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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소서!

에베소서 1: 17 ~ 19

김지철 목사

2014.01.05

신앙의 전승은 하나님이 주신 복입니다.

2014년을 맞이하여 온 가족 새벽기도회를 열었습니다. 3일 동안의 주제는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였습니다. 첫날은 ‘나를 새롭게’, 둘째 날은 ‘가정을 새롭게’, 셋째 날은 ‘세상을 새롭게’라는 제목으로 기도와 말씀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있는 말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시는 근거이고, 그분 안에 있으면 우리가 새로워진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고 은혜를 받은 시간이었습니다.
새벽에 나오시는 많은 분들을 보면서, 기도와 말씀으로 한 해를 시작하고자 하는 분들이 참으로 많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제게 기쁨이었습니다. 또한 어린 손자와 손녀, 아들, 딸의 손을 잡고 나오시는 모습이, 할아버지 세대, 아버지 세대, 아들 세대 이렇게 3세대가 함께 나오시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신앙이 무엇일까요? 다른 말로 표현하면 ‘전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신앙이 아버지, 어머니의 신앙이 되고, 그리고 또 아들과 딸의 신앙으로 전수되는 가정이 복 받은 가정입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표현하실 때에도 전승의 중요성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는 이삭의 하나님, 나는 야곱의 하나님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 가지 뜻이 그 안에 들어있습니다만, 그 중 하나는 ‘나는 할아버지의 하나님도 되고, 아버지의 하나님도 되고, 아들의 하나님도 된다’는 것입니다. 즉 신앙의 연속성을 축복해 주시기 위해서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신앙이 전승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는데, 바로 기억력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기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셨는지,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도우셨는지를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가르치라고 하십니다. “자녀들에게 그대로 가르쳐라! 그리고 너 자신이 신앙의 모범이 되어 살라!” 그래서 자녀들의 손을 잡고 어깨를 껴안으며 축복기도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우리의 기쁨인 것입니다.

‘아버지’는 하나님이 세우신 자리입니다.

저는 성도님들이 평생 자녀들과 대화할 수 있는 그런 부모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얘야, 참 고맙구나. 감사하구나.” 먼저 고마움도 표현하고, 때로 부모의 역할을 조금 못한 것 같이 여겨지면 “미안하구나! 내가 더 잘해보겠다.” 미안함도 이야기할 수 있는 부모 말입니다. 그러면서 자녀를 축복해 주는 부모가 된다면, 그 자녀들은 얼마나 복 받은 것이겠습니까?
특별히 아버지들에게 부탁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아버지를 가정의 가장으로 세우셨습니다. 권위 있는 자로 세우셨습니다. 권위가 있다는 게 무엇일까요? “어험!”하며 힘을 부리고 위엄을 갖추려는 것이 권위일까요? 아닙니다. 아버지 그 자체가 권위입니다. ‘아버지’라는 이름 자체가 아버지들의 권위입니다. 자녀들이 머리를 푹 숙이고 복종하며 다가오는 것을 기다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론 잘못을 했을 때는 엄하게 다스려야 하지만, 보통 때는 마음을 넓히셔야 합니다. 아버지가 먼저 부드럽게 다가서야 됩니다. 그리고 자녀들의 마음을 어루만지십시오. “내 아들아, 내 딸아, 고맙구나. 네가 내 아들, 내 딸인 것이 자랑스럽구나. 내가 네 아버지인 것이 보람 있구나.” 이것이 아버지의 역할입니다.
아내에게도 여태까지 함께 살아주어서 고맙다고 이야기해 보세요. 손 한 번 더 만져주시고, 안아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나를 떠납니다. 아버지가 외톨이가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얼마나 많은 가정의 아버지들이 따로 노는지 모릅니다. 착한 아들도, 착한 딸도 아버지를 떠납니다. 그렇게 착한 아내도 남편을 떠납니다. 무엇 때문에 고마움도 모르는 남편과 평생을 살려고 애를 쓰겠습니까? 자기를 인정해주고 존중해주지 않는 남편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밖에서 아무리 잘나가고 큰소리를 치는 지위에 있어도 가정이 엉망이 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버지들은 하나님이 주신 사랑의 권위를 갖고 하나님이 맡기신 가족을 바르게 이끌어 가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가정 안에 감사의 고백이 커지게 됩니다.

