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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기다림을 통해서 우리를 준비시켜 주십니다
누구에게나 청년의 때는 멋진 시기입니다. 청년의 때는 활력이 넘치고 생동감이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청년의 때만큼 질문과 고민이 많은 시기는 없을 것입니다. 많은 젊은이들은 크게 두 가지를 고민합니다. 첫째는 내 짝은 어디에 있는지 고민합니다. 그리고 둘째는 내 인생의 꿈을 어떻게 펼치며 내가 어떤 직장을 선택할지에 대한 고민입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이러한 문제와 고민들이 쉽게 해결되지 않을 때, 그들은 또 다른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은 준비된 자를 선택하시는가? 아니면 하나님께서는 선택된 자를 준비시키시는 분이신가?’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준비된 자를 택하시고, 또한 택하신 자를 준비시키시기 때문입니다. 이 둘은 맞물려 돌아가면서 서로를 보완해줍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아주 어렵고 심각한 질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택하신 것 같은데,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데, 왜 현실은 엉망으로 돌아가는 것일까? 왜 하나님께서 짝지어주신 사람은 쉽게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 나는 왜 직장에서 어려움을 당하는 것일까? 나는 기도하면서 사업하는데 왜 사업이 잘 되지 않고 실패하는 것일까? 우리는 이런 질문들을 하면서 정말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지, 나는 무엇을 기다려야 하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렵고 힘든 일을 당하는 것은 내가 선택받지 못했다는 표징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우리에게 더 큰 비전과 사명을 주시고 우리를 준비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과정입니다. 우리는 기다림을 통해서 더 큰 인내를 배우고 성숙하게 되며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준비됩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를 기다리게 하시는 것일까요? 기다리지 않는 자의 문제를 해결해주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셨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준비되지 않은 자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면 하나님께서 살아계셔서 내 인생을 이끌어가고 계신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은 기다림의 사람이었습니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인재의 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분야에 전문성과 탁월성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내 분야에 대해서 전문적 탁월성을 지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세상에서도 이런 사람을 요구합니다. 또 한 가지 요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공동체를 위해서 헌신할 수 있는 성품의 소유자인지를 묻습니다. 개인만 아는 이기적인 사람이 아니라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을 요구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요구하실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용하시기 전에 먼저 질문하십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높이기 위해서 마음속에 애타는 기다림을 가지고 있는가? 그의 인생 속에 이 기다림을 가지고 준비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는 인간만이 기다린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하나님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는 인간만이 준비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하나님도 긴 세월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마음속에 기다림의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선택하시고 사용하십니다.
본문 말씀은 세례 요한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들의 이름은 사가랴와 엘리사벳으로 준비된 인물이었습니다.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서 충성스러운 인물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누가복음 1:6)
이 말은 그들이 완벽한 의인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들이 맡겨진 일에 충성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전심전력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모하는 열정으로 지금까지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의인이며 흠이 없던 이들에게도 기다림의 아픔이 있었습니다. 아직까지 인생에서 해결되지 않은 부분이 있었습니다.
“엘리사벳이 잉태를 못하므로 그들에게 자식이 없고 두 사람의 나이가 많더라” (누가복음 1:7)
그들은 경건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라고 할 만큼 칭찬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아이가 없었습니다. 2000년 전에 자녀가 없는 것은 재앙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그들에게 아픔이었고 걸림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기다림의 아픔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을 경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기다림의 아픔 속에서 세례요한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세례 요한도 기다림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기다림 속에서 자신이 잉태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삶도 기다림의 삶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세례요한하면 무엇이 떠오릅니까? 세례요한은 들판의 야인이었습니다. 그는 낙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들풀을 먹고 살면서 문명과 세속에 때 묻지 않은 야성적인 자연미를 가진 남성이었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우뚝 서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당시의 권력자들과 종교가들을 꾸짖고 질타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카리스마와 권위를 인정했고 존경했습니다. 그는 불같은 격정을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에게는 기다림이 있었습니다. 불같은 격정 속에서도 기다림이 있는 사람은 부드러워집니다. 세례요한은 불같은 격정 속에서도 양같이 순하고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우리는 세례요한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어떤 분이 세례요한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예수님을 가장 높이기 위해서 자신을 가장 낮추기를 주저하지 않은 인물이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높이기 위해 자신이 낮고 천한 곳에 내려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요한복음 3:30)
어느 누가 이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쉽게 나오는 말입니까? 이 말은 인간의 이기심을 타파하는 강력한 자기 선언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최고라고 착각하며 인생을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인간은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괴짜 심리학」이라는 책에 실려 있는 재미있는 설문조사가 있습니다. 미국인들에게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사람들은 당시 미국대통령이었던 빌 클린턴이 천국에 들어갈 것인가라는 물음에 약 52%가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영국의 다이애나 왕세자비는 60%로 클린턴보다 조금 높았습니다. 그리고 2위를 차지한 사람은 인도의 캘커타에서 구제활동을 했던 유명한 테레사 수녀로 79%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87%의 지지를 받고 1등이 된 인물이 있었습니다. 과연 누구일까요? 그것은 바로 앙케이트 대상자였던 나 자신이었습니다.
