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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안에서 하나된 교회

로마서 12: 3 ~ 8

김지철 목사

2011.02.13

암은 사람에게 있어서 공포의 질병입니다

누구나 두려워하는 질병이 있다면 그것은 암이라는 질병일 것입니다. 1955년부터 2009년까지 우리나라의 사망통계를 보면 암으로 죽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1995년에는 5만 명이 암으로 죽었는데, 2009년에는 암으로 죽은 사람이 69,780명으로 약 2만 명이라는 숫자가 더 늘어났습니다. 이에 따르면 인구 10만 명당 140명이 암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사망률도 암이 가장 높아서 전체 사망률의 28%가 넘습니다. 이것은 4분의 1 이상이 암으로 죽어간다는 통계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암에 걸렸다고 하면 가장 먼저 죽음을 생각합니다. 건강한 사람도 암이라는 질병 앞에서는 두려워 떨고 애통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암이라는 질병은 왜 다른 질병들보다 무서운 것일까요? 그것은 현대의학도 암에 대해서는 쉽게 정복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완전히 치유됐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재발되었다는 소식에 옆에 있는 사람까지도 깜짝 놀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암이라는 질병과 투쟁하고 싸워 이긴 분들을 귀히 여기고 함께 기뻐합니다. 믿음과 용기를 가지고 투쟁하여 이겨나갔기 때문입니다.

암세포는 몸 전체를 죽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인간의 몸은 60조개나 되는 세포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본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몸 전체를 정상세포로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정상세포가 어떤 충격을 받고 유전자가 변화되면서 암세포로 변질됩니다. 그런데 정상세포와 암세포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둘 다 증식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결정적인 차이가 납니다. 정상세포는 증식되다가도 자신이 속한 생명체 전체의 필요를 늘 염두하고 있습니다. 아주 지혜롭습니다. 그리고 전체를 위해서는 언제든지 자신이 소모될 각오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장을 조절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증식하다가도 어느 순간에 내 역할이 다 끝났다고 생각되면 그 정상세포는 노화 상태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새로운 정상세포가 나타난 그 자리에 자신은 양보하고 소멸되어집니다.
그런데 암세포는 그렇지 않습니다. 생성과 소멸이라는 이 과정을 거절합니다. 노화되지 않으려고 합니다. 끊임없이 증식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담당해야할 자기의 역할과 본분을 잃어버립니다. 이 암세포의 모습을 보면 마치 탐욕스러운 인간의 모습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아주 이기적입니다. 그리고 탐욕스럽습니다. 자기 절제와 통제가 안 됩니다. 그리고 다른 세포들까지도 모두 잡아들입니다. 몸에 전이가 된다는 것이 바로 이것을 뜻합니다. 그러면 이 암세포는 언제까지 증식할까요? 자신이 속해있는 전체 생명체가 완전히 죽을 때까지 증식합니다. 그래서 암세포는 무서운 것입니다. 암세포는 항상 전체를 고려하지 않는 이기적인 욕심쟁이입니다. 자기 멋대로 분열하면서 통제의 기능을 결여하고 있습니다. 자동차를 샀는데 액셀러레이터는 있고 브레이크가 없다면 그 차를 타고 다닐 수 있겠습니까? 통제 기능이 없는 자동차는 파멸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건강한 몸을 가지기 원합니다

그래서 현대의학은 암을 제거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암세포만을 골라서 제거할 수 있을까요? 때로는 약품을 사용합니다. 때로는 방사선을 쬐입니다. 때로는 수술해서 환부를 도려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왜 문제가 있습니까? 암세포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정상세포들까지 다 죽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치료법들에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현대의학에서는 새로운 치료의 방향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 몸속에 있는 정상세포가 어느 날 유전자변형이 일어나서 암세포가 되는 것이라면 반대로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암세포를 정상세포로 바꿀 수는 없는가? 최근 네이쳐지라는 과학지에서는 AMPK라는 효소를 암세포에 투여하여 정상세포로 변화시킨 사례를 소개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획기적인 방법임에는 틀림없으나 아직까지는 초보적인 단계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암세포가 생기지 않도록 암세포의 원인이 되는 정신적인 스트레스, 과로, 운동 부족, 잘못된 식생활 습관을 피하는 것에 집중합니다.
이처럼 어떻게 하면 건강한 몸을 지닐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우리의 평생 과제입니다. 한곳만 아파도 우리의 몸 전체가 쑤셔오기 때문에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건강한 몸을 가지려는 것은 인간 모두의 소원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교회공동체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도 바울은 2000년 전에 오늘날과 같은 과학적 지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교회공동체를 몸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는 몸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거대한 몸에 속해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교회를 몸이라고 말하면서 교회란 행정조직이나 사람들의 집단이 아니라 생명체처럼 살아 움직이는 공동체라고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교회란 살아있는 것입니다. 마치 심장에서부터 솟아나온 혈액이 모든 세포 와 혈관 속에서 움직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교회공동체에 들어오면 예수님의 영이 우리를 붙들어서 살아있는 하나님의 몸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십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교회란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통일체를 이루는 동시에 그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세포처럼 그 몸을 이루고 있다.” 교회는 우리 각자의 모습이 다르듯이 다양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똑같이 고백합니다. “내가 주님 앞에서 죄인입니다. 예수님만이 나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아바 아버지이십니다.” 이 통일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 교회입니다.

