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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죽으심에 참여하는 길
<사순절을 보내며 바울이 전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의 의미를 돌아봅니다.>
우리가 사순절이나 고난 주간을 보낼 때마다 흔히 듣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다”라는 표현입니다. 때로는 이 말이 부담스럽게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순절이 되면 많은 경건한 신앙인들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려는 노력을 합니다. 어떤 이들은 일정 기간의 금식을 통해 기도에 집중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자신이 좋아했던 간식이나 기호품, 미디어를 절제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말을 아끼면서 내면의 소리에 집중하며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고, 그리스도의 고난과 관련된 그림이나 영화, 영상 같은 자료들을 보면서 기도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종교 수행을 하면서 “주님의 고난에 참여한다”라고 이야기하곤 합니다. 이것이 쓸데없는 일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의 수난을 기억하고 묵상하며 주님의 은혜를 헤아리고 감사하는 것은 신앙생활에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고난 참여가 혹시나 자기의 공로나 자랑이 되고, 형식적인 행위나 율법적인 구원의 조건이 된다면, 이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를 모독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의 이 말을 기억합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골 1:24)
이 말씀을 읽을 때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다가옵니다. 이 말씀은 어떤 말씀일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데 있어 아직 다 이루지 못한 고난이 있다는 말씀일까요? 그래서 우리가 무엇인가를 채워야만 구원이 완성된다는 뜻이겠습니까?
우리는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오해할 때가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가 항상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고난에는 절대로 부족함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인류 구원과 나의 구원을 위하여 전혀 부족함이 없습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더 해야 구원이 완성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믿음이자 이단 사상이 되고 말 것입니다.
바울이 골로새서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복음이 전해지고 세워진 교회가 유지되기 위한 모든 수고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데 고난이 부족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우리 삶에 이어지는 여정 속에, 그리고 교회가 세워지고 복음이 전파되는 모든 과정 속에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바울은 성찬을 통해 우리가 주님의 고난과 죽으심을 기억하고 세상에 전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관점을 더 명료하게 밝히는 본문이 오늘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고전 11:23~25)
이 말씀은 성찬 때마다 늘 듣는 말씀입니다. 성목요일이 되면 성찬식을 거행하는데, 그때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함께 읽고 묵상합니다. 학자들은 이 말씀 부분을 성찬 제정사(聖餐 制定史, The Institution of the Lord’s Supper) 혹은 제정의 말씀(The Words of Institution)이라고 구별하여 부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말씀은 예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성찬을 제정하셨던 말씀은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하는 공관복음서에 나타나 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마가복음 14장, 누가복음 22장에 성찬 제정의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 세 가지 말씀 중 마태복음의 경우를 보면 이렇습니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 26:26~28)
복음서마다 강조점이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공관복음 모두 예수님이 자신을 내어 주시던 그 밤에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시며 성찬을 제정하셨음을 증언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인 고린도전서 11장은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은 아니며, 바울이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을 인용하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찬 제정의 말씀을 전하기에 앞서 다음과 같이 덧붙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고전 11:23a)
주님으로부터 전수받은 내용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바울은 성찬 제정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마치 직접 인용을 하듯이 인용합니다. 그런데 공관복음과 차별되는 한 가지가 이 본문 속에 들어 있습니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고전 11:26)
이 말씀은 바울이 성찬 설명에 덧붙이는 해설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성찬을 설명하면서 우리가 성찬을 받을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한다고 말합니다. 즉, 성찬은 ‘주의 죽으심을 전하는 것, 기억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예수님의 성찬 제정에 대한 말씀을 하면서 ‘성찬은 주의 죽으심을 전하는 것’이라는 말씀을 함께 전하는 것일까요? 성찬의 의미가 이것 하나뿐이기 때문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 여러 곳에 나오는 성찬과 관련된 말씀을 읽어 보면, 그 안에 다양한 신학적인 주제들이 함께 어우러져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내용 속에 “죄 사함을 얻게 하려는”이라는 표현을 넣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성찬이 ‘죄 사함’을 얻게 하는 은혜의 도구라는 사실을 분명히 전해 줍니다.
그런데 바울은 성찬을 설명하면서 “주의 죽으심을 전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 바울은 고린도서에서 이와 같은 해석을 하고 있을까요? 그 이유를 이해하려면 고린도전서 11장의 흐름을 조금 더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교인 간의 분열을 방치하며 성찬을 나누었던 고린도교회를 책망하며 성찬의 또 다른 의미를 밝힙니다.>
바울은 성찬 관련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다음에 지시하려는 일에 대해서는 나는 여러분을 칭찬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모여서 하는 일이 유익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고전 11:17, 새번역)
이 단락에서 바울은 조금 전까지 여자가 쓰는 너울과 관련된 주제를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17절에서 새로운 주제 하나를 꺼냅니다. 바로 성찬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 주제는 고린도 교인들을 책망할 수밖에 없는 주제라는 사실을 먼저 밝히면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고전 11:17a)
한마디로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행하고 있는 성찬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바울이 말하려고 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는 이렇게 말을 이어 갑니다.
첫째로, 여러분이 교회에 모일 때에 여러분 가운데 분열이 있다는 말이 들리는데, 그것이 어느 정도는 사실이라고 믿습니다. (고전 11:18, 새번역)
바울은 살짝 비꼬듯이 이런 말을 덧붙입니다. 물론 바르게 사는 사람들이 환히 드러나려면 이렇게 파당을 짓는 나쁜 사람들도 좀 있어야겠다고 언급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이 분열되어 있으니, 여러분이 한 자리에 모여서 먹어도, 그것은 주님의 만찬을 먹는 것이 아닙니다. (고전 11:20, 새번역)
바울은 성찬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면서 분열해 있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책망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분열한 상태로는 성찬을 제대로 받을 수 없다, 주님의 만찬을 제대로 받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을 전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분열해 있기에 그들이 받는 성찬이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바울은 이어서 말합니다.
