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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집에 사는 자들의 복

시편 84: 1 ~ 7

김지철 목사

2010.10.24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복입니다

목사로서 저의 하루는 새벽기도를 인도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새벽에 교회를 나오면 뚜렷하게 보이는 교회의 탑이 있습니다. 그 탑은 하늘에서 쏘아내린 화살이 땅에 꽂혀있는 모양으로, 맨 꼭대기에는 세 가지 글자가 쓰여 있습니다. “예수구원”, “예수생명”, “예수소망”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마음속에 다짐을 합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원이십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생명이십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원이십니다.’ 그렇게 고백하면서 교회에 들어오면 저보다도 훨씬 먼저 교회에 오셔서 기도하시는 분들이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때 마음속으로부터 저절로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새벽을 사는 저들을 축복해주옵소서. 저들의 기도소리를 들으시고 응답해주옵소서.’
주일 아침에도 저보다 먼저 나와 차량안내를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또 거룩한 예배를 준비하는 예배위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아름다운 찬양을 드리기 위해서 일찍 나온 찬양대원들도 있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을 말씀과 사랑으로 가르치기 위해서 일찍 나와 준비하는 교사들도 있습니다. 그들을 보면 제 마음속에 기도가 생깁니다. ‘하나님, 저들을 통해서 오늘의 예배가 기쁨과 감사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복된 예배가 되게 하옵소서.’
그리고 주일에 단에 서면 다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을 사모해서 나아온 성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 또 기도하게 됩니다. ‘주님만나기를 열망해서 나아온 저들의 마음의 소원을 응답해주시고, 저들의 발걸음을 축복해주옵소서. 무엇보다 저들에게 영혼의 기쁨과 만족을 허락해주옵소서.’
그런데 이렇게 기도할 때마다 다시 한 번 머리에 떠오르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 시간 하나님의 전에 나오고 싶어도 나아올 수 없는 사랑하는 성도들입니다. 지금 너무 멀리 떨어져있어서 나아올 수 없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루하루를 사는 것이 너무 바빠서 나오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갑자기 몸이 쇠약해지고 질병에 걸려서 나오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누군가가 교회를 못 가도록 강요하고 억압해서 어쩔 수없이 나오지 못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또 이와 함께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북녘에 있는 우리의 동포들입니다. ‘거짓 이데올로기와 악한 지도자들에 의해서 억압받고 있는 저들은 얼마나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싶을까? 얼마나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을까?’ 그들을 생각하면 저절로 눈물이 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저들에게도 주님을 마음껏 예배하고 찬양할 수 있는 복된 날을 하루 속히 앞당겨주옵소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주일에 교회에 나아올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특권이며 자랑인지 모릅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향한 시인의 탄식

시편 84편의 시인은 이전에 하나님께 예배드렸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기쁨과 가슴 설렘으로 기도하면서 예루살렘 시온 성을 향하여 올라갔던 그 때가 생각났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을 만나기를 열망하면서 그 길을 갔는지를 돌이켜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지금은 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시온 성을 가야하는데 그 길이 차단되었습니다. 시인은 지금도 예배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가득하지만 그것을 실천할 수 없다는 현실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육체의 질병으로 인해 한발자국도 내디딜 수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쩌면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는 동안 너무 멀리 떨어져있는 예루살렘 성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부르짖고 있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또 다른 시인의 고백이 있습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시편 137:1)

시인은 예루살렘을 생각하면서 시온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없음에 슬퍼하며 울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하거나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즐거워하지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 (시편 137:5-6)

시인은 예루살렘을 잊는 것이 곧 자신의 모든 재주가 헛된 것이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 시인은 자신이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을 사모하는 열정입니다

오늘 본문의 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주님의 성전을 너무 사모하고 그리워하다가 병이 날 정도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시편 84:2)

시인은 주님의 성전을 너무 사모해서 몸과 영혼이 쇠약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는 마음이 노래 속에 그대로 묻어나고 있습니다. 그는 여호와의 궁정을 향하여 너무나 가고 싶었지만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그는 미물에 불과했던 참새와 제비 새끼가 부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성전을 마음대로 날아다니면서 들락거리는 참새와 제비가 부러웠습니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시편 84:3)

