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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영을 받은 사람들

요한복음 14: 16 ~ 21

김지철 목사

2008.04.27

사람의 말은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말 하나로 남을 세우기도 하고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말 한 마디로 인간관계를 돈독하게 하기도 하고 깨뜨리기도 합니다. 때로는 말 때문에 상처를 주기도 하고 아파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말의 힘이 얼마나 영향력을 주고 있는지 실감하면서 살아갑니다.
어느 사진작가가 한 가정에 저녁 식사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찍은 사진 몇 장을 들고 주인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주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 잘 찍었네요. 기가 막히게 멋진 사진입니다.” 그러면서 한 마디를 더 추가했습니다. “사진기가 아주 좋은가 보죠?” 앞의 말은 칭찬하는 말로 들렸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한 말은 사진작가의 기분을 상하게 했습니다. 식사를 맛있게 먹고 저녁식사 시간이 끝났습니다. 그러자 사진작가가 집 주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 맛있게 먹었습니다. 기가 막힌 맛이네요.” 그리고 한 마디를 더 추가했습니다. “냄비와 오븐이 좋은 건가보죠?”
이 대화에서 문제가 무엇입니까? 사람을 인정하고 칭찬한 것이 아니라 기계가 인정받고 칭찬받았습니다. 사진을 열심히 찍은 사람, 요리를 맛있게 만든 사람은 없어지고 사진기와 음식이 대화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식의 말을 들은 사람은 마음에 화가 나게 됩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언어를 되돌아보면 이와 비슷한 일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때로는 의도적으로는 혹은 의도적이지는 않더라도 우리는 부정적인 사고, 남을 폄하하는 말을 수없이 많이 합니다. 이것은 마음속에 남을 위하고 칭찬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내면에 있는 열등감의 표출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내면에 가득한 불안과 혼동을 어떻게든 해소해 보려고 남의 심성을 휘젓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사람을 통해 에너지를 받기도 하고 빼앗기기도 합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수없이 많은 사람을 만나곤 합니다. 하루에 스쳐지나가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지 머리에 떠올려보면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우리 주변을 스쳐지나갑니다. 그중에 만나서 대화하는 사람은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면 만날수록 생기가 도는 사람, 에너지가 쏟아져 나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계속해서 만나고 싶어지고 만나고 나면 모든 것이 긍정적으로 보입니다.사람의 장점이 보이기 시작하고, 산다는 것이 설레임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는 만남입니다. 에너지를 창출해 주는 이런 사람은 마음에 감사와 충만한 기쁨이 있습니다. 긍정적인 사고를 하여  사물에 어둠과 빛이 있지만 빛의 세계를 보려는 마음이 더 큽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을 만나면 자신의 에너지도 커지고 긍정적인 상대방의 에너지는 더 커집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을 만나서 대화를 하면 갑자기 힘이 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말하기 싫고 빨리 대화에서 벗어나 떠나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말하는 것, 생각하는 것이 부정적이고 비관적입니다. 말을 하면 할수록 자꾸만 힘이 빠집니다. 내가 지닌 에너지도 빼가는 것 같습니다. 이런 사람의 마음속에는 무언가 아직 해소되지 않은 분노와 원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걸핏하면 남의 탓을 하고 자꾸만 책임전가를 합니다. 환경에 대해서 끊임없이 짜증을 내며 투덜거립니다. 때로는 열등감에 사로잡혀 남에 대해서 불평하고 비난하면서 해소시키려고 합니다.때로는 나쁜 조건 탓이고 부모님 탓이라고 책임을 전가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이런 모습으로 인생을 살아왔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으면서 우리 안에 이런 모습은 점점 줄어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내 문제를 해결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내게 사랑을 가르쳐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으면 평화와 죄용서의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응어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잘 풀려지지 않는 모습에 우리의 문제점이 있습니다.

