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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만남은 예수님과의 만남입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 있었던 수많은 만남 중에 최고의 만남은 무엇입니까? 저의 경우, 부모님과의 만남, 친구와의 만남,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이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최고의 만남은 예수님과 나 자신과의 만남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났기에 이 자리에 설 수 있고 사랑하는 성도님들과 만날 수 있는 축복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는 것을 믿음이라 하기도 하고, 회개 혹은 회심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만났던 우리의 지난날을 되돌아보면 사람마다 경우와 환경이 다른 것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긴 세월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이런 분들은 차근차근 주님이 누구인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또 긴박한 순간에 충격적으로 예수님을 알게 된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든 그 내면을 살펴보면 비슷한 모습들이 있었던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정신적인 방황과 고뇌가 있었습니다. 외로움과 영혼의 갈급함이 있었습니다. 절망의 아픔과 고통의 순간이 있었습니다.
부모로부터 받은 신앙은 나의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변화와 회심의 유형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신약에 나타난 회심의 유형을 보면 디모데형의 회심과 바울형의 회심이 있습니다. 디모데형의 회심은 부모님을 통해 어릴 적부터 신앙의 훈련을 받고 자라난 것입니다.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디모데후서 1:5)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면서 외할머니의 신앙이 어머니의 신앙으로 전승되었고, 이제는 어머니의 신앙이 아들의 신앙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도 어릴 적부터 예수님을 믿었던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기도도 어릴 적부터 습관적으로 했습니다. 부모님이 헌금을 주면서 예배드리고 오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교회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자연스런 삶의 습관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청소년 시절이 되자 믿음에 대한 회의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어머니의 신앙에서 나의 신앙으로 바뀌면서 생기는 고통입니다. 아버지의 신앙에서 나의 체험적인 신앙으로 변화될 때 생기는 방황입니다. 이때 신앙의 결단과 도약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과 나만의 은밀한 경험이 요구됩니다.
자녀들이 부모의 신앙에서 자신의 신앙으로 바뀌기 위해서는 3인칭의 신앙에서 2인칭의 신앙으로 변모되는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은 2인칭까지를 요구합니다. 신앙은 독백(monolog)이 아닙니다. 신앙은 대화(dialog)입니다. 고백이 동반되지 않는 신앙은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실패하게 될 때 자녀들은 부모님 탓을 합니다. 우리는 어머니의 자궁에서 얻은 신앙을 모태신앙이라고 말하는데 종종 사람들은 ‘모태’신앙이 아닌 ‘못해’신앙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기도하라고 하면 ‘못해!’ 전도하라고 해도 ‘못해!’ 열정적으로 헌신하라고 해도 ‘못해!’ 그래서 그들은 오랫동안 방황하는 아픔을 겪습니다.
저도 모태신앙입니다. 그래서 저도 잘못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로부터 받은 신앙이 나의 신앙으로, 개인적인 고백으로 바뀌어져야만 내 속에서 신앙의 불이 붙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탁월한 인물이었지만 예수님께 저항했습니다
바울형의 회심도 있습니다. 이미 성인이 되어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의 경우입니다. 이런 분들은 굉장히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확신의 사람이요 의지의 사람입니다. 그들은 이미 자신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마음속에 확신도 있습니다. 자기 인생에 대한 자랑도 있고 돈과 재물도 있습니다. 지성과 성품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이런 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는 것은 때로 참 놀랍게 여겨집니다. 제가 세례를 줄 때 보면 여든 살, 아흔 살이 넘으신 분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이들을 보면 하나님께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리고 이 분들의 생애를 주님께서 더욱 축복해 달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도 뒤늦게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사도행전 9:3)
다른 사람들은 그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오직 바울만 그 빛을 보았습니다. 대낮이었으나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그동안 얼마만큼 어둠 속에서 있었는가를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늦게 믿은 사람들은 처음부터 마음속에 예수님에 대한 거부감이 못 박혀 있습니다. 누군가가 와서 끊임없이 교회가자고 말해도 교회에 왜 가느냐고 말합니다. 예수를 믿자고 말하면 나를 믿지 왜 예수를 믿느냐고 말합니다. 영원한 생명이 있다고 말해도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고 질문합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거절하고 거부하며 도전합니다. 때로는 반 기독교적인 신앙을 가지고 대적할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신앙을 모욕하기도 합니다. 바울 역시 그랬습니다.
