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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백성들은 놀라운 집중력으로 말씀을 경청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예배드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지금도 예배하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신앙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예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는 여러 종류의 공적인 예배를 드립니다.
소망교회 주일 예배는 절제된 경건의 예배입니다. 음악에는 대중음악, 고전음악 등 여러 장르의 음악이 있는데, 소망교회의 예배는 전통적인 클래식 음악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수요일 삼일기도회는 영적회복과 부흥의 예배입니다. 복음성가도 부르고 때로는 서로 마주보면서 축복송도 부릅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또한 새벽기도회가 있습니다. 하루를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음미하는 예배입니다. 내가 축복의 통로로서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 것인가를 다짐하는 예배입니다. 주일 예배가 입체적인 오케스트라 연주와 같다면, 새벽기도예배는 현악연주, 혹은 피아노 소나타와도 같습니다. 또는 나 홀로 깊이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아뢰는 독주로 표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소망교회에 와서 말씀을 증거 했던 목사님들이나 강사님들이 똑같이 고백하는 것이 있습니다. 성도님들에게 참으로 탁월한 집중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단어와 문장 하나하나를 음미하면서 생각하고 경청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칭찬하는 말씀을 여러 번 들었습니다. 저 자신도 그런 모습을 보면서 감사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때로 다른 곳을 가게 되면 예배 분위기가 흐트러져있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옆 사람과 대화를 하고 심지어는 껌을 씹는 사람도 있습니다. 팔짱을 끼고 눈부터 먼저 감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소망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모습을 보면 특색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아주 매력적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예배와 말씀의 집중력에 있어서는 세계 어느 장소에서도 볼 수 없는 탁월함이 있습니다.
본문에서도 이와 같은 예배의 탁월함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놀라운 집중력을 가지고 말씀을 경청했는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이들은 예루살렘 앞 광장에 모였습니다. 새벽부터 정오까지 모여서 말씀을 듣고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렸습니다. 무려 6시간의 집회를 가진 것입니다. 느헤미야 8장 3절의 기록입니다.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느헤미야 8:3)
여러분은 예배가 좋아서 6시간 동안 예배를 드린 적이 있으십니까?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수양관에 가서 신앙수련회를 할 때에도 6시간 내내 예배만 드린다면 화를 내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6시간이나 예배를 드렸다는 것은 말씀을 증거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사모함과 열정이 넘쳐났다는 뜻입니다. 중국의 가정교회에 가서 집회를 하면, 그들은 설교하는 목사님에게 말씀을 많이 전해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래서 “한 시간이면 되겠습니까?”라고 물으면 “아니요. 두 시간, 세 시간, 그 이상으로 길게 하셔도 괜찮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말씀듣기를 갈망합니다. 그래서 그곳에서는 사경회 집회를 며칠씩이나 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예배의 자리에는 그 어떤 차별도 없습니다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남자에게도 전하고 여자에게도 전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차별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유대사회는 가부장적인 사회였습니다. 여인은 부수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유대 랍비들은 기도하기를 이방인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감사했고,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감사했습니다. 그 정도로 유대사회에서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엄격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모세오경인 율법을 여성들에게 가르치는 것조차도 금했습니다. 유대사람들은 여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것을 마치 돼지에게 진주목걸이를 주는 것처럼 여겼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남자도, 여자도 함께 모여 온 백성이 말씀을 듣기 시작한 것입니다. 또한 본문에서는 알아들을만한 모든 사람들 앞에서 말씀을 전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른들에게만 말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청소년들에게도 말씀했고, 이방인들에게도 말씀을 전한 것 같습니다.
