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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문화가 만연한 세상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죽임의 영, 살림의 영’입니다. 이는 성령과 악령에 관한 네 번째 말씀입니다. 우리는 매일 아침 뉴스를 통해 놀라운 소식을 접합니다. 인간 생명을 경시하는 사건‧사고가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 죽음의 문화에 포위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직 6월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이번 한 달만 해도 충격적인 사건이 여러 차례 보도되었습니다.
아파트 외벽에서 도색 작업을 하던 사람이 음악을 틀며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음악소리가 시끄럽다며 아파트 주민이 옥상에 올라가 밧줄을 잘라 버렸습니다. 이로 인해 도색 작업자는 그 자리에서 숨지고 말았습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또한 원룸에서 거주하던 한 남성이 인터넷 속도가 느리다며 수리 기사를 흉기를 찔러 살해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30년 동고동락한 조강지처를 살해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부산의 한 아파트 냉동실에서는 영아 시신 2구가 발견되었는데, 범행자가 친모였습니다. 그녀는 임신과 출산 사실을 동거남이 알게 되면 버림받을까 봐 두려워 이런 일을 저질렀다고 진술했습니다. 지난 3월에는 인천초등학교 학생이 살해당했는데, 살해범이 여고생이었습니다. 이후 이 사건에 공모한 여고생이 한 명 더 있다는 사실도 드러났습니다. 그들은 트위터로 살인 계획을 주고받았고 범행을 모의했다고 합니다.
이런 범죄들은 우리의 예측 가능성을 벗어나 있습니다. 상상도 하기 힘든 사건들입니다. 사회심리학자들은 이런 사건의 원인을 분노조절장애로 보기도 합니다. 사회에서 소외감과 박탈감을 느끼며 분노를 쌓아온 것이 어느 순간 폭발한 것이라고 합니다.
2015년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전체 폭력 범죄가 37만 건에 달했습니다. 그중 우발적 범죄는 41%로, 총 148,000건으로 보고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외부적 폭력과 살인뿐만 아니라 자기 내면을 향한 폭력과 살인도 만만치 않습니다. 우리나라는 2014년부터 4년 연속 OECD 회원국 중 자살률 1위라는 오명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2015년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이 13,510명이었습니다. 인구 10만 명 당 자살률도 26.5명으로, OECD 회원국 평균인 12명을 2배 이상 웃돌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집단 동반자살도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마치 전염병처럼 자살이 사람들의 마음을 휩쓸어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영적으로 바라본다면 어떻게 분석할 수 있을까요? 이 사회가 어둠의 영, 영적인 죽임의 영에 사로잡혀 있다는 뜻입니다. 미움과 분노를 일으키는 사탄의 영이 우리를 협박하며 얽어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를 어디서부터 접근하고 해결할 수 있을까요? 혹시 우리가 원죄의 문제를 앓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저는 종종 우리 사회에 도사리고 있는 갈등과 분노의 원죄가 6‧25전쟁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동족상잔의 참화였습니다. 마치 아담이 아내 하와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한 것처럼,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을 잔인하게 죽인 것처럼, 우리 민족사에 응어리진 아픔과 고통으로 남아 있는 전쟁입니다.
생명을 사랑하는 자가 위대한 기적을 만듭니다.
오늘은 6‧25전쟁 후 67년이 되는 날입니다. 수많은 사상자와 유가족, 전쟁 고아와 이산가족을 낳은 우리 민족의 비극적인 전쟁이었습니다. 당시 6‧25전쟁에 참전한 국군 14만 명이 전사했습니다. 45만 명은 부상을 입었습니다. 유엔국도 4만 명의 사망자가 있었고, 10만 명이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민간인 피해 역시 속출했는데, 남북한 민간 사상자만 10만 명 이상이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시작된 6‧25전쟁은 우리 민족사와 국민 모두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습니다. 1953년에 휴전했지만, 남북한의 대립과 갈등, 민족 이질화는 여전합니다. 아니, 점점 더 커지고 곪아가고 있습니다. 미움과 어둠의 역사, 죽임의 역사로 점철된 6‧25전쟁입니다.