성령은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이 감사의 고백이 잠깐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지속되고 계속될 수 있을까요?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셔야 가능합니다. 누가복음 11장에 13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누가복음 11:13)

아들이나 딸이, “아빠, 이것 좀 해 주세요. 저것 좀 주세요.”라고 할 때, 나쁜 것이 아니면 대부분 허락하지 않습니까? 못된 아버지라 해도 자식에게 그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보다 더 크신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어떠시겠습니까? 자녀된 우리가 하나님께 요청하면 최고의 것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받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이 하시는 일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게 합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시는 대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만듭니다.
우리가 갖는 최고의 특권은 언제나 부를 수 있는 이름, ‘나의 예수님, 나의 아버지 하나님’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이름을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허락하셨습니다. 왜 성령을 통해서 주셨을까요?
예수님은 이 땅에서 33년을 사셨습니다. 그 중 공생애 기간은 3년뿐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을 떠나시기 전 기도하시면서 우리에게 주실 성령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에게 진리를 알게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마음을 갖게 한다.”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위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우리의 삶의 처지에 다가오십니다. 우리의 연약한 것, 부족한 것, 모자란 것, 외롭고 답답한 것을 아시고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저는 우리 성도님들이 올 한 해 어떤 모습의 사람이 되면 좋을까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성령을 넘치게 주셔서 성령의 사람,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 받은 성령의 축복을 자랑스러워하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로마서 8장 26절에서 사도 바울은 성령이 왜 소중한 분인지에 대해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로마서 8:26)

어떻게 기도할지 알지 못할 때, 기도의 제목도 떠오르지 않을 때, 어떤 기도를 해야 할지 모를 때, 주의 성령께서 내 영혼 속에서 내가 가야할 길, 하나님이 내게 주신 하늘의 비밀들을 가르치시며 나를 위하여 간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어디에 있든, 어떤 환경에 처하든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아버지도 아들과 늘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 어머니도 딸과 늘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 당신이 아버지가 되셔서 내 자녀들을 지키시고, 동행하시옵소서. 성령님이시여,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며 살아가게 하시옵소서.”라고 말입니다.

계시의 영과 지혜의 영이 만나는 것이 신앙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위해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들에게 하나님의 영을 주시옵소서. 무엇보다 지혜의 영을 주시옵소서. 무엇보다 계시의 영을 주시옵소서.” 에베소 교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사모하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에베소서 1:17)

