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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나의 복, 나의 즐거움

시편 16: 1 ~ 11

김지철 목사

2008.03.30

기독교는 우울하게 탄식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기쁨의 종교입니다. 결코 우울하고 침울한 종교가 아닙니다. 탄식하는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는 종교입니다. 때로 우리는 죄악과 허물이 너무 많아 탄식할 때가 있습니다.우리 주위의 환경이 너무 열악하고 고통이 심해서 신음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영혼의 즐거움이 있는 곳이 바로 기독교 신앙입니다.

기독교는 십자가를 넘어 부활의 새벽을 맞이하는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죽음을 넘어 생명이 있음을 가르쳐주는 종교입니다.

때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기쁘지 않다면 자기 자신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기독교인에게 결코 슬픔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는 슬픔을 넘어서 하나님만이 주시는 영혼의 기쁨이 있습니다. 시편 16편은 다윗의 신앙고백입니다. 그는 어렵고 힘든 과정을 겪었지만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완벽한 부활 신앙이 아니어서 어렴풋하지만 부활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시편 16:10-11)

다윗은 자기 삶 속의 어려운 여건과 죽음의 위협 앞에 있으면서도 부활 신앙으로 인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기쁨과 즐거움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쁨이 충만하게 넘치는 모습으로 하나님의 오른쪽에 영원한 즐거움이 있다고 찬양합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므로 기쁨과 즐거움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잘 알지 못한 인물이지만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구약적인 환경에서만 살았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기쁨이 충만하다고 말합니다. 다윗이 이 정도로 고백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알고 무덤에서 부활의 생명을 소유한 우리들이야 말로 얼마나 더 크게 기뻐해야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때로 우울할 때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순간순간마다 얼굴이 찌푸려지고 굳어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한 맺힌 분노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럴 때마다 부활신앙을 소유한 우리는 다시 하나님 주신 기쁨을 확인하고 우리 속에 우울하고 침울한 증세를 다 떨쳐버려야 할 것입니다.

무력하게 만드는 마음의 암인 우울증에 빠지지 마십시오.

우울한 증세는 마음을 어둡고 무겁게 합니다. 어떤 사람은 우울증을 ‘마음의 감기’라고 표현합니다. 감기란 육체적인 병의 시작입니다. 감기를 안 걸려본 사람은 한사람도 없습니다. 감기는 일주일이 지나 없어지면 괜찮습니다. 열흘 후에라도 나으면 괜찮습니다. 그러나 감기가 지속 되면 다른 질병을 야기 시킵니다. 우울 증세도 이와 비슷합니다. 때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기쁘지 않고 우울해질 때도 있습니다. 고통당하고 슬픈 이야기를 들으면 가슴이 답답하고 찢어질 것처럼 아플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지속 된다면 그것은 정신적인 세계, 영혼의 세계가 파괴당하는 징표입니다.
우울증은 무서운 암적인 요소와 같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우울증을 ‘마음의 암’이라고 표현합니다. 내 생각과 결심과 정신세계를 무너뜨리고 나의 영혼의 세계의 기쁨과 즐거움을 빼앗아 갑니다. 건강했던 몸까지 망가뜨리는 것이 우울증 증세입니다. 이처럼 우울증은 삶의 모든 것을 어둡게 하고 무력하게 만듭니다.
성도 여러분, 아침마다 일어날 때 거울로 얼굴을 들여다보십시오. 내가 얼마나 늙었는지, 이마에 주름살이 얼마나 많아졌는지를 보지 마시고 눈동자를 보며 확인하십시오. ‘내 눈이 맑은가? 내 눈이 신선한가? 내 눈이 밝게 빛나고 있는가? 아니면 총기가 점점 사라지고 있는가? 슬픔의 눈인가? 탄식의 눈인가? 절망하고 미워하는 눈인가? 가슴속에 한이 맺힌 눈인가?’ 우울한 눈이 되면 얼굴까지도 어두워지고 표정까지도 굳어집니다. 그러므로 항상 자신의 눈을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이 우울증에 빠지면 시도 때도 없이 마음속으로부터 나오는 깊은 한숨을 쉬게 됩니다. 우울증을 20년 동안이나 치료하고 진료했던 한 신경정신과 의사가 우울증이 도저히 고쳐지지 않는다는 사실 앞에서 고통스러웠습니다. ‘왜 우울증은 치료해도 금방 재발될까? 모두 잘 살자고 하는데 우울증 환자들은 왜 자꾸 죽자고 생각하고 실제로 자살을 시도하는 것일까?’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얻어 보기 위해서 의사는 직접 우울증 환자가 되어 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우울증 환자를 자세히 지켜봤더니 얼굴이 어둡고 표정이 굳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말을 많이 하든 적게 하든 모두 한숨을 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의사는 2주간 동안 의도적으로 한숨을 쉬어보기로 작정했습니다. 아침부터 땅이 꺼져라 한숨을 깊게 쉬다보니까 우울증 증세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한숨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기분이 자꾸만 가라앉았습니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의욕이 상실되고, 마지막에는 정말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침마다 주님을 바라보고 찬양함으로 기쁨을 연습하십시오.