그러나 이 전쟁 중에도 생명을 위해 헌신한 사람,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쉰들러(Emilie Pelzl Schindler)처럼 헌신적으로 생명을 살린 사람입니다. 오늘은 그에 대한 몇 가지 이야기를 전해 드리고자 합니다.
1950년 9월의 서울이었습니다. 매일 아침 그는 서울 시내를 돌며 버려진 아이들을 거두며 보살폈습니다. 그는 당시 공군 중령이었습니다. 그런데 3개월 후인 1950년 12월, 중공군의 개입으로 유엔연합군이 후퇴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때 그는 “이 아이들을 내버려둔 채 혼자만 후퇴할 수 없습니다.”라며, 상관 명령에 불복종합니다. 점점 악화되는 상황에서 유엔연합군은 철수를 서둘러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와중에도 아이들을 피난시킬 방법을 찾지 못해 전전긍긍했습니다. 그러다 때마침 공군사령에서 공군 책임자를 만나 다음과 같은 약속을 받아냅니다. “일본에서 대기하고 있던 C-54 수성기 16대를 김포공항으로 보내 주겠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8시까지 아이들을 데리고 김포공항으로 오지 않으면 안 된다.” 비행기로 대피시켜 주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그러나 남아 있는 시간은 15시간, 돌보던 아이들은 1069명이었습니다. 더욱이 김포공항으로 이송할 수 있는 트럭은 단 한 대뿐이었습니다. 중령이 트럭을 구하는 동안 아이들은 추위에 쓰러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트럭을 구하지 못한 채 아침을 맞이하는데, 마지막으로 들른 마을에서 기적적으로 시멘트를 싣고 있던 해병대 트럭 14대를 발견합니다. 하지만 중령에게는 해병대 트럭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이 없었습니다. 그는 공군 중령 계급을 이용해 상부에서 명령이 하달됐다고, 아이들을 즉각 이송하라고 한다며, 해병대에 불법 명령을 내립니다. 그렇게 14대의 해병대 트럭을 이용해 아이들을 김포공항으로 이송시킵니다. 1950년 12월 20일, 그렇게 1069명의 아이들이 제주도로 무사히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이른바 ‘유모차 공수 작전’이라 불리며,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작전을 수행한 사람은 러셀 블레이즈델 중령입니다. 그는 당시 공군 중령이자 군종 목사였습니다. 그러나 불법 명령을 했다는 이유로 검찰관의 조사를 받게 됩니다. 그때 그는 ‘왜 명령에 불복종하며 불법 명령을 했냐’는 물음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합니다.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림의 역사를 발견합니다.
우리 인생은 둘 중 하나입니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분노하며 죽음으로 몰고 가는 악하고 못된 성향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또 하나는 사람을 살리고 긍휼히 여기며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선하고 귀한 마음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 삶은 우리의 역사 속에, 그리고 성경에 나타난 인물들 속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납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의 말씀입니다. 그는 인간의 두 가지 속성을 말합니다. 5절 말씀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로마서 7:5)
죄의 정욕이 율법적인 사고 안에서 확대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율법적인 사고 안에 갇힌 사람들은 남의 흠만 봅니다. 다른 사람의 연약한 부분만을 지적하며 정죄합니다. 나의 문제까지 다른 사람 때문이라고 생각하거나 이 세상 탓이라고 여깁니다. 자기중심적으로만 판단하는 이기적인 인간이 됩니다. 이로 인해 탐욕스러움만 남고 긍휼은 사라집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오직 자기 판단에 기초한 삶을 살게 됩니다.
