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구독

ic_info구독 사용방법

해당 카테고리에 새로운 콘텐츠를 모아보기 원하시면 구독을 추가해주세요 마이페이지 > 내구독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ic_info

질그릇에 담긴 하나님의 영광

고린도후서 4: 6 ~ 10

김지철 목사

2017.04.23

기독교 신앙은 ‘죽음’을 강조합니다.

기독교는 ‘생명’을 강조하고 또 강조합니다. 이 생명은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죽음’에 대해서도 자주 논합니다. 보통 사람들에게 죽음은 터부시되거나 외면됩니다. 죽음을 멀리하고 싶어서도 그렇지만,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기도 합니다.
죽음이 왜 두렵습니까? 거기엔 기회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실수하고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일어서면 됩니다. 다시 시도하고 출발할 수 있습니다. 컴퓨터에 버그가 생기면 리셋 버튼을 눌러 재시동을 거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런데 죽음은 그럴 수가 없습니다. 한 번 죽으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더욱이 죽음은 우리가 쌓아놓은 모든 것을 무로 돌려놓습니다. 게다가 누구도 죽음을 피해갈 수 없고, 예고 없이 우리를 찾아옵니다. 그래서 죽음이 두려운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죽음은 거기 없다. 또, 죽음이 거기 있는 한 우리도 거기에 없다.” 무슨 뜻일까요? 살아 있으면 살아 있기 때문에 죽음을 체험할 수 없다는 것이고, 죽었다면 이미 죽었으니 죽음을 더 이상 의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매일매일 죽음을 경험하라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죽음에 도전하라고 합니다. 주님께서도 당신의 죽음을 말씀하셨으며, 친히 십자가 죽음의 길을 가셨습니다. 사도 바울 또한 십자가 길을 가신 주님을 기억하며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라고 선언했습니다. 자신 역시 매일 죽음을 경험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도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후서 4:10)

여기 보면,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항상 몸에 짊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십자가를 되새기면서 날마다 죽음을 경험하는 삶을 산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된다는 것입니까?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즉, 기독교는 죽음을 말하는 종교입니다. 하지만 이 죽음은 진정으로 살기 위한, 참 삶을 살기 위한 죽음입니다. 참 생명, 바로 그 생명을 경험할 수 있도록 초청하는 종교가 기독교인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죽음을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날마다 죽고 다시 사는 삶이란 어떤 삶입니까? 우리 주위에 과연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있습니까? 예수님 외에는 누구도 죽음을 경험하고 다시 살아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삶의 자리에서 간접적으로 이 죽음을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죽음에 가장 근접해 있는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이 무엇일지 생각해 보십시오.
먼저는 몸의 죽음을 경험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질병에 걸려 육체가 아플 때입니다. 우리가 몸살을 심하게 앓으며 40도에 가까운 열병으로 꼼짝없이 누워 있을 때, 이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아, 이러다가 갑자기 내 심장이 멈추는 건 아닌가?’ 그렇게 두려워 떨 때가 있습니다. 지금도 병상에 누워 병마와 다투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사고를 당해 누워 있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신체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고통으로 죽음을 경험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잘나가던 기업이 갑자기 파산합니다. 그렇게 탄탄하다고 여겼던 직장에서 내쫒깁니다. 통장 잔고가 바닥나고 신용불량자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 ‘혹시 내 삶이 죽음으로 몰려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탄식을 할 때가 있습니다.
특별히 인간관계 가운데 치명적인 아픔을 경험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렇게 믿었던 사람이 어느 날 배신합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비참함을 느낍니다. 그렇게 사랑했던 사람, 어제까지 손 붙들고 마주했던 사람이 갑자기 내 곁을 떠날 때도 있습니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 나를 비난할 때 마음에 비수가 꽂힙니다. 상처가 생기고 분노가 터집니다. 이런 모든 상처가 우리로 하여금 죽음을 경험하게 합니다.
혹시 절망해 본 적 있습니까? 모든 것이 싫습니다. 모든 게 허무하고 무의미합니다. 그렇게 넋 놓고 살아본 적 있습니까? 절망하니 세상의 모든 색이 잿빛으로 변합니다. 무슨 사건이 일어나도, 무슨 말을 들어도 가슴이 뛰지 않습니다. 마음이 죽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 생각대로 일이 되지 않을 때 절망합니다. 혹은 마음은 옳은 길을 가고자 하는데 내 발걸음이 못된 짓을 향할 때, 내 자신이 인내의 바닥을 드러낼 때, 절망을 경험합니다. ‘아, 이런 못난 놈, 이런 형편없는 놈, 이런 어리석은 놈! 나 같은 놈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고 자책하면서 마음의 죽음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죽음의 언어들이 참 많습니다. 질병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위협, 공갈, 불안, 절망, 상처, 외로움, 이 모든 게 다 죽음의 언어들입니다. 영적으로 무기력해지는 것, 무의미성 속에 빠져 어쩔 줄 모르는 것, 이 모든 것도 죽음의 언어들에 사로잡힌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질그릇과 같은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 위대한 사도 바울도 죽음의 언어를 경험한 적 있다는 걸 아십니까? 오늘 본문 8절에 보니, 그가 얼마나 위협과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고린도후서 4:8 중)

