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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믿음인가? 거짓 믿음인가?

호세아 10: 12 ~ 13

김지철 목사

2016.01.10

부와 재물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청년 시절, 성경말씀을 읽다가 한 구절에서 의문이 생겼습니다. 바로 누가복음 6장 20절 말씀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를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누가복음 6:20)

성경 어디에도 가난이 축복이라고 말하지 않는데, 놀랍게도 여기서는 가난한 자가 복이 있고,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차지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일까? 예수님께서는 일종의 프롤레타리아 혁명(proletarian revolution)을 추구하셨나? 노동자의 혁명을 주장하신 것일까?’ 성경을 계속 읽으며 그런 것을 부추기는 것 같지는 않다는 결론이 났지만, 여러 생각들이 복합적으로 제 안에 들어왔던 것은 사실입니다.
성경에서는 부와 재물을 하나님의 선물이자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던 모세를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 (신명기 8:18)

하나님이 우리에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담임목사인 저는 성도님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성도들이 재물 얻을 능력을 받게 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또 건강의 복, 명예의 복, 기업의 복을 위해서도 기도합니다. 인간관계의 축복을 위해서도 기도하고, 학문의 진전을 위해서도 기도합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이 속해 있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등 모든 분야에서 풍요로운 삶의 사건들이 나타나기를 기도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이 아닐까 하는 마음에서입니다.

부자가 벌을 받는 이유는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복이 있도다’로 시작된 누가복음 6장 말씀은, 놀랍게도 마지막에 ‘화 있을진저’라는 저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누가복음 6:24)

예수님은 재물이 풍성하여 풍요로운 자들을 향해서 ‘화가 임할 것이다’라고 악담을 퍼부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기에 우리가 돈을 벌고 재물을 얻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동시에 우리는 성경을 통해 ‘부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라는 말씀도 듣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돈과 재물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인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돈과 재물을 지나치게 좋아하기 때문에 돈과 재물이 인간의 마음을 독점할 수 있다는 것 또한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돈에는 마력이 있어 인간성 자체를 파괴시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경고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곧 돈과 재물이 하나님의 자리까지 올라와 우상숭배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태도를 갖기를 원하시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부와 재물의 축복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재물을 갖고 있어도 ‘가난한 자의 축복’을 누릴 수 있기를 원하십니다.
누가복음에서는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말씀하시고, 마태복음에서는 가난한 자에 한 가지가 더 추가되어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부자면서도 마음이 가난한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할까요?
성경은 부자면서 가난한 심령을 가진 자를 만나기가 쉽지 않다고 이야기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란, 자기 자신을 부정함으로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겠다는 태도를 지닌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마음이 가난해지면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자리에 들어올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많은 돈을 갖고 있으나 겸손하고, 쌓은 지식을 다른 사람과 나누려고 하고, 가진 권력을 공동체를 위해 쓰기 원하는 사람들이 축복받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삶의 태도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주신 말씀을 보면 명백해집니다.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 (신명기 8:12∼14)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하시면서도 한편으로는 염려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들로 인해 풍성한 삶을 살게 될 때, 그들이 교만해져서 ‘내가 능력이 많아서, 내가 수고하고 땀 흘려서 이렇게 많은 것을 얻은 거야!’ 하며 하나님을 잊어버릴까 걱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는 것이 우리의 위기입니다.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복 주실 때,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의 찬양을 올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우리의 마음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베푸신 선물인 것을 알고 감격하며 그것을 받습니다. 그런데 축복이 반복이 되면, 익숙해집니다. 그러면서 서서히 ‘내가 열심히 해서’, ‘내가 잘나서’, ‘내 수완과 헌신으로’ 이 모든 것들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바로 그때가 아주 위험한 때라고 성경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왜 위험한 것일까요?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셨는데, 어느 날 하나님 대신에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하나님의 자리에 대신 올려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재물이 나의 우상이 되고, 육체의 쾌락이 나의 우선순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실수록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야 되는데, 축복을 받으면 받을수록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인생이 범하는 실수입니다. 그리고 그런 때 우리는 위기를 맞이합니다.
오늘 본문인 호세아 10장을 보면, 하나님의 염려가 현실 속에서 구체적으로 진행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라 그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을 많게 하며 그 땅이 번영할수록 주상을 아름답게 하도다 (호세아 10:1)

하나님을 섬기는 대신 다른 신을 위한 제단을 만들고, 그 땅이 번성할수록 자신들의 신들을 멋지게 꾸민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물질적인 축복과 풍요가 오히려 하나님을 떠나게 만든 것입니다.

