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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요한복음 21: 17

김지철 목사

2015.04.19

두려움을 이기는 힘은 사랑뿐입니다.

지난해 천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애니메이션 영화가 있습니다. 바로 ‘겨울 왕국’입니다. 아마 이곳에도 자녀들이나 손주들과 보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겨울 왕국에는 눈과 얼음을 만드는 초능력을 가진 엘사와 언니를 사랑하고 언니와 놀고 싶어 하는 동생 안나가 등장합니다. 엘사는 자신의 초능력 때문에 동생이 다칠까봐 동생을 피합니다. 그리고는 어느 날 자기만의 얼음 왕국으로 도망을 갑니다. 그때 부르는 노래가 유명한 ‘Let it go’입니다. 분명 자유를 노래한 것이지만, 이 자유는 온전한 자유가 아닌 자기 속에 갇힌 자유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아무도 다가갈 수 없는 차디찬 얼음 왕국이었기 때문입니다.
엘사를 가두고 누르던 것은 사실 두려움이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엘사는 자신을 구하기 위해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 동생 안나의 순전한 사랑을 깨닫게 되면서 사랑만이 초능력을 조절할 수 있는 열쇠임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는 얼어붙은 왕국을 녹여 봄과 여름으로 되돌립니다. 결국 이 이야기는 두려움을 푸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라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두려움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두려움을 이기는 유일한 것은 사랑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마지막까지 남는 가장 소중한 것은 사랑이라는 사실을 절감합니다. 부모의 사랑, 남편과 아내의 사랑, 친구에 대한 사랑…. 이런 사랑 때문에 때로는 상처를 받기도 하고 섭섭한 마음에 화가 난 기억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한 것이 바로 그 사랑이라는 것을 우리는 확인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은 참 고맙고 감사한 것입니다.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면 사람들이 사랑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서로를 미워하고, 누군가에 대한 분노를 다스리지 못해 괴로워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받지 못한 것에 대한, 더 이상 사랑할 수 없음에 대한 공격이 그렇게 표현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두려움과 자책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누구에게나 사랑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것이 두렵습니다. 때로는 사랑받는 것도 두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를 꽁꽁 가둬 둡니다. 자기를 열지 않습니다. 빗장을 걸어 아무도 열지 못하게 만듭니다. 속으로는 누군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기대하면서도 겉으로는 자꾸만 거절합니다. 바로 두려움 때문입니다. 부부관계도 그렇습니다. 서먹서먹하게 되면, 사랑하는 것도 어색해지고 사랑받는 것도 두려워집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이런 두려움이 있습니다. 실수에 대한 두려움, 실패에 대한 두려움, 죄책감이 주는 두려움, 창피당하고 거절당할 것에 대한 두려움, 형벌에 대한 두려움. 이러한 두려움들이 우리를 억누르고 있는 것을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경험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런 두려움에 억눌려 있던 베드로를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만나주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까지 베드로는 아주 당당했습니다. 자신만만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떤 여종의 말 한마디에 3년 동안 쌓아온 ‘예수님의 충성된 종’, ‘수제자’라는 자랑스러운 칭호를 순식간에 빼앗겨 버렸습니다. 그 일을 통해 베드로는 자책했습니다. ‘나는 사실 못난 놈이었어. 형편없는 인간이야.’ 하지만 아무리 자책해도 그 부끄러움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도저히 그것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바로 여기서부터 출발합니다.
베드로는 차라리 고기 잡던 어부로 돌아가기로 결정합니다. 그래서 그는 갈릴리 바닷가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식탁의 교제를 나누셨습니다. 그런데도 변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두려움이 그들을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다가오신 것은 그들을 회복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누구보다 베드로를 회복시키기를 원하셨습니다. ‘베드로야, 이제 그만 두려워할래? 이제 자책하는 것을 멈추지 않을래? 이제 너 자신을 다시 찾아야지 않겠니’ 하는 마음으로 찾아오셔서는 베드로에게 질문하시는 장면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이 무엇이고 베드로의 응답이 무엇인지 함께 보겠습니다.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요한복음 21:17)