우리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고, 우리의 하나님은 영광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육신의 부모에게 이야기하듯 하나님께 요청하라는 것입니다. 진리의 영, 계시의 영을 달라고 하나님께 요청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계시의 영, 지혜의 영이 무엇일까요? 계시의 영은 위로부터의 영으로, 하나님의 비밀을 보여주는 영입니다. 조금 어려운 말로 하면, 명제적인 틀을 갖고 하늘에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다. 하나님은 시간을 만드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생명이시다. 하나님은 진리이시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시다. 하나님은 빛이시다.’ 이렇게 명제로 다가오는 말씀을 읽으면 우리는 놀라게 되고 경탄하게 됩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다른 생각이 듭니다. ‘에이,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지?’ 거리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생명, 거룩, 빛이 과연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나…’ 우리가 이렇게 마속으로부터 질문하게 될 때, 성령은 지혜의 영으로 다가오십니다. 그것은 어떤 영입니까? 아래로부터의 영으로, 하나님의 영적인 능력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영입니다.
신앙은 이 두 가지 영성, 즉 위로부터의 영성과 아래로부터의 영성이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위로부터의 영성은, ‘하나님은 구원자다. 하나님은 세상의 빛이다.’ 하고 하나님을 명제적으로 보여주며 이 땅에 내려오는 것입니다. 반면 아래로부터의 영성이란, 우리의 슬픔, 탄식, 외로움, 절망과 실패 가운데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우리와 동행하시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가장 높은 영광이신 분을 나의 비천한 삶에서 경험하는 영성, 이것이 지혜의 영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기억하십니까? 하나님은 하늘의 보물을 어디에 숨겨 두셨습니까? 땅 속에 숨겨 놓으셨다고 우리에게 가르치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어디로 오셨습니까? 왕궁으로 오지 않으셨습니다. 찬란하고 화려한 곳으로 찾아오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마구간으로 오셨습니다. 지저분하고 더럽고 추한 그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 낮고 낮은 자리가 어디입니까? 바로 우리 마음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깨끗해서 하나님이 다가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자랑할 만한 것이 많아서, 지식이 많아서, 세상에서 잘나가는 사람이어서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찾아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나를 봐도 알지 않습니까? 마음이 얼마나 너저분합니까? 고약합니까? 얼마나 문제가 많습니까? 얼마나 자주 넘어지고 실패합니까? 얼마나 자주 실망합니까? 탐욕과 정욕이 나를 붙잡고 있는 것을 새해에도 보지 않습니까? 작심삼일이 아니라 아침에 작정한 것도 저녁이 되면 무너뜨리는 것이 내 모습 아닙니까?
그런데 이렇게 실패와 문제가 가득한 곳, 탐욕과 정욕이 가득한 내 마음에 하나님이 입주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이고 복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내가 잘나서 하나님이 내게 다가오시는 것이 아니라, 문제투성이어도 그런 내 모습에 성령님이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십니까? 헤롯 왕처럼 “나 이외에 어떤 다른 사람이 있느냐!” 하며 떵떵거리지 말고, 교만해지지 말고, 목자들처럼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오시겠다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임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문제 많은 나와 함께 동행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가난하고 나약한 우리 안에 풍요와 영광의 하나님께서 함께 살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떤 사람이 복이 있는지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기다림을 갖고 있는 목마른 자들이 바로 그런 자들입니다. 교만하지 않은 자리에 하나님이 찾아오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나의 나됨을 알게 하십니다.

지혜의 영이 오시면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줍니다. 18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에베소서 1:18)

마음의 눈을 밝혀준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내가 인간임을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저 하늘에 계시고 나는 이 땅에 있는 존재임을 알게 해 주는 것입니다. 나의 한계가 무엇인지를 나로 하여금 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 앞에서 신음하면서 영원한 생명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거짓 것에 속고 속이는 나의 누추한 현장에서 참된 진리이신 예수님을 만나며 감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신음하고 탄식할 때 슬며시 찾아오셔서 나를 위로해 주시는 것, 이것이 지혜의 영이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에게는 누추하고 부족한 것들이 있습니다. 또 세상은 각박하고 살벌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혜의 영과 계시의 영을 받게 되면 이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모든 것이 닫혀 있는 곳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인생이란 쓰레기통에 버려야 될 값어치 없는 것이 아니라 살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시는 것이 계시의 영이고 지혜의 영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것들을 받을 수 있을까요? 누가 받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계시와 지혜의 영을 주시는 목적이 있습니다.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바르게 인식하도록, 하나님의 능력을 받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오늘 본문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신앙이란 무슨 뜻일까요? 이것은 나를 아는 신앙과도 같습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나를 아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아는데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다면, 아직 하나님을 잘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내가 누구인지는 아는데 하나님을 아직 잘 모르겠다면, 아직까지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오시면 인간은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압니다. 인간 스스로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고 하나님 앞에 머리를 숙이면 하나님의 계시가 다가옵니다. 이것은 함께 옵니다.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때로 내 무의식 속까지 찾아오셔서 나를 건드리십니다. 내가 실패했던 것, 좌절했던 것, 상처받고 신음했던 그 모든 것들을 건드리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모든 것들은 결코 나쁜 것들이 아닙니다. 바로 그 자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나의 무능력도, 나의 죄악조차도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자리가 됩니다.
그동안 실패해 왔다고 결코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실패한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실패한 다음에 ‘인생이란 다 이런 거야!’ 하며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실패한 삶의 현장이야 말로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시는 자리입니다. 내 삶이 망가지고 무너졌다고 해서 하나님을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이 자기 실존의 무능함을 깊이 인식할 때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망가진 모습이 있으면 그대로 하나님 앞에 아뢰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망가지면서까지 뻔뻔해져서는 안 됩니다. 신앙생활을 하고 있고, 교회까지 나오면서 뻔뻔해지고 교만해지면 누구도 말릴 수 없게 됩니다. 악해지고 탐욕스러워지도록 우리가 스스로를 닫아걸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에 보면 바울이 격정적으로 반대하는 것이 있습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쳤다’고 했던 바울의 말꼬리를 붙잡은 사람들이 이야기합니다. “그래?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치는 거야?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를 넘치게 받기 위해서 이제부터 죄를 지어야겠구만!” 이때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죄가 많은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넘쳤지만, 그렇다고 은혜를 넘치게 받기 위해서 죄를 짓겠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마찬가지입니다. 실패하고, 낙담하고, 절망하고, 무능을 경험하는 그 자리에 하나님의 영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의 역사를 받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악한 일을 하고 무너지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오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의 영과 계시의 영을 받는 자리는 다른 데가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는 자리입니다. 겸손이란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내 속에 어둠의 그림자가 있습니다. 주님, 내 속에 슬픔이 있습니다. 외로움이 있습니다. 실패하고 낙담한 절망이 나를 붙들고 있습니다. 나를 얽어매는 상처의 응어리가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이렇게 내 속에 있는 연약함과 문제를 인식하고 인정하는 용기가 겸손입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서게 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혜의 영과 계시의 영을 넘치게 부어 주십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처럼, 내가 약할 때 강해졌다고, 예수님 때문에 나는 내 자신의 연약함을 자랑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길이 열렸다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미련하다고 여길 때 지혜로운 분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죄인이라고 탄식할 때 죄인을 용서하시는 거룩한 분을 만납니다. 우리가 죽음 앞에서 허우적거리며 두려워할 때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새로운 한 해를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하나님께 요청하십시오.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요청하듯이 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주의 영으로 저를 가득히 채워주세요. 내 모습 이대로 주님 앞에 나옵니다. 지혜의 영을 주세요. 계시의 영을 주세요.”
이곳에 모인 귀한 성도님들 모두가 하나님의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 되시기를 원합니다. 계시의 영, 지혜의 영으로 우리의 가슴이 충만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귀히 쓰시는 믿음의 사람들 다 되시는 복된 한 해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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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1: 17 ~ 19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19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신앙의 전승은 하나님이 주신 복입니다.

