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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요즘 우리나라 여기저기에서 인문학의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붐이 대학교 인문학부에서 일어나기보다는 오히려 업적과 생산성을 강조하는 경제, 기업, 경영분야에서 아주 강력하게 불고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외형적인 업적이 중요한다고 역설해왔습니다. 그래서 기업의 매출과 총수익이 얼마인가를 보고 그것의 고저에 따라서 좋은 기업인가 아닌가를 가늠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인간에 대한 관심을 갖고 경영을 하려는 관심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업의 CEO들이 인문학을 배우기를 열망합니다. 그동안 실용주의적인 틀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기회를 만들려고 하는 몸부림이라고도 할 수가 있습니다. ‘인간이 도대체 누구인가?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가?’ 여기에서 기업이 창의적인 발상을 하고, 제품을 만들 때에도 인간을 위한 제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스티브 잡스는 자기 회사의 제품을 만들면서 우리는 기술뿐만이 아니라 인문학을 결합하려고 노력했다는 놀라운 말을 했습니다. 그것은 제품에 단순한 기술만을 적용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작품으로 하나의 예술적 가치를 부여하겠다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인문학은 원천으로 돌아가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본래 인문학이란 문학, 역사, 철학, 종교를 중심으로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인문학은 지성과 사고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삶의 이야기입니다. 그 목표는 인간의 본질을 설명하는 저작과 인간에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 인문학의 표제어가 있습니다. 라틴어로 아드폰테스(Ad Fontes)라는 말입니다. Ad는 ‘~향하여’라는 뜻으로 영어로 말하면 to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Fontes는 the sources, 즉 ‘자료들’, ‘원천들’, ‘근본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세인문주의자들은 바로 이러한 고전적인 책, 고전적인 인물로 돌아가자는 뜻에서 Ad Fontes를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종교 개혁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당시 로마 가톨릭의 교리주의, 교권주의를 벗어나 다시금 신앙의 원천인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을 펼쳤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이 늘 제시했던 표어가 있다면 ‘Sola Script-xura’, 즉 ‘오직 성경으로만’이라는 표제어였습니다.
시편 42편 1절을 보면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라틴어 번역 성경인 불가타는 시냇물을 Ad Fontes, 즉 ‘물의 원천을 향하여’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갈급해하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이 참 생명의 원천인 하나님의 말씀을 향하여 달려가고자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모든 인문학은 신으로부터 출발하였습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날 당시, 위대한 두 명의 사상가가 있었습니다. 한 명은 인문주의자였던 에라스무스이고, 또 다른 한 명은 종교개혁자였던 마틴 루터였습니다. 둘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전제하면서 논쟁을 하기 시작합니다. 신앙적인 논쟁이었고 인문학적인 논쟁이었습니다. 그것은 자유의지론에 대한 논쟁, 즉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자유의 범위가 얼마나 넓은가에 대한 논쟁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우리의 신앙을 규정하고 있는 신학이란 모든 인문학의 기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의 모든 인문학자들에게는 신에 대한 개념이 있었습니다. 신에 대한 개념 없이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서구학문의 시작은 항상 신학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철학, 그리고 법학, 그리고 의학으로 이어졌습니다. 우리는 신학에서부터 모든 학문이 출발된 것을 역사를 통해서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최근에 김용규라는 학자가 신(神,) 곧 하나님에 대한 책을 하나 써냈습니다.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이라는 제목의 책입니다. 