여기 나타난 동사들은 수동태면서 시제로는 현재형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상태를 묘사하길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라고 합니다. 모든 상황이 자신을 위협하고 통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9절에 보면 더욱 신랄하게 그의 상황이 묘사되는데, 박해를 받고 거꾸러뜨림을 당하고 있다고 합니다. 더 이상 살 소망이 없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이 표현은 수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외부’로부터 이러한 상황이 몰려오고 있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 모든 상황을 당하고 있습니다. 어둠의 세력들, 죽음의 세력들이 그를 덮쳤습니다. 그리고 바로 ‘지금’ 이 모든 것이 그를 옥죄고 있다고 표현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이해한 인간은 어떤 실존일까요? 이와 같은 위기와 위협 속에서 그는 이렇게 자신의 실존을 표명합니다. “나는 질그릇과 같다. 나는 토기와 같다.” 인간이란 던지면 깨질 수밖에 없고, 짓밟으면 부서질 수밖에 없는 질그릇과 같은 연약한 존재라는 고백입니다. 죽음의 위협이 가까이 오면 두려워 떨며 침륜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인간이란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인간의 화려함을 이야기하기보다 약하고 두려움에 떠는 인간 이해를 우리에게 전해 줍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도 그가 무너지지 않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오히려 이것이 부활의 자리로 나아가는 길이자 생명의 자리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가르쳐 줍니다. 이 절망이 희망의 자리로 바뀐다고 우리에게 말해 주는 것입니다. 어둠의 위력을 경험한 사람들은 작은 빛에도 감사해 할 줄 압니다. 죽음과도 같은 고통을 통과한 사람들은 살아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감사하며, 생명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를 실감합니다. 사도 바울 역시 어둠과 죽음과 같은 고통을 지나왔기에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거듭난 새 피조물입니다.

헬라어 원어를 살펴보면, 오늘 구절에 ‘그러나’라는 반전접속사가 들어 있습니다. “지금 내가 위협과 위기 속에 있지만, 이 모든 것을 뛰어넘을 것이다!”라고, 이 안에 반전 접속사가 숨어 있습니다. 그럼 이 구절을 ‘그러나’라는 접속사를 넣어 직접 읽어 보겠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8~9절입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그러나) 쌓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그러나)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그러나)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그러나) 망하지 아니하고 (고린도후서 4:8~9)

넘어져도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서겠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산산조각 난 상황에서도 다시 일어설 것이라는 각오입니다. 모든 것이 바닥을 친 인생의 끝자리까지 내려갔는데도 거기서 머물지 않고 다시 일어서겠다는 다짐입니다. 그는 마치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어떤 인생의 어려움도 나를 넘어뜨릴 수 없다. 결코 나를 낙심시킬 수 없다. 나는 결코 버린바 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망하지 않을 것이다.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일까요? 그 자신 때문이 아닙니다. 이미 바울은 말했습니다. 새롭게 일어설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인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라고,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고 말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6~7절을 통해 확인해 보겠습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고린도후서 4:6~7 중)

이 구절에는 사도 바울의 창조론도 나타나 있습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이라는 구절을 통해 첫 번째 창조 기사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흑암과 깊음, 무질서의 카오스 속에서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말씀하셨을 때, 그 세계가 코스모스의 세계로 바뀌었습니다. 이게 바로 첫 번째 창조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하나님이 두 번째 창조를 하시는데, 두 번째 창조란 무엇일까요? 인간이 죄악으로 무너지며 어둠의 세력에 붙잡혀 있을 때 하나님이 두 번째 창조를 하십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신 사건입니다(고후4:6).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춰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두 번째 창조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한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생명의 빛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비춰 주셨습니다. 우리 마음에 비춰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속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구나!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고 다시 부활하셨구나!’ 하는 고백이 이뤄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춰 주셔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새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놀라운 보배를 질그릇과 같은 우리 속에 부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십니다.