누구나 플러스 에너지만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사람과 너무 오랜 시간을 함께 하면 내 마음까지도 위축됩니다. 경제학에서 ‘그래샴(Grasham)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것입니다. 의미가 많이 변화되었지만 나쁜 것이 좋은 것을 물들여 좋은 것을 내쫒는다는 뜻입니다. 부정적인 것이 더 영향력이 강하다는 말입니다. 비관적인 것이 전염성이 더 강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참 이상한 것은 우리는 기뻐하려면 결단을 해야 합니다. 감사하려면 결심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원망하고 불평하려면 결단과 결심을 안 해도 금방 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가만히 두면 어느새 불평과 원망을 하고 부정적으로 비관합니다. 인간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진짜 감사하려면 결심하고 결단해야 합니다. 좋은 것, 귀한 것, 아름다운 것이 있는지 열심히 찾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부정적인 성향이 강한 사람을 만날 때는 먼저 준비하고 결단해야 합니다. 내가 줄 수 있는 에너지가 빼앗기는 에너지보다 더 커야 부정적인 사람을 만나도 견딜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부정적인 사람에게 빨려 들어갑니다. 그럴 때는 안 만나고 멀리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내가 부정적인 사람을 축복해주고 그 사람을 채워주려면 부정적인 에너지, 마이너스 에너지보다 플러스 에너지가 커야 합니다. 그럴 때 축복해 줄 수 있고 그 사람을 세워줄 수 있습니다. 때로는 의심하는 것을 믿음으로, 비웃음을 축복으로 바꿀 수 있을 만큼 플러스의 에너지, 긍정적인 에너지가 넘쳐야 합니다.
여러분 안에는 플러스 에너지가 넘치고 있습니까? 아니면 겨우 겨우 플러스 에너지와 마이너스 에너지 사이를 왔다 갔다 하고 있습니까? 인생을 마이너스 에너지로 살 때는 세상이 너무 척박하고 치열합니다. 세상이 너무 살벌하기까지 합니다. 무거운 짐을 등에 지고 부담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생로병사가 가득함으로 고통 받는 인생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는 이런 마음이 가득하기도 합니다.
“하나님 내 영혼이 방황하고 있습니다. 내 정신세계가 지쳐있고 피폐해졌습니다. 삶이 너무 힘듭니다. 아내와의 갈등 때문에, 남편의 뒤치다꺼리 하느라고 고단하고 피곤합니다. 자식들의 학업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또 직장에 나가서는 경쟁사회에서 어떻게 생존할 것인지 생각하느라 고통스럽고 힘이 듭니다. 이제 마감일이 다가오는데 하는 일을 잘 끝낼 수 있을지 고통스럽습니다. 몸이 고단하고 뼈마디까지 욱신욱신 아파오는데 내가 어쩌면 큰 질병에 걸린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됩니다.”
이처럼 마음의 근심과 염려가 끝나지 않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아마 강단에서 설교하시는 목사님도 내 심정은 모를 거라고, 내가 얼마나 지쳐있고 삶의 의욕이 다 고갈되었는지, 지금 얼마나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한지 모르실거라는 마음으로 있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위기에 있는 제자들에게 에너지를 주기 원하셨습니다.

본문에서 제자들은 우리가 갖고 있는 것보다 더 큰 위기 앞에 놓여 있습니다. 3년 동안 따라다녔던 예수님께서 이제 죽으러 가기 때문에 떠난다고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은 너무나 당혹스러워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 우리의 왕이 되셔야지 어디로 가십니까?” 그러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 열두 명 중 하나가 나를 팔아먹을 것이다.” 제자들의 마음이 동요했습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예수님을 배반합니까? 저는 아니지요?” 제자들이 걱정하고 근심하며 답답한 마음으로 예수님 앞에 서게 되었을 때 예수님은 요한복음 말씀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요한복음 14:1)

예수님은 근심하는 제자들을 향해서 근심하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믿고 나를 믿으니 앞을 향해서 살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런 모습은 사랑의 모습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제자들을 위로하고 용기를 주고 싶었습니다. 제자들로 하여금 삶의 의욕을 갖게 하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은 억눌려 있는 제자들에게 생기를 갖게 하고 쳐져 있는 마이너스 에너지 속에서 플러스 에너지로 충전 받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위해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좋은 약속인지 모릅니다. 이로 인해 인생을 홀로 가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가는 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나와 동일한 인생을 함께 살아가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내 아버지와 어머니도 내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남편도 내 인생을 함께 갈 수 없습니다. 내 자식도 나를 대신할 수가 없습니다.