그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참새와 제비도 저렇게 보호하시고 성전에 나아갈 수 있는 축복을 누리게 하시는데, 왜 나는 성전에 나아갈 수 있는 축복을 누리지 못하는가?’ 그는 안타까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부르짖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도 날게 하옵소서! 나에게도 건강을 주옵소서! 나에게도 젊음을 주옵소서! 나에게도 여유를 주옵소서! 나에게도 소망을 주옵소서! 나에게도 열정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여러분, 신앙이란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사모하는 열정입니다. 내가 사모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인생이 결정됩니다. 내가 사모하는 내용이 곧 나의 생각이요 가치관입니다. 이것은 내 인생을 사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사모함과 그리움이 있어야 생기가 넘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장 사모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본문의 시인은 그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의 성전을 사랑하고 사모하는 것에 자신의 전부를 걸고 있습니다.
이 시대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정말 사랑하고 사모하는 것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해도 흘러가는 것처럼 사랑합니다. 열정을 잃고 쉽게 포기합니다. 우리는 그리움을 상실하고 사모함을 잃어버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신앙이란 참된 그리움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이성복이라는 시인의 ‘오늘 아침 새소리’ 중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병이란 그리워 할 줄 모르는 것
사람들은 그리워서 병이 나는 줄 알지
그러나 병은 참말로 어떻게 그리워할지를 모르는 것

이성복 시인은 우리에게 지금 질병이 있다면 그것은 그리워할 줄 모르는 병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리워서 병이 나는 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워서 병이 나는 것은 괜찮습니다. 사모하는 열정 때문에 병이 나는 것은 괜찮습니다. 그리고 시인은 병은 어떻게 그리워할지를 모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움을 잃어버리면 인생이 무의미해집니다. 왜냐하면 나의 정성과 사랑을 쏟아 부을 곳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목사로서 여기에 더 중요한 것을 첨가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그리워하는가에 대한 방법론도 중요하지만 무엇을 그리워하고 누구를 그리워하는가에 대한 대상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에 따라서 우리는 참된 그리움의 대상을 그리워하며 축복받는 인생을 살 것인가, 아니면 사라져갈 것을 그리워하면서 인생을 낭비하면서 살 것인가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신앙이란 참된 그리움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진정으로 그리워해야할 분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그리워하는 것, 살아계신 하나님을 사모하는 것, 그분에게 내 인생 전체를 드려도 좋다는 결정을 내리는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신앙은 우리의 인생에서 시시한 것, 헛된 것, 사라져갈 것에 대한 그리움을 멈추게 합니다. 그리고 진정한 그리움을 향해 나아가게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믿음이요, 우리가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시인은 자신의 삶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이 계신 성전을 내가 사모합니다. 예배드리는 것이 내 인생의 첫 번째 우선순위입니다. 이 믿음과 예배가 나의 삶 전체입니다. 그래서 나는 주님의 성전을 그리워하고 사모하는데 내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이렇게 기진맥진한 상태 속에 있습니다.”

감탄사를 가지고 주님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시편 84:1)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는 감탄사입니다. 그리움이 있어야 인생에 감탄사가 나타납니다. 사랑의 열정이 있어야 인생에 감탄사가 나타납니다. 왜 우리의 인생이 맥없이 흘러갑니까? 왜 우리의 인생이 막연하고 의미 없이 지나가버릴까요? 그리움과 사모하는 열정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사모하는 사람이 입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고백은 감탄문입니다. 여기서 사랑스럽다는 것은 단순히 성전의 건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심미적인 안목으로 성전을 바라보니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신앙의 눈으로 성전을 봤을 때 성전 안에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시고, 믿음의 성도들이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기에 멋지고 아름답고 장엄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와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고백하면서도 마음속에 물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살아계신 하나님께서는 이 성전 안에만 계신 것인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를 만드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세상 속에도 계십니다. 구약의 사람들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다윗의 소원을 따라 예루살렘 성전을 지었던 솔로몬 왕도 하나님께서 온 우주에 가득한 하나님인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예루살렘 성전을 지어 하나님께 봉헌합니다. 그때 그는 두렵고 떨렸습니다. 단순히 내가 위대한 작품을 만들었다고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 (열왕기상 8:27)