먹을 때에, 사람마다 제가끔 자기 저녁을 먼저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배가 고프고, 어떤 사람은 술에 취합니다. (고전 11:21, 새번역)
이 말씀의 내용을 이해하려면 당시 초대교회 예배 상황을 조금 더 자세하게 알 필요가 있습니다. 초대교회에는 오늘날처럼 별도의 예배당 건물이 있지 않았기에 주로 부유한 성도들의 집에서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한마디로 가정교회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모일 때마다 성찬이 베풀어졌는데, 항상 애찬(Love Feast)과 더불어 거행되곤 했습니다. 즉, 먼저 식사를 충분히 나누고서 마지막에 성찬이 이어졌습니다. 이것이 초대교회 예배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찬가지로 제자들과 식사하시던 중에 떡을 들어 축사하시고, 또 잔을 들어 축사하신 후에 성찬을 제정하셨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마 26:26a)
그런데 당시 고린도교회의 애찬과 성찬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주로 저녁에 모여 식사하고 예배드리곤 하였는데, 부자들은 예배 시간에 먼저 와서 먹고 마시며 충분히 배부를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취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반면에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 가난한 사람, 종들은 늦게 도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늦게 도착한 이들이 음식을 먹으려고 할 때는 이미 음식이 바닥난 경우들이 상당히 있었습니다.
이처럼 가난한 사람들은 배를 곯아야 하는 상황이 고린도교회에 발생하곤 하였습니다. 한 몸이 되어야 할 교회 안에 사회적인 신분에 따른 소외와 차별이 일어나고 있던 것입니다. 처음에 온 사람들은 배불리 먹고 성찬에 참여했지만, 나중에 온 사람들은 배가 고픈 중에 성찬에 참여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분열’이라고 표현합니다. 바울은 이러한 모습이 단순히 예의나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주님의 만찬을 먹는 것이 아니다’라고 질책하기까지 합니다. 즉, 성찬의 의미가 없다, 무의미한 성찬을 하고 있다는 경계의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에게 먹고 마실 집이 없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이 하나님의 교회를 멸시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입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을 칭찬해야 하겠습니까? 이 점에서는 칭찬할 수 없습니다. (고전 11:22, 새번역)
가난한 자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애찬과 성찬은 진정한 성찬이 아니며, 그러므로 책망받아 마땅하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한 후에 바울은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전해 준 것은 주님으로부터 전해 받은 것입니다.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빵을 들어서 (고전 11:23, 새번역)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그는 분열한 상태에서 누군가는 배불리 먹고, 누군가는 굶주린 채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음을 지적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제정하셨던 성찬의 참된 의미를 전하기 위해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라고 말씀을 이어 갑니다. 그리고 성찬의 의미를 덧붙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선포하는 것입니다. (고전 11:26, 새번역)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바울은 이것을 모르고 성찬을 받는 사람은 죄를 짓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경계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합당하지 않게 주님의 빵을 먹거나 주님의 잔을 마시는 사람은, 주님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니 각 사람은 자기를 살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그 빵을 먹고, 그 잔을 마셔야 합니다. 몸을 분별함이 없이 먹고 마시는 사람은, 자기에게 내릴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고전 11:27~29, 새번역)
<성찬의 자리에서 배려하고 기다리는 작은 순종 또한 그리스도의 고난에 함께 참여하는 길입니다.>
여기까지 오늘 본문의 배경과 상황을 살펴보았습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찬 제정의 말씀을 전하는 배경에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드리던 예배의 자리가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행해진 애찬과 성찬에는 배려하지 않음으로 일어난 분열의 상황이 있었습니다. 이 문제를 지적하기 위해 바울은 성찬 제정 말씀을 전하면서 성찬은 주님의 죽으심을 전하는 것이라는 해설을 덧붙입니다.
이 말씀의 뜻은 이렇습니다. 주님의 성찬은 주의 죽으심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찬을 받을 때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하며 그 고난에 함께합니다. 그런데 먼저 와서 음식을 먹고 그 음식에 취하니, 과연 그것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경책의 물음입니다.
우리는 앞서 설교의 서론에서 이런 질문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할 수 있는가? 그 답을 구하며 성찬의 자리를 생각해 봅니다. 성찬을 통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며, 우리는 어떻게 그 길에 설 수 있을까요? 바울은 그 답을 이렇게 전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먹으려고 모일 때에는 서로 기다리십시오. (고전 11:33, 새번역)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알려 주는 처방은 매우 간결하고 분명합니다. “너희가 성찬을 받을 때 서로 기다리라. 가난한 사람을 위해, 늦게 오는 사람을 위해 기다리라. 그것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전하는 방법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함께 참여하는 길이다.” 바울은 이렇게 말씀을 전합니다.
우리 소망교회도 성찬을 받을 때마다 기다렸다가 함께 빵과 포도주를 받습니다. 얼마 후에 성목요일이 되면 우리가 함께 성찬을 거행할 것입니다. 그때도 우리가 다 함께 빵을 나눕니다. 그리고 혼자 먹지 않습니다. 함께 기다렸다가 한 믿음으로 함께 빵을 먹습니다. 또한 잔도 그렇게 받습니다. 그것은 기독교 예전으로 자리 잡은 하나의 형식이기도 하지만, 이 형식 안에는 매우 큰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한 배려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선포하는 것이다”라는 정신이 그 안에 담겨 있습니다. 기다리고 함께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참 놀라운 말씀 아닙니까? 주님의 죽으심을 전하는 것, 주님의 죽으심과 고난에 함께 참여하는 것은 대단하고 엄청난 것이 아니라, 나의 욕심을 잠시 내려놓고 상대를 위해 기다리는 잠시의 시간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바울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매우 중요한 지혜입니다.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은 대단한 고행이나 특별한 결단의 행위가 아닙니다. 고린도교회에 준 처방은 의외로 단순했습니다.