바울은 인간적으로 볼 때 탁월한 사람이었습니다.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고, 히브리 종교와 헬라 철학을 꿰뚫는 지성을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학문의 대성자였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성이 뛰어나면 실천력은 떨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바울은 실천력도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이런 바울이 예수님께 저항했습니다. 바울의 마음속에는 이런 생각이 있었습니다. ‘나보다 더 지성적인 사람이 어디 있는가? 나보다 율법을 더 잘 지키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는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에도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던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지성으로 예수님께 저항했습니다
바울형의 사람은 믿기 전에 하나님께 아주 강력하게 저항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주로 두 가지로 저항합니다. 한편으로는 지성으로 저항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행동으로 저항합니다. 예수를 늦게 믿은 분들도 그렇게 저항하셨을 것입니다. “내 지성을 설득해봐라! 그러면 내가 예수를 믿겠다!” 그리고 자신만만하게 대항하셨을 것입니다.
이 지성의 반항은 아주 무서운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 묻습니다.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비참한 일들을 하나님은 정말 아십니까?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아이가 죽어가는 것을 하나님은 아십니까? 죄 없는 자가 고난당하고 악한 자가 뻔뻔하게 잘사는 것을 하나님은 아십니까? 하나님, 당신은 어디 계십니까? 하나님, 당신은 이 지상의 일들을 눈으로 보고 계십니까? 가슴으로 느끼고 계십니까? 피눈물 나는 이 현장을 같이 아파하고 계십니까?”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담을 쌓고 하나님을 거절하는 것이 지성의 반항입니다.
오랜 기간 이 지성의 물음을 하다가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은 이어령 씨가 「지성에서 영성으로」라는 책을 냈습니다. 그는 책을 통해 그동안 어떻게 방황했고, 어떻게 지성으로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신에게 다가왔는지, 그리고 이제는 자신의 믿음이 없음을 탄식하면서 믿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가 쓴 탕자의 노래라는 시의 일부분입니다. 여기에는 지성인의 변명이 그대로 녹아 들어가 있습니다.
내가 지금 방황하고 있는 까닭은 사랑을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금 헤매고 있는 까닭은 진실을 배우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금 멀리 떠나고 있는 까닭은 아름다운 순간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은 사랑을 알고 진실을 배우고 아름다움은 보았지만 나에게 믿음이 없는 까닭입니다.
모든 지성인들의 물음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 내게 믿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믿고 싶습니다. 이제 믿음을 시작하겠습니다!” 이때 지성에게 요구되는 것이 자기 침묵이요 자기 절망입니다. 그리고 지성의 물음이 영성의 고백, 사랑의 고백으로 바뀌어 질 때 지성이 승화되어 영성으로 바뀌어 집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믿음은 우리의 지성을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성을 꿰뚫고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와 진리 속에 들어오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신비에 접목하게 됩니다. 하늘의 계시를 받게 됩니다. 우리는 지성의 저항을 통해서 신앙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고민과 고뇌가 필요합니다. 때로는 자기 절망과 지성적인 물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주여 뉘시니이까?’의 고백을 통해서 나의 절망과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할 때 우리는 온전히 변화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행동으로 예수님께 반항했습니다
행동으로 반항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처럼 열심히 사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나만큼 남을 구제하는 사람을 보았는가? 내가 남을 돕는데 얼마나 열심인가?’ 이렇게 자신의 행동을 자랑하면서 하나님께 대듭니다. “하나님 없이도 나는 성실합니다! 하나님 없이도 나는 열심히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바울에게도 그런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율법에 대해서 충성했고, 율법에 흠이 없이 살아왔습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선포를 들었습니다. 이에 그는 행동으로 부딪혔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고 강렬하게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은 자기 절망 속에서 신음하면서 부딪히기 시작한 것입니다.