묵은 땅에서 거짓 믿음이 납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완전히 떠나지는 않았습니다. 한쪽으로는 하나님을 믿고, 다른 한쪽으로는 우상을 만들어서 그것을 받아들였습니다. 필요할 때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즐길 때는 우상을 향했습니다. 마음이 두 개로 조각난 것입니다. 그래서 호세아 10장 2절에서는 ‘그들이 두 마음을 품었으니 이제 벌을 받을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서로 사랑해야 할 남편과 아내에게 다른 여자, 다른 남자가 생겼다면 그 부부의 삶은 그때부터 몰락하지 않겠습니까?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내가 신랑이고 너희는 내 신부다. 내가 남편이고 너희는 내 아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듯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네게 이 모든 약속과 변하지 않는 사랑을 베풀겠다. 너도 나를 사랑하고 나를 바라봐라’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그것을 거절하자 하나님께서 진노하신 것입니다.
물질적인 풍요가 정신적 타락을 일으켰습니다. 보이는 세계의 풍족함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탄식 소리가 들려옵니다. “네가 모양은 그럴 듯하지만 거짓 믿음을 갖고 있구나. 네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세상 잡것들을 신뢰하는구나.” 하나님은 탄식의 말씀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가르치셨습니다.

너희는 악을 밭 갈아 죄를 거두고 거짓 열매를 먹었나니 이는 네가 네 길과 네 용사의 많음을 의뢰하였음이라 (호세아 10:13)

자신의 길과 자신의 용사 많음을 의뢰했다는 것을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언어로 말하자면, 내 건강, 내 재산, 내 능력, 내 권력을 의지했다는 것입니다. “네가 네 건강을 신뢰했구나. 네 재산을 신뢰했구나. 네 능력과 권력을 의지했구나. 네가 얼마나 잘난 인간인지, 얼마나 힘 있는 존재인지를 과시하고 싶어 했구나.”
하나님은 하나님을 능력으로 삼지 않고 멋대로 인생을 산 이스라엘의 모습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은 부드러운 옥토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딱딱하게 굳어버린 묵은 땅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네 묵은 땅을 기경(起耕)하라. 갈아서 뒤집어엎어라.” 이것은 곧 자기 갱신과 자기 혁명을 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말로 표현하자면, ‘회개’를 촉구하신 것입니다.

내 영혼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회개란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축복입니다. 회개는 자신을 변화시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하며, 하나님이 주신 은총을 받을 수 있게 합니다.
하나님은 12절 후반부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호세아 10:12)

하나님은 “너희의 묵은 땅을 기경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묵은 땅은 어떤 땅입니까? 아무리 씨앗을 뿌려도 씨앗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황량한 땅입니다. 과거에는 풍성한 소출로 사람을 기쁘게 했던 땅이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방치되어 잡초가 무성하고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가득한 땅입니다.
영적으로는 어떤 상태일까요?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우리 영혼에 기쁨의 샘물이 솟아나오고 있습니까? 만약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내 영혼에 기쁨이 없으면, 영혼의 상태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영혼을 방치해 놓은 것은 아닌가? 영적인 즐거움을 잃어버린 채로 놔두어 버린 것은 아닌가? 그래서 영적인 힘과 능력을 상실한 것은 아닌가? 내 신앙이 습관화된 것은 아닌가? 강요에 의한 믿음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특히 신앙생활을 오래한 분들일수록 스스로에게 묻고 답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갈아엎어야 할 묵은 땅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 비유를 말씀하실 때, 네 가지 밭에 대해서 이야기하셨습니다. 심겨진 씨가 잘 자라나는 옥토를 제외하면 세 가지 종류의 땅이 있습니다. 길가, 돌밭, 나머지는 가시덤불 밭입니다. 길가에서는 씨앗이 뿌리를 내릴 수가 없습니다. 돌밭에서는 씨앗이 심기지만, 문제가 생기면 곧 말라버리고 맙니다. 가시덤불에서는 세상의 염려와 근심으로 줄기가 자라지 못합니다.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나의 고집과 교만의 돌덩어리들이 우리의 가슴에 박혀 있지는 않습니까? 게으르고 나태한 엉겅퀴들이 내 삶을 찌들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시기와 질투와 미움과 분노의 잡초들이 무성하게 나를 끌어안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말씀은 바로 이 묵은 땅을 기경하라는 것입니다. 갈아서 뒤엎으라는 것입니다. 잡초를 뽑아내고, 크고 작은 돌멩이들을 걷어 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이 일이 가능할까요? 우리 속에 있는 땅을 어떻게 기경할 수 있을까요? 방법은 간단합니다. 바로 진정한 믿음으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 (호세아 10:12)