서구문명의 깊은 내면에는 신, 곧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가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이 책은 세상적인 사람들과 대화하기 위해서 ‘하나님’이라는 기독교적 언어를 ‘신’이라는 말로 바꿔 썼습니다. 이 책은 ‘신’이라는 개념이 서구문명사회에 어떤 역할을 했는가에 대해서 종교사적, 문명사적으로 접근합니다. 또한 서구의 문화와 문명이 신과 동행하는 문화였는지, 아니면 신에게 도전하고 신과 대결하는 문화였는지, 아니면 신의 부재를 주장하는 문화였는지에 따라서 흥망성쇠가 갈렸다는 사실도 지적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을 잃어버리면 우리는 자유를 빌미로 해서 방종의 역사를 만들어 나갑니다. 그리고 빛을 어둠으로 바꿔놓습니다. 또한 신을 인정하기는 하나 신을 무시하면 인간은 한없이 오만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쓸데없는 허세를 부리기 시작합니다. 반대로 기독교가 신을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교리주의적으로 이해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을 문자와 종교적 이데올로기로 바꿔놓으면, 그것은 인간에게 또 다른 엄청난 폐해를 가져다줍니다. 우리는 이것을 역사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일까요?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 인격적인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진정한 인문학의 핵심은 신학에 놓여있습니다. 기독교 신학이란 곧 인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기독교 신학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인간학입니다. 인간학이 곧 신학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신학은 하나님을 전제하는 최고의 인문학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우리는 최고의 인문학자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인간이 무엇 때문에 고통을 받고 무엇 때문에 아파하는지, 인간의 미래가 무엇인지, 인간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되는지를 가르쳐주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성경의 내용은 인간의 존재와 인간의 본질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정신적인 내면세계가 무엇인지, 인간의 고통이 무엇인지, 인간의 실존이 왜 흔들리고 있는지와 같은 물음들에 대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대답을 하고 있는지, 성경은 인간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인간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시인은 빠져나올 수 없는 깊은 곳에 빠져 있었습니다
시편 130편에 등장한 인간상은 인간이 어떤 존재이고 인간이 위기 속에서 어떻게 탈출할 수 있는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본문의 시인은 위기 속에 있습니다. 그는 절망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끄트머리에 와있습니다. 그는 1절에서 자신을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시편 130:1)
이 시인은 깊은 곳에 빠져 있습니다. 그가 머무는 곳은 육체가 아픈 곳입니다. 정신적인 고뇌가 그를 사로잡고 있는 곳입니다. 그냥 가만 앉아있거나 침묵할 수 없는 곳입니다. 인생을 포기하고 싶은 곳입니다. 미래에 대해 닫힌 세계 속에서 고통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얼마나 자주 위기에 처하는 존재인지, 얼마나 좌절하면서 신음해야하는 존재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 실존의 깊은 곳에 빠져 있습니다. 그곳은 어둠입니다. 그곳은 위협입니다. 그곳은 숨 쉴 수도 없는 절대 절명의 자리입니다. 그곳은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멀리 있는 자리입니다.
인간이란 폭풍우 치는 바다 한복판에 일엽편주와 같이 흔들리는 존재입니다. 시인은 인간이 아침안개와도 같이 잠깐 있다가 사라져가는 인생임을 알고 있습니다. 이런 인간이 갖고 있는 고통을 세상 사람들은 조금 다르게 표현합니다. “그것은 스트레스를 받은 거야.” “그것은 우울증에 걸린 거야.” “그것은 자기를 연민하는 거야.” “그것은 좌절하는 거야.” “그것은 고통의 시간이야.” 그러나 기독교는 그러한 인간의 모습을 더욱 깊이 있게 표현합니다. 기독교는 그것이 하나님과 떨어진 인간의 좌절, 하나님을 잃어버린 인간의 아픔과 고독,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의 모습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인간이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스스로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갖고 있는 문제는 나 스스로가 죄의 깊은 골짜기로 떨어진 문제이기 때문에 내가 아무리 죄를 씻으려고 해도, 내가 아무리 죄로부터 벗어나려고 해도 내게는 그것을 씻어낼 능력이 없습니다. 이 사실 앞에 그는 고통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시인은 도망가고 싶습니다. 그러나 도망갈 데라고는 없는 깊은 곳입니다. 더 내려갈 때가 없는 최저의 밑바닥에 그는 놓여있습니다.