교회 안에는 다양성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로마서 12:5)

우리는 교회를 생각할 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모두를 하나님께서 불러주셨다는 다양성을 기억해야 합니다. 교회가 다양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만드실 때에도 다양하게 만드셨습니다. 식물들도 다양하게 만드셨습니다. 동물들도 다양하게 만드셨습니다. 인간의 모습도 다양하게 만드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그래서 다양성은 사람의 일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교회가 다양성을 강조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바로 각 사람의 자유와 개성을 존중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개인 한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종교입니다. 예수님이 다양성을 귀히 여기신다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도피해있을 때, 하나님은 나 같은 사람을 알지 못할 거라고 탄식하며 나 스스로도 어찌할 줄 몰라 하고 있을 때조차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찾아오셔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사랑하는 딸이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다양성을 귀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의도 때문에 우리는 주님 앞에 나아올 수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지만 동시에 개별적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나’라는 사람의 존재 그 자체가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더 이상 숨어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 앞에서는 숨어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 하나 귀하지 않은 존재가 없습니다. 독립적입니다. 교회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어느 사람도 예외가 없습니다. 나이가 많은 분도 소중한 것이고 젊은 사람도 소중합니다. 남자도 소중하고 여자도 소중합니다. 많이 가진 사람도 소중하고 가진 것이 없는 사람도 소중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을 귀히 여기셨기에 오늘날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올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다양성과 함께 통일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다양성이 소중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다양성만을 강조할 때 개인주의로 흘러갈 위험이 있습니다. 개인주의가 확대되면 이기주의로 빠지게 됩니다. 이기주의에 빠지면 나와 다른 사람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분열하기 시작합니다. 포용력과 배려심이 없어집니다. 나만 잘났다고 생각합니다. 교만해집니다. 이것은 다양성을 잘못 오해해서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에 빠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한국사회는 엄청나게 다양화되었습니다. 한국사회처럼 다양한 모습을 존중해주는 사회가 이 세계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곳곳에서는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때로는 지역 이기주의입니다. 때로는 집단 이기주의입니다. 그것이 한국사회를 멍들어가게 하고 있습니다. 정체성을 깨뜨리고 있습니다. 통일성을 사라지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양해지면 다양해질수록 통일성을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교회는 다양하지만 통일성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원하시는 뜻, 하나님의 거룩한 뜻,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려고 하는 하나님의 사명을 가진 믿음의 사람들이 모이는 통일성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각양각색으로 만드신 후에 이것을 전체적으로 묶으셨습니다. 그것이 질서이고 조화입니다. 그것이 아름다움인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아름답게 운행하도록 온 천하 만물을 우리에게 허락해주셨습니다. 그래서 통일성을 상실하게 되면 분쟁과 갈등이 일어납니다. 자기정체성을 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다양성과 통일성을 함께 가져야하는 이유입니다.
반대로 다양성 없이 통일성만을 강조하면 어떤 위험이 있을까요? 획일화될 위험이 있습니다. unity라는 말과 uniformity이라는 말은 다릅니다. unity는 통일성입니다. uniformity는 획일성입니다. 교회는 집단이 아니라 공동체입니다. 교회를 하나로 묶고 있는 것은 획일성이 아니라 통일성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주신 목표를 향해서 달려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건강한 교회가 됩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건강하고 영적인 몸으로서의 교회가 되기를 요청받고 있습니다.

