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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친구, 나쁜 친구 – 욥의 세 친구들 –

욥기 2: 11 ~ 13

김지철 목사

2016.02.14

욥기는 고난 속에서 나타나는 우정 이야기입니다.

‘고난’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욥’입니다. 그는 엄청난 고난을 겪은 인물입니다. 그는 본래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돈과 재물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아들딸들도 다 잃고, 믿었던 아내마저 자신을 욕하고 떠나 버렸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온 몸에 종기가 나 기왓장으로 몸을 긁어내야 했습니다. 한마디로 욥기는 한 인간의 고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도대체 고난이 왜 다가오는 것일까. 고난이 다가왔을 때 하나님은 정말 계시는가. 하나님이 계시다면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 이 고난을 주시는 하나님은 옳은 분인가, 선하다고 해야 하는가.’ 우리는 욥기를 읽을 때마다 이러한 질문을 하게 됩니다. 소위 ‘신정론’의 물음들입니다.
그런데 욥기를 또 다른 측면에서 들여다보면, 고난 속에서 나타나는 인간과 인간의 이야기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욥기는 욥과 친구들의 대화록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논쟁적인 대화입니다. 이 대화 가운데 욥이나 다른 세 친구들은 가장 먼저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돌아보게 됩니다. 사실 처음에는 친구들이 욥을 위로하려고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점점 논쟁으로 바뀌게 되고, 결국 마지막에는 서로를 심하게 공격하고 비난하게 됩니다.
고통 중에 있던 욥은 자신을 위로하려고 온 친구들의 이러한 모습을 보며 탄식합니다.

나의 친구는 나를 조롱하고 내 눈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니 (욥기 16:20)

하나님 앞에서도, 사람에게서도 출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 속에서 욥은 슬프고 외롭고 고통스럽습니다.

나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 (욥기 19:21)

욥은 반복해서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구나’ 하면서, 이제 그만 나에 대한 비난과 조롱을 멈추고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친구들에게 외치는 장면까지 등장합니다.
욥과 욥의 친구들은 고난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또 인간의 고난이 사람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는지 깊이 깨닫게 됩니다. 대화를 통해 이것을 해결해 보려고 하지만 한계에 부딪칩니다. 하지만 이 고난은 인간의 대화 속에서 위로를 받지 못한 욥에게 하나님을 만나는 기회를 가져다줍니다. 그리고 욥은 하나님 앞에서 고난의 신비를 깨닫게 됩니다. 고난의 신비를 깨닫게 되자 고난은 더 이상 욥을 억누르지 못합니다. 고난의 문제로부터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친구가 된다는 것은 혼자만의 일이 아닙니다.