“서로 기다리라” (고전 11:33b)
바울이 말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는 주제로 다시 돌아가 봅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골 1:24b)
바울에게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이미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교회를 세우기 위한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바울은 그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운다고 표현합니다. 물론 바울은 교회를 세우기 위해 이보다 더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수없이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으며 비난과 박해도 받았습니다. 그 모든 것은 교회를 세우기 위한 고난이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주의 몸 된 교회를 위해 채우는 일’이 그렇게 멀고 험한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님을 알려 줍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을 통해 바울이 말합니다.
“너희가 먹을 때 서로 기다리라.”
이것도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는 일이며 주님의 고난에 함께 참여하는 길이 됩니다. 이것이 바울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성도는 특별한 결단만이 아니라 내려놓음과 기다림으로 주의 몸 된 교회를 세워 가며 주님의 죽으심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순절을 함께 보내고 있습니다. 이때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겠다고 다짐하곤 합니다. 어떻게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함께 참여할 수 있을까요? 바울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의 기준을 오늘 우리 삶에 적용해 본다면 어떤 일들이 가능할까요?
교회에서 봉사를 하다 보면 유독 손이 빠르고 유능한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 따라오지 못하는 성도들도 종종 있습니다. 그때 내 속도를 고집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함께 일할 수 있도록 기다려 주는 것. 어쩌면 이것이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작은 일이 될지 모릅니다. 또한 예배당에 앉을 때 가장자리보다는 안쪽에 앉아서 뒤에 오는 사람들이 미안해하거나 불편하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 어쩌면 이것이 주님의 죽으심을 전하는 것이 아닐까요? 예배를 드릴 때 함께 힘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너희가 서로 기다리라”라는 말씀과 연결되며 교회를 세우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구역장과 권찰로 섬기고, 찬양대와 교사의 자리를 채우며, 간식과 음식을 준비하고, 제직회와 여러 부서에서 섬김을 행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이 주님의 교회를 세워 가는 일이자 주님의 복음이 전파될 수 있도록 다지는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즉, 모든 곳에서 ‘기다리라’라는 말씀 안에 담긴 뜻을 따르는 것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우리가 참여하는 길임을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시겠습니까? 육체적 금식도 좋고 기호품의 절제도 좋습니다. 이 모든 것은 나의 영성에 유익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개인의 차원에 두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토록 원하셨던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이 땅에 세우는 일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작은 일이지만 나의 권리와 기득권을 내려놓을 때, 그 작은 몸짓이 선함의 번짐으로 이어질 것이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번 사순절에는 대단한 일을 하려고 하기보다는 곁에 있는 지체를 위해 잠시 멈추는 작은 일부터 시작해 보면 어떻겠습니까? 내가 조금 덜 대접받더라도 우리 중 누구 하나 소외되지 않고 함께 주님의 상에 둘러앉을 수 있다면, 그것이 바울이 그토록 채우고 싶어 했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산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함께 참여하며, 그리스도의 죽음을 세상에 증거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사순절을 지혜롭게 보내는 소망의 모든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Ways to Participate in the Lord’s Death
1 Corinthians 11:23–27
Whenever we observe Lent or Passion Week, we often hear the phrase: “to share in Christ’s suffering.” Sometimes that phrase can feel a bit burdensome to us.
Yet devout believers frequently use that language when observing Lent or Passion Week. How exactly does one participate in suffering?
Some fast for a meal, a day, or a set period and focus on prayer. Some restrain themselves from favorite snacks or treats, or practice a media fast by cutting off media. Some fast from words, focus on their inner thoughts, and meditate on the Lord’s suffering. Others attend special Passion Week prayer services or meditate on the Stations of the Cross. Some empathize with the Lord’s pain through Scripture meditations, paintings, films, or videos that recall his Passion.
We often describe these religious practices as participating in the Lord’s suffering.
Is this pointless? Not at all. Meditating on and remembering the Lord’s Passion, reckoning His grace, and giving thanks are very important to our spiritual life.
However, if our such participation in suffering becomes a claim to merit, a boast, a formality, a law, or a condition for salvation, it can—however unintentionally—profane or trivialize God’s grace.
We remember what Paul said:
“Now I rejoice in what I am suffering for you, and I fill up in my flesh what is still lacking in regard to Christ’s afflictions, for the sake of his body, which is the church.” (Colossians 1:24 NIV)
What does this mean? Reading this, we might misunderstand and think we must do something for our salvation.
What does Paul mean by “what is still lacking in regard to Christ’s afflictions”?
Our Lord Jesus Christ came to this earth to save us, bore the Cross, and died. Does the above verse mean that this was insufficient? Does it mean that someone—that we—must supply what is lacking for salvation to be completed?
The first thing we must understand about these questions is that there is absolutely nothing lacking in the atoning suffering of Jesus Christ. The death of Jesus on the Cross was completely sufficient for the salvation of humanity and for my salvation. That is, salvation is not made complete by anything more we do. If we think otherwise, it is a mistaken belief and would become heretical.
What Paul calls “what is still lacking in regard to Christ’s afflictions” in Colossians refers to the labor required for the Gospel of Christ to be proclaimed to every person in the world and for the church, which was established as a result of the spread of the Gospel, to be sustained.
In other words, it denotes the calling given to us Christians after Jesus’ work of salvation. Paul is saying that “what is still lacking in regard to Christ’s afflictions” is our effort to make sure the Gospel of Christ is effectively preached and the striving of the church—Christ’s body—to be united in proclaiming that Gospel.