이미 우리 주위에 죽임의 영이 가득합니다. 죽음의 문화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 죽음의 문화는 어둠과 죽음을 예찬합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미움을 조장하고 분노하게 합니다. 여기에는 이기주의적 탐욕이 숨어 있습니다. 나만 살아남으면 괜찮다는 자아팽창주의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사람마저도 물질로 판단합니다. 모든 것을 계량화합니다. 그래서 “너 어느 대학 다녀? 직업이 뭐야? 직장에서 직위가 뭐야? 가문은 어떤 가문이야? 몇 평짜리 집에 살아? 차는 뭐야?”라는 질문들만 쏟아냅니다. 더 큰 것, 더 많은 것, 더 많은 권력을 원하는 것입니다.
치열한 경쟁으로 인간을 내모는 것, 인간으로 하여금 열등감과 교만에 빠지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죽임의 영이 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인간을 끊임없이 좌절하게 하고 분노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이 죽임의 영을 넘어설 수 있을까요? 죽임의 영을 거스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 풍조와 세상 가치관이 어떻습니까? ‘내가 살려면 네가 죽어야 한다’ 혹은 ‘내가 높아져야 하니 너를 짓밟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아닙니까? 이것이 세상의 풍조입니다. 하지만 인간들도 이러한 풍조가 잘못된 것임을 깨닫습니다. 양심의 노력입니다. 그래서 보다 발전된 사회를 위해 힘씁니다. 나도 살고 너도 살자는 소위 ‘윈윈 전략(win-win strategy)’입니다. 남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사회로 가려는 몸부림입니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인간의 이기성이 발동되면 모든 게 금세 무너지고 맙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내가 죽을 테니 네가 살라. 내가 고난 받을 테니 너는 치유 받아라. 내가 내려갈 테니 너는 높아지거라.” 이렇게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입니다. 아니, 말씀만이 아니라 몸소 낮아짐의 삶을 사시며 우리를 높여주신 예수님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 어디에도 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셈법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죽음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죽음을 무시하지도 않습니다. 그렇다고 죽음을 조롱하는 것도 아닙니다. 죽음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압니다. 우리 삶을 피폐하게 하는 힘이 죽음에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죽음을 피하고자 하셨습니다. 인간의 죽음에 아파하며 애통해 하셨습니다. 당신 자신의 죽음도 두려워하셨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바로 그 죽음으로부터 해방되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셔서 우리를 죽음에서 건져 주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다른 인간을 만드십니다. 죽음을 향해 가는 인간을 살리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생명의 영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그리하여 옛사람을 벗어 버리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다시 사랑할 줄 알게 하십니다. 다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베풀 줄 아는 인간으로 우리를 만들어 주시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살림의 영 안에서 새 생명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중 6절 말씀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로마서 7:6)
성령이 우리를 새롭게 바꾸신다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내리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우리에게 내어주셨습니다. 예수님도 이 사실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죽음의 형틀을 자발적으로 짊어지셨습니다. 자원하는 마음으로 십자가의 길도 오르셨습니다. 그것이 생명을 살리는 역사였기 때문입니다. “내가 섬기겠다. 너는 섬김을 받아라. 나는 죽음의 길을 가겠다. 너는 살아나라. 내가 고난을 당하겠다. 너는 치유를 받아라.”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내리사랑은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초청하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인간이 고난당하고 무너질 때도 하나님은 언제나 다시 회복의 꿈을 주셨습니다. 메시아적 꿈, 바로 생명의 꿈과 치유와 회복의 꿈을 허락하셨습니다. 구약성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를 보면, 하나님이 메시아적 꿈을 꾸라고 하시며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말라기 4장 2절 말씀입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말라기 4:2)
마침내 우리가 푸른 풀밭에서 뛰노는 송아지처럼 기쁘게 뛰놀게 될 것이라는 선언입니다. 그러니 회복의 꿈을 꾸라는 것입니다. 어둠의 세계에 갇혀 있지 말고 생명의 능력 안에 거하라는 메시지입니다. 또한 여기서 ‘공의로운 해’는 예수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그분이 이 땅에 오셔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실 때, 우리 안에 막혀 있던 것들이 뚫리고 응어리졌던 것들이 풀어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 영혼이 기뻐 뛰놀며 찬양할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도 보면, 주님이 재림하실 때 메시아적인 꿈이 실현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 4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요한계시록 21:4)
사망이 다시 우리를 겁박할 수 없다고 합니다. 다시 애곡하는 일도 아픈 일도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새로운 세계, 새 하늘과 새 땅의 생명의 세계에 들어갈 것이니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지상에서 흘렸던 눈물들을 친히 닦아주십니다. 하나님이 위로자가 되셔서 우리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고, 우리를 다시 세워 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생명의 자리에 들어서게 되며, 메시아적 꿈을 현실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주님께서 이 약속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생명의 자리에 누가 계십니까? 그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위로자이십니다.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치유자이십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신 부활의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을 믿는 우리는 그분과 함께 생명의 자리, 부활의 자리에 들어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에 미움이 생길 때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내 안에 분노가 치밀 때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묵상하십시오. 그때 우리를 덮고 있던 어둠의 영, 죽임의 영도 소멸됩니다. 이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어둠의 영을 물리칠 수 있는 건 오로지 우리 주님의 생명의 영밖에 없습니다.