말씀을 듣는 자리는 세상이 만들어 놓은 성적인 차별, 사회적인 차별을 깨뜨리는 장소입니다. 예배의 자리는 인간이 만들어 놓은 모든 차별성을 극복하는 자리입니다. 말씀공동체와 예배공동체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함께 참여하는 자리입니다. 우리는 예배드리는 자리에 남자로 참여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자로 참여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적인 명예와 직분을 가지고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의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주님께서 말씀하시면 내가 듣고 순종 하겠나이다 하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와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씀을 듣고 깨달아 성전과 성벽을 재건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본래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서에 나오는 백성들은 바닥을 친 인생들이었습니다. 바벨론의 포로로 70년 동안 고난을 겪은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포로생활을 하면서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왔을 때 먼저 성전을 재건하고 성벽을 다시 세웠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것으로 온전해졌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말씀을 깨닫고자 합니다.
우리의 인생에 도약이 필요할 때, 외적인 모양을 회복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도 외적인 모양을 바꾸는 것입니다. 내가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어떤 일을 하겠다고 결정하고 실행하는 것도 외적인 모양을 바꾸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외적인 모양을 회복할 때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외적인 모양의 회복도 내실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내실이란 무엇일까요? 기독교의 내실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하나님 말씀의 핵심은 들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구약에서는 ‘쉐마’라고 합니다. ‘쉐마’는 히브리어로 ‘들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수많은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마다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전하시기 전에 항상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갈 때 행함(doing)이 중요합니다. 업적을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존재(being)입니다. 내 존재가 가득차야 합니다. 내 생각이 올바르게 서야합니다. 내 마음이 정결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변화의 역사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래 이스라엘 백성은 듣지 못했던 이들이었습니다. 마음이 강퍅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적인 지도자들과 예언자들을 보내주셨지만, 그들은 그때마다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예언자들을 통해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오히려 모욕하고 핍박까지 했습니다. 결국 하나님 대신 우상을 숭배했던 그들의 삶은 처절하게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70년 동안의 바벨론 포로 생활로 이어졌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돈이 많아도 그것을 감당할만한 성품을 지니고 있지 않으면 가지고 있는 돈은 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명예와 권력이 우리에게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올바로 사용할 수 있는 목적의식이 없다면 그 모든 것은 부메랑이 되어서 나 자신을 치는 고통스러운 권력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멋진 남자, 예쁜 여자와 결혼을 해도 상대방을 사랑할 수 있는 신실한 성품이 내면에 충만하지 않으면 우리의 결혼생활은 슬프고 외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왜 이 사회에 수많은 부정과 부패가 있습니까? 아무리 유명인이 되고,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되어도 진정으로 우리 삶에 내적인 변화가 있지 않으면 파멸의 길로 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발적으로 나아갈 때 역동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영적인 지도자였던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성벽을 재건한 후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원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말씀을 전해도 백성들이 듣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참으로 놀라운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먼저 원했습니다. 백성들이 말씀을 배우겠다고 합니다. 백성들이 말씀을 듣겠다고 합니다. 백성들이 말씀을 가르쳐달라고 요청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하였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오기를 청하매” (느헤미야 8:1)
백성들이 말씀을 먼저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에스라가 말씀을 낭독하자 그들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너무 많이 떨어져 있었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몰랐구나! 말씀에 생명이 있는 것을 우리가 잊고 살았구나!’ 그리고 그들은 율법의 말씀을 듣고 통곡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니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느헤미야 8:8~9 상반절)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말씀 앞에 나올 때 변화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삶이 성숙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삶을 성숙하게 하는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신앙으로 능력 있게 살기 원하십니까? 신앙의 기쁨을 갖기 원하십니까? 내 인생에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축복을 받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입니다. 말씀을 잃어버리면 모든 것을 잃어버립니다. 30년을 교회에 다녔더라도 말씀을 읽고 듣지 않으면 그 신앙은 처음과 똑같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읽고,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을 내 것으로 삼아야 합니다.
둘째는 내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말씀에 대해서 자원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말씀하셔도 귀를 닫고 있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 이제 말씀대로 순종하겠습니다.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 것으로 삼겠습니다. 신앙의 인물들처럼 말씀의 능력을 나도 가져보겠습니다.’ 라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나올 때 역동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자발성이 없는 신앙, 마음속에 소원이 없는 신앙,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마음으로 나아가는 신앙은 하나님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발성을 가지고 변화와 성숙의 자리를 원했습니다.
