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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그릇에 담긴 보배

고린도후서 4: 7 ~ 11

김지철 목사

2009.10.11

사람의 외모와 육체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20세기 말에 새롭게 등장한 신조어인 ‘lookism’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보다’라는 뜻의 ‘look’이라는 단어에 ‘ism’을 붙인 말로 ‘외모 지상주의’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옥스퍼드의 1999년 판 20세기 단어 사전은 ‘lookism’을 “외모를 근거로 한 편견이나 차별”이라고 정의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외적인 용모가 개인 간의 우열을 조장하거나 때로는 인생의 성패를 가르는 잣대가 된다는 주장입니다.
고든 팻쩌(Patzer)가 쓴 「룩스(LOOKS)」라는 책에서는 매력적인 외모를 갖게 되면 인간관계, 사회관계 속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특히 남녀 간의 연애와 결혼에 있어서 외모는 아주 큰 역할을 합니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여성들에게 잘생긴 건달과 성실함과 친근함이 배어 있는 평범한 청년 둘 중에 누구를 사귈 것인가 물어보면 대다수의 여성들은 후자를 택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사람을 만나게 했을 때 거의 예외 없이 옷 잘 입고 잘생긴 건달을 택하고, 선량하고 성실한 남자를 퇴짜 놓는다고 합니다. 또한 이런 외모주의는 직장 뿐 아니라 법정에서도, 심지어는 정치현장에서도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외모만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일까요? 외모가 뛰어난 사람은 행복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불행한 세상에서 사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외모주의로 인해 실상은 잘난 사람도, 많은 것을 가진 사람도 대부분 부정적인 감정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 역시 마음속에 불행함과 공허함을 느낍니다. 결국은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인기 있는 사람도 인기 없는 사람도 모두가 부족한 모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자신의 외모와 육체에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젠가 육체와 외모, 그리고 내가 가진 것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합니다. 옛날의 미모와 인기와 명성을 그리워합니다. 이때마다 우리는 이러한 위기를 믿음으로 극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은 깨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인생은 언제 성숙할까요? 내가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육체의 건강, 그토록 좋아했던 돈과 재물, 지식과 학벌, 인기 등이 결코 마지막까지 우리의 인생을 지탱할 수 없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절감할 때 성숙합니다. 참된 긍정을 갖기 위해서 부정의 모습을 깨달을 때 우리는 성숙합니다.
사도바울은 이러한 인생을 사는 비밀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는 인생을 질그릇, 즉 흙으로 만든 그릇이라고 정의합니다. 떨어지면 깨지고 던지면 부스러지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인간은 토기그릇입니다. 결코 금그릇도 아니고 은그릇도 아니며 쇠와 강철로 만든 그릇도 아닙니다. 인간은 강한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은 나약한 존재이며 한계가 있는 존재입니다. 어딘가에 부딪히면 아파하는 존재입니다. 질병이 생기면 탄식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죽음으로 갈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깨질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은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고린도후서 4:8~9)