지금이 여호와를 찾을 때라는 것입니다. 내일로 미루지 말고 지금 결정하고 지금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묵은 땅을 뒤집어엎어 부드러운 옥토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거짓 믿음에서 참된 믿음으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거짓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보이는 것에 인생의 최종 목표를 두는 것이 거짓 믿음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목표를 두어야 보이는 세계를 끌어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보이는 세계에 집착하다 보니 그 속에 매몰되고 마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일 뿐입니다. 선물에 매달리지 말고 선물을 주신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인생에게 주신 축복에 집착하지 말고 축복을 베푸신 하나님을 향해 나아갈 때,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 진정한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축복이 없어도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데, 축복에만 집착하게 되면 축복에 따라 일희일비(一喜一悲)하는 인생이 되고 맙니다.
‘지금 여호와를 찾을 때’라는 것은 지금 여호와를 알라는 것입니다. 호세아서를 읽어 보면, 호세아는 계속해서 백성들에게 “여호와를 알자”고 말합니다. 여호와를 사랑하고 여호와를 알라고 끊임없이 부탁합니다.
또한 앞부분에서는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고 이야기합니다. 공의가 무엇일까요? 공의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뜻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면 무엇을 열매로 거둔다고 이야기합니까? 바로 인애입니다. 끊임없는 사랑을 인생의 결과물로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묵은 땅을 기경하는 한 해가 됩시다.

우리에게는 쓴 뿌리들이 있습니다. 미움의 쓴 뿌리, 분노의 쓴 뿌리, 교만의 쓴 뿌리, 열등감의 쓴 뿌리 등이 있습니다. 이 쓴 뿌리들을 과감하게 뽑아 성령의 불로 태워지기를 기도하며 주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능합니다. “주님 내게 말씀하시옵소서. 내 속에서 나를 억눌렀던 쓴 뿌리들을 불태우시옵소서.” 그리고 나의 죄악과 부끄러움을 십자가에 대신 달아주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는 인생의 묵은 땅을 기경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를 억압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씨앗이 심기지 못하는 딱딱한 땅처럼 경직되게 만드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들을 털어내셔야 합니다.
한 해를 새롭게 맞습니다. 내 안의 하나님 나라를 억눌렀던 것들,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면서도 의심하게 만든 쓴 뿌리들, 누군가를 미워했던 쓴 뿌리들, 쉽게 분노하게 만들던 쓴 뿌리들, 열등감으로 주눅 들게 하던 쓴 뿌리들을 토해 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회복시키기를 원하십니다. 이 한 해, 말씀을 듣고 예배를 드리면서 “주님, 저와 함께해 주세요. 제가 묵은 땅을 기경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우겠습니다. 하나님, 제 인생을 열어 주시고, 제가 세상이 주지 못하는 하늘의 평안을 경험하며 영혼의 기쁨의 샘물을 터트리게 하시옵소서. 그래서 하나님을 마음껏 찬양하며 이 한 해를 살아가는 주님의 사람이 되게 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하며 나가는 복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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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아 10: 12 ~ 13

