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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사무엘상 16: 6 ~ 13

김지철 목사

2008.03.02

우리 사회는 외모 지상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중국 당나라 때 관리를 채용하면서 인재를 선발하는 기준으로 삼았던 말입니다. 조선 사대부집안에서 사위를 고를 때에도 이 기준을 가지고 골랐습니다. 신언서판의 신(身)은 얼굴과 외모와 신체의 건장함을 보는 것입니다. 언(言)은 언변, 곧 말솜씨를 뜻하고, 서(書)란 글씨와 글의 내용을 의미합니다. 판(判)이란 사물의 시비를 바르게 가릴 수 있는 판단력과 분별력이 있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 중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는 것이 없는데 이것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할까요? 전자보다는 후자로 갈수록 더 중요한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외모의 그럴듯함보다는 말씨가 더 중요합니다. 언변보다는 글로 표현되는 교양이 더 중요합니다. 사물과 사람을 보는 판단력과 지혜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세태를 보면 거꾸로 가는 것 같습니다. 마음의 지혜보다는 외적으로 보이는 외모가 인간의 삶을 결정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사고의 천박성이 드러나고 삶의 비천함이 사라지지를 않습니다.
서울과 경기지역에 사는 18세 이상의 여성 810명에게 여성의 아름다움을 결정하는 요인이 무엇인지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얼굴이 25.8%, 몸매가  18.6%로 둘만 합쳐도 40%가 넘습니다. 그리고 마음씨가 13.5%, 매너가 10% 되는 것을 보면 여성이 여성을 볼 때도 얼굴과 몸매가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말입니다. 만약 남성에게 똑같은 질문을 했다면 얼굴과 몸매라고 대답하는 비율이 70%~80% 이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루키즘(lookism)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것은 look이라는 단어에 ism이 합쳐져서 외모차별주의라는 말입니다. 외모가 개인 간의 우열과 인생의 승패를 가름하는 기준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외모에 집착하는 외모지상주의를 뜻하기도 합니다. 옥스퍼드 1999년 판 20세기 단어사전에는 이렇게 정의되어 있습니다. “루키즘(lookism)이란 외모를 근거로 한 편견이나 차별을 의미한다.” 어쩌면 외모에 의한 차별은 인류역사 속에서 오랫동안 지속된 인종차별, 성차별, 연령차별, 계급차별의 정도와 수준이 비슷하거나 어쩌면 그것보다 더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외모지상주의에도 불구하고 종종 이것을 타파하는 몇 가지 좋은 징조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텔레비전이나 영화, 잡지를 보면 남자를 보는 눈에도 조금씩 변화가 있습니다. 과거에 남자배우들에게 ‘꽃미남’이라는 외모에 치중하는 말이 유행했다면 최근에는 그 말과 더불어 또 다른 말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바로 외모와 내면이 일치하는 ‘훈남’이라는 단어입니다. ‘완소훈남’이라는 단어는‘완전 소중한 훈훈한 남자’라는 말로 여성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를 표현할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사울왕의 외모와 내면이 일치하지 않았기에 새 왕을 세우십니다.

성경에서 사울이라는 왕에서부터 다윗왕으로 역사의 변화가 한 인물을 통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을 오늘날의 쉬운 말로 표현하면 이스라엘 역사 속에 꽃미남과 같은 사울왕에서 훈남 같은 다윗왕으로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흥미롭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을 다스릴 왕을 요구했을 때 하나님은 처음에는 그것을 반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너무나 왕을 요구하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기에 좋은 사람을 택하셨는데 그 사람이 바로 사울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이 좋아하는 기준에 의해 얼굴이 잘 생기고 키도 크고 건장하며 늠름한 인물을 택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사울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사울이요 준수한 소년이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만큼 더 컸더라”(사무엘상 9:2)

사울은 남들보다 목이 하나 더 있을 정도로 키가 컸고 겉모습이 아주 준수한 젊은 청년이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얼짱과 몸짱의 요소 두 가지를 동시에 갖춘 청년이었습니다. 이런 사울왕이 나라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외모와 내면이 일치하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지도자로서 왕의 역할을 하기에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는 백성들 앞에 거짓말을 했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존엄성을 우습게 여겼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임에도 불구하고 왕으로서 누려야할 명예와 영광이 점점 무너지며 몰락의 길을 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왕을 택한 것을 탄식하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사무엘상 15:35)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에게는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후회하시면 어떻게 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처음 사울을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세워놓았을 때 그의 외면과 내면은 일치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권력을 차지하고 돈과 재물을 가졌을 때, 세상의 모든 권력을 손에 넣었을 때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섬기고 백성들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욕심을 채우는 인물이 되었기에 하나님께서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무엘 선지자에게 다른 사람을 왕으로 세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을 찾습니다.