행동하는 사랑의 봉사자라 말할 수 있는 테레사수녀는 젊을 때 많은 수고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가난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도우면서 썼던 기도문에는 절망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녀의 이런 고백문이 있습니다.
“저의 신앙은 어디 있습니까? 오로지 공허함과 어둠이 있을 뿐입니다. 주여, 헤아릴 수 없는 고통 중에서 저는 믿음을 잃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 일로 부르셨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사랑과 봉사를 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마음에는 큰 공허감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행동 속에 실제로 예수님은 계시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테레사 수녀는 이러한 경험 앞에서 절망했던 한때의 모습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그랬습니다. 지성으로 하나님을 공격했습니다. 행동으로 하나님을 공격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께서 바울을 찾아오셨습니다. 그것이 다메섹도상에서의 사건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바울은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본문을 읽어보면 하나님의 물음과 인간의 물음이 묶여있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앞에 두고 바울 또한 묻습니다. “주여! 당신은 누구십니까?” 이 두 가지의 물음 속에서 하나님은 바울을 붙잡으셨고, 바울은 하나님께 붙잡힌 믿음의 사람이 되어 그의 인생 전체를 주님께 드리게 되었습니다.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사도행전 9:4)
여기에서 ‘어찌하여’라는 말씀 속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너 이제 그만해라! 이제 그 길을 더는 가지 마라! 너의 지성과 행동은 이제 거기서 멈춰서도 된다! 이제는 내 안에 들어와라!” 하나님의 물음 속에는 바울을 향한 꾸중이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울을 초대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있습니다. 그때 바울의 대답이 5절에 나타납니다.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사도행전 9:5)
여기서 바울은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수를 향해서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어떻게 십자가에 못 박힌 자가 주님이 될 수 있는가?’ 그런데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분이 부활하셔서 바울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 때 이미 그는 그분이 주님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자리에서 엎드립니다.
지금까지는 자신의 지성과 능력을 예배했습니다. 자신이 갖고 있는 힘을 예배했습니다. 자신의 의지력과 봉사심을 예배했습니다. 자신의 헌신과 충성이 예배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무릎을 꿇고 주님께 고백합니다. “이제는 내 능력, 내 지성, 내가 갖고 있는 실천력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이제는 하나님만을 예배하겠습니다. 이제는 예수님만 예배하겠습니다. 이제는 예수님께 내 모든 것을 맡기겠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예수님을 향하여 전심으로 예배드릴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과 너무 다른 것을 고백하게 됩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사야 55:8)
하나님께서 이것을 바울에게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모든 것을 주님 앞에 내려놓습니다. 그때 그의 지성이 불꽃같이 발하기 시작합니다. 그의 실천력이 온 세상을 가슴에 품는 행동으로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바울처럼 예수님을 믿음으로 세상 가운데 담대하게 나아가십시오
예수를 믿으면 지성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지성이 꽃을 피우게 됩니다. 예수를 믿으면 의지가 연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의지가 주님과 함께 강력해집니다. 예수를 믿으면 게으른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깨닫고 부지런히 나아가는 사람이 됩니다.