2014년을 맞이하여 온 가족 새벽기도회를 열었습니다. 3일 동안의 주제는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였습니다. 첫날은 ‘나를 새롭게’, 둘째 날은 ‘가정을 새롭게’, 셋째 날은 ‘세상을 새롭게’라는 제목으로 기도와 말씀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있는 말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시는 근거이고, 그분 안에 있으면 우리가 새로워진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고 은혜를 받은 시간이었습니다.
새벽에 나오시는 많은 분들을 보면서, 기도와 말씀으로 한 해를 시작하고자 하는 분들이 참으로 많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제게 기쁨이었습니다. 또한 어린 손자와 손녀, 아들, 딸의 손을 잡고 나오시는 모습이, 할아버지 세대, 아버지 세대, 아들 세대 이렇게 3세대가 함께 나오시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신앙이 무엇일까요? 다른 말로 표현하면 ‘전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신앙이 아버지, 어머니의 신앙이 되고, 그리고 또 아들과 딸의 신앙으로 전수되는 가정이 복 받은 가정입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표현하실 때에도 전승의 중요성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는 이삭의 하나님, 나는 야곱의 하나님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 가지 뜻이 그 안에 들어있습니다만, 그 중 하나는 ‘나는 할아버지의 하나님도 되고, 아버지의 하나님도 되고, 아들의 하나님도 된다’는 것입니다. 즉 신앙의 연속성을 축복해 주시기 위해서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신앙이 전승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는데, 바로 기억력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기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셨는지,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도우셨는지를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가르치라고 하십니다. “자녀들에게 그대로 가르쳐라! 그리고 너 자신이 신앙의 모범이 되어 살라!” 그래서 자녀들의 손을 잡고 어깨를 껴안으며 축복기도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우리의 기쁨인 것입니다.

‘아버지’는 하나님이 세우신 자리입니다.