1월 1일부터 ‘신뢰’라는 주제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오늘은 우정에 대해서, 다음 주는 자기 신뢰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우정이란 무엇일까요? 다른 사람과 친구를 맺는 것이 우정입니다. 그렇다면 자기 신뢰란 무엇일까요? 나 자신과 친구를 맺는 것이 자기 신뢰입니다.
우정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친구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친구 예찬론을 펼칩니다. 하지만 배반으로 깨진 우정 때문에 슬퍼하는 사람의 이야기도 곳곳에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묻기도 합니다. “나는 친구가 없어서 슬픕니다. 내게 친구가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친구가 된다는 것은 혼자서 결정하는 일이 아닙니다. 나는 친구가 되고 싶어도 상대방이 친구 되기를 거절하면 친구 관계는 형성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친구가 된다’는 것은 쌍방적인 것이며 시간이 필요한 일입니다.
남녀가 사랑하게 되면 순식간에 사랑에 빠집니다. 그러나 친구가 된다는 것은 때로는 기다리기도 하고 때로는 참기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친구가 됩니다.
‘우정’이라는 주제에 대해 말을 할 때면 자주 언급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생 땍쥐베리의 『어린왕자』에 나타나는 이야기입니다. 친구가 되고 싶은 어린왕자가 여우에게 묻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대화입니다. 이 대화는 오늘 우리에게도 많은 것을 시사해 줍니다.
먼저 어린왕자가 여우에게 말합니다. “이리 와서 나하고 놀자. 나 지금 무척 슬퍼.” 그러자 여우가 대답합니다. “난 너랑 함께 놀 수 없어. 나는 길들여져 있지 않거든.” “길들인다는 게 대체 뭐야?” “요즘엔 많이 잊혀진 거야.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야. 하지만 네가 나를 길들이면 우리는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가 될 거야. 나한테 너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사람이 되고 너한테 나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여우가 될 테니까.” 그러면서 여우는 왜 사람들이 친구를 못 사귀는지, 왜 친구가 없는지를 어린왕자에게 설명합니다. “사람들은 이제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않아.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을 가게에서 산다고. 그러나 친구를 파는 가게는 없어. 그래서 사람들은 이제 친구가 없게 된 거야. 너도 만일 친구를 가지고 싶다면 나를 길들여야 해.” 그러자 어린왕자가 다시 묻습니다. “어떻게 하면 되지?” 여우의 대답입니다. “인내심이 필요해. 먼저 내게서 좀 떨어져 풀밭에 앉아 있어 봐. 이렇게 내가 너를 곁눈질로 쳐다볼 거야. 넌 아무 말도 하지마. 말은 오해의 원인이거든. 하지만 하루하루가 지날 때마다 너는 조금씩 내게 가까이 다가앉을 수 있게 될 거야.”
누군가와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인내심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친구가 되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사려 깊은 태도와 접근이 있어야 믿음과 신뢰가 커지고, 충분한 시간을 들여야 우정이 깊이 있게 싹터 오르고 자라날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여우는 한 가지를 더 추가합니다. “매일 같은 시각에 오는 게 더 좋을 거야. 가령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나는 세 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네 시가 다가올수록 나는 더욱 행복해지겠지? 네 시가 되면 나는 가슴이 두근거리고 안절부절 못 할 거야. 그럼 행복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닫게 되겠지. 그러나 네가 아무 때나 오면 몇 시에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하는지 모르잖아. … 그래서 의식이 필요한 거야.”
믿음이 쌓이려면 서로가 약속을 하고, 약속에 대한 배려와 서로에 대한 존중이 있어야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친구를 함부로 대하거나 배려하지 않는다면 그 관계는 어느 순간 와해될 수밖에 없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욥에게는 좋은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좋은 친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특히 고난 속에서 친구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합니다. 잘나갈 때 친구가 되는 것은 우리가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어려울 때, 힘들 때 친구가 되는 것은 친구 됨의 비결이 있지 않으면 어려운 일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좋은 친구의 모습을 보입니다. 첫 번째, 욥이 고난 속에 있을 때 찾아왔습니다.

그 때에 욥의 친구 세 사람이 이 모든 재앙이 그에게 내렸다 함을 듣고 각각 자기 지역에서부터 이르렀으니 … (욥기 2:11)

어떤 친구가 좋은 친구일까요? 힘들고 마음이 무거울 때, 옆에 있는 사람이 좋은 친구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보통 세상의 친구들은 무언가 가졌을 때, 잘나갈 때, 명예와 권력을 누리고 있을 때 가까이 다가옵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사라질 때 그들도 함께 사라집니다. 나쁜 친구의 전형이 이런 것입니다. 잘나갈 때는 함께 있고 못 나갈 때는 사라져 버리는 친구. 그런 친구는 성경 속에서도 나쁜 친구입니다.
외경의 집회서 6장 10절 이하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또 어떤 친구는 너의 식탁에는 잘 와서 앉으나 네가 불행하게 되면 너를 버린다. 네가 잘살 때는 네 집을 자기 집처럼 여기고 네 하인들마저 마음대로 부리다가 네가 망하게 되면 등을 돌려 네 앞에서 자취를 감춰 버린다. (집회서 6:10∼12)

내가 고통받고 있을 때, 어려울 때 떠나가는 친구는 좋은 친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이것보다 더 문제 있는 친구가 등장합니다. 예수님이 친구로 받아들여 주셨지만 오히려 예수님을 고난 속으로 몰아간 친구, 그것도 은돈 몇 개를 위해 스승을 배반한 가룟 유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그를 마지막까지 친구로 부르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그들이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마태복음 26:50)

‘친구’라고 부르는 예수님에게 가룟 유다가 다가가 입을 맞춥니다. 그러자 군병들은 누가 예수님인지 알게 되어 예수님을 체포합니다. 위로가 되어야 하는 친구가 오히려 친구를 고난 속으로 몰아간 것입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친구를 독점하려고 하면 나쁜 친구가 됩니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친구를 조종하려고 하면 나쁜 친구가 됩니다. 왜 그럴까요? 서로에 대한 배려가 사라지고 서로에 대한 존중이 깨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욥의 세 친구는 아주 훌륭한 친굽니다. 친구가 고난 속에 있을 때 찾아왔습니다.
두 번째, 그들은 따뜻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욥을 위로하고 싶었습니다. 욥의 자리에 참여하고 싶었습니다.