우리는 토기요 질그릇일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보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면 그야말로 보잘것없는 질그릇에 지나지 않는 우리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 상태에서 깨진다면, 우리 속의 악하고 약한 것들만 터져 나올 것입니다. 내 속에 있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탐욕, 교만, 거짓, 이기심, 열등감, 미움, 분노, 수많은 죄악들이 가득 차 있습니다. 만약 내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는다면, 온통 이러한 것들이 나를 가득 채우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깨지면 이 더러운 것들만 쏟아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니,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보화가 계십니다. 만약 내가 깨지더라도 그 보화가 내 속에서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그분의 생명과 지혜가 내 속에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깨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깨질 것이다. 내 삶이 부서질 것이다. 그러나 나는 새롭게 변화될 수 있다.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니 어떤 것도 두렵지 않다.”라고 선언할 수 있었습니다. 때문에 그는 자신의 연약함도 자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강한 것을 자랑하지 않습니까? 높은 것만을 자랑합니다. 많이 가진 것을 자랑합니다. 내가 얼마나 힘이 센지를 자랑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능욕 받은 것, 궁핍한 것, 박해 받은 것, 곤고한 것을 기뻐한다고 자랑합니다(고후11장). 즉, 자신의 연약함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약할 때 예수님께서 힘을 주셔서 강하게 되었다고, 이 역설적인 복을 받아 누림으로 이렇게 감사도 드릴 수 있다고 고백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스스로 나는 쇠그릇이라고 그래서 안 깨진다고, 혹은 은그릇이나 금그릇처럼 멋진 존재라고 치장을 해도, 인간이란 존재 자체가 한번 치면 그냥 부서지는 존재입니다. 그렇게 연약한 존재가 우리 인간입니다. 우리 속에 생명의 주님을 모시지 않으면, 앞으로 나가도 두렵고 뒤로 돌아가려 해도 불안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고 그분과 함께 다시 삽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은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제시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으라고 합니다. 그리고 다시 예수님과 함께 살라고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을 때 나의 작은 자아를 그 안에 묻으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분과 함께 살 때 예수님의 큰 자아에 나의 자아를 접붙여 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이 되면, 내 자아가 예수님과 함께 살며 하나님의 지혜와 생명과 구원의 역사를 내가 받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안 바울은 자신이 깨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깨지겠다고 그렇게 나설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 나를 깨뜨리려 해도 내가 깨지는 것 같지만, 그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 인해 궁극적으로 자신은 깨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게 바로 바울이 자신의 생을 담대히 살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오늘 말씀 중 10절을 다시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후서 4:10)

이 말씀을 통해 바울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내가 깨지면 깨질수록 그 속에서 강력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것이다. 질그릇 같은 나를 누르라. 궁지에 몰아넣어라. 박해를 가해도 좋다. 그럼 나는 깨질 것이다. 나는 부서질 것이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내 안에 살아 계신 예수님이 드러날 것이다. 예수님의 생명의 역사가 나를 통해 더욱 커질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우리는 그때부터 작은 부활을 경험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예수님이 지니셨던 작은 영광을 우리가 소유하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이 작은 부활, 작은 생명, 작은 영광의 기쁨을 누리는 것, 이것이 믿음의 사람들이 얻는 축복입니다. 또, 이것이 생명의 부활이신 예수님을 믿는 이유입니다. 바로 이 생명을 우리 주위에 전하고 자랑하는 것, 그리고 이 생명을 기뻐하는 것이 전도이며 선교입니다.
시간이 갈수록 우리 삶은 서서히 후패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영혼은 주님과 뛰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질그릇 같은 존재지만 이 생명의 기쁨이 우리 안에 있음을 바라보십시오. 우리 안에 누가 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 생명의 주님이 계십니다. 이 주님을 오늘도 내 안에 모시며 세상을 향해 담대히 나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 되시길 축원합니다.

btn_switch

고린도후서 4: 6 ~ 10

6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기독교 신앙은 ‘죽음’을 강조합니다.