빛의 영, 생명의 영은 어둠과 죽임의 영보다 강력합니다. 무엇을 보고 알 수 있을까요? 우리가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이 그 표증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생명체로 존재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언젠가는 온전한 생명에 들어가리라는 것 또한 확신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가장 강력한 증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그분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고, 죄 용서의 기쁨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총도 누리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처럼 내 영과 몸이 기뻐 뛰놀고,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소중함을 누리며 이웃에게도 나눠 주는 하나님의 사람들, 믿음의 사람들, 생명의 영을 지닌 복된 사람들이 다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로마서 7: 4 ~ 6
4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5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죽음의 문화가 만연한 세상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죽임의 영, 살림의 영’입니다. 이는 성령과 악령에 관한 네 번째 말씀입니다. 우리는 매일 아침 뉴스를 통해 놀라운 소식을 접합니다. 인간 생명을 경시하는 사건‧사고가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 죽음의 문화에 포위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직 6월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이번 한 달만 해도 충격적인 사건이 여러 차례 보도되었습니다.
아파트 외벽에서 도색 작업을 하던 사람이 음악을 틀며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음악소리가 시끄럽다며 아파트 주민이 옥상에 올라가 밧줄을 잘라 버렸습니다. 이로 인해 도색 작업자는 그 자리에서 숨지고 말았습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또한 원룸에서 거주하던 한 남성이 인터넷 속도가 느리다며 수리 기사를 흉기를 찔러 살해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30년 동고동락한 조강지처를 살해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부산의 한 아파트 냉동실에서는 영아 시신 2구가 발견되었는데, 범행자가 친모였습니다. 그녀는 임신과 출산 사실을 동거남이 알게 되면 버림받을까 봐 두려워 이런 일을 저질렀다고 진술했습니다. 지난 3월에는 인천초등학교 학생이 살해당했는데, 살해범이 여고생이었습니다. 이후 이 사건에 공모한 여고생이 한 명 더 있다는 사실도 드러났습니다. 그들은 트위터로 살인 계획을 주고받았고 범행을 모의했다고 합니다.
이런 범죄들은 우리의 예측 가능성을 벗어나 있습니다. 상상도 하기 힘든 사건들입니다. 사회심리학자들은 이런 사건의 원인을 분노조절장애로 보기도 합니다. 사회에서 소외감과 박탈감을 느끼며 분노를 쌓아온 것이 어느 순간 폭발한 것이라고 합니다.