과거에는 두려워했고 무서워했습니다. 과거에는 내 체면을 살피기에 바빴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성공하든 실패하든 상관이 없습니다. 이제는 배부르든 배고프든 상관이 없습니다. 이제는 다른 사람이 나를 조롱하든 칭찬하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주님께서 나의 주인이시기에 담대하게 세상가운데 나아가는 복된 믿음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주님께 예배드릴 때마다 확인하십시오. “주여, 당신이 누구십니까? 나는 당신 앞에서 누구입니까? 주여, 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주님과 더불어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감사함으로 살게 하옵소서!” 주님 앞에 이 고백을 드리면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께 쓰임 받는 믿음의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도행전 9: 1 ~ 9
1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3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5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6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만남은 예수님과의 만남입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 있었던 수많은 만남 중에 최고의 만남은 무엇입니까? 저의 경우, 부모님과의 만남, 친구와의 만남,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이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최고의 만남은 예수님과 나 자신과의 만남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났기에 이 자리에 설 수 있고 사랑하는 성도님들과 만날 수 있는 축복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는 것을 믿음이라 하기도 하고, 회개 혹은 회심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만났던 우리의 지난날을 되돌아보면 사람마다 경우와 환경이 다른 것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긴 세월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이런 분들은 차근차근 주님이 누구인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또 긴박한 순간에 충격적으로 예수님을 알게 된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든 그 내면을 살펴보면 비슷한 모습들이 있었던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정신적인 방황과 고뇌가 있었습니다. 외로움과 영혼의 갈급함이 있었습니다. 절망의 아픔과 고통의 순간이 있었습니다.
부모로부터 받은 신앙은 나의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변화와 회심의 유형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신약에 나타난 회심의 유형을 보면 디모데형의 회심과 바울형의 회심이 있습니다. 디모데형의 회심은 부모님을 통해 어릴 적부터 신앙의 훈련을 받고 자라난 것입니다.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디모데후서 1:5)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면서 외할머니의 신앙이 어머니의 신앙으로 전승되었고, 이제는 어머니의 신앙이 아들의 신앙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도 어릴 적부터 예수님을 믿었던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기도도 어릴 적부터 습관적으로 했습니다. 부모님이 헌금을 주면서 예배드리고 오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교회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자연스런 삶의 습관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청소년 시절이 되자 믿음에 대한 회의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어머니의 신앙에서 나의 신앙으로 바뀌면서 생기는 고통입니다. 아버지의 신앙에서 나의 체험적인 신앙으로 변화될 때 생기는 방황입니다. 이때 신앙의 결단과 도약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과 나만의 은밀한 경험이 요구됩니다.
자녀들이 부모의 신앙에서 자신의 신앙으로 바뀌기 위해서는 3인칭의 신앙에서 2인칭의 신앙으로 변모되는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은 2인칭까지를 요구합니다. 신앙은 독백(monolog)이 아닙니다. 신앙은 대화(dialog)입니다. 고백이 동반되지 않는 신앙은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실패하게 될 때 자녀들은 부모님 탓을 합니다. 우리는 어머니의 자궁에서 얻은 신앙을 모태신앙이라고 말하는데 종종 사람들은 ‘모태’신앙이 아닌 ‘못해’신앙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기도하라고 하면 ‘못해!’ 전도하라고 해도 ‘못해!’ 열정적으로 헌신하라고 해도 ‘못해!’ 그래서 그들은 오랫동안 방황하는 아픔을 겪습니다.
저도 모태신앙입니다. 그래서 저도 잘못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로부터 받은 신앙이 나의 신앙으로, 개인적인 고백으로 바뀌어져야만 내 속에서 신앙의 불이 붙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탁월한 인물이었지만 예수님께 저항했습니다
바울형의 회심도 있습니다. 이미 성인이 되어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의 경우입니다. 이런 분들은 굉장히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확신의 사람이요 의지의 사람입니다. 그들은 이미 자신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마음속에 확신도 있습니다. 자기 인생에 대한 자랑도 있고 돈과 재물도 있습니다. 지성과 성품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이런 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는 것은 때로 참 놀랍게 여겨집니다. 제가 세례를 줄 때 보면 여든 살, 아흔 살이 넘으신 분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이들을 보면 하나님께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리고 이 분들의 생애를 주님께서 더욱 축복해 달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도 뒤늦게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사도행전 9:3)
다른 사람들은 그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오직 바울만 그 빛을 보았습니다. 대낮이었으나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그동안 얼마만큼 어둠 속에서 있었는가를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늦게 믿은 사람들은 처음부터 마음속에 예수님에 대한 거부감이 못 박혀 있습니다. 누군가가 와서 끊임없이 교회가자고 말해도 교회에 왜 가느냐고 말합니다. 예수를 믿자고 말하면 나를 믿지 왜 예수를 믿느냐고 말합니다. 영원한 생명이 있다고 말해도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고 질문합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거절하고 거부하며 도전합니다. 때로는 반 기독교적인 신앙을 가지고 대적할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신앙을 모욕하기도 합니다. 바울 역시 그랬습니다.