저는 성도님들이 평생 자녀들과 대화할 수 있는 그런 부모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얘야, 참 고맙구나. 감사하구나.” 먼저 고마움도 표현하고, 때로 부모의 역할을 조금 못한 것 같이 여겨지면 “미안하구나! 내가 더 잘해보겠다.” 미안함도 이야기할 수 있는 부모 말입니다. 그러면서 자녀를 축복해 주는 부모가 된다면, 그 자녀들은 얼마나 복 받은 것이겠습니까?
특별히 아버지들에게 부탁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아버지를 가정의 가장으로 세우셨습니다. 권위 있는 자로 세우셨습니다. 권위가 있다는 게 무엇일까요? “어험!”하며 힘을 부리고 위엄을 갖추려는 것이 권위일까요? 아닙니다. 아버지 그 자체가 권위입니다. ‘아버지’라는 이름 자체가 아버지들의 권위입니다. 자녀들이 머리를 푹 숙이고 복종하며 다가오는 것을 기다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론 잘못을 했을 때는 엄하게 다스려야 하지만, 보통 때는 마음을 넓히셔야 합니다. 아버지가 먼저 부드럽게 다가서야 됩니다. 그리고 자녀들의 마음을 어루만지십시오. “내 아들아, 내 딸아, 고맙구나. 네가 내 아들, 내 딸인 것이 자랑스럽구나. 내가 네 아버지인 것이 보람 있구나.” 이것이 아버지의 역할입니다.
아내에게도 여태까지 함께 살아주어서 고맙다고 이야기해 보세요. 손 한 번 더 만져주시고, 안아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나를 떠납니다. 아버지가 외톨이가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얼마나 많은 가정의 아버지들이 따로 노는지 모릅니다. 착한 아들도, 착한 딸도 아버지를 떠납니다. 그렇게 착한 아내도 남편을 떠납니다. 무엇 때문에 고마움도 모르는 남편과 평생을 살려고 애를 쓰겠습니까? 자기를 인정해주고 존중해주지 않는 남편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밖에서 아무리 잘나가고 큰소리를 치는 지위에 있어도 가정이 엉망이 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버지들은 하나님이 주신 사랑의 권위를 갖고 하나님이 맡기신 가족을 바르게 이끌어 가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가정 안에 감사의 고백이 커지게 됩니다.

성령은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이 감사의 고백이 잠깐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지속되고 계속될 수 있을까요?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셔야 가능합니다. 누가복음 11장에 13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누가복음 11:13)

아들이나 딸이, “아빠, 이것 좀 해 주세요. 저것 좀 주세요.”라고 할 때, 나쁜 것이 아니면 대부분 허락하지 않습니까? 못된 아버지라 해도 자식에게 그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보다 더 크신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어떠시겠습니까? 자녀된 우리가 하나님께 요청하면 최고의 것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받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이 하시는 일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게 합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시는 대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만듭니다.
우리가 갖는 최고의 특권은 언제나 부를 수 있는 이름, ‘나의 예수님, 나의 아버지 하나님’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이름을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허락하셨습니다. 왜 성령을 통해서 주셨을까요?
예수님은 이 땅에서 33년을 사셨습니다. 그 중 공생애 기간은 3년뿐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을 떠나시기 전 기도하시면서 우리에게 주실 성령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에게 진리를 알게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마음을 갖게 한다.”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위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우리의 삶의 처지에 다가오십니다. 우리의 연약한 것, 부족한 것, 모자란 것, 외롭고 답답한 것을 아시고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저는 우리 성도님들이 올 한 해 어떤 모습의 사람이 되면 좋을까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성령을 넘치게 주셔서 성령의 사람,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 받은 성령의 축복을 자랑스러워하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로마서 8장 26절에서 사도 바울은 성령이 왜 소중한 분인지에 대해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로마서 8:26)

어떻게 기도할지 알지 못할 때, 기도의 제목도 떠오르지 않을 때, 어떤 기도를 해야 할지 모를 때, 주의 성령께서 내 영혼 속에서 내가 가야할 길, 하나님이 내게 주신 하늘의 비밀들을 가르치시며 나를 위하여 간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어디에 있든, 어떤 환경에 처하든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아버지도 아들과 늘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 어머니도 딸과 늘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 당신이 아버지가 되셔서 내 자녀들을 지키시고, 동행하시옵소서. 성령님이시여,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며 살아가게 하시옵소서.”라고 말입니다.