깊은 곳은 하나님께서 가까이 계신 자리입니다
요나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말씀을 증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니느웨로 가기가 싫었습니다. 니느웨는 이스라엘을 못살게 구는 적대국이었습니다. 그는 그곳의 백성이 구원받는 것은 보기도 싫었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니느웨로 가지 않고 배를 타고 다시스로 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의 실존 전체를 뒤흔들었습니다. “네가 도대체 어디로 가려고 하느냐” 그래서 그 배가 파선하기까지 이르렀습니다. 거기 있었던 사람들은 이것이 누구의 잘못 때문인가를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요나가 지목됐습니다. 그들은 요나를 폭풍우가 이는 바다에 내던졌습니다. 그때 그는 큰 물고기 배속으로 빠져들어 갑니다. 요나는 그곳을 깊은 곳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요나 2:3)
여러분, 우리가 이 자리에 오게 것은 깊은 곳을 경험했기 때문이 아닙니까? 우리의 깊은 곳은 무엇일까요? 어떤 분에게는 질병이었을 것입니다. 어떤 분에게는 실패였을 것입니다. 어떤 분에게는 삶의 목표를 잃어버린 것이었을 것입니다. 어떤 분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는 아픔을 경험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어떤 분들에게는 자신의 실존이 너무나 불안해서 무엇인가를 붙잡지 않고는 인생을 살아갈 수 없었던 허무감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니까 이 시인은 그것이 자신의 죄악 때문인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속에 죄가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게 됐습니다. 사실은 망각하려고 했습니다. 도망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림자처럼 따라왔습니다. 마음에 평안이 없었습니다. 내 속의 양심이 계속해서 나를 향해 질문했습니다. 그러나 깊은 곳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을 때 시인은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소리치지 않고는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소리를 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이라고 생각했던 깊은 곳이 바로 하나님이 가까이 계신 자리였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 안에 있는 어둠, 자신 안에 있는 게으름, 자신 안에 있는 정욕, 자신 안에 있는 헛된 야망들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자신의 죄악 된 실존에 대해서 깨닫습니다.
내 죄의 깊이를 깨닫는 순간이 용서받는 순간입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시편 130:3)
내속에 있는 생각들을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어떨까요? 아마도 부끄러워서 어떻게든 가리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내 모든 죄악을 하나하나 다 살피시면 내가 감히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자신의 죄악의 깊이를 다시금 깨닫습니다. 전에는 실존의 깊이를 알았는데 이제는 죄악의 깊이까지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그는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죄용서의 은총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죄용서의 은총을 받게 되는 비결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내 인간적인 삶의 실존과 육체의 깊은 곳에서 곧 내 자신의 이 죄의 깊이를 깨닫는 순간이 바로 용서받는 순간인 것입니다. 그 순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순간입니다. 그 순간이 하나님께서 내 옆에 계신 것을 확인하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확인합니다.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시편 130:4)
죄가 자기를 절망감과 무력감으로 몰아넣고 그래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그 순간에 그가 확인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본문말씀은 내가 주님을 경외하므로 용서를 받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내가 내 죄의 깊이를 깨닫는 순간에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때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구나. 내가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았구나. 내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지 않았구나. 내가 인생을 내 마음대로 살았구나. 내가 불순종했구나, 내가 게을렀구나, 내가 하나님의 뜻을 가슴에 품지 않았구나.’ 하고 자신의 삶을 깨달으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배웁니다.
시인은 자신의 죄보다 더 큰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으면서 마음속에 확인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내가 이제는 하나님만을 바라리라. 내가 하나님 약속을 보리라.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리라.’ 그는 그렇게 마음속으로 결정하면서 이렇게 소리 높여 외칩니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시편 130:6)
시인은 밤새도록 잠 못 자고 보초를 서는 파수꾼이 새벽에 동트는 것을 기다리는 마음보다 더 열정적으로 하나님을 기다리고 그분 앞에 나아가겠다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으십시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의 깊은 곳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지금도 어둡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탄식하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그 깊은 곳에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께 토해내야 합니다. “하나님, 나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바닥을 치는 인생까지 내려왔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내 곁에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때 내 죄악이 보일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내 입에서 기도의 울부짖음이 하나님을 향해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제 곧 수난 주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골고다의 십자가에 달리도록 내버려두신 것은 이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다. “내 아들 예수보다 더 깊은 곳에 빠져있었던 사람이 있느냐? 내 아들 예수가 받은 십자가의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을 받은 사람이 있느냐? 내 아들 예수가 당한 절망과 좌절보다 더 큰 좌절을 겪은 사람들이 있느냐? 누구나 다 내 아들을 통해서 내게로 오라! 내 아들을 믿는 자를 내가 용서하겠고, 내 아들을 사랑하는 자를 내가 사랑할 것이며, 내 아들을 주로 고백하는 자를 내 자녀로 삼아줄 것이다!”
우리의 깊은 곳이 사실은 주님께서 찾아오시는 자리입니다. 깊은 곳에 빠지셨습니까? 주님께 마음을 열어놓고 부르짖으십시오. “주님, 내 죄를 용서하시고 나를 깊은 곳에서 건져 주옵소서!” 그때에 주님께서 우리를 만나주실 것입니다.