인생은 어느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홀로 가는 길입니다.

옛날에 어떤 왕이 백성 중 한명에게 신하를 보내서 왕궁에 입궐하라는 전갈을 보냈습니다. 그는 왕이 자기를 문책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친구와 함께 궁궐에 입궐하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에게는 두 친구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너무 절친한 친구였습니다. 함께 있지 않으면 못 살 정도로 좋은 친구였습니다. 또 다른 친구 하나는 그냥 그런 정도의 친구였습니다. 그래서 절친한 친구에게 찾아가서 함께 가자고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정색을 합니다. 가려면 혼자가라고 했습니다. 절대로 함께 갈 수가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친구에게 부탁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친구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가기는 갈 수 있다. 그러나 왕궁 문턱까지 갈 것이다. 그 다음은 너 혼자 가라.”
이것은 죽음을 앞에 두고 함께하는 친구의 모습을 비유적으로 한 이야기 입니다. 첫 번째 옆에 없어서는 안 될 절친한 친구는 돈과 재물이라는 친구였습니다. 그렇게 멋진 친구인 것 같았는데 죽음 앞에 설 때는 같이 갈 수 없다고 거절합니다. 죽을 때 관 속에다 돈을 채워 넣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결국 빈손으로 가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살아있을 때는 그렇게 필요하고 소중한 것도 죽음 앞에서는 예외가 없습니다.
두 번째 친구는 형제와 친척들입니다. 그들은 죽을 때 화장터나 매장지까지는 옵니다. 그러나 곧 잊어버리고 뿔뿔이 흩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와 함께 할 친구를 보냈다. 네 안에 함께 있을 것이다. 네 인생을 살 때도 함께 가고 죽음 앞에서도 함께 가고 하나님 앞에 설 때까지 함께 가는 친구를 보내겠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신 친구가 바로 성령이십니다.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영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요한복음 14:18)

너희는 사랑할 대상이 없는 고아, 사랑에 굶주린 고아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령이 오셔서 제일 먼저 하시는 일은 무엇일까요?우리의 영과 함께 하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됩니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고아가 아닙니다. 우리는 의붓자식이 아닙니다. 우리는 버려진 존재가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축복의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성령님께서 동행해주실 것이라고 약속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성령님이 오시면 하나님이 너희 안에 너희가 하나님 안에,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 있게 된다.”
성령은 우리에게 신기한 연합을 가르쳐주십니다. 성령이 우리와 더불어 함께하는 믿음의 역사가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왜 귀하고 소중한 것일까요? 왜 우리의 가슴을 펴게 하는 것일까요? 머리 숙였던 우리의 낙심된 마음을 다시 일으켜 세우시고 하나님과 더불어 인생을 살아가도록 해주시는 것은 마음에 성령을 보내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보내주시는 진리의 영으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십시오.

성령은 진리의 영입니다. 왜냐하면예수님이 진리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에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복음 14:6)

그러므로 예수님의 영은 진리의 영이고 생명의 영입니다. 예수님께서 진리의 영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 인생에 말동무가 되시고 평생 친구가 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는 존재로 세우십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멋진 존재다. 너는 당당한 존재다. 너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존재다. 너는 하나님께서 축복하는 존재다. 너희는 길바닥에 널려있는 돌멩이가 아니라 비록 먼지가 쌓이고 때가 끼어있어도 금과 은, 보석 같은 존재다. 그러니 말씀으로 너를 한 번 닦아 보아라.”
돌 같이 보이지만 우리는 돌이 아니라 빛나는 보석이라는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천하의 어떤 것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존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머리를 숙여야 했던 낙망하고 실망스러웠던 것에서 다시 성령과 함께 일어서십시오.