어쩌면 인간의 자아중심성이란 자신을 보호하고자 하는 본능 속에서 나오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이것을 무시했습니다. 자아보호본능을 포기했습니다. 그는 자기중심성을 탈피한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보다 시간적으로 먼저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먼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중 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였습니다. 회개의 세례를 베풀 때 수많은 사람들이 세례요한에게 다가왔습니다. 세례요한은 사람들이 메시아 혹은 엘리야로 여길 만큼 자랑스럽고 인기 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등장했을 때 자기 자신을 낮추기 시작합니다. 신부를 맞이할 신랑은 내가 아니고 바로 내 뒤에 오시는 예수님이라고 하면서 자신은 그저 신랑을 돕는 친구일 뿐이라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요한복음 3:29)
자신은 신랑의 친구가 된 것만으로도 기쁘고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그는 모든 영광을 예수님께 돌렸습니다.
세례요한은 오직 예수님만 높였습니다
세례요한은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분파를 만들지도 않았습니다. 세례요한에게는 제자들이 참 많았습니다. 그 중 안드레는 세례요한의 탁월한 제자였습니다. 그런데 자기 스승인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향하여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는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가 만났습니다. 그리고 곧장 집으로 가서 자기 형 베드로를 전도하여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자기 품에서 떠나가는 제자를 보는 것이 쉽겠습니까? 얼마나 괴롭고 힘든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세례요한은 그것을 용납했습니다. 그러면서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외칩니다.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요한복음 1:23)
예수님은 말씀이요, 나는 소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계시이자 지혜요, 나는 그저 그것을 가르치는 음성에 불과한 존재라고 자신을 겸손하게 소개합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한복음 1:29)
세례요한은 말합니다. “나를 보지마라. 예수님을 바라보아라. 나에게 영광을 돌리지마라. 예수님께 영광을 돌려라. 저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저분 안에서만 우리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 예수님이야말로 하늘의 메시아다!” 우리는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높이기 위해서 전력을 다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사랑하는 친구가 있습니까? 어떤 친구를 높여주십니까? 내 마음속에 사랑이 생기지 않으면 상대방을 깎아내리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남편과 아내여도, 친구여도 똑같습니다. 그런데 사랑하게 되면 남을 세워줍니다. 이러한 세례요한의 모습을 보면 안도연이 쓴 ‘어둠이 되어’라는 시가 생각납니다.
그대가 한밤 내
초롱초롱 별이 되고 싶다면
나는 밤새도록
눈도 막고 귀도 막고
그대의 등 뒤에서
어둠이 되어 주겠습니다.
세례요한의 마음이 이러했습니다. ‘당신은 빛나십시오. 나는 어둠 속에 있겠습니다. 당신은 높아지십시오. 나는 낮고 천한 자리에 내려가겠습니다. 당신이 영광을 받으시면 나는 어떤 일을 당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당신이 흥하면 나는 사라져도 괜찮습니다. 당신을 알리는 것,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 당신이 이 세상의 구원자라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 내 인생의 목적입니다!’