2015년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전체 폭력 범죄가 37만 건에 달했습니다. 그중 우발적 범죄는 41%로, 총 148,000건으로 보고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외부적 폭력과 살인뿐만 아니라 자기 내면을 향한 폭력과 살인도 만만치 않습니다. 우리나라는 2014년부터 4년 연속 OECD 회원국 중 자살률 1위라는 오명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2015년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이 13,510명이었습니다. 인구 10만 명 당 자살률도 26.5명으로, OECD 회원국 평균인 12명을 2배 이상 웃돌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집단 동반자살도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마치 전염병처럼 자살이 사람들의 마음을 휩쓸어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영적으로 바라본다면 어떻게 분석할 수 있을까요? 이 사회가 어둠의 영, 영적인 죽임의 영에 사로잡혀 있다는 뜻입니다. 미움과 분노를 일으키는 사탄의 영이 우리를 협박하며 얽어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를 어디서부터 접근하고 해결할 수 있을까요? 혹시 우리가 원죄의 문제를 앓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저는 종종 우리 사회에 도사리고 있는 갈등과 분노의 원죄가 6‧25전쟁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동족상잔의 참화였습니다. 마치 아담이 아내 하와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한 것처럼,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을 잔인하게 죽인 것처럼, 우리 민족사에 응어리진 아픔과 고통으로 남아 있는 전쟁입니다.
생명을 사랑하는 자가 위대한 기적을 만듭니다.
오늘은 6‧25전쟁 후 67년이 되는 날입니다. 수많은 사상자와 유가족, 전쟁 고아와 이산가족을 낳은 우리 민족의 비극적인 전쟁이었습니다. 당시 6‧25전쟁에 참전한 국군 14만 명이 전사했습니다. 45만 명은 부상을 입었습니다. 유엔국도 4만 명의 사망자가 있었고, 10만 명이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민간인 피해 역시 속출했는데, 남북한 민간 사상자만 10만 명 이상이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시작된 6‧25전쟁은 우리 민족사와 국민 모두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습니다. 1953년에 휴전했지만, 남북한의 대립과 갈등, 민족 이질화는 여전합니다. 아니, 점점 더 커지고 곪아가고 있습니다. 미움과 어둠의 역사, 죽임의 역사로 점철된 6‧25전쟁입니다.
그러나 이 전쟁 중에도 생명을 위해 헌신한 사람,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쉰들러(Emilie Pelzl Schindler)처럼 헌신적으로 생명을 살린 사람입니다. 오늘은 그에 대한 몇 가지 이야기를 전해 드리고자 합니다.
1950년 9월의 서울이었습니다. 매일 아침 그는 서울 시내를 돌며 버려진 아이들을 거두며 보살폈습니다. 그는 당시 공군 중령이었습니다. 그런데 3개월 후인 1950년 12월, 중공군의 개입으로 유엔연합군이 후퇴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때 그는 “이 아이들을 내버려둔 채 혼자만 후퇴할 수 없습니다.”라며, 상관 명령에 불복종합니다. 점점 악화되는 상황에서 유엔연합군은 철수를 서둘러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와중에도 아이들을 피난시킬 방법을 찾지 못해 전전긍긍했습니다. 그러다 때마침 공군사령에서 공군 책임자를 만나 다음과 같은 약속을 받아냅니다. “일본에서 대기하고 있던 C-54 수성기 16대를 김포공항으로 보내 주겠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8시까지 아이들을 데리고 김포공항으로 오지 않으면 안 된다.” 비행기로 대피시켜 주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그러나 남아 있는 시간은 15시간, 돌보던 아이들은 1069명이었습니다. 더욱이 김포공항으로 이송할 수 있는 트럭은 단 한 대뿐이었습니다. 중령이 트럭을 구하는 동안 아이들은 추위에 쓰러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트럭을 구하지 못한 채 아침을 맞이하는데, 마지막으로 들른 마을에서 기적적으로 시멘트를 싣고 있던 해병대 트럭 14대를 발견합니다. 하지만 중령에게는 해병대 트럭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이 없었습니다. 그는 공군 중령 계급을 이용해 상부에서 명령이 하달됐다고, 아이들을 즉각 이송하라고 한다며, 해병대에 불법 명령을 내립니다. 그렇게 14대의 해병대 트럭을 이용해 아이들을 김포공항으로 이송시킵니다. 1950년 12월 20일, 그렇게 1069명의 아이들이 제주도로 무사히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이른바 ‘유모차 공수 작전’이라 불리며,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작전을 수행한 사람은 러셀 블레이즈델 중령입니다. 그는 당시 공군 중령이자 군종 목사였습니다. 그러나 불법 명령을 했다는 이유로 검찰관의 조사를 받게 됩니다. 그때 그는 ‘왜 명령에 불복종하며 불법 명령을 했냐’는 물음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합니다.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림의 역사를 발견합니다.