바울은 인간적으로 볼 때 탁월한 사람이었습니다.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고, 히브리 종교와 헬라 철학을 꿰뚫는 지성을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학문의 대성자였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성이 뛰어나면 실천력은 떨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바울은 실천력도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이런 바울이 예수님께 저항했습니다. 바울의 마음속에는 이런 생각이 있었습니다. ‘나보다 더 지성적인 사람이 어디 있는가? 나보다 율법을 더 잘 지키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는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에도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던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지성으로 예수님께 저항했습니다
바울형의 사람은 믿기 전에 하나님께 아주 강력하게 저항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주로 두 가지로 저항합니다. 한편으로는 지성으로 저항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행동으로 저항합니다. 예수를 늦게 믿은 분들도 그렇게 저항하셨을 것입니다. “내 지성을 설득해봐라! 그러면 내가 예수를 믿겠다!” 그리고 자신만만하게 대항하셨을 것입니다.
이 지성의 반항은 아주 무서운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 묻습니다.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비참한 일들을 하나님은 정말 아십니까?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아이가 죽어가는 것을 하나님은 아십니까? 죄 없는 자가 고난당하고 악한 자가 뻔뻔하게 잘사는 것을 하나님은 아십니까? 하나님, 당신은 어디 계십니까? 하나님, 당신은 이 지상의 일들을 눈으로 보고 계십니까? 가슴으로 느끼고 계십니까? 피눈물 나는 이 현장을 같이 아파하고 계십니까?”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담을 쌓고 하나님을 거절하는 것이 지성의 반항입니다.
오랜 기간 이 지성의 물음을 하다가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은 이어령 씨가 「지성에서 영성으로」라는 책을 냈습니다. 그는 책을 통해 그동안 어떻게 방황했고, 어떻게 지성으로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신에게 다가왔는지, 그리고 이제는 자신의 믿음이 없음을 탄식하면서 믿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가 쓴 탕자의 노래라는 시의 일부분입니다. 여기에는 지성인의 변명이 그대로 녹아 들어가 있습니다.
내가 지금 방황하고 있는 까닭은 사랑을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금 헤매고 있는 까닭은 진실을 배우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금 멀리 떠나고 있는 까닭은 아름다운 순간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은 사랑을 알고 진실을 배우고 아름다움은 보았지만 나에게 믿음이 없는 까닭입니다.
모든 지성인들의 물음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 내게 믿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믿고 싶습니다. 이제 믿음을 시작하겠습니다!” 이때 지성에게 요구되는 것이 자기 침묵이요 자기 절망입니다. 그리고 지성의 물음이 영성의 고백, 사랑의 고백으로 바뀌어 질 때 지성이 승화되어 영성으로 바뀌어 집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믿음은 우리의 지성을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성을 꿰뚫고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와 진리 속에 들어오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신비에 접목하게 됩니다. 하늘의 계시를 받게 됩니다. 우리는 지성의 저항을 통해서 신앙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고민과 고뇌가 필요합니다. 때로는 자기 절망과 지성적인 물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주여 뉘시니이까?’의 고백을 통해서 나의 절망과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할 때 우리는 온전히 변화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행동으로 예수님께 반항했습니다
행동으로 반항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처럼 열심히 사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나만큼 남을 구제하는 사람을 보았는가? 내가 남을 돕는데 얼마나 열심인가?’ 이렇게 자신의 행동을 자랑하면서 하나님께 대듭니다. “하나님 없이도 나는 성실합니다! 하나님 없이도 나는 열심히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바울에게도 그런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율법에 대해서 충성했고, 율법에 흠이 없이 살아왔습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선포를 들었습니다. 이에 그는 행동으로 부딪혔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고 강렬하게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은 자기 절망 속에서 신음하면서 부딪히기 시작한 것입니다.