여기 보면 동사가 수동태로 쓰여 있습니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한다.” “박해를 받는다.” “꺼꾸러뜨림을 당한다.” 내 힘으로는 저항할 수 없고 견딜 수 없는 외부의 위협과 강력한 공격이 나를 향해서 달려온다는 것입니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한다”는 어떤 의미일까요? 더 이상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어디에서도 희망을 찾을 수 없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답답한 일을 당해도 하소연할 곳이 없습니다. 미칠 것 같은 무력감에 시달립니다. “박해를 받았다”는 무슨 뜻일까요? 살 소망이 끊어졌다는 것입니다. 마치 쓰레기처럼 버려진 인생이 되었습니다. “꺼꾸러뜨림을 당하였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마치 권투선수가 펀치를 맞고 넉 다운된 것처럼 육체와 마음이 완전히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경험을 했다고 말합니다. 바울에게는 이와 같은 인생의 아픔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살아가려하면 이러한 고난이 우리에게 다가오기도 합니다. 우리가 바르게 살아가려하면 이러한 아픔이 우리를 붙잡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연약한 존재여서 육체가 깨어지면 슬퍼하고 우울해합니다. 낙심하고 절망합니다. 거기에 마음까지 공허해지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우리 인생의 모습입니다.
네덜란드의 화가였던 빈센트 반 고흐는 정신질환을 앓았습니다. 그에게는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그림을 그리는 것이 큰 기쁨이 되었습니다. 그는 동생에게 쓴 편지에서 그림 그리는 작업이 자신에게는 마치 종교와 같은 것이라며 이렇게 말합니다. “간혹 제 정신이 돌아오면 나는 발작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상태라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그럴 때는 고통도 잊고 공포심에 짓눌리지 않도록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열심히 작업을 할 때면 내 영혼은 잠시나마 잠잠해지고, 언젠가는 병을 이겨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게 된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고흐는 31세의 젊은 나이에 권총으로 자살을 합니다. 오늘날 고흐의 그림은 수백만 불, 아니 수천만 불까지 하는 최고의 명작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아무도 그를 인정해주지 않았습니다. 그의 그림은 단 한 점만 팔렸습니다. 그에게 닥친 마음의 절망과 육체적인 고통은 그를 아주 절망스럽게 했습니다. 그것은 육체의 절망만이 아니었습니다. 영혼의 평안이 없었을 때 그는 여지없이 무너졌습니다.
우리의 삶에 큰 고통이 있습니까? 박해와 핍박이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의 공격을 통해 버려진 존재와 같이 되었습니까? 바울에게도 그러한 인생의 고통과 아픔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울은 다시 일어섰다고 고백합니다. 실수와 실패가 결코 나를 무너뜨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끝까지 낙심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서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때 바울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인간은 깨질 수밖에 없다. 인간이 깨질 수밖에 없는 존재라면 깨질 준비를 하면서 인생을 살아가라! 아니, 깨지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살아가라!”

깨어짐의 순간은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는 복된 자리입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후서 4:7)

우리의 질그릇 속에 담겨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보물과도 같이 아주 소중한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아 계십니다. 나는 무가치하고 질그릇같이 깨지기 쉬우나 그러한 나를 가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담겨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 때문에 아주 당당하고 담대합니다. 그에게는 용기가 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그는 복음 사역에 쓰임 받는 것을 너무 귀하고 감격스럽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깨지는 경험을 하면 내 인생이 끝났다며 탄식합니다. 저 벼랑 끝에선 인간처럼 이제 우리는 땅바닥으로 추락하는 일만 남았다고 낙심합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인생은 나만 깨지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깨지게 되어 있습니다. 살아있는 모든 사람들은 죽음으로 깨지게 됩니다.
프랑스 시인 기욤 아폴리네(Guillaume Apollinaire)가 이런 시를 썼습니다.

“벼랑 끝으로 오라.” 그가 말했다.
“무서워요. 우리는 추락하고 말거예요.” 그들이 말했다.
“벼랑 끝으로 오라.” 그가 말했다.
그들이 왔다.
그는 그들을 밀어버렸다.

그리하여 그들은 날았다.

기독교 신앙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역설이 있습니다. ‘이제는 마지막이다. 이제는 가망성이 없다.’라고 생각되는 벼랑 끝으로 몰리는 순간,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상을 나는 비상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후서 4:10)

사도바울은 고백합니다. “내가 죽음을 경험한다. 매일매일 내 육체가 죽음 앞에 서있는 아픔을 경험한다. 그러나 그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은총을 오늘도 내일도 경험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모든 것이 끝이라고 누군가 이야기할 때, 혹은 내 마음속에 그런 판단이 들 때, 하나님께 나의 인생을 맡기는 신앙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가 당한 고난을 실패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사방에서 우겨쌈을 당하는 것이 실패가 아닙니다. 박해를 당하는 것이 실패가 아닙니다. 꺼꾸러뜨림을 당하는 것도 인생의 실패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그때가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 하나님의 생명의 은총을 경험하는 복된 자리입니다. 바울은 오히려 그것이 축복의 기회라고 말합니다.