… 곧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라 그들이 욥을 위문하고 위로하려 하여 서로 약속하고 오더니 (욥기 2:11)

여기 보면 ‘위문하다(sympathize)’는 말과 ‘위로하다(comfort)’라는 말이 함께 사용되고 있습니다. 위문하고 위로하려고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본래 그렇게 강한 존재가 아닙니다. 아프고 슬프고 외로우면 누군가 옆에 있기를 원하게 됩니다. 욥도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찾아온 친구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세 번째, 욥의 친구들은 정서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고통받는 사람의 슬픔과 아픔의 자리에 참여하는 친구들이었습니다.

눈을 들어 멀리 보매 그가 욥인 줄 알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일제히 소리 질러 울며 각각 자기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욥기 2:12)

친구들은 욥의 몰골이 상한 것을 보며 매우 놀랐습니다. 그래서 소리를 지르며 함께 붙들고 울었습니다. 자신들의 겉옷을 찢었습니다. 슬픔이 극대화된 태도였습니다. 그리고 재를 하늘에 날리며 재를 머리에 뒤집어썼습니다. 욥이 당한 고난의 자리에 감정적으로 공감하면서 참여한 것입니다. 이런 친구들이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아주 복된 친구들입니다. 그런데 이 친구들의 더욱 뛰어난 점이 계속 기록됩니다.
네 번째, 그들은 욥의 고난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침묵 가운데 함께 있었습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밤낮 칠 일 동안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고통이 심함을 보므로 그에게 한마디도 말하는 자가 없었더라 (욥 2:13)

욥의 고통이 너무 심하기 때문에 어떤 위로의 말도 나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저 옆에 있기만 했습니다. 무려 7일 동안 함께 있으면서 침묵을 지켰습니다.
친구와 함께 있으면서 재미있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어도 어색하거나 불편하지 않은 친구, 불안해지지 않는 친구가 있습니다. 친구는 앞에서 책을 보고 나는 음악을 들어도 친구는 친구대로 좋고 나는 나대로 좋은 친구 말입니다. 이것이 멋진 친구 관계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7일 동안 욥과 함께 있으면서 그저 가만히 쳐다만 보고 있었습니다. 고통 속에 있을 때 이렇게 함께해 주는 친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욥에게는 축복이었습니다.
나 혼자만 남겨졌을 때, 시궁창 같은 절망에 빠져 있을 때, 7일 동안 곁을 지켜주는 것이 과연 쉬운 일이겠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많은 말을 해서가 아니라 그저 나의 아픔을 공감해 주는 친구가 있다는 것만으로 좋은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욥은 최고의 친구들을 갖고 있다고 말해도 될 것 같습니다.

사람의 우정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욥기를 계속 읽다 보면 이렇게 좋은 친구들이어도 마지막에는 한계가 나타납니다. 그들 사이에 엄청난 논쟁이 펼쳐지게 된 것입니다. 결국 무슨 이야기입니까? 인간의 위로는 궁극적인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고난은 인간의 위로를 필요로 합니다. 누구의 고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고난의 마지막 순간은 결국 혼자 져야 합니다. 부모도 내 고난을 질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나 남편도 내 고난을 지고 갈 수 없습니다. 내 고난을 내 자식들이 지고 갈 수 없습니다. 나의 고난은 나의 것입니다. 그렇게 홀로 자신의 고난을 지고 가다 보면, 마지막에 만나게 되는 분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입니다.
욥도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을 만나 고난의 신비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욥이 당한 고난보다 더 큰 하나님께서 하늘의 위로를 주십니다. 그러면서 고난에 대한 욥의 대답을 우리가 발견하게 됩니다. 욥의 목표는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 그래서 고난의 신비를 깨닫게 되는 것, 그래서 고난보다 더 큰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진정한 친구가 누굴까요? 우리가 고난을 받을 때 마지막까지 우리를 붙잡아 주는 친구는 누굴까요?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라마저 잃어버리고 바벨론에서 종살이를 했습니다. 그들의 삶이 이처럼 무너졌을 때,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서 가르쳐 주신 것은 ‘너희가 내 친구’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내 친구였던 것처럼 너희가 친구의 자손이기 때문에 내가 너희를 축복해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이사야 41:8)