예수님은 베드로의 아픈 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베드로의 상처 난 마음을 예수님은 회복시키고 싶으셨습니다. 사랑과 충성에 실패했다는 사실 앞에 낙심천만하고 있는 베드로가 그 실망감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예수님은 원하셨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이 실패를 경함한 후 말을 잃어버렸습니다. 말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바깥에 나가서 ‘내가 예수님을 부인했구나’ 하고 울음을 쏟아놓고는 마치 실어증에 걸린 사람처럼 입을 닫았습니다. 대인기피증에 걸렸습니다.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이 창피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끼리만 모여 신세를 한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찾아오신 것입니다.
본래 베드로는 적극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도전적이고 주도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보면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습니다. 아주 조심스럽습니다. 진지하고 신중하며 겸손하게 보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베드로야, 나는 네 모습 그대로, 네가 가지고 있는 약점 그대로 너를 사랑한단다. 네가 실수한 것을 안단다. 네가 호기를 부렸지만 무너진 것을 내가 안단다. 그러나 나는 너의 그 모습 그대로를 진심으로 사랑한단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몇 가지 오해를 할 때가 있습니다. 오랫동안 예수님을 믿으며 신앙생활을 한 사람에게도 그런 오해가 남아 있습니다. 그 오해들은 깊이 들여다보면 일종의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믿으면 나라는 존재는 없어지는 것 아닌가? 더 이상 나라는 존재를 주장할 수 없는 것 아닌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면 더 이상 화를 내서는 안 되나?’, ‘예수님을 믿으면 남이 내게 불쾌한 말을 하고 못되게 굴어도 사랑으로 참아야만 하는 것일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누군가 틀린 주장을 하며 고집을 피워도 사랑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나? 이제부터는 다른 사람만을 위해서 살아야 하나? 그렇다면 나라는 존재는 도대체 어디서 찾을 수 있는 걸까?’
사실 저도 처음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 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고 내가 당신의 종이라면, 나는 없어지는 것 아닌가요? 내게 소중한 것들을 다 포기해야 되는 건가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더욱 분명하게 살아납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과정입니다.
그렇다면 뭐가 사라질까요? 그동안 나를 억눌렀던 거짓 자아, 나의 두려움을 가리기 위해 썼던 가면들이 벗어지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본연의 나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한 자아를 직면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거짓된 자아에 붙잡혀 있거나 본래 모습에게서 도망갑니다.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내 속에 있는 두려움을 어떻게 감출까? 어떻게 해야 비겁함을 숨기고 용기 있는 사람처럼 보일까?’ 그러나 그렇게 드러난 모습은 진짜 내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연약하고, 끝없이 갈등하는 본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주님 앞에 드러냄으로써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시 확인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하나님의 것으로 만들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자유를 주십니다. 자발적인 사랑으로 내가 주님 앞에 나가기를 기다리십니다. 나의 문제점을 가지고, 나의 약점과 두려움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질문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위해서 십자가에 나를 못 박았다. 너는 정말 나를 사랑하고 있느냐?”