기독교는 ‘생명’을 강조하고 또 강조합니다. 이 생명은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죽음’에 대해서도 자주 논합니다. 보통 사람들에게 죽음은 터부시되거나 외면됩니다. 죽음을 멀리하고 싶어서도 그렇지만,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기도 합니다.
죽음이 왜 두렵습니까? 거기엔 기회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실수하고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일어서면 됩니다. 다시 시도하고 출발할 수 있습니다. 컴퓨터에 버그가 생기면 리셋 버튼을 눌러 재시동을 거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런데 죽음은 그럴 수가 없습니다. 한 번 죽으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더욱이 죽음은 우리가 쌓아놓은 모든 것을 무로 돌려놓습니다. 게다가 누구도 죽음을 피해갈 수 없고, 예고 없이 우리를 찾아옵니다. 그래서 죽음이 두려운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죽음은 거기 없다. 또, 죽음이 거기 있는 한 우리도 거기에 없다.” 무슨 뜻일까요? 살아 있으면 살아 있기 때문에 죽음을 체험할 수 없다는 것이고, 죽었다면 이미 죽었으니 죽음을 더 이상 의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매일매일 죽음을 경험하라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죽음에 도전하라고 합니다. 주님께서도 당신의 죽음을 말씀하셨으며, 친히 십자가 죽음의 길을 가셨습니다. 사도 바울 또한 십자가 길을 가신 주님을 기억하며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라고 선언했습니다. 자신 역시 매일 죽음을 경험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도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후서 4:10)

여기 보면,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항상 몸에 짊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십자가를 되새기면서 날마다 죽음을 경험하는 삶을 산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된다는 것입니까?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즉, 기독교는 죽음을 말하는 종교입니다. 하지만 이 죽음은 진정으로 살기 위한, 참 삶을 살기 위한 죽음입니다. 참 생명, 바로 그 생명을 경험할 수 있도록 초청하는 종교가 기독교인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죽음을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날마다 죽고 다시 사는 삶이란 어떤 삶입니까? 우리 주위에 과연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있습니까? 예수님 외에는 누구도 죽음을 경험하고 다시 살아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삶의 자리에서 간접적으로 이 죽음을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죽음에 가장 근접해 있는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이 무엇일지 생각해 보십시오.
먼저는 몸의 죽음을 경험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질병에 걸려 육체가 아플 때입니다. 우리가 몸살을 심하게 앓으며 40도에 가까운 열병으로 꼼짝없이 누워 있을 때, 이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아, 이러다가 갑자기 내 심장이 멈추는 건 아닌가?’ 그렇게 두려워 떨 때가 있습니다. 지금도 병상에 누워 병마와 다투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사고를 당해 누워 있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신체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고통으로 죽음을 경험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잘나가던 기업이 갑자기 파산합니다. 그렇게 탄탄하다고 여겼던 직장에서 내쫒깁니다. 통장 잔고가 바닥나고 신용불량자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 ‘혹시 내 삶이 죽음으로 몰려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탄식을 할 때가 있습니다.
특별히 인간관계 가운데 치명적인 아픔을 경험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렇게 믿었던 사람이 어느 날 배신합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비참함을 느낍니다. 그렇게 사랑했던 사람, 어제까지 손 붙들고 마주했던 사람이 갑자기 내 곁을 떠날 때도 있습니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 나를 비난할 때 마음에 비수가 꽂힙니다. 상처가 생기고 분노가 터집니다. 이런 모든 상처가 우리로 하여금 죽음을 경험하게 합니다.
혹시 절망해 본 적 있습니까? 모든 것이 싫습니다. 모든 게 허무하고 무의미합니다. 그렇게 넋 놓고 살아본 적 있습니까? 절망하니 세상의 모든 색이 잿빛으로 변합니다. 무슨 사건이 일어나도, 무슨 말을 들어도 가슴이 뛰지 않습니다. 마음이 죽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 생각대로 일이 되지 않을 때 절망합니다. 혹은 마음은 옳은 길을 가고자 하는데 내 발걸음이 못된 짓을 향할 때, 내 자신이 인내의 바닥을 드러낼 때, 절망을 경험합니다. ‘아, 이런 못난 놈, 이런 형편없는 놈, 이런 어리석은 놈! 나 같은 놈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고 자책하면서 마음의 죽음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죽음의 언어들이 참 많습니다. 질병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위협, 공갈, 불안, 절망, 상처, 외로움, 이 모든 게 다 죽음의 언어들입니다. 영적으로 무기력해지는 것, 무의미성 속에 빠져 어쩔 줄 모르는 것, 이 모든 것도 죽음의 언어들에 사로잡힌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질그릇과 같은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 위대한 사도 바울도 죽음의 언어를 경험한 적 있다는 걸 아십니까? 오늘 본문 8절에 보니, 그가 얼마나 위협과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고린도후서 4:8 중)