진리의 영은 우리를 보석과 같은 존재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미국의 16대 대통령의 에브라함 링컨은 믿음의 인물이었습니다.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성령과 함께 살았던 인물이었습니다. 아주 당당했던 그는 자기의 삶을 회고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승리에 사로잡힌 사람이 아니라 오직 진실에 사로잡힌 사람이다. 성공에 사로잡힌 사람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빛에 사로잡힌 사람이다.”

인생의 목표는 승리가 아닙니다.
인생의 목표는 성공이 아닙니다.
인생의 목표는 진실입니다.
인생의 목표는 성령의 빛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빛에 사로잡혀있을 때 하나님께서 승리하고 성공하게 하십니다. 우리 인생의 목표는 하나님께서 성령의 나와 함께 계시면서 주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 말은 세상이 편해져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었다는 뜻도 아닙니다. 문제와 어려움이 아직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과 진리의 플러스 에너지의 영이 우리를 붙잡고 있습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의 플러스 에너지의 영을 받아 다시 충전하십시오. 성령님에게 충전을 받으십시오. 예수님의 영, 진리와 생명의 영에게 충전을 받으십시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예수님과 성령으로부터 주어질 때 우리는 기도하고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예배드리고 찬송 부를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 오셔서 마이너스 에너지를 플러스 에너지, 생명의 에너지, 사랑의 에너지로 바꿔달라고 기도하면서 나아가십시오.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생명의 역사, 사랑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며 내가 만나는 사람과 우리의 가정과 직장과 사회 속에 함께 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성령께서 함께 하시기에 복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고 생명을 얻어 사랑할 수 있게 축복해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이제는 플러스의 에너지를 예수님의 영으로부터 받게 하셔서 진리와 생명으로 사랑하면서 사는 복된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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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4: 16 ~ 21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사람의 말은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말 하나로 남을 세우기도 하고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말 한 마디로 인간관계를 돈독하게 하기도 하고 깨뜨리기도 합니다. 때로는 말 때문에 상처를 주기도 하고 아파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말의 힘이 얼마나 영향력을 주고 있는지 실감하면서 살아갑니다.
어느 사진작가가 한 가정에 저녁 식사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찍은 사진 몇 장을 들고 주인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주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 잘 찍었네요. 기가 막히게 멋진 사진입니다.” 그러면서 한 마디를 더 추가했습니다. “사진기가 아주 좋은가 보죠?” 앞의 말은 칭찬하는 말로 들렸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한 말은 사진작가의 기분을 상하게 했습니다. 식사를 맛있게 먹고 저녁식사 시간이 끝났습니다. 그러자 사진작가가 집 주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 맛있게 먹었습니다. 기가 막힌 맛이네요.” 그리고 한 마디를 더 추가했습니다. “냄비와 오븐이 좋은 건가보죠?”
이 대화에서 문제가 무엇입니까? 사람을 인정하고 칭찬한 것이 아니라 기계가 인정받고 칭찬받았습니다. 사진을 열심히 찍은 사람, 요리를 맛있게 만든 사람은 없어지고 사진기와 음식이 대화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식의 말을 들은 사람은 마음에 화가 나게 됩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언어를 되돌아보면 이와 비슷한 일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때로는 의도적으로는 혹은 의도적이지는 않더라도 우리는 부정적인 사고, 남을 폄하하는 말을 수없이 많이 합니다. 이것은 마음속에 남을 위하고 칭찬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내면에 있는 열등감의 표출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내면에 가득한 불안과 혼동을 어떻게든 해소해 보려고 남의 심성을 휘젓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사람을 통해 에너지를 받기도 하고 빼앗기기도 합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수없이 많은 사람을 만나곤 합니다. 하루에 스쳐지나가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지 머리에 떠올려보면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우리 주변을 스쳐지나갑니다. 그중에 만나서 대화하는 사람은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면 만날수록 생기가 도는 사람, 에너지가 쏟아져 나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계속해서 만나고 싶어지고 만나고 나면 모든 것이 긍정적으로 보입니다.사람의 장점이 보이기 시작하고, 산다는 것이 설레임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는 만남입니다. 에너지를 창출해 주는 이런 사람은 마음에 감사와 충만한 기쁨이 있습니다. 긍정적인 사고를 하여  사물에 어둠과 빛이 있지만 빛의 세계를 보려는 마음이 더 큽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을 만나면 자신의 에너지도 커지고 긍정적인 상대방의 에너지는 더 커집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을 만나서 대화를 하면 갑자기 힘이 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말하기 싫고 빨리 대화에서 벗어나 떠나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말하는 것, 생각하는 것이 부정적이고 비관적입니다. 말을 하면 할수록 자꾸만 힘이 빠집니다. 내가 지닌 에너지도 빼가는 것 같습니다. 이런 사람의 마음속에는 무언가 아직 해소되지 않은 분노와 원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걸핏하면 남의 탓을 하고 자꾸만 책임전가를 합니다. 환경에 대해서 끊임없이 짜증을 내며 투덜거립니다. 때로는 열등감에 사로잡혀 남에 대해서 불평하고 비난하면서 해소시키려고 합니다.때로는 나쁜 조건 탓이고 부모님 탓이라고 책임을 전가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이런 모습으로 인생을 살아왔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으면서 우리 안에 이런 모습은 점점 줄어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내 문제를 해결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내게 사랑을 가르쳐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으면 평화와 죄용서의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응어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잘 풀려지지 않는 모습에 우리의 문제점이 있습니다.