12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13

너희는 악을 밭 갈아 죄를 거두고 거짓 열매를 먹었나니 이는 네가 네 길과 네 용사의 많음을 의뢰하였음이라

부와 재물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청년 시절, 성경말씀을 읽다가 한 구절에서 의문이 생겼습니다. 바로 누가복음 6장 20절 말씀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를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누가복음 6:20)

성경 어디에도 가난이 축복이라고 말하지 않는데, 놀랍게도 여기서는 가난한 자가 복이 있고,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차지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일까? 예수님께서는 일종의 프롤레타리아 혁명(proletarian revolution)을 추구하셨나? 노동자의 혁명을 주장하신 것일까?’ 성경을 계속 읽으며 그런 것을 부추기는 것 같지는 않다는 결론이 났지만, 여러 생각들이 복합적으로 제 안에 들어왔던 것은 사실입니다.
성경에서는 부와 재물을 하나님의 선물이자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던 모세를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 (신명기 8:18)

하나님이 우리에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담임목사인 저는 성도님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성도들이 재물 얻을 능력을 받게 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또 건강의 복, 명예의 복, 기업의 복을 위해서도 기도합니다. 인간관계의 축복을 위해서도 기도하고, 학문의 진전을 위해서도 기도합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이 속해 있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등 모든 분야에서 풍요로운 삶의 사건들이 나타나기를 기도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이 아닐까 하는 마음에서입니다.

부자가 벌을 받는 이유는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복이 있도다’로 시작된 누가복음 6장 말씀은, 놀랍게도 마지막에 ‘화 있을진저’라는 저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누가복음 6:24)

예수님은 재물이 풍성하여 풍요로운 자들을 향해서 ‘화가 임할 것이다’라고 악담을 퍼부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기에 우리가 돈을 벌고 재물을 얻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동시에 우리는 성경을 통해 ‘부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라는 말씀도 듣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돈과 재물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인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돈과 재물을 지나치게 좋아하기 때문에 돈과 재물이 인간의 마음을 독점할 수 있다는 것 또한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돈에는 마력이 있어 인간성 자체를 파괴시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경고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곧 돈과 재물이 하나님의 자리까지 올라와 우상숭배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태도를 갖기를 원하시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부와 재물의 축복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재물을 갖고 있어도 ‘가난한 자의 축복’을 누릴 수 있기를 원하십니다.
누가복음에서는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말씀하시고, 마태복음에서는 가난한 자에 한 가지가 더 추가되어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부자면서도 마음이 가난한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할까요?
성경은 부자면서 가난한 심령을 가진 자를 만나기가 쉽지 않다고 이야기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란, 자기 자신을 부정함으로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겠다는 태도를 지닌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마음이 가난해지면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자리에 들어올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많은 돈을 갖고 있으나 겸손하고, 쌓은 지식을 다른 사람과 나누려고 하고, 가진 권력을 공동체를 위해 쓰기 원하는 사람들이 축복받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삶의 태도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주신 말씀을 보면 명백해집니다.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 (신명기 8:12∼14)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하시면서도 한편으로는 염려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들로 인해 풍성한 삶을 살게 될 때, 그들이 교만해져서 ‘내가 능력이 많아서, 내가 수고하고 땀 흘려서 이렇게 많은 것을 얻은 거야!’ 하며 하나님을 잊어버릴까 걱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는 것이 우리의 위기입니다.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복 주실 때,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의 찬양을 올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우리의 마음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베푸신 선물인 것을 알고 감격하며 그것을 받습니다. 그런데 축복이 반복이 되면, 익숙해집니다. 그러면서 서서히 ‘내가 열심히 해서’, ‘내가 잘나서’, ‘내 수완과 헌신으로’ 이 모든 것들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바로 그때가 아주 위험한 때라고 성경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왜 위험한 것일까요?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셨는데, 어느 날 하나님 대신에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하나님의 자리에 대신 올려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재물이 나의 우상이 되고, 육체의 쾌락이 나의 우선순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실수록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야 되는데, 축복을 받으면 받을수록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인생이 범하는 실수입니다. 그리고 그런 때 우리는 위기를 맞이합니다.
오늘 본문인 호세아 10장을 보면, 하나님의 염려가 현실 속에서 구체적으로 진행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라 그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을 많게 하며 그 땅이 번영할수록 주상을 아름답게 하도다 (호세아 10:1)

하나님을 섬기는 대신 다른 신을 위한 제단을 만들고, 그 땅이 번성할수록 자신들의 신들을 멋지게 꾸민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물질적인 축복과 풍요가 오히려 하나님을 떠나게 만든 것입니다.