여기 나타난 동사들은 수동태면서 시제로는 현재형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상태를 묘사하길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라고 합니다. 모든 상황이 자신을 위협하고 통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9절에 보면 더욱 신랄하게 그의 상황이 묘사되는데, 박해를 받고 거꾸러뜨림을 당하고 있다고 합니다. 더 이상 살 소망이 없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이 표현은 수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외부’로부터 이러한 상황이 몰려오고 있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 모든 상황을 당하고 있습니다. 어둠의 세력들, 죽음의 세력들이 그를 덮쳤습니다. 그리고 바로 ‘지금’ 이 모든 것이 그를 옥죄고 있다고 표현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이해한 인간은 어떤 실존일까요? 이와 같은 위기와 위협 속에서 그는 이렇게 자신의 실존을 표명합니다. “나는 질그릇과 같다. 나는 토기와 같다.” 인간이란 던지면 깨질 수밖에 없고, 짓밟으면 부서질 수밖에 없는 질그릇과 같은 연약한 존재라는 고백입니다. 죽음의 위협이 가까이 오면 두려워 떨며 침륜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인간이란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인간의 화려함을 이야기하기보다 약하고 두려움에 떠는 인간 이해를 우리에게 전해 줍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도 그가 무너지지 않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오히려 이것이 부활의 자리로 나아가는 길이자 생명의 자리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가르쳐 줍니다. 이 절망이 희망의 자리로 바뀐다고 우리에게 말해 주는 것입니다. 어둠의 위력을 경험한 사람들은 작은 빛에도 감사해 할 줄 압니다. 죽음과도 같은 고통을 통과한 사람들은 살아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감사하며, 생명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를 실감합니다. 사도 바울 역시 어둠과 죽음과 같은 고통을 지나왔기에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거듭난 새 피조물입니다.

헬라어 원어를 살펴보면, 오늘 구절에 ‘그러나’라는 반전접속사가 들어 있습니다. “지금 내가 위협과 위기 속에 있지만, 이 모든 것을 뛰어넘을 것이다!”라고, 이 안에 반전 접속사가 숨어 있습니다. 그럼 이 구절을 ‘그러나’라는 접속사를 넣어 직접 읽어 보겠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8~9절입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그러나) 쌓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그러나)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그러나)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그러나) 망하지 아니하고 (고린도후서 4:8~9)

넘어져도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서겠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산산조각 난 상황에서도 다시 일어설 것이라는 각오입니다. 모든 것이 바닥을 친 인생의 끝자리까지 내려갔는데도 거기서 머물지 않고 다시 일어서겠다는 다짐입니다. 그는 마치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어떤 인생의 어려움도 나를 넘어뜨릴 수 없다. 결코 나를 낙심시킬 수 없다. 나는 결코 버린바 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망하지 않을 것이다.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일까요? 그 자신 때문이 아닙니다. 이미 바울은 말했습니다. 새롭게 일어설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인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라고,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고 말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6~7절을 통해 확인해 보겠습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고린도후서 4:6~7 중)

이 구절에는 사도 바울의 창조론도 나타나 있습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이라는 구절을 통해 첫 번째 창조 기사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흑암과 깊음, 무질서의 카오스 속에서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말씀하셨을 때, 그 세계가 코스모스의 세계로 바뀌었습니다. 이게 바로 첫 번째 창조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하나님이 두 번째 창조를 하시는데, 두 번째 창조란 무엇일까요? 인간이 죄악으로 무너지며 어둠의 세력에 붙잡혀 있을 때 하나님이 두 번째 창조를 하십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신 사건입니다(고후4:6).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춰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두 번째 창조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한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생명의 빛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비춰 주셨습니다. 우리 마음에 비춰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속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구나!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고 다시 부활하셨구나!’ 하는 고백이 이뤄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춰 주셔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새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놀라운 보배를 질그릇과 같은 우리 속에 부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십니다.