성도여러분, 여러분의 안에 설레는 마음이 있습니까? 기쁜 마음이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마다 하나님 앞에 열망하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나아와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영혼이 죄악으로부터 해방되고, 육체가 질병으로부터 해방되는 역사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리에서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뻐할 때 우리에게 새로운 힘이 생깁니다
온 백성들이 눈물로 통곡하기 시작했을 때 느헤미야가 다시 말합니다.
“느헤미야가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는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 (느헤미야 8:10)
우리의 힘은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에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영적인 힘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생명의 역사입니다. 주일 예배가 끝나면 많은 분들이 가족과 함께 식사하고 대화를 나누며 잔치를 즐기는 것을 보게 됩니다. 본문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함께 먹으라는 것입니다. 함께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일 예배를 위해서 이것을 하지 못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바깥에서 주차안내하시는 분들, 예배위원들, 귀한 찬양을 드리는 찬양대원들, 곳곳에서 어린 심령들을 가르치시는 교사 분들, 이외에도 곳곳에서 예배를 위해 어렵고 힘든 일들을 마다하지 않고 애쓰시는 분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분들을 만나면 당신들의 헌신과 봉사 때문에 내가 오늘 식구들과 기쁨 잔치를 벌이게 되었다고 위로해주시기 바랍니다. 조금 불편한 것이 있어도 격려해주시고 위로해주시고 칭찬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에게 이 놀라운 축복이 주어졌습니다. 모든 것을 갖추어도, 성전을 만들고 성벽을 쌓아도, 하나님의 말씀이 영혼에 가득차지 않으면 기쁨이 없습니다. 우리가 예배드릴 때마다 주어지는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을 우리 인생에 능력으로 삼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이 가지는 축복이요 변화의 원동력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나와 공동체가 변하고,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우리에게는 참된 기쁨이 되는 새로운 역사가 열려질 것입니다.
느헤미야 8: 1 ~ 12
1
12
이스라엘 백성들은 놀라운 집중력으로 말씀을 경청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예배드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지금도 예배하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신앙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예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는 여러 종류의 공적인 예배를 드립니다.
소망교회 주일 예배는 절제된 경건의 예배입니다. 음악에는 대중음악, 고전음악 등 여러 장르의 음악이 있는데, 소망교회의 예배는 전통적인 클래식 음악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수요일 삼일기도회는 영적회복과 부흥의 예배입니다. 복음성가도 부르고 때로는 서로 마주보면서 축복송도 부릅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또한 새벽기도회가 있습니다. 하루를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음미하는 예배입니다. 내가 축복의 통로로서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 것인가를 다짐하는 예배입니다. 주일 예배가 입체적인 오케스트라 연주와 같다면, 새벽기도예배는 현악연주, 혹은 피아노 소나타와도 같습니다. 또는 나 홀로 깊이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아뢰는 독주로 표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소망교회에 와서 말씀을 증거 했던 목사님들이나 강사님들이 똑같이 고백하는 것이 있습니다. 성도님들에게 참으로 탁월한 집중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단어와 문장 하나하나를 음미하면서 생각하고 경청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칭찬하는 말씀을 여러 번 들었습니다. 저 자신도 그런 모습을 보면서 감사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때로 다른 곳을 가게 되면 예배 분위기가 흐트러져있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옆 사람과 대화를 하고 심지어는 껌을 씹는 사람도 있습니다. 팔짱을 끼고 눈부터 먼저 감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소망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모습을 보면 특색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아주 매력적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예배와 말씀의 집중력에 있어서는 세계 어느 장소에서도 볼 수 없는 탁월함이 있습니다.