The passage we read today makes this perspective even clearer. Today we read the words we always hear at Communion:
“For I received from the Lord what I also passed on to you: The Lord Jesus, on the night he was betrayed, took bread, and when he had given thanks, he broke it and said, ‘This is my body, which is for you; do this in remembrance of me.’ In the same way, after supper he took the cup, saying, ‘This cup is the new covenant in my blood; do this, whenever you drink it, in remembrance of me.’” (1 Corinthians 11:23–25 NIV)
These are the words we always hear at Communion.
Scholars distinguish this passage as the Institution of the Lord’s Supper, or the Words of Institution.
Interestingly, however, these words in 1 Corinthians are not the Lord’s own direct words. The direct account of Jesus instituting the Lord’s Supper appears in the Synoptic Gospels that record Jesus’ life.
Matthew 26, Mark 14, and Luke 22 contain the story of the institution of the Lord’s Supper.
If we cite one of them, Matthew records:
“While they were eating, Jesus took bread, and when he had given thanks, he broke it and gave it to his disciples, saying, ‘Take and eat; this is my body.’ Then he took a cup, and when he had given thanks, he gave it to them, saying, ‘Drink from it, all of you. This is my blood of the covenant, which is poured out for many for the forgiveness of sins.’” (Matthew 26:26–28 NIV)
Although each Gospel emphasizes slightly different aspects, all three Synoptic Gospels testify that Jesus shared the Last Supper with His disciples on the very night He was betrayed and instituted the Supper that night.
But 1 Corinthians 11, from which today’s passage is taken, is not a record of Jesus’ direct words. Here Paul is quoting the words that Jesus spoke.
Accordingly, before Paul delivers the words of the institution of the Lord’s Supper, he adds this remark: “For I received from the Lord what I also passed on to you.” He makes it clear that this was handed down from the Lord. Then he recounts the institution of the Supper almost as a direct quotation.
But one clause is added that differs from the Synoptic Gospels: “For whenever you eat this bread and drink this cup, you proclaim the Lord’s death until he comes.” (1 Corinthians 11:26 NIV)
This line functions as Paul’s explanatory note on the Lord’s Supper.
As Paul explains the Lord’ Supper, he says that whenever we receive Communion, we proclaim the Lord’s death until he comes.
In other words, the Holy Communion is to proclaim and remember the Lord’s death. In short, the distinctiveness of Paul’s account in 1 Corinthians about the institution of the Lord’s Supper is that Paul’ interpretation of the Supper immediately follows the words of institution.
Then why does Paul, when recounting the Lord’s institution of the Holy Communion, say that Communion is to remember the Lord’s death? Is it because that is it’s only meaning? No.
For example, Matthew does not explicitly give his own interpretation, but Matthew includes the phrase “for the forgiveness of sins” as he records Jesus’ words. This indicates a relation between the Holy Communion and the forgiveness of sins.
However, Paul explicitly says the Holy Communion is to proclaim the Lord’s death. Why does Paul give this interpretation in 1 Corinthians? To understand the reason, we must grasp the flow of 1 Corinthians 11.
As Paul begins the discussion about the Lord’s Supper, he says:
“In the following directives I have no praise for you, for your meetings do more harm than good.” (1 Corinthians 11:17 NIV)
Up until the above verse, Paul had been discussing the matter of head coverings for women. But in verse 17 Paul introduces a new topic: the Lord’s Supper.
He begins by stating that he must rebuke them about this matter: “In the following directives I have no praise for you,” (1 Corinthians 11:17a NIV)
In short, Paul is saying there is a problem with the way the Corinthians are celebrating the Lord’s Supper. He goes on to say:
“In the first place, I hear that when you come together as a church, there are divisions among you, and to some extent I believe it.” (1 Corinthians 11:18 NIV)
He then speaks a bit sarcastically. He says “no doubt there have to be differences among you” and there should be bad people among you to show who is upright.
But then Paul says:
“So then, when you come together, it is not the Lord’s Supper you eat,” (1 Corinthians 11:20 NIV)
As Paul talks about the Holy Communion, the Lord’s Supper, he rebukes the Corinthians for being divided. He says that their eating together in a divided state is not truly the Holy Communion. He flatly states it is ineffective and meaningless.
How exactly were they divided that their Communion had no meaning? Paul explains:
“for when you are eating, some of you go ahead with your own private suppers. As a result, one person remains hungry and another gets drunk.” (1 Corinthians 11:21 NIV)
To understand this, we need a bit of background about worship in the early church.
The early Christians did not usually meet in separate church buildings as we do today. They met in the homes of wealthier members—house churches. Whenever they met, the Holy Communion was celebrated along with a Love Feast. That is, they ate a full meal first, and then celebrated the Lord’s Supper at the end.
Jesus Himself took bread and gave thanks while dining with His disciples when He instituted the Supper: “While they were eating, Jesus took bread, and when he had given thanks…” (Matthew 26:26a NIV)
But there was a problem in the Corinthian church’s Love Feast and Communion. They usually met in the evening for worship and meals. The wealthy would arrive early, eat and drink heartily—some even to the point of drunkenness—while laborers, the poor, and slaves arrived late because of their work.
When the poor arrived late, the food had already run out, and they would go hungry. Within the church, which ought to be one body, unintended exclusion and discrimination based on social status were happening.
Paul insists that this behavior is not merely a matter of manners or ethics but means they are not truly eating the Lord’s Supper. In other words, the Supper has no effect; its meaning is gone. He rebukes them for conducting a wrong form of worship.
So Paul says:
“Don’t you have homes to eat and drink in? Or do you despise the church of God by humiliating those who have nothing? What shall I say to you? Shall I praise you? Certainly not in this matter!” (1 Corinthians 11:22 NIV)
A Love Feast and a Lord’s Supper that shame the poor are not a true Holy Communion and, therefore, deserve rebuke.