우리는 토기요 질그릇일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보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면 그야말로 보잘것없는 질그릇에 지나지 않는 우리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 상태에서 깨진다면, 우리 속의 악하고 약한 것들만 터져 나올 것입니다. 내 속에 있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탐욕, 교만, 거짓, 이기심, 열등감, 미움, 분노, 수많은 죄악들이 가득 차 있습니다. 만약 내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는다면, 온통 이러한 것들이 나를 가득 채우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깨지면 이 더러운 것들만 쏟아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니,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보화가 계십니다. 만약 내가 깨지더라도 그 보화가 내 속에서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그분의 생명과 지혜가 내 속에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깨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깨질 것이다. 내 삶이 부서질 것이다. 그러나 나는 새롭게 변화될 수 있다.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니 어떤 것도 두렵지 않다.”라고 선언할 수 있었습니다. 때문에 그는 자신의 연약함도 자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강한 것을 자랑하지 않습니까? 높은 것만을 자랑합니다. 많이 가진 것을 자랑합니다. 내가 얼마나 힘이 센지를 자랑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능욕 받은 것, 궁핍한 것, 박해 받은 것, 곤고한 것을 기뻐한다고 자랑합니다(고후11장). 즉, 자신의 연약함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약할 때 예수님께서 힘을 주셔서 강하게 되었다고, 이 역설적인 복을 받아 누림으로 이렇게 감사도 드릴 수 있다고 고백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스스로 나는 쇠그릇이라고 그래서 안 깨진다고, 혹은 은그릇이나 금그릇처럼 멋진 존재라고 치장을 해도, 인간이란 존재 자체가 한번 치면 그냥 부서지는 존재입니다. 그렇게 연약한 존재가 우리 인간입니다. 우리 속에 생명의 주님을 모시지 않으면, 앞으로 나가도 두렵고 뒤로 돌아가려 해도 불안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고 그분과 함께 다시 삽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은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제시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으라고 합니다. 그리고 다시 예수님과 함께 살라고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을 때 나의 작은 자아를 그 안에 묻으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분과 함께 살 때 예수님의 큰 자아에 나의 자아를 접붙여 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이 되면, 내 자아가 예수님과 함께 살며 하나님의 지혜와 생명과 구원의 역사를 내가 받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안 바울은 자신이 깨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깨지겠다고 그렇게 나설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 나를 깨뜨리려 해도 내가 깨지는 것 같지만, 그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 인해 궁극적으로 자신은 깨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게 바로 바울이 자신의 생을 담대히 살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오늘 말씀 중 10절을 다시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후서 4:10)

이 말씀을 통해 바울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내가 깨지면 깨질수록 그 속에서 강력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것이다. 질그릇 같은 나를 누르라. 궁지에 몰아넣어라. 박해를 가해도 좋다. 그럼 나는 깨질 것이다. 나는 부서질 것이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내 안에 살아 계신 예수님이 드러날 것이다. 예수님의 생명의 역사가 나를 통해 더욱 커질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우리는 그때부터 작은 부활을 경험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예수님이 지니셨던 작은 영광을 우리가 소유하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이 작은 부활, 작은 생명, 작은 영광의 기쁨을 누리는 것, 이것이 믿음의 사람들이 얻는 축복입니다. 또, 이것이 생명의 부활이신 예수님을 믿는 이유입니다. 바로 이 생명을 우리 주위에 전하고 자랑하는 것, 그리고 이 생명을 기뻐하는 것이 전도이며 선교입니다.
시간이 갈수록 우리 삶은 서서히 후패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영혼은 주님과 뛰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질그릇 같은 존재지만 이 생명의 기쁨이 우리 안에 있음을 바라보십시오. 우리 안에 누가 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 생명의 주님이 계십니다. 이 주님을 오늘도 내 안에 모시며 세상을 향해 담대히 나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 되시길 축원합니다.