누구나 플러스 에너지만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사람과 너무 오랜 시간을 함께 하면 내 마음까지도 위축됩니다. 경제학에서 ‘그래샴(Grasham)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것입니다. 의미가 많이 변화되었지만 나쁜 것이 좋은 것을 물들여 좋은 것을 내쫒는다는 뜻입니다. 부정적인 것이 더 영향력이 강하다는 말입니다. 비관적인 것이 전염성이 더 강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참 이상한 것은 우리는 기뻐하려면 결단을 해야 합니다. 감사하려면 결심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원망하고 불평하려면 결단과 결심을 안 해도 금방 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가만히 두면 어느새 불평과 원망을 하고 부정적으로 비관합니다. 인간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진짜 감사하려면 결심하고 결단해야 합니다. 좋은 것, 귀한 것, 아름다운 것이 있는지 열심히 찾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부정적인 성향이 강한 사람을 만날 때는 먼저 준비하고 결단해야 합니다. 내가 줄 수 있는 에너지가 빼앗기는 에너지보다 더 커야 부정적인 사람을 만나도 견딜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부정적인 사람에게 빨려 들어갑니다. 그럴 때는 안 만나고 멀리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내가 부정적인 사람을 축복해주고 그 사람을 채워주려면 부정적인 에너지, 마이너스 에너지보다 플러스 에너지가 커야 합니다. 그럴 때 축복해 줄 수 있고 그 사람을 세워줄 수 있습니다. 때로는 의심하는 것을 믿음으로, 비웃음을 축복으로 바꿀 수 있을 만큼 플러스의 에너지, 긍정적인 에너지가 넘쳐야 합니다.
여러분 안에는 플러스 에너지가 넘치고 있습니까? 아니면 겨우 겨우 플러스 에너지와 마이너스 에너지 사이를 왔다 갔다 하고 있습니까? 인생을 마이너스 에너지로 살 때는 세상이 너무 척박하고 치열합니다. 세상이 너무 살벌하기까지 합니다. 무거운 짐을 등에 지고 부담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생로병사가 가득함으로 고통 받는 인생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는 이런 마음이 가득하기도 합니다.
“하나님 내 영혼이 방황하고 있습니다. 내 정신세계가 지쳐있고 피폐해졌습니다. 삶이 너무 힘듭니다. 아내와의 갈등 때문에, 남편의 뒤치다꺼리 하느라고 고단하고 피곤합니다. 자식들의 학업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또 직장에 나가서는 경쟁사회에서 어떻게 생존할 것인지 생각하느라 고통스럽고 힘이 듭니다. 이제 마감일이 다가오는데 하는 일을 잘 끝낼 수 있을지 고통스럽습니다. 몸이 고단하고 뼈마디까지 욱신욱신 아파오는데 내가 어쩌면 큰 질병에 걸린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됩니다.”
이처럼 마음의 근심과 염려가 끝나지 않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아마 강단에서 설교하시는 목사님도 내 심정은 모를 거라고, 내가 얼마나 지쳐있고 삶의 의욕이 다 고갈되었는지, 지금 얼마나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한지 모르실거라는 마음으로 있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위기에 있는 제자들에게 에너지를 주기 원하셨습니다.