시편 130: 1 ~ 8
1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2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3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4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5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6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7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
8
그가 이스라엘을 그의 모든 죄악에서 속량하시리로다
인문학의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요즘 우리나라 여기저기에서 인문학의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붐이 대학교 인문학부에서 일어나기보다는 오히려 업적과 생산성을 강조하는 경제, 기업, 경영분야에서 아주 강력하게 불고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외형적인 업적이 중요한다고 역설해왔습니다. 그래서 기업의 매출과 총수익이 얼마인가를 보고 그것의 고저에 따라서 좋은 기업인가 아닌가를 가늠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인간에 대한 관심을 갖고 경영을 하려는 관심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업의 CEO들이 인문학을 배우기를 열망합니다. 그동안 실용주의적인 틀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기회를 만들려고 하는 몸부림이라고도 할 수가 있습니다. ‘인간이 도대체 누구인가?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가?’ 여기에서 기업이 창의적인 발상을 하고, 제품을 만들 때에도 인간을 위한 제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스티브 잡스는 자기 회사의 제품을 만들면서 우리는 기술뿐만이 아니라 인문학을 결합하려고 노력했다는 놀라운 말을 했습니다. 그것은 제품에 단순한 기술만을 적용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작품으로 하나의 예술적 가치를 부여하겠다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인문학은 원천으로 돌아가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본래 인문학이란 문학, 역사, 철학, 종교를 중심으로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인문학은 지성과 사고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삶의 이야기입니다. 그 목표는 인간의 본질을 설명하는 저작과 인간에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 인문학의 표제어가 있습니다. 라틴어로 아드폰테스(Ad Fontes)라는 말입니다. Ad는 ‘~향하여’라는 뜻으로 영어로 말하면 to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Fontes는 the sources, 즉 ‘자료들’, ‘원천들’, ‘근본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세인문주의자들은 바로 이러한 고전적인 책, 고전적인 인물로 돌아가자는 뜻에서 Ad Fontes를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종교 개혁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당시 로마 가톨릭의 교리주의, 교권주의를 벗어나 다시금 신앙의 원천인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을 펼쳤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이 늘 제시했던 표어가 있다면 ‘Sola Script-xura’, 즉 ‘오직 성경으로만’이라는 표제어였습니다.
시편 42편 1절을 보면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라틴어 번역 성경인 불가타는 시냇물을 Ad Fontes, 즉 ‘물의 원천을 향하여’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갈급해하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이 참 생명의 원천인 하나님의 말씀을 향하여 달려가고자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모든 인문학은 신으로부터 출발하였습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날 당시, 위대한 두 명의 사상가가 있었습니다. 한 명은 인문주의자였던 에라스무스이고, 또 다른 한 명은 종교개혁자였던 마틴 루터였습니다. 둘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전제하면서 논쟁을 하기 시작합니다. 신앙적인 논쟁이었고 인문학적인 논쟁이었습니다. 그것은 자유의지론에 대한 논쟁, 즉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자유의 범위가 얼마나 넓은가에 대한 논쟁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우리의 신앙을 규정하고 있는 신학이란 모든 인문학의 기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의 모든 인문학자들에게는 신에 대한 개념이 있었습니다. 신에 대한 개념 없이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서구학문의 시작은 항상 신학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철학, 그리고 법학, 그리고 의학으로 이어졌습니다. 우리는 신학에서부터 모든 학문이 출발된 것을 역사를 통해서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최근에 김용규라는 학자가 신(神,) 곧 하나님에 대한 책을 하나 써냈습니다.