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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요한복음 15: 26 ~ 27

김지철 목사

2017.06.04

오순절은 성서 전통 가운데 있습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오순절(五旬節)이라고도 불리며, 칠칠절, 맥추절이라고도 불리는 날입니다. 구약성경의 근거로는, 유월절 후 첫 안식일 다음날 보리의 첫 단을 드리는 초실절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입니다(출34:22). 이때 밀 수확의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며 절기를 지켰는데, 이날을 맥추절, 오순절 등으로 불렀습니다. 또한 신약성경에서는 부활절에서 50일째, 즉 예수님 승천일에서 열흘 후 첫 일요일인 이날,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강림합니다. 그리하여 이 오순절을 성령강림절로 지키게 되었습니다.
구약 출애굽기 23장 16절에 보면,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라는 말씀이 기록돼 있습니다. 또한 신약에서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 오순절을 성령강림절로 지킵니다. 초대교회 당시 예루살렘 교인들이 성령 강림의 역사를 체험하면서 온 세상에 복음을 증거 하게 된 날이 바로 이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순절을 ‘주님의 몸 된 교회가 탄생한 날이다’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은 오순절에 율법 받는 것을 기념했고, 하나님 앞에 첫 열매를 드렸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오순절에 성령을 통해 죄 용서를 받음으로, 믿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언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예루살렘에서 시작해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증인이 된 것, 바로 이 사실을 증언하는 날이 오순절이자 성령강림주일인 것입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입니다.

우리는 ‘성령’이란 말을 들을 때 쉽게 이해가 되는 듯하면서도 어려워합니다. 누군가 “당신은 참으로 성령 임재를 원하며 성령충만 하길 원하십니까?”라고 물어보면, 머뭇거리기도 합니다. “예.”라고 말하고 싶으면서도 ‘성령이 내게 임재해서 나를 지배하면 나라는 존재가 없어지는 건 아닐까? 내가 성령충만 하게 되면 내 날카로운 지성은 무뎌지고 혹시 너무 감성적으로 변화는 건 아닐까?’ 하고 걱정하기도 합니다. 또는 ‘내가 성령충만 하게 되면 열광적으로 변해 마치 미친 사람처럼 되는 건 아닌가?’ 하고 염려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령충만 하면 더는 나를 위한 삶을 살지 못하겠구나.’ 하면서 성령의 임재와 충만을 바라면서도 선뜻 “네.”라고 대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은 성령을 뭐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오늘 본문에 의하면, 예수님은 성령을 ‘진리의 성령’이라고 부르십니다. 26절 말씀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요한복음 15:26)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분이 예수님을 증언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즉,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성령에 대해 이렇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이 보내신 보혜사다. 우리를 안내해 주시는 분이며, 우리를 돕는 분이고, 우리를 상담하시는 분이며, 우리의 위로자가 되시는 분이다. 그리고 그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다.”
여러분, 진리가 무엇입니까?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이십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성령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시는 성령을 가리킵니다. 이미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가리켜 선언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의 진리란 사변적이거나 수학적인 진리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격적인 진리입니다. 살아계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진리의 행위며, 인격체이신 그분과 교제하는 것이 진리 안에 거하는 길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인격체이시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인격체이신 진리를 우리가 믿게 되었다는 사실 또한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가 예수님 앞에 기도할 수 있고, 그분과 대화할 수 있고, 말씀 가운데서 그분을 발견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진리대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될 수 있다는 것, 이 사실이 얼마나 감격스럽습니까? 예수님은 우리가 이 성령을 통해 당신을 만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 이 땅에 오시면, 그분이 예수님을 증언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 성령 안에서 진리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삶의 이유와 목적을 알게 하십니다.