After this Paul says:
“For I received from the Lord what I also passed on to you: The Lord Jesus, on the night he was betrayed, took bread,” (1 Corinthians 11:23 NIV)
And after recounting the institution, Paul adds this meaning of the Lord’s Supper:
“For whenever you eat this bread and drink this cup, you proclaim the Lord’s death until he comes.” (1 Corinthians 11:26 NIV)
Whenever we eat the Lord’s Supper, we proclaim the Lord’s death. This means that whenever we receive Communion, we confirm by faith the Lord’s death.
Paul goes on to warn that those who act ignorantly or receive the Lord’s Supper without discerning its significance are sinning:
“So then, whoever eats the bread or drinks the cup of the Lord in an unworthy manner will be guilty of sinning against the body and blood of the Lord. Everyone ought to examine themselves before they eat of the bread and drink from the cup. For those who eat and drink without discerning the body of Christ eat and drink judgment on themselves.” (1 Corinthians 11:27–29 NIV)
So far we have reviewed the background and context of today’s passage.
The background for Paul’s mention of Christ’s words instituting the Holy Communion is that the Corinthian church was divided because they were not considerate when they gathered for worship, the Love Feast, and the Lord’s Supper and some would eat before the others.
To address that problem, Paul adds that receiving the Lord’s Supper is proclaiming the Lord’s death after conveying Jesus’ words of institution.
Thus the meaning is this: The Lord’s Supper proclaims the Lord’s death. Therefore, when we receive it we participate in Christ’s death and share in His suffering. If this is so, can you, Corinthians, say you are participating in His death and suffering if you come early and get drunk?
Now, let’s return to our questions at the beginning of the sermon.
What does it mean to participate in Christ’s suffering? How does one participate in it?
What must we do to participate in His suffering as we receive Communion? Paul gives us the answer:
“So then, my brothers and sisters, when you gather to eat, you should all eat together. Anyone who is hungry should eat something at home, […]” (1 Corinthians 11:33–34a NIV)
Paul’s prescription is simple and clear. When you come to receive the Holy Communion, wait for one another. Doing so is how we proclaim the Lord’s death and participate in His suffering.
We remember this and wait when we receive Communion. In our church we do not take Communion individually but wait and share it together.
This has become a Christian ritual, but there is deep meaning within it. Our simple act of consideration for others—waiting and letting go of our own appetite for a moment—is precisely how we proclaim the Lord’s death and participate in His suffering.
Isn’t that striking? To proclaim the Lord’s death and share in His suffering is not some grandiose act but the brief moment when we set aside our selfishness and wait for others.
Through Paul, God teaches that participating in the Lord’s suffering is not a great ascetic feat or a special act of resolve. The prescription given to the Corinthian church is surprisingly simple: “Wait for one another.”
Now let’s return to Paul’s theme of the remaining afflictions of Christ. Paul says:
“I fill up in my flesh what is still lacking in regard to Christ’s afflictions, for the sake of his body, which is the church.” (Colossians 1:24b)
For Paul, “what is still lacking in regard to Christ’s afflictions” was the suffering for the church. He says he fills it up in his flesh. Paul endured all kinds of hardship to build up the church: countless beatings, imprisonment, reproach, and persecution.
But Paul tells the Corinthians that participating in those sufferings and filling up Christ’s remaining afflictions for the sake of His body is not only found in distant, arduous places.
“Wait for one another when you eat.” This, too, is work that builds up Christ’s body and a way to participate in the Lord’s sufferings.
We are observing Lent. In this season, we pledge to participate in Christ’s afflictions. How can we take part in Christ’s suffering?
If we apply Paul’s teaching to our present situation, what might that look like?
In church service, there are those who are especially quick and competent. Others, on the other hand, lag behind. Rather than insisting on my own pace, waiting so others can keep up—wouldn’t that be a small way of participating in the Lord’s suffering?
When we take seats for worship, instead of sitting at the end of a pew, why don’t we sit in the middle so that latecomers may be seated more easily without feeling sorry? Wouldn’t this also be a way of proclaiming the Lord’s death?
Building up the church, Paul says, is what is still lacking in regard to Christ’s afflictions, and this is how the Lord’s death is proclaimed through the Holy Communion.
Beloved saints, we are in Lent. How will you participate in Christ’s suffering? Physical fasting or abstaining from comforts are good. But remember also that laying down your rights and waiting for others, considering others so all can eat and drink together—this is the way God desires us to participate in the Lord’s suffering today.
When we relinquish our rights and vested interests even in small areas, that small gesture spreads goodness and becomes something God delights in.
Dear brothers and sisters, this Lent, rather than striving to do some great thing for the Lord, let’s begin by pausing for the member next to us. Even if we are served later than others or receive less attention, it is important that we all sit together at the Lord’s table with no one excluded. This precisely is the remaining affliction of Christ that Paul desired to fill up, and it will be the most powerful way to proclaim the Lord’s death to the world.
고린도전서 11:23~27
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24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27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사순절을 보내며 바울이 전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의 의미를 돌아봅니다.>
우리가 사순절이나 고난 주간을 보낼 때마다 흔히 듣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다”라는 표현입니다. 때로는 이 말이 부담스럽게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순절이 되면 많은 경건한 신앙인들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려는 노력을 합니다. 어떤 이들은 일정 기간의 금식을 통해 기도에 집중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자신이 좋아했던 간식이나 기호품, 미디어를 절제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말을 아끼면서 내면의 소리에 집중하며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고, 그리스도의 고난과 관련된 그림이나 영화, 영상 같은 자료들을 보면서 기도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종교 수행을 하면서 “주님의 고난에 참여한다”라고 이야기하곤 합니다. 이것이 쓸데없는 일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의 수난을 기억하고 묵상하며 주님의 은혜를 헤아리고 감사하는 것은 신앙생활에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고난 참여가 혹시나 자기의 공로나 자랑이 되고, 형식적인 행위나 율법적인 구원의 조건이 된다면, 이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를 모독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의 이 말을 기억합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골 1:24)
이 말씀을 읽을 때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다가옵니다. 이 말씀은 어떤 말씀일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데 있어 아직 다 이루지 못한 고난이 있다는 말씀일까요? 그래서 우리가 무엇인가를 채워야만 구원이 완성된다는 뜻이겠습니까?