“내가 성전을 아무리 멋지게 지었어도 하늘의 하늘도 하나님을 다 용납할 수 없는 피조물이거늘, 기껏 내가 지은 이곳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거하시겠습니까?” 솔로몬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고백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이 기억났습니다. 네가 성전을 지으면 내 이름을 그 성전에 두겠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거하면 이 성전에서 너희에게 응답하겠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이 성전을 바칩니다. “하나님 우리가 여기에 와서 예배드리겠습니다. 이곳에 와서 기도드리겠습니다. 이곳에 와서 하나님께 재물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해주시고 우리와 동행해주옵소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교회에 두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이름을 교회에 두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두세 사람 이상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예배를 기뻐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일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배당에 나아가야 합니다.

교회는 영적인 충전소입니다

참된 것과 올바른 것을 그리워하고 사모하면 때로는 힘듭니다. 때로는 아픔과 고통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십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사모하고 성전을 그리워함으로 자신의 영혼과 육체가 쇠약해졌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죄책감 속에서 마음과 육체가 쇠약해지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주님 앞에 나아오면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를 깨닫게 됩니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시편 84:5)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시편 84:7)

성경은 힘을 얻고 더 얻는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그리움과 사모함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으로부터 힘에 힘을 얻고 새로운 은총을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왜 우리가 주님의 전에 나오면 힘을 얻습니까? 왜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하나님을 사모하면 능력을 받습니까? 하나님께서 에너지의 원천이시기 때문입니다. 차를 몰다가 휘발유가 떨어지면 주유소를 들어가 주유를 합니다. 그래야 또 움직일 수가 있습니다. 교회도 이와 같습니다. 교회는 영적인 충전소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에너지, 생명의 샘물이 우리에게 떨어지는 장소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전을 사모하고 예배드리기를 사모할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주십니다.
물론 우리의 삶의 자리는 결코 만만한 현장이 아닙니다. 때로는 슬픔이 있고 눈물의 터널을 지나야 할 때도 있습니다. 본문의 시인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 (시편 84:6)

그러나 시인은 말합니다. “우리가 힘들고 목마를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목을 채워주실 것이며 이른 비로 우리의 삶에 풍성한 결실을 맺게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가슴을 펴고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은혜를 입어라!”
기독교의 인생은 순례자의 길입니다. 방랑자의 길이 아닙니다. 방랑자는 목표와 방향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방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시온의 대로 위에서 주님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이요 축복의 통로입니다. 마치 고향을 찾아가서 부모님께 인사드리고 부모님으로부터 사랑을 다시 확인하고 돌아오는 것처럼, 우리는 영혼의 고향인 교회에서 영적인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우리 가슴에 새기고 다시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은 그리움이요 사모함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에게 주님을 향한 그리움과 사모함, 영적인 열망이 사라지는 순간 신앙은 추락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부터 우리의 신앙은 변질되고 습관적인 신앙으로 바뀝니다. 내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기쁨과 감사가 사라집니다.
신앙이란 그리움입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에 대한 그리움입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여러분 안에 영혼에 대한 사모함이 있습니까? 하루를 시작하는 새벽시간에 하나님 앞에 나와 기도하고 말씀을 들으며 세상을 향해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럴 시간조차 없다면 출근할 때, 퇴근할 때, 낮에 시간이 있을 때 하나님 앞에 나아와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건강할 때, 시간이 있을 때, 젊을 때, 그리고 사모함을 열정을 가졌을 때 그렇게 하십시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셔서 생명의 복과 은혜의 복, 자유의 복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놀라운 복을 마음껏 누리는 복된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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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84: 1 ~ 7