성령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 자기 존재 이유를 세워 나갈까요? 흔히 IQ(intelligence quotient)라고 불리는 지능지수가 오랫동안 우리 역사를 지배해 왔습니다. 아는 것이 힘이라는 것입니다. 이성과 지성을 통해 논리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암송과 반복 훈련을 통해 정보를 구축하고, 그것을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삼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지성적인 힘만으로 삶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EQ(emotional quotient)라고 불리는 감성지수가 20세기 후반부에 등장합니다. 단순히 많이 안다고 해서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를 바르게 할 때 인간다워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내적이며 심리적인 감성, 이웃과의 정서 교감, 공감의 능력과 같은 것들이 대두되었습니다. 인간이 홀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 더불어 사는 존재라는 이야기도 회자됩니다. 때문에 감성지수를 높여야 한다고, 이것이 교육에서도 필요하다는 주장이 전개되었습니다.
우리나라 교육의 문제는 여전히 IQ교육에 멈춰 있다는 데 있습니다. 감성적 교육도 필요한데, 우리는 여전히 답보 상태입니다. 인간관계의 미숙함에서 비롯되는 문제가 얼마나 많습니까? “저 사람, 참 똑똑해. 굉장히 IQ가 높은 사람이야. 그런데 인간관계를 못해. 대화도 안 돼. 소통이 불가능해.” 이런 말을 듣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 슬픈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교육계에서도, 가정에서도 감성지수를 높일 수 있는 교육을 하는 게 필요합니다.
요즘 우리 시대는 많은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과학과 기술의 발달, 정보의 발전이 너무 빠릅니다. 빅 데이터와 인공지능을 통한 제4차 산업혁명도 시작되고 있습니다. 과거에 경험하지 못했던 세계에 우리가 들어서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때,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요? 그것은 바로 SQ(spiritual quotient), 곧 ‘영성지수’입니다.
영성지수가 있어야 인간이 인간다워질 수 있습니다. 영성지수란 ‘내가 누구인지’, ‘내가 왜 여기 있는지’, ‘인생의 의미와 목적은 무엇인지’,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등을 묻고 대답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지금껏 이러한 질문들은 언제나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 질문에 명백한 답을 달아줄 능력이 있었던가에 대해서는 돌아봐야 합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것을 가르쳐 준다고 합니다. 우리가 왜 존재하는지, 우리의 사명이 무엇인지, 우리가 어떻게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지를 성령께서 가르쳐 주신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이 바로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소명을 강조합니다. 너는 부름 받은 존재라고 우리를 깨우쳐 줍니다. 그저 우연하게 이 땅에 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부름 받은 존재가 바로 우리 자신임을 깨닫게 해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인생이 무의미하거나 가치 없는 인생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보고 계시고, 나를 부르고 계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렇게 내 마음 속에 새로운 생명이 약동함을 경험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또한 기독교는 소명과 함께 사명도 강조합니다. 내가 이 땅에 그저 왔다 그저 가는 존재가 아님을 깨우쳐 줍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생명을 주신 건, 이 땅에서 수행해야 할 사명이 있다는 걸 알게 해 줍니다. 바로 성령이 그 사명을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린도전서 12:3 중)

이는 사도 바울의 말씀입니다. 바울은 처음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에 대해 그분의 죄 때문에 죽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 저주 받은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가 다메섹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전혀 새로운 고백을 하게 됩니다. “아, 저분이 죽은 것은 나 때문이구나. 내가 죽어야 하는데 대신 죽으신 거구나! 아니, 나뿐만 아니라 이 시대의 모든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구나. 이 모든 게 하나님의 사랑의 표증이구나!”라고…. 그는 그렇게 자신의 소명과 사명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 마음에 임재하시는 성령과 동행하는 삶이 믿음의 삶입니다.