우리는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오해할 때가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가 항상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고난에는 절대로 부족함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인류 구원과 나의 구원을 위하여 전혀 부족함이 없습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더 해야 구원이 완성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믿음이자 이단 사상이 되고 말 것입니다.
바울이 골로새서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복음이 전해지고 세워진 교회가 유지되기 위한 모든 수고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데 고난이 부족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우리 삶에 이어지는 여정 속에, 그리고 교회가 세워지고 복음이 전파되는 모든 과정 속에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바울은 성찬을 통해 우리가 주님의 고난과 죽으심을 기억하고 세상에 전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관점을 더 명료하게 밝히는 본문이 오늘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고전 11:23~25)
이 말씀은 성찬 때마다 늘 듣는 말씀입니다. 성목요일이 되면 성찬식을 거행하는데, 그때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함께 읽고 묵상합니다. 학자들은 이 말씀 부분을 성찬 제정사(聖餐 制定史, The Institution of the Lord’s Supper) 혹은 제정의 말씀(The Words of Institution)이라고 구별하여 부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말씀은 예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성찬을 제정하셨던 말씀은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하는 공관복음서에 나타나 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마가복음 14장, 누가복음 22장에 성찬 제정의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 세 가지 말씀 중 마태복음의 경우를 보면 이렇습니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 26:26~28)
복음서마다 강조점이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공관복음 모두 예수님이 자신을 내어 주시던 그 밤에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시며 성찬을 제정하셨음을 증언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인 고린도전서 11장은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은 아니며, 바울이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을 인용하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찬 제정의 말씀을 전하기에 앞서 다음과 같이 덧붙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고전 11:23a)
주님으로부터 전수받은 내용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바울은 성찬 제정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마치 직접 인용을 하듯이 인용합니다. 그런데 공관복음과 차별되는 한 가지가 이 본문 속에 들어 있습니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고전 11:26)
이 말씀은 바울이 성찬 설명에 덧붙이는 해설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성찬을 설명하면서 우리가 성찬을 받을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한다고 말합니다. 즉, 성찬은 ‘주의 죽으심을 전하는 것, 기억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예수님의 성찬 제정에 대한 말씀을 하면서 ‘성찬은 주의 죽으심을 전하는 것’이라는 말씀을 함께 전하는 것일까요? 성찬의 의미가 이것 하나뿐이기 때문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 여러 곳에 나오는 성찬과 관련된 말씀을 읽어 보면, 그 안에 다양한 신학적인 주제들이 함께 어우러져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내용 속에 “죄 사함을 얻게 하려는”이라는 표현을 넣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성찬이 ‘죄 사함’을 얻게 하는 은혜의 도구라는 사실을 분명히 전해 줍니다.
그런데 바울은 성찬을 설명하면서 “주의 죽으심을 전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 바울은 고린도서에서 이와 같은 해석을 하고 있을까요? 그 이유를 이해하려면 고린도전서 11장의 흐름을 조금 더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교인 간의 분열을 방치하며 성찬을 나누었던 고린도교회를 책망하며 성찬의 또 다른 의미를 밝힙니다.>
바울은 성찬 관련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다음에 지시하려는 일에 대해서는 나는 여러분을 칭찬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모여서 하는 일이 유익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고전 11:17, 새번역)
이 단락에서 바울은 조금 전까지 여자가 쓰는 너울과 관련된 주제를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17절에서 새로운 주제 하나를 꺼냅니다. 바로 성찬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 주제는 고린도 교인들을 책망할 수밖에 없는 주제라는 사실을 먼저 밝히면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고전 11:17a)
한마디로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행하고 있는 성찬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바울이 말하려고 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는 이렇게 말을 이어 갑니다.
첫째로, 여러분이 교회에 모일 때에 여러분 가운데 분열이 있다는 말이 들리는데, 그것이 어느 정도는 사실이라고 믿습니다. (고전 11:18, 새번역)
바울은 살짝 비꼬듯이 이런 말을 덧붙입니다. 물론 바르게 사는 사람들이 환히 드러나려면 이렇게 파당을 짓는 나쁜 사람들도 좀 있어야겠다고 언급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이 분열되어 있으니, 여러분이 한 자리에 모여서 먹어도, 그것은 주님의 만찬을 먹는 것이 아닙니다. (고전 11:20, 새번역)
바울은 성찬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면서 분열해 있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책망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분열한 상태로는 성찬을 제대로 받을 수 없다, 주님의 만찬을 제대로 받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을 전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분열해 있기에 그들이 받는 성찬이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바울은 이어서 말합니다.
