 이미 오신 메시아를 축하하며, 다시 오실 재림의 주를 기다립니다.
우리는 모세 이후의 시대를 살아갑니다. 모세가 보지 못한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모세가 경험하지 못한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목격하고, 이미 가나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약속의 증거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이미 우리가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독일어 중에 Eile mit Weile 이란 말이 있습니다. Eile는 서두르란 뜻입니다. mit은 ‘함께’라는 뜻이며, Weile는 시간, 여유라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slow and stay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즉 ‘여유를 갖되 서두르라’는 말입니다. 침착히 서두르라는 것입니다. 여유가 없이 서두르면 조급함이 되지만, 여유를 갖고 서두르면 준비와 부지런한 삶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다림은 모세처럼 초조하지 않습니다. 조급하지도 않습니다. 이미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를 통해서입니까? 예수님을 통해서, 여호수아를 통해서입니다.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구원과 죄 용서와 평안과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고, 약속의 성취인 주님 안에서 이 기쁨을 누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다리면서 축하합니다. 기다리면서 기뻐합니다. 기다리면서 감사합니다. 기다리면서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약속을 미리 경험하고 재림의 주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대림절을 맞이하면서 이 축복을 누려야 합니다.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이지.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주신 모든 보화가 들어있지.’라고 생각하면서, 우리의 남은 생을 감사와 기쁨으로 누리며 예수님 안에서 발견되는 모든 지혜와 보화를 우리 삶에 간직하면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이 모든 축복을 항상 누리면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017년 12월 3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조급함의 영, 기다림의 영”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38장, 93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민 20:10-13 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생각하기

성경에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어 있습니다. 태어나고 자라고, 사랑하고 결혼하고, 죽음에 이르는 작은 이야기(미시)들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인간과 더불어 역사하시는 큰 이야기(거시)가 공존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아주 작은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그 모습 속에 모세의 조급함과 하나님의 기다림이 대비되어 있습니다.

 

설교의 요약

모세는 자기 생각을 성취하려고 시도했던 조급한 인물이었습니다. 광야 학교에 무려 40년의 세월을 흘려보내고 나서야 출애굽의 시작을 맛 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꿈은 곧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그리고 이삭과 야곱에게 반복한 약속,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가나안 땅을 약속의 땅으로 줄 것이라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것을 위해 애굽에서 탈출시켰고, 오늘 본문은 바로 그 목적지인 가나안 앞에서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모세는 황당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모세야 너는 내가 약속한 땅, 가나안에는 들어갈 수 없다!’(신1:32) 믿음 없는 이스라엘의 모습에 대해 모세에게도 책임을 물으시기 때문입니다(민20:12). 지도자들이 공동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모세가 한 말과, 후대의 시편 기자가 한 말이 서로 비교됩니다. 모세는 신명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 때문에 자기도 덤터기를 썼다고 그 핑계를 돌립니다(신1:37). 반면, 시편에서 이스라엘 역사를 해석하는 다윗은 이렇게 결론을 짓습니다. ‘이는 그들이 그의 뜻을 거역함으로 말미암아 모세가 그의 입술로 망령되이(rash words) 말하였음이라(시 106:33)’

모세는 왜 거룩함을 드러내지 못했을까요? 반석을 두 번 내리쳤기 때문일까요? 단순히 그것만이 원인이라면 우리에게 죄가 되지 않을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른 무엇은 없을까요? 반석을 내리치기 전 모세가 한 말이 눈에 들어옵니다. “…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나님의 행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행한 행위로 바꾸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기적을 행한 것처럼 말이지요. 모세는 그 동안 중보자 역할을 잘 감당해 왔습니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자기가 하나님인 것처럼 착각을 했습니다. 물 때문에 불평하는 백성들의 모습에 온유한 사람 모세도 혈기를 드러냈습니다. 그래서 ‘사랑의 물’을 ‘증오의 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교만이 모세를 순식간에 무너뜨렸습니다. 모세는 거시적인 구속사적 사명에 대해 실수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족한 모세를 크게 세우셔서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를 누구도 훼손할 수는 없습니다.

그 후, 모세는 하나님께 다시 간청하지만 하나님은 모세의 간청을 거부하십니다(신3:25). ‘네 시대는 끝났다. 그리고 이제 새로운 약속이 바로 여호수아를 통해 시작될 것이다.‘ ‘여호수아’라는 히브리어는 헬라어로 ‘예수’입니다. 모세는 율법의 사람이고, 여호수아는 언약의 사람입니다. 이제 여호수아는 오실 예수님의 표상입니다. 작은 이야기(미시)가 큰 이야기(거시)로 바뀝니다.

우리는 대림절(기다릴 대, 임하실 림) 첫 번째 주를 지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세 이후를 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모세가 보지 못한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기다림은 모세처럼 조급하지 않습니다. 이미 예수님을 통해 하늘의 생명과 기쁨을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기다림을 감사함과 기쁨으로 기다리는 하나님의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나누기

1. 조급함으로 일을 그르쳤던 경험이 있나요?(가족에게, 직장동료에게, 구역식구에게)

2.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보며 기다림으로 결국 하나님께서 이루신 은혜가 있었나요?

3. 결국 교만을 이길 수 있어야 기다릴 수 있습니다. 나의 강점이 나의 약점입니다. 나의 강점이자 약점인 ‘교만한 부분’은 무엇인가요?

 

마무리 기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예수님께서 믿음의 표상을 가르치셨습니다. 이제 기다림의 기쁨 속에서 우리 주 예수님을 기다리는 감사의 삶을 살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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