내가 역할을 충실히 감당할 때 교회가 바르게 세워집니다

그렇다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교회공동체를 위한 건강한 영적인 정상세포일까요? 아니면 우리에게 암과 같은 모습이 있어서 우리의 공동체를 파괴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순간부터 정상적인 영적인 세포로서 교회공동체 안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내 역할을 잃어버리게 되면 몸 전체를 위해서 내가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마치 암세포가 자기중심적으로 모든 것을 끌어안듯이 교회를 나 중심으로 끌어가게 될 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남에게 양보하지 않습니다. 남을 배려하지 않습니다. 질서가 없어집니다. 조화가 사라집니다. 나눔이 사라집니다. 마치 암세포가 몸 전체가 무너질 때까지 증식하려는 것처럼 그런 마음은 교회공동체를 무너뜨리고 맙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분에게 우리의 전체가 있는 것입니다. 전체를 생각하지 아니하면 인간은 교만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욕심쟁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자신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고린도전서 12:18)

우리는 각기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눈은 보아야 하고, 코는 냄새를 맡아야 하고, 귀는 들어야 하고, 입은 먹고 말해야 하는 역할이 있습니다. 이 역할 잃어버리면 안 된됩니다. 내 역할, 내게 주신 은사,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것을 바르게 감당할 때에 그 공동체가 바르고 성숙하게 자라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전체의 한 부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때로 우리는 역할을 잊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내가 몸에 속한 지체라는 의식을 망각해버릴 때가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조차 세상의 경쟁논리를 가지고 교회생활을 하려할 때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못 얻은 명예를 교회 안에서 얻으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자신의 욕심대로 뽐내는 자리로 교회를 사용하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인 거룩한 DNA가 파괴됩니다. 그러면 마치 암세포처럼 우리에게 심겨진 욕심과 거짓과 불의로 우리의 삶이 휩쓸려 들어가게 되고 맙니다. 그래서 오늘 바울은 로마서 12장 3절 전반부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로마서 12:3上)

여기 보면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을 믿으면 꿈을 꾸지 말라는 뜻입니까? 예수님을 믿으면 가슴에 비전을 품지 말라는 뜻입니까? 결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주님이 내게 주신 꿈을 꾸고 달려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비전을 내 비전으로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교회에 속한 존재가 되었느냐? 네가 한 몸에 속한 지체가 되었느냐? 그러면 교회전체를 생각할 줄 알아라.” 그리스도가 교회의 주인인 것을 깨닫고 네 역할을 감당하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소망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는 전체 교회의 한 부분입니다. 마찬가지로 한국교회는 세계교회의 한 부분입니다. 그리고 세계교회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더 큰 영적교회의 한 부분인 것입니다. 이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사실을 기억하고 내게 주신 역할이 무엇인지를 알아 그것을 잘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쳐주십니다. 목사가 되면 목사답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직분을 맡게 되면 그 직분을 맡은 것을 감사하면서 맡은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역할이고 축복된 교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게서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십시오

그런데 교회에서조차 세상의 경쟁적인 논리를 도입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 우리는 어려움에 봉착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로마서 12:3下)

믿음의 분량대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들, 하나님이 내게 주신 믿음대로, 내게 주신 품성대로, 내게 주신 은사대로 하나님을 위해서 이 모든 것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것을 드리지 못하게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교만과 열등감입니다. 교만이란 열등감의 드러난 모습이고 열등감이란 교만의 감추어진 모습입니다. 열등감을 조금만 열어보면 그 속에 맺혀진 것이 있습니다. 그 속에 콤플렉스가 있습니다. 그 속에 자기 회개를 못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기적이고 탐욕적이게 됩니다. 자기통제가 안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최근의 의학자들은 어떻게 하면 암세포를 다시 정상세포로 돌릴 수 있을까를 연구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안에 있는 영적 암세포는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요? 그것은 오직 한 가지뿐입니다. 내가 가진 잘못을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그 분의 사랑의 은혜 앞에 굴복해야 합니다. 그러면 내 속에 있는 교만의 암세포, 탐욕의 암세포, 나 자신만을 아는 암세포 덩어리들이 떨어져나갑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신 거룩한 믿음의 공동체를 향하여 내가 어떻게 쓰임 받을까를 마음속에 열망하면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때에 교회가 바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나를 통하여 주님의 거룩한 뜻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저는 부족합니다. 저는 잘못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주님 앞에 회개하고 주님의 거룩한 뜻 안에서 주님의 은총을 발견하기 원합니다.” 그리할 때에 이 공동체에 하나님께서 새 역사를 이루실 것입니다. 소망교회를 통해서 이 땅에 하나 된 교회가 세워지기 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자매를 섬기는 축복의 역사가 소망교회와 성도님들을 통해서 온 땅에 나타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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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2: 3 ~ 8