우리 인생은 둘 중 하나입니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분노하며 죽음으로 몰고 가는 악하고 못된 성향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또 하나는 사람을 살리고 긍휼히 여기며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선하고 귀한 마음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 삶은 우리의 역사 속에, 그리고 성경에 나타난 인물들 속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납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의 말씀입니다. 그는 인간의 두 가지 속성을 말합니다. 5절 말씀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로마서 7:5)
죄의 정욕이 율법적인 사고 안에서 확대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율법적인 사고 안에 갇힌 사람들은 남의 흠만 봅니다. 다른 사람의 연약한 부분만을 지적하며 정죄합니다. 나의 문제까지 다른 사람 때문이라고 생각하거나 이 세상 탓이라고 여깁니다. 자기중심적으로만 판단하는 이기적인 인간이 됩니다. 이로 인해 탐욕스러움만 남고 긍휼은 사라집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오직 자기 판단에 기초한 삶을 살게 됩니다.
이미 우리 주위에 죽임의 영이 가득합니다. 죽음의 문화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 죽음의 문화는 어둠과 죽음을 예찬합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미움을 조장하고 분노하게 합니다. 여기에는 이기주의적 탐욕이 숨어 있습니다. 나만 살아남으면 괜찮다는 자아팽창주의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사람마저도 물질로 판단합니다. 모든 것을 계량화합니다. 그래서 “너 어느 대학 다녀? 직업이 뭐야? 직장에서 직위가 뭐야? 가문은 어떤 가문이야? 몇 평짜리 집에 살아? 차는 뭐야?”라는 질문들만 쏟아냅니다. 더 큰 것, 더 많은 것, 더 많은 권력을 원하는 것입니다.
치열한 경쟁으로 인간을 내모는 것, 인간으로 하여금 열등감과 교만에 빠지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죽임의 영이 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인간을 끊임없이 좌절하게 하고 분노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이 죽임의 영을 넘어설 수 있을까요? 죽임의 영을 거스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 풍조와 세상 가치관이 어떻습니까? ‘내가 살려면 네가 죽어야 한다’ 혹은 ‘내가 높아져야 하니 너를 짓밟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아닙니까? 이것이 세상의 풍조입니다. 하지만 인간들도 이러한 풍조가 잘못된 것임을 깨닫습니다. 양심의 노력입니다. 그래서 보다 발전된 사회를 위해 힘씁니다. 나도 살고 너도 살자는 소위 ‘윈윈 전략(win-win strategy)’입니다. 남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사회로 가려는 몸부림입니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인간의 이기성이 발동되면 모든 게 금세 무너지고 맙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내가 죽을 테니 네가 살라. 내가 고난 받을 테니 너는 치유 받아라. 내가 내려갈 테니 너는 높아지거라.” 이렇게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입니다. 아니, 말씀만이 아니라 몸소 낮아짐의 삶을 사시며 우리를 높여주신 예수님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 어디에도 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셈법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죽음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죽음을 무시하지도 않습니다. 그렇다고 죽음을 조롱하는 것도 아닙니다. 죽음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압니다. 우리 삶을 피폐하게 하는 힘이 죽음에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죽음을 피하고자 하셨습니다. 인간의 죽음에 아파하며 애통해 하셨습니다. 당신 자신의 죽음도 두려워하셨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바로 그 죽음으로부터 해방되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셔서 우리를 죽음에서 건져 주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다른 인간을 만드십니다. 죽음을 향해 가는 인간을 살리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생명의 영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그리하여 옛사람을 벗어 버리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다시 사랑할 줄 알게 하십니다. 다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베풀 줄 아는 인간으로 우리를 만들어 주시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살림의 영 안에서 새 생명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중 6절 말씀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로마서 7:6)
성령이 우리를 새롭게 바꾸신다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내리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우리에게 내어주셨습니다. 예수님도 이 사실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죽음의 형틀을 자발적으로 짊어지셨습니다. 자원하는 마음으로 십자가의 길도 오르셨습니다. 그것이 생명을 살리는 역사였기 때문입니다. “내가 섬기겠다. 너는 섬김을 받아라. 나는 죽음의 길을 가겠다. 너는 살아나라. 내가 고난을 당하겠다. 너는 치유를 받아라.”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내리사랑은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초청하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인간이 고난당하고 무너질 때도 하나님은 언제나 다시 회복의 꿈을 주셨습니다. 메시아적 꿈, 바로 생명의 꿈과 치유와 회복의 꿈을 허락하셨습니다. 구약성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를 보면, 하나님이 메시아적 꿈을 꾸라고 하시며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말라기 4장 2절 말씀입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말라기 4:2)