1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2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3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4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셀라)

5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6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

7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복입니다

목사로서 저의 하루는 새벽기도를 인도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새벽에 교회를 나오면 뚜렷하게 보이는 교회의 탑이 있습니다. 그 탑은 하늘에서 쏘아내린 화살이 땅에 꽂혀있는 모양으로, 맨 꼭대기에는 세 가지 글자가 쓰여 있습니다. “예수구원”, “예수생명”, “예수소망”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마음속에 다짐을 합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원이십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생명이십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원이십니다.’ 그렇게 고백하면서 교회에 들어오면 저보다도 훨씬 먼저 교회에 오셔서 기도하시는 분들이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때 마음속으로부터 저절로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새벽을 사는 저들을 축복해주옵소서. 저들의 기도소리를 들으시고 응답해주옵소서.’
주일 아침에도 저보다 먼저 나와 차량안내를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또 거룩한 예배를 준비하는 예배위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아름다운 찬양을 드리기 위해서 일찍 나온 찬양대원들도 있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을 말씀과 사랑으로 가르치기 위해서 일찍 나와 준비하는 교사들도 있습니다. 그들을 보면 제 마음속에 기도가 생깁니다. ‘하나님, 저들을 통해서 오늘의 예배가 기쁨과 감사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복된 예배가 되게 하옵소서.’
그리고 주일에 단에 서면 다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을 사모해서 나아온 성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 또 기도하게 됩니다. ‘주님만나기를 열망해서 나아온 저들의 마음의 소원을 응답해주시고, 저들의 발걸음을 축복해주옵소서. 무엇보다 저들에게 영혼의 기쁨과 만족을 허락해주옵소서.’
그런데 이렇게 기도할 때마다 다시 한 번 머리에 떠오르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 시간 하나님의 전에 나오고 싶어도 나아올 수 없는 사랑하는 성도들입니다. 지금 너무 멀리 떨어져있어서 나아올 수 없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루하루를 사는 것이 너무 바빠서 나오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갑자기 몸이 쇠약해지고 질병에 걸려서 나오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누군가가 교회를 못 가도록 강요하고 억압해서 어쩔 수없이 나오지 못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또 이와 함께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북녘에 있는 우리의 동포들입니다. ‘거짓 이데올로기와 악한 지도자들에 의해서 억압받고 있는 저들은 얼마나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싶을까? 얼마나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을까?’ 그들을 생각하면 저절로 눈물이 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저들에게도 주님을 마음껏 예배하고 찬양할 수 있는 복된 날을 하루 속히 앞당겨주옵소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주일에 교회에 나아올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특권이며 자랑인지 모릅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향한 시인의 탄식

시편 84편의 시인은 이전에 하나님께 예배드렸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기쁨과 가슴 설렘으로 기도하면서 예루살렘 시온 성을 향하여 올라갔던 그 때가 생각났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을 만나기를 열망하면서 그 길을 갔는지를 돌이켜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지금은 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시온 성을 가야하는데 그 길이 차단되었습니다. 시인은 지금도 예배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가득하지만 그것을 실천할 수 없다는 현실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육체의 질병으로 인해 한발자국도 내디딜 수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쩌면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는 동안 너무 멀리 떨어져있는 예루살렘 성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부르짖고 있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또 다른 시인의 고백이 있습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시편 137:1)

시인은 예루살렘을 생각하면서 시온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없음에 슬퍼하며 울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하거나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즐거워하지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 (시편 137:5-6)

시인은 예루살렘을 잊는 것이 곧 자신의 모든 재주가 헛된 것이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 시인은 자신이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을 사모하는 열정입니다

오늘 본문의 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주님의 성전을 너무 사모하고 그리워하다가 병이 날 정도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시편 84:2)

시인은 주님의 성전을 너무 사모해서 몸과 영혼이 쇠약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는 마음이 노래 속에 그대로 묻어나고 있습니다. 그는 여호와의 궁정을 향하여 너무나 가고 싶었지만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그는 미물에 불과했던 참새와 제비 새끼가 부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성전을 마음대로 날아다니면서 들락거리는 참새와 제비가 부러웠습니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시편 84:3)