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4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6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7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8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암은 사람에게 있어서 공포의 질병입니다

누구나 두려워하는 질병이 있다면 그것은 암이라는 질병일 것입니다. 1955년부터 2009년까지 우리나라의 사망통계를 보면 암으로 죽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1995년에는 5만 명이 암으로 죽었는데, 2009년에는 암으로 죽은 사람이 69,780명으로 약 2만 명이라는 숫자가 더 늘어났습니다. 이에 따르면 인구 10만 명당 140명이 암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사망률도 암이 가장 높아서 전체 사망률의 28%가 넘습니다. 이것은 4분의 1 이상이 암으로 죽어간다는 통계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암에 걸렸다고 하면 가장 먼저 죽음을 생각합니다. 건강한 사람도 암이라는 질병 앞에서는 두려워 떨고 애통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암이라는 질병은 왜 다른 질병들보다 무서운 것일까요? 그것은 현대의학도 암에 대해서는 쉽게 정복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완전히 치유됐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재발되었다는 소식에 옆에 있는 사람까지도 깜짝 놀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암이라는 질병과 투쟁하고 싸워 이긴 분들을 귀히 여기고 함께 기뻐합니다. 믿음과 용기를 가지고 투쟁하여 이겨나갔기 때문입니다.

암세포는 몸 전체를 죽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인간의 몸은 60조개나 되는 세포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본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몸 전체를 정상세포로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정상세포가 어떤 충격을 받고 유전자가 변화되면서 암세포로 변질됩니다. 그런데 정상세포와 암세포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둘 다 증식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결정적인 차이가 납니다. 정상세포는 증식되다가도 자신이 속한 생명체 전체의 필요를 늘 염두하고 있습니다. 아주 지혜롭습니다. 그리고 전체를 위해서는 언제든지 자신이 소모될 각오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장을 조절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증식하다가도 어느 순간에 내 역할이 다 끝났다고 생각되면 그 정상세포는 노화 상태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새로운 정상세포가 나타난 그 자리에 자신은 양보하고 소멸되어집니다.
그런데 암세포는 그렇지 않습니다. 생성과 소멸이라는 이 과정을 거절합니다. 노화되지 않으려고 합니다. 끊임없이 증식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담당해야할 자기의 역할과 본분을 잃어버립니다. 이 암세포의 모습을 보면 마치 탐욕스러운 인간의 모습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아주 이기적입니다. 그리고 탐욕스럽습니다. 자기 절제와 통제가 안 됩니다. 그리고 다른 세포들까지도 모두 잡아들입니다. 몸에 전이가 된다는 것이 바로 이것을 뜻합니다. 그러면 이 암세포는 언제까지 증식할까요? 자신이 속해있는 전체 생명체가 완전히 죽을 때까지 증식합니다. 그래서 암세포는 무서운 것입니다. 암세포는 항상 전체를 고려하지 않는 이기적인 욕심쟁이입니다. 자기 멋대로 분열하면서 통제의 기능을 결여하고 있습니다. 자동차를 샀는데 액셀러레이터는 있고 브레이크가 없다면 그 차를 타고 다닐 수 있겠습니까? 통제 기능이 없는 자동차는 파멸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건강한 몸을 가지기 원합니다

그래서 현대의학은 암을 제거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암세포만을 골라서 제거할 수 있을까요? 때로는 약품을 사용합니다. 때로는 방사선을 쬐입니다. 때로는 수술해서 환부를 도려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왜 문제가 있습니까? 암세포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정상세포들까지 다 죽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치료법들에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현대의학에서는 새로운 치료의 방향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 몸속에 있는 정상세포가 어느 날 유전자변형이 일어나서 암세포가 되는 것이라면 반대로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암세포를 정상세포로 바꿀 수는 없는가? 최근 네이쳐지라는 과학지에서는 AMPK라는 효소를 암세포에 투여하여 정상세포로 변화시킨 사례를 소개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획기적인 방법임에는 틀림없으나 아직까지는 초보적인 단계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암세포가 생기지 않도록 암세포의 원인이 되는 정신적인 스트레스, 과로, 운동 부족, 잘못된 식생활 습관을 피하는 것에 집중합니다.
이처럼 어떻게 하면 건강한 몸을 지닐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우리의 평생 과제입니다. 한곳만 아파도 우리의 몸 전체가 쑤셔오기 때문에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건강한 몸을 가지려는 것은 인간 모두의 소원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교회공동체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도 바울은 2000년 전에 오늘날과 같은 과학적 지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교회공동체를 몸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는 몸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거대한 몸에 속해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교회를 몸이라고 말하면서 교회란 행정조직이나 사람들의 집단이 아니라 생명체처럼 살아 움직이는 공동체라고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교회란 살아있는 것입니다. 마치 심장에서부터 솟아나온 혈액이 모든 세포 와 혈관 속에서 움직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교회공동체에 들어오면 예수님의 영이 우리를 붙들어서 살아있는 하나님의 몸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십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교회란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통일체를 이루는 동시에 그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세포처럼 그 몸을 이루고 있다.” 교회는 우리 각자의 모습이 다르듯이 다양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똑같이 고백합니다. “내가 주님 앞에서 죄인입니다. 예수님만이 나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아바 아버지이십니다.” 이 통일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 교회입니다.