본문에서 제자들은 우리가 갖고 있는 것보다 더 큰 위기 앞에 놓여 있습니다. 3년 동안 따라다녔던 예수님께서 이제 죽으러 가기 때문에 떠난다고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은 너무나 당혹스러워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 우리의 왕이 되셔야지 어디로 가십니까?” 그러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 열두 명 중 하나가 나를 팔아먹을 것이다.” 제자들의 마음이 동요했습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예수님을 배반합니까? 저는 아니지요?” 제자들이 걱정하고 근심하며 답답한 마음으로 예수님 앞에 서게 되었을 때 예수님은 요한복음 말씀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요한복음 14:1)

예수님은 근심하는 제자들을 향해서 근심하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믿고 나를 믿으니 앞을 향해서 살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런 모습은 사랑의 모습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제자들을 위로하고 용기를 주고 싶었습니다. 제자들로 하여금 삶의 의욕을 갖게 하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은 억눌려 있는 제자들에게 생기를 갖게 하고 쳐져 있는 마이너스 에너지 속에서 플러스 에너지로 충전 받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위해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좋은 약속인지 모릅니다. 이로 인해 인생을 홀로 가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가는 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나와 동일한 인생을 함께 살아가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내 아버지와 어머니도 내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남편도 내 인생을 함께 갈 수 없습니다. 내 자식도 나를 대신할 수가 없습니다.

인생은 어느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홀로 가는 길입니다.

옛날에 어떤 왕이 백성 중 한명에게 신하를 보내서 왕궁에 입궐하라는 전갈을 보냈습니다. 그는 왕이 자기를 문책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친구와 함께 궁궐에 입궐하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에게는 두 친구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너무 절친한 친구였습니다. 함께 있지 않으면 못 살 정도로 좋은 친구였습니다. 또 다른 친구 하나는 그냥 그런 정도의 친구였습니다. 그래서 절친한 친구에게 찾아가서 함께 가자고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정색을 합니다. 가려면 혼자가라고 했습니다. 절대로 함께 갈 수가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친구에게 부탁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친구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가기는 갈 수 있다. 그러나 왕궁 문턱까지 갈 것이다. 그 다음은 너 혼자 가라.”
이것은 죽음을 앞에 두고 함께하는 친구의 모습을 비유적으로 한 이야기 입니다. 첫 번째 옆에 없어서는 안 될 절친한 친구는 돈과 재물이라는 친구였습니다. 그렇게 멋진 친구인 것 같았는데 죽음 앞에 설 때는 같이 갈 수 없다고 거절합니다. 죽을 때 관 속에다 돈을 채워 넣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결국 빈손으로 가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살아있을 때는 그렇게 필요하고 소중한 것도 죽음 앞에서는 예외가 없습니다.
두 번째 친구는 형제와 친척들입니다. 그들은 죽을 때 화장터나 매장지까지는 옵니다. 그러나 곧 잊어버리고 뿔뿔이 흩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와 함께 할 친구를 보냈다. 네 안에 함께 있을 것이다. 네 인생을 살 때도 함께 가고 죽음 앞에서도 함께 가고 하나님 앞에 설 때까지 함께 가는 친구를 보내겠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신 친구가 바로 성령이십니다.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영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요한복음 14:18)