베드로는 진실한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많은 상처들은 사랑의 거절에 대한 상처입니다. 사랑할 수 없음에 대한 상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랑의 질문을 통해서 우리를 치유하십니다.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고백을 하게 함으로써 사랑의 상처가 아물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질문으로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동안 예수님을 따랐다고 여겼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했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자신을 위해서 예수님을 따랐다는 사실을, 자신의 욕심에 매달리면서 예수님을 좇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을 수단으로 이용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이제 예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을 고백하게 됩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분명히 이것은 은혜 받은 사람의 고백입니다. 과거에는 자신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주님, 사랑합니다!”라고 말할 때도 자신만만했습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도 주님이 하시는 일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도적 능동성에서 수동적 능동성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은혜란 그런 것입니다. 내가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조차도 하나님이 허락하셔야 내가 할 수 있다고 겸손히 고백하는 것, 그저 나는 주님께 맡기고 순종함으로 따라간다는 것. 이것이 은혜 받은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과거에 호기롭게 큰소리쳤던 베드로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스스로를 향한 집착과도 같은 자존심이었습니다. 이 자존심에 붙잡혀 있었을 때, 베드로는 감정을 통제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베드로의 자존심을 건강한 자존감으로 바꾸셨습니다. 자존심이란 외적 모습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존심은 부정적으로 쓰일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자존감은 다릅니다. 그것은 내면의 세계로부터 자신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욕망에 의존했던 베드로의 자존심과 자만심을 벗기셨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직시하게 만드셨습니다. “주님, 내가 약합니다. 무너질 때도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했으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거짓말로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주님, 그럼에도 내 속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 속에 갇혀 있던 주님에 대한 사랑을 끄집어내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되자 베드로는 자신의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확인했을 때, 그는 주님 앞에 모든 것을 내어놓을 수가 있었습니다. “이제 내가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제 내가 헌신할 수 있습니다.”
장자(莊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루가 작으면 큰 물건을 담을 수 없고 두레박줄이 짧으면 깊은 우물의 물을 기를 수가 없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나의 작은 자루가 예수님의 자루로 바뀌는 것입니다. 나의 짧은 두레박줄이 예수님의 두레박줄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격지심과 열등감을 모면하려 발버둥치는 자존심이나 남에게 과시하려는 자만심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붙잡힘 받고 예수님을 사랑하며 예수님이 주신 열정으로 살아가는 새로운 인간상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일어난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베드로처럼 잘못된 자존심으로 끊임없이 방어막을 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 주님은 우리를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무언가 잘되면 자랑하고, 안되면 크게 실망하고 낙심하기 때문입니다. 잘될 때는 하나님을 찬양할 줄 모르고, 안될 때는 ‘주님과 함께 다시 일어서겠습니다’하는 용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비로소 건강한 자존감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에게 사명을 허락하십니다. 바로 “내 양을 먹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했던 그 마음, 너희를 긍휼히 여기고 목자 없는 양을 불쌍히 여겼던 그 마음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야, 네 양이 아니다. 내 양이란다.”
3천 명이 회개하는 놀라운 일을 보게 되었을 때, 베드로는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주님의 양입니다. 나는 다만 순종하고 충성할 뿐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이렇게 변화될 때까지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는 주님을 자랑할 줄 아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랑이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놀라운 것은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를 감싸면서 우리를 동시에 놓아준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를 초대하면서 동시에 세상으로 우리를 파송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를 소유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자유롭게 인생의 길을 가도록 도와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란 차갑게 식어버린 인간의 사랑에 다시 불을 당기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차디찬 인간의 사랑을 향한 하나님의 저항이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말라버린 사랑에 부어지는 단비와도 같은 것이 십자가를 통한 사랑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 사랑이 승리했다는 표시입니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우리의 마음을 억누르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두렵게 하고 비겁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입니까? 수없이 많은 가면을 바꿔가면서 사람들의 시선에 연연해하도록 만드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다 훌훌 벗어버리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벗어버릴 수 있을까요?
“하나님, 내가 주님을 다시 사랑합니다.”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의 고백이야말로 나를 어둡게 하고 두렵게 만드는 모든 상처로부터 나를 자유하게 하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이것이 부활하신 주님의 물음에 답하는 우리의 고백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시간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을 향해 모든 것 다 내려놓고,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고백과 함께 주님을 자랑하고 사랑하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복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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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1: 17

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두려움을 이기는 힘은 사랑뿐입니다.

지난해 천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애니메이션 영화가 있습니다. 바로 ‘겨울 왕국’입니다. 아마 이곳에도 자녀들이나 손주들과 보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겨울 왕국에는 눈과 얼음을 만드는 초능력을 가진 엘사와 언니를 사랑하고 언니와 놀고 싶어 하는 동생 안나가 등장합니다. 엘사는 자신의 초능력 때문에 동생이 다칠까봐 동생을 피합니다. 그리고는 어느 날 자기만의 얼음 왕국으로 도망을 갑니다. 그때 부르는 노래가 유명한 ‘Let it go’입니다. 분명 자유를 노래한 것이지만, 이 자유는 온전한 자유가 아닌 자기 속에 갇힌 자유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아무도 다가갈 수 없는 차디찬 얼음 왕국이었기 때문입니다.
엘사를 가두고 누르던 것은 사실 두려움이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엘사는 자신을 구하기 위해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 동생 안나의 순전한 사랑을 깨닫게 되면서 사랑만이 초능력을 조절할 수 있는 열쇠임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는 얼어붙은 왕국을 녹여 봄과 여름으로 되돌립니다. 결국 이 이야기는 두려움을 푸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라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두려움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두려움을 이기는 유일한 것은 사랑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마지막까지 남는 가장 소중한 것은 사랑이라는 사실을 절감합니다. 부모의 사랑, 남편과 아내의 사랑, 친구에 대한 사랑…. 이런 사랑 때문에 때로는 상처를 받기도 하고 섭섭한 마음에 화가 난 기억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한 것이 바로 그 사랑이라는 것을 우리는 확인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은 참 고맙고 감사한 것입니다.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면 사람들이 사랑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서로를 미워하고, 누군가에 대한 분노를 다스리지 못해 괴로워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받지 못한 것에 대한, 더 이상 사랑할 수 없음에 대한 공격이 그렇게 표현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두려움과 자책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누구에게나 사랑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것이 두렵습니다. 때로는 사랑받는 것도 두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를 꽁꽁 가둬 둡니다. 자기를 열지 않습니다. 빗장을 걸어 아무도 열지 못하게 만듭니다. 속으로는 누군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기대하면서도 겉으로는 자꾸만 거절합니다. 바로 두려움 때문입니다. 부부관계도 그렇습니다. 서먹서먹하게 되면, 사랑하는 것도 어색해지고 사랑받는 것도 두려워집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이런 두려움이 있습니다. 실수에 대한 두려움, 실패에 대한 두려움, 죄책감이 주는 두려움, 창피당하고 거절당할 것에 대한 두려움, 형벌에 대한 두려움. 이러한 두려움들이 우리를 억누르고 있는 것을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경험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런 두려움에 억눌려 있던 베드로를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만나주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까지 베드로는 아주 당당했습니다. 자신만만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떤 여종의 말 한마디에 3년 동안 쌓아온 ‘예수님의 충성된 종’, ‘수제자’라는 자랑스러운 칭호를 순식간에 빼앗겨 버렸습니다. 그 일을 통해 베드로는 자책했습니다. ‘나는 사실 못난 놈이었어. 형편없는 인간이야.’ 하지만 아무리 자책해도 그 부끄러움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도저히 그것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바로 여기서부터 출발합니다.
베드로는 차라리 고기 잡던 어부로 돌아가기로 결정합니다. 그래서 그는 갈릴리 바닷가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식탁의 교제를 나누셨습니다. 그런데도 변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두려움이 그들을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다가오신 것은 그들을 회복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누구보다 베드로를 회복시키기를 원하셨습니다. ‘베드로야, 이제 그만 두려워할래? 이제 자책하는 것을 멈추지 않을래? 이제 너 자신을 다시 찾아야지 않겠니’ 하는 마음으로 찾아오셔서는 베드로에게 질문하시는 장면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이 무엇이고 베드로의 응답이 무엇인지 함께 보겠습니다.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요한복음 21:17)