교회 안에는 다양성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로마서 12:5)

우리는 교회를 생각할 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모두를 하나님께서 불러주셨다는 다양성을 기억해야 합니다. 교회가 다양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만드실 때에도 다양하게 만드셨습니다. 식물들도 다양하게 만드셨습니다. 동물들도 다양하게 만드셨습니다. 인간의 모습도 다양하게 만드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그래서 다양성은 사람의 일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교회가 다양성을 강조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바로 각 사람의 자유와 개성을 존중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개인 한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종교입니다. 예수님이 다양성을 귀히 여기신다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도피해있을 때, 하나님은 나 같은 사람을 알지 못할 거라고 탄식하며 나 스스로도 어찌할 줄 몰라 하고 있을 때조차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찾아오셔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사랑하는 딸이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다양성을 귀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의도 때문에 우리는 주님 앞에 나아올 수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지만 동시에 개별적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나’라는 사람의 존재 그 자체가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더 이상 숨어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 앞에서는 숨어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 하나 귀하지 않은 존재가 없습니다. 독립적입니다. 교회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어느 사람도 예외가 없습니다. 나이가 많은 분도 소중한 것이고 젊은 사람도 소중합니다. 남자도 소중하고 여자도 소중합니다. 많이 가진 사람도 소중하고 가진 것이 없는 사람도 소중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을 귀히 여기셨기에 오늘날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올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다양성과 함께 통일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다양성이 소중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다양성만을 강조할 때 개인주의로 흘러갈 위험이 있습니다. 개인주의가 확대되면 이기주의로 빠지게 됩니다. 이기주의에 빠지면 나와 다른 사람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분열하기 시작합니다. 포용력과 배려심이 없어집니다. 나만 잘났다고 생각합니다. 교만해집니다. 이것은 다양성을 잘못 오해해서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에 빠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한국사회는 엄청나게 다양화되었습니다. 한국사회처럼 다양한 모습을 존중해주는 사회가 이 세계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곳곳에서는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때로는 지역 이기주의입니다. 때로는 집단 이기주의입니다. 그것이 한국사회를 멍들어가게 하고 있습니다. 정체성을 깨뜨리고 있습니다. 통일성을 사라지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양해지면 다양해질수록 통일성을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교회는 다양하지만 통일성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원하시는 뜻, 하나님의 거룩한 뜻,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려고 하는 하나님의 사명을 가진 믿음의 사람들이 모이는 통일성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각양각색으로 만드신 후에 이것을 전체적으로 묶으셨습니다. 그것이 질서이고 조화입니다. 그것이 아름다움인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아름답게 운행하도록 온 천하 만물을 우리에게 허락해주셨습니다. 그래서 통일성을 상실하게 되면 분쟁과 갈등이 일어납니다. 자기정체성을 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다양성과 통일성을 함께 가져야하는 이유입니다.
반대로 다양성 없이 통일성만을 강조하면 어떤 위험이 있을까요? 획일화될 위험이 있습니다. unity라는 말과 uniformity이라는 말은 다릅니다. unity는 통일성입니다. uniformity는 획일성입니다. 교회는 집단이 아니라 공동체입니다. 교회를 하나로 묶고 있는 것은 획일성이 아니라 통일성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주신 목표를 향해서 달려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건강한 교회가 됩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건강하고 영적인 몸으로서의 교회가 되기를 요청받고 있습니다.