본문에서도 이와 같은 예배의 탁월함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놀라운 집중력을 가지고 말씀을 경청했는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이들은 예루살렘 앞 광장에 모였습니다. 새벽부터 정오까지 모여서 말씀을 듣고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렸습니다. 무려 6시간의 집회를 가진 것입니다. 느헤미야 8장 3절의 기록입니다.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느헤미야 8:3)
여러분은 예배가 좋아서 6시간 동안 예배를 드린 적이 있으십니까?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수양관에 가서 신앙수련회를 할 때에도 6시간 내내 예배만 드린다면 화를 내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6시간이나 예배를 드렸다는 것은 말씀을 증거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사모함과 열정이 넘쳐났다는 뜻입니다. 중국의 가정교회에 가서 집회를 하면, 그들은 설교하는 목사님에게 말씀을 많이 전해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래서 “한 시간이면 되겠습니까?”라고 물으면 “아니요. 두 시간, 세 시간, 그 이상으로 길게 하셔도 괜찮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말씀듣기를 갈망합니다. 그래서 그곳에서는 사경회 집회를 며칠씩이나 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예배의 자리에는 그 어떤 차별도 없습니다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남자에게도 전하고 여자에게도 전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차별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유대사회는 가부장적인 사회였습니다. 여인은 부수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유대 랍비들은 기도하기를 이방인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감사했고,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감사했습니다. 그 정도로 유대사회에서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엄격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모세오경인 율법을 여성들에게 가르치는 것조차도 금했습니다. 유대사람들은 여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것을 마치 돼지에게 진주목걸이를 주는 것처럼 여겼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남자도, 여자도 함께 모여 온 백성이 말씀을 듣기 시작한 것입니다. 또한 본문에서는 알아들을만한 모든 사람들 앞에서 말씀을 전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른들에게만 말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청소년들에게도 말씀했고, 이방인들에게도 말씀을 전한 것 같습니다.
말씀을 듣는 자리는 세상이 만들어 놓은 성적인 차별, 사회적인 차별을 깨뜨리는 장소입니다. 예배의 자리는 인간이 만들어 놓은 모든 차별성을 극복하는 자리입니다. 말씀공동체와 예배공동체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함께 참여하는 자리입니다. 우리는 예배드리는 자리에 남자로 참여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자로 참여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적인 명예와 직분을 가지고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의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주님께서 말씀하시면 내가 듣고 순종 하겠나이다 하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와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씀을 듣고 깨달아 성전과 성벽을 재건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본래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서에 나오는 백성들은 바닥을 친 인생들이었습니다. 바벨론의 포로로 70년 동안 고난을 겪은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포로생활을 하면서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왔을 때 먼저 성전을 재건하고 성벽을 다시 세웠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것으로 온전해졌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말씀을 깨닫고자 합니다.
우리의 인생에 도약이 필요할 때, 외적인 모양을 회복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도 외적인 모양을 바꾸는 것입니다. 내가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어떤 일을 하겠다고 결정하고 실행하는 것도 외적인 모양을 바꾸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외적인 모양을 회복할 때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외적인 모양의 회복도 내실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내실이란 무엇일까요? 기독교의 내실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하나님 말씀의 핵심은 들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구약에서는 ‘쉐마’라고 합니다. ‘쉐마’는 히브리어로 ‘들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수많은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마다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전하시기 전에 항상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갈 때 행함(doing)이 중요합니다. 업적을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존재(being)입니다. 내 존재가 가득차야 합니다. 내 생각이 올바르게 서야합니다. 내 마음이 정결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변화의 역사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래 이스라엘 백성은 듣지 못했던 이들이었습니다. 마음이 강퍅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적인 지도자들과 예언자들을 보내주셨지만, 그들은 그때마다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예언자들을 통해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오히려 모욕하고 핍박까지 했습니다. 