그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참새와 제비도 저렇게 보호하시고 성전에 나아갈 수 있는 축복을 누리게 하시는데, 왜 나는 성전에 나아갈 수 있는 축복을 누리지 못하는가?’ 그는 안타까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부르짖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도 날게 하옵소서! 나에게도 건강을 주옵소서! 나에게도 젊음을 주옵소서! 나에게도 여유를 주옵소서! 나에게도 소망을 주옵소서! 나에게도 열정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여러분, 신앙이란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사모하는 열정입니다. 내가 사모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인생이 결정됩니다. 내가 사모하는 내용이 곧 나의 생각이요 가치관입니다. 이것은 내 인생을 사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사모함과 그리움이 있어야 생기가 넘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장 사모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본문의 시인은 그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의 성전을 사랑하고 사모하는 것에 자신의 전부를 걸고 있습니다.
이 시대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정말 사랑하고 사모하는 것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해도 흘러가는 것처럼 사랑합니다. 열정을 잃고 쉽게 포기합니다. 우리는 그리움을 상실하고 사모함을 잃어버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신앙이란 참된 그리움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이성복이라는 시인의 ‘오늘 아침 새소리’ 중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병이란 그리워 할 줄 모르는 것
사람들은 그리워서 병이 나는 줄 알지
그러나 병은 참말로 어떻게 그리워할지를 모르는 것

이성복 시인은 우리에게 지금 질병이 있다면 그것은 그리워할 줄 모르는 병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리워서 병이 나는 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워서 병이 나는 것은 괜찮습니다. 사모하는 열정 때문에 병이 나는 것은 괜찮습니다. 그리고 시인은 병은 어떻게 그리워할지를 모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움을 잃어버리면 인생이 무의미해집니다. 왜냐하면 나의 정성과 사랑을 쏟아 부을 곳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목사로서 여기에 더 중요한 것을 첨가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그리워하는가에 대한 방법론도 중요하지만 무엇을 그리워하고 누구를 그리워하는가에 대한 대상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에 따라서 우리는 참된 그리움의 대상을 그리워하며 축복받는 인생을 살 것인가, 아니면 사라져갈 것을 그리워하면서 인생을 낭비하면서 살 것인가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신앙이란 참된 그리움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진정으로 그리워해야할 분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그리워하는 것, 살아계신 하나님을 사모하는 것, 그분에게 내 인생 전체를 드려도 좋다는 결정을 내리는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신앙은 우리의 인생에서 시시한 것, 헛된 것, 사라져갈 것에 대한 그리움을 멈추게 합니다. 그리고 진정한 그리움을 향해 나아가게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믿음이요, 우리가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시인은 자신의 삶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이 계신 성전을 내가 사모합니다. 예배드리는 것이 내 인생의 첫 번째 우선순위입니다. 이 믿음과 예배가 나의 삶 전체입니다. 그래서 나는 주님의 성전을 그리워하고 사모하는데 내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이렇게 기진맥진한 상태 속에 있습니다.”

감탄사를 가지고 주님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시편 84:1)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는 감탄사입니다. 그리움이 있어야 인생에 감탄사가 나타납니다. 사랑의 열정이 있어야 인생에 감탄사가 나타납니다. 왜 우리의 인생이 맥없이 흘러갑니까? 왜 우리의 인생이 막연하고 의미 없이 지나가버릴까요? 그리움과 사모하는 열정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사모하는 사람이 입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고백은 감탄문입니다. 여기서 사랑스럽다는 것은 단순히 성전의 건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심미적인 안목으로 성전을 바라보니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신앙의 눈으로 성전을 봤을 때 성전 안에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시고, 믿음의 성도들이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기에 멋지고 아름답고 장엄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와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고백하면서도 마음속에 물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살아계신 하나님께서는 이 성전 안에만 계신 것인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를 만드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세상 속에도 계십니다. 구약의 사람들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다윗의 소원을 따라 예루살렘 성전을 지었던 솔로몬 왕도 하나님께서 온 우주에 가득한 하나님인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예루살렘 성전을 지어 하나님께 봉헌합니다. 그때 그는 두렵고 떨렸습니다. 단순히 내가 위대한 작품을 만들었다고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 (열왕기상 8:27)