여러분, IQ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이성이라고 한다면, EQ를 활성화하는 것이 감정과 감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SQ를 활성화시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마음’입니다. 성령 강림은 바로 이 마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우리 마음에 부어주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마음을 열어야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서 움직이실 수가 있습니다. 로마서 5장 5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로마서 5:5)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진 바 된 것을 누가 알게 해 주시는가? 바로 성령이 알게 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믿음이란 용기 있는 자가 얻는 것입니다. 그저 인생이 두려우니 절대 신을 믿겠다고 하는 게 아니라, 진리를 사모하며 인생의 의미를 깨닫기 원하는 사람들이 용기를 갖고 믿음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높은 곳에 있을 때 아버지가 뛰어내리라고 하면 그 아버지를 믿고 뛰어내리는 것처럼, 또 아브라함이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이 부르셔서 모든 것을 버리고 길을 떠났던 것처럼, 믿음은 용기 있는 사람이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나라는 작은 자아를 예수님이라는 거대한 자아에 맡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 예수님의 생각과 성품에 나를 드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더 알고 싶고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긴다면, 그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이 성령의 역사로 이 자리에 나와 있습니다. 그 많은 일들을 제쳐 놓고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기 위해, 그분의 말씀을 듣기 위해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이런 마음 자세 자체가 성령의 역사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이 시대의 문제가 무엇일까요? 삶의 질은 예전보다 훨씬 좋아졌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도 풍요로워졌습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속에는 불평과 불만이 자꾸만 늘어갑니다. 자존심은 그렇게 세면서도 자존감은 취약해져 가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들어야 할 것을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아름다운 자연의 색감을 볼 수 있는 눈을 갖고 있습니다. 얼마나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만약 이 색감을 구분하지 못한다면, 그를 색맹이라고 부릅니다. 바로 이 색맹처럼 삶의 의미와 가치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 오늘 현실입니다. 일종의 의미맹, 가치맹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떻게 활력을 얻어야 하는지, 무엇이 가치 있는 삶인지, 그 의미를 자꾸만 잃어가고 있습니다. 삶의 동기마저 자꾸 잃어버리는 이 세대 속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기껏해야 돈과 권력이라는 동기부여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이 시대의 위기입니다. 영적인 위기면서 근본적인 위기입니다. 또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모르기 때문에 알코올중독에 빠집니다. 약물중독에도 빠집니다. 섹스중독, 도박중독에 빠집니다. 그리고 어느 날 예고도 없이 인생이 무가치하다며 자살하는 사람이 그렇게 늘어만 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성령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성령은 예수님의 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것은 다른 게 아닙니다. 예수님을 사모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성령이 내게 임하실 바라면 됩니다. 그러면 내가 하나님의 말씀의 영으로 충만한 것처럼 하나님의 영이 내게 임하십니다. 또한 이미 그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를 어둡게 만드는 그림자들, 영적인 그림자들, 정신적으로 응어리졌던 그림자들, 불확실성으로 걱정하는 그림자들을 성령께서 소멸시키십니다. 진리의 성령께 우리를 노출시키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영적인 존재입니다. 우리는 현실에 발을 딛고 살아가지만 현실을 뛰어넘을 수 있는 가치와 의미, 진리를 발견하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그 진리를 발견했고, 또 성령을 통해 그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영적지능을 높이기 위해 애씁니다. “인문학 책을 들여다봐라.” “너의 내적인 심리적 상태를 들여다봐라.” “내 내면의 세계를 들여다봐라.” 아니면 “우주적인 저 영감의 세계와 네가 접선해 봐라.” 그렇게 말하면서 도를 닦기도 하고, 자기 암시를 주며 자기 내면의 세계와 우주적 영을 연결하려는 시도들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엔 성령이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 영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예수님의 영입니다. 인격적인 영입니다.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내 안에 들어오시는 거룩하신 영입니다. 말씀을 펴서 읽으면, 그 말씀 속에 예수님이 누구신가 가르쳐 주시는 진리의 영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영을 자꾸 잊고 삽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그분과 대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예수님이 어떻게 인간을 대했는지, 예수님이 어떻게 시간과 역사를 보내셨는지, 예수님이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셨는지, 예수님이 어떻게 그렇게 지혜로운 담대함을 지니셨는지’를 묻지 않고 살아갑니다.
여러분, 성령의 사람이 된다는 건 예수의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사람이 된다는 건 말씀의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바로 그분 안에 지혜와 생명과 진리와 평안이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아 그 성령에 따라 살아가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것, 예수님의 모습을 더 아는 것, 예수님과 함께 대화하면서 인생에 대해 묻고 대답을 받는 것, 그러면서 주님께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내가 더 주님께 감사합니다. 내가 주님께 더 영광 돌리길 원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도 주님의 성령으로 우리와 동행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른 곳에서 영의 역사를 찾지 마십시오. 바로 예수님 안에 성령의 역사가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 그 성령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이 보내주신 보혜사 성령이 오늘 우리 가운데 거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열어 그분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성령의 역사가 있지만 제일 중요한 건,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 그게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라는 사실입니다.
오늘도 주님 더 알기를 원합니다. 주님을 더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주님과 대화하십시오. 잘 모르겠다면 다시 말씀을 펴서 읽으십시오. 예수님이 어떻게 살아가셨는지,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살펴보면 진리의 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또, 그 진리의 영 안에서 우리가 한 걸음 한 걸음 우리의 삶을 열어갈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진리이자 생명의 주님이신 성령과 함께 하루하루를 열어나가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 다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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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5: 26 ~ 27