사람이 슬퍼지면 울게 되고 계속해서 울다보면 슬퍼집니다. 반면 기쁘면 웃게 되고 계속해서 웃다보면 기뻐집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웃음 치료’라는 것도 나왔습니다. 사람들이 질병에 걸리면 우울해지고 고통스럽습니다. 웃기도 싫고 의욕이 상실됩니다. 그런 사람들을 억지로라도 웃게 하고 계속해서 웃게 하면 마음이 밝아지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억지로 웃는 것 같이 보이는데 그 웃음 자체가 정신세계를 밝게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마음속에 기쁨의 연습을 해야 합니다. 아무리 한숨을 쉬어야하는 상황에서도 한숨을 쉬지 마세요. 자신이 한숨을 쉬고 있다고 확인되면 바로 거절하세요. 그리고 오히려 한숨을 쉴 호흡으로 찬양을 불러보세요. 그러면 하나님과 접촉이 시작됩니다. 예수님과의 접촉이 시작됩니다. 성령님과의 접촉이 시작됩니다. 그러면서 내 영혼에 억눌렸던 것들이 조금씩 풀려나가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찬양을 하면서 귀신이 쫓겨 나가는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 쓰여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탄식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먼저 찬양하면서 기뻐하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내 상황을 보고 있으면 탄식이 나오지만 기쁨과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면 숨겨진 탄식과 한숨을 바꿔주십니다. 이것은 때로는 노력하고 결심해야 합니다.
시편 16편은 우리에게 다윗의 신앙과 기쁨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윗이 소유한 기쁨은 잠깐 지나가는 기쁨이 아닙니다. 코미디를 보고 일시적으로 웃게 되는 기쁨도 아닙니다. 다윗의 기쁨은 본질적인 기쁨입니다. 영혼 깊숙한 곳에서 나오는 기쁨입니다. 환경이 주는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서 갖게 되는 기쁨입니다. 우리는 이 시인의 기쁨을 보면서 이런 의심이 생기기도 합니다. ‘시인의 생각이 깊지 못해서, 인생의 고난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서, 인생이 얼마나 치열하게 경쟁해야 하는지 알지 못해서, 천박한 낙관주의자가 되어서 이렇게 기뻐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다윗은 자신의 실존 전체가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존재 전체를 걸면서 하나님께 맡기겠다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시편16:1)

다윗은 결코 우리보다 고난을 적게 당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인생은 참으로 많은 수난을 당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당하는 아픔이 크더라도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자신을 하나님 앞에 서있는 존재로 만들기를 사모했습니다. 그것이 다윗의 위대한 점입니다.

다윗은 사랑하는 하나님이 함께 계심으로 기쁨을 누렸습니다.

다윗은 잘못된 길로 가다가도 누가 신앙 안에서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순간, 하나님 앞에 나아가 회개하면서 하나님을 사모했던 인물입니다. 다윗은 늘 하나님만으로 그의 인생을 만족하려고 한 사람이었기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하였나이다” (시편 16:2)

어찌 보면 다윗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자신에게 어떤 복도 없다고 고백합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 명예를 사랑하는 것, 권력을 차지하는 것이 결코 최고의 복이 아니라 주님만이 복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다윗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길이고 하나님만이 나의 즐거움이고 하나님만이 나의 기쁨이라고 찬양하는 다윗이 사랑스러우셨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면 위로가 되고 하나님이 계시면 그 자체가 축복이라고 선언하는 다윗의 사랑 노래를 하나님께서 들으셨습니다.
이런 사랑의 노래가 있습니다. 페르시아 문학의 최고 인물로 꼽히는 루미(Rumi)라는 사람이 쓴 시입니다. 봄의 예쁜 꽃이 피는 과수원으로 연인을 초대하는 아름다운 시입니다.