묵은 땅에서 거짓 믿음이 납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완전히 떠나지는 않았습니다. 한쪽으로는 하나님을 믿고, 다른 한쪽으로는 우상을 만들어서 그것을 받아들였습니다. 필요할 때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즐길 때는 우상을 향했습니다. 마음이 두 개로 조각난 것입니다. 그래서 호세아 10장 2절에서는 ‘그들이 두 마음을 품었으니 이제 벌을 받을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서로 사랑해야 할 남편과 아내에게 다른 여자, 다른 남자가 생겼다면 그 부부의 삶은 그때부터 몰락하지 않겠습니까?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내가 신랑이고 너희는 내 신부다. 내가 남편이고 너희는 내 아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듯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네게 이 모든 약속과 변하지 않는 사랑을 베풀겠다. 너도 나를 사랑하고 나를 바라봐라’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그것을 거절하자 하나님께서 진노하신 것입니다.
물질적인 풍요가 정신적 타락을 일으켰습니다. 보이는 세계의 풍족함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탄식 소리가 들려옵니다. “네가 모양은 그럴 듯하지만 거짓 믿음을 갖고 있구나. 네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세상 잡것들을 신뢰하는구나.” 하나님은 탄식의 말씀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가르치셨습니다.

너희는 악을 밭 갈아 죄를 거두고 거짓 열매를 먹었나니 이는 네가 네 길과 네 용사의 많음을 의뢰하였음이라 (호세아 10:13)

자신의 길과 자신의 용사 많음을 의뢰했다는 것을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언어로 말하자면, 내 건강, 내 재산, 내 능력, 내 권력을 의지했다는 것입니다. “네가 네 건강을 신뢰했구나. 네 재산을 신뢰했구나. 네 능력과 권력을 의지했구나. 네가 얼마나 잘난 인간인지, 얼마나 힘 있는 존재인지를 과시하고 싶어 했구나.”
하나님은 하나님을 능력으로 삼지 않고 멋대로 인생을 산 이스라엘의 모습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은 부드러운 옥토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딱딱하게 굳어버린 묵은 땅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네 묵은 땅을 기경(起耕)하라. 갈아서 뒤집어엎어라.” 이것은 곧 자기 갱신과 자기 혁명을 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말로 표현하자면, ‘회개’를 촉구하신 것입니다.

내 영혼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회개란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축복입니다. 회개는 자신을 변화시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하며, 하나님이 주신 은총을 받을 수 있게 합니다.
하나님은 12절 후반부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호세아 10:12)