26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27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

오순절은 성서 전통 가운데 있습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오순절(五旬節)이라고도 불리며, 칠칠절, 맥추절이라고도 불리는 날입니다. 구약성경의 근거로는, 유월절 후 첫 안식일 다음날 보리의 첫 단을 드리는 초실절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입니다(출34:22). 이때 밀 수확의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며 절기를 지켰는데, 이날을 맥추절, 오순절 등으로 불렀습니다. 또한 신약성경에서는 부활절에서 50일째, 즉 예수님 승천일에서 열흘 후 첫 일요일인 이날,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강림합니다. 그리하여 이 오순절을 성령강림절로 지키게 되었습니다.
구약 출애굽기 23장 16절에 보면,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라는 말씀이 기록돼 있습니다. 또한 신약에서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 오순절을 성령강림절로 지킵니다. 초대교회 당시 예루살렘 교인들이 성령 강림의 역사를 체험하면서 온 세상에 복음을 증거 하게 된 날이 바로 이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순절을 ‘주님의 몸 된 교회가 탄생한 날이다’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은 오순절에 율법 받는 것을 기념했고, 하나님 앞에 첫 열매를 드렸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오순절에 성령을 통해 죄 용서를 받음으로, 믿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언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예루살렘에서 시작해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증인이 된 것, 바로 이 사실을 증언하는 날이 오순절이자 성령강림주일인 것입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입니다.

우리는 ‘성령’이란 말을 들을 때 쉽게 이해가 되는 듯하면서도 어려워합니다. 누군가 “당신은 참으로 성령 임재를 원하며 성령충만 하길 원하십니까?”라고 물어보면, 머뭇거리기도 합니다. “예.”라고 말하고 싶으면서도 ‘성령이 내게 임재해서 나를 지배하면 나라는 존재가 없어지는 건 아닐까? 내가 성령충만 하게 되면 내 날카로운 지성은 무뎌지고 혹시 너무 감성적으로 변화는 건 아닐까?’ 하고 걱정하기도 합니다. 또는 ‘내가 성령충만 하게 되면 열광적으로 변해 마치 미친 사람처럼 되는 건 아닌가?’ 하고 염려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령충만 하면 더는 나를 위한 삶을 살지 못하겠구나.’ 하면서 성령의 임재와 충만을 바라면서도 선뜻 “네.”라고 대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은 성령을 뭐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오늘 본문에 의하면, 예수님은 성령을 ‘진리의 성령’이라고 부르십니다. 26절 말씀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요한복음 15:26)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분이 예수님을 증언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즉,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성령에 대해 이렇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이 보내신 보혜사다. 우리를 안내해 주시는 분이며, 우리를 돕는 분이고, 우리를 상담하시는 분이며, 우리의 위로자가 되시는 분이다. 그리고 그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다.”
여러분, 진리가 무엇입니까?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이십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성령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시는 성령을 가리킵니다. 이미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가리켜 선언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의 진리란 사변적이거나 수학적인 진리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격적인 진리입니다. 살아계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진리의 행위며, 인격체이신 그분과 교제하는 것이 진리 안에 거하는 길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인격체이시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인격체이신 진리를 우리가 믿게 되었다는 사실 또한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가 예수님 앞에 기도할 수 있고, 그분과 대화할 수 있고, 말씀 가운데서 그분을 발견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진리대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될 수 있다는 것, 이 사실이 얼마나 감격스럽습니까? 예수님은 우리가 이 성령을 통해 당신을 만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 이 땅에 오시면, 그분이 예수님을 증언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 성령 안에서 진리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삶의 이유와 목적을 알게 하십니다.