오세요. 봄의 과수원으로 오세요.
꽃과 촛불과 포도주가 있어요.
하지만 당신이 안 오신다면,
이런 것들이 다 무슨 소용 있겠어요.
만약 당신이 오신다면,
또한 이런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겠어요.

인간의 사랑도 하나님의 사랑의 그림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열심히 준비한 것도 당신만 오신다면 당신 한분으로 만족하기에 모든 것이 필요 없고, 만약 당신이 오지 않는다면 정성으로 준비한 아름다운 모든 것들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 간절히 부르는 아름다운 노래입니다.
다윗은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 노래한 이 시인처럼 하나님만 계시면 그 기쁨과 즐거움으로 만족하겠다고 고백합니다.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에게만 복이 있다고 노래합니다. 그때 다윗의 슬픔은 기쁨으로 변하고, 절망은 환희의 노래로 바뀔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신앙의 끊임없는 정의 속에 사랑이 있습니다. 신앙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선물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큰 사랑은 사랑하는 분이 내 옆에 있는 그 자체만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선물 때문에 기뻐하고 선물 때문에 좋아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우리에게 선물과 축복이 주어지면 감사합니다. 때로는 선물이 없으면 투정하고 불평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앙의 첫 번째 단계입니다. 신앙이 점점 성숙하면 할수록 신앙의 본질은 나를 사랑하는 하나님,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면 그 자체로 기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만족입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주님이십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기쁨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자신을 완전히 개방하고 마음에 모시기로 결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내 앞에 있는 존재 자체로 내가 좋아한다.” 우리가 아무리 자기 자신을 들여 봐도 기쁨과 즐거움이 없습니다. 내가 만든 환경과 여건 속에는 고통과 고난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진정으로 기뻐하기 위해서 결단하고 결심합니다.

“내가 여호와를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시편 16:8)

이 말은 내 환경에 문제가 있고 부정부패와 거짓이 있고, 내 안에 기쁨이 없고 탄식만 있는데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을 내 앞에 모셨기 때문이라는 고백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볼 때 기쁨의 근원, 즐거움의 근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분을 내 앞에 오시도록 확정할 때 마음에 기쁘고 즐거움이 찾아옵니다. 우리 안에는 감추고 싶은 모습, 남편과 아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연약한 모습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아픈 것, 수치스러운 것 부끄러운 것, 보이고 싶지 않은 것, 슬픈 것, 탄식할 수밖에 없는 모든 것까지도 내려놓고 주님을 내 앞에 모셔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으로 인한기쁨과 즐거움이 생깁니다. 그 순간 하나님을 찬양하며 주님과 더불어 춤을 출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인생이란 예수님과 더불어 춤을 추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춤, 기쁨의 춤, 감사의 춤을 추는 것입니다. 다윗에게는 여호와만을 바라보려는 강한 의지가 있었습니다.

모든 가치관의 첫 번째가 하나님을 내 앞에 모시는 것입니다.
모든 결심의 첫 번째가 하나님을 내 앞에 모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뻐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가슴을 교만과 불평으로 채우기 때문에 하나님을 내 앞에 모실 수 없고,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오실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윗의 고백이 여러분의 고백이 되게 하십시오.  처한 상황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하나님을 모시기로 작정하는 순간 하나님께서 새로운 길을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을 이렇게 찬양합니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시편 16:11)

주님께서 다윗에게 주시는 충만한 기쁨과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쁨으로 믿고 인생을 살아가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해주신 삶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 충만한 기쁨과 영원한 즐거움을 누리는 것은 우리의 자격이며 권리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신앙, 영혼의 즐거움을 갖는 신앙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지금 있는 자리에서 다시 주님을 내 앞에 모실 때 하나님께서 기쁨과 즐거움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이 놀라운 기쁨과 즐거움을 이 땅위에서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나 자신만을 바라볼 때 부끄럽고 허물과 욕심이 많아서 불평과 불만을 하는 어리석은 모습만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나의 모든 것을 솔직히 고백하며 주님을 내 앞에 모시기를 원합니다. 생명의 주님, 기쁨의 주님, 즐거움의 주님이신 주님을 내 앞에 모시며 주님과 더불어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생명과 기쁨의 축복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다윗처럼 하나님이 나의 복, 나의 즐거움이라고 노래 부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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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6: 1 ~ 11

1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2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3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4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나는 그들이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

5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6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7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

8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9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10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성도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11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기독교는 우울하게 탄식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기쁨의 종교입니다. 결코 우울하고 침울한 종교가 아닙니다. 탄식하는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는 종교입니다. 때로 우리는 죄악과 허물이 너무 많아 탄식할 때가 있습니다.우리 주위의 환경이 너무 열악하고 고통이 심해서 신음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영혼의 즐거움이 있는 곳이 바로 기독교 신앙입니다.