2017년 4월 23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질그릇에 담긴 하나님의 영광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⑵ 찬송가 171, 384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⑷ 고후 4:6-10 을 읽고 나눕니다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생각하기

기독교는 생명을 강조합니다그 생명은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입니다그래서 기독교는 생명과 동시에 죽음을 말합니다사람들은 죽음이란 말을 터부시합니다죽음이란 다시 한 번이라는 것이 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그래서 죽음을 두려워합니다죽음 앞에서는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그것은 우리에게 낯선 손님처럼 다가옵니다.

설교의 요약

기독교 신앙은 매일매일 죽음을 경험하라 말씀합니다사도 바울도 자신이 매일 죽음의 경험을 했다고 고백합니다.(고전 15:31, 고후 4:10) 여기서 매일 경험하는 죽음은 간접적인 경험입니다우리는 몸의 죽음을 경험합니다육체가 아픈 질병입니다사건사고를 당할 때입니다우리는 마음의 죽음도 경험합니다인간관계로 말미암은 치명적인 경험입니다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는 겁니다마음속에 미움과 분노가 생기고상처가 나는 그 마음이 곧 죽음을 경험하는 자리입니다절망에 대한 체험을 하며나의 어리석음을나의 죄 된 모습을 바라보는 참담함을 느낍니다자책합니다정신적인 위협공갈불안절망상처외로움 등은 죽음의 언어들입니다영적 무기력과 무의미성에 대한 갈증도 죽음의 언어들입니다이를 통해 우리는 간접적 죽음을 경험합니다.

본문은 곳곳에서 자신을 둘러싸는 위협과박해모든 것이 뒤집어지는 고통의 경험을 이야기합니다바울이 이야기하는 이 경험들은 죽음의 언어들이며죽음의 체험입니다바울은 이것을 고백하며 수동태와 현재형으로 쓰고 있습니다이러한 어려움이 자기 안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밖에서 자기를 향하여 다가오는 외부의 고통이었다는 의미입니다과거뿐 아니라 지금 그 고통 속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이러한 위기 속에서 인생은 토기와 같은 질그릇이라고 명명합니다인간이란 누구나 던지면 깨지고짓밟으면 부숴지는죽음의 위협 앞에서 떨고 있는 연약한 질그릇과 같은 존재입니다어둠과 죽음고통의 세력이 늘 앞에 놓여져 있습니다.(8,9그런데이 말씀의 우리말 표현에는 명백하게 나타나고 있지 않지만 원어를 보면 중간마다 그러나라는 접속사가 네 번 반복되어 있습니다인생의 어떤 어려움도 나를 넘어뜨리게 할 수 없고결코 나를 낙심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나는 버린바 되지 않고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그것은 지금도 그러하고 미래도 그러할 것이라 고백합니다그 이유는 곧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비록 연약한 질그릇과 같은 존재이지만그 안에 보화가 담겨져 있습니다이 보배가 하나님의 영광을 지닌 예수님이십니다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시기에 깨져도 괜찮습니다예수님을 믿으면오히려 내가 깨질수록 내 안에 예수님이 드러나게 되고그 빛과 영광이 나타나게 됩니다예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바울은 자신의 연약함을 자랑했습니다왜냐하면 그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덧입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우리가 존귀한 것이 아닙니다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우리가 존귀하게 되는 것입니다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여전히 우리 자신이 질그릇임을 깨닫지 못하고금 그릇이나 은그릇처럼 생각하고 스스로 자랑하며 그것을 닦고 보존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새로운 삶을 소개합니다내가 죽고 예수로 사는 것입니다우리가 죽으면 예수님의 생명예수님의 사랑예수님의 지혜곧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를 통해 나타납니다내가 질그릇임을 아는 사람은 겸손해집니다동시에 깨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매일 예수님과 죽는 연습을 하면 날마다 새롭게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살아갈 수 있습니다부활의 생명 붙잡고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나누기

1. 인생 속에서 간접적인 죽음의 경험을 했던 기억이 있다면 서로에게 나눠봅시다.

2. 내 삶 속에 찾아온 위협과 박해뒤집어지는 경험 속에 승리한 은혜가 있었다면 나눠봅시다.

3.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보배이신 부활의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결단을 나눠봅시다.

마무리 기도

질그릇과 같은 연약함을 갖고 살아가지만 보배이신 예수님과 함께 능력을 누리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부활의 생명과 능력으로 주의 영광을 맛보며 살아가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아멘.

Connection Card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