역사의 변화에 있어서 환경의 변화, 시스템의 변화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제일 중요한 것은 사람의 변화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외모와 내면이 일치하는 사람, 내면의 세계를 존중하는 사람, 하나님과 백성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을 세우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이새의 아들들 중 이런 사람이 있으니 베들레헴이라는 곳에 가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드디어 사무엘은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 여기 보면 하나님이 주도권을 가지고 인도하십니다. 다윗의 아버지 이새에게는 8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들을 모두 모아두었는데 8번째 아들인 다윗을 제외시켰습니다. 다윗은 들에 나가서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아들들은 다 불러서 사무엘 선지자 앞에 세웠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를 축복해주기 위해서 유명한 선지자가 집에 왔다면 흩어진 자녀들을 다 불러 모아 한 사람, 한 사람을 축복해달라고 요청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덟 번째 아들 다윗은 이 자리에 초청받지 못했습니다. 이새에게 여덟 번째 아들이란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요? 딸만 일곱 명 낳다가 마지막 8번째 아들을 낳았다면 애지중지하는 아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아들만 일곱 명을 낳다가 여덟 번째도 또 아들을 낳는다면 그 아들은 별 볼 일 없는 아들임에 틀림없습니다. 아버지가 여덟 번째 아들인 다윗을 그대로 내버려 둔 것을 보면 아버지 눈에도 띄지 않는 평범한 존재였습니다. 드디어 이새는 사무엘 선지자 앞에 아들을 한명씩 소개했습니다. 첫째 아들인 엘리압이 사무엘 앞에 섰을 때 사무엘의 마음은 흔들렸습니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사무엘상 16:6)

아마도 사무엘은 사울왕을 연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왕으로 사울처럼 잘 생겼을 뿐 아니라 체격도 좋고 키가 장대한 청년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첫째 아들 엘리압을 보니까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런 사무엘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는지라”(사무엘상 16:7)

가면을 쓴 우리들은 겉과 속이 다른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선지자인 사무엘도 사람을 잘못 보는지 의문이 생깁니다. 사무엘은 사울왕에게 연연했고 다시 사울왕이 회복되기를 기다리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얼짱이고 몸짱인 사울왕과 인간관계도 있었습니다. 비록 사울왕이 실수하고 실패했지만 애정관계가 있었습니다. 그러니 사울왕의 후계자니까 당연히 그와 비슷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무엘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읽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볼 때 첫 번째 아들이 사울왕과 비슷했기 때문에 이렇게 건장하고 잘생긴 아들을 하나님께서 택하실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인간의 생각과 판단력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선택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십니다.
우리는 인간을 외모로 볼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얼굴과 재물, 사회적 지위와 입고 있는 옷, 학식과 소유물로 사람을 판단하여 차별대우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았던 여덟 번째 아들을 선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고 겉과 속이 같은 사람을 찾으라고 하십니다. 아니 겉보다 내면의 세계를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을 찾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때때로 천박한 사고 때문에 잘못된 길로 갈 수가 있습니다. 외모를 좀 치장하면 속의 검은 것을 감출 수 있다고 착각하기도 합니다. 사람을 말할 때 영어로 ‘person’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 단어는 사람 또는 인격이라고 번역되는데, 라틴어로 ‘페르조나(가면)’라는 말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가면을 쓰고 있습니다. 나는 뭔가 가지고 있는 사람, 돈이 많은 사람,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 고상한 품격을 지닌 사람, 지식을 많이 쌓은 사람으로 겉모습의 가면을 씁니다. 멋진 옷으로 때로는 화장품과 향수로 가면을 쓰고 사람들 앞에 섭니다. 그러나 조금만 우리의 속을 들여다보면 어두운 모습, 음습한 모습, 탐욕의 모습, 나도 다 알 수 없는 잘못된 모습이 있습니다.
우리는 생존을 위해서 때때로 가면을 쓰지만 마음속에 얼마나 잘못된 것들로 가득 차 있는지를 스스로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마음에 있는 것이 얼마나 못된 것이고 그대로 내버려 두면 인간을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보여주십니다.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마가복음 7:21-23).