예수님은 베드로의 아픈 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베드로의 상처 난 마음을 예수님은 회복시키고 싶으셨습니다. 사랑과 충성에 실패했다는 사실 앞에 낙심천만하고 있는 베드로가 그 실망감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예수님은 원하셨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이 실패를 경함한 후 말을 잃어버렸습니다. 말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바깥에 나가서 ‘내가 예수님을 부인했구나’ 하고 울음을 쏟아놓고는 마치 실어증에 걸린 사람처럼 입을 닫았습니다. 대인기피증에 걸렸습니다.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이 창피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끼리만 모여 신세를 한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찾아오신 것입니다.
본래 베드로는 적극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도전적이고 주도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보면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습니다. 아주 조심스럽습니다. 진지하고 신중하며 겸손하게 보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베드로야, 나는 네 모습 그대로, 네가 가지고 있는 약점 그대로 너를 사랑한단다. 네가 실수한 것을 안단다. 네가 호기를 부렸지만 무너진 것을 내가 안단다. 그러나 나는 너의 그 모습 그대로를 진심으로 사랑한단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몇 가지 오해를 할 때가 있습니다. 오랫동안 예수님을 믿으며 신앙생활을 한 사람에게도 그런 오해가 남아 있습니다. 그 오해들은 깊이 들여다보면 일종의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믿으면 나라는 존재는 없어지는 것 아닌가? 더 이상 나라는 존재를 주장할 수 없는 것 아닌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면 더 이상 화를 내서는 안 되나?’, ‘예수님을 믿으면 남이 내게 불쾌한 말을 하고 못되게 굴어도 사랑으로 참아야만 하는 것일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누군가 틀린 주장을 하며 고집을 피워도 사랑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나? 이제부터는 다른 사람만을 위해서 살아야 하나? 그렇다면 나라는 존재는 도대체 어디서 찾을 수 있는 걸까?’
사실 저도 처음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 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고 내가 당신의 종이라면, 나는 없어지는 것 아닌가요? 내게 소중한 것들을 다 포기해야 되는 건가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더욱 분명하게 살아납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과정입니다.
그렇다면 뭐가 사라질까요? 그동안 나를 억눌렀던 거짓 자아, 나의 두려움을 가리기 위해 썼던 가면들이 벗어지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본연의 나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한 자아를 직면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거짓된 자아에 붙잡혀 있거나 본래 모습에게서 도망갑니다.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내 속에 있는 두려움을 어떻게 감출까? 어떻게 해야 비겁함을 숨기고 용기 있는 사람처럼 보일까?’ 그러나 그렇게 드러난 모습은 진짜 내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연약하고, 끝없이 갈등하는 본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주님 앞에 드러냄으로써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시 확인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하나님의 것으로 만들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자유를 주십니다. 자발적인 사랑으로 내가 주님 앞에 나가기를 기다리십니다. 나의 문제점을 가지고, 나의 약점과 두려움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질문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위해서 십자가에 나를 못 박았다. 너는 정말 나를 사랑하고 있느냐?”