내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으면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길을 가다가 어떤 문제가 발생해서 넘어질 수 있습니다. 환경 때문에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내 탓이 아닌 누군가의 잘못으로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다시 용기를 가지고 일어나 걸어야 합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몫이 아니라 바로 내 자신의 몫입니다. 내가 일어나야 합니다. 내가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내 속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삶 속에 넘어지고 자빠지는 일이 한 두 번이겠습니까? 실수하고 실패할 확률이 절반 이상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99% 실패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때에도 다시 일어나야 한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한 말이 있습니다. “한 인간에 대한 최종적인 평가는 형편이 좋고 안락할 때 그가 어떤 편에 서느냐가 아니다. 도전과 혼란에 휩싸일 때 그가 어느 편에 서느냐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다.”
우리가 편할 때는 무엇인들 결정을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힘들고 어려울 때, 모든 것이 막혔을 때, 무능력 속에 빠져있을 때 내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확인하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인생은 반드시 깨어지게 되어있습니다. 때로는 사고나 실수 때문에 깨어집니다. 직장과 사업 때문에 깨어지기도 하고, 갑자기 병들어서 깨어지기도 합니다. 인간관계의 갈등으로 인해 깨어질 때도 있고, 꿈꾸었던 꿈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깨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무너지고 쓰러지는 인간 안에 무언가 담겨있어야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담겨있으면 깨어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자랑스럽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빛을 발할 수 있도록 나를 복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질그릇 같은 인생 속에 예수님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 안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금그릇, 은그릇처럼 치장해보기도 합니다. 지식과 학벌로 치장을 합니다. 돈과 명예와 권력으로도 치장해봅니다. 그러나 그것도 어느 순간 깨어질 때가 다가옵니다. 그때 내 속에 생명이 없으면 오만한 것이 쏟아져 나옵니다. 게으름, 허위의식, 정욕과 음란, 탐욕의 악독한 것들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로 당당하게 살아가십시오.