사람의 속에서 나온 것이 하나님 없는 인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인간, 인간의 욕심대로 사는 인간의 모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비판한 내용은 겉과 속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마가복음 7:6)

입술로는 하나님이 위대하시다고 하지만 속으로는 내가 위대하다는 교만한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다윗은 내면의 아름다움이 외면에 나타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다윗이라는 인물을 택하셨을까요? 성경에 보면 다윗이 사무엘 앞에 나왔을 때 다윗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사무엘상 16:12)

하나님께서 얼굴을 보지 않으시겠다고 하셨는데 왜 여기서는 얼굴을 보시며 칭찬하시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언제는 외모지상주의는 안된다고 말씀하시면서 다윗의 외모에 대해서는 칭찬의 말로 표현하고 계신지 우리 마음속에 의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이 말을 무슨 뜻일까요? 다윗이 혼자들에서 양을 칠 때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한가지였습니다. 부모님도 아니었고 형제도 아니었고 하나님이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다윗은 골리앗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을 증거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고백합니다. 다윗이 마음속에 갖고 있던 내면의 생각, 가치관, 삶의 모든 것은 오직 한가지였습니다. 다윗의 생을 읽다보면 왜 하나님께서 다윗을 이토록 사랑하셨을까 질투할 정도로 다윗이라는 인물을 높이 세우셨습니다. 다윗은 결코 인간적으로 완전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도 하나님 앞에서 무너지는 실수와 실패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다윗을 예쁘게 보셨습니다. 그것은 그의 내면의 세계가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의 그 어떤 것보다 우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는 것이 소원입니다.” 그래서 골리앗이 이스라엘을 조롱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할 때 그의 마음속에 불타는 용기가 생겼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당하고 조롱받을 때 어린 다윗이 앞으로 나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다윗의 모습을 귀히 여기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습, 하나님이 자기 인생의 가장 소중한 분임을 고백하는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은 다윗을 세우셨습니다. 바로 이런 다윗의 모습을 그의 얼굴빛이 붉고 눈이 초롱초롱하고 아름답다고 기록합니다. 외모 자체가 아니라 내면에서부터 나오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그의 외적인 모습에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의 중심이 하나님을 사랑할 때 아름다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사람이 아름답습니까? 진정한 아름다움은 내면의 품격과 사랑, 내면의 기쁨과 평안이 겉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정말 아름답고 멋진 사람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이 넘치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은혜와 감사로 인생을 사는 사람의 얼굴은 빛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의 얼굴표정에는 감사와 기쁨의 모습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외모를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나, 추한 나, 연약한 나, 욕심이 가득한 나를 주님 앞에 다 내려놓습니다. 사람들은 나를 모르지만 하나님은 나를 아십니다. 내 죄를 용서해주셔서 마음에 기쁨을 주시고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안을 허락해 주십니다. 그 때 우리는 슬픔 가운데 왔지만 기쁨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근심과 걱정 가운데 나왔지만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가슴에 품고 나갈 수 있습니다. 불안한 마음으로 나왔지만 주님이 주신 평안의 마음으로 세상을 향해 나갑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고,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깨닫고 예배드릴 때 얼굴의 표정도 바뀝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거울을 보십시오. 근심과 걱정으로, 오기와 교만으로 얼굴이 어그러져 있는 것은 아닌지요? 하나님이 주신 내면의 세계, 주님을 사랑하는 중심으로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의 얼굴이 변화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은 진정한 성형외과 의사와 같습니다. 다른 것에 시간과 돈을 투자하는 것을 조금 줄이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말씀을 읽고 사랑을 고백하는 것에 우리의 시간을 쏟아내어 가치관이 변할 때 생각이 바꿔지는 것입니다. 생각이 바꿔질 때 얼굴이 바뀝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의 중심을 보시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받기를 원하십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는 사람을 외모로 보며 거기에 시간과 정열과 모든 것을 쏟아 부었습니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말씀에 따라 이제는 내 중심의 주님 사랑과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소중한 것을 깨닫고 앞을 향해 나가게 하옵소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얼굴이 빛나는 사람, 눈동자가 맑은 사람,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사는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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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16: 6 ~ 13

6

그들이 오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 하였더니

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8

이새가 아비나답을 불러 사무엘 앞을 지나가게 하매 사무엘이 이르되 이도 여호와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니