하나님은 하나님의 벗 아브라함만을 기억하시는 게 아니라 그의 자손인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친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엄청난 용기와 확신을 주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사야 41:10)

하나님께서 ‘참으로’ ‘참으로’라고 말씀하시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로하십니다. “내가 너를 붙들고 내가 너를 도와준다. 내가 네 하나님이 되고 내가 너를 굳세게 할 것이니 이 고난의 자리에 머물지 말고 일어나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도 우리의 친구가 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뿐인 아들을 십자가에 내놓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바로 우리의 친구가 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요한복음 15:13)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어놓으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느껴지십니까?

하나님이 내 친구 되심을 기억합시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떤 친구를 갖고 있습니까? 아니 나는 어떤 친구입니까? 가끔씩 내게는 친구가 없다고 좌절합니까?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이 내 친구가 되셨습니다. 여기서부터 모든 것을 시작해야 합니다.
내가 나에게 친구가 되어야 하고, 그 마음으로 내 이웃에게 친구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인생의 지혜로운 비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마음을 우리가 믿음으로 우리의 형제자매와 친구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믿음과 신뢰를 보내 주는 것입니다.
이곳에 모인 모든 성도님들이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지, 내가 친구들에게 어떤 친구가 되어야 하는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바르게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더불어 주님의 사랑을 보여 주는 욥의 친구들의 축복과 한계성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고난 속에서 친구가 되어줄 수 있는 주님의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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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2: 11 ~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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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에 욥의 친구 세 사람이 이 모든 재앙이 그에게 내렸다 함을 듣고 각각 자기 지역에서부터 이르렀으니 곧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라 그들이 욥을 위문하고 위로하려 하여 서로 약속하고 오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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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들어 멀리 보매 그가 욥인 줄 알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일제히 소리 질러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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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낮 칠 일 동안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고통이 심함을 보므로 그에게 한마디도 말하는 자가 없었더라

욥기는 고난 속에서 나타나는 우정 이야기입니다.

‘고난’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욥’입니다. 그는 엄청난 고난을 겪은 인물입니다. 그는 본래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돈과 재물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아들딸들도 다 잃고, 믿었던 아내마저 자신을 욕하고 떠나 버렸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온 몸에 종기가 나 기왓장으로 몸을 긁어내야 했습니다. 한마디로 욥기는 한 인간의 고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도대체 고난이 왜 다가오는 것일까. 고난이 다가왔을 때 하나님은 정말 계시는가. 하나님이 계시다면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 이 고난을 주시는 하나님은 옳은 분인가, 선하다고 해야 하는가.’ 우리는 욥기를 읽을 때마다 이러한 질문을 하게 됩니다. 소위 ‘신정론’의 물음들입니다.
그런데 욥기를 또 다른 측면에서 들여다보면, 고난 속에서 나타나는 인간과 인간의 이야기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욥기는 욥과 친구들의 대화록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논쟁적인 대화입니다. 이 대화 가운데 욥이나 다른 세 친구들은 가장 먼저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돌아보게 됩니다. 사실 처음에는 친구들이 욥을 위로하려고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점점 논쟁으로 바뀌게 되고, 결국 마지막에는 서로를 심하게 공격하고 비난하게 됩니다.
고통 중에 있던 욥은 자신을 위로하려고 온 친구들의 이러한 모습을 보며 탄식합니다.

나의 친구는 나를 조롱하고 내 눈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니 (욥기 16:20)

하나님 앞에서도, 사람에게서도 출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 속에서 욥은 슬프고 외롭고 고통스럽습니다.