마침내 우리가 푸른 풀밭에서 뛰노는 송아지처럼 기쁘게 뛰놀게 될 것이라는 선언입니다. 그러니 회복의 꿈을 꾸라는 것입니다. 어둠의 세계에 갇혀 있지 말고 생명의 능력 안에 거하라는 메시지입니다. 또한 여기서 ‘공의로운 해’는 예수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그분이 이 땅에 오셔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실 때, 우리 안에 막혀 있던 것들이 뚫리고 응어리졌던 것들이 풀어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 영혼이 기뻐 뛰놀며 찬양할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도 보면, 주님이 재림하실 때 메시아적인 꿈이 실현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 4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요한계시록 21:4)
사망이 다시 우리를 겁박할 수 없다고 합니다. 다시 애곡하는 일도 아픈 일도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새로운 세계, 새 하늘과 새 땅의 생명의 세계에 들어갈 것이니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지상에서 흘렸던 눈물들을 친히 닦아주십니다. 하나님이 위로자가 되셔서 우리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고, 우리를 다시 세워 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생명의 자리에 들어서게 되며, 메시아적 꿈을 현실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주님께서 이 약속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생명의 자리에 누가 계십니까? 그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위로자이십니다.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치유자이십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신 부활의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을 믿는 우리는 그분과 함께 생명의 자리, 부활의 자리에 들어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에 미움이 생길 때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내 안에 분노가 치밀 때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묵상하십시오. 그때 우리를 덮고 있던 어둠의 영, 죽임의 영도 소멸됩니다. 이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어둠의 영을 물리칠 수 있는 건 오로지 우리 주님의 생명의 영밖에 없습니다.
빛의 영, 생명의 영은 어둠과 죽임의 영보다 강력합니다. 무엇을 보고 알 수 있을까요? 우리가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이 그 표증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생명체로 존재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언젠가는 온전한 생명에 들어가리라는 것 또한 확신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가장 강력한 증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그분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고, 죄 용서의 기쁨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총도 누리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처럼 내 영과 몸이 기뻐 뛰놀고,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소중함을 누리며 이웃에게도 나눠 주는 하나님의 사람들, 믿음의 사람들, 생명의 영을 지닌 복된 사람들이 다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7년 6월 25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죽임의 영, 살림의 영?”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369, 384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롬 7:4-6 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생각하기
음악을 틀어놓고 아파트 외벽에 매달려 작업하던 사람을 시끄럽다는 이유로 밧줄을 잘라버렸습니다. 자기 집 인터넷이 느리다고 수리기사를 흉기로 살해했습니다. 아파트 냉동실에서 영아시신 두 구가 발견됐는데 두 아이를 출산한 34세 여성의 범행이었습니다. 지난 3월에는 인천초등학교 학생이 살해당했는데 살인범인 여고생 김모양 또 다른 박모양이 트위터를 주고받으면서 살인하는 과정을 나누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이 사회를 덮고 있는 심리적인 어둠의 영, 영적인 죽임의 영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게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이 모든 것들을 다 설명할 수가 있을까요? 어쩌면 우리가 원죄를 앓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저는 종종 우리 사회에 도사리고 있는 이 갈등과 분노의 원죄가 625전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종종 떠올리곤 합니다. 마치 먼저 죄를 범한 아담이 자기 아내 하와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했던 그 모습과도 같이 우리 민족사에 최근 현대사에 원죄처럼 우리의 가슴 속에 응어리지는 아픔과 고통으로 우리에게 남아있는 것은 아닌가? 다시 돌아보게 됩니다.