9

이새가 삼마로 지나게 하매 사무엘이 이르되 이도 여호와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니라

10

이새가 그의 아들 일곱을 다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하나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들을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고

11

또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가 이르되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그는 양을 지키나이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라 그가 여기 오기까지는 우리가 식사 자리에 앉지 아니하겠노라

12

이에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하시는지라

13

사무엘이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그의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

우리 사회는 외모 지상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중국 당나라 때 관리를 채용하면서 인재를 선발하는 기준으로 삼았던 말입니다. 조선 사대부집안에서 사위를 고를 때에도 이 기준을 가지고 골랐습니다. 신언서판의 신(身)은 얼굴과 외모와 신체의 건장함을 보는 것입니다. 언(言)은 언변, 곧 말솜씨를 뜻하고, 서(書)란 글씨와 글의 내용을 의미합니다. 판(判)이란 사물의 시비를 바르게 가릴 수 있는 판단력과 분별력이 있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 중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는 것이 없는데 이것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할까요? 전자보다는 후자로 갈수록 더 중요한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외모의 그럴듯함보다는 말씨가 더 중요합니다. 언변보다는 글로 표현되는 교양이 더 중요합니다. 사물과 사람을 보는 판단력과 지혜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세태를 보면 거꾸로 가는 것 같습니다. 마음의 지혜보다는 외적으로 보이는 외모가 인간의 삶을 결정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사고의 천박성이 드러나고 삶의 비천함이 사라지지를 않습니다.
서울과 경기지역에 사는 18세 이상의 여성 810명에게 여성의 아름다움을 결정하는 요인이 무엇인지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얼굴이 25.8%, 몸매가  18.6%로 둘만 합쳐도 40%가 넘습니다. 그리고 마음씨가 13.5%, 매너가 10% 되는 것을 보면 여성이 여성을 볼 때도 얼굴과 몸매가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말입니다. 만약 남성에게 똑같은 질문을 했다면 얼굴과 몸매라고 대답하는 비율이 70%~80% 이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루키즘(lookism)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것은 look이라는 단어에 ism이 합쳐져서 외모차별주의라는 말입니다. 외모가 개인 간의 우열과 인생의 승패를 가름하는 기준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외모에 집착하는 외모지상주의를 뜻하기도 합니다. 옥스퍼드 1999년 판 20세기 단어사전에는 이렇게 정의되어 있습니다. “루키즘(lookism)이란 외모를 근거로 한 편견이나 차별을 의미한다.” 어쩌면 외모에 의한 차별은 인류역사 속에서 오랫동안 지속된 인종차별, 성차별, 연령차별, 계급차별의 정도와 수준이 비슷하거나 어쩌면 그것보다 더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외모지상주의에도 불구하고 종종 이것을 타파하는 몇 가지 좋은 징조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텔레비전이나 영화, 잡지를 보면 남자를 보는 눈에도 조금씩 변화가 있습니다. 과거에 남자배우들에게 ‘꽃미남’이라는 외모에 치중하는 말이 유행했다면 최근에는 그 말과 더불어 또 다른 말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바로 외모와 내면이 일치하는 ‘훈남’이라는 단어입니다. ‘완소훈남’이라는 단어는‘완전 소중한 훈훈한 남자’라는 말로 여성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를 표현할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사울왕의 외모와 내면이 일치하지 않았기에 새 왕을 세우십니다.

성경에서 사울이라는 왕에서부터 다윗왕으로 역사의 변화가 한 인물을 통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을 오늘날의 쉬운 말로 표현하면 이스라엘 역사 속에 꽃미남과 같은 사울왕에서 훈남 같은 다윗왕으로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흥미롭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을 다스릴 왕을 요구했을 때 하나님은 처음에는 그것을 반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너무나 왕을 요구하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기에 좋은 사람을 택하셨는데 그 사람이 바로 사울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이 좋아하는 기준에 의해 얼굴이 잘 생기고 키도 크고 건장하며 늠름한 인물을 택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사울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사울이요 준수한 소년이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만큼 더 컸더라”(사무엘상 9:2)

사울은 남들보다 목이 하나 더 있을 정도로 키가 컸고 겉모습이 아주 준수한 젊은 청년이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얼짱과 몸짱의 요소 두 가지를 동시에 갖춘 청년이었습니다. 이런 사울왕이 나라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외모와 내면이 일치하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지도자로서 왕의 역할을 하기에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는 백성들 앞에 거짓말을 했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존엄성을 우습게 여겼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임에도 불구하고 왕으로서 누려야할 명예와 영광이 점점 무너지며 몰락의 길을 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왕을 택한 것을 탄식하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사무엘상 15:35)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에게는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후회하시면 어떻게 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처음 사울을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세워놓았을 때 그의 외면과 내면은 일치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권력을 차지하고 돈과 재물을 가졌을 때, 세상의 모든 권력을 손에 넣었을 때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섬기고 백성들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욕심을 채우는 인물이 되었기에 하나님께서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무엘 선지자에게 다른 사람을 왕으로 세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을 찾습니다.