사도바울은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깨어질 것을 알면서 살아가라. 그러나 그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보화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살아가라.” 그러기에 바울은 자랑스럽습니다. 그는 겸손하면서 당당합니다. 교만하면서 당당한 것은 거짓 당당함이나 예수를 믿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겸손하면서 당당합니다.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은 겸손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인생에 끝이 있음을 깨닫고 생명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알면서 겸손히 살아갑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병이 들면 육체가 병상에 누울 수밖에 없는 존재인 줄 깨닫고 나에게 주신 건강한 몸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알면서 살아갑니다.
또한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은 당당합니다. 몸이 아파도 당당하고 가진 것이 없어도 당당합니다. 많이 배우지 못해도 당당하며 나이가 들어 머리가 백발이 되어도, 반대로 젊어서 애송이 취급을 받아도 당당합니다. 내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를 무너뜨리려는 것들은 대체 무엇일까요? 그것은 내 안에 있는 자존감의 결여일 수도 있습니다. 육체적으로 먹고 마시는 것이 부족하지 않아도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상대적 빈곤이 나를 피폐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거대한 핍박은 없어도 누군가가 나를 조롱하고 비난하면 그것에 못 이겨서 분노하고 화를 내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텅 빈 영혼이 우리를 공허하게 만들고 슬프게 합니다.
이때 우리는 주님 앞에서 확인해야 합니다. 우리가 질그릇인 것을 확인해야 합니다. 우리가 깨질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확인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내 문제와 아픔보다 더 크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나를 이끌고 계시다는 놀라운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생명이 계십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 생명의 보물인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 때문에 여러분 한분 한분이 다 보물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고 귀히 여기시는 보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놀라운 축복을 확인하십시오. 때로 우리가 세상에서 질그릇같이 깨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내안에서 빛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냄으로 다시 일어나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스스로 질그릇인줄 모르고 금그릇, 은그릇인양 행세할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이제는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깨닫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깨어질 준비를 하게 하시고, 깨어져도 내 안에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임으로 당당하게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이 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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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4: 7 ~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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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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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외모와 육체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20세기 말에 새롭게 등장한 신조어인 ‘lookism’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보다’라는 뜻의 ‘look’이라는 단어에 ‘ism’을 붙인 말로 ‘외모 지상주의’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옥스퍼드의 1999년 판 20세기 단어 사전은 ‘lookism’을 “외모를 근거로 한 편견이나 차별”이라고 정의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외적인 용모가 개인 간의 우열을 조장하거나 때로는 인생의 성패를 가르는 잣대가 된다는 주장입니다.
고든 팻쩌(Patzer)가 쓴 「룩스(LOOKS)」라는 책에서는 매력적인 외모를 갖게 되면 인간관계, 사회관계 속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특히 남녀 간의 연애와 결혼에 있어서 외모는 아주 큰 역할을 합니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여성들에게 잘생긴 건달과 성실함과 친근함이 배어 있는 평범한 청년 둘 중에 누구를 사귈 것인가 물어보면 대다수의 여성들은 후자를 택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사람을 만나게 했을 때 거의 예외 없이 옷 잘 입고 잘생긴 건달을 택하고, 선량하고 성실한 남자를 퇴짜 놓는다고 합니다. 또한 이런 외모주의는 직장 뿐 아니라 법정에서도, 심지어는 정치현장에서도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외모만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일까요? 외모가 뛰어난 사람은 행복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불행한 세상에서 사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외모주의로 인해 실상은 잘난 사람도, 많은 것을 가진 사람도 대부분 부정적인 감정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 역시 마음속에 불행함과 공허함을 느낍니다. 결국은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인기 있는 사람도 인기 없는 사람도 모두가 부족한 모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자신의 외모와 육체에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젠가 육체와 외모, 그리고 내가 가진 것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합니다. 옛날의 미모와 인기와 명성을 그리워합니다. 이때마다 우리는 이러한 위기를 믿음으로 극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은 깨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인생은 언제 성숙할까요? 내가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육체의 건강, 그토록 좋아했던 돈과 재물, 지식과 학벌, 인기 등이 결코 마지막까지 우리의 인생을 지탱할 수 없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절감할 때 성숙합니다. 참된 긍정을 갖기 위해서 부정의 모습을 깨달을 때 우리는 성숙합니다.
사도바울은 이러한 인생을 사는 비밀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는 인생을 질그릇, 즉 흙으로 만든 그릇이라고 정의합니다. 떨어지면 깨지고 던지면 부스러지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인간은 토기그릇입니다. 결코 금그릇도 아니고 은그릇도 아니며 쇠와 강철로 만든 그릇도 아닙니다. 인간은 강한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은 나약한 존재이며 한계가 있는 존재입니다. 어딘가에 부딪히면 아파하는 존재입니다. 질병이 생기면 탄식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죽음으로 갈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깨질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은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고린도후서 4:8~9)