하나님은 “너희의 묵은 땅을 기경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묵은 땅은 어떤 땅입니까? 아무리 씨앗을 뿌려도 씨앗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황량한 땅입니다. 과거에는 풍성한 소출로 사람을 기쁘게 했던 땅이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방치되어 잡초가 무성하고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가득한 땅입니다.
영적으로는 어떤 상태일까요?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우리 영혼에 기쁨의 샘물이 솟아나오고 있습니까? 만약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내 영혼에 기쁨이 없으면, 영혼의 상태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영혼을 방치해 놓은 것은 아닌가? 영적인 즐거움을 잃어버린 채로 놔두어 버린 것은 아닌가? 그래서 영적인 힘과 능력을 상실한 것은 아닌가? 내 신앙이 습관화된 것은 아닌가? 강요에 의한 믿음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특히 신앙생활을 오래한 분들일수록 스스로에게 묻고 답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갈아엎어야 할 묵은 땅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 비유를 말씀하실 때, 네 가지 밭에 대해서 이야기하셨습니다. 심겨진 씨가 잘 자라나는 옥토를 제외하면 세 가지 종류의 땅이 있습니다. 길가, 돌밭, 나머지는 가시덤불 밭입니다. 길가에서는 씨앗이 뿌리를 내릴 수가 없습니다. 돌밭에서는 씨앗이 심기지만, 문제가 생기면 곧 말라버리고 맙니다. 가시덤불에서는 세상의 염려와 근심으로 줄기가 자라지 못합니다.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나의 고집과 교만의 돌덩어리들이 우리의 가슴에 박혀 있지는 않습니까? 게으르고 나태한 엉겅퀴들이 내 삶을 찌들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시기와 질투와 미움과 분노의 잡초들이 무성하게 나를 끌어안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말씀은 바로 이 묵은 땅을 기경하라는 것입니다. 갈아서 뒤엎으라는 것입니다. 잡초를 뽑아내고, 크고 작은 돌멩이들을 걷어 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이 일이 가능할까요? 우리 속에 있는 땅을 어떻게 기경할 수 있을까요? 방법은 간단합니다. 바로 진정한 믿음으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 (호세아 10:12)

지금이 여호와를 찾을 때라는 것입니다. 내일로 미루지 말고 지금 결정하고 지금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묵은 땅을 뒤집어엎어 부드러운 옥토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거짓 믿음에서 참된 믿음으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거짓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보이는 것에 인생의 최종 목표를 두는 것이 거짓 믿음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목표를 두어야 보이는 세계를 끌어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보이는 세계에 집착하다 보니 그 속에 매몰되고 마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일 뿐입니다. 선물에 매달리지 말고 선물을 주신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인생에게 주신 축복에 집착하지 말고 축복을 베푸신 하나님을 향해 나아갈 때,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 진정한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축복이 없어도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데, 축복에만 집착하게 되면 축복에 따라 일희일비(一喜一悲)하는 인생이 되고 맙니다.
‘지금 여호와를 찾을 때’라는 것은 지금 여호와를 알라는 것입니다. 호세아서를 읽어 보면, 호세아는 계속해서 백성들에게 “여호와를 알자”고 말합니다. 여호와를 사랑하고 여호와를 알라고 끊임없이 부탁합니다.
또한 앞부분에서는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고 이야기합니다. 공의가 무엇일까요? 공의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뜻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면 무엇을 열매로 거둔다고 이야기합니까? 바로 인애입니다. 끊임없는 사랑을 인생의 결과물로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묵은 땅을 기경하는 한 해가 됩시다.

우리에게는 쓴 뿌리들이 있습니다. 미움의 쓴 뿌리, 분노의 쓴 뿌리, 교만의 쓴 뿌리, 열등감의 쓴 뿌리 등이 있습니다. 이 쓴 뿌리들을 과감하게 뽑아 성령의 불로 태워지기를 기도하며 주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능합니다. “주님 내게 말씀하시옵소서. 내 속에서 나를 억눌렀던 쓴 뿌리들을 불태우시옵소서.” 그리고 나의 죄악과 부끄러움을 십자가에 대신 달아주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는 인생의 묵은 땅을 기경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를 억압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씨앗이 심기지 못하는 딱딱한 땅처럼 경직되게 만드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들을 털어내셔야 합니다.
한 해를 새롭게 맞습니다. 내 안의 하나님 나라를 억눌렀던 것들,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면서도 의심하게 만든 쓴 뿌리들, 누군가를 미워했던 쓴 뿌리들, 쉽게 분노하게 만들던 쓴 뿌리들, 열등감으로 주눅 들게 하던 쓴 뿌리들을 토해 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회복시키기를 원하십니다. 이 한 해, 말씀을 듣고 예배를 드리면서 “주님, 저와 함께해 주세요. 제가 묵은 땅을 기경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우겠습니다. 하나님, 제 인생을 열어 주시고, 제가 세상이 주지 못하는 하늘의 평안을 경험하며 영혼의 기쁨의 샘물을 터트리게 하시옵소서. 그래서 하나님을 마음껏 찬양하며 이 한 해를 살아가는 주님의 사람이 되게 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하며 나가는 복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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