너희는 사랑할 대상이 없는 고아, 사랑에 굶주린 고아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령이 오셔서 제일 먼저 하시는 일은 무엇일까요?우리의 영과 함께 하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됩니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고아가 아닙니다. 우리는 의붓자식이 아닙니다. 우리는 버려진 존재가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축복의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성령님께서 동행해주실 것이라고 약속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성령님이 오시면 하나님이 너희 안에 너희가 하나님 안에,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 있게 된다.”
성령은 우리에게 신기한 연합을 가르쳐주십니다. 성령이 우리와 더불어 함께하는 믿음의 역사가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왜 귀하고 소중한 것일까요? 왜 우리의 가슴을 펴게 하는 것일까요? 머리 숙였던 우리의 낙심된 마음을 다시 일으켜 세우시고 하나님과 더불어 인생을 살아가도록 해주시는 것은 마음에 성령을 보내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보내주시는 진리의 영으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십시오.

성령은 진리의 영입니다. 왜냐하면예수님이 진리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에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복음 14:6)

그러므로 예수님의 영은 진리의 영이고 생명의 영입니다. 예수님께서 진리의 영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 인생에 말동무가 되시고 평생 친구가 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는 존재로 세우십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멋진 존재다. 너는 당당한 존재다. 너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존재다. 너는 하나님께서 축복하는 존재다. 너희는 길바닥에 널려있는 돌멩이가 아니라 비록 먼지가 쌓이고 때가 끼어있어도 금과 은, 보석 같은 존재다. 그러니 말씀으로 너를 한 번 닦아 보아라.”
돌 같이 보이지만 우리는 돌이 아니라 빛나는 보석이라는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천하의 어떤 것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존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머리를 숙여야 했던 낙망하고 실망스러웠던 것에서 다시 성령과 함께 일어서십시오.

진리의 영은 우리를 보석과 같은 존재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미국의 16대 대통령의 에브라함 링컨은 믿음의 인물이었습니다.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성령과 함께 살았던 인물이었습니다. 아주 당당했던 그는 자기의 삶을 회고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승리에 사로잡힌 사람이 아니라 오직 진실에 사로잡힌 사람이다. 성공에 사로잡힌 사람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빛에 사로잡힌 사람이다.”

인생의 목표는 승리가 아닙니다.
인생의 목표는 성공이 아닙니다.
인생의 목표는 진실입니다.
인생의 목표는 성령의 빛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빛에 사로잡혀있을 때 하나님께서 승리하고 성공하게 하십니다. 우리 인생의 목표는 하나님께서 성령의 나와 함께 계시면서 주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 말은 세상이 편해져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었다는 뜻도 아닙니다. 문제와 어려움이 아직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과 진리의 플러스 에너지의 영이 우리를 붙잡고 있습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의 플러스 에너지의 영을 받아 다시 충전하십시오. 성령님에게 충전을 받으십시오. 예수님의 영, 진리와 생명의 영에게 충전을 받으십시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예수님과 성령으로부터 주어질 때 우리는 기도하고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예배드리고 찬송 부를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 오셔서 마이너스 에너지를 플러스 에너지, 생명의 에너지, 사랑의 에너지로 바꿔달라고 기도하면서 나아가십시오.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생명의 역사, 사랑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며 내가 만나는 사람과 우리의 가정과 직장과 사회 속에 함께 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성령께서 함께 하시기에 복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고 생명을 얻어 사랑할 수 있게 축복해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이제는 플러스의 에너지를 예수님의 영으로부터 받게 하셔서 진리와 생명으로 사랑하면서 사는 복된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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