나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 (욥기 19:21)

욥은 반복해서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구나’ 하면서, 이제 그만 나에 대한 비난과 조롱을 멈추고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친구들에게 외치는 장면까지 등장합니다.
욥과 욥의 친구들은 고난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또 인간의 고난이 사람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는지 깊이 깨닫게 됩니다. 대화를 통해 이것을 해결해 보려고 하지만 한계에 부딪칩니다. 하지만 이 고난은 인간의 대화 속에서 위로를 받지 못한 욥에게 하나님을 만나는 기회를 가져다줍니다. 그리고 욥은 하나님 앞에서 고난의 신비를 깨닫게 됩니다. 고난의 신비를 깨닫게 되자 고난은 더 이상 욥을 억누르지 못합니다. 고난의 문제로부터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친구가 된다는 것은 혼자만의 일이 아닙니다.

1월 1일부터 ‘신뢰’라는 주제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오늘은 우정에 대해서, 다음 주는 자기 신뢰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우정이란 무엇일까요? 다른 사람과 친구를 맺는 것이 우정입니다. 그렇다면 자기 신뢰란 무엇일까요? 나 자신과 친구를 맺는 것이 자기 신뢰입니다.
우정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친구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친구 예찬론을 펼칩니다. 하지만 배반으로 깨진 우정 때문에 슬퍼하는 사람의 이야기도 곳곳에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묻기도 합니다. “나는 친구가 없어서 슬픕니다. 내게 친구가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친구가 된다는 것은 혼자서 결정하는 일이 아닙니다. 나는 친구가 되고 싶어도 상대방이 친구 되기를 거절하면 친구 관계는 형성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친구가 된다’는 것은 쌍방적인 것이며 시간이 필요한 일입니다.
남녀가 사랑하게 되면 순식간에 사랑에 빠집니다. 그러나 친구가 된다는 것은 때로는 기다리기도 하고 때로는 참기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친구가 됩니다.
‘우정’이라는 주제에 대해 말을 할 때면 자주 언급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생 땍쥐베리의 『어린왕자』에 나타나는 이야기입니다. 친구가 되고 싶은 어린왕자가 여우에게 묻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대화입니다. 이 대화는 오늘 우리에게도 많은 것을 시사해 줍니다.
먼저 어린왕자가 여우에게 말합니다. “이리 와서 나하고 놀자. 나 지금 무척 슬퍼.” 그러자 여우가 대답합니다. “난 너랑 함께 놀 수 없어. 나는 길들여져 있지 않거든.” “길들인다는 게 대체 뭐야?” “요즘엔 많이 잊혀진 거야.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야. 하지만 네가 나를 길들이면 우리는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가 될 거야. 나한테 너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사람이 되고 너한테 나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여우가 될 테니까.” 그러면서 여우는 왜 사람들이 친구를 못 사귀는지, 왜 친구가 없는지를 어린왕자에게 설명합니다. “사람들은 이제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않아.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을 가게에서 산다고. 그러나 친구를 파는 가게는 없어. 그래서 사람들은 이제 친구가 없게 된 거야. 너도 만일 친구를 가지고 싶다면 나를 길들여야 해.” 그러자 어린왕자가 다시 묻습니다. “어떻게 하면 되지?” 여우의 대답입니다. “인내심이 필요해. 먼저 내게서 좀 떨어져 풀밭에 앉아 있어 봐. 이렇게 내가 너를 곁눈질로 쳐다볼 거야. 넌 아무 말도 하지마. 말은 오해의 원인이거든. 하지만 하루하루가 지날 때마다 너는 조금씩 내게 가까이 다가앉을 수 있게 될 거야.”
누군가와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인내심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친구가 되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사려 깊은 태도와 접근이 있어야 믿음과 신뢰가 커지고, 충분한 시간을 들여야 우정이 깊이 있게 싹터 오르고 자라날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여우는 한 가지를 더 추가합니다. “매일 같은 시각에 오는 게 더 좋을 거야. 가령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나는 세 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네 시가 다가올수록 나는 더욱 행복해지겠지? 네 시가 되면 나는 가슴이 두근거리고 안절부절 못 할 거야. 그럼 행복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닫게 되겠지. 그러나 네가 아무 때나 오면 몇 시에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하는지 모르잖아. … 그래서 의식이 필요한 거야.”
믿음이 쌓이려면 서로가 약속을 하고, 약속에 대한 배려와 서로에 대한 존중이 있어야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친구를 함부로 대하거나 배려하지 않는다면 그 관계는 어느 순간 와해될 수밖에 없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욥에게는 좋은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좋은 친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특히 고난 속에서 친구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합니다. 잘나갈 때 친구가 되는 것은 우리가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어려울 때, 힘들 때 친구가 되는 것은 친구 됨의 비결이 있지 않으면 어려운 일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좋은 친구의 모습을 보입니다. 첫 번째, 욥이 고난 속에 있을 때 찾아왔습니다.