역사의 변화에 있어서 환경의 변화, 시스템의 변화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제일 중요한 것은 사람의 변화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외모와 내면이 일치하는 사람, 내면의 세계를 존중하는 사람, 하나님과 백성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을 세우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이새의 아들들 중 이런 사람이 있으니 베들레헴이라는 곳에 가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드디어 사무엘은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 여기 보면 하나님이 주도권을 가지고 인도하십니다. 다윗의 아버지 이새에게는 8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들을 모두 모아두었는데 8번째 아들인 다윗을 제외시켰습니다. 다윗은 들에 나가서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아들들은 다 불러서 사무엘 선지자 앞에 세웠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를 축복해주기 위해서 유명한 선지자가 집에 왔다면 흩어진 자녀들을 다 불러 모아 한 사람, 한 사람을 축복해달라고 요청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덟 번째 아들 다윗은 이 자리에 초청받지 못했습니다. 이새에게 여덟 번째 아들이란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요? 딸만 일곱 명 낳다가 마지막 8번째 아들을 낳았다면 애지중지하는 아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아들만 일곱 명을 낳다가 여덟 번째도 또 아들을 낳는다면 그 아들은 별 볼 일 없는 아들임에 틀림없습니다. 아버지가 여덟 번째 아들인 다윗을 그대로 내버려 둔 것을 보면 아버지 눈에도 띄지 않는 평범한 존재였습니다. 드디어 이새는 사무엘 선지자 앞에 아들을 한명씩 소개했습니다. 첫째 아들인 엘리압이 사무엘 앞에 섰을 때 사무엘의 마음은 흔들렸습니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사무엘상 16:6)

아마도 사무엘은 사울왕을 연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왕으로 사울처럼 잘 생겼을 뿐 아니라 체격도 좋고 키가 장대한 청년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첫째 아들 엘리압을 보니까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런 사무엘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는지라”(사무엘상 16:7)

가면을 쓴 우리들은 겉과 속이 다른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선지자인 사무엘도 사람을 잘못 보는지 의문이 생깁니다. 사무엘은 사울왕에게 연연했고 다시 사울왕이 회복되기를 기다리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얼짱이고 몸짱인 사울왕과 인간관계도 있었습니다. 비록 사울왕이 실수하고 실패했지만 애정관계가 있었습니다. 그러니 사울왕의 후계자니까 당연히 그와 비슷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무엘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읽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볼 때 첫 번째 아들이 사울왕과 비슷했기 때문에 이렇게 건장하고 잘생긴 아들을 하나님께서 택하실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인간의 생각과 판단력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선택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십니다.
우리는 인간을 외모로 볼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얼굴과 재물, 사회적 지위와 입고 있는 옷, 학식과 소유물로 사람을 판단하여 차별대우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았던 여덟 번째 아들을 선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고 겉과 속이 같은 사람을 찾으라고 하십니다. 아니 겉보다 내면의 세계를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을 찾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때때로 천박한 사고 때문에 잘못된 길로 갈 수가 있습니다. 외모를 좀 치장하면 속의 검은 것을 감출 수 있다고 착각하기도 합니다. 사람을 말할 때 영어로 ‘person’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 단어는 사람 또는 인격이라고 번역되는데, 라틴어로 ‘페르조나(가면)’라는 말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가면을 쓰고 있습니다. 나는 뭔가 가지고 있는 사람, 돈이 많은 사람,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 고상한 품격을 지닌 사람, 지식을 많이 쌓은 사람으로 겉모습의 가면을 씁니다. 멋진 옷으로 때로는 화장품과 향수로 가면을 쓰고 사람들 앞에 섭니다. 그러나 조금만 우리의 속을 들여다보면 어두운 모습, 음습한 모습, 탐욕의 모습, 나도 다 알 수 없는 잘못된 모습이 있습니다.
우리는 생존을 위해서 때때로 가면을 쓰지만 마음속에 얼마나 잘못된 것들로 가득 차 있는지를 스스로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마음에 있는 것이 얼마나 못된 것이고 그대로 내버려 두면 인간을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보여주십니다.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마가복음 7:21-23).