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이라는 제목의 책입니다. 서구문명의 깊은 내면에는 신, 곧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가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이 책은 세상적인 사람들과 대화하기 위해서 ‘하나님’이라는 기독교적 언어를 ‘신’이라는 말로 바꿔 썼습니다. 이 책은 ‘신’이라는 개념이 서구문명사회에 어떤 역할을 했는가에 대해서 종교사적, 문명사적으로 접근합니다. 또한 서구의 문화와 문명이 신과 동행하는 문화였는지, 아니면 신에게 도전하고 신과 대결하는 문화였는지, 아니면 신의 부재를 주장하는 문화였는지에 따라서 흥망성쇠가 갈렸다는 사실도 지적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을 잃어버리면 우리는 자유를 빌미로 해서 방종의 역사를 만들어 나갑니다. 그리고 빛을 어둠으로 바꿔놓습니다. 또한 신을 인정하기는 하나 신을 무시하면 인간은 한없이 오만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쓸데없는 허세를 부리기 시작합니다. 반대로 기독교가 신을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교리주의적으로 이해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을 문자와 종교적 이데올로기로 바꿔놓으면, 그것은 인간에게 또 다른 엄청난 폐해를 가져다줍니다. 우리는 이것을 역사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일까요?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 인격적인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진정한 인문학의 핵심은 신학에 놓여있습니다. 기독교 신학이란 곧 인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기독교 신학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인간학입니다. 인간학이 곧 신학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신학은 하나님을 전제하는 최고의 인문학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우리는 최고의 인문학자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인간이 무엇 때문에 고통을 받고 무엇 때문에 아파하는지, 인간의 미래가 무엇인지, 인간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되는지를 가르쳐주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성경의 내용은 인간의 존재와 인간의 본질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정신적인 내면세계가 무엇인지, 인간의 고통이 무엇인지, 인간의 실존이 왜 흔들리고 있는지와 같은 물음들에 대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대답을 하고 있는지, 성경은 인간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인간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시인은 빠져나올 수 없는 깊은 곳에 빠져 있었습니다
시편 130편에 등장한 인간상은 인간이 어떤 존재이고 인간이 위기 속에서 어떻게 탈출할 수 있는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본문의 시인은 위기 속에 있습니다. 그는 절망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끄트머리에 와있습니다. 그는 1절에서 자신을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시편 130:1)
이 시인은 깊은 곳에 빠져 있습니다. 그가 머무는 곳은 육체가 아픈 곳입니다. 정신적인 고뇌가 그를 사로잡고 있는 곳입니다. 그냥 가만 앉아있거나 침묵할 수 없는 곳입니다. 인생을 포기하고 싶은 곳입니다. 미래에 대해 닫힌 세계 속에서 고통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얼마나 자주 위기에 처하는 존재인지, 얼마나 좌절하면서 신음해야하는 존재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 실존의 깊은 곳에 빠져 있습니다. 그곳은 어둠입니다. 그곳은 위협입니다. 그곳은 숨 쉴 수도 없는 절대 절명의 자리입니다. 그곳은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멀리 있는 자리입니다.
인간이란 폭풍우 치는 바다 한복판에 일엽편주와 같이 흔들리는 존재입니다. 시인은 인간이 아침안개와도 같이 잠깐 있다가 사라져가는 인생임을 알고 있습니다. 이런 인간이 갖고 있는 고통을 세상 사람들은 조금 다르게 표현합니다. “그것은 스트레스를 받은 거야.” “그것은 우울증에 걸린 거야.” “그것은 자기를 연민하는 거야.” “그것은 좌절하는 거야.” “그것은 고통의 시간이야.” 그러나 기독교는 그러한 인간의 모습을 더욱 깊이 있게 표현합니다. 기독교는 그것이 하나님과 떨어진 인간의 좌절, 하나님을 잃어버린 인간의 아픔과 고독,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의 모습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인간이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스스로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갖고 있는 문제는 나 스스로가 죄의 깊은 골짜기로 떨어진 문제이기 때문에 내가 아무리 죄를 씻으려고 해도, 내가 아무리 죄로부터 벗어나려고 해도 내게는 그것을 씻어낼 능력이 없습니다. 이 사실 앞에 그는 고통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시인은 도망가고 싶습니다. 그러나 도망갈 데라고는 없는 깊은 곳입니다. 더 내려갈 때가 없는 최저의 밑바닥에 그는 놓여있습니다.