내가 역할을 충실히 감당할 때 교회가 바르게 세워집니다

그렇다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교회공동체를 위한 건강한 영적인 정상세포일까요? 아니면 우리에게 암과 같은 모습이 있어서 우리의 공동체를 파괴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순간부터 정상적인 영적인 세포로서 교회공동체 안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내 역할을 잃어버리게 되면 몸 전체를 위해서 내가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마치 암세포가 자기중심적으로 모든 것을 끌어안듯이 교회를 나 중심으로 끌어가게 될 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남에게 양보하지 않습니다. 남을 배려하지 않습니다. 질서가 없어집니다. 조화가 사라집니다. 나눔이 사라집니다. 마치 암세포가 몸 전체가 무너질 때까지 증식하려는 것처럼 그런 마음은 교회공동체를 무너뜨리고 맙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분에게 우리의 전체가 있는 것입니다. 전체를 생각하지 아니하면 인간은 교만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욕심쟁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자신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고린도전서 12:18)

우리는 각기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눈은 보아야 하고, 코는 냄새를 맡아야 하고, 귀는 들어야 하고, 입은 먹고 말해야 하는 역할이 있습니다. 이 역할 잃어버리면 안 된됩니다. 내 역할, 내게 주신 은사,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것을 바르게 감당할 때에 그 공동체가 바르고 성숙하게 자라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전체의 한 부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때로 우리는 역할을 잊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내가 몸에 속한 지체라는 의식을 망각해버릴 때가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조차 세상의 경쟁논리를 가지고 교회생활을 하려할 때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못 얻은 명예를 교회 안에서 얻으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자신의 욕심대로 뽐내는 자리로 교회를 사용하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인 거룩한 DNA가 파괴됩니다. 그러면 마치 암세포처럼 우리에게 심겨진 욕심과 거짓과 불의로 우리의 삶이 휩쓸려 들어가게 되고 맙니다. 그래서 오늘 바울은 로마서 12장 3절 전반부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로마서 12:3上)

여기 보면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을 믿으면 꿈을 꾸지 말라는 뜻입니까? 예수님을 믿으면 가슴에 비전을 품지 말라는 뜻입니까? 결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주님이 내게 주신 꿈을 꾸고 달려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비전을 내 비전으로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교회에 속한 존재가 되었느냐? 네가 한 몸에 속한 지체가 되었느냐? 그러면 교회전체를 생각할 줄 알아라.” 그리스도가 교회의 주인인 것을 깨닫고 네 역할을 감당하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소망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는 전체 교회의 한 부분입니다. 마찬가지로 한국교회는 세계교회의 한 부분입니다. 그리고 세계교회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더 큰 영적교회의 한 부분인 것입니다. 이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사실을 기억하고 내게 주신 역할이 무엇인지를 알아 그것을 잘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쳐주십니다. 목사가 되면 목사답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직분을 맡게 되면 그 직분을 맡은 것을 감사하면서 맡은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역할이고 축복된 교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게서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십시오

그런데 교회에서조차 세상의 경쟁적인 논리를 도입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 우리는 어려움에 봉착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로마서 12:3下)

믿음의 분량대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들, 하나님이 내게 주신 믿음대로, 내게 주신 품성대로, 내게 주신 은사대로 하나님을 위해서 이 모든 것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것을 드리지 못하게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교만과 열등감입니다. 교만이란 열등감의 드러난 모습이고 열등감이란 교만의 감추어진 모습입니다. 열등감을 조금만 열어보면 그 속에 맺혀진 것이 있습니다. 그 속에 콤플렉스가 있습니다. 그 속에 자기 회개를 못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기적이고 탐욕적이게 됩니다. 자기통제가 안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최근의 의학자들은 어떻게 하면 암세포를 다시 정상세포로 돌릴 수 있을까를 연구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안에 있는 영적 암세포는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요? 그것은 오직 한 가지뿐입니다. 내가 가진 잘못을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그 분의 사랑의 은혜 앞에 굴복해야 합니다. 그러면 내 속에 있는 교만의 암세포, 탐욕의 암세포, 나 자신만을 아는 암세포 덩어리들이 떨어져나갑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신 거룩한 믿음의 공동체를 향하여 내가 어떻게 쓰임 받을까를 마음속에 열망하면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때에 교회가 바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나를 통하여 주님의 거룩한 뜻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저는 부족합니다. 저는 잘못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주님 앞에 회개하고 주님의 거룩한 뜻 안에서 주님의 은총을 발견하기 원합니다.” 그리할 때에 이 공동체에 하나님께서 새 역사를 이루실 것입니다. 소망교회를 통해서 이 땅에 하나 된 교회가 세워지기 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자매를 섬기는 축복의 역사가 소망교회와 성도님들을 통해서 온 땅에 나타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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