사람의 속에서 나온 것이 하나님 없는 인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인간, 인간의 욕심대로 사는 인간의 모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비판한 내용은 겉과 속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마가복음 7:6)

입술로는 하나님이 위대하시다고 하지만 속으로는 내가 위대하다는 교만한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다윗은 내면의 아름다움이 외면에 나타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다윗이라는 인물을 택하셨을까요? 성경에 보면 다윗이 사무엘 앞에 나왔을 때 다윗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사무엘상 16:12)

하나님께서 얼굴을 보지 않으시겠다고 하셨는데 왜 여기서는 얼굴을 보시며 칭찬하시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언제는 외모지상주의는 안된다고 말씀하시면서 다윗의 외모에 대해서는 칭찬의 말로 표현하고 계신지 우리 마음속에 의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이 말을 무슨 뜻일까요? 다윗이 혼자들에서 양을 칠 때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한가지였습니다. 부모님도 아니었고 형제도 아니었고 하나님이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다윗은 골리앗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을 증거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고백합니다. 다윗이 마음속에 갖고 있던 내면의 생각, 가치관, 삶의 모든 것은 오직 한가지였습니다. 다윗의 생을 읽다보면 왜 하나님께서 다윗을 이토록 사랑하셨을까 질투할 정도로 다윗이라는 인물을 높이 세우셨습니다. 다윗은 결코 인간적으로 완전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도 하나님 앞에서 무너지는 실수와 실패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다윗을 예쁘게 보셨습니다. 그것은 그의 내면의 세계가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의 그 어떤 것보다 우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는 것이 소원입니다.” 그래서 골리앗이 이스라엘을 조롱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할 때 그의 마음속에 불타는 용기가 생겼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당하고 조롱받을 때 어린 다윗이 앞으로 나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다윗의 모습을 귀히 여기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습, 하나님이 자기 인생의 가장 소중한 분임을 고백하는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은 다윗을 세우셨습니다. 바로 이런 다윗의 모습을 그의 얼굴빛이 붉고 눈이 초롱초롱하고 아름답다고 기록합니다. 외모 자체가 아니라 내면에서부터 나오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그의 외적인 모습에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의 중심이 하나님을 사랑할 때 아름다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사람이 아름답습니까? 진정한 아름다움은 내면의 품격과 사랑, 내면의 기쁨과 평안이 겉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정말 아름답고 멋진 사람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이 넘치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은혜와 감사로 인생을 사는 사람의 얼굴은 빛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의 얼굴표정에는 감사와 기쁨의 모습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외모를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나, 추한 나, 연약한 나, 욕심이 가득한 나를 주님 앞에 다 내려놓습니다. 사람들은 나를 모르지만 하나님은 나를 아십니다. 내 죄를 용서해주셔서 마음에 기쁨을 주시고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안을 허락해 주십니다. 그 때 우리는 슬픔 가운데 왔지만 기쁨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근심과 걱정 가운데 나왔지만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가슴에 품고 나갈 수 있습니다. 불안한 마음으로 나왔지만 주님이 주신 평안의 마음으로 세상을 향해 나갑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고,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깨닫고 예배드릴 때 얼굴의 표정도 바뀝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거울을 보십시오. 근심과 걱정으로, 오기와 교만으로 얼굴이 어그러져 있는 것은 아닌지요? 하나님이 주신 내면의 세계, 주님을 사랑하는 중심으로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의 얼굴이 변화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은 진정한 성형외과 의사와 같습니다. 다른 것에 시간과 돈을 투자하는 것을 조금 줄이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말씀을 읽고 사랑을 고백하는 것에 우리의 시간을 쏟아내어 가치관이 변할 때 생각이 바꿔지는 것입니다. 생각이 바꿔질 때 얼굴이 바뀝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의 중심을 보시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받기를 원하십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는 사람을 외모로 보며 거기에 시간과 정열과 모든 것을 쏟아 부었습니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말씀에 따라 이제는 내 중심의 주님 사랑과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소중한 것을 깨닫고 앞을 향해 나가게 하옵소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얼굴이 빛나는 사람, 눈동자가 맑은 사람,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사는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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