“내가 성전을 아무리 멋지게 지었어도 하늘의 하늘도 하나님을 다 용납할 수 없는 피조물이거늘, 기껏 내가 지은 이곳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거하시겠습니까?” 솔로몬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고백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이 기억났습니다. 네가 성전을 지으면 내 이름을 그 성전에 두겠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거하면 이 성전에서 너희에게 응답하겠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이 성전을 바칩니다. “하나님 우리가 여기에 와서 예배드리겠습니다. 이곳에 와서 기도드리겠습니다. 이곳에 와서 하나님께 재물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해주시고 우리와 동행해주옵소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교회에 두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이름을 교회에 두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두세 사람 이상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예배를 기뻐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일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배당에 나아가야 합니다.

교회는 영적인 충전소입니다

참된 것과 올바른 것을 그리워하고 사모하면 때로는 힘듭니다. 때로는 아픔과 고통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십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사모하고 성전을 그리워함으로 자신의 영혼과 육체가 쇠약해졌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죄책감 속에서 마음과 육체가 쇠약해지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주님 앞에 나아오면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를 깨닫게 됩니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시편 84:5)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시편 84:7)

성경은 힘을 얻고 더 얻는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그리움과 사모함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으로부터 힘에 힘을 얻고 새로운 은총을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왜 우리가 주님의 전에 나오면 힘을 얻습니까? 왜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하나님을 사모하면 능력을 받습니까? 하나님께서 에너지의 원천이시기 때문입니다. 차를 몰다가 휘발유가 떨어지면 주유소를 들어가 주유를 합니다. 그래야 또 움직일 수가 있습니다. 교회도 이와 같습니다. 교회는 영적인 충전소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에너지, 생명의 샘물이 우리에게 떨어지는 장소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전을 사모하고 예배드리기를 사모할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주십니다.
물론 우리의 삶의 자리는 결코 만만한 현장이 아닙니다. 때로는 슬픔이 있고 눈물의 터널을 지나야 할 때도 있습니다. 본문의 시인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 (시편 84:6)

그러나 시인은 말합니다. “우리가 힘들고 목마를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목을 채워주실 것이며 이른 비로 우리의 삶에 풍성한 결실을 맺게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가슴을 펴고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은혜를 입어라!”
기독교의 인생은 순례자의 길입니다. 방랑자의 길이 아닙니다. 방랑자는 목표와 방향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방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시온의 대로 위에서 주님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이요 축복의 통로입니다. 마치 고향을 찾아가서 부모님께 인사드리고 부모님으로부터 사랑을 다시 확인하고 돌아오는 것처럼, 우리는 영혼의 고향인 교회에서 영적인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우리 가슴에 새기고 다시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은 그리움이요 사모함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에게 주님을 향한 그리움과 사모함, 영적인 열망이 사라지는 순간 신앙은 추락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부터 우리의 신앙은 변질되고 습관적인 신앙으로 바뀝니다. 내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기쁨과 감사가 사라집니다.
신앙이란 그리움입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에 대한 그리움입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여러분 안에 영혼에 대한 사모함이 있습니까? 하루를 시작하는 새벽시간에 하나님 앞에 나와 기도하고 말씀을 들으며 세상을 향해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럴 시간조차 없다면 출근할 때, 퇴근할 때, 낮에 시간이 있을 때 하나님 앞에 나아와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건강할 때, 시간이 있을 때, 젊을 때, 그리고 사모함을 열정을 가졌을 때 그렇게 하십시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셔서 생명의 복과 은혜의 복, 자유의 복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놀라운 복을 마음껏 누리는 복된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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