먹을 때에, 사람마다 제가끔 자기 저녁을 먼저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배가 고프고, 어떤 사람은 술에 취합니다. (고전 11:21, 새번역)
이 말씀의 내용을 이해하려면 당시 초대교회 예배 상황을 조금 더 자세하게 알 필요가 있습니다. 초대교회에는 오늘날처럼 별도의 예배당 건물이 있지 않았기에 주로 부유한 성도들의 집에서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한마디로 가정교회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모일 때마다 성찬이 베풀어졌는데, 항상 애찬(Love Feast)과 더불어 거행되곤 했습니다. 즉, 먼저 식사를 충분히 나누고서 마지막에 성찬이 이어졌습니다. 이것이 초대교회 예배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찬가지로 제자들과 식사하시던 중에 떡을 들어 축사하시고, 또 잔을 들어 축사하신 후에 성찬을 제정하셨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마 26:26a)
그런데 당시 고린도교회의 애찬과 성찬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주로 저녁에 모여 식사하고 예배드리곤 하였는데, 부자들은 예배 시간에 먼저 와서 먹고 마시며 충분히 배부를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취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반면에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 가난한 사람, 종들은 늦게 도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늦게 도착한 이들이 음식을 먹으려고 할 때는 이미 음식이 바닥난 경우들이 상당히 있었습니다.
이처럼 가난한 사람들은 배를 곯아야 하는 상황이 고린도교회에 발생하곤 하였습니다. 한 몸이 되어야 할 교회 안에 사회적인 신분에 따른 소외와 차별이 일어나고 있던 것입니다. 처음에 온 사람들은 배불리 먹고 성찬에 참여했지만, 나중에 온 사람들은 배가 고픈 중에 성찬에 참여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분열’이라고 표현합니다. 바울은 이러한 모습이 단순히 예의나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주님의 만찬을 먹는 것이 아니다’라고 질책하기까지 합니다. 즉, 성찬의 의미가 없다, 무의미한 성찬을 하고 있다는 경계의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에게 먹고 마실 집이 없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이 하나님의 교회를 멸시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입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을 칭찬해야 하겠습니까? 이 점에서는 칭찬할 수 없습니다. (고전 11:22, 새번역)
가난한 자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애찬과 성찬은 진정한 성찬이 아니며, 그러므로 책망받아 마땅하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한 후에 바울은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전해 준 것은 주님으로부터 전해 받은 것입니다.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빵을 들어서 (고전 11:23, 새번역)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그는 분열한 상태에서 누군가는 배불리 먹고, 누군가는 굶주린 채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음을 지적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제정하셨던 성찬의 참된 의미를 전하기 위해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라고 말씀을 이어 갑니다. 그리고 성찬의 의미를 덧붙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선포하는 것입니다. (고전 11:26, 새번역)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바울은 이것을 모르고 성찬을 받는 사람은 죄를 짓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경계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합당하지 않게 주님의 빵을 먹거나 주님의 잔을 마시는 사람은, 주님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니 각 사람은 자기를 살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그 빵을 먹고, 그 잔을 마셔야 합니다. 몸을 분별함이 없이 먹고 마시는 사람은, 자기에게 내릴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고전 11:27~29, 새번역)
<성찬의 자리에서 배려하고 기다리는 작은 순종 또한 그리스도의 고난에 함께 참여하는 길입니다.>
여기까지 오늘 본문의 배경과 상황을 살펴보았습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찬 제정의 말씀을 전하는 배경에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드리던 예배의 자리가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행해진 애찬과 성찬에는 배려하지 않음으로 일어난 분열의 상황이 있었습니다. 이 문제를 지적하기 위해 바울은 성찬 제정 말씀을 전하면서 성찬은 주님의 죽으심을 전하는 것이라는 해설을 덧붙입니다.
이 말씀의 뜻은 이렇습니다. 주님의 성찬은 주의 죽으심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찬을 받을 때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하며 그 고난에 함께합니다. 그런데 먼저 와서 음식을 먹고 그 음식에 취하니, 과연 그것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경책의 물음입니다.
우리는 앞서 설교의 서론에서 이런 질문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할 수 있는가? 그 답을 구하며 성찬의 자리를 생각해 봅니다. 성찬을 통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며, 우리는 어떻게 그 길에 설 수 있을까요? 바울은 그 답을 이렇게 전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먹으려고 모일 때에는 서로 기다리십시오. (고전 11:33, 새번역)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알려 주는 처방은 매우 간결하고 분명합니다. “너희가 성찬을 받을 때 서로 기다리라. 가난한 사람을 위해, 늦게 오는 사람을 위해 기다리라. 그것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전하는 방법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함께 참여하는 길이다.” 바울은 이렇게 말씀을 전합니다.
우리 소망교회도 성찬을 받을 때마다 기다렸다가 함께 빵과 포도주를 받습니다. 얼마 후에 성목요일이 되면 우리가 함께 성찬을 거행할 것입니다. 그때도 우리가 다 함께 빵을 나눕니다. 그리고 혼자 먹지 않습니다. 함께 기다렸다가 한 믿음으로 함께 빵을 먹습니다. 또한 잔도 그렇게 받습니다. 그것은 기독교 예전으로 자리 잡은 하나의 형식이기도 하지만, 이 형식 안에는 매우 큰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한 배려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선포하는 것이다”라는 정신이 그 안에 담겨 있습니다. 기다리고 함께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참 놀라운 말씀 아닙니까? 주님의 죽으심을 전하는 것, 주님의 죽으심과 고난에 함께 참여하는 것은 대단하고 엄청난 것이 아니라, 나의 욕심을 잠시 내려놓고 상대를 위해 기다리는 잠시의 시간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바울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매우 중요한 지혜입니다.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은 대단한 고행이나 특별한 결단의 행위가 아닙니다. 고린도교회에 준 처방은 의외로 단순했습니다.
“서로 기다리라” (고전 11:33b)
바울이 말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는 주제로 다시 돌아가 봅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골 1:24b)
바울에게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이미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교회를 세우기 위한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바울은 그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운다고 표현합니다. 물론 바울은 교회를 세우기 위해 이보다 더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수없이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으며 비난과 박해도 받았습니다. 그 모든 것은 교회를 세우기 위한 고난이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주의 몸 된 교회를 위해 채우는 일’이 그렇게 멀고 험한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님을 알려 줍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을 통해 바울이 말합니다.