설교의 요약
그러나 죽임의 역사인 6.25 전쟁 와중에도 생명을 위해 헌신했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전쟁으로 버려진 아이들을 보살핀 군종목사 러셀 블레이즈델 공군중령이 있었습니다. 1950년 12월 중공군의 갑작스런 개입으로 유엔연합군이 후퇴를 시작할 수밖에 없게 된 상황에서 ‘이 아이들을 내버려둔 채 혼자만 후퇴할 수 없습니다.’하며 상관의 명령에 불복종하고 군법을 어기면서 까지 아이들을 제주도로 옮겼던 사람입니다. 그 유명한 유모차 공수작전입니다. 왜 당신은 명령 불복종을 했느냐? 불법명령을 했느냐? 하고 그에게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인간의 두 가지 속성을 얘기하면서 다음과 같이 우리들에게 가르칩니다. 우리의 죄의 정욕이 율법적인 사고를 할 때 이것이 확대된다는 것입니다(5절). 그래서 그 눈에는 남의 흠만 보입니다. 그래서 율법적인 사고를 하게 되면 남을 정죄합니다. 내가 갖고 있는 나의 문제까지 다른 사람 때문이라고 이 세상 탓이라고 그렇게 마음속에 분노를 느낍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것보다 한걸음 더 나아갑니다. ‘내가 죽을 테니 너는 살라. 내가 고난을 받을 테니 너는 치유를 받으라. 내가 내려갈 테니 너는 높아져라.’ 이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하나님 사랑의 셈법인 것입니다(6절).
그렇기 때문에, 세상이 무너져 가고 있을 때도 하나님은 다시 회복의 꿈을 주셨어요. 메시아적 꿈을 주셨어요. 생명의 꿈이고 치유와 회복의 꿈입니다. 구약성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서에 보면 메시아적인 꿈을 꾸라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말4:2). 신약성경의 마지막인 요한계시록에 보면 재림하실 우리 주님을 통해서 마지막 메시아적인 꿈의 실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위로자가 되셔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지시고 이 생명의 자리에 우리를 초대하시겠다고 하는 메시아적인 꿈의 실현을 우리에게 약속해주고 있습니다(계21:4).
이 모든 생명의 자리에 누가 있습니까? 그 중심에 예수그리스도가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위로자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마음속에 미움이 생길 때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빛의 영, 생명의 영은 어둠과 죽임의 영보다 더 큰 것이고 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이 생명의 소중함을 내가 누리고 우리 이웃들에게 나눠주고 함께 공유할 줄 아는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 믿음의 사람들, 생명의 영을 지닌 복된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나누기
1. 이 시대의 어두운 뉴스를 들으며 느낀 바를 함께 나눠 봅시다.
2. 유모차 공수작전 이야기를 들으며 느낀 바를 함께 나눠 봅시다.
3. 6.25 전쟁의 아픔을 극복하고 나아가 지금 이 땅의 아픔을 끊어내고 회복하기 위한 중보기도의 시간을 가져 봅시다.
마무리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주님 우리의 마음에 미움이 생길 때 예수님을 다시 바라보게 하시고, 분노가 치솟을 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묵상하게 하시옵소서. 생명의 영을 갖고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처럼 기뻐 뛰노는 믿음의 사람들 다 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