우리 안에도 이러한 마음이 있습니까? ‘예수님, 나를 통해서 영광 받아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이 세상에서 높아지기를 원합니다. 내가 예수님 때문에 고통을 당해도 감수하겠습니다. 예수님이 높아지고 내가 낮아져도, 예수님이 빛나고 내가 어두워져도 괜찮습니다!’ 이것은 대단한 신앙이요 사랑입니다. 세례요한에게는 이러한 모습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세례요한보다 더 큰 자들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승천하신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예수님보다 3년이나 빨리 죽었습니다. 세례요한의 나이는 30세로 그는 젊음을 주님께 바쳤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세례요한을 보면서 누가복음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누가복음 7:28 상반절)
세례요한은 여인이 낳은 자 중에 최고의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준비했기에 내가 왔고, 그가 기다렸기에 내가 왔다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으로 인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생명의 역사가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보다 더 큰 자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더 놀라운 말씀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하시니” (누가복음 7:28 하반절)
세례요한은 하나님을 아바아버지라고 부르는 자녀의 축복을 예수님으로부터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바아버지라고 부르며 죄 용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하늘의 지혜와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에 들어온 자는 아무리 미미한 자라도 여인이 낳은 자 중에 최고의 인물인 세례 요한보다 더 위대하다고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에 어려움이 있다고 나를 택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인생이 어렵다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다림의 아픔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준비하는 것이 얼마나 큰 대가를 치러야하는 것인지 우리의 인생 속에서 가르쳐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바로 우리를 사용하시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우리가 잘 감당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기다림 속에서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를 경험합시다
우리는 주님께서 다시 오실 재림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기도하면서 아뢰는 것이 무엇입니까? ‘2000년 전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시여, 이제 성령으로 내게 오셔서 내 마음과 생각과 영혼에 임재 하여 주옵소서.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과 기쁨을 내게 주옵소서. 성령님이시여, 내 머리 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안수하여 주셔서 내 연약한 육체를 치유하시고, 나를 억압하는 악한 세포들을 다 소멸하옵소서.’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기다리면서 하나님의 영적인 임재를 경험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대림절입니다. 마지막 날에 영광의 주로 재림하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이 대림절의 참된 모습입니다.
우리는 기다림을 귀한 것으로 간직할 줄 알아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다림의 아픔과 애통함을 갖고 있는 자를 찾아 영적인 축복과 물질의 축복을 주십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높이고 나를 낮추십시오. 그때 주님께서 다가오셔서 말씀하실 것입니다. “네가 나를 높이 여기느냐? 나도 너를 높이 여기겠다. 네가 나를 존귀하게 여겼느냐? 나도 너를 존귀하게 여기겠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의 인생에는 기다림이 있습니다. 기다림은 귀한 것입니다. 때로는 아프기도 합니다.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눈물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도우심,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은총, 하나님의 치유, 하나님의 회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 놀라운 축복을 경험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주님을 기다리며 하나님을 맞이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누가복음 1: 5 ~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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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기다림을 통해서 우리를 준비시켜 주십니다
누구에게나 청년의 때는 멋진 시기입니다. 청년의 때는 활력이 넘치고 생동감이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청년의 때만큼 질문과 고민이 많은 시기는 없을 것입니다. 많은 젊은이들은 크게 두 가지를 고민합니다. 첫째는 내 짝은 어디에 있는지 고민합니다. 그리고 둘째는 내 인생의 꿈을 어떻게 펼치며 내가 어떤 직장을 선택할지에 대한 고민입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이러한 문제와 고민들이 쉽게 해결되지 않을 때, 그들은 또 다른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은 준비된 자를 선택하시는가? 아니면 하나님께서는 선택된 자를 준비시키시는 분이신가?’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준비된 자를 택하시고, 또한 택하신 자를 준비시키시기 때문입니다. 이 둘은 맞물려 돌아가면서 서로를 보완해줍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아주 어렵고 심각한 질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택하신 것 같은데,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데, 왜 현실은 엉망으로 돌아가는 것일까? 왜 하나님께서 짝지어주신 사람은 쉽게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 나는 왜 직장에서 어려움을 당하는 것일까? 나는 기도하면서 사업하는데 왜 사업이 잘 되지 않고 실패하는 것일까? 우리는 이런 질문들을 하면서 정말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지, 나는 무엇을 기다려야 하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렵고 힘든 일을 당하는 것은 내가 선택받지 못했다는 표징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우리에게 더 큰 비전과 사명을 주시고 우리를 준비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과정입니다. 우리는 기다림을 통해서 더 큰 인내를 배우고 성숙하게 되며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준비됩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를 기다리게 하시는 것일까요? 기다리지 않는 자의 문제를 해결해주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셨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준비되지 않은 자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면 하나님께서 살아계셔서 내 인생을 이끌어가고 계신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은 기다림의 사람이었습니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인재의 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분야에 전문성과 탁월성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내 분야에 대해서 전문적 탁월성을 지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세상에서도 이런 사람을 요구합니다. 또 한 가지 요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공동체를 위해서 헌신할 수 있는 성품의 소유자인지를 묻습니다. 개인만 아는 이기적인 사람이 아니라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을 요구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요구하실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용하시기 전에 먼저 질문하십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높이기 위해서 마음속에 애타는 기다림을 가지고 있는가? 그의 인생 속에 이 기다림을 가지고 준비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는 인간만이 기다린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하나님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는 인간만이 준비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하나님도 긴 세월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마음속에 기다림의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선택하시고 사용하십니다.