베드로는 진실한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많은 상처들은 사랑의 거절에 대한 상처입니다. 사랑할 수 없음에 대한 상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랑의 질문을 통해서 우리를 치유하십니다.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고백을 하게 함으로써 사랑의 상처가 아물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질문으로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동안 예수님을 따랐다고 여겼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했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자신을 위해서 예수님을 따랐다는 사실을, 자신의 욕심에 매달리면서 예수님을 좇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을 수단으로 이용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이제 예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을 고백하게 됩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분명히 이것은 은혜 받은 사람의 고백입니다. 과거에는 자신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주님, 사랑합니다!”라고 말할 때도 자신만만했습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도 주님이 하시는 일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도적 능동성에서 수동적 능동성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은혜란 그런 것입니다. 내가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조차도 하나님이 허락하셔야 내가 할 수 있다고 겸손히 고백하는 것, 그저 나는 주님께 맡기고 순종함으로 따라간다는 것. 이것이 은혜 받은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과거에 호기롭게 큰소리쳤던 베드로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스스로를 향한 집착과도 같은 자존심이었습니다. 이 자존심에 붙잡혀 있었을 때, 베드로는 감정을 통제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베드로의 자존심을 건강한 자존감으로 바꾸셨습니다. 자존심이란 외적 모습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존심은 부정적으로 쓰일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자존감은 다릅니다. 그것은 내면의 세계로부터 자신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욕망에 의존했던 베드로의 자존심과 자만심을 벗기셨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직시하게 만드셨습니다. “주님, 내가 약합니다. 무너질 때도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했으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거짓말로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주님, 그럼에도 내 속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 속에 갇혀 있던 주님에 대한 사랑을 끄집어내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되자 베드로는 자신의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확인했을 때, 그는 주님 앞에 모든 것을 내어놓을 수가 있었습니다. “이제 내가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제 내가 헌신할 수 있습니다.”
장자(莊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루가 작으면 큰 물건을 담을 수 없고 두레박줄이 짧으면 깊은 우물의 물을 기를 수가 없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나의 작은 자루가 예수님의 자루로 바뀌는 것입니다. 나의 짧은 두레박줄이 예수님의 두레박줄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격지심과 열등감을 모면하려 발버둥치는 자존심이나 남에게 과시하려는 자만심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붙잡힘 받고 예수님을 사랑하며 예수님이 주신 열정으로 살아가는 새로운 인간상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일어난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베드로처럼 잘못된 자존심으로 끊임없이 방어막을 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 주님은 우리를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무언가 잘되면 자랑하고, 안되면 크게 실망하고 낙심하기 때문입니다. 잘될 때는 하나님을 찬양할 줄 모르고, 안될 때는 ‘주님과 함께 다시 일어서겠습니다’하는 용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비로소 건강한 자존감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에게 사명을 허락하십니다. 바로 “내 양을 먹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했던 그 마음, 너희를 긍휼히 여기고 목자 없는 양을 불쌍히 여겼던 그 마음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야, 네 양이 아니다. 내 양이란다.”
3천 명이 회개하는 놀라운 일을 보게 되었을 때, 베드로는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주님의 양입니다. 나는 다만 순종하고 충성할 뿐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이렇게 변화될 때까지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는 주님을 자랑할 줄 아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랑이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놀라운 것은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를 감싸면서 우리를 동시에 놓아준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를 초대하면서 동시에 세상으로 우리를 파송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를 소유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자유롭게 인생의 길을 가도록 도와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란 차갑게 식어버린 인간의 사랑에 다시 불을 당기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차디찬 인간의 사랑을 향한 하나님의 저항이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말라버린 사랑에 부어지는 단비와도 같은 것이 십자가를 통한 사랑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 사랑이 승리했다는 표시입니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우리의 마음을 억누르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두렵게 하고 비겁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입니까? 수없이 많은 가면을 바꿔가면서 사람들의 시선에 연연해하도록 만드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다 훌훌 벗어버리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벗어버릴 수 있을까요?
“하나님, 내가 주님을 다시 사랑합니다.”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의 고백이야말로 나를 어둡게 하고 두렵게 만드는 모든 상처로부터 나를 자유하게 하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이것이 부활하신 주님의 물음에 답하는 우리의 고백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시간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을 향해 모든 것 다 내려놓고,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고백과 함께 주님을 자랑하고 사랑하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복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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