성령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 자기 존재 이유를 세워 나갈까요? 흔히 IQ(intelligence quotient)라고 불리는 지능지수가 오랫동안 우리 역사를 지배해 왔습니다. 아는 것이 힘이라는 것입니다. 이성과 지성을 통해 논리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암송과 반복 훈련을 통해 정보를 구축하고, 그것을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삼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지성적인 힘만으로 삶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EQ(emotional quotient)라고 불리는 감성지수가 20세기 후반부에 등장합니다. 단순히 많이 안다고 해서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를 바르게 할 때 인간다워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내적이며 심리적인 감성, 이웃과의 정서 교감, 공감의 능력과 같은 것들이 대두되었습니다. 인간이 홀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 더불어 사는 존재라는 이야기도 회자됩니다. 때문에 감성지수를 높여야 한다고, 이것이 교육에서도 필요하다는 주장이 전개되었습니다.
우리나라 교육의 문제는 여전히 IQ교육에 멈춰 있다는 데 있습니다. 감성적 교육도 필요한데, 우리는 여전히 답보 상태입니다. 인간관계의 미숙함에서 비롯되는 문제가 얼마나 많습니까? “저 사람, 참 똑똑해. 굉장히 IQ가 높은 사람이야. 그런데 인간관계를 못해. 대화도 안 돼. 소통이 불가능해.” 이런 말을 듣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 슬픈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교육계에서도, 가정에서도 감성지수를 높일 수 있는 교육을 하는 게 필요합니다.
요즘 우리 시대는 많은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과학과 기술의 발달, 정보의 발전이 너무 빠릅니다. 빅 데이터와 인공지능을 통한 제4차 산업혁명도 시작되고 있습니다. 과거에 경험하지 못했던 세계에 우리가 들어서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때,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요? 그것은 바로 SQ(spiritual quotient), 곧 ‘영성지수’입니다.
영성지수가 있어야 인간이 인간다워질 수 있습니다. 영성지수란 ‘내가 누구인지’, ‘내가 왜 여기 있는지’, ‘인생의 의미와 목적은 무엇인지’,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등을 묻고 대답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지금껏 이러한 질문들은 언제나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 질문에 명백한 답을 달아줄 능력이 있었던가에 대해서는 돌아봐야 합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것을 가르쳐 준다고 합니다. 우리가 왜 존재하는지, 우리의 사명이 무엇인지, 우리가 어떻게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지를 성령께서 가르쳐 주신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이 바로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소명을 강조합니다. 너는 부름 받은 존재라고 우리를 깨우쳐 줍니다. 그저 우연하게 이 땅에 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부름 받은 존재가 바로 우리 자신임을 깨닫게 해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인생이 무의미하거나 가치 없는 인생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보고 계시고, 나를 부르고 계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렇게 내 마음 속에 새로운 생명이 약동함을 경험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또한 기독교는 소명과 함께 사명도 강조합니다. 내가 이 땅에 그저 왔다 그저 가는 존재가 아님을 깨우쳐 줍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생명을 주신 건, 이 땅에서 수행해야 할 사명이 있다는 걸 알게 해 줍니다. 바로 성령이 그 사명을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린도전서 12:3 중)

이는 사도 바울의 말씀입니다. 바울은 처음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에 대해 그분의 죄 때문에 죽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 저주 받은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가 다메섹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전혀 새로운 고백을 하게 됩니다. “아, 저분이 죽은 것은 나 때문이구나. 내가 죽어야 하는데 대신 죽으신 거구나! 아니, 나뿐만 아니라 이 시대의 모든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구나. 이 모든 게 하나님의 사랑의 표증이구나!”라고…. 그는 그렇게 자신의 소명과 사명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 마음에 임재하시는 성령과 동행하는 삶이 믿음의 삶입니다.