기독교는 십자가를 넘어 부활의 새벽을 맞이하는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죽음을 넘어 생명이 있음을 가르쳐주는 종교입니다.

때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기쁘지 않다면 자기 자신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기독교인에게 결코 슬픔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는 슬픔을 넘어서 하나님만이 주시는 영혼의 기쁨이 있습니다. 시편 16편은 다윗의 신앙고백입니다. 그는 어렵고 힘든 과정을 겪었지만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완벽한 부활 신앙이 아니어서 어렴풋하지만 부활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시편 16:10-11)

다윗은 자기 삶 속의 어려운 여건과 죽음의 위협 앞에 있으면서도 부활 신앙으로 인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기쁨과 즐거움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쁨이 충만하게 넘치는 모습으로 하나님의 오른쪽에 영원한 즐거움이 있다고 찬양합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므로 기쁨과 즐거움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잘 알지 못한 인물이지만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구약적인 환경에서만 살았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기쁨이 충만하다고 말합니다. 다윗이 이 정도로 고백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알고 무덤에서 부활의 생명을 소유한 우리들이야 말로 얼마나 더 크게 기뻐해야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때로 우울할 때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순간순간마다 얼굴이 찌푸려지고 굳어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한 맺힌 분노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럴 때마다 부활신앙을 소유한 우리는 다시 하나님 주신 기쁨을 확인하고 우리 속에 우울하고 침울한 증세를 다 떨쳐버려야 할 것입니다.

무력하게 만드는 마음의 암인 우울증에 빠지지 마십시오.

우울한 증세는 마음을 어둡고 무겁게 합니다. 어떤 사람은 우울증을 ‘마음의 감기’라고 표현합니다. 감기란 육체적인 병의 시작입니다. 감기를 안 걸려본 사람은 한사람도 없습니다. 감기는 일주일이 지나 없어지면 괜찮습니다. 열흘 후에라도 나으면 괜찮습니다. 그러나 감기가 지속 되면 다른 질병을 야기 시킵니다. 우울 증세도 이와 비슷합니다. 때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기쁘지 않고 우울해질 때도 있습니다. 고통당하고 슬픈 이야기를 들으면 가슴이 답답하고 찢어질 것처럼 아플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지속 된다면 그것은 정신적인 세계, 영혼의 세계가 파괴당하는 징표입니다.
우울증은 무서운 암적인 요소와 같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우울증을 ‘마음의 암’이라고 표현합니다. 내 생각과 결심과 정신세계를 무너뜨리고 나의 영혼의 세계의 기쁨과 즐거움을 빼앗아 갑니다. 건강했던 몸까지 망가뜨리는 것이 우울증 증세입니다. 이처럼 우울증은 삶의 모든 것을 어둡게 하고 무력하게 만듭니다.
성도 여러분, 아침마다 일어날 때 거울로 얼굴을 들여다보십시오. 내가 얼마나 늙었는지, 이마에 주름살이 얼마나 많아졌는지를 보지 마시고 눈동자를 보며 확인하십시오. ‘내 눈이 맑은가? 내 눈이 신선한가? 내 눈이 밝게 빛나고 있는가? 아니면 총기가 점점 사라지고 있는가? 슬픔의 눈인가? 탄식의 눈인가? 절망하고 미워하는 눈인가? 가슴속에 한이 맺힌 눈인가?’ 우울한 눈이 되면 얼굴까지도 어두워지고 표정까지도 굳어집니다. 그러므로 항상 자신의 눈을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이 우울증에 빠지면 시도 때도 없이 마음속으로부터 나오는 깊은 한숨을 쉬게 됩니다. 우울증을 20년 동안이나 치료하고 진료했던 한 신경정신과 의사가 우울증이 도저히 고쳐지지 않는다는 사실 앞에서 고통스러웠습니다. ‘왜 우울증은 치료해도 금방 재발될까? 모두 잘 살자고 하는데 우울증 환자들은 왜 자꾸 죽자고 생각하고 실제로 자살을 시도하는 것일까?’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얻어 보기 위해서 의사는 직접 우울증 환자가 되어 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우울증 환자를 자세히 지켜봤더니 얼굴이 어둡고 표정이 굳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말을 많이 하든 적게 하든 모두 한숨을 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의사는 2주간 동안 의도적으로 한숨을 쉬어보기로 작정했습니다. 아침부터 땅이 꺼져라 한숨을 깊게 쉬다보니까 우울증 증세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한숨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기분이 자꾸만 가라앉았습니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의욕이 상실되고, 마지막에는 정말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침마다 주님을 바라보고 찬양함으로 기쁨을 연습하십시오.