깊은 곳은 하나님께서 가까이 계신 자리입니다
요나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말씀을 증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니느웨로 가기가 싫었습니다. 니느웨는 이스라엘을 못살게 구는 적대국이었습니다. 그는 그곳의 백성이 구원받는 것은 보기도 싫었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니느웨로 가지 않고 배를 타고 다시스로 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의 실존 전체를 뒤흔들었습니다. “네가 도대체 어디로 가려고 하느냐” 그래서 그 배가 파선하기까지 이르렀습니다. 거기 있었던 사람들은 이것이 누구의 잘못 때문인가를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요나가 지목됐습니다. 그들은 요나를 폭풍우가 이는 바다에 내던졌습니다. 그때 그는 큰 물고기 배속으로 빠져들어 갑니다. 요나는 그곳을 깊은 곳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요나 2:3)
여러분, 우리가 이 자리에 오게 것은 깊은 곳을 경험했기 때문이 아닙니까? 우리의 깊은 곳은 무엇일까요? 어떤 분에게는 질병이었을 것입니다. 어떤 분에게는 실패였을 것입니다. 어떤 분에게는 삶의 목표를 잃어버린 것이었을 것입니다. 어떤 분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는 아픔을 경험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어떤 분들에게는 자신의 실존이 너무나 불안해서 무엇인가를 붙잡지 않고는 인생을 살아갈 수 없었던 허무감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니까 이 시인은 그것이 자신의 죄악 때문인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속에 죄가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게 됐습니다. 사실은 망각하려고 했습니다. 도망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림자처럼 따라왔습니다. 마음에 평안이 없었습니다. 내 속의 양심이 계속해서 나를 향해 질문했습니다. 그러나 깊은 곳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을 때 시인은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소리치지 않고는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소리를 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이라고 생각했던 깊은 곳이 바로 하나님이 가까이 계신 자리였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 안에 있는 어둠, 자신 안에 있는 게으름, 자신 안에 있는 정욕, 자신 안에 있는 헛된 야망들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자신의 죄악 된 실존에 대해서 깨닫습니다.
내 죄의 깊이를 깨닫는 순간이 용서받는 순간입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시편 130:3)
내속에 있는 생각들을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어떨까요? 아마도 부끄러워서 어떻게든 가리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내 모든 죄악을 하나하나 다 살피시면 내가 감히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자신의 죄악의 깊이를 다시금 깨닫습니다. 전에는 실존의 깊이를 알았는데 이제는 죄악의 깊이까지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그는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죄용서의 은총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죄용서의 은총을 받게 되는 비결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내 인간적인 삶의 실존과 육체의 깊은 곳에서 곧 내 자신의 이 죄의 깊이를 깨닫는 순간이 바로 용서받는 순간인 것입니다. 그 순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순간입니다. 그 순간이 하나님께서 내 옆에 계신 것을 확인하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확인합니다.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시편 130:4)
죄가 자기를 절망감과 무력감으로 몰아넣고 그래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그 순간에 그가 확인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본문말씀은 내가 주님을 경외하므로 용서를 받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내가 내 죄의 깊이를 깨닫는 순간에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때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구나. 내가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았구나. 내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지 않았구나. 내가 인생을 내 마음대로 살았구나. 내가 불순종했구나, 내가 게을렀구나, 내가 하나님의 뜻을 가슴에 품지 않았구나.’ 하고 자신의 삶을 깨달으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배웁니다.
시인은 자신의 죄보다 더 큰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으면서 마음속에 확인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내가 이제는 하나님만을 바라리라. 내가 하나님 약속을 보리라.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리라.’ 그는 그렇게 마음속으로 결정하면서 이렇게 소리 높여 외칩니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시편 130:6)
시인은 밤새도록 잠 못 자고 보초를 서는 파수꾼이 새벽에 동트는 것을 기다리는 마음보다 더 열정적으로 하나님을 기다리고 그분 앞에 나아가겠다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으십시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의 깊은 곳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지금도 어둡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탄식하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그 깊은 곳에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께 토해내야 합니다. “하나님, 나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바닥을 치는 인생까지 내려왔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내 곁에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때 내 죄악이 보일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내 입에서 기도의 울부짖음이 하나님을 향해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제 곧 수난 주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골고다의 십자가에 달리도록 내버려두신 것은 이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다. “내 아들 예수보다 더 깊은 곳에 빠져있었던 사람이 있느냐? 내 아들 예수가 받은 십자가의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을 받은 사람이 있느냐? 내 아들 예수가 당한 절망과 좌절보다 더 큰 좌절을 겪은 사람들이 있느냐? 누구나 다 내 아들을 통해서 내게로 오라! 내 아들을 믿는 자를 내가 용서하겠고, 내 아들을 사랑하는 자를 내가 사랑할 것이며, 내 아들을 주로 고백하는 자를 내 자녀로 삼아줄 것이다!”
우리의 깊은 곳이 사실은 주님께서 찾아오시는 자리입니다. 깊은 곳에 빠지셨습니까? 주님께 마음을 열어놓고 부르짖으십시오. “주님, 내 죄를 용서하시고 나를 깊은 곳에서 건져 주옵소서!” 그때에 주님께서 우리를 만나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