계시의 영과 지혜의 영이 만나는 것이 신앙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위해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들에게 하나님의 영을 주시옵소서. 무엇보다 지혜의 영을 주시옵소서. 무엇보다 계시의 영을 주시옵소서.” 에베소 교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사모하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에베소서 1:17)

우리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고, 우리의 하나님은 영광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육신의 부모에게 이야기하듯 하나님께 요청하라는 것입니다. 진리의 영, 계시의 영을 달라고 하나님께 요청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계시의 영, 지혜의 영이 무엇일까요? 계시의 영은 위로부터의 영으로, 하나님의 비밀을 보여주는 영입니다. 조금 어려운 말로 하면, 명제적인 틀을 갖고 하늘에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다. 하나님은 시간을 만드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생명이시다. 하나님은 진리이시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시다. 하나님은 빛이시다.’ 이렇게 명제로 다가오는 말씀을 읽으면 우리는 놀라게 되고 경탄하게 됩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다른 생각이 듭니다. ‘에이,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지?’ 거리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생명, 거룩, 빛이 과연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나…’ 우리가 이렇게 마속으로부터 질문하게 될 때, 성령은 지혜의 영으로 다가오십니다. 그것은 어떤 영입니까? 아래로부터의 영으로, 하나님의 영적인 능력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영입니다.
신앙은 이 두 가지 영성, 즉 위로부터의 영성과 아래로부터의 영성이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위로부터의 영성은, ‘하나님은 구원자다. 하나님은 세상의 빛이다.’ 하고 하나님을 명제적으로 보여주며 이 땅에 내려오는 것입니다. 반면 아래로부터의 영성이란, 우리의 슬픔, 탄식, 외로움, 절망과 실패 가운데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우리와 동행하시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가장 높은 영광이신 분을 나의 비천한 삶에서 경험하는 영성, 이것이 지혜의 영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기억하십니까? 하나님은 하늘의 보물을 어디에 숨겨 두셨습니까? 땅 속에 숨겨 놓으셨다고 우리에게 가르치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어디로 오셨습니까? 왕궁으로 오지 않으셨습니다. 찬란하고 화려한 곳으로 찾아오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마구간으로 오셨습니다. 지저분하고 더럽고 추한 그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 낮고 낮은 자리가 어디입니까? 바로 우리 마음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깨끗해서 하나님이 다가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자랑할 만한 것이 많아서, 지식이 많아서, 세상에서 잘나가는 사람이어서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찾아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나를 봐도 알지 않습니까? 마음이 얼마나 너저분합니까? 고약합니까? 얼마나 문제가 많습니까? 얼마나 자주 넘어지고 실패합니까? 얼마나 자주 실망합니까? 탐욕과 정욕이 나를 붙잡고 있는 것을 새해에도 보지 않습니까? 작심삼일이 아니라 아침에 작정한 것도 저녁이 되면 무너뜨리는 것이 내 모습 아닙니까?
그런데 이렇게 실패와 문제가 가득한 곳, 탐욕과 정욕이 가득한 내 마음에 하나님이 입주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이고 복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내가 잘나서 하나님이 내게 다가오시는 것이 아니라, 문제투성이어도 그런 내 모습에 성령님이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십니까? 헤롯 왕처럼 “나 이외에 어떤 다른 사람이 있느냐!” 하며 떵떵거리지 말고, 교만해지지 말고, 목자들처럼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오시겠다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임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문제 많은 나와 함께 동행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가난하고 나약한 우리 안에 풍요와 영광의 하나님께서 함께 살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떤 사람이 복이 있는지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기다림을 갖고 있는 목마른 자들이 바로 그런 자들입니다. 교만하지 않은 자리에 하나님이 찾아오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나의 나됨을 알게 하십니다.