사람이 슬퍼지면 울게 되고 계속해서 울다보면 슬퍼집니다. 반면 기쁘면 웃게 되고 계속해서 웃다보면 기뻐집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웃음 치료’라는 것도 나왔습니다. 사람들이 질병에 걸리면 우울해지고 고통스럽습니다. 웃기도 싫고 의욕이 상실됩니다. 그런 사람들을 억지로라도 웃게 하고 계속해서 웃게 하면 마음이 밝아지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억지로 웃는 것 같이 보이는데 그 웃음 자체가 정신세계를 밝게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마음속에 기쁨의 연습을 해야 합니다. 아무리 한숨을 쉬어야하는 상황에서도 한숨을 쉬지 마세요. 자신이 한숨을 쉬고 있다고 확인되면 바로 거절하세요. 그리고 오히려 한숨을 쉴 호흡으로 찬양을 불러보세요. 그러면 하나님과 접촉이 시작됩니다. 예수님과의 접촉이 시작됩니다. 성령님과의 접촉이 시작됩니다. 그러면서 내 영혼에 억눌렸던 것들이 조금씩 풀려나가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찬양을 하면서 귀신이 쫓겨 나가는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 쓰여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탄식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먼저 찬양하면서 기뻐하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내 상황을 보고 있으면 탄식이 나오지만 기쁨과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면 숨겨진 탄식과 한숨을 바꿔주십니다. 이것은 때로는 노력하고 결심해야 합니다.
시편 16편은 우리에게 다윗의 신앙과 기쁨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윗이 소유한 기쁨은 잠깐 지나가는 기쁨이 아닙니다. 코미디를 보고 일시적으로 웃게 되는 기쁨도 아닙니다. 다윗의 기쁨은 본질적인 기쁨입니다. 영혼 깊숙한 곳에서 나오는 기쁨입니다. 환경이 주는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서 갖게 되는 기쁨입니다. 우리는 이 시인의 기쁨을 보면서 이런 의심이 생기기도 합니다. ‘시인의 생각이 깊지 못해서, 인생의 고난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서, 인생이 얼마나 치열하게 경쟁해야 하는지 알지 못해서, 천박한 낙관주의자가 되어서 이렇게 기뻐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다윗은 자신의 실존 전체가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존재 전체를 걸면서 하나님께 맡기겠다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시편16:1)

다윗은 결코 우리보다 고난을 적게 당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인생은 참으로 많은 수난을 당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당하는 아픔이 크더라도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자신을 하나님 앞에 서있는 존재로 만들기를 사모했습니다. 그것이 다윗의 위대한 점입니다.

다윗은 사랑하는 하나님이 함께 계심으로 기쁨을 누렸습니다.

다윗은 잘못된 길로 가다가도 누가 신앙 안에서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순간, 하나님 앞에 나아가 회개하면서 하나님을 사모했던 인물입니다. 다윗은 늘 하나님만으로 그의 인생을 만족하려고 한 사람이었기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하였나이다” (시편 16:2)

어찌 보면 다윗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자신에게 어떤 복도 없다고 고백합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 명예를 사랑하는 것, 권력을 차지하는 것이 결코 최고의 복이 아니라 주님만이 복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다윗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길이고 하나님만이 나의 즐거움이고 하나님만이 나의 기쁨이라고 찬양하는 다윗이 사랑스러우셨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면 위로가 되고 하나님이 계시면 그 자체가 축복이라고 선언하는 다윗의 사랑 노래를 하나님께서 들으셨습니다.
이런 사랑의 노래가 있습니다. 페르시아 문학의 최고 인물로 꼽히는 루미(Rumi)라는 사람이 쓴 시입니다. 봄의 예쁜 꽃이 피는 과수원으로 연인을 초대하는 아름다운 시입니다.