본문 말씀은 세례 요한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들의 이름은 사가랴와 엘리사벳으로 준비된 인물이었습니다.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서 충성스러운 인물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누가복음 1:6)
이 말은 그들이 완벽한 의인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들이 맡겨진 일에 충성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전심전력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모하는 열정으로 지금까지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의인이며 흠이 없던 이들에게도 기다림의 아픔이 있었습니다. 아직까지 인생에서 해결되지 않은 부분이 있었습니다.
“엘리사벳이 잉태를 못하므로 그들에게 자식이 없고 두 사람의 나이가 많더라” (누가복음 1:7)
그들은 경건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라고 할 만큼 칭찬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아이가 없었습니다. 2000년 전에 자녀가 없는 것은 재앙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그들에게 아픔이었고 걸림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기다림의 아픔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을 경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기다림의 아픔 속에서 세례요한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세례 요한도 기다림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기다림 속에서 자신이 잉태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삶도 기다림의 삶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세례요한하면 무엇이 떠오릅니까? 세례요한은 들판의 야인이었습니다. 그는 낙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들풀을 먹고 살면서 문명과 세속에 때 묻지 않은 야성적인 자연미를 가진 남성이었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우뚝 서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당시의 권력자들과 종교가들을 꾸짖고 질타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카리스마와 권위를 인정했고 존경했습니다. 그는 불같은 격정을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에게는 기다림이 있었습니다. 불같은 격정 속에서도 기다림이 있는 사람은 부드러워집니다. 세례요한은 불같은 격정 속에서도 양같이 순하고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우리는 세례요한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어떤 분이 세례요한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예수님을 가장 높이기 위해서 자신을 가장 낮추기를 주저하지 않은 인물이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높이기 위해 자신이 낮고 천한 곳에 내려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요한복음 3:30)
어느 누가 이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쉽게 나오는 말입니까? 이 말은 인간의 이기심을 타파하는 강력한 자기 선언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최고라고 착각하며 인생을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인간은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괴짜 심리학」이라는 책에 실려 있는 재미있는 설문조사가 있습니다. 미국인들에게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사람들은 당시 미국대통령이었던 빌 클린턴이 천국에 들어갈 것인가라는 물음에 약 52%가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영국의 다이애나 왕세자비는 60%로 클린턴보다 조금 높았습니다. 그리고 2위를 차지한 사람은 인도의 캘커타에서 구제활동을 했던 유명한 테레사 수녀로 79%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87%의 지지를 받고 1등이 된 인물이 있었습니다. 과연 누구일까요? 그것은 바로 앙케이트 대상자였던 나 자신이었습니다.
어쩌면 인간의 자아중심성이란 자신을 보호하고자 하는 본능 속에서 나오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이것을 무시했습니다. 자아보호본능을 포기했습니다. 그는 자기중심성을 탈피한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보다 시간적으로 먼저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먼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중 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였습니다. 회개의 세례를 베풀 때 수많은 사람들이 세례요한에게 다가왔습니다. 세례요한은 사람들이 메시아 혹은 엘리야로 여길 만큼 자랑스럽고 인기 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등장했을 때 자기 자신을 낮추기 시작합니다. 신부를 맞이할 신랑은 내가 아니고 바로 내 뒤에 오시는 예수님이라고 하면서 자신은 그저 신랑을 돕는 친구일 뿐이라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요한복음 3:29)
자신은 신랑의 친구가 된 것만으로도 기쁘고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그는 모든 영광을 예수님께 돌렸습니다.