여러분, IQ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이성이라고 한다면, EQ를 활성화하는 것이 감정과 감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SQ를 활성화시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마음’입니다. 성령 강림은 바로 이 마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우리 마음에 부어주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마음을 열어야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서 움직이실 수가 있습니다. 로마서 5장 5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로마서 5:5)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진 바 된 것을 누가 알게 해 주시는가? 바로 성령이 알게 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믿음이란 용기 있는 자가 얻는 것입니다. 그저 인생이 두려우니 절대 신을 믿겠다고 하는 게 아니라, 진리를 사모하며 인생의 의미를 깨닫기 원하는 사람들이 용기를 갖고 믿음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높은 곳에 있을 때 아버지가 뛰어내리라고 하면 그 아버지를 믿고 뛰어내리는 것처럼, 또 아브라함이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이 부르셔서 모든 것을 버리고 길을 떠났던 것처럼, 믿음은 용기 있는 사람이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나라는 작은 자아를 예수님이라는 거대한 자아에 맡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 예수님의 생각과 성품에 나를 드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더 알고 싶고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긴다면, 그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이 성령의 역사로 이 자리에 나와 있습니다. 그 많은 일들을 제쳐 놓고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기 위해, 그분의 말씀을 듣기 위해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이런 마음 자세 자체가 성령의 역사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이 시대의 문제가 무엇일까요? 삶의 질은 예전보다 훨씬 좋아졌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도 풍요로워졌습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속에는 불평과 불만이 자꾸만 늘어갑니다. 자존심은 그렇게 세면서도 자존감은 취약해져 가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들어야 할 것을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아름다운 자연의 색감을 볼 수 있는 눈을 갖고 있습니다. 얼마나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만약 이 색감을 구분하지 못한다면, 그를 색맹이라고 부릅니다. 바로 이 색맹처럼 삶의 의미와 가치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 오늘 현실입니다. 일종의 의미맹, 가치맹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떻게 활력을 얻어야 하는지, 무엇이 가치 있는 삶인지, 그 의미를 자꾸만 잃어가고 있습니다. 삶의 동기마저 자꾸 잃어버리는 이 세대 속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기껏해야 돈과 권력이라는 동기부여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이 시대의 위기입니다. 영적인 위기면서 근본적인 위기입니다. 또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모르기 때문에 알코올중독에 빠집니다. 약물중독에도 빠집니다. 섹스중독, 도박중독에 빠집니다. 그리고 어느 날 예고도 없이 인생이 무가치하다며 자살하는 사람이 그렇게 늘어만 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성령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성령은 예수님의 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것은 다른 게 아닙니다. 예수님을 사모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성령이 내게 임하실 바라면 됩니다. 그러면 내가 하나님의 말씀의 영으로 충만한 것처럼 하나님의 영이 내게 임하십니다. 또한 이미 그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를 어둡게 만드는 그림자들, 영적인 그림자들, 정신적으로 응어리졌던 그림자들, 불확실성으로 걱정하는 그림자들을 성령께서 소멸시키십니다. 진리의 성령께 우리를 노출시키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영적인 존재입니다. 우리는 현실에 발을 딛고 살아가지만 현실을 뛰어넘을 수 있는 가치와 의미, 진리를 발견하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그 진리를 발견했고, 또 성령을 통해 그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영적지능을 높이기 위해 애씁니다. “인문학 책을 들여다봐라.” “너의 내적인 심리적 상태를 들여다봐라.” “내 내면의 세계를 들여다봐라.” 아니면 “우주적인 저 영감의 세계와 네가 접선해 봐라.” 그렇게 말하면서 도를 닦기도 하고, 자기 암시를 주며 자기 내면의 세계와 우주적 영을 연결하려는 시도들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엔 성령이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 영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예수님의 영입니다. 인격적인 영입니다.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내 안에 들어오시는 거룩하신 영입니다. 말씀을 펴서 읽으면, 그 말씀 속에 예수님이 누구신가 가르쳐 주시는 진리의 영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영을 자꾸 잊고 삽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그분과 대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예수님이 어떻게 인간을 대했는지, 예수님이 어떻게 시간과 역사를 보내셨는지, 예수님이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셨는지, 예수님이 어떻게 그렇게 지혜로운 담대함을 지니셨는지’를 묻지 않고 살아갑니다.
여러분, 성령의 사람이 된다는 건 예수의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사람이 된다는 건 말씀의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바로 그분 안에 지혜와 생명과 진리와 평안이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아 그 성령에 따라 살아가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것, 예수님의 모습을 더 아는 것, 예수님과 함께 대화하면서 인생에 대해 묻고 대답을 받는 것, 그러면서 주님께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내가 더 주님께 감사합니다. 내가 주님께 더 영광 돌리길 원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도 주님의 성령으로 우리와 동행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른 곳에서 영의 역사를 찾지 마십시오. 바로 예수님 안에 성령의 역사가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 그 성령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이 보내주신 보혜사 성령이 오늘 우리 가운데 거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열어 그분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성령의 역사가 있지만 제일 중요한 건,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 그게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라는 사실입니다.
오늘도 주님 더 알기를 원합니다. 주님을 더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주님과 대화하십시오. 잘 모르겠다면 다시 말씀을 펴서 읽으십시오. 예수님이 어떻게 살아가셨는지,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살펴보면 진리의 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또, 그 진리의 영 안에서 우리가 한 걸음 한 걸음 우리의 삶을 열어갈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진리이자 생명의 주님이신 성령과 함께 하루하루를 열어나가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 다 되시길 축원합니다.