행동하는 사랑의 봉사자라 말할 수 있는 테레사수녀는 젊을 때 많은 수고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가난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도우면서 썼던 기도문에는 절망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녀의 이런 고백문이 있습니다.
“저의 신앙은 어디 있습니까? 오로지 공허함과 어둠이 있을 뿐입니다. 주여, 헤아릴 수 없는 고통 중에서 저는 믿음을 잃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 일로 부르셨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사랑과 봉사를 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마음에는 큰 공허감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행동 속에 실제로 예수님은 계시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테레사 수녀는 이러한 경험 앞에서 절망했던 한때의 모습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그랬습니다. 지성으로 하나님을 공격했습니다. 행동으로 하나님을 공격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께서 바울을 찾아오셨습니다. 그것이 다메섹도상에서의 사건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바울은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본문을 읽어보면 하나님의 물음과 인간의 물음이 묶여있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앞에 두고 바울 또한 묻습니다. “주여! 당신은 누구십니까?” 이 두 가지의 물음 속에서 하나님은 바울을 붙잡으셨고, 바울은 하나님께 붙잡힌 믿음의 사람이 되어 그의 인생 전체를 주님께 드리게 되었습니다.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사도행전 9:4)
여기에서 ‘어찌하여’라는 말씀 속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너 이제 그만해라! 이제 그 길을 더는 가지 마라! 너의 지성과 행동은 이제 거기서 멈춰서도 된다! 이제는 내 안에 들어와라!” 하나님의 물음 속에는 바울을 향한 꾸중이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울을 초대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있습니다. 그때 바울의 대답이 5절에 나타납니다.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사도행전 9:5)
여기서 바울은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수를 향해서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어떻게 십자가에 못 박힌 자가 주님이 될 수 있는가?’ 그런데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분이 부활하셔서 바울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 때 이미 그는 그분이 주님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자리에서 엎드립니다.
지금까지는 자신의 지성과 능력을 예배했습니다. 자신이 갖고 있는 힘을 예배했습니다. 자신의 의지력과 봉사심을 예배했습니다. 자신의 헌신과 충성이 예배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무릎을 꿇고 주님께 고백합니다. “이제는 내 능력, 내 지성, 내가 갖고 있는 실천력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이제는 하나님만을 예배하겠습니다. 이제는 예수님만 예배하겠습니다. 이제는 예수님께 내 모든 것을 맡기겠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예수님을 향하여 전심으로 예배드릴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과 너무 다른 것을 고백하게 됩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사야 55:8)
하나님께서 이것을 바울에게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모든 것을 주님 앞에 내려놓습니다. 그때 그의 지성이 불꽃같이 발하기 시작합니다. 그의 실천력이 온 세상을 가슴에 품는 행동으로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바울처럼 예수님을 믿음으로 세상 가운데 담대하게 나아가십시오
예수를 믿으면 지성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지성이 꽃을 피우게 됩니다. 예수를 믿으면 의지가 연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의지가 주님과 함께 강력해집니다. 예수를 믿으면 게으른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깨닫고 부지런히 나아가는 사람이 됩니다.
과거에는 두려워했고 무서워했습니다. 과거에는 내 체면을 살피기에 바빴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성공하든 실패하든 상관이 없습니다. 이제는 배부르든 배고프든 상관이 없습니다. 이제는 다른 사람이 나를 조롱하든 칭찬하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주님께서 나의 주인이시기에 담대하게 세상가운데 나아가는 복된 믿음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주님께 예배드릴 때마다 확인하십시오. “주여, 당신이 누구십니까? 나는 당신 앞에서 누구입니까? 주여, 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주님과 더불어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감사함으로 살게 하옵소서!” 주님 앞에 이 고백을 드리면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께 쓰임 받는 믿음의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