그 때에 욥의 친구 세 사람이 이 모든 재앙이 그에게 내렸다 함을 듣고 각각 자기 지역에서부터 이르렀으니 … (욥기 2:11)

어떤 친구가 좋은 친구일까요? 힘들고 마음이 무거울 때, 옆에 있는 사람이 좋은 친구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보통 세상의 친구들은 무언가 가졌을 때, 잘나갈 때, 명예와 권력을 누리고 있을 때 가까이 다가옵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사라질 때 그들도 함께 사라집니다. 나쁜 친구의 전형이 이런 것입니다. 잘나갈 때는 함께 있고 못 나갈 때는 사라져 버리는 친구. 그런 친구는 성경 속에서도 나쁜 친구입니다.
외경의 집회서 6장 10절 이하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또 어떤 친구는 너의 식탁에는 잘 와서 앉으나 네가 불행하게 되면 너를 버린다. 네가 잘살 때는 네 집을 자기 집처럼 여기고 네 하인들마저 마음대로 부리다가 네가 망하게 되면 등을 돌려 네 앞에서 자취를 감춰 버린다. (집회서 6:10∼12)

내가 고통받고 있을 때, 어려울 때 떠나가는 친구는 좋은 친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이것보다 더 문제 있는 친구가 등장합니다. 예수님이 친구로 받아들여 주셨지만 오히려 예수님을 고난 속으로 몰아간 친구, 그것도 은돈 몇 개를 위해 스승을 배반한 가룟 유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그를 마지막까지 친구로 부르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그들이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마태복음 26:50)

‘친구’라고 부르는 예수님에게 가룟 유다가 다가가 입을 맞춥니다. 그러자 군병들은 누가 예수님인지 알게 되어 예수님을 체포합니다. 위로가 되어야 하는 친구가 오히려 친구를 고난 속으로 몰아간 것입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친구를 독점하려고 하면 나쁜 친구가 됩니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친구를 조종하려고 하면 나쁜 친구가 됩니다. 왜 그럴까요? 서로에 대한 배려가 사라지고 서로에 대한 존중이 깨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욥의 세 친구는 아주 훌륭한 친굽니다. 친구가 고난 속에 있을 때 찾아왔습니다.
두 번째, 그들은 따뜻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욥을 위로하고 싶었습니다. 욥의 자리에 참여하고 싶었습니다.

… 곧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라 그들이 욥을 위문하고 위로하려 하여 서로 약속하고 오더니 (욥기 2:11)

여기 보면 ‘위문하다(sympathize)’는 말과 ‘위로하다(comfort)’라는 말이 함께 사용되고 있습니다. 위문하고 위로하려고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본래 그렇게 강한 존재가 아닙니다. 아프고 슬프고 외로우면 누군가 옆에 있기를 원하게 됩니다. 욥도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찾아온 친구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세 번째, 욥의 친구들은 정서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고통받는 사람의 슬픔과 아픔의 자리에 참여하는 친구들이었습니다.

눈을 들어 멀리 보매 그가 욥인 줄 알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일제히 소리 질러 울며 각각 자기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욥기 2:12)

친구들은 욥의 몰골이 상한 것을 보며 매우 놀랐습니다. 그래서 소리를 지르며 함께 붙들고 울었습니다. 자신들의 겉옷을 찢었습니다. 슬픔이 극대화된 태도였습니다. 그리고 재를 하늘에 날리며 재를 머리에 뒤집어썼습니다. 욥이 당한 고난의 자리에 감정적으로 공감하면서 참여한 것입니다. 이런 친구들이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아주 복된 친구들입니다. 그런데 이 친구들의 더욱 뛰어난 점이 계속 기록됩니다.
네 번째, 그들은 욥의 고난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침묵 가운데 함께 있었습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밤낮 칠 일 동안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고통이 심함을 보므로 그에게 한마디도 말하는 자가 없었더라 (욥 2:13)