여기 보면 동사가 수동태로 쓰여 있습니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한다.” “박해를 받는다.” “꺼꾸러뜨림을 당한다.” 내 힘으로는 저항할 수 없고 견딜 수 없는 외부의 위협과 강력한 공격이 나를 향해서 달려온다는 것입니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한다”는 어떤 의미일까요? 더 이상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어디에서도 희망을 찾을 수 없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답답한 일을 당해도 하소연할 곳이 없습니다. 미칠 것 같은 무력감에 시달립니다. “박해를 받았다”는 무슨 뜻일까요? 살 소망이 끊어졌다는 것입니다. 마치 쓰레기처럼 버려진 인생이 되었습니다. “꺼꾸러뜨림을 당하였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마치 권투선수가 펀치를 맞고 넉 다운된 것처럼 육체와 마음이 완전히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경험을 했다고 말합니다. 바울에게는 이와 같은 인생의 아픔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살아가려하면 이러한 고난이 우리에게 다가오기도 합니다. 우리가 바르게 살아가려하면 이러한 아픔이 우리를 붙잡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연약한 존재여서 육체가 깨어지면 슬퍼하고 우울해합니다. 낙심하고 절망합니다. 거기에 마음까지 공허해지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우리 인생의 모습입니다.
네덜란드의 화가였던 빈센트 반 고흐는 정신질환을 앓았습니다. 그에게는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그림을 그리는 것이 큰 기쁨이 되었습니다. 그는 동생에게 쓴 편지에서 그림 그리는 작업이 자신에게는 마치 종교와 같은 것이라며 이렇게 말합니다. “간혹 제 정신이 돌아오면 나는 발작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상태라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그럴 때는 고통도 잊고 공포심에 짓눌리지 않도록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열심히 작업을 할 때면 내 영혼은 잠시나마 잠잠해지고, 언젠가는 병을 이겨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게 된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고흐는 31세의 젊은 나이에 권총으로 자살을 합니다. 오늘날 고흐의 그림은 수백만 불, 아니 수천만 불까지 하는 최고의 명작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아무도 그를 인정해주지 않았습니다. 그의 그림은 단 한 점만 팔렸습니다. 그에게 닥친 마음의 절망과 육체적인 고통은 그를 아주 절망스럽게 했습니다. 그것은 육체의 절망만이 아니었습니다. 영혼의 평안이 없었을 때 그는 여지없이 무너졌습니다.
우리의 삶에 큰 고통이 있습니까? 박해와 핍박이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의 공격을 통해 버려진 존재와 같이 되었습니까? 바울에게도 그러한 인생의 고통과 아픔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울은 다시 일어섰다고 고백합니다. 실수와 실패가 결코 나를 무너뜨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끝까지 낙심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서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때 바울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인간은 깨질 수밖에 없다. 인간이 깨질 수밖에 없는 존재라면 깨질 준비를 하면서 인생을 살아가라! 아니, 깨지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살아가라!”

깨어짐의 순간은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는 복된 자리입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후서 4:7)

우리의 질그릇 속에 담겨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보물과도 같이 아주 소중한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아 계십니다. 나는 무가치하고 질그릇같이 깨지기 쉬우나 그러한 나를 가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담겨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 때문에 아주 당당하고 담대합니다. 그에게는 용기가 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그는 복음 사역에 쓰임 받는 것을 너무 귀하고 감격스럽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깨지는 경험을 하면 내 인생이 끝났다며 탄식합니다. 저 벼랑 끝에선 인간처럼 이제 우리는 땅바닥으로 추락하는 일만 남았다고 낙심합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인생은 나만 깨지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깨지게 되어 있습니다. 살아있는 모든 사람들은 죽음으로 깨지게 됩니다.
프랑스 시인 기욤 아폴리네(Guillaume Apollinaire)가 이런 시를 썼습니다.

“벼랑 끝으로 오라.” 그가 말했다.
“무서워요. 우리는 추락하고 말거예요.” 그들이 말했다.
“벼랑 끝으로 오라.” 그가 말했다.
그들이 왔다.
그는 그들을 밀어버렸다.

그리하여 그들은 날았다.

기독교 신앙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역설이 있습니다. ‘이제는 마지막이다. 이제는 가망성이 없다.’라고 생각되는 벼랑 끝으로 몰리는 순간,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상을 나는 비상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후서 4:10)

사도바울은 고백합니다. “내가 죽음을 경험한다. 매일매일 내 육체가 죽음 앞에 서있는 아픔을 경험한다. 그러나 그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은총을 오늘도 내일도 경험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모든 것이 끝이라고 누군가 이야기할 때, 혹은 내 마음속에 그런 판단이 들 때, 하나님께 나의 인생을 맡기는 신앙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가 당한 고난을 실패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사방에서 우겨쌈을 당하는 것이 실패가 아닙니다. 박해를 당하는 것이 실패가 아닙니다. 꺼꾸러뜨림을 당하는 것도 인생의 실패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그때가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 하나님의 생명의 은총을 경험하는 복된 자리입니다. 바울은 오히려 그것이 축복의 기회라고 말합니다.