지혜의 영이 오시면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줍니다. 18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에베소서 1:18)

마음의 눈을 밝혀준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내가 인간임을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저 하늘에 계시고 나는 이 땅에 있는 존재임을 알게 해 주는 것입니다. 나의 한계가 무엇인지를 나로 하여금 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 앞에서 신음하면서 영원한 생명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거짓 것에 속고 속이는 나의 누추한 현장에서 참된 진리이신 예수님을 만나며 감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신음하고 탄식할 때 슬며시 찾아오셔서 나를 위로해 주시는 것, 이것이 지혜의 영이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에게는 누추하고 부족한 것들이 있습니다. 또 세상은 각박하고 살벌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혜의 영과 계시의 영을 받게 되면 이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모든 것이 닫혀 있는 곳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인생이란 쓰레기통에 버려야 될 값어치 없는 것이 아니라 살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시는 것이 계시의 영이고 지혜의 영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것들을 받을 수 있을까요? 누가 받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계시와 지혜의 영을 주시는 목적이 있습니다.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바르게 인식하도록, 하나님의 능력을 받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오늘 본문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신앙이란 무슨 뜻일까요? 이것은 나를 아는 신앙과도 같습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나를 아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아는데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다면, 아직 하나님을 잘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내가 누구인지는 아는데 하나님을 아직 잘 모르겠다면, 아직까지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오시면 인간은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압니다. 인간 스스로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고 하나님 앞에 머리를 숙이면 하나님의 계시가 다가옵니다. 이것은 함께 옵니다.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때로 내 무의식 속까지 찾아오셔서 나를 건드리십니다. 내가 실패했던 것, 좌절했던 것, 상처받고 신음했던 그 모든 것들을 건드리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모든 것들은 결코 나쁜 것들이 아닙니다. 바로 그 자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나의 무능력도, 나의 죄악조차도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자리가 됩니다.
그동안 실패해 왔다고 결코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실패한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실패한 다음에 ‘인생이란 다 이런 거야!’ 하며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실패한 삶의 현장이야 말로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시는 자리입니다. 내 삶이 망가지고 무너졌다고 해서 하나님을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이 자기 실존의 무능함을 깊이 인식할 때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망가진 모습이 있으면 그대로 하나님 앞에 아뢰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망가지면서까지 뻔뻔해져서는 안 됩니다. 신앙생활을 하고 있고, 교회까지 나오면서 뻔뻔해지고 교만해지면 누구도 말릴 수 없게 됩니다. 악해지고 탐욕스러워지도록 우리가 스스로를 닫아걸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에 보면 바울이 격정적으로 반대하는 것이 있습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쳤다’고 했던 바울의 말꼬리를 붙잡은 사람들이 이야기합니다. “그래?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치는 거야?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를 넘치게 받기 위해서 이제부터 죄를 지어야겠구만!” 이때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죄가 많은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넘쳤지만, 그렇다고 은혜를 넘치게 받기 위해서 죄를 짓겠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마찬가지입니다. 실패하고, 낙담하고, 절망하고, 무능을 경험하는 그 자리에 하나님의 영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의 역사를 받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악한 일을 하고 무너지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오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의 영과 계시의 영을 받는 자리는 다른 데가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는 자리입니다. 겸손이란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내 속에 어둠의 그림자가 있습니다. 주님, 내 속에 슬픔이 있습니다. 외로움이 있습니다. 실패하고 낙담한 절망이 나를 붙들고 있습니다. 나를 얽어매는 상처의 응어리가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이렇게 내 속에 있는 연약함과 문제를 인식하고 인정하는 용기가 겸손입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서게 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혜의 영과 계시의 영을 넘치게 부어 주십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처럼, 내가 약할 때 강해졌다고, 예수님 때문에 나는 내 자신의 연약함을 자랑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길이 열렸다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미련하다고 여길 때 지혜로운 분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죄인이라고 탄식할 때 죄인을 용서하시는 거룩한 분을 만납니다. 우리가 죽음 앞에서 허우적거리며 두려워할 때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새로운 한 해를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하나님께 요청하십시오.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요청하듯이 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주의 영으로 저를 가득히 채워주세요. 내 모습 이대로 주님 앞에 나옵니다. 지혜의 영을 주세요. 계시의 영을 주세요.”
이곳에 모인 귀한 성도님들 모두가 하나님의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 되시기를 원합니다. 계시의 영, 지혜의 영으로 우리의 가슴이 충만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귀히 쓰시는 믿음의 사람들 다 되시는 복된 한 해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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