세례요한은 오직 예수님만 높였습니다
세례요한은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분파를 만들지도 않았습니다. 세례요한에게는 제자들이 참 많았습니다. 그 중 안드레는 세례요한의 탁월한 제자였습니다. 그런데 자기 스승인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향하여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는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가 만났습니다. 그리고 곧장 집으로 가서 자기 형 베드로를 전도하여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자기 품에서 떠나가는 제자를 보는 것이 쉽겠습니까? 얼마나 괴롭고 힘든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세례요한은 그것을 용납했습니다. 그러면서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외칩니다.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요한복음 1:23)
예수님은 말씀이요, 나는 소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계시이자 지혜요, 나는 그저 그것을 가르치는 음성에 불과한 존재라고 자신을 겸손하게 소개합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한복음 1:29)
세례요한은 말합니다. “나를 보지마라. 예수님을 바라보아라. 나에게 영광을 돌리지마라. 예수님께 영광을 돌려라. 저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저분 안에서만 우리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 예수님이야말로 하늘의 메시아다!” 우리는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높이기 위해서 전력을 다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사랑하는 친구가 있습니까? 어떤 친구를 높여주십니까? 내 마음속에 사랑이 생기지 않으면 상대방을 깎아내리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남편과 아내여도, 친구여도 똑같습니다. 그런데 사랑하게 되면 남을 세워줍니다. 이러한 세례요한의 모습을 보면 안도연이 쓴 ‘어둠이 되어’라는 시가 생각납니다.
그대가 한밤 내
초롱초롱 별이 되고 싶다면
나는 밤새도록
눈도 막고 귀도 막고
그대의 등 뒤에서
어둠이 되어 주겠습니다.
세례요한의 마음이 이러했습니다. ‘당신은 빛나십시오. 나는 어둠 속에 있겠습니다. 당신은 높아지십시오. 나는 낮고 천한 자리에 내려가겠습니다. 당신이 영광을 받으시면 나는 어떤 일을 당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당신이 흥하면 나는 사라져도 괜찮습니다. 당신을 알리는 것,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 당신이 이 세상의 구원자라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 내 인생의 목적입니다!’
우리 안에도 이러한 마음이 있습니까? ‘예수님, 나를 통해서 영광 받아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이 세상에서 높아지기를 원합니다. 내가 예수님 때문에 고통을 당해도 감수하겠습니다. 예수님이 높아지고 내가 낮아져도, 예수님이 빛나고 내가 어두워져도 괜찮습니다!’ 이것은 대단한 신앙이요 사랑입니다. 세례요한에게는 이러한 모습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세례요한보다 더 큰 자들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승천하신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예수님보다 3년이나 빨리 죽었습니다. 세례요한의 나이는 30세로 그는 젊음을 주님께 바쳤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세례요한을 보면서 누가복음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누가복음 7:28 상반절)
세례요한은 여인이 낳은 자 중에 최고의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준비했기에 내가 왔고, 그가 기다렸기에 내가 왔다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으로 인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생명의 역사가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보다 더 큰 자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더 놀라운 말씀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하시니” (누가복음 7:28 하반절)
세례요한은 하나님을 아바아버지라고 부르는 자녀의 축복을 예수님으로부터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바아버지라고 부르며 죄 용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하늘의 지혜와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에 들어온 자는 아무리 미미한 자라도 여인이 낳은 자 중에 최고의 인물인 세례 요한보다 더 위대하다고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에 어려움이 있다고 나를 택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인생이 어렵다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다림의 아픔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준비하는 것이 얼마나 큰 대가를 치러야하는 것인지 우리의 인생 속에서 가르쳐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바로 우리를 사용하시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우리가 잘 감당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기다림 속에서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를 경험합시다
우리는 주님께서 다시 오실 재림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기도하면서 아뢰는 것이 무엇입니까? ‘2000년 전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시여, 이제 성령으로 내게 오셔서 내 마음과 생각과 영혼에 임재 하여 주옵소서.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과 기쁨을 내게 주옵소서. 성령님이시여, 내 머리 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안수하여 주셔서 내 연약한 육체를 치유하시고, 나를 억압하는 악한 세포들을 다 소멸하옵소서.’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기다리면서 하나님의 영적인 임재를 경험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대림절입니다. 마지막 날에 영광의 주로 재림하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이 대림절의 참된 모습입니다.
우리는 기다림을 귀한 것으로 간직할 줄 알아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다림의 아픔과 애통함을 갖고 있는 자를 찾아 영적인 축복과 물질의 축복을 주십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높이고 나를 낮추십시오. 그때 주님께서 다가오셔서 말씀하실 것입니다. “네가 나를 높이 여기느냐? 나도 너를 높이 여기겠다. 네가 나를 존귀하게 여겼느냐? 나도 너를 존귀하게 여기겠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의 인생에는 기다림이 있습니다. 기다림은 귀한 것입니다. 때로는 아프기도 합니다.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눈물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도우심,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은총, 하나님의 치유, 하나님의 회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 놀라운 축복을 경험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주님을 기다리며 하나님을 맞이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