욥의 고통이 너무 심하기 때문에 어떤 위로의 말도 나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저 옆에 있기만 했습니다. 무려 7일 동안 함께 있으면서 침묵을 지켰습니다.
친구와 함께 있으면서 재미있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어도 어색하거나 불편하지 않은 친구, 불안해지지 않는 친구가 있습니다. 친구는 앞에서 책을 보고 나는 음악을 들어도 친구는 친구대로 좋고 나는 나대로 좋은 친구 말입니다. 이것이 멋진 친구 관계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7일 동안 욥과 함께 있으면서 그저 가만히 쳐다만 보고 있었습니다. 고통 속에 있을 때 이렇게 함께해 주는 친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욥에게는 축복이었습니다.
나 혼자만 남겨졌을 때, 시궁창 같은 절망에 빠져 있을 때, 7일 동안 곁을 지켜주는 것이 과연 쉬운 일이겠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많은 말을 해서가 아니라 그저 나의 아픔을 공감해 주는 친구가 있다는 것만으로 좋은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욥은 최고의 친구들을 갖고 있다고 말해도 될 것 같습니다.

사람의 우정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욥기를 계속 읽다 보면 이렇게 좋은 친구들이어도 마지막에는 한계가 나타납니다. 그들 사이에 엄청난 논쟁이 펼쳐지게 된 것입니다. 결국 무슨 이야기입니까? 인간의 위로는 궁극적인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고난은 인간의 위로를 필요로 합니다. 누구의 고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고난의 마지막 순간은 결국 혼자 져야 합니다. 부모도 내 고난을 질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나 남편도 내 고난을 지고 갈 수 없습니다. 내 고난을 내 자식들이 지고 갈 수 없습니다. 나의 고난은 나의 것입니다. 그렇게 홀로 자신의 고난을 지고 가다 보면, 마지막에 만나게 되는 분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입니다.
욥도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을 만나 고난의 신비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욥이 당한 고난보다 더 큰 하나님께서 하늘의 위로를 주십니다. 그러면서 고난에 대한 욥의 대답을 우리가 발견하게 됩니다. 욥의 목표는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 그래서 고난의 신비를 깨닫게 되는 것, 그래서 고난보다 더 큰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진정한 친구가 누굴까요? 우리가 고난을 받을 때 마지막까지 우리를 붙잡아 주는 친구는 누굴까요?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라마저 잃어버리고 바벨론에서 종살이를 했습니다. 그들의 삶이 이처럼 무너졌을 때,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서 가르쳐 주신 것은 ‘너희가 내 친구’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내 친구였던 것처럼 너희가 친구의 자손이기 때문에 내가 너희를 축복해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이사야 41:8)

하나님은 하나님의 벗 아브라함만을 기억하시는 게 아니라 그의 자손인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친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엄청난 용기와 확신을 주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사야 41:10)

하나님께서 ‘참으로’ ‘참으로’라고 말씀하시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로하십니다. “내가 너를 붙들고 내가 너를 도와준다. 내가 네 하나님이 되고 내가 너를 굳세게 할 것이니 이 고난의 자리에 머물지 말고 일어나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도 우리의 친구가 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뿐인 아들을 십자가에 내놓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바로 우리의 친구가 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요한복음 15:13)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어놓으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느껴지십니까?

하나님이 내 친구 되심을 기억합시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떤 친구를 갖고 있습니까? 아니 나는 어떤 친구입니까? 가끔씩 내게는 친구가 없다고 좌절합니까?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이 내 친구가 되셨습니다. 여기서부터 모든 것을 시작해야 합니다.
내가 나에게 친구가 되어야 하고, 그 마음으로 내 이웃에게 친구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인생의 지혜로운 비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마음을 우리가 믿음으로 우리의 형제자매와 친구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믿음과 신뢰를 보내 주는 것입니다.
이곳에 모인 모든 성도님들이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지, 내가 친구들에게 어떤 친구가 되어야 하는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바르게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더불어 주님의 사랑을 보여 주는 욥의 친구들의 축복과 한계성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고난 속에서 친구가 되어줄 수 있는 주님의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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