2017년 6월 4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408, 182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요 15:25-26 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생각하기

오순절은 출애굽 당시 광양에서 인도하셨던 하나님의 사랑을 함께 기억하고 기념하는 날입니다. 또한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날이기도 하며,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하나님 앞에 처음으로 수확한 열매를 드리던 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이 날을 성령강림절로 지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 받은 것을 기념하는 이 절기에 기독교는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께서 진정한 생명의 소유자가 되었다는 복음을 성령님을 통해 선포합니다.

 

설교의 요약

오늘의 성도들도 성령을 받고 성령에 충만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성령충만을 진정으로 원하는가 물으면, 머뭇거리게 됩니다. 성령충만하면 나의 지성은 무디어지고, 감성적이게 되고, 비정상적인 사람처럼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진리의 성령’이라 명명하십니다. 성령은 어떤 분이신가요?(26절) 우리를 안내하는 보혜사, 돕는 분, 상담하는 자, 위로자이십니다. 또한 성령은 진리의 성령이십니다. 그러면 진리란 무엇인가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요14:6). 성령은 예수님이 진리이심을 알게 하시고, 우리에게 예수님을 증언하시는 분이십니다.

성령이 없는 시대에 사람들은 무엇에 자기를 의존하였을까요? 첫째, IQ(지적인 지능). 엄청난 양의 정보를 축적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그런 지성적인 똑똑함만 갖고서 삶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둘째, 20세기 후반에 EQ(감정의 지능)가 등장합니다. 심리적이고 관계적인 정서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공감의 능력, 측은지심의 능력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을 통해 제 4차 산업혁명의 시대가 왔습니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SQ(영성 지수)입니다.

영성지수란 자기 자신을 향하여 왜를 질문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내가 누구인가? 왜 살아야 하는가? 이 질문의 대답은 성령님이 오셔야만 얻을 수 있습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령강림은 바로 우리 마음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마음을 열어 놓아야 성령님이 우리 가운데 오십니다.(롬5:5) 우리가 성령의 사람인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바로 예수님을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있는가에서 부터 시작합니다. 예수님을 더 알고 싶고, 예수님을 더 사랑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먹고 마실 것이 풍요로워지고 있습니다. 삶의 질이 더 높아지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런데 불평, 불만은 왜 자꾸 늘어나는 것일까요? ‘자존심’은 점점 더 세지는 데 왜 ‘자존감’은 점점 더 약해 지는 것일까요? 보아야할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삶의 색맹을 앓고 있습니다. 확신도 없이, 변화도,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너무 쉽게 알코올중독, 약물중독, 도박중독에 빠집니다. 그리고 예고도 없이 자살을 하는 것은 모두 ‘자기 삶을 어떻게 보람 있게 살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에 답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삶이 너무 의미 없이 지나가는 것 같은 허무함을 느끼나요? 그것에 대해 스스로 질문할 수 있다면, 이미 그는 새로운 가치를 향한 발걸음이 시작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마음속의 심리적인 그림자와 영적인 그림자를 제거하십니다. 예수님은 빛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현실 속에 살지만, 현실을 감히 뛰어넘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는 존재입니다. 내면에 있는 자기 영으로 만족하지 맙시다. 생명의 영, 진리의 영, 지혜의 영을 모셔야 합니다. 예수님을 가슴으로 마음으로 알고, 예수님을 더 사랑하고. 예수님을 자랑하면. 예수님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인도하시는 놀라운 일을 체험할 것입니다.

 

나누기

1. 나는 IQ와 EQ와 SQ 중에서 무엇을 가장 우선시 하고 추구하는지 나눠 봅시다.

2. 우리의 기도제목을 점검해 보고, 나의 기도제목 중 진심으로 성령충만을 위한 기도제목이 있는지 확인합시다. 기도제목을 점검하며 SQ를 높이기 위한 우리의 경건의 훈련을 결단해 봅시다.

마무리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과 함께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내 영과 세상의 거짓된 영에 의해 살지 않게 하시고, 나를 주님 앞에 내어놓아 예수님의 영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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