오세요. 봄의 과수원으로 오세요.
꽃과 촛불과 포도주가 있어요.
하지만 당신이 안 오신다면,
이런 것들이 다 무슨 소용 있겠어요.
만약 당신이 오신다면,
또한 이런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겠어요.

인간의 사랑도 하나님의 사랑의 그림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열심히 준비한 것도 당신만 오신다면 당신 한분으로 만족하기에 모든 것이 필요 없고, 만약 당신이 오지 않는다면 정성으로 준비한 아름다운 모든 것들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 간절히 부르는 아름다운 노래입니다.
다윗은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 노래한 이 시인처럼 하나님만 계시면 그 기쁨과 즐거움으로 만족하겠다고 고백합니다.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에게만 복이 있다고 노래합니다. 그때 다윗의 슬픔은 기쁨으로 변하고, 절망은 환희의 노래로 바뀔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신앙의 끊임없는 정의 속에 사랑이 있습니다. 신앙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선물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큰 사랑은 사랑하는 분이 내 옆에 있는 그 자체만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선물 때문에 기뻐하고 선물 때문에 좋아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우리에게 선물과 축복이 주어지면 감사합니다. 때로는 선물이 없으면 투정하고 불평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앙의 첫 번째 단계입니다. 신앙이 점점 성숙하면 할수록 신앙의 본질은 나를 사랑하는 하나님,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면 그 자체로 기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만족입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주님이십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기쁨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자신을 완전히 개방하고 마음에 모시기로 결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내 앞에 있는 존재 자체로 내가 좋아한다.” 우리가 아무리 자기 자신을 들여 봐도 기쁨과 즐거움이 없습니다. 내가 만든 환경과 여건 속에는 고통과 고난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진정으로 기뻐하기 위해서 결단하고 결심합니다.

“내가 여호와를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시편 16:8)

이 말은 내 환경에 문제가 있고 부정부패와 거짓이 있고, 내 안에 기쁨이 없고 탄식만 있는데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을 내 앞에 모셨기 때문이라는 고백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볼 때 기쁨의 근원, 즐거움의 근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분을 내 앞에 오시도록 확정할 때 마음에 기쁘고 즐거움이 찾아옵니다. 우리 안에는 감추고 싶은 모습, 남편과 아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연약한 모습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아픈 것, 수치스러운 것 부끄러운 것, 보이고 싶지 않은 것, 슬픈 것, 탄식할 수밖에 없는 모든 것까지도 내려놓고 주님을 내 앞에 모셔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으로 인한기쁨과 즐거움이 생깁니다. 그 순간 하나님을 찬양하며 주님과 더불어 춤을 출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인생이란 예수님과 더불어 춤을 추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춤, 기쁨의 춤, 감사의 춤을 추는 것입니다. 다윗에게는 여호와만을 바라보려는 강한 의지가 있었습니다.

모든 가치관의 첫 번째가 하나님을 내 앞에 모시는 것입니다.
모든 결심의 첫 번째가 하나님을 내 앞에 모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뻐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가슴을 교만과 불평으로 채우기 때문에 하나님을 내 앞에 모실 수 없고,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오실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윗의 고백이 여러분의 고백이 되게 하십시오.  처한 상황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하나님을 모시기로 작정하는 순간 하나님께서 새로운 길을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을 이렇게 찬양합니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시편 16:11)

주님께서 다윗에게 주시는 충만한 기쁨과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쁨으로 믿고 인생을 살아가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해주신 삶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 충만한 기쁨과 영원한 즐거움을 누리는 것은 우리의 자격이며 권리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신앙, 영혼의 즐거움을 갖는 신앙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지금 있는 자리에서 다시 주님을 내 앞에 모실 때 하나님께서 기쁨과 즐거움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이 놀라운 기쁨과 즐거움을 이 땅위에서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나 자신만을 바라볼 때 부끄럽고 허물과 욕심이 많아서 불평과 불만을 하는 어리석은 모습만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나의 모든 것을 솔직히 고백하며 주님을 내 앞에 모시기를 원합니다. 생명의 주님, 기쁨의 주님, 즐거움의 주님이신 주님을 내 앞에 모시며 주님과 더불어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생명과 기쁨의 축복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다윗처럼 하나님이 나의 복, 나의 즐거움이라고 노래 부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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