“너희가 먹을 때 서로 기다리라.”
이것도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는 일이며 주님의 고난에 함께 참여하는 길이 됩니다. 이것이 바울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성도는 특별한 결단만이 아니라 내려놓음과 기다림으로 주의 몸 된 교회를 세워 가며 주님의 죽으심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순절을 함께 보내고 있습니다. 이때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겠다고 다짐하곤 합니다. 어떻게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함께 참여할 수 있을까요? 바울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의 기준을 오늘 우리 삶에 적용해 본다면 어떤 일들이 가능할까요?
교회에서 봉사를 하다 보면 유독 손이 빠르고 유능한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 따라오지 못하는 성도들도 종종 있습니다. 그때 내 속도를 고집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함께 일할 수 있도록 기다려 주는 것. 어쩌면 이것이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작은 일이 될지 모릅니다. 또한 예배당에 앉을 때 가장자리보다는 안쪽에 앉아서 뒤에 오는 사람들이 미안해하거나 불편하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 어쩌면 이것이 주님의 죽으심을 전하는 것이 아닐까요? 예배를 드릴 때 함께 힘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너희가 서로 기다리라”라는 말씀과 연결되며 교회를 세우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구역장과 권찰로 섬기고, 찬양대와 교사의 자리를 채우며, 간식과 음식을 준비하고, 제직회와 여러 부서에서 섬김을 행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이 주님의 교회를 세워 가는 일이자 주님의 복음이 전파될 수 있도록 다지는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즉, 모든 곳에서 ‘기다리라’라는 말씀 안에 담긴 뜻을 따르는 것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우리가 참여하는 길임을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시겠습니까? 육체적 금식도 좋고 기호품의 절제도 좋습니다. 이 모든 것은 나의 영성에 유익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개인의 차원에 두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토록 원하셨던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이 땅에 세우는 일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작은 일이지만 나의 권리와 기득권을 내려놓을 때, 그 작은 몸짓이 선함의 번짐으로 이어질 것이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번 사순절에는 대단한 일을 하려고 하기보다는 곁에 있는 지체를 위해 잠시 멈추는 작은 일부터 시작해 보면 어떻겠습니까? 내가 조금 덜 대접받더라도 우리 중 누구 하나 소외되지 않고 함께 주님의 상에 둘러앉을 수 있다면, 그것이 바울이 그토록 채우고 싶어 했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산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함께 참여하며, 그리스도의 죽음을 세상에 증거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사순절을 지혜롭게 보내는 소망의 모든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의 죽으심에 참여하는 길” (고전11:23~27)
(1)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2) 찬송가 220, 229장을 부릅니다.
(3)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4) 본문을 읽고 나눕니다.
(5)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6)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마칩니다.
<생각하기>
1.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말을 들을 때 어떤 생각이나 느낌이 드는지 나누어 봅시다.
<설교의 요약>
사순절에 우리는 금식이나 절제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다.”고 말하지만, 이것이 공로나 구원의 조건이 된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모독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예수님의 대속이 부족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복음이 온 세상에 전달되고 교회가 세워지고 유지되기 위한 수고, 즉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소명을 말합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성찬 문제를 다루면서 이 진리를 더욱 명료하게 보여줍니다. 당시 고린도교회는 저녁에 모여 애찬과 성찬을 함께 했는데, 부자들은 먼저 와서 먹고 마시며 취하기까지 했지만, 생업에 종사하는 가난한 사람들이나 노예들은 늦게 도착했을 때 이미 음식이 바닥나 있었습니다. 한 몸이 되어야 할 교회 안에서 사회적 신분에 따른 소외와 차별이 일어난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분열된 상태로 받는 성찬은 주님의 만찬을 먹는 것이 아니며 효력이 없다고 책망합니다.
바울은 성찬 제정의 말씀을 전하면서 고린도교회에만 나타나는 독특한 해석을 덧붙입니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성찬은 주님의 죽으심을 전하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먼저 와서 음식을 먹고 취하는 것이 과연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겠느냐는 질문입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준 처방은 의외로 매우 단순합니다. “서로 기다리라” 성찬을 받을 때 서로 기다리라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은 대단한 것이 아니라 나의 욕심을 잠시 내려놓고 상대를 위해 기다려줄 수 있는 그 잠깐의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봉사할 때 손이 느린 사람을 기다려주는 것, 예배 자리 안쪽에 먼저 앉아 뒤에 오는 이를 배려하는 것, 나의 권리를 내려놓는 것이 바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는 일이며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 작은 몸짓이 선함의 번짐으로 이어지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될 것입니다.
<나누기>
1. “서로 기다리라”는 바울의 간결한 처방이 주는 도전은 무엇인지 나누어 봅시다.
2. 사순절을 보내며, 내 곁의 지체를 위해 무엇을 실천할 것인지 나누고 기도합시다.
<마무리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우리를 위해 자기 몸을 찢으시고 피 흘려주신 주님의 그 크신 사랑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고난에 동참한다’ 말하면서도, 정작 내 곁의 형제가 배고픈 것은 보지 못한 채 나의 의와 만족만을 먼저 채우려 했던 죄인들이었습니다. 주님, 이번 사순절 기간에는 우리가 ‘기다림의 고난’을 배우게 하옵소서. 내 속도를 늦추어 지체의 보폭에 맞추게 하시고, 내 목소리를 낮추어 소외된 자의 숨소리를 듣게 하옵소서. 우리의 작은 배려와 기다림이 모여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온전히 세워지게 하시고, 그 아름다운 연합을 통해 세상이 주님의 고난과 죽으심의 의미를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끝까지 참으시고 기다려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