결국 하나님 대신 우상을 숭배했던 그들의 삶은 처절하게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70년 동안의 바벨론 포로 생활로 이어졌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돈이 많아도 그것을 감당할만한 성품을 지니고 있지 않으면 가지고 있는 돈은 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명예와 권력이 우리에게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올바로 사용할 수 있는 목적의식이 없다면 그 모든 것은 부메랑이 되어서 나 자신을 치는 고통스러운 권력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멋진 남자, 예쁜 여자와 결혼을 해도 상대방을 사랑할 수 있는 신실한 성품이 내면에 충만하지 않으면 우리의 결혼생활은 슬프고 외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왜 이 사회에 수많은 부정과 부패가 있습니까? 아무리 유명인이 되고,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되어도 진정으로 우리 삶에 내적인 변화가 있지 않으면 파멸의 길로 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발적으로 나아갈 때 역동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영적인 지도자였던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성벽을 재건한 후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원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말씀을 전해도 백성들이 듣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참으로 놀라운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먼저 원했습니다. 백성들이 말씀을 배우겠다고 합니다. 백성들이 말씀을 듣겠다고 합니다. 백성들이 말씀을 가르쳐달라고 요청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하였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오기를 청하매” (느헤미야 8:1)
백성들이 말씀을 먼저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에스라가 말씀을 낭독하자 그들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너무 많이 떨어져 있었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몰랐구나! 말씀에 생명이 있는 것을 우리가 잊고 살았구나!’ 그리고 그들은 율법의 말씀을 듣고 통곡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니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느헤미야 8:8~9 상반절)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말씀 앞에 나올 때 변화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삶이 성숙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삶을 성숙하게 하는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신앙으로 능력 있게 살기 원하십니까? 신앙의 기쁨을 갖기 원하십니까? 내 인생에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축복을 받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입니다. 말씀을 잃어버리면 모든 것을 잃어버립니다. 30년을 교회에 다녔더라도 말씀을 읽고 듣지 않으면 그 신앙은 처음과 똑같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읽고,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을 내 것으로 삼아야 합니다.
둘째는 내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말씀에 대해서 자원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말씀하셔도 귀를 닫고 있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 이제 말씀대로 순종하겠습니다.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 것으로 삼겠습니다. 신앙의 인물들처럼 말씀의 능력을 나도 가져보겠습니다.’ 라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나올 때 역동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자발성이 없는 신앙, 마음속에 소원이 없는 신앙,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마음으로 나아가는 신앙은 하나님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발성을 가지고 변화와 성숙의 자리를 원했습니다.
성도여러분, 여러분의 안에 설레는 마음이 있습니까? 기쁜 마음이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마다 하나님 앞에 열망하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나아와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영혼이 죄악으로부터 해방되고, 육체가 질병으로부터 해방되는 역사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리에서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뻐할 때 우리에게 새로운 힘이 생깁니다
온 백성들이 눈물로 통곡하기 시작했을 때 느헤미야가 다시 말합니다.
“느헤미야가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는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 (느헤미야 8:10)
우리의 힘은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에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영적인 힘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생명의 역사입니다. 주일 예배가 끝나면 많은 분들이 가족과 함께 식사하고 대화를 나누며 잔치를 즐기는 것을 보게 됩니다. 본문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함께 먹으라는 것입니다. 함께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일 예배를 위해서 이것을 하지 못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바깥에서 주차안내하시는 분들, 예배위원들, 귀한 찬양을 드리는 찬양대원들, 곳곳에서 어린 심령들을 가르치시는 교사 분들, 이외에도 곳곳에서 예배를 위해 어렵고 힘든 일들을 마다하지 않고 애쓰시는 분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분들을 만나면 당신들의 헌신과 봉사 때문에 내가 오늘 식구들과 기쁨 잔치를 벌이게 되었다고 위로해주시기 바랍니다. 조금 불편한 것이 있어도 격려해주시고 위로해주시고 칭찬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에게 이 놀라운 축복이 주어졌습니다. 모든 것을 갖추어도, 성전을 만들고 성벽을 쌓아도, 하나님의 말씀이 영혼에 가득차지 않으면 기쁨이 없습니다. 우리가 예배드릴 때마다 주어지는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을 우리 인생에 능력으로 삼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이 가지는 축복이요 변화의 원동력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나와 공동체가 변하고,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우리에게는 참된 기쁨이 되는 새로운 역사가 열려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