내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으면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길을 가다가 어떤 문제가 발생해서 넘어질 수 있습니다. 환경 때문에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내 탓이 아닌 누군가의 잘못으로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다시 용기를 가지고 일어나 걸어야 합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몫이 아니라 바로 내 자신의 몫입니다. 내가 일어나야 합니다. 내가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내 속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삶 속에 넘어지고 자빠지는 일이 한 두 번이겠습니까? 실수하고 실패할 확률이 절반 이상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99% 실패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때에도 다시 일어나야 한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한 말이 있습니다. “한 인간에 대한 최종적인 평가는 형편이 좋고 안락할 때 그가 어떤 편에 서느냐가 아니다. 도전과 혼란에 휩싸일 때 그가 어느 편에 서느냐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다.”
우리가 편할 때는 무엇인들 결정을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힘들고 어려울 때, 모든 것이 막혔을 때, 무능력 속에 빠져있을 때 내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확인하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인생은 반드시 깨어지게 되어있습니다. 때로는 사고나 실수 때문에 깨어집니다. 직장과 사업 때문에 깨어지기도 하고, 갑자기 병들어서 깨어지기도 합니다. 인간관계의 갈등으로 인해 깨어질 때도 있고, 꿈꾸었던 꿈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깨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무너지고 쓰러지는 인간 안에 무언가 담겨있어야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담겨있으면 깨어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자랑스럽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빛을 발할 수 있도록 나를 복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질그릇 같은 인생 속에 예수님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 안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금그릇, 은그릇처럼 치장해보기도 합니다. 지식과 학벌로 치장을 합니다. 돈과 명예와 권력으로도 치장해봅니다. 그러나 그것도 어느 순간 깨어질 때가 다가옵니다. 그때 내 속에 생명이 없으면 오만한 것이 쏟아져 나옵니다. 게으름, 허위의식, 정욕과 음란, 탐욕의 악독한 것들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로 당당하게 살아가십시오.

사도바울은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깨어질 것을 알면서 살아가라. 그러나 그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보화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살아가라.” 그러기에 바울은 자랑스럽습니다. 그는 겸손하면서 당당합니다. 교만하면서 당당한 것은 거짓 당당함이나 예수를 믿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겸손하면서 당당합니다.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은 겸손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인생에 끝이 있음을 깨닫고 생명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알면서 겸손히 살아갑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병이 들면 육체가 병상에 누울 수밖에 없는 존재인 줄 깨닫고 나에게 주신 건강한 몸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알면서 살아갑니다.
또한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은 당당합니다. 몸이 아파도 당당하고 가진 것이 없어도 당당합니다. 많이 배우지 못해도 당당하며 나이가 들어 머리가 백발이 되어도, 반대로 젊어서 애송이 취급을 받아도 당당합니다. 내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를 무너뜨리려는 것들은 대체 무엇일까요? 그것은 내 안에 있는 자존감의 결여일 수도 있습니다. 육체적으로 먹고 마시는 것이 부족하지 않아도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상대적 빈곤이 나를 피폐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거대한 핍박은 없어도 누군가가 나를 조롱하고 비난하면 그것에 못 이겨서 분노하고 화를 내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텅 빈 영혼이 우리를 공허하게 만들고 슬프게 합니다.
이때 우리는 주님 앞에서 확인해야 합니다. 우리가 질그릇인 것을 확인해야 합니다. 우리가 깨질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확인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내 문제와 아픔보다 더 크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나를 이끌고 계시다는 놀라운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생명이 계십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 생명의 보물인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 때문에 여러분 한분 한분이 다 보물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고 귀히 여기시는 보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놀라운 축복을 확인하십시오. 때로 우리가 세상에서 질그릇같이 깨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내안에서 빛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냄으로 다시 일어나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스스로 질그릇인줄 모르고 금그릇, 은그릇인양 행세할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이제는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깨닫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깨어질 준비를 하게 하시고, 깨어져도 내 안에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임으로 당당하게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이 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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